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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패러다임 전환 /안또니오 네그리(자율평론25호 20080919)

by 마리산인1324 2010. 10. 23.

<자율평론> 25호(2008-09-19)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1216&p_no=1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패러다임 전환

안또니오 네그리/ 역자 : 정남영



 

1.
근대의 정치적 범주들 즉 통치의 이론들은 강하고도 단호한 비판을 받게 되어있다. 따라서 이어지는 논의에서 우리는 현대 정치의 새로운 어휘와 새로운 문법을 다듬어내는 것에 몰두할 것이다.

우리는 우선, 근대 시기에서는 여러 매우 상이한 입장들 사이에 놀라운 상동성相同性, homology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실로, 막스 베버Max Weber, 칼 슈미트Carl Schmitt, 그리고 레닌에게서 권력은 동일한 하나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된다. 권력은 항상 초월적이고, 항상 주권적이다. 권력은 주권기계이다. 자유주의적 기능주의의 옹호자인 막스 베버에게, 보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전통을 해석하는 슈미트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르주아 국가의 사멸을 목표로 하는 예외적인 혁명적 계기를 나타내는 레닌에게―이들 모두에게 권력은 심히 상동적인 정의 속에서 초월적인 것으로서, 신비로서 주어져있다.

우리는 다음을 강조해야 한다. 준(準)무정부적인 정치관과 대면을 했을 때조차도 그리고―레닌의 경우처럼―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 국가의 소멸과 일치할 때조차도 정치적 사유 전체는 실상 기존의 권력 및 그 주권적 정의와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는 단일한 양자택일만을 수반한다. 권력을 취하여 권력의 특징을 띠든가 아니면 권력을 완전히 버리고 정치적 공간의 가능성을 곧바로 권력의 절대적 부정으로 정의하든가이다. 그 중간의 해결책은 없다. 그리고 양자 모두 막다른 곳으로 이른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국가이론가들은 (독일의 루돌프 슈타믈러Rudolf Stammler에서 프랑스의 에밀 뒤르깽Emil Durkheim까지) 이러한 양자택일―한편으로는 제국Reich 혹은 공화국, 다른 한편으로는 무정부상태―를 피하지 못했으며 그 포로로 남아있었다.

근대 사상에서의 권력관의 광범한 상동성을 더 정밀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Politik als Beruf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추론의 선을 쫓아볼 것이다. 권력의 초월성은 정치적 주체들의 행동들을 분석하는 데 사용되는 준(俊)종교적 언어에 의해 나타내어진다. 정치는 조건이 아니라 소명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베버가 옹호하는 정치적 가치들의 상대주의와 다신론은 정치적 경험에서 권력의 초월성으로의 이행을 나타내는 형상들이 된다. 이것들은 정치의 존재론적 차원의 중립화를 나타내는 형상들이다. 권력은 고수해야 할 실재, 실재 너머에 존재하는 무엇, 소명, 혹은 궁극적으로는 순교가 된다......

베버의 인식론적 신칸트주의―정치적 결정들은 단언적categorical이라는 생각―는 다시 초월사상(일종의 속인적俗人的 신앙)안에 함입되어지게 마련이며, 그리하여 ?순수이성 비판?과 ?실천이성 비판? 모두를 배반하게 된다. 오늘날 베버가 본질적으로 니체적 저자로서 읽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정치적 경험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비관적 입장으로 인해서 그리고 구원을 전적으로 자율성과 혹은 정치적 결정의 비시대성非時代性과 연결되는 것으로서 보는 생각과 관련된 "부정적 사상"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베버를 탈코트 파슨즈Talcott Parsons에 따라 읽는 기능주의적 독해의 위대한 시기는 지났다(레이몽 아롱Raymond Aron)같은 몇몇 사람들은 그러한 기획의 취약점을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이러한 이론적 에피소드들은 플라톤적 전통이 권력과 정치적 장의 근대적 표현에서 어떻게 유지되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관점에서는, 니체가 실재와 권력(힘)의 이상성ideality 사이의 관계를 여는 동시에 닫는, 그러면서 내내 후자의 초월성을 유지하는, 순수하지 못하고 모호한 독해를 제공한다. 만일 세계에 대한 니체의 해석이 비관적이라면, 만일 자연이 그 가능성들의 낭비를 인정해야 하고 역사가 그 힘들의 파괴를 인정해야 한다면, 이는 현실이―바로 “현실주의적인” 방식으로―권력의 관리管理와 재생산의 논리적 필연성에 굴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동굴 안에서는 세계가 지배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상대화된 그림자로서 나타난다.

베버의 자유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인 권력관에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폐쇄와 필연성을 통하여 위로부터 구축된다. 권력이 초월적이기 때문에 위로부터 구축되는 것이며, 권력이 그것이 일자一者인 한에서 정의상 모든 차이들을 배제하기 때문에 폐쇄를 통하는 것이고, 다른 식으로는 될 수가 없기 때문에 필연성을 통하는 것이다. 우리가 뒤에서 보여주겠지만, 이러한 관점은 푸꼬가 1970년대에 발전시키기 시작한 삶권력biopower이라는 생각을 미리 구현한다. 위에 제시된 정치권력구축의 세 양상은 국가가 정치적으로 삶에 스며드는 것에,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실존을 결정하는 총체를 날줄과 씨줄로 가로지는 미시적 네트워크에 매우 잘 적용될 수 있다. 양자의 경우에서, 즉 베버에게서 그리고 푸꼬의 삶권력 분석에서 우리는 상동화되었고 상동화하는 형상으로서의 권력을 대면한다. 그러나 베버와는 달리 푸꼬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칼 슈미트를 분석한다면 우리는 퍽 역설적이게도 막스 베버의 것과 매우 유사한 개념과 대면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슈미트를 민주적 사상가로 보고 후자를 전체주의 사상가로 보기가 매우 어렵다.역주2 양자 모두 권력의 이론적 정의(定義)를 그 정의가 이루어지는 주체적 차원과 혼동한다. 슈미트와 베버는 헌법이론의 지형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정치이론의 면에서는 매우 가깝다. 슈미트 또한 정치를 신비주의적이고 신학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가 말하는 권력은 베버의 칸트식 선험론적transcendental 덮개를 빼고 본다면 그저 윤리를 철저하게 정치로 환원한 것이다. 그는 확신의 윤리학과 책임의 윤리학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자를 묶는 전체주의적 흐름이 존재한다.

푸꼬에서 아감벤Giorgio Agamben에 이르는 많은 현대의 논자들이 보여주었듯이, 삶권력(삶의 총체에 스며든 권력)과 전체주의(국가가 삶의 총체에 스며든 것)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공유된 지형에서 작동한다. 독일법은 푸꼬가 나중에 삶정치적이라고 부르게 될 것을 다루는 유럽의 헌법이론들 안에 괴물을 만들어놓았다. 전체주의로서의 삶권력. 19세기와 20세기의 투쟁들의 결과인 복지의 구축과 합의의 사회적 차원은 모두 국가의 총체성에 의하여 흡수되었던 것이다.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는 이 형상의 극적인 성취이다. 그리고 칼 슈미트에게는 정치가 이 형상이 실재하는 공간이다. 슈미트에게 권력은 실상 일종의 총체적 팬옵티콘이다.역주3 모든 시민이 살아있는 신 안에서 사는 것이며, 팬옵티콘은 범신론이 된다. 그러나 팬옵티콘 시스템과는 달리 이 살아있는 신은 또한 사회로부터 내쫓긴 자들을 정의해야 한다. 이들은 바로 삶으로부터 내쫓긴 자들, 그 삶이 무가치하다고 곧 선언받을 자들이다. 이 과정의 변증법적 해결인 지양Aufhebung은―그 삶이 무가치한 자들을 뒤에 남겨두고―삶의 공간의 확대로서 번역되며 우리가 오늘날 국가건설Nation Bildung이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하게 된다. 다시 한 번, 보편적인 구축이라고 주장되는 것이 실제로는 그 시민들을 종속시키게 된다......그러한 것이 반동적 두더지의 선한 작업이다.

결정decision의 문제―이는 얼핏 보기에는 개인들에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데, 개인들만이 결정하기 때문이다―가 베버적 소명에서 초월적 금욕주의가 차지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양자의 경우에 구축되는 것은 개인이 친구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줄 수 있고 적들에게 죽음을 가할 수 있는 장소이다......전쟁(주권자의 결정이자 정치적인 것의 본성을 밝히는 것으로서의 전쟁)이 삶권력의 친밀한 작용을 드러내며 그 절대적인 비시대성을 드러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전쟁은 시민들의 실존에 대한 절대적 장악을 유지하는 한편 시민들로부터 정치적 결정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한다. 전쟁은 정치가 아닌 수단으로 정치를 연장한 것이라는 클라우제비츠Clausewitz의 유명한 말은 1990년대의 신보수주의자들에 의하여 취해진 것이 아니라 1930년대의 파시스트들과 슈미트주의자들에 의해서 취해졌다. 그리고 푸꼬가 말하듯이 그 이전에도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취해진 바 있다.

2.
몇몇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레닌적 결정decision과 슈미트적 결정의 동일성이 보여주는 바처럼 ?국가와 혁명?에서 보이는 레닌의 정치관 또한 초월에 닻을 내리고 있다......혁명적 정치를 수행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초월의 지배를 수립한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행동은 정치를 해소하는 동시에 초월을 해소한다. 레닌에게 국가의 소멸은 부르주아 이론가들이 이해하는 바의 국가의 초월성과 대칭을 이루며 그것을 뒤집는 무정부적 이상이다.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라는 생각이 권력과의 변증법적 관계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는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살펴본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두 가능성들 사이에 하나를 필연적으로 택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막다른 곳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 가능성은 권력을 취하여 또 다른 권력이 되는 데 있다. 다시 말하자면, 불가피하게 하나의 권력으로 남는 데 있다. 둘째 가능성은 삶에 행사되는 권력을 총체적으로 부인하고 그에 따라 삶 자체의 부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레닌에게서 발견하는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개념은 부르주아 권력의 개념과 완전히 대칭을 이룬다. 해방 개념이 권력 개념에 꽉 물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자유, 특이성, 그리고 활력puissance이 권력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로서 등장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레닌의 것이 아닌 오류를 레닌에게 돌리지 않기 위해서 이 점을 분명히 해보자. 레닌은 그가 막다른 곳에 처했음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실상, 반란의 문제와 권력을 파괴하는 문제를 제기한 이후에 그는 그 이중성을, 이행적 성격을 강조하며, 이행 자체를 통어할 형태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조한다. 레닌은 그의 이름으로 행해진 자유살해 행위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 당시에 다른 길들이 가능했다고 누가 분명하게 장담할 수 있는가? 확실한 것은 오늘날 다른 대안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들에 착수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적 권력관을 분쇄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근대적 권력관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3.
그러나 근대적인 것이 단지 이러한 정치적인 범주들로 환원될 수는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근대적 사유에서도 우리가 막 보았던 것과 반대되며 초월적 권력관에 대항하는 정치적 연합의 이유들 그리고 민주적 동학의 이유들을 제공하는 대안이 존재한다(마키아벨리 대 “국가이성” 이데올로기, 스피노자 대 홉스). 이 대안은 정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민주주의의 구성적, 제헌적 차원을 긍정한다. 현금의 논쟁에서 사용되는 다중과 민주주의라는 개념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탄생되었다. 이것이 내가 나의 책 ?야만의 별종?The Savage Anomaly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원주1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은 근대적 전통과의 관계에서의 패러다임 전환 내에서만 정의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특히 현대를 초근대(하이퍼모던) 보다는 탈근대(포스트모던)로 정의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탈근대’라는 말이 특히 프랑스와 미국에서 겪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많은 이론가들, 사회학자들, 정치가들이―나는 여기서 주로 울리히 벡(Ulrich Beck) 같은 독일 지식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현대 시기를 근대적 전통과의 연속적 관계 속에서 생각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이 시기에 ‘초근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패러다임 전환만이 우리로 하여금 특히 권력, 노동, 지구화라는 테마들과 관련하여 현대 시기를 해석하게 해줌을 입증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이 패러다임 전환을 강조하는 것은, 출발점을 이루며 따라서 인정이 되어야 하는 바의 불연속성을 이 패러다임 전환이 긍정하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인 휴지休止가 우리가 하고자 하는 논의의 본질적 구성요소인 것이다.

실상, 오랜 시간에 걸친 일련의 현상들로부터 나온 근대의 위기를 (말하자면 그 정치적 범주들의 위기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휴지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오늘날 “노동”(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보자. 오랫동안 일은 물질적 재화들의 생산에 국한되어 있었다. 오늘날 “노동”은 사회적 활동 전체를 지칭한다.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17년 이후의 노동자들의 투쟁들과 노동의 조직화의 변형을, 노동자들측에서의 반란적 도전―이는 오랫동안 (몇몇 사람들이 “짧은 세기”추가역주라고 불렀던 기간 동안) 조직화된 노동 전체를 위기 속에 던져 넣었다―을 명심해야 한다. 산 노동이 자본주의 체제를 공격한 데 대한 첫 번째 대응은 뉴딜New Deal의 형태를 띠었다. 그 다음에는 사회와 국가의 삶정치적 조직형태들과 착취형태들이 부과됨으로써 지구의 중심 지역들에서 일반적으로 확대된 복지국가의 형태로서 발전되었다.

이 이후로 사회적 및 생산적 활동을 근대의 사회주의적 전통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비물질적 노동(지적, 과학적, 인지적, 관계적, 소통적, 정동적 등등의 노동)의 헤게모니를 향한 경향이 생산방식과 가치화과정 양자를 점증적으로 특징짓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노동이 새로운 축적방식 및 착취방식에 전적으로 종속되어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더 이상, 노동을 생산에 투여된 시간에 따라 측정하는 고전적인 노동가치론에 따라 해석할 수가 없다. 인지적cognitive 노동은 그런 관점에서 측정될 수 없다. 심지어 이 노동은 그 측정불가능성에 의하여, 그 잉여excess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 생산관계는 인지적 노동을 삶의 시간에 연결시킨다. 생산관계는 삶에 의해 자양분을 공급받는 만큼이나 다시 삶을 변경시키며, 그 생산물들은 자유와 상상력의 산물들이다. 이 창조성이 바로 그것을 특징짓는 잉여이다. 물론, 노동은 여전히 생산과정 전체의 중심부에 남아있다. (이 점에서 우리가 맑스주의에 충실하다는 것을 우리는 긍정한다.) 그러나 그 정의는 순전히 물질적인 차원으로 축소될 수 없다. 이것이 근대적인 것과 탈근대적인 것 사이의 휴지의 첫째 요소를 구성한다.

4.
둘째 휴지는 바로 주권 개념의 재정의와 관련하여 일어난다. 복지국가의 관리 아래에서는 사회적 노동을 조직하는 과정들이 사회 전체를 감싸왔다. 주권적 행동은 사회적 장 전체를 포괄하도록 확대되는 삶권력으로서 점차적으로 정의되게 되었다. 우리는 개별적 노동조직의 훈육으로부터 인구들의 통제로 이동했다. 사회의 자본 아래로의 실질적 포섭이라는 과정은 여기서 한껏 영광스럽게 자신을 표현한다.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의 차이는 맑스에게로 소급된다. 형식적 포섭의 단계에서는 자본이 상이한 생산형태들―수공업, 농업, 산업 등등―을 자신의 명령 아래 배열한다. 자본주의적 명령은 그리하여 이 모든 차이들을 통일하는 힘으로서 외부로부터 자신을 제시한다. 이와 달리 실질적 포섭에서는 모든 생산형태들이 처음부터 이윤을 허용하기 위한 동질적인 것으로서 정의된다. 이러한 경우에 자본은 사회적 노동을 이용하고 축적하는 것에 국한된다. 푸꼬의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훈육의 체제에서 통제의 체제로 이동한 것이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서 ?자본론? 1편의 출판되지 않은 6장과 ?정치경제한 비판 요강?에서의 맑스의 논의 그리고 앙드레 고르Andre Gorz) 최근의 저작들을 다룰 수 있었으면 한다.

사회의 삶정치적 통치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전체주의를 향하는 경향이 있다. 삶정치는 심지어 죽음정치thanatopolitics에 근접할 정도에 이를 수도 있다. 전쟁이 정치의 본질이 되고 죽음정치가 삶정치의 모태가 되면서 삶정치와 죽음정치는 때때로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극적인 만큼이나 역설적인, 스스로 소진하는 전도顚倒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권력의 전지구적 확장은 불복종의 전지구적 확대에 상응한다는 것을 우리는 곧바로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긍정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가치법칙―이것이 자본주의적 발전에 명령을 내린다―이 실패하게 되면, 노동의 생산적 힘(비물질적, 인지적, 정동적, 언어적 등)을 봉쇄하는 자본의 능력 자체가 소진되게 되는 것이다. 노동의 새로운 성격에 대한 무지와 자본주의적 명령의 선입견은 이제 새로운 불복종과 사회적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일반적 상황은 적대로 향하게 되어있다. 이것이 우리가 근대와 현대 시기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정의할 수 있는 두 번째 지반이다.

 

5.
휴지를 구성하는 세 번째 일련의 현상들은 경제적 과정의 지구화와 그로부터 나오는 국민국가, 민중(국민), 주권 등의 개념들의 위기와 관련된다. 자본주의적 발전은 국민국가에서 그 근본적 구조를 발견했었다. 오늘날에는 반대로 근대의 정치적 범주들의 일반적 위기가 지구화에 의해 야기된 국민국가의 위기로 발현되며, 우리의 생각을 제국과 다중의 관계로 열어준다.

우리는 이 요소들을, 근대의 범주들의 철학적 위기를, 그리고 새로운 범주들의 출현을 다시 더 심층적으로 다룰 것이다. 지금은 탈근대적인 정치적 지평이 무엇보다도 주권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진 정치적 존재론의 해소로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주권의 범주들이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실재 자체가 변형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바로 이 점에서 근대의 정치이론들은 그 확연한 한계를 맞는 것이다. 우리는, 주권이 더 이상 일자로 환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한 환원이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주권의 행사는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감당해야 하고 부단하게 증가하는 적대에 스스로를 맡겨야 한다. 이러한 긴장의 선과 명시적 적대의 선으로부터, “소란”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이론을 복구함으로써, 민주적 “다중”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론과 “계급투쟁”에 대한 맑스의 이론을 우리 것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는 우리 시대의 특수하고 특이한 특징들을 정의하기 시작할 수 있다.

 

6.
이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또한 근대의 패러다임의 변이에 대해서 성찰해온 다른 철학적 이론들을 대면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우리는 권력에 대한 성찰들과 관련하여 근대와 탈근대 사이의 휴지의 깊이, 삶정치적 질서에 의하여 야기된 단절의 깊이를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았다. 우리는 역사적 발전에 대한 거대 서사들에 대하여 경각심을 갖게 하는 장기적 위기를 막 거쳐 왔다. '거대 서사를 시도하는 자들을 경계하라!' 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삶권력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에 삶의 모든 조건들을 종속시키는 것으로서 발전했다는 것, 그리고 삶이 생산과정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가능성의 절대적 조건을 나타낸다는 것은 점차적으로 명백해졌다. 오늘날 그러한 앎에 도달하는 많은 길들이 있다. 보장임금을 요구하는 일용노동자의 관점에서 혹은 프리웨어를 요구하는 IT엔지니어의 관점에서도 도달할 수 있고, 직장이 없는 부모나 훈련과 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학생의 관점에서도 도달할 수 있다. 이 모든 경우들에서 사람들의 삶이 가치화과정의 기반을 구성하며 역으로 보면 가치화과정이 그들의 실존이다. 객체적인 것과 주체적인 것이 완전히 동일한 것이 되는 것이다. 사회적, 생산적 맥락에서 일어난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왜 인식되지 않는가? 이것이 일단 인식이 되면 왜 모든 개인이 생산적 사회에서 살기만 해도 생산적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삶 자체에 보수를 주지 않는가? 실상, 간접적 임금에 대한 그리고 사회 전체의 재생산에 적합한 서비스에 대한 요구는 널리 퍼졌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의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이라는 맑스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했다. 사회의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에 대한 맑스의 정의에는 이 사회가 전적으로 상품에 상응한다는 것이 함축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상품생산에 의하여 결정되는 모순과 적대가 사회 전체를 감싸버렸다는 점 또한 함축되어있다는 것을 독자는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에 일반화된 보수報酬역주4는 사회적 생산에서의 적대가 사회 전체에 일반화된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 상황을 완전하게 파악하고 서술하였다. 이 상황은 탈근대적 사상에서 실질적 포섭의 개념이 전반적으로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매우 볼 만하게) 유통되는 것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수많은 텍스트들을 예견하고 있다).역주5 탈근대적인 것은 처음에는 이 포섭의 한계 없는 예증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탈근대적인 것은 단지 사유의 새로운 방식일 뿐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에 대한 구체적 재(再)정의이다. 그러나 일부 사상가들은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실재적 인식을 그 과정에 대한 반어적이고 피상적인 의식과 연결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시기는 비록 다소 “예쁘다”고는 하지만 엄청나게 무책임했다. “약한” 사상이 지배하고, 일반화된 철학적, 역사적 수정주의가 지배하고, 무거운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미학으로 옮겨놓는 사상이 지배했다. 모든 역사적 순간이 희극적 측면과 비극적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역주6 지금 논의하고 있는 경우에 있어서는 탈근대의 일관성 없는 취약한 춤추는 형상들의 뒤로부터 비극적인 것이 다시 한 번 출현하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즉 실질적 포섭에 대한 온전하지만 철학적으로는 취약한 이해와 반란적인 비판들이 처음으로 산출되는 비극적 순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탈근대에서 실질적 포섭에 대한 비판은 힘든 훈련기간을 거쳤다. 이어지는 강의들에서 우리는 그 국면들을 조심스럽게 분석해볼 것이다. 첫째 국면은 사회의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 정치적 구조를 구성한 삶권력에 대해서는 (주변적인 저항 말고는) 대안이 있을 수 없다는 인식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선물의 철학을 기다림과 우정의 철학으로 바꿈으로써 주변에서, 주변적 잉여에서 행동하기를 선택했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자연주의적이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혁신의 문제들과 틈의 형상의 문제들을 다시 제기하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낭씨Jean-Luc Nancy의 경우에는 주변적 긴장이 초창기적 형태의 공통체의 형태를 띠었다..... 이 모든 독해들에서 우리는 저항/권력 관계의 일정한 변증법적이고 역설적인 일의성이 재생산되는 것을 본다. 저항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권력이 항상 이방異邦적인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저항이 (헤겔적 전통, 특히 그 좌파 버전의 경우처럼) 역사적 발전의 중앙무대에 등장하기를 그칠 때, 그리고 주변적이고 공시적이며 횡단적인 차원에 국한될 때, 우리는 활력(puissance)이라는 생각, 적대의 위치, 혹은 해방의 심급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한다. 이럴 경우 명백하게도 유일한 해결책은 여전히 구원의 별이나 메시아적 시간이다. 이와 달리 우리는 저 처절한 세대의 덧없는 그림자들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이 문제에 관한 마지막 논평을 해보자. 사회의 자본으로의 실질적 포섭의 세계에는 외부가 없다. 우리는 그 내부에서 살지만, 외부는 없다. 우리는 상품물신주의에 푹 빠져있다. 그 초월성을 나타낼 수 있는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은 채로 그렇다. 자연과 인간은 자본에 의하여 변형되었다. 지금부터는 타자성에 대한 모든 야망들이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 이르는 중요한 전통에서처럼) 낡았을 뿐만 아니라 헛되다. 그러나 이 물신적 세계의 내부로부터 산 노동의 적대가 스스로를 긍정하며 저항이 형성된다.

바로 권력의 반경 내에서 자유를 복구하는 문제가 궁구되어야 한다. 권력이 무엇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삶권력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사회의 자본에 의한 실질적 포섭에 의하여 정의되는 세계가 관계들의 가능성들을 응고시키고 중립화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저항을, 활력으로서의 자유를, 혹은 새로운 존재의 구성을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장 노동자들이 일관작업의 직접적 착취에 맞서 투쟁했던 것처럼, 사회 전체가 일에 부려지는 오늘날에는 다중이 일어서고 있다. 삶권력의 봉쇄가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하고 저항이 존재론적 힘으로 된 것은 바로 푸꼬와 들뢰즈에게서였다. 푸꼬는 능동적 삶정치를 정의함과 동시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분석들을 재정식화하고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삶권력의 정의를 제공한다. 그는 또한 주체들을 그 자체로 그리고 동시에 권력과의 관계에서 변형할 수 있는 주체성 생산과정의 점진적 출현을 지적해낸다. 들뢰즈의 경우에는 삶권력과 삶정치적 현실 사이의 관계들이 거치는 상이한 국면들―훈육에서 통제로―의 고찰 및 시기구분을 통해 실질적 포섭의 역사적 격자 안에서 저항의 존재론적 결정determination을 확립하고 있다. 그리하여, 탈근대는 근대와의 단절을 통해 주어질 뿐만 아니라 적대적 과정의 새로운 조건들을 통해서도 주어진다. 후자는 실질적 포섭의 세계를 감싸며 이 세계를 권력과 저항, 자본과 자유라는 적대적 힘들이 씨름하는 세계로서 제시한다. 만일 우리가 저항과 자유를 물질적 토대들로 간주한다면 이때 이것들은 물론 활동들로서, 살아있는 활동들로서, 주체성의 생산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권력 내부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사용가치”의 발명으로서 그리고 교환가치의 객관적 포화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는 곧 이 문제를 다시 다룰 것이다.

7.
요컨대 우리는 탈근대적 사상이 다음의 세 가지 본질적인 철학적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가. 근대의 존재론에 대한 철학적 반작용으로서 그리고 자본에 의한 사회의 실질적 포섭의 인정―이는 “안이한” 사고와 약한 계약주의 말고는 다른 배출구를 찾지 못한다―으로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료따르Jean-François Lyotard,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잔니 밧띠모Gianni Vattimo, 혹은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저작들이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주체성을 상업적 유통으로 환원하고 사용가치에 대한 모든 준거들을 지우고 생산과 유통의 등가성을 고정시키는, 일종의 맑스주의적 이단을 본다.

나. 주변적 저항으로서, 일종의 “상품물신주의”와 신비주의적 종말론의 인력引力 사이에서의 동요로서 나타난다. 데리다, 낭씨, 아감벤이 이에 해당한다. 낭씨와 아감벤은 벤야민의 코뮤니즘적 유토피아를 실질적 포섭의 주변부들에 도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 비판적 탈근대주의로서 나타난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처한 역사적 국면의 인정으로서만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적대의 인정으로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주체화의 공간의 재구축으로서 나타난다. 우리는 여기서 본질적으로 푸꼬와 들뢰즈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앞으로 이어질 공장들에서 우리의 연구 및 분석 대상을 구성하게 될 예비적 요소들을 제시하였다. 공장들은 10개가 될 것이다. 둘째 공장은 삶정치의 정의를 다룰 것이다. 셋째는 국민국가의 주권의 해체와 전쟁과 평화의 테마들을 분석할 것이다. 넷째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문제들을 넘어서는 공통적인 것의 개념을 정의해 볼 것이다. 다섯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을 다룰 것이다. 여섯째는 저항과 차이들에 집중할 것이다. 일곱째, 여덟째, 아홉째에서는 근대적 통치이론들에 대한 비판을 특징짓는 테마들을 고찰할 것이다. 마지막 강의에서는,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의 가장 본질적인 매듭, 바꾸어 말하자면 시간성, 척도, 공통적인 자유라는 대안적 선택지들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

 

 



역주1
휴지(休止)는 한 국면(시대)과 다른 국면(시대)이 불연속적으로 이어질 때 그 이어지는 불연속점을 말한다. 네그리는 본문에서 이것을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역주2
여기서 ‘전자’와 ‘후자’가 뒤바뀌어 쓰인 듯하다. 영역자의 실수일 수도 있다.


역주3
팬옵티콘(the Panopticon)은 1785년 영국의 제레미 벤삼(Jeremy Bentham)에 의해서 고안된 일종의 감옥건물이다. 그 취지는 감시자로 하여금 모든(pan-) 수인들을 감시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감시하는(-opticon) 것이다. 벤삼 자신은 이를 “이제까지 유례가 없는 정도로 정신이 정신을 지배하는 힘을 획득하는 새로운 방식”("a new mode of obtaining power of mind over mind, in a quantity hitherto without example.")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원주1
Negri, Antonio. The Savage Anomaly: The Power of Spinoza's Metaphysics and Politics. Translation Michael Hardt. Minneapolis :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1).


추가역주
홉스봄(Eric Hobsbawm)은 20세기를 1914년에서 시작해서 1989년에 끝나는 것으로 보았고, 네그리는 1917년에 시작해서 1968년에 끝나는 것으로 본다.

 

역주4
보장임금을 말한다.


역주5
?계몽의 변증법?의 주된 논지는, 계몽주의가 “마법적” 문화―연관, 유사성, 관계를 찾는다―를 “과학적” 문화―모든 것을 기본적 측정 단위들로 환원한다(즉 수량화한다)―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주체성이나 집단적 행동 같은 개념들이 “과학적” 문화에서는 이해될 수 없게 된다.


역주6
맑스는 「루이 보나빠르트의 브뤼메어 18일」을 이렇게 시작한다 : “헤겔은 어디에선가 세계 역사에서 큰 중요성을 가진 사실들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등장한다고 말한다. 그는 ‘처음은 비극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소극(笑劇)으로 등장한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