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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퀘이커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3) /기독교사상2011년8월

by 마리산인1324 2013. 2. 14.

<기독교사상> 2011년 8월

http://www.clsk.org/gisang/gisang_view.asp?tab=sasang_theologry&flag=01&board_idx=681&page=4&block=0&theologry_sec=&set_year=2013&set_month=01&view_year=2011&view_month=08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3)
침묵의 영성

좋은 사람, 퀘이커
내가 경험한 퀘이커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좋은 사람’ ‘좋은 크리스천’이란 것이다. 영국 우드부룩과 미국 펜들힐에서 만나고 사귄 퀘이커들에 대한 인상은 참 괜찮은 사람들이란 것이다. 우선 사람들이 친절하고 이방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알며, 모든 사람을 차별의식 없이 평등하게 대하는 삶의 양식이 몸에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또 사람들이 조용하고 명랑하며 화목하다. 나는 우드부룩에서 지낼 때, 펜들힐에서 지낼 때, 이 사람들이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고 다투는 일을 본적이 없다. 사람이 함께 모여 살면 갈등은 어느 곳이든 생기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그런 갈등들을 조용하게 해결하는 법을 체득하고 사는 것 같았다. 나도 퀘이커들을 좋은 사람들이라 느꼈지만 그들 스스로도 좋은 사람이라 불리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듯이 보였다. 크리스천 영성이 추구하는 목표가 다양하게 있겠지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점에서 퀘이커는 연구해 볼 만한 사람들이다.


펜들힐에서 퀘이커 생활 공동체를 경험하면서 나는 퀘이커들의 영적 신앙 문화가 공동체 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는 것을 보았다. 간혹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 퀘이커들은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하기보다는 조용하게 침묵하는 시간을 갖는다. 갈등에 직접 연관된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모두 침묵을 한다. 갈등하는 어느 한편에 서서 주장을 하기보다는 조용히 침묵하는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갈등으로 상처받은 사람을 분별하고 그를 위해 기도한다. 나는 이런 퀘이커의 영성을 침묵의 영성이라 본다. 이 침묵의 영성은 퀘이커들을 좋은 사람의 모습으로 살게하고, 좋은 크리스천의 신앙과 실천의 모습을 낳은 영적 원천이다. 퀘이커는 조용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신앙을 추구하고 또 그에 일치하는 삶의 문화를 만들고 있다.


나는 퀘이커를 특별한 사람들로 선전하고 싶지 않다. 다만 퀘이커의 신앙과 삶의 이야기 가운데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내다보는 참고자료가 발견될 수 있기를 바란다. 퀘이커 영성에서 우리 자신의 신앙적 성찰을 위한 자료를 찾고자 하는 것이니 되도록 좋은 점을 주목하여 볼 것이다. 이 점에 대한 이해가 있기를 기대한다.

영적 크리스천들
퀘이커들의 내적 영성 추구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분명하게 규명할 점이 있다. 우리는 퀘이커를 뭔가 별종의 종교인이라고 보려고 하는데, 퀘이커는 기독교 신앙 전통을 따르는 크리스천이다. 이 사람들이 퀘이커라고 불리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퀘이커 운동이 처음 일어나던 17세기 중반, 영국에는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란 의미의 씨커(seeker)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조지 폭스(George Fox)라는 젊은이가 그리스도의 진리가 어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들 마음속에 있음을 깨닫고, 이에 동조하는 씨커들과 함께 돌아다니기를 멈추고 앉아 내면의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는 구도행(求道行)을 했다. 이들의 영적 체험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모든 이들이 일치한 표현은 ‘빛’의 체험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빛으로 증언한 요한복음을 즐겨 읽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스스로 ‘빛의 자녀들’(Children of Light)이라 불렀다. 이들은 특정한 예배 처소를 갖지 못하고 농가의 창고 같은 곳에 둥그렇게 모여앉아 조용히 뭔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취했는데, 그 가운데 영적 체험을 하는 이들은 몸을 부르르 떨곤 했다. 이런 모습이 소문을 타고 퍼져서 일반대중들은 이들을 ‘떠는 자들’(Quaker)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재판정에서 판사가 이들을 가리켜 ‘너희를 떠는 자들이라 부르는데 맞느냐’고 묻는 말에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 그후 공식 호칭이 되었다. 조롱하고 폄하하여 부른 호칭인데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크리스천 교회가 장로교, 감리교, 가톨릭, 정교회 등 여러 가지 교회 이름으로 불리듯이 이들 퀘이커의 정식 명칭은 종교 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이다. 이들은 서로 친구(friend)라고 부른다. 다양한 교파교회들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통칭하여 크리스천이라 부르듯이 이들 퀘이커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천에 속하며, 특별히 ‘내면의 그리스도’(Christ Within)를 신봉하는 영적인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역사적 출현 배경을 간단히 들여다보았지만, 신앙적 정체성을 좀더 이해하자면 이들의 신앙적 족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영국의 종교개혁운동이었던 청교도 혁명(Purian Revolution)에 가담한 사람들이며, 이 가운데 영적으로 철저한 개혁을 추구했던 영적 급진 청교도(radical spiritual puritan)였다. 이들 초기 선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 영성을 회복할 때까지 이 세상에서 영구 영적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영적 신앙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족보를 이어 온 선조들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영적 체험 가운데 확신했던 신비주의자들과 영성가들이라 할 수 있다. 퀘이커는 영적으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영성 가문이라 하겠다. 종교 개혁 교회들 가운데 제도화의 길을 간 교회들이 주류 개신교회를 형성했다면, 퀘이커는 영적 영구 혁명을 추구하는 소수자 전통, 종교 사학자 트뢸치(Ernst Troeltch)의 분류에 따른다면, 소종파 교회(Sectarian type of church) 전통에 속한다. 트뢸치는 소종파 교회의 영적 신앙이 제도화된 주류 교회의 신앙을 갱신하고 존속시키는 영적 원천으로 기여해 왔음을 높게 평가했다. 나는 트뢸치의 역사적 통찰을 우리 한국교회가 귀담아 듣고, 겸손한 마음으로 소종파 교회의 영적 신앙 전통으로부터 갱신의 길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기도: 빛 가운데 붙잡아 주는 일
퀘이커들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빛 가운데 붙잡는다’(hold in the light)고 표현한다. 상처받은 사람들, 고통을 겪는 사람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빛 가운데 붙잡고 있음으로서 사망(the deepest darkness)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이 사람들은 기도라고 한다. 나는 종종 펜들힐 아침예배시간 끝 무렵에 행해지는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 시간에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 혹은 세계에서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빛 가운데 붙잡아 주기를 요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퀘이커는 고난 받는 사람들에 민감하다. 우리는 ‘통성기도’라 하여 소리 내어 호소하는 기도를 드리는데 익숙하다면, 이 사람들은 조용히 빛 가운데 고난 받는 사람을 붙잡고 있다. 모든 기도가 영적인 것이지만, 나는 퀘이커들의 빛의 기도에서 내적으로 깊은 영성을 느낀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무엇이 퀘이커들을 인간적인 면모로 보아도 좋은 사람, 신앙적으로도 좋은 크리스천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게 하는 것일까? ‘기독교 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란 저런 사람이구나’ 하고 누구나 인정하고 고개가 끄덕여지게 하는 퀘이커의 삶의 모습은 어디에서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내가 경험하고 관찰해 보건데 그것은 이들이 추구하는 내적 영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속으로 파고드는 영성을 추구한다. 외적인 화려함이라든가 치장, 수천억의 초호화 교회건물, 견실한 조직과 교육 훈련방법론은 이들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이들이 관심하는 것은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을 체험하고 그 체험된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고 증거 하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하나님의 성령을 체험함에 있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성령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 이것이 퀘이커들의 영적 체험 신앙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속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어떻게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점에서 퀘이커들이 취한 방법은 침묵이다. 침묵 가운데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 이렇게 조용한 가운데 깊은 내면의 음성을 듣는 영적 체험의 신앙은 이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깊이 있게 만들고, 사려 깊게 하고,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게하고, 진리에 복종하는 삶의 태도를 양육하는 원천이 된다. 침묵 중에 이뤄지는 퀘이커의 영적 체험을 나는 침묵의 영성이라 부른다. 또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수많은 내적 소음과 잡념들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분별하는 퀘이커의 내적 신앙을 나는 성찰적 신앙이라고 본다. 나는 이 침묵의 영성과 성찰적 신앙이 퀘이커를 좋은 사람, 좋은 크리스천으로 만드는 비결이라 본다. 조용하고 소박하면서도 품격이 높은 영성이 느껴지는 것은 침묵의 영성과 성찰적 신앙 때문일 것이다. 영국에서 나는 젊은이들이 퀘이커 모임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식인들이 주로 관심하는 종교가 된다는 것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지만,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영국사회에서 젊은이들이 비록 소수일지언정 퀘이커 예배모임을 찾고 미세하지만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의미 있게 남아있다. 버밍험의 종교신학자 존 힉(John Hick)은 장로교 목사로서 다양한 종교적 여정 끝에 지금은 퀘이커 예배모임에 나가고 있다고 한다. 다원종교 사회에서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영적 체험을 유지하는 넓고도 깊은 신앙을 하는데 퀘이커의 내적 영성 체험의 신앙으로부터 한국교회가 배울 점이 무언가 있다고 본다.

침묵 예배
침묵의 영성은 퀘이커 영성의 주요한 특징이다. 초기 퀘이커들은 조용한 가운데 앉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기다렸다. 침묵 가운데 하나님과의 직접 만남을 구하는 퀘이커 예배는 퀘이커리즘의 정통 예배 양식으로 전해 내려왔고, 오늘날도 영국과 미국 동부 지역 퀘이커들은 아무런 예전도 설교도 찬송도 중보기도 순서도 없이 오직 침묵 가운데서 예배드리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퀘이커 침묵 예배는 다른 기독교회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예배 양식이다.


나는 퀘이커 침묵 예배를 처음 경험했을 때의 낯설고도 특별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1998년 봄, 아일랜드더블린의 평화 에큐메니칼 대학원에서 평화교회로써 퀘이커리즘을 알게된 후, 수소문 끝에 더블린 근교에 있는 퀘이커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일반교회 건물 외형과는 달리 평범한 모습의 회당이었다. 후에 나는 교회(church)라는 말보다 모임 집(meeting house), 주일 예배(worship service)라는 말보다 예배 모임(meeting for worship)이란 말을 퀘이커들은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처음 호기심을 품고 찾아갔던 퀘이커 주일 예배 모임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파격적이고 이상한 것이었다. 오래되어 낡은 예배실 문 앞에서 노인이 말없는 눈빛으로 맞이하면서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예배실 안에는 사각형으로 서로 마주보도록 배열된 긴 나무 의자들에 십여 명의 성인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감고 있고, 어떤 사람은 팔짱을 낀 채, 또 어떤 사람은 턱을 괴고 골똘히 무언가를 사색하는 모습이었다. 예배실은 십자가도 성찬대와 설교대도, 성화도, 피아노도 없이 아주 단순하고 텅 빈 공간에 고요한 정적만이 있었다. 골동품 같은 벽시계가 유일한 물품이요, 시계추 움직이는 소리가 유일한 소리였다. 참으로 처음 접하는 기이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정경이었다. 나는 한쪽 구석 의자에 앉아 예배 시작을 기다렸다. 이제 곧 누군가 나와서 예배시작을 알리고 예전을 인도하겠지 하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침묵만이 계속됐다. 드문드문 사람이 일어나 무언가를 말하고 앉았다. 나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상태로 예배 시작을 기다렸고, 종국에는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마치 잠에서 깨듯이 눈을 뜨고 옆에 사람과 악수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모임 대표가 나와서 광고를 했고, 참석자들은 옆방으로 이동하여 차를 마시며 대화하다가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참 싱거운 예배도 있구나.’ 생각했다. 찬송가도 부르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고, 헌금도 없고, 성가대 찬양도 없고, 아무런 예전이 없이 조용히 앉았다가 일어서서 나온 것이니 싱겁기 그지없게 느껴졌고, 한 시간 내내 들은 것은 벽시계 소리뿐이었으니 우습고 허망했다. 도무지 예배 같지 않았다. 그후로 퀘이커리즘을 박사 논문 주제로 삼아 공부를 하면서 경험한 퀘이커 침묵 예배는 영국과 미국을 막론하고 거의 비슷한 양식임을 알게 되었다. 예배실의 환경, 의자 배치 같은 것이 조금 다를 뿐, 아무런 장식도 없이 단순한 환경에서 조용히 앉아 예배하는 것은 같았다. 퀘이커 침묵 예배를 이해하지 못한 채 처음 참석하는 일반 교회 신자들은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갖는 것 같다. 펜들힐에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미국 장로교인이 퀘이커 침묵 예배에 참석하고 나눈 대화가 유명하다. 그 장로교인은 한 시간 내내 침묵을 하고 일어서는 퀘이커에게 “‘예배’(worship service)는 언제 시작합니까?”라고 물었고, 그 퀘이커는 “예배(worship)은 방금 전까지 여기서 있었고, 봉사(service)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영적 민주주의와 공동체 문화
퀘이커는 침묵 가운데 가만히 넋 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수양을 하는 것도 아니다. 퀘이커의 침묵은 진지하고 활발한 진리 추구와 영적 체험이 일어나는 살아있는 침묵(active silence)이다. 침묵 가운데 퀘이커들은 영적 체험을 하고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삶의 문화를 만들고 있다. 이들은 언성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을 강제로 억압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조용한 가운데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진리를 실천하는 일에 신실하다. 나는 이런 침묵의 영성에 기반한 삶의 실천을 추진하는 퀘이커를 조용한 혁명가라고 본다. 퀘이커가 좋은 사람이요 좋은 크리스천으로 느껴지는 몇 가지 사례를 나의 경험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첫째 퀘이커의 특징은 잘 듣고 듣기를 즐겨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퀘이커들은 다른 사람의 말에도 귀 기우려 잘 듣는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자신과 다른 생각과 믿음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와 마음을 가진다. 퀘이커들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크게 갈등하지 않고, 간혹 의견 충돌이 있어도 언성을 높이고 원수가 될 정도로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는 것은 이렇게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갖기 때문이다.


둘째, 퀘이커의 의사결정 원칙은 만장일치제이다. 퀘이커들은 공동체의 안건을 통과시킬 때는 다수결 원리로 하지 않고 만장일치제로 한다. 퀘이커들은 다수 의견이 진리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소수에게 진리성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진리는 수의 문제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수결 원리로 공동체 입장을 결정하는 것은 난센스(nonsense)이다. 이는 그들 자신이 소수자로서 역사적 경험에서 확인한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함으로서 소수자가 되었고, 또 소수자로서 진리를 추구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퀘이커는 비록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는 경우에도 그 안건을 통과시키지 않는다. 모든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그것(that of God in everyone)이 있으며, 한 사람의 의견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다수의 이름으로 그것은 무시될 수 없다. 나는 퀘이커의 만장일치의 의사 결정 원리를 영적 민주주의(Spiritual Democracy)라고 부른다. 민주주의는 본래 소수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원리이며, 수에 관계없이 개인 한 사람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정신이다. 그것이 어찌하다가 다수결의 원리로 둔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다수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방식이 영적 공동체인 교회 안에까지 파고 들어와 지배하게 된 것은 우리가 깊이 되짚어 봐야 할 점이다. 아마도 시간과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사고방식 때문일 것이다. 교회 회의에서도 끄떡하면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교회 안에 갈등과 분쟁이 그칠 날이 없고, 저속한 협잡 정치가 판을 치고, 편을 가르고 분열한다. 다수결 제도는 영적 공동체로서 교회를 갈등하게 만들고 분열시키는 요인이다. 이런 점에서 퀘이커의 영적 민주주의 원리는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모든 사안이 만장일치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고와 시간이 요구될 것이다. 퀘이커들의 의사결정 과정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퀘이커들은 많은 토론과 대화를 한다. 작은 일이라도 쉽게 하지 않는다. 모든 일을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한다. 공동체의 일치를 가장 중시한다. 긴급한 대응이 요청되는 사안인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뜻이 일치하는 사람들의 협력으로 행동한다. 그 행동에 반대하는 사람도 이것을 공동체의 이름으로 막지 않는다.


셋째, 영적 회의 문화이다. 한국교회 총회라든가 노회 같은 회의에 참석해 보면 고성이 오가고, 심지어 폭력도 일어나는 것이 일반 세속 정치 현장과 다를 바가 없다. 퀘이커 회의는 다르다. 우선 이들은 회의와 예배를 구별하지 않는다. 통상 우리 교회는 예배 후에 회의를 하면서 부지불식간에 회의를 세속적 모임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세속적 욕망의 정치가 판을 친다. 그러나 교회 회의는 세속 정치권의 회의와는 다르다. 이 점에서 퀘이커 회의에서 배울 점이 있다. 퀘이커는 회의를 예배와 같이 생각한다. 회의는 안건을 토론하는 예배 모임이다. 그러므로 토론과 의결은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것이어야 한다. 퀘이커들은 예배에 참석하는 마음으로 회의에 임한다. 이런 영적 회의 문화는 우리 교회가 깊이 주목하고 배워야 할 대목이다. 나는 퀘이커 회의 문화에서 우리 교회가 쉽게 배울 수 있는 두 가지 모습을 소개한다. 하나는 의견이 충돌하여 맞서는 경우 침묵 시간을 갖는 것이다. 퀘이커들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다른 의견을 듣는 태도가 훈련되어 있는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의견 또한 확신 있게 주장하기 때문에 의견이 다른 경우 쉽게 일치에 이르지 못하고 팽팽하게 맞서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퀘이커들은 침묵 시간을 갖는다. 사회자가 모두 함께 침묵할 것을 제안하면, 참석자들은 토론을 중지하고 침묵에 들어간다.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하나님의 진리와 합치되는 것인가를 다시 묻는다. 이것이 침묵하는 주된 이유이다. 침묵은 사람들의 뜨거워진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스스로 냉철하게 다시 돌아보는 실용적 효과도 있다. 그러나 퀘이커들에게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영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침묵을 통하여 자신 의견에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질 수도 있고, 변화를 가질 수도 있으며, 또 제 3의 의견을 가질 수도 있다. 공동체에게 중요한 사안인 경우 몇 차례의 침묵을 갖는 경우도 있다고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에는 결론을 다음 회의로 유보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퀘이커 회의는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또 하나 주목할 모습은 회의를 영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적인 노력이다. 퀘이커들은 영적 회의를 위해 기도자들을 선정하여 회의장 네 모퉁이에 포진시킨다. 사회자가 참석자 가운데 기도자 역할을 해 줄 것을 요청하면 그들은 회의장의 네 모퉁이에 앉아 회의 시간 내내 회의 참석자들을 빛 가운데 붙잡고 기도한다. 사회자가 곤경에 처할 경우에는 사회자를 위해 기도를 한다. 펜들힐에서 나는 퀘이커 연례 모임의 회의를 사회하면서 매우 힘든 가운데서도 뒤에 앉아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회의 기도자들로부터 큰 힘을 얻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회자로서 균형 감각을 않고 사회를 볼 수 있었던 것,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도 신앙인으로서의 태도를 잃지 않고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회의를 영적인 것으로 만들고자하는 퀘이커들의 의지적인 노력의 결실이다. 우리 교회의 회의 문화도 개혁해야 한다. 인간적인 욕망이 지배하는 정치적 회의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지배하는 영적 회의로 바꾸는 일에서 퀘이커들의 영적 회의 문화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지석 l 목사는 영국 우드부록(Woodbrooke) 대학원에서 ‘퀘이커리즘과 함석헌의 평화 사상 비교 연구’로 박사(Ph. D.)학위를 받았다. KNCC,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UNESCO-APEIU 국제이해교육원에서 평화교육가로 일했으며 성공회 대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평화윤리와 교육을 강의하였다. 한국 YMCA 생명평화센터 소장이며 현재 미국 펜들힐에서 연수중이다.

글쓴이 / 정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