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평론> 22호(2007-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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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시대의 예술과 문화, 그리고 다중들의 시간
■ 출처 : SubStance 112호, 통권 36권, no. 1, 2007년.
■ 저자 : Antonio Negri
■ 영역 : Max Henninger
■ 원문 링크주소 : http://muse.jhu.edu/journals/substance/toc/sub36.1.html
http://korotonomedya2.googlepages.com/AntonioNegri-ArtandCultureintheAgeof.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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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비판은 자주 그 자신을 반복한다. 우리의 현 정세와 관련해 그렇게 문화비판을 반복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니면 잘못된 일일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7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ꡔ계몽의 변증법ꡕ을 출판하자, 새로운 비판모델은 재생산이 가능하고, 또 상이하면서도 반복이 가능한 독특한 형태로서 출현하게 되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그들이 한 때 머물렀던 파시즘으로 폐허가 된 유럽과, 그들이 망명지로 택한 미국사회 모두를 반성하면서 계몽의 경향이 스스로를 자신의 대립자로 변형시킨다고, 즉 새로운 문화산업의 유혹으로 양산된 대중들을 파시즘에 무방비상태인 야만족으로뿐만 아니라, 전체주의의 신민으로도 변형시킨다고 생각했다. 유럽의 파시즘과 미국의 상품화가 공존한다고 간주되었다. 그 뒤부터 (즉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부터) 오늘날까지 서구문화에 대한 그러한 판단은 제국의 점진적 구성으로 확신을 얻게 되었다. 파시즘의 문화상품화로의 변형은, 텔레커뮤니케이션 체계들이 그러한 변형을 확산시키는 주요도구가 됨에 따라 전지구를 가로질러 퍼지면서 깨지지 않는 연속성으로 실현되었다... 이미지들의 가공은 보편적인 관광매춘1)과 수많은 다양한 악취미를 야기했다. 루퍼드 머독의 텔레비전을 생각해보라.2) 그러면 당신은 아도르노의 문화비판 모델이 새로운 세계의 존재론을 제대로 폭로했다는 것의 증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세계의 파시즘으로의 재구조화, 전쟁에 의한 세계의 재구축, 타락한 이미지에 의한 세계의 부패. 이 모든 것이 오늘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텔레비전은 쓰레기 문화를 생산하고, 특유의 청중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게 되었다! 뮤지컬 문화는 새로운 쓰레기 생산물들을 요구하고, [이러한] 순환은 완전히 닫혀 있다. 정보의 중립화는 정동의 평준화라는 동일한 법칙들에 의해 야기된다. 만일 낭만주의와 고전주의가 모두 의미 없는 기호들로 환원되었다면, 이제 진리는 강제된 것 혹은 저속한 것이다. 아도르노의 모델은 자신을 소진시켰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의 문화비판이 담고 있었을 혁신적 요소가 무엇이든 간에 이제는 진부한 것이 되었다. 분노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문화비판이 필연적으로 반복적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문화를 지구화하고, 동시에 문화가 자신의 가치들을 황폐화하고 왜곡하는 이러한 지옥-기계 안에서, 그리고 그 지옥-기계에 대항하는 하나의 유령, 하나의 반란의 정신이 있다. 문화적 커뮤니케이션의 회로가 완전하고 자족적인 반면, 이 반란의 정신은 자신에게 외생적인 것과 타자를 공급함으로써만 전진할 수 있다. 육체적 욕망, 다중들의 자유, 언어들의 역능.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끔찍한 추상 속에서 무엇인가가, 즉 다중의 정신이 자신을 주체화한다. 왜곡된 기호들의 세계 속에서, 누군가는 진리의 단순한 기호들을 생산한다. 바스키아3)를 생각해보라, 그의 순진무구한 기호들을, 유토피아적 묘사들을... 생산은 언어적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주체성은 이제 자신을 언어 자체를 통해 제시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추상은 특이성들의 몸이 된다... 따라서 다중이 탄생된다.
2. TV는 보이는 세계를 경영자의 이미지로 혹은 명령 기능 일반의 이미지로 재구축하려 한다. TV은 아래를 향해 상호작용한다. 즉 지배하기, 분해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 아래에 놓인 것을 생산하기. 전쟁들은 실재의 혼탁함(obfuscation)에서 전지구적 판타지들의 서사까지를 포괄하는 언어로 다시 묘사된다. 전쟁 다큐멘터리는 비디오 게임이 된다. 하지만 다중이 삶의 중립화 내부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모든 추악한 구성물은 도살장 안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즉 권력에 의해 다시 묘사된 진리에 대한 다중스러운(multitudinous) 분해에서 시작되었다. 아주 소수의 사진기사들, 그리고 이따금씩 철학적 마인드를 가진 병사들은 전쟁이 퍼뜨린 피와 눈물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그때 이래로 탈신비화의 메커니즘들 및 세계를 그것의 생생한 직접성 속에서 포착하는 능력은, 유행병과 같이 격렬히 증식하는 바이러스들이 되었다. 반G8 시위 동안의 제노바를 생각해보라. 경찰은 평화로운 시위자에 맞서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이용해) 그들을 테러집단으로 매도하면서 저강도의 전투를 수행했다. [하지만] 그건 헛된 일이었다. 다중은 경찰보다도 더 많은 카메라를, 그것도 셀 수 없이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암살자라는 이미지가 모든 집집마다... 익숙한 것이 되었다. 다중은 자신들의 이미지 생산 능력으로 기호들의 추상을 반항적이게 만들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세계는 그것을 해석하는 것만으로 변혁될 수 없었다. 아도르노가 파시스트들로 규정했을 법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의 의해 전유된 최후의 철학적 기획은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 턱수염이 수북히 난 어떤 옛날 사람[맑스]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해석은 그것의 변혁에 있다. 만일 이것이 우리가 도착한 지점이라면, 계몽의 변증법은 결국 소진되었고, 반복적인 이미지들(“역사는 끝났다”)이 자본주의적 생산 속에서 소멸했으며, 새로운 욕망의 생산으로 대체되었다. 상품화된 바로 그 커뮤니케이션의 추상은 다중들의 주도적 활동 덕분에 이제는 구제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도르노여 안녕, 리얼리즘과 근대적 비판모델의 반복이여 안녕. 여기에서 문화비판은 자신을 새로운 영역으로, 즉 다중과 탈근대성의 영역으로 확립한다. 다중은 더 이상 유토피아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디스토피아4)를 생산하는 것일지 모른다. 즉 그 내부에 남아있는 능력, 언어를 내부에서부터 공동화(空洞化)하는 능력, 그리고 변혁을 위한 물질적 욕망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출현한 것이다.
3. 다중들의 디스토피아는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정치적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문화가 현재 자신을 구조적으로 조밀하고 생동감있는 형태로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래로부터, 즉 삶-권력과 대립되는 관점으로부터 지배와 폭력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높은 것과 낮은 것의 변증법 혹은 높은 것과 낮은 것 간의 대립의 변증법과 동일시될 가능성이란 없다. 다중은 새로운 언어적 규정들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 증식하는 특이성들의 앙상블(ensemble)5)이다. 자신의 고전적 형태 속에서, 변증법은 일자로 후퇴하지만, 새로운 변증법은 카오스적이다. 다중들은 언제나 제 때가 아닌, 예외적인 클리나멘에 따라서 마주치는 원자들의 앙상블들이다. 따라서 삶권력의 구조들 내부에서 사는 것과, 자유롭게 그리고 적대적으로 그 구조들을 삶정치적 주체들로서 옮겨 다니는 것, 이 양자의 대립에는 어떠한 변증법도 없다. 오늘날 새로운 문화적 규정들을 제국적 공간 속에서 사고할 때, 우리가 관심을 두는 유일한 문제는 상호교차의 순간, 사건의 규정, 그리고 다중의 카오스적 앙상블을 횡단하는 혁신 등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정치적 표현이 삶권력의 표현에 대해 언제 승리하는지를 인식하는 문제이다. 여기에는 어떤 종합도, 어떤 지양(Aufhebung)도 없다. 여기에는 오로지 대립들, 각양각색의 표현들, 모든 방향에서 탈주하는 언어적 긴장들의 다양체들이 있다.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은 탈근대가 도입하는 측정불가능성에 의해, 즉 근대적 합리주의가 제안하고 부과한 모든 척도기준의 종말을 표시해주는 측정불가능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척도와 도구적 이성은 근대의 금의 시대(인본주의와 데카르트 사이)에는 그들 자체를 자생적으로 제시했고, 자신의 은의 시대(헤겔과 베르그송 사이)에는 질서지워진 세계의 형이상학적 종합으로 표현되었으며, 그리고 자신의 동의 시대에는 베버주의적인 도구적 이성과 케인즈주의적 계획의 폭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척도와 합리성은 종말에 이르렀다. 아도르노가 주장했듯이 시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귄터 안더스(Gunther Anders)가 주장했던 모든 희망이 히로시마 이후에 사멸했다는 것이 이제 더 이상 올바른 진리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시와 희망은 탈근대적 다중들에 의해 다시 생기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척도는 더 이상 근대의 시나 근대의 희망과는 동질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탈근대의 새로운 문화적 표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그것이 하나여야만 하는지도 분명치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이 새로운 변형이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새로운 표현의 형상들을 발견하는 곳은 바로 삶 안에서라는 것이다. 즉 척도 없는 형상들, 형식적인 측정불가능성. 바로 괴물들.
4. 따라서 탈근대적 혁신은 괴물스럽다. 이 괴물스러움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그것의 척도 없는 존재, 그리고 그것의 측정불가능한 존재론적-되기. 이 두 가지 특징을 세부적으로 사고하면서 괴물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먼저 그것의 존재론적-되기를 살펴보자. 앞에서 제시했듯이, 새로운 문화의 생생한 표현들은 종합들로서가 아니라 사건들로, 그리고 무시간성으로 산출된다. 그것들은 측정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 혁신들 및 형식들을 구성하는 생(生, vital)의 요소들의 계보학 내부에서 그 형태를 취한다. 몇몇 동시대 철학자들은 탈근대의 이 새로운 표현적 힘을 추적하면서 그것을 특질화하려 했다. 라깡은 척도의 부재를 새로운 것과 예술, 그리고 기표 일반의 특징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데리다에게 있어, 주변부의 생산성은 자신을 산종(disseminating)6)하면서 질서의 새로운 형태를 발견한다. 낭시와 아감벤은 이 극한의 들판에서 그럭저럭 수확(harvest)을 해낸다... 이 저자들 중 누구도 혁신의 괴물스러움을 긍정적으로 특질화하지 못했지만, 그들 저작에는 예리한 감각과 존재론적인 격화(exasperation)의 강도가 있다. 새로운 문화의 생생한 표현들이 비생산적이 되고 또 부재할수록, 새로운 형태들은 존재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더욱더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들은 자신을 존재 속으로 침윤시키거나 빠뜨린다. 그것들은 자신의 바람에 쓸려다니는 모래들(shifting sands) 속에서 살고 호흡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이 저자들이 인지하는데 실패한 것은, 그들이 모험을 택했던 그 질료가 바로 새로운 세계들이 주조되는 진흙이라는 점이다. 존재론적인 차원은 자신의 한계를 무(無)의 가장자리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저 불가능한 주변부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의 구성능력에 무모하게, 어떤 대안도 없이 기생한다. 존재론적인 차원은 언제나 기생적인 자본의 명령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조건 하에서, 즉 절망 아래에서 이동적이고 유연한 노동을 하는 비물질 노동자들의 다중적 지성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다. 존재론적 차원은 일련의 역설들로부터 출현한다. 노동의 여성화, 생산에서의 이성과 정동의 결합(conjunction).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황을 함축하는, 이 양가적이지만 근본적인 존재론적 조건을 끊임없이 규정하면서 나아갈 수 있겠다. 괴물은 존재론적 차원 안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혁신적 카오스의 이 존재론적 차원이 가진 두 번째 특징은 바로 척도의 부재에 있다. 괴물은 척도의 부재, 아니 어쩌면 새로운 척도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이행 내부로부터 부정과 긍정을, 즉 탈주와 구성능력을 규정할 수 있을까? 17~18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자연에 대한 탐구에서 흥미를 끌었던 기형물들을 발견했다. 왕들은 자신들의 공포의 방[런던에 있었던 흉악범의 밀랍인형 진열실]에 그 기형물들을 수집했다. 하지만 더 자세히 생각해보라. 그들에게 있어 측정불가능성은 척도에 대한 변명이었다. 숭고함과 마찬가지로 공포스러움은 질서에 대한 욕망을 정신 속에 복원시킨다. 얼마나 많은 머리 셋 달린 닭들이, 얼마나 많은 샴쌍둥이들 혹은 자웅동체 태아들이, 얼마나 많은 신체적 비틀림들과 기형아들이 해부학적 일탈들의 이색적인 저 박물관에 수집되었는가. 조르푸아 생틸레르(Geoffroy Saint-Hilaire)는 우리에게 태생적 별종들의 역사적 백과사전을 남겼다. 비록 그것은 다양한 시대의 괴물스러움들 및 자연적 결함들에 대한 법칙과 원인을 규명하려는 시도였지만 말이다. 심지어 이 모든 것에 대한 하나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기형학(teratology)이었다. 괴물스러움의 새롭고 탈근대적인 형태가 기형학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자신을 다르게 표현하는 삶일 뿐이다. 카오스 내부에 존재하는 특이한 기계들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구축하길 바라는 것은 바로 잡종성이다. 척도 형식들에 의해 위계적으로 질서지워지거나 선형화(先形化)되지 않는 것은 바로 삶에 대한 희망이자 선택이다. 이전의 수많은 고대철학처럼(적어도 그것의 일부분은 전통이 되었다), 존재의 기원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 역시도 존재의 질서와 척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아르케(arche)는 최초의 원리이자 명령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우생학은 자신의 형식상의(stylistic) 원리들에 대한 합법화를 추구했던 근대에서 다시금 채택되었다. 괴물에게 손짓을 보내는 것은 고전적 우생학과 근대적 우생학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며, 원리 혹은 출발점으로서의 본질을 포기했던 하나의 존재론적 과정을 전개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새로운 여정은 우리를 우울한 지대로 이끌 것이며, 아마도 우리의 방향감각은 때때로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투사로서 활동해야하는 것은 바로 이 해답 없는 질문들과 함께 하는 여정에서이며, 질서지워지고 측정된 기원의 결여에서이다. 그것은 모든 원리(precept)를 뒤흔드는 하나의 긴장이다. 즉 공간적이든 시간적이든 모든 원리일 뿐 아니라 모든 선형화를, 그리고 모든 선형화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일원적 매트릭스를 뒤흔드는 긴장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 이 존재의 한 가운데에서 격동적인 창조성이 전위의 계보학들이 아니라 다양한 특이성들의 구체적 역사가, 인류학적 괴물스러움을... 부여잡는다. 숲이 다 타버린 땅은 비옥해진다. 그들은 숲(하지만 이것은 움직이고 있다)에 불을 놓았으며, 우리는 새로운 자연에서 살기 위해 (새처럼 자유롭게, 야생으로) 회귀하고 있다.
5. 전지구화의 차원들은 측정불가능한 것에 가깝다. 어떤 경우에도 세계는 더 이상 어떤 “외부”(어떤 외부도 어떤 선행자도)를 갖지 않는다. 문화인류학의 발전을 생각해보라. 그 중심에는 유럽인이 있었으며, 그것은 두 개의 외부를 갖고 있었다. 원시인과, 원주민 혹은 미개인, 즉 인류학적 선행자와 정치적 외부. 유럽인은 문명의 찌꺼기(rest)에 둘러싸인 중심점이었다. 시장과 다양한 감성적 모델들, 화폐와 거주지(the habitat), 세계(welt)와 주위세계(umwelt). 역사는 유럽인의 독점에 맞춰 조정되었다. 최초로 등장했던 자는 원시인이었고, 유럽인에 의해 지배된 자는 미개인이거나 원주민이었다. 그러나 지구화와 더불어 인간의 공간이 더 이상 다양한 한계들을 알지 못하고 하나의 한계(그것의 외부적 주변(circumference))만을 안다면, 그렇다면 이 한계에 도달하자마자 그 후에 나타나는 모든 표현은 내부로 향해질 뿐이다. 여기에는 자기반성이라는, 이 가장 거대하게 가능한 확장에 의미를 부여하는 연속성의 선이 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최후의 프로메테우스주의이자 부르주아 문명(culture)의 최후의 보편주의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해방된 인류의 유적 존재(Gattungswesen)라는 최초의 규정으로 정의될 수도 있겠다. 지구화 이전의 모든 역사는 우리를 이러한 한계로 인도했다. 그것은 서구 문화의 지배 범위를 표시하길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모순들 및 투쟁들의 과정, 즉 억제될 수 없는 경향을 띄지만 바로 그 한계들 내부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주체의 계보학의 가장 거대하게 가능한(그리고 종종 괴물스러운) 효과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세계 무대(world scene)는 단순히 어떤 지평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무대미술이며, 소품들이 극의 일부가 되었다.(포스트-발레 뤼스) 세계 무대는 한계가 없으면서 동시에 유한하다. 그것은 이 괴물스러운 대립(confrontation)에 기생한다. 바로 이 역설을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확실히 함으로써 하나의 작품은 미학적 중요성을 획득한다. 세계는 거대하면서도 동시에 아주 작게 되었다. 즉 우리는 파스칼을 의미 있게 만드는 상황 속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이상 어떠한 신도 없다. 이 공간은 매끄럽고 표면적이다. 즉 가치의 내재성은 오로지 인간들의 노동에만 자신을 내맡긴다. 이 상황 속에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6. 그 괴물을 새로운 세계 무대 위에서 행동케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인류학적인 변신의 과정 내부에서 행동하는 괴물을 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그 괴물을 돌연변이와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펴봤듯이, 이 돌연변이는 공간적이지만 또한 시간적이다. 서구 부르주아 문명이 세계의 가장자리에 도달하자마자 역사의 종말은 바로 시간 안에서 자신을 실현한다. “여기”와 “세계”의 공간적 종합은 “지금”과 “무한”의 시간적 종합을 흡수하고자 한다. 인류학적 변신은 이 역설적 앙상블들을 둘러싸고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탈근대가 의미하는 바이다. 즉 완전히 괴물스러운 거대서사이다... 사실상 인간사(human events)의 살(flesh)은 서사에 대해 요구되는 시공의 통일로 포위되지 않는다. 살은 몸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구적 사건들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모든 측면에서 예술적 표현을 흘러넘치게 한다. 엄청난 정념들이 살의 무능력을 통해 몸이 된다. 한때 즉 1968년에 앞서는 거대한 시대 동안, 이러한 무능력은 유토피아를 향한 어떤 열림으로서 살아남았었다. 문학적 그리고 미학적 전위들은 유토피아를 창출해야만 했다. 유토피아가, 실재를 구축하는 집단적 실천이라는 극단의 역량을 맴돌았던 한에서, 세계의 종말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목표, [즉] 걸작(masterpiece)은 마치 기독교 이전 시대의 위대한 작가들의 요한계시록이었다... 그러나 탈근대에서(여기, 우리 시대에서) 예언자가 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예언자가 되지 않고도 요한계시록을 반성한다. 우리는 유토피아주의자가 되지 않고도 전위에 대해 말한다. 세계는 완성되었다. 모든 시선은 내부로 향해진다. 탈주로는 막혀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내부로부터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슬로건은 우리 자신을 인도하는 탈주(exodus)를 함의한다. 한계에 도달할 때마다(그것은 그 너머가 없는, 즉 초과될 수 없는 한계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현재의 카이로스로 다시 향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도대체 카이로스는 무엇인가? 그리스 문화에서 그것은 화살의 비행에 의해 표시되는 시간 속 순간이었다. 그것은 여전히 어떤 미래를 상상하는 문명이었고, 따라서 화살을 쏘는 것과 화살이 도착하는 것을 보는 것 간의 관계였다. 하늘로 쏘아진 화살은 별들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카이로스는 우리의 심장을 꽂는 화살이며, 별의 극한으로부터 되돌아오는 화살이다. 카이로스는 우리 자신을 창조적 기획의 출발점으로 취하는 필연성(이자 가능성)이다. 그것은 우리 몸들을 변형시킬 가능성, 즉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몸들을 잡종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구축하고 내부로부터 잡종으로 만들 가능성이다. 그것은 삶의 모든 요소들을 시적 재구성으로 되돌림으로써 정치학에 참여할 가능성이다. 바로 “삶정치”라는 용어가 이러한 구성기획을 함의한다. 요컨대, 우리가 전지구화 아래에서 살아갈 때, 그리고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경계들이 있는 세계 속에서 살아갈 때,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자신과 프톨레마이오스를 확실하게 소진시키고 그래서 카이로스의 중심성이 유일한 준거점이 되었을 때, 이 모든 경우들에서, 예술적 실천의 창조적이고 구성적인 정신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술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에 있어 유일한 가능성이 존재 내부로부터 출발해, 모든 형성이 인간 몸의 바로 그 육체적․정신적 본질의 변형과 같은 삶정치적 실천을 관통하는 데 있을 바로 그때. 사회적인 것의 구조가 아주 중심적이 되었고, 그래서 세계가 아주 작고 제한적이 되어서 더 이상 이 거주지 뒤에 남아있을 어떠한 가능성도 없을 바로 그때. 유토피아적 환영들(다른 장소(topoi)에 대한 환영들)이 더 이상 자신을 제시하지 못할 바로 그때. 그렇다면 예술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새로운 존재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구적 공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반성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며, 그 공간으로 하여금 다시 특이성들의 실존을 향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죽음을 제거하도록, 지구기계의 내적 한계들을 해소하도록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괴물은 우리에게 더 이상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7. 다중은 죽음을 이 창조적 도전에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이다. 다중은 특이성들의 앙상블이지만, 각 특이성은 또한 다중들의 앙상블이다. 이 기계는 삶을 위해 투쟁한다. 그것은 삶 내부에서 죽음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다중의 실천은 죽음에 대한 부정, 즉 삶의 과정을 중단시키는 것에 대한 확실한 거부와 거절을 공통적으로 갖는, 생의 경험들의 지속적인 증식일 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구적 세계는, 마치 제국이 우리에게 정치적 질서로 나타나듯이 닫힌 세계인데, 그것은 시공간이 소모되었을 때 귀결로서 나타나는 엔트로피에 종속된다. 그러나 이 닫힌 세계 내부에서 행동하는 다중은 각 주체를 통과해, 세계를 형성하는 각 특이성들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세계를 변형시키는 법을 배웠다. 푸코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할 때, 역사가 우리가 서있는 세로축에서 자신을 갱신한다는 것을 발견한다고 말이다. 바로 그것이 다중으로서의, 다중스러운 신체로서의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변형 내부에서만, 그리고 죽음에 대항하는 맹렬한 투쟁 속에서만 다중의 실천은 시작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보기에는 제국의 시대 그리고 다중들의 시간 동안에서의 예술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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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자주] 보편적인 관광매춘의 원문은 ‘universal prostitution of tourism’으로,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성매매관광인 ‘매춘관광’과 의미상 구분짓기 위해 ‘관광매춘’이라는 말로 옮겼다. 네그리는 이것으로 오늘날 (대부분은 여행비자로 출국한) 노동자들의 더 나은 일자리를 찾기 위한 유랑을 의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는 노동자들에게 특정 지역(제 3세계에는 제 1세계를, 제 1세계에는 제 3세계를)이 더 나은 일자리를 보장할 것이라는 환상을 유포하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전지구 어느 지역에서도 자신의 신체를 팔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2) [역자주] 루퍼드 머독은 세계 미디어 시장을 장악한 뉴스 코퍼레이션(The News Corporation Ltd.)의 대표로 런던타임스, 선, 선데이타임스 등의 신문과 폭스TV를 비롯해 스타TV, 내셔널 지오그라피 등의 방송을 소유하고 있으며, 21세기 폭스사, 하퍼콜린스 출판기업, LA다저스 등과 같이 영화, 출판, 스포츠 산업과 같은 시장에도 개입하고 있다.
3) [역자주] 바스키아는 80년대 초 미국에서 활동했던 20대의 젊은 흑인화가로, 엔디워홀의 후원을 받았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검은 피카소라는 별명으로 유명세를 얻고, 28살의 나이에 생을 마친 이 천재적인 화가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공존하기도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참고할 만한 내용이 소개된 것으로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라. http://jmbasquiat.new21.org/main.htm
4) [역자주] 디스토피아로 옮긴 ‘dis-utopia’(본문에는 ‘dis-ustopia’로 표기되기도 했는데, 오타로 여겨진다.)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 유토피아(‘u(~이 없는)+topoi(장소)’)의 의미를 유물론적으로 역전시킨다는 점(즉 ‘어디에나 있음’)에서 주목되어야 할지 모른다. 최근에 번역 발간된 네그리의 작업노트는 그러한 의미역전의 사례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유물론적 목적어의 공통 언어는 디스토피아(dystopia)이다. 유토피아가 완전히 결정된 미래를 전유한다면 디스토피아의 공통 언어는 빈 상태로 남아있는 ‘장차 올 것’을 채운다. 디스토피아는 혁신의 힘을 진공 속으로 투사하기 때문에 힘차다. 디스토피아는 가난의 덕성(virtus)이다.” ꡔ혁명의 시간ꡕ, 정남영 역, 갈무리, 2004, 212쪽.
5) [역자주] ‘ensemble’을 영어든·독일어든·불어든 관례적으로 ‘총체’로 옮겨왔다. 예컨대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6의 다음 구절이 그렇다.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 안에서 해소시킨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ensemble)이다.” ꡔ독일 이데올로기 Ⅰꡕ, 김대웅 역, 두레, 1989. 39쪽. 그러나 ‘총체(總體)’가 전체로의 통일 속에서의 차이의 지양을 함의하는 ‘totality’의 역어에 좀더 가깝다면, ‘총화(總和)’가 ‘조화’가 차이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ensemble’의 역어로 더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낯선 번역어가 독서를 방해하는 어색함을 준다는 점에서 여기에선 의미만 환기시키고, 불가피하게 음역하는 방법을 택했다.
6) [역자주] “산종(散種)”은 “파종(insemination)”과는 달리 씨앗을 무의미하게 흩뿌리는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에게 있어 ‘산종’은 자신의 ‘원본 텍스트’로 되돌아갈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이 출발했던 텍스트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의미의 방사(emission)과정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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