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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지젝의 혁명적 문화정치에 대하여 /조정환(자율평론20호 20070406)

by 마리산인1324 2010. 10. 23.

<자율평론> 20호(2007-04-06)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1084&p_no=1

 

 

 

지젝의 혁명적 문화정치에 대하여

조정환

 

 

 




 

지젝은 고유한 들뢰즈와 가타리와 연합한 들뢰즈 사이에 첨예한 분리의 선을 긋는다. 지젝의 눈에 가타리는 들뢰즈를 퇴행시키는 유혹자로 나타난다. 가타리와의 최초의 공동작업인 ꡔ앙띠-오이디푸스ꡕ는 실제로는 들뢰즈 자신의 오이디푸스화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지젝은 비판한다.


들뢰즈가 구조주의를 승인한 사실을, 자신의 기본적인 입장의 모든 결과를 그가 미처 완전히 자각하지 못했을 시절에 속하는 특질이라고 기각한다면(그리하여 “경직화”가 필연적인 근본화로 파악된다면) 이는 어쩌면 너무 성급할 일일 것이다. 이러한 경직화는 반대로 “퇴행”의 신호, 잘못된 “도주선”의 신호, 복잡함을 희생함으로써 어떤 교착상태를 해결하는,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잘못된 출구의 신호라면 어찌할 것인가? (...) 가타리와 공동집필한 그의 텍스트들의 유연함은 즉 이제 마침내 일이 매끄럽게 돌아간다는 느낌은 사실상 거짓 위안이다. 그것은 사유의 짐을 성공적으로 회피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왜 들뢰즈는 구조주의에 있는 그 자신의 뿌리를 부인하고 그것을 “악마화”하려는 이상한 압박에 굴복하는가?1)


전투는 잠재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서 벌어진다. 이것은 앞에서 ‘무엇(aliquid)’으로, ‘차이적 반복’으로, ‘의미’로 제시되었던 바로 그것이다. 지젝은 들뢰즈의 잠재성 개념이 특히 중요하다는 사실에 즉 들뢰즈가 잠재적인 것의 철학자라는 사실에 올바르게 주목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욕망은 사실은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에 대한 개념을 상징적인 것의 개념으로 전치시키고 평면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에서 역설의 성격을 빼앗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전략의 핵심이 노출되어 있다. “잠재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상징적인 것 자체가 아닌가? 상징적 권위를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유효한 권위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완전히-현행화되지-않은-것으로, 영원한 위협으로 남아있어야 한다.”2) 이를 위해 그는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이라는 개념에 존재와 생성의 존재론적 대립이 있으며 이 대립의 궁극적 준거점은 ‘생성 없는 순수존재라는 형이상학적 개념과 대립되는 존재 없는 순수생성’에 있고 그래서 그 대립이 근본적이라고 말한다.3) 그런 후 그는 자신이 들뢰즈의 것으로 귀속시킨 이 ‘존재 없는 순수생성’(혹은 ‘신체 없는 기관’)이 바로 ‘상징적 거세로서의 남근’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치를 통해서 지젝은 유물론을 ‘의미-사건 층위의 자율성에 대한 단언’4)으 로 정의한다. 신체의 거세(신체 없음), 물질의 소멸, 유일한 실재인 무, 부정성, 물체적 원인들의 그물망이 아니라 순수한 초월적 변용능력 …. 이것이 지젝의 유물론의 어휘목록들이다. “근본적인 유물론자의 자세는 그 어떤 세계도 없다고, 그 전체에 있어서의 세계는 무라고 단언하는 자세”5)이다. 지젝은 들뢰즈가 존재와 생성의 대립이라는 올바른 설정에서 출발했으나 후기에 그것을 생산과 재현의 대립으로 보는 관점으로 퇴행했다고 주장한다.6) 그러나 이것은 ꡔ천개의 고원ꡕ의 중요한 정치학인 되기의 장(10장)이 여전히 생산과 생성의 간극을 핵심적 평면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독이다. 들뢰즈의 정치학은 평면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ꡔ의미의 논리ꡕ에서 오이디푸스에 대한 평가와 ꡔ앙띠-오이디푸스ꡕ에서 오이디푸스에 대한 평가가 어조를 달리하고 있다 할지라도 들뢰즈 자신의 정치학이 퇴행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존재와 존재자,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사이에 잠재성의 장을 설정하며 습관적 혹은 기억적 반복의 시간과 존재론적 반복의 시간, 사물의 시간과 의미의 시간, 생산과 생성, 분화와 미분화, 경험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이의 긴장을 놓지 않는다. 사실상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사이에서 잠재적인 것의 긴장된 위치를 간단히 비물질적인 것으로 이동시켜버리고 신체(물질, 생산 등등)를 손쉽게 청산하고 있는 것은 정작 지젝 자신이다. 그는 객관주의적 유물론의 한계를 옳게 지적하지만 물질 개념의 혁신이라는 절실한 과제를 회피하고 만다. 그래서 지젝의 유물론은 그 자신이 ‘관념론과의 타협이 아니다’라는 변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수준으로, 그래서 ‘포스트-형이상학적 관념론’이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금하기 어려울 수준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물질의 소멸에 접근하는 정치로서, 다시 말해 잠재에서 물적 현실로의 이행의 축(분화, 생산의 축)을 뺀 상태에서 오직 잠재에서 비물질적 사건으로의 이행만을 고려하면서 제안되는 것이 지젝의 혁명적 문화정치이다. 그는 지금에 초점을 맞추는 포스트모던 정치학의 여러 양상을 ‘인식적 지도그리기에 근거한 그 어떤 접근도 희망 없다는 사실로부터의 필사적인 전략적 후퇴’7)라고 비난 한 후, 과연 인식적 지도그리기로 돌아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철저하게 계획된 전략적 활동이 아니라 지금에의 완전한 몰입을 혁명적 문화정치의 혁명과정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혁명과 삶을 연극적인 것으로 변형시키자는 제안이다. 인민이 스스로를 연기하는 심미화.8) 진정한 파괴의 주신제(에이젠쉬타인), 무아지경의 난장, 목표지향적인 도구적 행동의 중지, 무제약적 소모(바타이유), 혁명적 과잉, 추상적 부정성(헤겔) …. 이 진정으로 근본적인 정치적 행위에서는 파괴적 제스처와 전략적 정치적 결정의 대립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순수 소모의 불가능한 제스처만이 어떤 역사적 배치 내부에서 전략적으로 가능한 것의 바로 그 좌표들을 바꿀 수 있다. 지젝은 러시아 혁명과정의 초점이 익명적 대중에서 영웅적 개인들로 옮아간 시기를 1928년 1933년간의 스탈린 집권기로 보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프롤레타리아 분파주의를 청소하면서) 그것을 문학에서 완성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파괴적 에너지의 레닌주의적 해방적 폭발에서 스탈린주의적 법의 외설적 이면으로의 이동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9) 그래서 이제 지젝에게 진정한 혁명은 혁명에 대한 혁명, 혁명 자체의 시초적 전제들을 혁명하는 혁명으로 이해된다. 이 심오한 혁명을 뒷받침하는 인물은 우선 ‘종교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어떤 부패한 윤리체계, 그것의 구성과 입법을 변경하는 것은, 재형성 없는 혁명을 하려는 것은 현대의 어리석음이다’10)라 고 말하는 헤겔이다. 물질적인 것에 앞서 종교를, 비물질적인 것을 변형시켜야 한다. 그에 이어 마오쩌뚱이 성공적인 사회혁명의 조건으로서의 문화혁명의 실행자로 제시된다. 문화혁명은 근본적인 것이다. 그것은 혁명의 전제, 준원인, 남근, 상징을 혁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 부정성의 표출이다. 이 근본적 혁명은 꿈의 실현이 아니라 꿈꾸는 양태 자체를 재발명하는 것이다. 지젝은 잠재적인 것을 모든 현실적인 것에 대한 대립과 부정과 파괴의 자리에 놓는다. 그러나 그 자신도 의식하고 있듯이, 바로 부정을 향한 충동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항구적 자기혁명 과정의 특질 바로 그것이 아닌가? 오늘날의 항구적 전쟁질서, 이것이 이 부정적 영구혁명 충동의 표현양식이 아닌가?

부각되는 것이 부정성과 무인 한에서 지젝은 차이들이 되돌아오는 반복의 시간을 사고할 수 없다. 사회는 인간들의 협력체이다. 협력의 공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선 차이들의 세계를 의미한다. 지젝이 말하는 간극들이 여기에 있다. 간극들은 일차적인 비물질적 공간을 정의한다. 거세, 탈영토화, 잠재화, 언어화, 관계의 장이 이곳이다. 차이들의 로두스 공간. 여기에서 차이들은 공포와 파괴의 충동을 넘어 스피노자적 방식으로 서로를 체험하며 점차 공통적인 것의 발견으로 나아간다. 직관은 바로 이 공통적인 것의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출현/체현이다. 영원한 것과 지복의 발생과정은 영원회귀에 기초한 절대적 민주주의의 현상학이 아닌가?

지젝은 (스피노자와는 달리) 다양체를 협력체로 사고하지 않으며 (들뢰즈와는 달리) 다양체를 차이를 되돌아오게 하는 구성적 반복의 시간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그는 다양체의 역설적 선분들을 준원인의 고정된 점으로 환원시킨다. 고정된 점으로 변화된 준원인, 잠재적인 것, 상징적 거세, 남근은 편집증적 파괴의 블랙홀로 되지 않을 수 없다. 반복되지 못하는 것들은 협력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공통적인 것의 발견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직 상상적 관계에 머물 때, 자기에 고착될 때, 속성이 아니라 고유성에 머물 때, 차이는 돌아오지 못하고 파괴의 블랙홀로 된다. 이때 혁명과 정신적 테러는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네그리와 마르꼬스 등을 비판하는 지젝에서 반견되는 것이 바로 이 이론적 테러리즘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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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슬라보에 지젝, [신체 없는 기관], 김지훈 외 옮김, 도서출판 b, 165쪽.
2)같은 책, 18쪽.
3)같은 책, 29쪽.
4)같은 책, 71쪽.
5)같은 책, 57쪽.
6)같은 책, 48쪽. 지젝은 들뢰즈가 [시네마]에서 다시 중기의 문제설정으로 돌아간다고 본다.
7)같은 책, 381쪽.
8)같은 책, 383쪽.
9)같은 책, 391쪽.
10)같은 책, 396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