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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안토니오 네그리와의 인터뷰 /막스 헤닝어(자율평론23호 20080111)

by 마리산인1324 2010. 10. 23.

<자율평론> 23호(2008-01-11)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1163&p_no=1&key=p_no

 

 

사회학적 연구에서 존재론적 연구로


 

안토니오 네그리와의 인터뷰


 

막스 헤닝어/ 역자 : 승준, 은혜


 


■ 출처 : Italian Culture (issn 0161-4622) Vol. 23, 2005, pp. 153-166
■ 원문 링크주소 : http://muse.jhu.edu/demo/italian_culture/v023/23.1henninger.html
■ 편집자주 : 막스 헤닝어는 2004년 뉴욕시립대학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베를린에 살고 있으며, 저널 arranca의 편집자로 있다.





 

안또니오 네그리는 파리 8대학(생 드니)의 정치학 교수이다. 그는 마이클 하트와 함께 전지구화의 사법적·정치적·경제적 측면을 연구한 『디오니소스의 노동: 국가형태비판』(1994), 『제국』(2000), 『다중: 제국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2004) 등을 저술했다. 또한 네그리는 1970-80년대 이래로 수많은 철학적․정치적 개입으로, 특히 스피노자에 대한 해석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동안, 네그리는 오뻬라이스모(다른 대표적 인물로는 마리오 뜨론띠, 세르지오 볼로냐, 로마노 알꽈띠가 있다)로 알려진 이탈리아 맑스주의의 흐름과 교류했다. 오뻬라이스모는 노동계급 투쟁이 자본주의 발전의 배후 추동력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1945년 이후 이탈리아의 변화하는 노동계급 구성에 대한 강한 사회학적 관심을 보였다는 점으로 특징지어진다. 오뻬라이스모의 노동계급 개념에 대한 고전적인 글로는 마리오 뜨론띠의 논문집 『노동자와 자본(Operai e capitale)』(1966)1)이 있다.

뽀르또 마르게라(Porto Marghera)의 석유화학공장 등지에서 정치선전물을 배포하는 활동가였던 네그리는, 전통적인 노동계급 조직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사보타지와 무단결근, 와일드캣 파업 등으로 자신의 요구를 내거는 매우 이동적인 미숙련 노동자를 ‘대중노동자’라는 범주로 발전시켰다. 네그리의 분석에 따르면, 포드주의와 함께 등장한 대중노동자는 이전 시대의 고도로 단결되고 특권화된 ‘전문노동자’를 대체함으로써 노동계급 투쟁에서 헤게모니적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독일의 역사학자 칼-하인츠 로쓰(Karl-Heinz Roth)가 독일에서 이주노동의 역할을 분석하는 데 바친 『“다른” 노동운동과 1880년에서 현재까지의 자본주의 억압의 발전(Die “andere” Arbeiterbewegung und die Entwicklung der kapitalistischen Repression von 1880 bis zur Gegenwart)』(1974)과 같은 저작은 이 ‘대중노동자’ 범주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입증했었다. 1960년대 이탈리아에서 ‘대중노동자’라는 용어는 전형적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이주노동자를 지칭하는데 사용되곤 했다.

네그리는 68혁명에 뒤이어 이탈리아에서 내핍경제가 지속된 10년 동안, 공장노동에 대한 대중노동자의 일반화된 거부가 극적인 경제적 재구조화 과정을 촉진케 했다고 주장했다. 늘어나는 자주-경영에 대한 선호와 지속적인 공장노동자들의 전투성은 기업을 삐아뜨에서와 같이 자동화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도록 촉진시켰고, 이탈리아 경제의 생산지향적 부문들은 보다 새로우면서 보다 더 강력한 (결국 베네통이 그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듯) 판매·광고지향적인 기업으로 대체되었다. 「대중노동자에서 사회적 노동자로」(1979)에서 가장 명확히 설명되고 「세기말: 사회적 노동자 선언」(1988)2)과 같은 이후 저작들에서 채택된 네그리의 분석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가치화의 메커니즘은 고도의 유연생산체제·완전고용의 종말·(분석적이고 소통적인)‘비물질’ 노동에 대한 늘어난 의존도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포스트포드주의적 경제체제로의 이행을 준비함으로써 전사회로 확장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대중노동자는 ‘사회화된 노동자’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사회의 자본 아래로의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이행이라는 맑스주의적 개념이 담겨있던 맑스의 『요강』은 이 기간 동안 중요한 이론적 전거가 되었다. 네그리가 알튀세의 초청으로 파리에서 강연하면서 쓴 『맑스를 넘어선 맑스: 「요강」에 대한 연구노트』(1979)는, 『요강』에 대한 네그리의 독해의 가장 포괄적인 정식화를 담고 있다.

1970년대 공장에 기초를 둔 이탈리아의 의회 외부의 집단들은, 아우또노미아로 알려진 훨씬 더 확산된 반자본주의 운동의 네트워크에 길을 내주었다. 파두아 지방의 공안검사 삐에뜨로 깔로게로(Pietro Calogero)가 아우또노미아와 붉은 여단의 테러활동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단정한 뒤, 네그리는 “무장부대의 창시자”에다 1978년에 있었던 이탈리아 기독민주당 당대표 알도 모로의 납치와 살해의 공범자에 이르는 죄목을 추가로 뒤집어쓰고 기소되었다. 4년간의 구금(원래의 기소내용 중 많은 부분이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석방을 막으려는 노골적인 시도 속에서 새로운 죄목이 추가된 시기) 뒤에, 네그리는 1983년 7월 이탈리아 급진당의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의 국회의원 면책특권은 300표 대 293표로 즉석에서 철회되었고, 이후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1997년까지 망명자로 살아야했다. 네그리의 이러한 구금과 도피를 둘러싼 사건들의 1인칭 시점의 서술은 『탈출의 일기(Diario di un’evasione)』(1985)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망명기간 내내 네그리는 대학 강사로 일했고, 질 들뢰즈, 펠릭스 가따리, 미셸 푸코와 같은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사상과 체계적으로 연계되었다.

네그리가 전지구화에 대한 분석에서 오늘날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된 것은, 1985년에 출판된 가따리와의 공저 『자유의 새로운 공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예견되었다. 들뢰즈와 가따리의 자본주의 개념, 즉 탈영토화 과정들을 가속화시키지만 동시에 그 과정들에 의해 해방된 창조적 잠재력을 포획하고 착취하려는 힘이라는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화는 푸코의 (『성의 역사』 1권에서 발전되고, 거기에서 정치가 점점 인류의 생존과 연관을 맺는 방식을 개념화하기 위해 사용한) 삶정치 개념과 함께 네그리의 최근 저작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탈영토화와 삶정치라는 개념은 『제국』, 『카이로스, 알마비너스, 다중: 나 자신에게 주는 9개의 교훈』3)(모두 2000년에 출간)과 같은 저작들에서 빈번하게 논의되거나 시사되어 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네그리는, 1981년의 연구 『야만적 별종』에서 최초로 정식화되고, 이후 논문모음집 『전복적 스피노자』(1998)로 확장된 그의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스피노자에 대한 해석 작업 역시 지속시켰다. 이러한 독해는 핵심적으로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서 나타나는 근본적 긴장에 기초해, 실재를 초월(론)적4) 법칙에 의거해 해석하는 목적론적인 철학적 모델들과, 실재를 내재성과 투쟁의 용어로 설명하는 모델들 간의 대립을 역전시킨다. (『전복적 스피노자』에 재수록된) 중요한 논문인 “미완의 여백: 후기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개념 정의”5)에서, 네그리는 내재성 개념을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특징짓는 것으로 채택하고 ‘절대적 민주주의’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사용한다.

사법적 구성권력 개념을 철학적으로 굴절시키는 연구서 『구성권력: 근대성의 대안들에 대하여』(1992)의 출간은, 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의 경제 질서상의 이행이 정치적 주권의 본성상의 근본적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네그리 사상의 최근 국면을 공표해 주었다. 네그리는 다중 개념뿐만이 아니라, 창조-하는-힘 즉 포텐샤와, 명령-하는-힘 즉 포테스타스라는 스피노자의 구별을 차용함으로써, 정치적 주체성의 변형과 완전히 전지구화된 자본주의 시대(제국의 시대)에서 혁명적 파괴 및 급진적 민주주의가 나타날 가능성을 이론화하기 시작했다. 네그리의 독해에 따르면, 다중 개념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주체 개념으로 그 주체의 자기-조직화 능력은 근대성의 과정 속에서 발전한 정치적 대의의 메커니즘을 점차적으로 퇴색시킨다. 제국 개념은 유연하면서도 초국가적·사법적·정치적인 질서의 개념으로, 그것은 자본의 운동들이 국민국가의 경직된 영토성을 해소하기 시작할 때 나타난다.

네그리는 이탈리아로 귀환한 1997년 두 번째로 투옥되었고, 『제국』이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2000년에도 여전히 구금되어 있었다. 그는 2003년에야 비로소 자유로운 여행을 허가받았다. 오늘날 그의 이론들은 전지구화에 대한 학문적 논쟁들에서 뿐만 아니라, 1999년 시애틀 G8 정상회담 반대시위와 같은 전지구적 정치의 무대에 출현한 새로운 사회운동들에서도 하나의 중요한 준거점이다. 게다가 네그리는 프랑스에서 강의를 계속하면서 (각각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출간되는) 저널 MultitudesPosse를 편집하고 있다. 또한 그는 현재의 이탈리아의 사회적 저항운동과 교류하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저널일 수 있는 Derive Approdi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네그리는 최근에 마이클 하트와의 또 다른 협동연구를 준비하고 있다.


아래의 인터뷰는 2005년 7월 21일 베니스에서 이탈리아어로 진행되었다.


헤닝어 : 당신이 1970년대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정치적 텍스트들은 그 기간에 있었던 맑스주의 담론의 일부분을 이루며, 그것은 경제의 동학(dynamics)보다는 정치적 주체성과 투쟁의 열린 성격을 강조하는 담론이었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맑스주의를 『요강』에서 발견했는데요. 당신의 사상의 발전에서 이 텍스트가 한 역할은 무엇입니까?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네그리 : 1972년 이후 『요강』으로 돌아간 것은, 맑스에 대한 나의 해석의 발전에 있어서 의심의 여지없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1960년대가 맑스에 대한 재독해로, 그 중에서도 특히 마리오 뜨론띠의 엄청나게 혁신적인 재독해로 이미 특징지어졌다는 사실이 잊혀지면 안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 『요강』은 우리가 1960년대 이후로 오뻬라이스모 안에서 발전시켰던 맑스주의 담론의 방법론적인 (따라서 주관적이고, 인식론적인) 특징들을 강조하는 데 있어 중요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요강』은 대중노동자에서 사회화된 노동자로의 이행기 동안 맑스주의 담론의 변형에 있어서, 즉 생산적 사회의 본질을 재평가하는 데 있어서 지극히 중요했습니다. 달리 말해 중요한 것은 매개없는[기존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는] 연구였죠. 바로 그러한 연구에 기초해서 우리는 그런 내용을 지지해주는 텍스트들을 조사했습니다. 이 과정은 실천 활동을 이끌어주는 정교한 이론적 탐구가 결코 아닙니다. 반대로 이론적 관점으로부터 실천 활동을 재구조화하는 문제인 것이죠. 그것이 우리들의 맑스주의가 지닌 변별적인 특징이었습니다. 『요강』은 그것들에 대해 연구하기로 한 나에게도 매우 중요했는데요. 나의 책 『맑스를 넘어선 맑스』는 우리가 발전시킨 맑스 해석의 종착점입니다. 그것은 강한 전투적 경향을 띠는 저작입니다. 분석된 문제들은 여전히 지속되는 정치적 논쟁과 투쟁의 발전으로부터 비롯된 문제들이죠. 나는 1960-70년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맑스주의의 부흥, 즉 마리오 뜨론띠의 독해에서부터 『요강』에 대한 나의 독해까지가 본질적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런 요인들을 벗어나 오늘날 맑스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원한다면 그것이 문제를 제기하는 아주 논쟁적인(여전히 학계에서 발견되는 전통적인 맑스주의 해석학에 대해 혹은 월스트리트가에서 다루는 객관주의적 맑스주의 해석학에 대해 논쟁적인)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해석학들은 오늘날 계급투쟁보다 경영주들에게 더 유용하죠.

헤닝어 : 1978년에 출간된 정치적-전략적 문건인 『지배와 사보타지』의 마지막 페이지들은, 급진적인 민주적 정치학의 존재론적 전제들을 명확히 하기위해 설정한 일련의 성찰들을 이미 공표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데요. 1981년 출간된 당신의 스피노자 연구에서 정치학과 존재론 간의 이런 연결은 명백해졌죠. 당신은 수많은 철학적 자극을 스피노자에서 발견했던 것처럼 보이는데, 당신의 이론적 접근이 띠는 일련의 발전에서 스피노자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부각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그 명백한 사례들로 내재성이라는 주제와 다중이라는 개념이 있는데요. 이 두 가지는 모두, 세계를 어떤 초월(론)적 질서와 목적론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상호작용의 장으로 개념화하는 존재론적 시각의 일부분을 이루죠. 이러한 세계 속에서, 데카르트 철학의 고립된 개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주체성은 스피노자에 의해 과정성(processuality)과 협력이라는 용어로 개념화됩니다.

네그리 : 스피노자는 항상 나의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게다가, 나는 1970년대 동안 상당한 시간을 스피노자 연구의 부흥과 마주했던 프랑스에서 보내기 시작했었죠. 당시의 연구들은 앞서의 담론이 지닌 잠재력을 인식하게 했습니다. 당신이 『지배와 사보타지』를 언급하는 바람에 나는 다소간 혼동스러웠다고 말해야겠군요. 맞아요, 거기에서는 일정한 계기로 존재론적 지평을 도입하죠. 예컨대 (내가 스피노자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던 시점 이전인) 1970년대 후반의 텍스트들을 포함하는 『시간기계(Machina Tempo)』가 그렇습니다. 그 시기 동안 우리는 정통 맑스주의의 위기를 인식하기 위해, 우리가 몰두했던 실재[현실]의 변형된 성격과 대면해야 했습니다.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가 요청되었던 것이죠. 그것은 내적인 동학을 이해하는 것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더 이상 사회학적 연구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회학적 연구에서 존재론적 연구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정치적 논쟁의 발전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서도) 니체적인 비판의 부흥, 아니 오히려 존재를 잠재성에 의해 열린 것으로 생각하려는 하이데거주의의 변형과 맞아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당신이 언급한 텍스트인 『지배와 사보타지』에서(혹은 이런 점에서 내가 언급한 텍스트인 『시간기계』에서도) 스피노자에 대한 참조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전제들이 틀림없이 거기에 담겨있었지만 말이죠. 그러나 그것들은 이미 맑스주의 안에서 공표되었던 전제들이었습니다. 후기 알튀세를 생각해보세요. 알튀세는 심리적 위기[1980년의 아내 교살(絞殺)의 원인이었던 그의 정신질환을 지칭함]를 겪기 이전에도, 맑스주의를 개혁하려는 기획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인 마키아벨리-스피노자의 문제와 대면했습니다. 알튀세의 연구에서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정치적 과정의 기초가 되는 존재론적 변형6)에 대한 검토를 필요로 합니다.

헤닝어 : 당신이 알튀세와 맺은 관계에 대해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네그리 : 나는 항상 그의 연구의 첫 번째 국면이라고 불릴 법한 기간 동안에 그가 이룬 업적에 대해 엄청난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만, 『자본론』의 개념장치를 결코 버린 적이 없는 그의 분석 스타일이나 인식론적 단절의 의미를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맑스를 넘어선 맑스』를 강의했던 1977년과 1978년에 나는 알튀세와 주기적으로 만났는데(그는 이 강연들에 수차례 출석했었죠), 그나 나나 둘 다 인식하고 있었듯이 우리의 관점상의 차이는 분명했다고 말해야겠군요. 특히, 그 당시에는 (알튀세뿐만 아니라 그와 가까운 동료들에게도) 『요강』에 대한 심각한 과소평가가 있었죠. 그들이 그런 평가를 공공연하게 선언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들에게 『요강』은 인식론적 단절 이전에, 즉 맑스 사상의 위대한 건설적 국면이 시작되기 이전에 쓰여진 문헌으로 분류될 거라고 추정되니까 말이죠. 알튀세와 내가 만난 것은 (나는 그것이 아주 중요한 계기였다고 말해야합니다) 이후에 내가 파리로 돌아와 병중에 있는 그를 보았던 1980년대 초였습니다. 나는 그가 작업하고 있던 수고들을 읽기 시작했는데요. 우발적 유물론이라는 개념을 정식화하려는 다소간 무모한(desperate) 그의 시도는 아주 흥미있었지만, 논증이 구축되는 방식은 위험해 보였습니다. 어쨌든 알튀세는 21세기를 위한 맑스주의의 재정교화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합니다.

헤닝어 : 알튀세의 연구는 당신의 연구처럼 스피노자를 풍부하게 참조합니다. 그 연구는 수많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참조 역시 포함하고 있죠. 당신은 ‘마키아벨리-스피노자 문제’와 알튀세의 연관관계를 언급했는데요. 마키아벨리에 대한 당신의 독해는 1992년에 출간된 『구성권력』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저작에서 당신은 구성권력을, 새로운 사법적․정치적 질서뿐 아니라 공동체의 새로운 형태, 나아가 ‘새로운 존재’를 확립하는 능력(capacity)으로 정의합니다. 당신은 마키아벨리가 이 능력을 개념화한 최초의 사상가였다는 전제로 시작하면서, 이 전제를 『로마사 논고』와 마키아벨리 사상의 공화주의 국면(이 모든 것이 “구성권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7)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책 『구성권력』의 보다 큰 맥락 안에서 다뤄진다)에 대한 독해를 경유해 발전시킵니다. 마키아벨리 사상의 공화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차원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시겠습니까?

네그리 : 명백히 요즘의 나는 이전에 했던 것보다는 민주주의인가 공화주의인가라는 양자택일에 대해 더 많이 말할 것입니다. 공화주의 담론은 그것이 가진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월(론)적 전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루소와 칸트의 통합(consolidation)이라는 첫 번째 계기를 성취하는데, 그 계기는 의심할 나위없이 여러 면에서 전복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자(一者)의 철학, 다양성을 감소시키는 철학, 대의 메커니즘을 통해 주체가 소외되는 철학에 여전히 빚을 지고 있죠. 이 관점에서 보면 민주주의 개념은 공화주의 사상보다 더 급진적인데, 공화주의 사상이 주류적 흐름인 대서양 전통으로 간주될 때 특히 그렇습니다. 마키아벨리에게는 이 쟁점이 별로 명시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남겠군요.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인본주의 저자들이 지닌 힘과 총명함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 저자들은 혁명기에 살았는데, 이 시기에는 그들이 전통적인 권력 형태들에 맞서 수행했던 투쟁의 강도로 인해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구별과 같은) 수많은 구별들이 모호하게 이해되었었죠.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간의 관계에는 모순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죠. 그의 흥미를 끈 것은 공화주의의 과정과 민주주의 과정 모두를 추진할 수 있는 힘(force)이었는데요. 그것은 가공할만한 이론적 이행의 계기이자, 가능한 미래를 발명(invention)할 계기인 것이죠. 이런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애매하지만, 바로 이 애매함 속에 강력함이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것이 마키아벨리에게서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마키아벨리의 저작에는 정치적 시간성(temporality)이라는 개념, 즉 우리가 그 전체성 속에서 삶을 중단할 수 있고 중단해야하지만 또한 다시금 삶을 기초지울 수 있고 기초지워야만 하는 그러한 시간성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근대적 정치이론이 파악할 수 없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이런 식으로 보면,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진정 우리 시대에서 전개될 철학에 대한 위대한 예견(anticipation)인 것이죠.

헤닝어 : 『제국』의 출판 이후에 쓴 『구성권력』의 서문에서, 당신은 오늘날 우리가 근대성을 넘어서 있고 어쩌면 구성권력 조차도 넘어서 있다고 제시했습니다. 최근에는 당신의 저작에 점점 더 자주 나타나고 있는, 후기 푸코에게서 가져온 삶정치, 삶권력이라는 용어가 발견되는데요. 삶정치 개념(삶 자체가 점차적으로 정치의 대상이 되어간다는 관념)은 비록 그 함의가 아주 다른 것이긴 하지만 조르지오 아감벤의 저작에서도 발견됩니다. 심지어 푸코에게서도 삶정치 개념은, 당신의 저작에서와 같이 창조나 구성의 과정들을 개념화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삶을 절멸시키는(annihilate) 능력으로 사용됩니다.

네그리 : 분명 삶정치에 대한 조르지오 아감벤의 담론은 그의 사상의 하이데거적 전제들에 의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창조-하는-힘은 무성(無性, nothingness)조차도 창조하는 힘, 즉 자신 안에 자기 자신의 부정을 포함하는 힘인 것이죠. 이런 생각은 아감벤에게서 아주 강력하게 전개됩니다. 정치의 장은 어떠한 표현 능력도 갖지 않은 순수한 스파티움(spatium, 공간)이 됩니다. 아감벤에게서 힘은 행위를 향해 열려있지 않은 모순적인 개념입니다. 완전히 애매하죠. 힘은 순수부정성의 힘, 즉 바틀비의 힘이나 나치수용소에 갇힌 [삶을 체념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는] 무셀만(Muselmann)의 힘입니다. 아감벤의 최신 저작 『열린 것: 인간과 동물(L’aperto: L’uomo e l‘animale)』(1992)8)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근본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푸코는 별도의 경우인데요. 그의 저작에서 삶정치는 제일 먼저 역사적인 관점에 입각해, 즉 존재론적 기초이기보다는 오히려 역사적 문제틀의 측면으로 해석됩니다. 이 역사적 문제틀 안에서 특정한 개념들이, 특히 주체성 생산에 관한 개념들이 근본적이 됩니다. 확실히 나는 푸코의 추종자는 (또한 들뢰즈의 추종자도) 아닙니다. 나는 그 산출물이 무엇일지를 보기 위해 이런 유형의 개념을 가지고 연구했었던 것이죠. 더욱이 내가 푸코에 관해 쓴 유일한 글은, 그의 사상의 위대한 두 번째 국면이 시작하기 전인 1970년대 초반에 쓴 『감시와 처벌』에 대한 것입니다. 그 글에서 나는 푸코의 분석이 주체성을 망각한 것을 빼면 완벽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그가 우리에게 자신이 망각하고 있는 이 요소를 보여주기를 기다려보자고 말했었죠. 이후에 증명되었듯 기다린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헛된 기다림이 아니었던 것이죠. 나는 이탈리아 맑스주의가 푸코(와 들뢰즈)에게 미친 영향력이 지극히 중요했다고 믿습니다. 결국 공생관계였던 셈인데, 거기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이 모든 경험을 묶어주는 단일한 뭔가가 깊이 자리잡고 있지요. 말이 나왔으니 얘기인데, 나에게 삶정치란 곧 공간이라는 것을 덧붙여야겠습니다. 공간은 첫째 새로운 생산형태들로 특징지워지고, 둘째 전 사회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생산형태들의 확장으로 특징지워지며, 셋째 이러한 사회 안에 사회의 자본 아래로의 실질적 포섭과 연계된 고전적인 모든 모순요소들의 출현으로 특징지워지는 공간이죠. 다시 말해, 나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재현했던 파열과 적대를 설명하기 위해 삶정치 개념을 채택하고, 그것을 (명백히 아주 실질적인 방식으로) 재정의하고자 합니다. 삶정치는 단지 삶권력의 밝은 면(la faccia chiara)9)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삶정치는 그 이상의 뭔가가 있는데, 그것은 강력한 힘(strength)입니다. 내재적·비변증법적인, 그리고 비목적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에게는 바로 그 점이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헤닝어 : 아감벤에게 삶정치 개념은 헐벗은 삶[벌거벗은 삶]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헐벗은 삶이라는 개념을 전제하는 철학이 당신의 이론적 접근과 양립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감벤이 ‘재현[대의]할 수 없는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과, 당신이 스피노자의 우주에서 존재론적 관계들의 수평상태(horizontality)라고 묘사했던 것 간에 일치점이 전혀 없는 겁니까?

네그리 : 물론 일치의 계기들은 있습니다. 예컨대 『도래하는 공동체(La comunita che viene)』(1990)는 비록 전제들은 상당히 달랐지만, 깊은 일치의 계기가 있습니다. 나는 그 전제들이 존재, 아니 잠재적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갈라지는(divergent) 개념들에서 찾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아감벤에게 있어 잠재적 존재란 항상 부정적인 존재, 즉 스스로를 구축하도록 강제하는 존재입니다. 반면 나에게는, 소위말해 고전적 철학의 재정교화가 아니라 노동의 변형이나 오늘날의 인간 활동에 근거를 둔다는 점에서, 그 기초에는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존재론적인 기초를 갖는 동학(dynamis)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아감벤의 인식론적 감수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주 확고한 유물론적 경향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나는 헐벗은 삶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신비화된 개념이라고 믿습니다. 내 관점에서 헐벗은 삶은 그렇게 홀딱 벗겨진 프롤레타리아의 삶입니다. 헐벗은 삶이란 가난한 사람들의 헐벗은 삶인 것이죠.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부마저도 처분합니다. 이 때의 부는 완전히 물질적인데, 그것이 그들의 노동할 능력이자 그들 자신을 표현할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현 능력은, 어떤 인간의 본질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놓여있는 역사에 의해 규정된 구체적인 힘관계에 근거를 둘 뿐입니다. 분명 이것은 방황(meanderings), 악화(relapses), 심리적 비극 등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왜 이것이 외부 현상들과의 인과관계로 설명되기 보다는, 암묵적으로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건지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 생각에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이러한 유물론적 긍정이 있으며, 이 능력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좋든 나쁘든 바로 우리가 구축했었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내가 스피노자적이라면, 아감벤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은 하이데거적이죠. 너무 강한 [뉘앙스를 지닌] 단어를 쓰기를 원하진 않지만, 그것은 원죄 개념을 담은 형이상학인 것이죠.

헤닝어 : 삶정치 개념이 당신이 마이클 하트와 함께 분석한 국민국가의 주권의 위기와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 즉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과, 당신이 『구성권력』에서 논의한 정치적 투쟁 형태의 극복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 뭔가 더 하실 말이 있을 것 같군요.

네그리 : 『구성권력』의 결론을 가져와보죠. 나는 그것을 집필의 극적인 순간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내가 그것을 언제 썼는지 완벽히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나는 보통은 기억을 잘 못합니다. 나의 다른 책들의 경우 나는 그것들을 언제 썼는지 어떻게 썼는지를 기억할 수 없는데, 이것은 『구성권력』의 앞부분들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그것의 결론을 썼던 순간은 아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여섯 번 정도 썼던 것 같아요. 나는 근대적인 구성권력(potere costituente) 개념을 이미 스스로를 새로운 사회운동의 출현으로, 즉 구성능력(potenza costituente)의 복수성과 다양성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과 단순하게 연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관련을 맺는 한에서, 구성권력과 구성능력 간의 모순은 이미 완전히 분명해졌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론적 혹은 개념적 문제를 해소하는 유일한 길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분석의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개념의 정의를 규정하는 맥락과 존재론적인 기체(substratum)를 고찰하기 위해서 말이죠. 구성권력에서 구성능력으로의 이행은 근대 사회의 최후의 형태들(국가, 경영자, 노동계급을 둘러싸고 조직된 사회, 그리고 단일하면서 절대적으로 안정적인 중심에 기초를 둔 사법적 질서)에서 자본의 권력이 다중(특이한 다양체들의 앙상블)의 전복적 능력만큼 확산되어 가는 사회로의 이행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탈근대적인 구성능력은 운동의 확산, 즉 국민국가의 사회적 직조를 가로질러 퍼질 뿐만 아니라 전지구사회를 관통하여 퍼지는 자치, 자기가치화, 그리고 저항의 형태들을 의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론적 과정은 항상 개념과 실재 간의 이러한 관계에 기초해서 만들어집니다. 모든 개념은 하나의 공통 이름인 것이죠. 공통 이름은 항상, 우리가 그것의 서술적 힘의 효과의 관점에서 구축한 어떤 것이죠. 하늘에서 떨어져 땅에 적용된 보편자란 없습니다. 우리는 실재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해하도록 허용하는 공통의 이름들을 구축해야 합니다. 나에게 있어 이런 이행은 『구성권력』을 쓰는 동안 일어났는데요. 바로 그 이행이 결론부를 쓰려고 고심하는 동안, 전제들이 그 문제틀 안에서 확립되었던 곳입니다.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내가 나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나는 이제 이 문제들에 대해 연구할 거야.’ 그것은 다중 개념과 민주주의 개념이 구성능력 개념과 연결되었을 때였습니다. 그 개념들은 이 사회가 파괴되고 있을 때에도 재구축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구성적 탈주(constituent exodus)가, 말하자면 우리 세계의 변형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리고 변형의 힘들, 즉 혁명의 힘들에 생기를 불어넣는데 있어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탈주가 시작되었다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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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자와 자본』에 수록된 논문 중 「영국의 레닌」과 「거부의 전략」은 자율평론 3호에 번역 수록되어 있다.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122&p_no=1과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123&p_no=1을 참고하라.

2) 이 두 편의 논문은 네그리, 『전복의 정치학』, 세계일보사, 1990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사실상 한국어로 소개된 네그리의 최초의 번역서이지만, 이 번역의 기획이 혁명적 투사로서보다는 새로운 사상을 말하는 이론가로서의 네그리를 소개하는데 초점이 두어져있고, 또한 아무래도 당시로서는 새로웠을 네그리 특유의 용어들이나 개념들이 투박하게 번역되어 있다는 점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3) 한국어판은 『혁명의 시간』, 정남영 옮김, 갈무리, 2004로 번역 출간되었다.

4) 통상 칸트의 독창적인 개념인 ‘transcendental’을 ‘선험론적’이나 ‘초월론적’으로 옮기나, 여기에서는 ‘선험’의 의미보다는 ‘초월’의 의미가 더 강하게 부각되어 있기 때문에 ‘초월’의 의미로 새기되, ‘transcedent’(초월적)와 번역 용어상에서 차이를 두기 위해 ‘초월(론)적’으로 옮겼다.

5) 네그리, 『전복적 스피노자』, 이기웅 옮김, 그린비, 2005, 57~109쪽을 참고하라.

 

6) 알튀세 번역서들에는 ‘전화(轉化)’로 표기됐을 법한 ‘transformation’을 형태(form)의 변형(trans)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변형’으로 옮겼다.

7) [영어판] Antonio Negri, Insurgencies: Constituent Power and the Modern State, trans. Maurizia Boscagli,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9, p. 1. [불어판] Le pouvoir constituant, Traduit de l’italien par Etienne Balibar et Francois Matheron,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7, p. 1.

8) 1992년이라고 하기에는 최신 저작(most recent book)이라는 수식어와 맞지 않다는 점에서, 2002년에 발간된 책을 네그리가 착각해서 말했거나 헨링어가 오기(誤記)한 것으로 보인다.

9) ‘la faccia chiara’는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이탈리아어로는 끼아라이며, 아녜스 성녀의 친언니이기도 하다)의 얼굴을 지칭한다. 클라라는 프란체스코회의 공동 창설자이기도 한데, 이 글에서는 병자를 돌보는 그녀의 얼굴이 눈부시게 빛났다는 일화를 빗대서 얘기된 것으로, 영역자가 그랬듯 ‘밝은 면’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