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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안또니오 네그리 : 정치의 새로운 문법을 위하여 /정남영

by 마리산인1324 2010. 10. 23.

<Alternative Plans>에서 퍼왔습니다

http://blog.daum.net/chobits1985/17

[지상강좌 : 안또니오 네그리 - 정치의 새로운 문법을 위하여<1강>]

              

정남영


안또니오 네그리 : 정치의 새로운 문법을 위하여



이 글은 다중지성의 정원 '08년 겨울학기에 개설된 동명 강좌의 강의노트를 옮긴 것이다. ■ 편집자주

강사 정남영
서울대학원 영문학과에서 디킨즈 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경원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저서로 [리얼리즘과 그 너머]가 있고 [현대철학의 두 가지 전통과 마르크스주의]를 번역했으며 [문학이론입문],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눈뜨기]를 공역했다. 안토니오 네그리의『혁명의 시간』(갈무리, 2004)을 번역하고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다중』(세종서적, 2008)을 공역하였다. <다중지성의 정원>의 상임강사이다.

 

강의목차

1강 근대와 탈근대
2강 삶정치란 무엇인가?
3강 지구화와 엑서더스(exodus) : 전쟁과 평화
4강 사적인 것, 공적인 것, 공통적인 것
5강 차이와 저항
6강 통치, 협치, 그리고 민주주의
7강 결정(decision)과 조직화
8강 공통적인 자유의 시간

주요 참조 문헌 약자
Empire (2000), [한국어본]『제국』 → 『제국』로 줄이지만 면수는 영어본을 참조함.
Time for Revolution (2003), [한국어본] 『혁명의 시간』 → 『시간』로 줄이고 한국어본 참조.
Multitude (2004), [한국어본] 『다중』 → 『다중』으로 줄이고 한국어본 참조.
The Porcelain Workshop (2006) 미번역 → 『공장』으로 줄임.
In Praise of the Common (2008), 미번역 → 『공통적인 것』으로 줄임.


1강 근대와 탈근대

1. 강의머리에

이번 강좌는 정치의 새로운 문법, 혹은 새로운 정치적 범주들의 창출하려는 안또니오 네그리의 이론적 노력을 공유해보는 자리로 구성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공유할만하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선 두 가지 점에 동의를 해야 할 것이다.

 

첫째, 네그리의 사상은 결코 완료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백과사전에 기록될 만한 완제품을 기대하는 것은 빗나간 기대가 될 것이다. 네그리는 『공통적인 것을 찬양하며』의한 대목에서는 그의 최근의 정치사상의 상징이 된 ‘다중’ 개념의 불완전성을 털어놓고도 있기도 하거니와1), 2004-05년의 강의를 출판한 『도자기 공장』에서는 그 목적에 대해 명시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물론 경직된 정의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계속적인 문제화를 통해 작업을 할 것이며 일의적인 열쇠를 재구축하기보다는 물어보기의 새로운 방식의 폭과 깊이를 보여줄 것이다.2)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론이 공유 이전에 문제의식 ― 새로운 정치적 개념들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 의 공유일지도 모른다.

 

둘째, 새로운 정치적 개념들의 필요는 새로운 시기의 도래를 전제하게 마련이다. 새로운 시기 자체가 낡은 개념을 현실 속에서 무너뜨리기 때문이다.3) 이 새로운 시기를 네그리는 탈근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금은 탈근대적인 정치적 지평이 무엇보다도 주권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진 정치적 존재론의 해소로서 나타난다.”4) 뒤에서 보겠지만, 탈근대의 기점은 1968년 혁명과 그 이후의 현실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점에 대한 일정한 동의도 그의 탐구과정을 공유하는 데 일정한 추동력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동의는 반드시 미리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탐구과정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사후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동의’를 서두에 거론하는 이유는 이러한 종류의 동의의 부재가 네그리와의 대화(그를 비판하는 것까지도 포함하여)에 큰 장애가 되는 사례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의문제를 같이 다룬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비판을 하든 칭찬을 하든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있는 것이다.

 

2. 네그리와 근대

우선 근대 ― 아마 처음에는 자신이 속한 시대로만 알았었을 시기5) ― 에 대한 네그리의 초기의식을 알아보기로 하자. 네그리는 계급투쟁의 현실과 본격적으로 부딪치기 전, 그리고 맑스의 저작과 만나기 전에 자신의 공부 ― 고대, 중세, 근대의 많은 사상가들을 포괄하고 있다6)― 를 근대적인 것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으려는 노력이라고 평한 바 있다.7) 또한 60년대의맑스 독해도 근대와의 관계에서 보고 있다.


나는 맑스주의를 역사의 종말로서가 아니라 근대에 대한 대안으로서 읽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맑스는 근대를 완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국가와 대립된 비(非)국가를 찬양하는 어떤 이상, 사회를 이룬 개인의 영역과 대립되는 유기적 힘으로서 코뮤니즘을 주장하는 어떤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맑스는 이런 종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다른 무언가였습니다. 맑스에게 중요한 것은 투쟁들이 ― 더 정확하게는 활동들이 ― 세계를 창출하고 만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세계에 의하여 구성되는 수동적 주체성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능동적 주체성에 대한 인식이다.8) 근대에 대한 네그리의 비판적 의식은 나중에 68혁명을 기점으로 탈근대의 지평이 열림으로써 이론적으로 더욱 다듬어지지만, 그 이전부터 이러한 문제의식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근대와 탈근대의 구분의 문제가 그에게서 차지하는 위치가 단순한 시기구분의 수준에 국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네그리가 말하는 근대와 탈근대(의 구분이)란 그의 고유한 현실인식에 따른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것으로 통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바의 근대/탈근대 구분과는 무관한 것이다. 실제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바의 근대 혹은 탈근대 개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주 다양한 근대 혹은 탈근대 개념들이 존재한다. (푸꼬는 한 글에서, 하버마스가 ‘근대’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하자고 제안을 한 적이 있는데, 자기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자기가 아는 ‘근대’란 보들레르의 개념 말고는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9))

 

3. 탈근대의 시작 

 근대/탈근대의 구분이 단순한 시기구분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것이 시기 구분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반적으로 20세기는 1901년에 시작하고 21세기는 2001년에 시작한다. 그러나 네그리는 21세기는 1917년에 시작하여 1968년에 끝난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짧은 세기’이다.10)) 여기서 투쟁의 국제적 순환의 기점이 된 1968년의 혁명이 바로 탈근대의 시작을 표시하는 사건이 된다.

 

1968년은 20세기 들어와서 자본주의의 두 번째 재구조화 ― 이른바 ‘정보화’ 혹은 ‘정보혁명’― 의 기점이다. 20세기의 첫 번째 재구조화는 1917년이 기점이다. 소련의 혁명으로 대표되는 노동자계급의 공격이 자본으로 하여금 노동자계급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자본증식의 새로운 탈출구를 열기 위해서 그 지배형식을 재구조화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이때 자본은 대량해고와 기술혁신(탈숙련과 대량일관작업)으로 대응한다. 탈숙련은 레닌적 전위당의 계급적 바탕이었던 전문노동자층을 분해하고, 대중노동자라는 새로운 노동자 형상을 만들어낸다. 또한 고전적인 자유주의 국가가 계획자국가(개입주의적 국가)로 변형된다. 계획자국가는 사회의 경제적 동학을 그 자신의 사법구조에 통합함으로써 안정을 창조하는 국가이다. 케인즈주의나 뉴딜은 모두 첫 번째 재구조화와 연관된다.

 

1968년의 봉기로 인해 자본은 또 한 번의 재구조화를 강요당한다. 1970년대 초부터 줄곧 자본의 이니셔티브가 다시 시작되어 비약적 전진을 하게 된다.11)) 여기에는 68년 혁명 이외에도 몇 가지 요인들이 기여한다.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패배, 노동자투쟁의 거대한 발전, 석유위기(반反식민운동의 승리의 첫 표현으로 이해됨), 달러를 금표준으로부터 분리한 미국의 조치(이는 무제한적인 규제완화의 길을 열었고, 실상 화폐가 교환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갖는다는,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권력>에 의해서 위로부터 규정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갖는다는 포고를 한 것이었다).12)) 그 결과 한편으로는 노동계급의 힘이 뽑히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전통적 영토인 공장의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공장에 기반을 둔 조합들은 변화를 보기를 거부하고 이 새로운 현상과 현실들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상황을 악화시킨다. 노동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은 이 현상과 현실들을 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특히 공장노동자들은 노동과정의 기하학적인 컴퓨터화를 목격하기 시작하였고 자본이 생산의 사회적 회로들에 점증적으로 더 의존함을 목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자본이 공장의 바깥으로 나와 사회적 회로 전체에 침투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공장이 되었으며, 이에 조응하는 노동자 형상 ― 이 시기에 처음으로 네그리가 ‘사회적 노동자’라고 부른 것 ― 이 출현한다.

 

이렇게 탈근대가 시작한 것이다.

 

4. 네그리와 68혁명 

네그리는 헤겔주의에 작별을 고하고 노동에 대한 연구, 맑스에 대한 연구, 잡지 발간작업들을 활발하게 하면서 68혁명을 맞는다. 네그리는 68년의 의미에 개인적인 차원의 중요성을 이렇게 부여한다. “당시의 나의 모든 연구가 마치 1968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하고 있는 것에는 일종의 운명성이 있었던 것이 맞다! 정말로 약간 기괴하기는 하다. 1958년에서 1968년까지 내가 한 모든 것은 정말로 계급투쟁의 거대한 예비공부였다.”13)

 

그에게 68년 혁명과 그 이후의 정치투쟁의 발전은 그 이전에 그가 가졌던 생각들을 현실 속에서 검증하고 확증하는 측면도 가진다. 예컨대 그는 60년대에 이미 ?���요강?���을 공부하였지만 이에 대해서 집필을 하게 되는 것은 1977-78년에 와서이다. 실제로 1962-63년에 썼지만 자신이 없어서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가 1977년에 비로소 ?���국가형식?���에 삽입한 글 ― 「헌법에서의 노동」― 도 있다. 이처럼 그의 이론적 작업은 현실에서의 투쟁의 발전과의 상호교직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5. 근대와 탈근대 사이의 ‘휴지’(caesura)와 그 구성요소들

네그리는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 ‘휴지’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휴지(休止, caesura)는 원래 그리스의 시작법에서 시의 한 행 중간에 잠깐 쉬는 지점을 의미하지만, 네그리는 휴지를 파열, 단절, 불연속의 지점, 혹은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는 지점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한다. 그런데 휴지는 단절에 국한되고 저항의 새로운 지평을 전혀 보지 않거나 혹은 특정의 부분에 서만 저항을 보는 것과는 다르다.14) 저항의 연속성이 불연속성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역사적 과정이 한편으로는 불연속적인 파열, 단절로 이루어져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언제나 존재하는, 따라서 권력보다 먼저 존재하는 저항이 그 과정의 연속성을 담지한다고 본다. “마이클과 나는 제국이 잠재태로서든 다른 무엇으로든 항상 존재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항상 존재했던 것은 저항의 사유와 실천입니다(그리고 나는 사유보다는 실천이 더 자주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모든 종류의 단절과 파열들을 가로지르는 연속성들을 구성하는 것은 창조적 요소로서 이해된 바의, 장차 올 민중들을 건설하는 부단한 능력으로서 이해된 바의 저항입니다.”15)

 

네그리에게서 휴지는 다음의 세 구성요소들에 의하여 구성된다.

①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향한 경향이 생산방식과 가치화과정 양자를 점증적으로 특징짓는다.16)
② “사회적 장 전체를 포괄하도록 확대되는 삶권력”의 등장, “개별적 노동조직의 훈육으로부터 인구들의 통제로 이동” “사회의 자본 아래로의 실질적 포섭”°이 이와 관련된다.17) → ‘삶정치’개념.
③ 경제적 과정의 지구화와 그로부터 나오는 국민국가, 민중(국민), 주권 등의 개념들의 위기와 관련된다.


6.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에 대한 맑스의 설명

이미 보았다시피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성립은 노동이 자본에 통합됨으로써, 즉 노동과정이 동시에 가치화과정이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런데 노동이 자본에 포섭되는 형태는 한가지가 아니다. 그것은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으로 크게 나뉜다. 전자는 노동과정이 자본에 포섭되고, 자본이 타인의 노동을 직접적으로 이용한다는 것 자체를 말한다. 후자는 그렇게 포섭될 뿐만 아니라 포섭된 노동(과정)의 내용 자체가 달라지는 것18)을 말한다.

 

형식적 포섭은 두 측면을 갖는다. 첫째로 그것은 모든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일반적 형태로서 모든 자본주의적 시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계속적으로 비자본주의적 부분을 우선 형식적으로 포섭한 다음, 이어서 실질적으로 포섭하여 특유의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면서 외연적으로 확대됨을 함축한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형식적 포섭이 이와 동시에 실질적 포섭 이전의 단계 즉 특유한 자본주의적 생산에 도달하기 이전의 단계를 말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노동자가 자본가에 의하여 고용되기는 하지만, 아직 그 노동의 내용이 달라지는 않은 단계가 역사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실질적 포섭에 대한 맑스의 발언이다. (핵심은 ‘사회화된 노동’이다. 네그리가 탈근대의 초입에 제시한 ‘사회적 노동자’형상은 그 이름 자체가 바로 이 실질적 포섭의 단계에 상응함을 나타낸다.)

 

협동, 공장 내에서의 분업, 기계의 사용, 그리고 일반적으로 과학, 역학, 화학 등의 ― 특별한 목적, 테크놀로지 등을 위한 ― 의식적 사용에 의한 생산의 전환을 통해서,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생겨나고 그러한 발전에 상응하는 규모의 엄청난 증가를 통하여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 혹은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사회화된(즉 집단적인) 노동의 생산력이 생겨난다(수학과 같은 인간 발전의 일반적인 생산물을 직접적 생산과정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노동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과학에서의 진보는 일정한 물질적 생산을 전제한다). 사회화된 노동력(개인들의 이러저러한 정도로 고립된 노동과 대조되는)의 생산력의 발전 전체, 그리고 이와 함께 과학(사회 발전의 일반적 생산물)을 직접적 생산과정에 사용하는 것은 자본의 생산적 힘의 형태를 취한다. 그것은 노동의 생산적 힘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심지어는 노동 중에서 자본과 동일한 부분의 힘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개인 노동자나 혹은 생산과정에서 결합한 노동자들의 생산적 힘으로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자본의 관계 전체에 함축된 신비화는 여기서 크게 강화되어, 이전에 노동의 자본에의 단순히 형식적인 포섭에서 도달했던 혹은 도달할 수 있었던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다. 다른 한편, 우리는 여기서 특유한 형태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적 의의--즉 직접적 생산과정 자체의 변환과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대한 두드러진 설명을 발견한다.19)


7. 탈근대적 사상들

네그리는 근대에서 벗어나 탈근대의 지형에서 작동하는 사상들의 세 가지 철학적 형태를 구별해낸다.20)

 

가. 근대의 존재론에 대한 철학적 반작용으로서, 그리고 자본에 의한 사회의 실질적 포섭의 인정과 저항의 부정으로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료따르(Jean-François Lyotard),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잔니 밧띠모(Gianni Vattimo), 혹은 리처드 로티(RichardRorty)의 저작들이 그렇다.


나. 주변적 저항의 가능성을 본다. 일종의 “상품물신주의”와 신비주의적 종말론의 인력(引力) 사이에서의 동요로서 나타난다. 데리다(Jacques Derrida), 낭씨(Jean-Luc Nancy),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이에 해당한다. 낭씨와 아감벤은 벤야민의 코뮤니즘적 유토피아를 실질적 포섭의 주변부들에 도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 비판적 탈근대주의로서 나타난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처한 역사적 국면의 인정으로서만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적대의 인정으로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주체화의 공간의 재구축으로서 나타난다. 푸꼬와 들뢰즈가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네그리는 푸꼬와 들뢰즈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8. 새로운 정치적 개념들을 위하여

앞에서 우리는 네그리가 처음부터 근대라는 틀을 삶을 구속하는 답답한 지평으로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정치철학의 영역에서 부수어야 구속하는 틀은 바로 권력(Power, pouvoir) 개념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장』의 첫 대목에서 네그리는 전혀 다른 사상가들인 베버, 슈미트, 레닌에게서의 초월적 권력 개념이 상동성(homology)을 띠고 나타남을 주목한다.21) 지키려는 사람이나 부수려는 사람이나 동일한 대상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정치적 행동들은 양자택일 ― 다른 권력이냐 아니면 무정부 상태 혹은 삶의 부정이냐 ― 의 막다른 골목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네그리의 생각이다. “해방개념이 권력 개념에 꽉 물려있는 것이다”22)


이제 탈근대에서는 자본의 사회 전체의 실질적 포섭으로 인하여 초월적 권력이 삶 전체를 감싸면서 ‘삶권력’biopower)이 된다. 그리하여 정치는 삶을 놓고 벌어지는 정치 즉 ‘삶정치’가 된다. 네그리는 이러한 탈근대적 지형에서 ‘삶권력’에 대항하는 힘을 권력과는 다른 종류의 힘으로서 제시한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자유, 특이성, 그리고 활력(power, puissance)이 권력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로서 등장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 아닌가?”23) 서두에서 말한 “정치의 새로운 문법, 혹은 새로운 정치적 범주들의 창출하려는 안또니오 네그리의 이론적 노력”이란 바로 이 “자유, 특이성, 그리고 활력”이 표현되고 조직되는 조건, 양태, 주체성 등에 대한 탐구의 노력에 다름 아니다. ♠

 

<부록>
다음은 『혁명의 시간』에서 서론에서 네그리가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을 간략하게 기술한 대목들이다.


근대에서 탈근대로 오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첫째로, 노동력이 변형되었기 때문에 생산관계가 변하였다. 둘째로, 자본주의 정권은 사회주의 국가들과 여타 경쟁자들에 승리하면서 전체주의적으로 되었고 분명히 더 흉포해졌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제 공장을 통해서만 생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를 창출하는 일에 사회 전체를 동원한다. 이제는 노동자들만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 전체를 착취한다. 사회에 명령을 내리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 자신이 돈을 내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지불하게 한다. 자본주의는 삶 전체를 감싸버렸다. 그 생산은 삶정치적 biopolitical 이다. 생산에서 <권력>은 사회를 통하여 팽창되고 재생산되는 것의 ‘상부구조’를 이룬다. 사회적 조직의 ‘훈육적 체제’는 푸꼬의 용어를 빌자면 ‘통제 체제’24)로 대체되었다. 생산자 ― 노동자 혹은 프롤레타리아, 지적 혹은 물질적 노동력 ― 가 점증적으로 두뇌라고 불리게 되는 생산도구를 재전유한 상황에서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 노동력이 변형되었다고 했을 때 이를 이미 말한 셈이다 ….(22-23)


탈근대 즉 1968년 혁명과 함께 시작한 시대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들어와서 근대에 대한 윤리적이며 금욕적인 환상은 종말에 도달한 듯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초월과 명령이라는 형이상학적 어리석음도 종말에 도달한 듯하다. 이제 공통적인 것이 그 정의의 온전한 의미에서 등장할 수 있게 된다. (119)

 


 

1) “다중 개념은 아직 그다지 분명하지 않아서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조언한다.” 『공통적인 것』 93.
2) 『공장』 91.
3) 물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훨씬 더 늦게까지 남아있을 수 있다.
4) 『공장』 22.

5) 네그리는 대학에 들어가서 헤겔에 푹 빠져있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헤겔의 철학에 불만이 있었지만, “근대의 철학이기 때문에 계속 사용했다”고 말한다. 『공장』 46.
6)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딸리아 르네상스의 고전들(마르씰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와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스피노자, 칸트, 헤겔. 대학 수준에서는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독일 역사주의 등등.
7) 『공통적인 것』 43.
8) 실상 이것이 70년대에 들어와 발전한 것이 바로 ‘구성적 존재론’이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 2장, 3장 참조.
9) “그리고 실로 이것이 보들레르가 근대를 ‘덧없고, 일시적이며 우연한 것’으로 정의할 때 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근대적인 된다는 것은 이 영속적인 운동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데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 운동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는 데 놓여있다. 그리고 이 신중하고도 힘이 드는 태도는 현재의 너머에 있지도 않고 현재의 뒤에 있지도 않으면 현재의 안에 있는 무언가 영원한 것을 다시 포착하는 데 놓여있다.” “What Is Enlightenment?” Ethics : Subjectivity and Truth, 310.
10) 이와 달리 홉스봄(Hobbsbawm)은 20세기가 1914년에 시작하여 1989년(소련의 붕괴)에 끝나는 것으로 본다.
11) 여기서부터 이 단락 끝까지는 『공통적인 것』 62-63에 나온 네그리 자신의 발언내용이다.
12) 네그리는 여기서 가치법칙의 붕괴를 읽어낸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강의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주석 16을 참조하라.

13) 『공통적인 것』53.
14) 이에 대해서는 나중의 강의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우선의 7절을 참조하라.
15) 『공통적인 것』79.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네그리에게서 탈근대는 맑스가 말한 노동의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단계와 동일하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발언들도 모두 탈근대로 이어지는 저항의 연속성을 역설한 대목들이다: “우리가 사회의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현재의 자본주의 발전)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명백히 삶의 상업화, 사용가치의 소멸, 자본에 의한 삶의 형태들의 식민화를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 새로운 지평에서의 저항이 구축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탈근대의 특수성들 중 하나는 그 효과의 불가역성이다. 그 어떤 지배도 항상 저항과 병행한다.”(『공장』36) “실질적 포섭의 근본적 요소는 저항의 일반화이다. 이것의 발견에 탈근대적 긍정이 놓여있다.”(『공장』37)
16) “우리는 이것들을 더 이상, 노동을 생산에 투여된 시간에 따라 측정하는 고전적인 노동가치론에 따라 해석할 수가 없다. 인지적(cognitive) 노동은 그런 관점에서 측정될 수 없다. 심지어 이 노동은 그 측정불가능성에 의하여, 그 잉여(excess)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 생산관계는 인지적 노동을 삶의 시간에 연결시킨다. 생산관계는 삶에 의해 자양분을 공급받는 만큼이나 다시 삶을 변경시키며, 그 생산물들은 자유와 상상력의 산물들이다. 이 창조성이 바로 그것을 특징짓는 잉여이다. 물론, 노동은 여전히 생산과정 전체의 중심부에 남아있다. (이 점에서 우리가 맑스주의에 충실하다는 것을 우리는 긍정한다.) 그러나 그 정의는 순전히 물질적인 차원으로 축소될 수 없다.”(『공장』20)
17) 이상 『공장』21. 다음은 이 대목에서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에 대한 네그리의 간단한 설명이다. “형식적 포섭의 단계에서는 자본이 상이한 생산형태들 ― 수공업, 농업, 산업 등등 ― 을 자신의 명령 아래 배열한다. 자본주의적 명령은 그리하여 이 모든 차이들을 통일하는 힘으로서 외부로부터 자신을 제시한다. 이와 달리 실질적 포섭에서는 모든 생산형태들이 처음부터 이윤을 허용하기 위한 동질적인 것으로서 정의된다. 이러한 경우에 자본은 사회적 노동을 이용하고 축적하는 것에 국한된다. 푸꼬의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훈육의 체제에서 통제의 체제로 이동한 것이다.”(『공장』21)
다음은 『제국』에서의 네그리와 하트의 설명이다. “근대적 축적이 비자본주의적 환경의 형식적 포섭에 기반을 두는 반면에 탈근대적 축적은 자본주의적 지형 자체의 실질적 포섭에 의존한다.”1) 형식적 포섭이 일정한 한계에 부딪혔을 때 즉 더 이상 포섭할 외부가 사라졌을 때 자본은 실질적 포섭에만 의존하게 될 것이다. 현재 탈근대의 가장 특징적인 과정으로서 진행되고 있는 정보화가 바로 이러한 포섭과정이며, 그러기에 네그리와 하트는 이것을 ‘진정한 탈근대화의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제국』272.

18) 이는 다음과 같은 것들로 구성된다. ①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과학과 기술의 직접적 응용 포함) ② 노동조건의 사회화(규모, 효율성) ③ 기계의 사용.
19) 펭귄판 영어본 『자본론』부록 “Results of the Immediate Process of Production,” 1024

20) 이하 『공장』27 참조.
21) 그러나 레닌에 대해 이렇게 변호한다 : “레닌의 것이 아닌 오류를 레닌에게 돌리지 않기 위해서 이 점을 분명히 해보자. 레닌은 그가 막다른 곳에 처했음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실상, 반란의 문제와 권력을 파괴하는 문제를 제기한 이후에 그는 그 이중성을, 이행적 성격을 강조하며, 이행 자체를 통어할 형태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조한다. 레닌은 그의 이름으로 행해진 자유살해 행위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 당시에 다른 길들이 가능했다고 누가 분명하게 장담할 수 있는가? 확실한 것은 오늘날 다른 대안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들에 착수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점이다.)”
22)『공장』18.
23) 같은 책, 같은 면.
24) 영역자주 6 네그리는 이 개념을 푸꼬와 들뢰즈로부터 따왔다. 들뢰즈의 짧지만 통렬한 글인 「통제사회에 대한 후기」그리고 네그리와 들뢰즈의 인터뷰인 「통제와 생성」을 참조하라. 이 두 글들은 G. Deleuze, Negotiations, trans. M. Joughi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5 , pp. 169~82 한국어판 질 들뢰즈, 『대담 1972~1990』, 김종호 옮김, 솔, 1994 에서 찾을 수 있다. 훈육사회와 통제사회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는 M. Hardt and A. Negri, Empir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 pp. 329~32 참조 한국어판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 .

 

 

▒▒The Autonomy Review


[지상강좌 : 안또니오 네그리 - 정치의 새로운 문법을 위하여<2강>]

 

정남영


2강 삶정치란 무엇인가?1)


1. 푸꼬의 ‘삶정치’(biopolitics)

 

 

정의 : “8세기부터 시작되는, 통치관행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인구를 구성하는 일단의 살아있는 존재들에 특징적인 현상들 ― 건강, 위생, 출생률, 수명, 인종... ― 에 의해 합리화하려는 시도.”2)

 

그러면 푸꼬의 삶정치 개념은 기존의 근대적 정치개념으로부터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권력의 관계들’의 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달라졌다.

 

내가 권력의 관계들에 대해서 말할 때, 이 관계들을 지배하고 규제하는 합리성의 형태들에 대해서 말할 때 나는 지배하면서 사회체 전체에 그 합리성을 부과하는 대문자 P의 Power(권력)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권력의 관계들이라는 것이 있다. 이 관계들은 다양하며 상이한 형태들을 가지고 있고. 가족관계들 내에서 혹은 어떤 제도 내에서 혹은 행정부 내에서, 혹은 지배하는 계급과 지배받는 계급 사이에서도 작용할 수 있는데, 권력의 관계들이란 합리성의 특수한 형식들, 그 관계들에 공통적인 형식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분석의 장이지, 어떤 특유의 사례에 대한 참조가 아니다.3)

 

네그리는 권력(power)에 대한 푸꼬의 이해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거의 전적으로 탈근대적이라고 한다.4)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주권에 대한 사법적 모델이 국가에 대한 정치적 비판에 종속된 것이라고 네그리는 말한다. 그리고 이 비판이 사회체 속에 권력이 스며들어 순환되고 있음을(이것이 바로 삶권력biopower이다),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종속관계들의 가변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러한 순환의 복합성 속에서 주체화, 저항, 불복종의 과정들이 일어날 수 있다. 삶권력 대 삶의 활력의 구도가 바로 삶정치의 구도이다.

 

2. 들뢰즈의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

 

푸꼬는 근대와 탈근대를 특별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근대와 탈근대의 사이의 휴지를 강조하는 네그리로서는 푸꼬의 삶정치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기보다는 들뢰즈가 통제사회에 관한 후기」에서 제시한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의 이행이라는 형태로 한 번 다듬어진 것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훈육사회와 통제사회의 구분은 네그리의 근대/탈근대 구분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5)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바로 이러한 여과과정이 드러난다.


훈육이 신체들의 “해부정치”이고 본질적으로 개인들에게 적용된다면 삶정치는 이와 반대로 인구의 삶을 통치하기 위해서 인구를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일종의 거대한 “사회적 의료”를 나타낸다. 이제 삶은 권력의 장에 속하게 된 것이다.(30)

 

주권사회

훈육사회

통제사회

17세기 이전 18, 19, 20세기 초 2차 대전 이후
징세 생산의 조직화 마케팅
. 방대한 봉쇄된 영역들을 조직. 개인들은 이러한 영역들 중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동하면서 살아감. .
봉쇄된 공간들에의 억류들 각각은 독립변수들이다. 항상 제로에서 시작하며 공통의 언어가 있기는 하지만 유비적이다. 통제 메커니즘들 각각은 분리 불가능한 변수들이다. 가변적 기하학의 체계를 구성하며, 그 언어를 숫자적(numerical)이다.
봉쇄된 공간들은 주형(mold)들이다. 통제는 변조(modulation)이 매순간 계속적으로 변하는, 스스로 변형하는 주형, 혹은 그 그물눈이 지점에서 지점으로 변이하는 체이다.
공장. 공장은 개인들을 하나의 신체(고체적인 것)로서 조직화. 자본가와 조합 양자에게 이점을 제공함. 기업(corporation). 기체적인 것(a spirit, a gas). 개인들을 항상적으로 경쟁시.
① 학교 ② 시험 ① 영속적 훈련 ②지속적 통제.

주권사회

훈육사회

통제사회

. 평형 무엇 하나 끝내는 것이 없다.
두 극: ① 개인을 지칭하는 서명. ② 대중속에서의 개인의 지위를 나타내는 수(數), 혹은 관리적 수매김. 코드가 중요하다.
슬로건(watchword) 패스워드 = 코드
개인"individual"/대중 "dividual"/samples, data, markets, banks
[화폐] 금을 표준으로 하는 주조화폐 [화폐] 일단의 표준통화들이 수립하는 비율에 따라 변조되는, 유동하는 환율
두더지
훈육적 인간은 에너지의 불연속적인 생산자이다. 통제사회의 인간은 궤도상에서, 연속적인 네트워크에서 변조된다.
단순한 기계들. 지레, 도르래, 시계 에너지를 포함하는 기계(자동차를 생각하면 된다). 컴퓨터.
. 생산을 위한 자본주의 생산물을 팔기 위한, 마케팅하기 위한 자본주의
[시장정복]
① 훈육적 훈련
② 경비를 낮춤으로써.
③ 생산의 전문화
[시장정복]
① 통제의 장악
② 환율의 고정
③ 생산물의 변형
* “마케팅이 기업의 중심 혹은 영혼이 되었다.”"
. 시장조작이 사회통제의 도구이며, 뻔뻔스러운 자본가집단을 형성한다.
훈육은 긴 지속기간을 가지며 무한하고 불연속적이다. 통제는 단기적이고, 빠른 회전율을
가지면서도 연속적이고 무제한적이다.
봉쇄된 인간 채무자 인간
. [교육] 연속적인 통제의 형식들, 영속적 훈련이 학교에 미치는 영향, 그에 따른 모든 대학 연구의 방기. 교육의 모든 수준에의 ‘기업’"의 도입.
. [기업] 구래의 공장 형태를 거치지 않는 화폐, 이윤, 인간들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들.
. 조합의 부적합성. 조합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것인가 아니면 통제사회에 대한 새로운 저항의 형식들에 자리를 내줄 것인가?
. 우리는 마케팅의 기쁨을 위협할 수 있는, 장래의 형식들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을 이미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 뱀의 똬리는 두더지의 굴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셋 모두에서 해방의 세력과 노예화의 세력이 서로 맞섬. “겁먹을 필요도 없고, 희망을 가질 필요도 없다. 새로운 무기를 찾을 필요가 있을 뿐이다.” .

 

 

 3. ‘삶’(Life, Bios)이란 무엇인가?

 

네그리는 삶을 ?이해하는 사고방식으로서 ‘실증주의적 생기론’(positivistic vitalism)6)을 비판한다. 생기론은 삶으로부터 모든 정치적 힘을 제거하고 삶을 생물학적이고 자연물적인 것으로 본다. “삶은 기껏해야 한 무더기의 살과 뼈로 환원된다.”33) 이것을 네그리는 ‘Bios의 Zoe로의 환원’이라고 부른다. 삶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삶에 대한 정치적 긍정으로 향하는 경향이 아니라 죽음정치(thanatopolitics)7)로의 경향을 낳는다. (이는 삶이라는 단어 차제가 갖는 거대한 모호성에 의하여 허용되고 심지어는 강화된다고 네그리는 말한다.) 권력이자신을 위해서 국민들의 ‘생명’life)을 살릴 수 있는 만큼 죽일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이 나온다. 푸꼬에게 그리고 들뢰즈에게 존재하는, 자유로운 주체성의 생산의 공간으로서의 삶정치라는 생각은 생기론에서는 제거된다. 네그리는 생기론의 해악을 이렇게 말한다.

 

생기론의 안개 속에서는 식별이 있을 수 없다. 삶과 죽음은 거대한 모호성의 관계에 휩쓸린다. 개인들 간의 전쟁이 본질적으로 되고, 공격적 동물이 시장에 의하여 격앙된 사회와 공존하는 것이 자연적 규범으로서, 즉 삶으로서 제시된다. (33-34)

 

"따라서 생기론은 항상 반동적인 철학이다”라고 네그리는 말한다.(34) 또한 이렇게 말한다. “죽음정치는 내적 대안도 아니고 삶정치의 모호성도 아니다. 그 정반대로서 권위적 초월이며 부패의 장치이다.”34) 예를 들어서 카미카제 행동8)의 경우, 그 행동의 선택의 뿌리에 있는 고통과 절망 ― 이를 ‘정치적 정동’political affects)이라고 부른다 ― 을 간과한다면 Bios를 Zoe로 환원하는 것이 되고, 그 행동으로부터 삶정치적 힘을 제거하게 된다는 것이다.9)


푸꼬와 들뢰즈에게서 삶 개념을 네그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 삶의 방식들로부터 사유를 구축함. 인공성(artificiality, 인간에 의하여 구축되었음)으로부터 사유가 빛나게 함.
② 주체구성의 힘(puissance, 활력)
③ 모든 정치적 사유의 재발견된 지형(구체화 과정의 힘이 스며들어 있는 한에서)

 

4. 장치개념의 역전

 

푸꼬와 들뢰즈에게서 나타나는 바의 “장치”(dispositif) 개념. 이는 특정 시점에서 힘의 상태를 정의하는 동질적인 관행들과 전략들의 집단이다.10) 이는 통제의 장치, 혹은 규범적 장치라고 불린다. 그러나 삶정치가 권력이 삶을 장악하는 것과 삶의 권력에 대한 저항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는 만큼 ― 그런 만큼 삶정치 개념이 애매하다고 한다 ― 장치 개념도 그런 애매성을 띠게 된다고 한다. 즉 장치란 저항의 전략에 붙이는 이름일 수도 있다.(35)

 

5. 니체

 

네그리는 프랑스의 푸꼬와 들뢰즈에게서 나타나는 삶정치 개념과 유사한 인식론적 발전의 독일에서의 대표자로 니체를 제시한다. 그는 실증주의적이고 생기론적인 목적론을 파괴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이 노력은 도덕의 계보학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네그리는 도덕의 계보학은 주체화 과정의 집합과 유물론적 목적론의 공간이며, 유물론적 목적론은 기획적 투사성(projectuality)의 위험을 감수하고 주체적 원천의 유한성을 인정한다고 한다. 이것이 “디스토피아”(distopia)이다.11) 쉽게 말하면 계보학이란 현재 상태의 영원한 반복도 아니고 그렇다고 삶의 외부에 어떤 유토피아를 설정하는 것도 아니며, 현재를 계속 갱신해가는, 계속적인 차이를 생성해가는 것이다.(부록의 푸꼬의 정의 참조.) (36)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 역사적으로 적대적인 결정들(determinations)에 의하여 영속적으로 재정의되고 재정식화되며 다시 열리고 다시 살려지는 목적”41)


 

★ 유물론적 목적론에 대해서는 네그리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유물론적 목적론은 출발점 혹은 종착점이 되는 목적인 final cause 을 알지 못한다. 유물론에서 목적이란 물질의 영원성이, 다시 말해서 세계의 지평이, 그 어떤 공리 公理적 제한도 없이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구성해 나가는 형태이다. 여기서 ‘스스로를 구성한다’함은 현재가 특이한 공통적 형상들을 통하여 스스로를 형성하고 확립하고 혁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점진적으로”란 말은 시간의 화살에 의하여 정해지는 방향에 맞춘다는 의미이다. 시간은 앞으로 진행한다. 시간의 역행은 시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활동 시간의 고정, 순간들의 축적, 기억 에 달려있다. 결과적으로 삶의 특이한 지평은 점점 더, 시간 속에서 존재가 취하는 공통적 형태가 된다. 그것은 공통적인 것의 실제에서 실현된 모든 시간이다.(『혁명의 시간』108-09)

유물론적 목적론의 공통 언어는 디스토피아 dystopia, 반 反이상향 이다. 유토피아가 완전히 결정된 미래를 전유한다면 디스토피아의 공통 언어는 빈 상태로 남아있는 ‘장차 올것’을 채운다. 디스토피아는 혁신의 힘을 진공 속으로 투사하기 때문에 힘차다. 디스토피아는 가난의 덕성 virtus 이다. (『혁명의 시간』13)


6. 실질적 포섭과 삶정치

 

네그리가 실질적 포섭 즉 탈근대로의 이행의 근본적인 요소로 보는 것은 저항의 일반화이다. 이런 의미에서 삶정치는 모순적이다. 즉 삶정치는 정의상 경제적, 정치적 모순들이 사회적 짜임새 전체로 확대되는 것을 나타내는 한편 사회에 포화된 특이화된 저항들의 출현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지배의 측면만이 존재하는 역사적 국면은 없다는 것이 네그리의 확고한 생각이며12) 삶정치의 국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37)

 

7. 주체성의 생산

 

삶정치에서 저항의 일반화는 곧 주체성의 생산을 말한다. 그런데 ‘(주체성의 생산’(이란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고 네그리는 묻는다. 그리고 주체성 생산의 동력은 권력 관계들 내에서, 항상 삶에 대한 욕망에 의해 항상 휩쓸리는 관계들의 복합적인 게임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답한다.13) 삶에 대한 이 욕망이 권력에의 저항의 출현을 의미하는 만큼 저항 자체가 주체성의 생산의 진정한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8. ‘초과’의 표현

 

네그리는 저항과 삶의 관계는 변증법적이지 않다고 한다. 적대를 말한다고 해서 무조건 변증법으로 소급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동하는 특이성이 기존의 권력과 맺는 관계는 종합, 인수, 지양으로, 즉 헤겔이 말하는 ‘(부정의 부정’(으로 이를 수 없다고 한다. 그 관계는 절대적으로 무(無)목적론적이다. 쉽게 말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네그리는 ‘초과’(excess)개념을 제시한다. 특이성의 행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항상 초과의 표현으로서 출현할 가능성 혹은 힘(puissance)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초과는, 어떤 초월적 형식으로 생산적 운동을 재구성하려고 하는 변증법으로 재흡수될 수 없다.14) 일정한 재흡수 효과가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이는 항상 임의적인 현상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체성 생산의 재흡수가 삶의 새로운 양태들을 봉쇄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곧바로 새로운 저항을, 새로운 초과를 낳을 것이라고 한다.(38) → 재특이화(가따리), 기존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건’프리고진의 물리학)

 

9. 초과와 탈측정15)

 

초과와 탈측정은 네그리에게서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 생각은 가치가 창조적 행동의 인지적․비물질적 생산물이 되고 동시에 가치법칙을 회피하게 되는 (탈근대의) 노동조직화를 새롭게 분석한 데서 나왔다고 네그리는 말한다. (가치법칙에 대해서는 이후의 강의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네그리는 삶권력은 측정 가능한 반면에 활력(puissance)은 환원불가능한 차이의 순수한 표현으로서 측정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네그리가 거론하지는 않지만, 맑스의 발언 한 대목이 이와 의미심장하게 연관되다 :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선행하는 역사단계 말고는 그 어떤 전제도 없이 절대적으로 발휘되어서 이러한 발전의 총체 ― 인간의 모든 능력의 발전 그 자체 ― 를 미리 주어진 자로 재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목적으로 삼고, 이를 통하여 인간이 어떤 특정의 성격으로 자신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총체를 생산하고, 자신이 이미 되어버린 어떤 것에 머물려하지 않고 절대적 생성운동의 상태에 있는 것, 이것이 부가 아니고 무엇인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0. 국가

삶정치의 국면에서는 ‘비상국가’등으로 나타나는 국가 권력의 절대성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가권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것은 해롭다. 전체주의에 관한 모든 이론화들도 그렇다. “전체주의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 정치적 행위들이 여전이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지만 그 권력의 이른바 ‘전체성’은 신비화하는 생각이다. 이제 이것을 비판해야 할 때이다.”40)

 

11. 이론들의 합류

네그리는 노동의 변형과 주체성의 생산의 관계의 문제에 대하여 이탈리아의 노동자주의 조류와 프랑스의 탈구조주의적 사상이 합류한 것을 강조한다. 이 합류는 한편으로는 노동과 주체성의 관계에 관련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이한 차이들과 특이성들이 모여 이루는 공통적인 것의 마디결합과 관련된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이탈리아 노동자주의가 확증한 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의 이행은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의 이행에 상응함을 지적한다. 이 합류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고 영미권에도 확산되었다고 한다. 그 예로서 ‘써발턴 연구’(Subaltern Studies)를 든다.’이러한 합류가 일어날 즈음에 일부 맑스주의자들도 노동력 혹은 가변자본이 경제적 법칙들에 의해 객관적으로 미리 형성된 것으로 보는 사고방식을 해체하기 시작하였다.

 

12. 시간성의 변형

 

네그리는 포디즘에서 시간성은 가치법칙에 따라서 측정되었다고 한다. 분석적, 추상적, 수량적 시간성이 노동의 살아있는 시간과 대립하면서 자본의 생산적 가치를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포스트포디즘에서는 시간성이 불변자본의 구조들 ― 공장을 생각하라 ― 에 전혀 갇히지 않거나 일부만 갇힌다. 지적, 비물질적, 정동적 생산은 초과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추상적 시간성 즉 노동의 시간적 척도는 이제 노동 자체의 창조적 에너지를 담지 못한다고 한다. 시간성의 문제는 앞에서 말한 가치법칙의 문제와 연관된다. 가치법칙이란 가치를 재는데 있어서 상품에 투여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것은 이후의 강의에!)

 

13. 자기가치화

 

네그리는 초과가 자본이 전적으로 재흡수하지는 못하는 자기가치화(self-valorization)의 공간이 구성을 가능하게 한다고 본다. 미친 듯이 이윤사냥을 하러 다니지 않고서는 다 흡수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변증법적 포섭이 그만큼 더 어렵게 된다. 상품생산은 곧 주체성들의 생산을 수반하는데, 이 또한 초과로서 서로 대면한다고 한다. 이것이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장치의 형태를 띠고 모든 자본주의적 종합(이는 변증법적 종합이다)에 저항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푸꼬가 말한 권력과 주체성의 관계가 탈근대의 자본주의적 조직에서 재현된다고 한다. 이는 자본주의적 시간/가치와 노동의 특이한 가치화 사이의 분리이다. 이는 스피노자가 말한 potestas(권력)와 potentia(puissance, 활력)의 분리이다.

 

14. 위기로서의 자본이라는 새로운 정의


불변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적 관계는 완전히 기생적이 되었다. 또한 우리는 주체성의 생산과 산 노동의 표현을 포함하는 적대가 다시 구성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자본의 위기에 대한 새로운 이론화는 다음 강의들에서.....사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다중’개념의 전제를 구성한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임시적으로 다음의 정의를 네그리는 제시한다.

 

“ 자본이 예전에는 특이성들의 다양성을 무언가 유기적이고 일원적인 것(계급, 국민, 대중등)으로 축소시킬 수 있었던 데 반해서 지금은 이런 과정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 다중은 필연적으로 비유기적이고, 차이생성적이며 활력있는(puissant) 다양성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45)

<2강 끝>

 


<부록 : 푸꼬의 발언들>
Gérard Raulet와의 인터뷰 “tructuralism and Post-structuralism”1983), in Michel Foucault, Aesthetics, Method, and Epistemology (New York : The New Press 1998)

 

▷ “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가장 명백하게 보이는 것들도 항상 만남들과 우연들의 합류에서, 불안정하고도 덧없는 역사의 과정에서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성이 그 필연성으로 인식하는 것,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합리성의 상이한 형식들이 그들의 필연적 존재하고 제시하는 것도 역사를 갖는 것으로 완벽하게 제시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출현하는 우연들의 네트워크도 추적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합리적인 형식들이 합리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의 실천과 인간의 역사라는 기반 위에 놓여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만들어진 만큼 다시 말소될 수 도 있다(can be unmade)는 말입니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우리가 안다면 말이죠.“(450)

 

▷ “ 만일 내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나에 대하여 진실을 말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또 반대로 내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정한 수의 힘의 관계들을 가로질러 내가 주체로서 구성됨을 부분적으로 의미합니다.”(452) from Michel Foucault, "What is Enlightenment?," Ethics: Subjectivity and Truth (New York : The New Press 1997)

 

▷ “자율 속에서의 우리 자신들의 영속적인 창조”314)

 

▷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a historical ontology of ourselves 을 통한 비판”16) (315)

 

▷ “비판은 더 이상 보편적 가치를 가진 형식적 구조들을 찾기 위해 실행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신들을 구성하게 했고 우리 자신들을 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의 주체들로서 인식하게 한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탐구로서 실행될 것이다.”315)

 

▷ “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316)

 

▷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들로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수행하는 작업”316)

 

▷ “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은 분명 이론이나 교리로, 심지어는 축적되고 있는 영속적인 지식의 집합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현재의 우리에 대한 비판이 동시에 우리에게 부과되는 한계의 역사적 분석이고 또한 그 한계를 넘어갈 가능성의 실험이라고 보는 어떤 태도, 기풍, 철학적 활력으로 간주되어야 한다.”319)

 

▷ “자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욕망에 형태를 부여하는 참을성 있는 일”319)

 

>푸꼬의 역사적 존재론의 구성


‘실천의 체계들’: 인간들이 행하는 것과 행하는 방식
기술적 면: 행하는 방식을 조직하는 합리성의 형식들> 전략적 측면 : 이 체계 내에서 행동하는 데 있어서의 자유로움
사물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상호작용 자신에 대한 관계, 자기생성
지식의 축 권력의 축 윤리의 축
[방법] 고고학적 : 보편적 구조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특이성들)을 찾음. ↔ 초월적
[의도] 계보학적 : 우리가 알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것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끌어냄. 종국에는 과학이 된 형이상학을 가능하게 하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되지 않은 자유의 일”the undefined work of freedom)에 새로운 추동력을 주고자 함.

 



 

 

1) 오늘 강의안은 『도자기 공장』의 장 「다중의 노동과 삶정치적 짜임새」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그냥 면수만 나온 것은 이 책에서의 면수이다.

 

2) Michel 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8-79, ed. Michel Senellart, trans. Graham Burchell (New York : Macmillan 2008), 317.

3) Michel Foucault, “Structuralism and Post-structuralism,” Aesthetics, Method, and Epistemology, ed. James D. Faubion, trans. Robert Hurley et al. (New York : New Press, 1998), 451.

 

4) 소문자 p의 power는 미시적으로 작용하는 권력으로, 대문자 P의 Power는 거시적으로 작용하는 <권력>으로 이해하면 된다. 네그리는 푸꼬를 공부할 때에 자신의 주위에서 푸꼬의 생각들을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번역은 양자 모두 그냥 ‘권력’으로 하기로 한다.

5) 네그리는 카자리노(Casarino)와의 대담에서, 「통제사회에 대한 후기」에서 들뢰즈가 푸꼬를 다시 다듬은 것을 여과기로 삼아서 삶정치 개념을 다시 다듬은 것이냐고 카자리노가 묻자, ‘물론, 그렇다’라고 선뜻 답하고 있다. In Praise, 136.

 

6) 맑스가 ‘슬픈 유몰론’이라고 부른 것이라고 네그리는 말한다.

 

7) Agambe이 대표적이다.

8) 이는 죽음정치적 행동의 사례이다.

 

9) 물론 그 행동에 대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별도의 문제이다. 80년대 말인가 90년대 초인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했던 한 작가의 말이 기억난다.

10) 하트는 『네그리 사상의 진화』의 한 주석에서 “dispositif”를 “물질적 구성요소와 비물질적 구성요소가 협력적으로 작동하는 메커니즘(mechanism) 혹은 장치(apparatus)로 정의”한다.

 

11) 원문에는 “disutopia”라고 되어 있으나 다중에서의 쓰임을 따랐다.

12) 그래서 네그리는 ‘전체주의’라는 담론, 혹은 권력에 의한 인간의 총체적 장악 같은 담론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13) 뒤의 부록에서 주체 형성에 관한 푸꼬의 말 참조.

14) ‘초월적 재구성’이란 쉽게 말하자면 그 운동의 외부에서 운동 전체를 포획한다는 말이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하는 ‘덧코드화’(overcoding)와 유사하다. 참고 : 들뢰즈와 가따리에게 있어서 추상기계의 세 유형 ① 지층화(stratification)의 추상기계 - 이는 공재의 평면을 다른 평면으로 둘러싼다. ‘기표-기의’ 체제가 그 한 예이다. ② 공리적 혹은 덧코드화(overcoding)하는 추상기계ー이는 총체와, 동질화, 봉쇄하는 연결을 행한다. 국가와 자본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③ 공재의 추상기계(abstract machines of consistency) - 이는 특이하고 변이적이며 뿌리줄기 유형의 연결을 증대시킨다. 이를 ‘살아있는 추상기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줄여서 ‘추상기계’라고 하면 ③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A Thousand Plateaus, 514면 참조.

 

15) 『혁명의 시간』에서는 이것을 ‘측정불가능한 것’이라고 옮겼다. 53.

 

16)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이란 어구는 하트도 본문 206쪽에서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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