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고대문화> 2009.12.24 (22:15:11)
http://www.komun.net/zbxe/?mid=monthly_komun_2009&category=250568&document_srl=248926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는 주류 사학의 배타적 민족주의와 유럽중심주의로 인해 그동안 한국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만큼이나 한국사회에서 라틴아메리카는 혁명의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의 상징적 장소로서 한쪽 면만 부각되어, 왜곡된 편견 또한 동시에 받아왔다. 미화되지도 폄하되지도 않은, 그래서 온전히 그 자체로 숨 쉬는 라틴아메리카를 알기 위해서는 서양제국주의의 침탈 이후 그 어느 대륙보다도 민중들이 치열한 저항을 펼쳐졌던 근대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한다. 2009년 2학기 역사 연재에서는 멕시코, 쿠바, 칠레-베네수엘라의 혁명사를 연대기적 순으로 다루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라틴아메리카 근대사에서 진정으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알아보려 한다.
아옌데에서 차베스까지 - 라틴아메리카의 또 다른 혁명
박구병|아주대 사학과 교수|kbpark@ajou.ac.kr
흔히 20세기 라틴아메리카의 3대 혁명이라고 하면 앞서 소개한 멕시코 혁명, 쿠바 혁명과 더불어 1979년 니카라과 혁명을 손꼽는다. 세 혁명은 모두 게릴라 무장투쟁의 승리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라틴아메리카 혁명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는 니카라과 혁명 대신 최근의 흐름과도 관련이 깊은 또 다른 유형의 혁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사회주의로 향하는 칠레의 길
‘미국의 뒷마당’에서 발발한 쿠바 혁명이 무장투쟁의 본보기를 제공했다면, 쿠바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칠레의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Gossens, 1908-1973)는 이른바 ‘선거 혁명’의 대변자였다. 1970년 아옌데의 집권은 선거를 통한 좌파 정부의 탄생이라는 제3세계에서 보기 드문 사례였다. 하지만 동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 정권을 유지하면서 사회주의의 실현을 모색하는 것이 선거의 승리보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1952, 1958, 1964년 세 차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낙선의 고배를 마신 아옌데는 결국 ‘대권 4수생’으로서 1970년9월 박빙의 삼파전 끝에 어렵사리 보수파와 중도우파 후보를 제쳤다. 당시 아옌데를 단일 후보로 내세운〈인민연합(Unidad Popular)〉은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을 비롯해 여섯 개의 조직을 포함한 선거 연합체였다. 아옌데는 1970년11월 5일 취임 연설에서“마침내 더 이상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이 없는 날이 왔다”고 선언하면서 “칠레는〈인민연합〉의 강령에 적시한 대로 민주주의와 다원주의, 그리고 자유를 통해 사회주의로 이르는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는 사회주의로의 평화로운 이행을 위해 생산수단의 사회화뿐만 아니라 합법성과 제도적 발전, 정치적 자유와 폭력의 예방을 준수해야 할 원칙으로 제시했다. 피억압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새로운 국가 체제가 부르주아적 사회 질서를 대체한 뒤에야 비로소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아옌데가 표방한 ‘제2의 이행 모델’은 실현 가능성이 낮은 변종이었다. 그러나 아옌데는 칠레에서의 실험을 민주주의 전통에 바탕을 둔 마르크스주의의 창조적인 변용으로 여겼다. 19세기 말 이래 칠레는 의회 중심 체제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여러 정당들의 활동이 보장되며, 대중의 선거 참여 비율이 높은 민주주의의 모범 사례로 꼽혀왔기 때문이다.
아옌데의 초기 경제 정책은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카스트로의 정책과 유사했다. 먼저 물가를 동결하고 임금 인상을 추진하면서 짧은 기간 동안 소득재분배를 모색하는 한편 임금 인상이 인플레이션으로 증발해버리지 않도록 가격 통제를 실시했다.〈 인민연합〉정부는 경제전반을 사회적 소유(국유화) 부문, 사적 부문, 혼합 부문으로 나누어 각각 별도의 계획을 수립하고, 교육, 의료∙건강, 주택 부문에서 필요한 지출을 늘리며 공공사업과 주택 공급을 확대했다. 특히 국가 소유 지분이 자본금의 80%를 넘는 사회적 소유 부문의 확대는〈인민연합〉정부가 심혈을 기울인 핵심 사안이었다.〈인민연합〉정부는 법률 제안권을 활용해 당시 칠레 수출의80%를 차지하던 구리 산업을 비롯해 석탄, 철강, 민간 은행, 섬유 등 주요 분야의 국유화를 추진했다. 국제전신전화(ITT)나 포드 같은 미국계 기업 역시 국유화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인민연합〉정부는 앞서 기독교민주당 정부 시절에 제정된 토지개혁법을 1972년 말까지 80ha가 넘는 모든 관개(灌漑) 농지에 일률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농업 인구의 2%에 불과한 대토지소유자들의 지배 체제를 약화시키고자 했다.
미국의 개입과 군부쿠데타, 아옌데 실험의 좌절
국유화 정책의 추진으로〈인민연합〉정부는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미국과도 갈등을 초래했다. 반대파의 파업 투쟁과 미국의 보이지 않는 봉쇄 탓에 경제 사정이 차츰 악화되었고 결국〈인민연합〉정부는 국제전신전화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조직적인 지원에 힘입어 1973년 9월 11일 칠레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아옌데는 대통령 집무실에 십자포화를 퍼부은 쿠데타 세력에 맞섰지만 역시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키신저(Henry Kissinger)에 따르면, 아옌데는“라틴아메리카의 모든 지도자 가운데 (미국 정부에게) 가장 적대적인 인물”로서“공공연한 카스트로의 지지자이며 반미주의자”였고“그의 국내 정책은 칠레의 자유와 인권을 위협”했다.(각주 : (1) Henry Kissinger『, Years of Renewal』, New York: Simon & Schuster, 1999, p. 753.) 최근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적어도 1971년말부터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브라질의 군부독재자 에밀리오 메디치는 아옌데 축출에 관해 논의했다. 닉슨은 자금이나 다른 형태의 지원을 시사하면서“또 다른 아옌데나 카스트로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가능한 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부를 전복시키는 데”앞장설 것을 요청했다.(각주:(2) ‘닉슨, 브라질 정상과 아옌데 축출 논의’, 연합뉴스 2009년 8월 18일기사.)
쿠데타로 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15-2006) 장군은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아옌데 정부가 추진한 정책을 철저히 뒤엎었다. 더욱이 피노체트의 독재는 3천 건이 넘는 인권침해사례를 양산함으로써 아옌데가 존중한 민주적 헌법 질서와 제도적 틀을 크게 훼손시켰다. 결국 아옌데의 ‘비정통적’도전과 라틴아메리카 초유의 실험은 오래 전 서유럽의사회민주주의세력이겪은논란을재연시켰다. ‘ 부르주아 민주주의’사회의 법적 질서를 존중하는 합법성의 원칙과 사회주의 체제를 실현하려는 혁명 세력의 신념이 양립할 수 있을까? 기존의 국가 기구를 파괴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반발 세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 합법성의 존중과 선거 참여는“계급투쟁의 포기”이며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시키는 개량주의일 뿐인가?(각주:(3)졸고「, 칠레의고독한‘구원자’살바도르아옌데」, 박상철외『, 꿈은소멸하지않는다: 스파르타쿠스에서아옌데까지다시보는세계의혁명가들』, 한겨레출판, 2007,p. 456.)
아옌데의 비극은 카스트로와는 달리 의회민주주의가작동하는 나라라는 상황, 특히 반대파가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아옌데의 방식에 회의를 품은 이들에게 칠레의 사례는 ‘비폭력’원칙에 매몰된 ‘개혁파’의 한계를 드러낸 반면교사였다. 이들은 변혁 운동 세력이 경제 정책에서 지속적인진전을 이루고 기득권층의 정치적∙군사적 저항을 좌절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가 권력의 확실한 장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아옌데의 염원은 외부 세력의 방해 공작과 군부의 비합법적인 도전에 무너졌지만 세월이 흐른 뒤 적잖은 열매를 맺었다. 피노체트의 오랜 독재 탓에 제도와 정책의 차원에서 아옌데가 남긴 유산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희생자’ 아옌데에 대한 기억은 이미 1980년대 칠레에서 일종의 대중신화로 재구성되었다. 그리고2000년 6월 민주화 이행이 개막된 지 10년 만에 산티아고의 대통령 집무실 뒤편 헌법 광장에는“나는 칠레가 가야 할 길, 칠레의 미래를 확신하노라”는 글귀와 함께 아옌데의 동상이 세워졌다.
아옌데의 재탄생 : 21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집권 도미노
아옌데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열일곱 살의 사관학교 생도 우고 차베스(Hugo Chávez Frias)는 줄곧 좌파운동에 관심을 보이다가 25년 뒤 아옌데의 방식을 좇아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차베스는 1998년 대통령에 선출된 뒤 현재까지 삼선(三選)에 성공했으며 브라질에서는 2003년〈노동자당(PT)〉의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시우바(Luiz Inácio Lula da Silva)가 대통령에 선출된 뒤 연임 가도를 달리고 있다. 같은 해 아르헨티나에서는 국제통화기금의 정책을 비판하며 외채 상환계획의 재조정을 주장한〈정의당〉(일명 페론당)의 중도좌파 네스토르 키르츠네르(Nestor Carlos Kirchner)가집권했고, 2005년 12월에는〈사회주의운동당〉의 원주민출신 에보 모랄레스(Juan Evo Morales Ayma)가 54%에 이르는 지지를 획득해 볼리비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밖에 2005년 3월 우루과이 역사상 최초로 중도좌파로서 대통령에 취임한 타바레 바스케스(Tabaré Vásquez)나 2006년 3월 4년 임기의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칠레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사회당〉의 미첼레 바첼레트(Verónica Michelle Bachelet), 그리고 권좌에서 물러난 지17년 만인 2007년 1월 대통령직에 복귀한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José Daniel Ortega Saavedra)도 21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바람’을 이어갔다. 특히 다니엘 오르테가는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의 최고지도자로서 1979년부터 1990년까지 혁명 정권을 이끌다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우파 후보에게 밀려 퇴진한 뒤에는 야당 지도자로 변모했으며 두 차례 낙선 끝에 2006년 11월 선거에서 승리해 다시권좌에 오른 불굴의 투사였다.
이런 라틴아메리카의 연쇄적인 ‘좌향좌’현상은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당시 멕시코와 브라질을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는 이른바 중도파 기술관료 정부가 출현해 ‘민주주의와 시장’을 기치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얼마간 성과를 거두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초대로1994년 12월 마이애미에 모인 라틴아메리카의 지도자들은2005년까지 아메리카 전체를 포괄하는 자유무역지대를 설립하는 데 합의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남북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전례 없는 수렴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림은 10년 만에 크게 바뀌었다. 차베스를 필두로 곳곳에서 집권한 좌파 성향의 지도자들은 한때 ‘만병통치약’으로 떠받들린 바 있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폐기나 대폭 수정을 주도하며 라틴아메리카를 ‘좌파 바람’의 진원지로 탈바꿈시켰다.
물론 현재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세력 가운데에는 과거 강경 좌파로부터 출현한 개혁적 좌파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좌파 포퓰리스트(populist)’도 섞여 있다. 이들 사이에는 미국과의 경제 협력이나 자유무역협정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가 존재하지만, 대부분 교육, 빈곤 퇴치를 위한 부의 공평 분배, 의료 혜택, 주거 문제 해결과 같은 사회 정책을 강조하며 정부의 효율성보다는 민주주의적 원칙과 사회정의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면 21세기 라틴아메리카 정치에서 좌파가 득세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무엇보다 민선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경제의 안정적∙지속적 성장을 달성하겠다는 공언과는 달리 저조한 성적을 거둔 것에 대해 대중의 불만이 집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1990년대에 경제 개혁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빈곤, 부와 권력, 기회의 집중에 따른 극심한 불평등 탓에 좌파의 정치적 호소가 통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의 어떤 중도좌파 정부를 과거에 그랬듯이 ‘소련의 발판’이라고 비난하기 어려워진 국제 환경의 변화와 관련이 클 것이다.
차베스의 통치(Chavismo) : ‘21세기 볼리바르혁명’
현재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지도자 가운데 단연 세인의 주목을 끄는 흥미로운 인물은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일 것이다. 1999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뒤 차베스는 19세기 초 남아메리카의 ‘해방자(el libertador)’로 추앙받은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그는 1999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의 정식 명칭을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República Bolivariana de Venezuela)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적 주권확립, 대중의 정치 참여, 경제적 자족, 석유(주지하듯이 베네수엘라는 일일생산량이나 매장량 기준으로 볼 때, 세계 5위 내에 드는 산유국으로서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이기도 하다) 수입의 공평한 분배, 부패척결을 표방한 ‘볼리바르 혁명’을 주도했다. 또한 차베스는 볼리바르가 염원한 남아메리카 통합과 미국 견제의 기치를 전유(專有)해 반세계화(각주:(4) 반(反)세계화 운동은1994년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의창설5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에스파냐 마드리드에서 시위를 벌였을 때부터 점차 언론매체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더욱이1997년 가을 동남아시아의 일부 국가에서 시작되어 한국까지 확산된 외환과 금융 위기는 자본 거래의 세계화와‘무분별한’금융 자유화의 소산이었기 때문에 반세계화 운동가들의 목소리는 1999년 시애틀과 2000년 워싱턴DC에서 더욱 커졌다. )와 반미의 선봉장으로 거듭났다. 차베스는 ‘제국주의’, ‘세계평화의파괴자’같은 표현으로 미국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결국 실패로 끝난 2002년 4월 반대파의 쿠데타를 미국이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차베스는 국내외 지지 세력에게는 ‘사회주의 해방자’나 ‘미국에 맞서는 데 두려워하지 않는 인본주의적 지도자’, 반대파로부터는 ‘권위주의적선동가’, ‘독재자’로크에게 엇갈리는 평가를 받을 만큼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부는 차베스를 민주적 절차와 과정에 무관심하며 권력에 굶주린 인물로 묘사했다. 이에 대해 차베스는 2006년 9월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조지 W. 부시의 연설이 있은 다음 날 연단에 올라“악마가 어제 바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아직도 유황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고 조롱한 바 있다. 이는 마치 그가 2005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아메리카 대륙정상회담에서 부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삽을 들어 보이면서“미국이 제안한 아메리카자유무역지대(FTAA)를땅에 묻으러 왔다”고 선포한 다소 해학적인 장면과 겹쳐 보인다.
어쨌든 차베스의 집권은 부패의 만연과 경제 악화에 대한 대중의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또한 1958년부터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어져온(1989년 ‘카라카스의 저항[Caracazo]’으로 크게 흔들리긴 했지만) 양당 체제(각주:(5) 베네수엘라에서는 1948년 군부쿠데타가 발생해 집권 정당인〈민주주의 행동(AD)〉가 불법화되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가속되는 등 개혁노선이 크게 후퇴했다.
1958년 군부 세력이 물러난 뒤 다시 집권한〈민주주의 행동〉의 로물로 베탕쿠르트(Romulo Betancourt)는 예전과는 달리〈베네수엘라 기독사회당(COPEI)〉과 ‘푼토 피호(Punto Fijo)’협정을 맺어 사실상 선거 없이 양당이 번갈아 집권하고 타협하면서 좌파 세력을 배제하는 보수대연합 체제를 구축했다.)의 종말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1992년 2월 당시 특수부대 중령이었던 차베스는〈볼리바르 혁명운동200(MBR-200)〉이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푼토 피호’체제에 대항하는 군부의 쿠데타를 주도했으나 실패한 뒤 2년 동안 복역한 바 있었다. 석방 후 차베스는 옛 동료들을 규합해 제5공화국운동(MVR)을 창설하고 개혁적 좌파 인사와 시민운동가들을 수용하면서 원래 지녔던 민족주의적∙애국주의적 색채를 누그러뜨렸다.(각주:(6) 김은중「, 베네수엘라: 민주주의에대한새로운문제설정과국가기능의재편」『, 라틴아메리카연구』Vol. 22, No. 2, 2009, p. 159.)이런 견지에서 볼 때 차베스의 집권은 군부를 배경으로 한 강력한 민족주의, 개혁적 사회주의, 저발전과 양극화에 대한 반발이 어우러진 독특한 사건이었다.
차베스는 초기부터 사회 개혁의 실행에 적극적이었는데, 베네수엘라의 빈곤 관련 통계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2006년에 석유 수입을 재원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투자는133억 달러에 이르렀다. 차베스는 2002년 쿠데타의 불발 이후 다양한 ‘미시온(misión)’(각주 : (7) 임무(mission)라는 뜻의 스페인어 - 편집자 주)을 전개하면서 대중에게 복지혜택을 부여하는 동시에 정치사회적 활동에 대한 참여의 폭을 넓혀왔다. 여러 미시온들은 2001년 12월에 출범한 이웃공동체 조직 ‘볼리바르 서클’들을 대체했다. 예컨대 2003년4월 가장 먼저 시작된 미시온 바리오 아덴트로(MisiónBarrio Adentro)는 가난한 지역에 의료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쿠바 의사들을 파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차베스는 쿠바와의 전략적 동맹을 통해 쿠바의 의사뿐만 아니라 교사와 기간요원 등 약 2만 여 명이 베네수엘라에서 활동하게 했다. 베네수엘라의 노동자들은 이 미시온을 통해 처음으로 의료혜택을 받게 되었다. 또 2003년 7월 실시된 미시온 로빈슨은 문자 독해 능력의 향상을 도모했고 2004년 1월 시작된 메르칼(Mercal)은 저가에 식량을 판매하는 프로그램이었다.2004년 3월에 대중경제부(MINEP)가 주관하기 시작한 미시온 ‘전환(Vuelvan Caras: 얼굴을 돌려라)’은 대중이 자발적으로 협동조합을 결성하도록 유도하고 그들이 생산관계를 실제로 바꿈으로써 실업이나 배제에 맞설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었다.
차베스의 공식적인 담화에 근거해 그의 정치경제적 지향은 ‘21세기형 신사회주의’로 이해되기도 한다. 예컨대 차베스는 2005년 5월 1일 노동절 기념식에서 베네수엘라가“21세기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선언한 뒤 기간산업과 은행의 국유화 조치를 추진했으며 2007년 1월 10일 새로운 임기 6년을 시작하면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공식화하고 연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의 추진을 공표했다. 더욱이2007년 5월 1일 이후에는 외국계 석유 회사와 베네수엘라의주요 텔레콤 회사인 CANTV(1991년에 민영화됨)를 국유화대상에 올렸으며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라틴아메리카 최고수준으로 인상했다. 차베스는 두 차례로 연임을 제한(최대삼선 가능)한 원래 헌법 규정을 없애고 중앙은행의 자율성을 제한하며 국가의 수용(收用)권을 강화하는 등 새로운 헌법 개정안에 대해 2007년 12월 국민투표를 실시했으나 51%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하지만 차베스는 결국 2009년 2월에 연임 제한 규정을 삭제하는 국민투표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차베스가 표방하는 ‘볼리바르 혁명’에는 반제국주의와 반세계화를 바탕으로 한 라틴아메리카 통합의 전망이 담겨 있었다. 이를 위해 쿠바를 비롯한 카리브 해 국가들에게 원유를 저렴하게 수출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또한 차베스가 2004년에 설립을 주도한 아메리카 민중을 위한 볼리바르 대안(ALBA)은 현재 베네수엘라, 쿠바, 볼리비아, 니카라과, 에콰도르, 온두라스 등 6개국이 참여한 지역 연대로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견제하는 대안적연합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각주:(8) 베네수엘라 정부가 제공하는 차베스의 일대기 가운데 특히 수상 목록에 주목한다면 차베스가 1999년 10월 16일 한국의 경희대학교(당시 총장 조정원)로부터 명예정치학박사학위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차베스가 수여받은 첫 번째 명예박사학위인 듯하다. 과연 어떤 까닭에 차베스에게 한국의 한 대학이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을까? 10년 뒤 정치적 관점에 따라선 영웅 또는 반(反)영웅으로 평가가 뚜렷이 갈려 치열한 논란의 대상으로 성장하게 될 차베스의 될성부름을 일찍이 간파한 것일까? 자못 궁금해진다.) 아울러 차베스는 2007년2월 남아메리카 은행(Banco del Sur)의 창설을 주도했는데, 이 은행이 적절하게 기능한다면 국제통화기금의대안으로서 해외 투기 자본으로부터 약소국을 보호하는 등 낙후된 라틴아메리카 금융시장의 안정에 기여하고 각종 인프라 건설 사업 지원, 에너지 개발, 산업 발전에 우선적으로 자금을 투입하게 될 것이다.(각주:(9)김영길『, 남미를말하다』, 프레시안북, 2009, p. 317.)
평가 유보
아옌데를 계승한 것처럼 보이는 차베스의 실험은 현재진행형이다. 차베스는 약 1천만 달러를 투자해 2005년10월 말 카라카스에 본부를 둔 24시간 뉴스 방송국 텔레수르(TeleSUR)를 개국함으로써 CNN에 맞서는 ‘남아메리카의 알 자지라’의 시동을 걸었다. 이것이 차베스를 위한 선전 도구에 머물게 될지 또는 대안적 방송망을 형성하는 초석이 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각주:(10) 2002년 보수파가 벌인 쿠데타와‘3일천하’를 승인한 바 있는 라디오카라카스TV(RCTV)에 대해 차베스는 2007년 5월 말 방송권 갱신을 거부했다.) 다만 차베스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안녕하세요, 대통령님(Alo Presidente)’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권위주의적 요소의 존재가 제도적 민주주의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는 친(親)차베스 성향의 노동조합 내에서 정부의 통제 강화가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에 대해 분란이 발생하기도했다.
또 베네수엘라가 주도하는 볼리바르 대안(ALBA)은 남아메리카공동시장(MERCOSUR 또는 MERCOSUL)에 속해 있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지역 내 위상이나 기존 국제관계의 지배적 규범과 갈등을 야기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앞서 언급한 여러 미시온과 같은 사회 복지개혁은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실상 지속 불가능한 과업일수 있다. 검증된 공공서비스 체계나 공무원들의 역량 강화 없이 베네수엘라를 석유 수입, 특히 원유 생산량 감축에서 비롯된 고수익이라는 일종의 횡재에 의존해 현대적인 복지국가로 변모시키려는 시도는 위험성이 클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베네수엘라에서 범람하고 있는 반미 수사, 반자본주의 구호, 신사회주의 선언 자체에 매료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 때문인지 최근 한국 내 일부 진보세력의 베네수엘라 순례가 심심찮게 이루어졌고 베네수엘라에 편중된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치 담론이 재생산되기도했다. 과연 이들의 주장대로 베네수엘라는 실제“무장투쟁보다 단호한 선거 혁명”이나“끊임없이 선거하는 혁명”을 이루어냈는가? 최소한 현재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는가?(각주:(11)김병권외『, 베네수엘라, 혁명의역사를다시쓰다』, 시대의창, 2007, p. 387.)차베스의 일관된 반미 수사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에 대한 최대 해외 투자자는 미국이며 베네수엘라 산석유의 최대 수입국 또한 미국이라는 점은 역설이라고 해야할까?(각주:(12) Michael Shifter“, In Search of Hugo Chavez,”Foreign Affairs, Vol. 85, No. 3, 2006, pp. 56-57.) 이렇듯 구호와 실제 사이의 간극에 주목한 어떤 연구자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실험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원 민족주의, 그리고 포퓰리즘의 거대한 혼합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신사회주의’는 외화내빈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차베스의 최근 발언은 그가 처음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1998년에 정리한 구상, 즉“가능한 만큼의 시장과 필요한 만큼의 국가(tanto mercado como sea posible, tantoEstado como sea necesario)”(각주:(13)김은중,「베네수엘라:민주주의에대한새로운문제설정과국가기능의재편」pp. 159-160.)보다 호소력이 커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악마의 배설물’로서 베네수엘라 산업구조 전반의 왜곡을 초래해온 석유가 차베스에게 막대한 재원뿐만 아니라 인플레이션이라는 골칫거리를 선사해주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현재 베네수엘라에서는 국내총생산의 상승률뿐만 아니라 소비자 물가의 증가도 만만찮다. 해마다 최소 10%에서 최대 20%(2007년 3월 당시 18.5%)에이르는 물가상승률은 빈곤층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힌다. 필수품에 대한 가격통제는 물자부족을 야기하고 석유와 가스부분을 제외한 내수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수입도 증가한다. 또 물자부족은 높은 범죄율의 원인으로 거론될 수 있다. 차베스가 집권한 뒤에도 마약 거래 세력의 발호 탓에 수도 카라카스는 ‘세계 제1의 살인 도시’가 되었다. 공식 통계만으로 연간 살인 건수가 10만 명당 130명에 달하면서 인구 320만 명의 카라카스는 예전부터 악명 높은 콜롬비아의보고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미국의 뉴올리언스를 제치고 오명을 넘겨받게 되었다. 범죄의 증가와 치안악화는 사회 개혁 정책의 효과가 낮다는 것을 반증하는 표지이기에 차베스 정부에게 큰 걸림돌이 된다.
연재를 마치며
이제까지 세 차례에 걸쳐 1980년대 초 이래 신자유주의세계화의 진원지가 된 라틴아메리카의 20세기를 혁명이란 창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라틴아메리카는 16세기 초 이래 낯선 침입자 유럽인들에 의해 일방적인 발견 대상이자 명명 대상처럼 여겨졌다. 그에 상응해 원주민들의 흔적은 희미해졌고, 어떤 언론인의 표현을 빌면 라틴아메리카는 ‘수탈된 대지’가 되었다. 달리 말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는 유럽세계가 어떻게 확대되었는지의 예증이라고 할 만하다.20세기 초까지는 분명히 그런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20세기 초 과두지배 체제에 저항하는 각지의 대중이 본격적으로 부상하면서 원주민 담론이 등장하는 등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한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신자유주의세계화의 구호는 한마디로 ‘TINA,’즉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이다. 과연 그럴까? 이곳저곳을 찬찬히 살펴보면 세상이 어찌 하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강변할 수 있을까? 현실적인 성공의 방식이 있고 강력한 지배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누구나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일은 부자연스럽고불가능한일임을지적하고싶을뿐이다. ‘ 대안은 없으니 오직 이 길을 따르라’는 최강자의 목소리만 살아 있는 듯 보이는 사회는 파시스트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지금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싶다. 불법과 부정을 저질러도 ‘먹고 살게 해주는 능력’이 있으면 별 문제 없다고 여기며 바람직한 삶의 가능성을 외면하는 동안 우리는 사람다움을 잃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TINA가 강제하는 획일적 논리와 가치에서 벗어나고자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상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땀을 쏟아야 한다. 그 길에서 TATA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TATA는 대안 부재를 설파하는 TINA와는 매우 대조적인 인물(각주:(14) TINA는영국의전수상마거릿대처의별명이기도하다- 편집자주)이다. There are thousands of alternatives. 우리 앞에는 단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의 길이 있으며 그 길마다 회복해야 할 소중한 꿈이 새겨져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20세기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농민 혁명, 민주주의 혁명, 사회주의 혁명 또는 다른 어떤 이름을 붙이든 그것은 비록 오류가 있었을지라도 더 인간다운 삶, 존재가 대접받는 삶에 대한 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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