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2011-05-18 오전 10:18:31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10518034913§ion=06
"박정희가 키운" <중앙> 김진, 무식하면 입 다물라
[기고]내 친구 구충서, 그리고 김진의 '5.16 예찬'
내 친구 구충서
1974년 3월 하순 어느 날 저녁 나는 고교시절부터 깊은 친교를 나눠 오던 벗 구충서와 무교동의 한 막걸리 집에 마주앉았다. 당시 우리는 대학에 입학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햇병아리 신입생이었다. 고교시절부터 10월유신에 대해 강한 저항의식을 표출해 왔던 충서는 그날 유신철폐 민주화투쟁에 가담하게 되었다며 내게 동참을 권유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거절했다.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이를 위해 공부하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궁색한 논리를 피력하면서. "너는 투쟁해라. 나는 공부하마." 나의 이 말에 충서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약 보름 후 충서는 소위 민청학련 사건 최연소 가담자로 체포되었고 열아홉 어린 나이에 12년형을 언도 받고 복역했다. 그해 겨울 육영수 여사 서거에 따른 특사조치로 충서는 대부분의 다른 가담자들과 함께 출옥했지만 그의 정신 상태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고초도 감내하기 힘들었지만 자신으로 인해 파탄 난 집안 모습에 그는 크게 충격 받았다. 광주에서 견실한 자영업을 하던 부모의 사업은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체에 근무하던 형은 직장에서 쫓겨나 실업자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제 정신을 갖고 살 수 있었겠는가.
충서의 정신장애는 갈수록 악화해서 다른 선배들처럼 민주화투쟁에 다시 뛰어들 수도 없었다. 그런 벗을 두고 나는 유학길에 올랐다. 군부독재에 저항해서 민주화를 쟁취해 낸 처절한 투쟁이 국내에서 계속되는 동안 나는 외국에서 편안한 유학생활을 영위했다. 1991년 귀국한 나는 충서를 찾아 볼 겨를 없이 쫓기듯 시간강사 생활을 꾸려갔다.
1995년 3월 이화여대에 정식으로 자리를 잡고 나서 나는 비로소 충서를 찾을 생각을 했다. 두 명의 다른 벗들과 힘을 합쳐 마침내 충서 형님을 찾아냈고 그 형님을 통해 충서가 전라도 깊은 산 속에 있는 정신병자를 격리수용해 놓은 기도원에 갇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사이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님은 아파트 경비원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동생을 그런 곳에 방치해 두었냐고 따져 물을 상황이 아님이 여실했다.
산속 기도원에서 만난 친구의 모습은 처참했다. 열아홉 훤칠했던 체격과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했던 눈빛, 당당한 기상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나이는 불과 마흔인데 머리는 하얗게 새었고 어깨는 구부정한 채 초점 없는 눈빛과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며 앞뒤가 전혀 안 맞는 말을 지껄여대는 친구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나는 무엇으로도 갚을 길 없는 빚을 친구에게 졌다는 것을 그 순간 절감했다.
이때 이후 충서는 옛 벗들의 도움에 의지해서 살아오고 있다. 그는 여전히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며 외부와 사실상 단절된 삶을 지속하고 있다.
▲ 2007년 11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해 분향하고 있다. ⓒ뉴시스 |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과 박정희
나는 왜 내 친구 구충서의 삶을 공개할 결심을 했는가. 5.16 50주년을 맞아 보수언론들이 경쟁적으로 게재한 특집기사를 나는 읽었다. 보수적 지식층과 논객들이 5.16을 혁명으로 미화하고,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찬양하고, 급기야 5.16과 박정희가 한국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는 궤변을 읽으며 나는 내 친구의 삶을 떠올렸고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견딜 수 없어 이 글을 쓸 마음을 먹었다. 37년 전 '투쟁'의 가시밭길에 동참하라는 친구의 제의를 거절하고 '공부'라는 안락한 길을 택했던 내가 용기 있게 '투쟁'의 길에 나섰던 내 친구를, 그리고 내 친구와 함께 투쟁의 길에 나섰던 무수한 '구충서'들을 모욕하고 매도하는 글들에 도저히 침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많은 구역질나는 글들 중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의 글(5월 16일자 칼럼 '나를 키운 박정희'-편집자주)을 선택해서 비판의 글을 쓴다. 선택의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한국 보수 언론을 대표하는 대표적 논객이 쓴 글의 논리 전개가 지극히 조야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한국 정치사에 대한 그릇된 지식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어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선택했을 뿐이다.
그에 의하면 그가 취재한 박정희의 '부하'들은 오직 박정희의 '청렴과 애국심'만 강조하더란다. 그에게 김태촌과 같은 조직폭력배 보스의 '부하'들을 취재해 보라 묻고 싶다. 보스의 지시로 자행한 무수한 폭력과 살인, 그리고 갈취행각을 과연 그들이 증언하겠는가. 그의 글을 읽으면 '부하'들의 증언이 어느 결에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증언'으로 바뀐다. 김진 논설위원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구충서'들에게 박정희에 관해 물어 본 적 있나.
그가 서술하는 '공동체'는 오늘날 민주적 공화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공동체라기보다 오히려 파시스트들이 주창했던 유기체적 전체주의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 그가 묘사하는 공동체적 인간 박정희는 히틀러, 무솔리니, 김일성 같은 전체주의자에 더 가깝다는 말이다.
"내가 발견한 김일성은 공동체적 인간이었다... 인류 문명의 진보와 공동체 발전에 개인의 궤적을 합일시키는 공동체적 인간이었다...그런 인간의 대표적인 사람이 김일성이었다. 그런 김일성이 나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았다."
김 논설위원의 글에서 박정희를 김일성으로 바꾼 표현이다. 노동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김일성 주체사상 찬양 글귀와 무엇이 다른가. 김일성 대신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바꾸어 넣어 읽어 보라. 1930년대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당시 이들이 주창했던 소위 Lebensraum(레벤슈라움,나치의 '생존권역' 개념-편집자주) 이념과 무엇이 다른가.
그에 의하면 "1960~70년대 한국의 공동체 발전은 안보와 가난의 극복, 그리고 경제발전이었(지) 민주주의는 그 시대의 과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묻는다. 이승만 독재 타도 투쟁에 나섰다 고귀한 목숨을 희생시키고 4.19 민주묘역에 잠들어 있는 민주열사들은 시대적 요구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이었나. 유신독재에 맞서 싸우다 희생된 무수한 '구충서'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에 분연히 맞서 싸웠던 70년대 언론인들 역시 정신 나간 자들이었나.
그는 나아가 "박정희 개발독재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시초였다"고 강변한다. 그의 논리는 한국 근대화의 기초를 닦아 주었던 것이 일제 식민통치였다는 일본 극우 세력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이제 우리는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을 열어 준 일본에 크게 감사해야 할 판이다. 무엇보다 일제는 '위대한 공동체적(혹은 전체주의적) 인간 박정희(혹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를 교육시켜 주지 않았나.
그는 "민주주의라는 건 경제개발로 중산층이 형성되어야만 가능"하단다. 오늘날 민주화의 물결이 히말라야 산록을 거슬러 올라 네팔과 부탄을 민주화시키고 또 중동의 빈국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예멘 등을 휩쓸고 있다는 것을 대 언론인 김진이 정말 모르고서 하는 말인가. 민주화 투쟁에 나선 국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있는 리비아의 카다피가 40여 년 전 쿠데타로 권력을 쥔 다음 소위 '녹색혁명'을 확산시켰을 때 서방의 일부 언론과 학자들은 그를 '근대화 엘리트'로 칭송한 바 있었다. 그러나 카다피는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잔혹한 독재자일 뿐이다. 그가 아무리 텐트에 기거하면서 '청렴'을 가장해 왔고 또 진정 '인민을 위한' 통치를 해 왔다고 큰 소리 치더라도 말이다.
박정희나 카다피처럼 평생 독재자 노릇을 하려 했던 자들에게 '청렴'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가소로운 얘기다. 죽을 때까지 나라 전체가 자기 소유일 것으로 믿는 자들이 왜 7년 임기를 채우면 권좌를 넘겨줘야 할 자들처럼 째째하게 푼돈을 모으느라 혈안이 되겠는가.
"쿠데타-혁명도 제대로 구별 못하는 김진이 언론인?
박정희와 유신독재체제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 호의호식"해 온 '박정의의 부하들'의 위선에 찬 증언에 기대어 역사를 왜곡하고 민주인사를 능멸하는 김 논설위원에게 분노를 넘어 차라리 연민을 느낀다. 그가 영합하려는 대상이 역사도 아니고 진실도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눈으로 볼 때 권력 획득을 목전에 둔 것처럼 보이는 박정희의 딸이야말로 그가 진정 영합하고 또 비호하고 싶은 대상이리라.
"박정희 소장을 비껴간 헌병대 총탄에 감사한다"는 김 논설위원의 언급에 대응해서 "대통령 박정희를 비껴가지 않은 그의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감사한다"는 말을 나는 결코 하고 싶지 않다. 내 눈에는 김재규 역시 독재자 박정희의 부하일 뿐이다.
그러나 경제학을 전공해서 쿠데타와 혁명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김진 논설위원에게 정치학자로서 이것 하나만은 정확하게 가르쳐주고자 한다. 1789년 프랑스 인민들이 궐기해서 부르봉 왕조를 붕괴시킨 것은 '혁명'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무력을 앞세워 총재 정부를 붕괴시킨 것은 '쿠데타'였다. 마찬가지로 1960년 4월 한국 인민들이 궐기해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혁명'이었고, 그 결과 수립된 제2공화국을 박정희 소장을 우두머리로 한 군인들이 무력으로 전복시킨 것은 '쿠데타'였다.
무식하면 입을 다물고 있으면 본전은 한다. 알면서도 글을 썼다면 언론인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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