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1-05-20 21:38:5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202138535&code=990000
[이택광의 왜?]임재범 신드롬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고 있는 임재범 신드롬이 거세다. 과거 그의 사생활까지 인터넷에 쏟아져 나와서 기사화되는 해프닝이 벌어질 정도이다. 노래보다도 ‘인간’ 임재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불우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거나, 암 투병 중인 아내, 그리고 딸 때문에 고집을 꺾고 텔레비전에 나오게 된 사연들이 이런 관심을 촉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중은 왜 이렇게 임재범의 사연에 흥미를 느끼는 것일까?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임재범이라는 대상에서 자기 자신의 결핍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보이는 삶은 언제나 모자람을 중심으로 구성되게 마련이다. 이것이 욕망의 법칙이다.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이 우리를 밀고 가는 힘이다
임재범이라는 ‘불행한 존재’에서 대중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끝을 본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결핍의 의미이다. 결핍은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의미화하는데, 임재범이라는 대상은 이런 의미화에 사연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임재범이라는 개인을 통해 대중은 자기의 삶에도 내재해 있는 결핍의 의미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수다>는 단순한 음악프로그램이라고 보기 어렵다. 진행자들은 이 프로그램을 ‘공연’이라고 명명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연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와 달리 또한 이 프로그램은 가수나 음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편곡자를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수의 실력을 겨루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임재범이라는 존재의 부각은 여러 가지로 흥미를 자아낸다. ‘실력대결’이라는 차가운 게임의 논리가 아니라 사연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의도라는 진실을 본의 아니게 폭로했기 때문이다.
임재범 신드롬은 최근 한국 사회의 ‘정의’에 대한 공감과 무관하지 않다. ‘노래 잘 부르는 가수가 제대로 대접 받는 세상’과 정의로운 사회를 동격에 놓는 윤리가 여기에서 작동한다. 말하자면, 평등에 대한 정치적 요구가 임재범 신드롬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임재범이라는 개인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불우한 사연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실력 있는 가수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던 세상의 불의를 증명하는 본보기로 표상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제 예능프로그램은 윤리를 필수적으로 내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정치인이나 대의기구를 통해 대리할 수 없는 평등에 대한 근본적인 요구는 이렇게 문화의 논리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임재범 신드롬은 <나는 가수다>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예능보다도 윤리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비단 <나는 가수다>뿐만 아니라, 다른 예능프로그램에서도 이와 같은 요구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능프로그램들의 출연자들은 대중의 참여와 간섭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내려온 출연자들이 던지는 사연에 참여하고 간섭함으로써 대중은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곧 이윤과 직결되게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가수다>는 분명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윤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임재범 신드롬에서 보듯이,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음악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가창력이라는 낭만주의로 이 프로그램을 치장하는 것은 그러므로 중요한 무엇인가를 빠트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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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1-05-06 19:48:1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61948115&code=990000&s_code=ao073
[이택광의 왜?]‘나는 가수다’에 빗대 본 한국 정치인
청중평가단의 결정을 번복하는 바람에 논란에 휩싸였던 MBC <나는 가수다>가 돌아왔다. 리얼리티 TV의 요소를 강화함으로써, 처음 프로그램이 선보였을 때 드러났던 정체성의 혼란은 다소 누그러진 느낌이다. ‘나가수’ 현상은 갑작스럽게 출몰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남자의 자격> 같은 프로그램이 ‘합창단’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부터 전조들이 있었다
노래는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장치 중 하나이다. <전국노래자랑>이라는 프로그램이 연령과 계층을 뛰어 넘어서 광범위한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호응의 양상은 ‘감동’에 대한 갈구로 나타난다. 혼신의 노력을 다해서 청중을 사로잡는 가수를 ‘좋은 가창력’의 보유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감동이라는 것은 정서의 움직임이고, 대중들의 마음은 이를 통해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좋다’는 것은 체제의 논리에 포섭 당하지 않고, 또는 포섭해주기를 요구하면서 떠도는 ‘대중들’이라는 존재를 공동체에 안착하게 만드는 중요한 윤리적 좌표이다. 이것을 ‘정의’라고 합의하는 분위기가 지금 한국 사회에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지난 ‘나가수’에서 제작진과 출연진이 청중평가단의 결과를 뒤집었을 때, 그 의도야 어떠했든, 정확하게 공동체의 정의라는 원칙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 정의의 원칙을 구성하는 논리는 “나는 가수다”라는 진술 자체에 내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 진술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전제는 한국 사회에 ‘(진짜) 가수가 없다’는 믿음이다. 그래야 “나는 (진짜) 가수다”라는 주장이 진실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없는 가수를 있게 하는 것, 여기에 “나는 가수다”라는 발화의 의미가 숨어 있다. 동일한 논리를 정의에 대한 요구에서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은 결론적으로 ‘정의가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가수’에 쏠리는 관심은 정의에 대한 대중들의 요구와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문제는 이런 요구가 충분히 정치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한국 사회처럼 변화의 낙차가 큰 사회에서 정치의 밑절미를 이루는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부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 사회에서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부르주아는 대중들을 혐오하면서 대중들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밖에 없는 보수정치인들은 대중들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나가수’에 등장하는 가수들 못지않게 청중평가단의 결정에 일희일비한다. 자기 소신을 주장하는 일에 두려움이 없어야할 정치인이 인기를 먹고 사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4·27 재·보궐 선거에서 ‘분당우파들’이 보여준 선택은 더 이상 ‘텃밭’이라는 것이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물론 이런 변화를 야기한 원인은 다른 무엇도 아닌 정치를 억압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경제제일주의였다. ‘1인 1표’라는 민주주의 원칙이 경제주의와 결합한 결과, 계급이라는 수직적 불평등 문제는 개인의 능력이라는 수평적 불평등 문제로 치환되어버린 것이다. 이 교착 상황을 넘어설 묘책은 무엇일까? “나는 정치인이다”라는 주장이 새삼 필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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