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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퀘이커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2) /기독교사상2011년7월

by 마리산인1324 2013. 2. 14.

<기독교사상> 2011년 7월호

http://www.clsk.org/gisang/gisang_view.asp?tab=sasang_theologry&flag=01&board_idx=676&page=5&block=0&theologry_sec=&set_year=2013&set_month=01&view_year=2011&view_month=07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2)
평화의 사람들

 

- 정지석 -

 

역사적 평화교회를 배우자
카리브 해의 섬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열렸던 국제 에큐메니칼 평화회의(International Ecumenical Peace Convocation)에 참석했던 김용복 박사 일행이 귀국 길에 펜들힐을 방문했다. 김문기 목사, 이윤희 간사(한국 YMCA), 그리고 미국에서 박사 논문을 쓰는 황남덕 목사와 <뉴스앤조이> 박지호 기자가 펜들힐을 취재한다면서 동행했다. 전날 뉴욕에서 열렸던 <평화포럼>에 참석하고 뉴욕 빌딩 숲을 벗어나 푸르른 펜들힐 숲 속에 도착하니 모두들 행복한 모습이었다. 이번 자메이카 국제 평화회의에서는 역사적 평화교회의 역할이 돋보였다고 한다. 주제 강연을 한 폴 외스트레쳐(Paul Oestreicher) 박사도 역사적 평화교회에 속한 퀘이커이다. 우리 한국교회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지난 1998년 세계교회협의회가 21세기를 평화의 세기로 만들자는 의지아래 ‘폭력극복 10년’(Decade for Overcoming Nonviolence: DOV)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제안을 한 그룹이 역사적 평화교회들이었다. 이번 자메이카 회의는 이 운동에 대한 종합평가와 함께 향후 방향을 정하는 회의였는데, 역사적 평화교회들이 작은 교회들이지만 평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세계교회의 평화운동과 신학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도해 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도 지난 10년간 ‘폭력극복 10년’ 캠페인에 참여해 왔다. 이번 국제 평화회의를 기점으로 세계교회협의회가 그랬듯이 한국교회협의회도 평화 신학적 배경과 운동 실천론에서 역사적 평화교회들로부터 많은 점을 배우기를 기대한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이번 호에서는 펜들힐에 대해 좀 더 집중적으로 소개하려고 계획을 바꿔 퀘이커 평화이야기를 먼저 쓴다.


퀘이커들은 평화에 대한 신학적 토론을 많이 하기보다는 작든지 크든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데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이 평화 운동을 하는데 있어 사상적 신학적 바탕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들은 토론만 하고 실천은 덜 하는 것 보다는 자신이 믿는 바를 열심히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화의 신앙과 실천은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퀘이커는 평화 신학(Peace Theology)라는 말보다 평화 테스티모니(Peace Testimony)란 말을 사용한다. 테스티모니란 진리로 믿고 확신한 것은 삶에서 반드시 증언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도 퀘이커들의 평화 이야기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내가 직접 참여하고 경험하면서 거기서 내 나름대로 느끼고 깨달은 점들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소개하려 한다. 그리고 퀘이커들이 왜 그렇게 평화를 신앙의 절대 과제로 삼고 평화운동을 열심히 해 왔는가라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소풍 같은 평화시위
2002년 영국에서 공부할 때이다. 당시 영국 토니 블레어 정부는 미국의 부시 정부와 손을 잡고 이라크 공격을 준비 중이었다. UN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던 부시 정부로서는 영국의 협조가 매우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점심시간 학교 식당에서 식사 중인데 한 사람이 일어나 말하기를, 영국 남부의 공군 기지에 이라크를 폭격할 미국 폭격기가 들어오기로 했다면서 그곳에 반대 시위를 간다는 것이었다. 퀘이커 평화 운동을 공부하던 나로서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그곳에 동참했다. 시위하러 가는 사람은 7명, 자동차 두 대로 나눠 탔다. 영국 중부의 버밍험에서 남부 공군기지까지는 두 시간 남짓 되는 거리였다. 어느덧 한적한 시골 길로 접어들더니 공군기지가 나타났고, 차는 정문 초소 맞은 편 길가에 멈췄다. 인적이 드물고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는 아주 한적한 곳이었다. 자동차 두 대가 갑자기 정문 맞은 편 길에 서는 것을 보고 초소병들이 움직였다. 순간 긴장이 감돌았다. 영국 현지인도 아닌 외국인으로서 공부하던 나로서는 이러다가 추방이라도 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가 스쳤다. 퀘이커들은 자동차 트렁크에서 뭔가를 꺼냈다. 접이식 간이 의자와 플랜카드였다. “우리는 이라크 폭격을 반대하는 퀘이커들이다.” 이 플랜카드는 정문을 향해 세운 후 퀘이커들은 간이 의자를 하나씩 들고 빙 둘러앉았다. 그리고는 조용하게 눈을 감고 퀘이커 형식의 침묵 예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눈을 감고 앉았다. 저쪽 건너편 초소에서는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지 한동안 분주한 듯 하더니 점차 조용해 졌다. 서로 조용한 가운데 바람소리와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만이 있었다. 1시간 정도 그렇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퀘이커들은 일어나 서로 악수를 나눈 후 플랜카드를 접어 자동차에 실은 후 그곳을 떠나는 것이었다. 뭔가 일어날 것 같고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지극히 조용하고 마치 소풍이라도 온 듯 편안한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이게 뭔가’라는 의문이 자꾸만 일어났다. 다소 맥 빠지는 이유는 왜 일까? 이렇게 하려고 거기까지 간 것일까? 또 그런 의문의 마음 한편에는 묘한 안도감이 일었다. 사실 처음 기지 앞에 도착해서 철조망과 총을 든 초소병들을 보았을 때 나는 퍽 긴장했었다. 그런데 침묵 가운데 고요히 앉아 있는 동안 긴장은 사라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시골 들판을 가로지르는 바람소리를 즐기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버밍험 우드부룩 학교에 돌아와서도 나는 계속 그날의 평화 시위의 의미를 생각했다. 너무 싱겁게 끝난 거 아닌가라고 느낀 것은 뭔가 충돌과 고함과 몸싸움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예상에서 몸과 마음이 바짝 긴장했던 것인데 예상외로 야외 예배라도 간 것 처럼 조용하고 평화롭게 시위를 하고 왔으니 싱거운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하러 그 먼 길까지 달려갔던 것일까. 무슨 효과가 있었을까. 이 질문은 지금도 내가 갖고 있는 질문이다. 다만 내가 하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 퀘이커들은 미군 폭격기 기지 소식을 듣고, 이것은 반대해야 할 일이라고 확신했고, 그 확신을 실천했다. 이런 방식의 평화 실천을 퀘이커들은 평화 파수꾼(Peace Vigil)이라고 부른다. 진리를 증거하고 지켜본다는 것이다. 대개 악한 일은 은밀한 가운데 아무도 모르게 꾸며진다. 그런데 진리의 빛으로 그것을 지켜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악을 꾸미는 자들에게는 끔찍한 일일 것이다. 그날 시골구석 공군기지 안에서 은밀하게 꾸며지던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폭격 계획은 소수의 퀘이커들에 의해 세상 빛 속에 드러났다. 상상해 보건데 7명의 퀘이커들이 공군기지 정문 앞에서 조용히 둘러 앉아 예배드리는 시간, 아마도 그 기지 안의 많은 눈길은 소수의 무리들에 눈을 떼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이런 즐거운 상상이 그날 공군기지 앞에서 가졌던 퀘이커 평화 실천의 효과요 의미라고 보고 싶다. 뒤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이곳 공군기지 정문 앞에서의 ‘피스 비질’(Peace Vigil)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고, 급기야 한 퀘이커는 공군기지 철조망을 넘어가는 항의 행동을 하여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국가 권력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킨 평화 신앙
퀘이커들은 왜 평화를 그들 신앙의 핵심으로 삼게 되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있을 수 있고, 또 그 설명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나 대다수 퀘이커들이 인정하는 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하면 사람을 해치거나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 마음 속 깊이 존재하는 하나님의 영적 실체인 양심의 소리를 따라 살면 전쟁과 폭력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성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평화이니 이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퀘이커들은 17세기 초기 퀘이커 운동부터 평화주의 신앙을 퀘이커 모임의 영적 원리로 선언했다. 퀘이커들은 개인이 자유로운 영적 체험 신앙을 존중하기 때문에 집단적 교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유일하게 평화신조(Peace Creed)는 집단적 규범이다. 이를 어길 시에는 누구든 퀘이커에서 제명했다. 이 때문에 퀘이커 역사를 보면, 곤혹스러운 경우가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흑인 노예 해방운동에 앞장 섰던 퀘이커들이 노예해방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남북 전쟁 참여를 두고 격론을 벌인 일이라든지,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서 영국 지지파가 아니냐는 비난과 시련을 겪기도 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평화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국가 권력까지 포기했던 사례가 있다. 퀘이커였던 윌리엄 펜(William Penn)은 펜실바니아(Pennsylvania)를 세우고 퀘이커 정신에 따른 정치를 실험했다. 미국 퀘이커 역사에서는 이를 ‘거룩한 실험’(Holy Experiment)라고 부른다. 많은 퀘이커들이 주 정부 관리와 국회의원을 많이 했는데, 펜실바니아 안에서 벌어진 인디언과 프랑스인의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하자 전쟁 상황에서 직간접적으로 기여할 수밖에 없는 공직을 포기하고 만다. 위기를 느낀 영국 퀘이커 본부에서 특사를 파견하여 훗날을 위해서라도 공직을 유지하기를 권고했지만, 많은 퀘이커 정치인 공직자들이 물러났고, 펜실바니아는 퀘이커 정부에서 일반 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후에 정계에서는 퀘이커 공직자들을 물러나게 하려면 종종 전쟁을 이용하면 된다는 이야기들이 나돌았다고 한다. 퀘이커들은 정치권력을 내 던질지언정 평화신앙은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퀘이커들에게 평화 신앙은 국가 권력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었다.

사회 개혁적 평화주의
요즘 우리 사회 안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양심적 병역 거부는 이런 확고한 평화 신앙의 한 표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 집총 거부로 군대 복무를 거부하고 감옥에 가는 것으로 잘 알려진 것인데, 사실 반전 평화운동으로 발전된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퀘이커의 평화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퀘이커 평화 전통은 신앙적인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전쟁과 군대가 사라져야 한다는 평화 운동적 차원을 내포한다. 제 1차 세계 전쟁 당시 전쟁 상황에 들어가 있던 영국 정부는 퀘이커들의 평화 신앙 전통을 존중했고, 신앙 양심에 따른 퀘이커들의 전쟁 참여 거부를 법적으로 인정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양심적 병역거부이다. 미국에서도 영국의 전례를 참고삼아 퀘이커들의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했다. 미국에 있는 역사적 평화교회들인 메노나이트와 브레드린 교회는 퀘이커의 정치적 협상에 힘입어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받게 된다. 퀘이커들은 정치 참여에 적극적이고 영미권에는 퀘이커 정치인들이 꽤 있다. 미국에서는 윌리엄 펜과 동료 퀘이커들이 펜실바니아 정부를 운영했던 경험이 있다.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두 명이 퀘이커 대통령이었고, 1차 세계전쟁 당시 대통령이었던 윌슨은 퀘이커를 신뢰하고 좋아하던 친 퀘이커 대통령이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대중적 불만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퀘이커를 비롯한 역사적 평화교회들이 합법적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윌슨 대통령의 퀘이커에 대한 깊은 신뢰와 친분 관계가 작용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잠시 메노나이트 교회와 퀘이커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같은 역사적 평화교회에 속하지만 메노나이트는 전통적으로 세속사회와 교회 공동체의 분리를 엄격하게 적용했고, 세속과의 거리를 두는 입장을 취했다. 20세기 중반부터 메노나이트들 가운데는 세계 속에 참여하여 활발한 평화운동을 전개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직도 전기를 쓰지 않고 세속 문명과 거리를 둔 채 전통적인 신앙 공동체의 삶을 유지하는 이들도 있다. 펜들힐에서 자동차로 서쪽으로 두 시간 거리에 살고 있는 랭카셔의 아미쉬 마을에 가면 지금도 검은 옷에 남자는 검은 모자, 여자는 하얀 모자를 쓰고 자동차 대신 마차를 타고 다니는 아미쉬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여전히 엄격한 메노나이트 신앙전통을 따르고 세속사회와는 거리를 두고 사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퀘이커는 사회 속에 깊이 참여한다. 이것은 초기 퀘이커들이 영적 종교 개혁 운동과 사회 개혁운동을 동시에 추구했던 전통 때문이다. 사람들은 퀘이커를 아미쉬처럼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갖고 독특한 옷차림을 하고 사는 범상치 않은 사람들로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신앙 배경이나 추구하는 영성은 매우 사회 참여적이고 개혁적이며, 동시에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중시한다. 영적 체험은 있으되 사회적 책임감이 없는 신앙을 퀘이커는 미신 종교라고 잘라 말한다.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퀘이커 평화 신앙을 영국의 평화학자들은 ‘개혁적 평화주의’(reformative pacifism)라고 부른다. 나는 퀘이커의 이런 사회 개혁적 평화 정신이 우리한국교회 평화 운동에 적합한 것이라고 본다.

보통 사람들이 수긍하는 쉽고 상식적인 평화 운동
퀘이커들의 평화 실천을 보면, 기본적으로 신앙적인 바탕을 두고 하는 것이므로 매우 고지식하고 비타협적이고 순교자적인 결단을 요구할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물론 그런 입장을 취하는 퀘이커들도 있으나, 실상은 매우 실용적이고, 대안을 제시하고, 보통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매우 상식적인 평화운동을 한다. 매사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유연하고 쉽게 한다. 하나님의 영을 체험한 사람들의 면모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를 들면 양심적 병역 거부를 대신할 대안적 봉사활동 같은 아이디어도 그런 경우이다. 국가가 전쟁에 들어 간 긴급한 상황에서 “나는 신앙양심상 전쟁에 나갈 수 없다”고 한다면 일반 사람들의 정서상 이해하기 힘든 어처구니없는 것일 수 있다. 영국에서도 그랬다.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하는 퀘이커에 대해 일반 대중들은 분노했고, 퀘이커들과 퀘이커 모임에 돌을 던졌다. 사회 여론은 매국노, 배신자, 겁쟁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퀘이커들은 자기 신념을 고고하게 지키는데 역점을 두지 않았다. 대중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수용하고 이에 납득할만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 못지않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국가와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한 일(good work)을 하기로 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부상자 수송대를 조직하여 폭격 중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병원으로 긴급 후송하는 일이라든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유럽 8개 나라에 나가 전쟁 난민과 시민들을 구호하는 일을 전개한다든지, 전쟁이 돌발한 뒤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영국에 남아있던 독일시민들을 돌보는 일을 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후 독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국에 남아있던 독일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야 했다. 퀘이커들은 이들을 보살폈다. 퀘이커는 영국인이든 독일인이든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믿음에 따라 평등하게 대했다. 이것이 퀘이커 평화 신앙의 요체이다. 영국 퀘이커들의 이런 행동은 독일에도 알려져 독일에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영국인들을 보호 해주는 것으로 응답되었다. 서구의 인도주의 정신의 기초는 기독교 신앙이다. 퀘이커들은 기초에 충실했던 기독교 신앙인이다. 기독교 신앙 진리를 그대로 따르고자 했던 퀘이커들은 적과 친구를 구별하는 세상의 논리를 거부하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했다. 그러므로 퀘이커 평화실천은 특별한 능력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기초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기초에 충실하다는 것이 특별한 일처럼 되어버린 세계에서는 쉬운 일은 아니다. 퀘이커들은 기독교 상식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다.


2차 세계 전쟁 이후 퀘이커는 전쟁 포로수용소에서 구호 활동을 벌였다. 우리 한국 신학계에도 널리 알려지고 영향을 미쳤던 독일 신학자 몰트만은 2차 세계전쟁 당시 전쟁 포로였다. 그는 어느 날 특별한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분명 연합국에서 나온 봉사자들인데, 적국 병사인 자신과 연합국 병사에게 똑같이 대하는 것이었다. 몰트만은 그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퀘이커였다. 몰트만은 적과 아군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사람을 대해주는 이 사람들의 배후에 하나님 신앙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자신 속에 죽어있던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었다고 한다.


지구 공동체에서 전쟁과 분쟁, 재난과 기아가 일어나는 곳에는 거의 반드시 퀘이커들이 들어가 있다고 보아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한국 전쟁 직후에도 미국과 영국 퀘이커들이 군산에 들어와 구호와 의료 봉사 활동을 펼쳤다. 그때 퀘이커 활동에 청년 신학생으로 참여했다가 퀘이커가 된 사람이 이윤구이다. 그는 국제적인 평화 기구들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퀘이커의 도움을 받아 국제연합 아동기금(UNICEF)에서 일했고 한국 적십자사 총재도 했다. 또 한 인물은 현재 길 병원과 가천의대, 경원대 이사장인 이길녀이다. 나는 논문을 쓰는 가운데 한국 전쟁 이후 퀘이커 의료봉사단과 같이 봉사했던 한국인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길녀는 당시 한국에 왔던 미국 퀘이커 의사를 도와 봉사활동을 했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그가 아직도 이런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기억하고 있다면 그녀 역시 마땅히 평화운동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함석헌도 이때 한국에 왔던 퀘이커들을 처음 만나고 교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1962년 예순두 살의 청년할아버지 함석헌은 ‘평화의 종교’ 퀘이커리즘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펜들힐에 와서 가을학기(1962년 9월-12월)동안 머물렀다.

평화의 값어치는 백지 수표
퀘이커들은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을 겪으면서 상당한 각성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평화운동을 전쟁이 일어나면 사후 약방문식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이었으며, 전쟁을 사전에 예방해야 한다는 ‘평화시기 평화운동’(peace movement in peace time)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현대 평화운동의 선구자라는 명성을 얻을 만큼 다양한 평화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가운데 우리 한국교회와 신학계에도 참고가 될 만한 것으로 나는 평화교육 운동을 소개하고 싶다. 이번 자메이카 국제 에큐메니칼 평화회의 주제 강연을 한 외스트레쳐 박사도 강조한 것이지만 전쟁은 인류 사회에서 폐지될 수 있다는 신념을 우리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은 자연질서이고 인간 또한 자연질서의 일부인데, 더욱이 무한한 탐욕의 존재인 인간 사회에서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고 한다. 평화란 불가능한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퀘이커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평화는 가능한 현실이다. 예전 흑인노예 시절 미국에서 사람들은 노예 폐지는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한 이상이라고 믿고 노예해방운동을 펼친 사람들이 있었고 오늘날 노예 제도는 폐지되었다.


평화교육 운동은 평화를 가능한 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된다. 20세기 퀘이커들의 평화교육의 열정은 대단하다. 버밍험에 있는 퀘이커 학교인 우드부룩은 본래 쵸코렛 사업으로 거부가 된 퀘이커 카드베리의 저택이었다. 카드베리는 이 대저택을 퀘이커리즘과 평화의 정신을 교육하는 곳으로 사용해 달라는 유지와 함께 퀘이커 재단에 기부했고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다가 세계 2차 전쟁과 핵무기의 출현을 목격하면서 퀘이커들은 보다 전문적인 평화교육을 기획했고, 영국 북부에 있는 작은 대학인 브래포드 대학에 평화학과를 설치하고 물질적 지원을 했다. 초대 학장 아담 컬(Adam Curle)은 20세기 영국 퀘이커 평화운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우드부록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퀘이커 평화 운동 역사 자료도 그곳으로 옮겨갔다. 본래 브래포드 대학은 지역 광산의 쇠퇴와 함께 쇠잔해 가는 시골대학이었지만 현재는 평화학과로서 명성을 떨치는 대학이 되어있다. 나는 2002년 우드부록에서 영국 평화학자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옥스포드 대학이 평화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학과 신설을 논의 중에 브래포드 대학의 평화학과를 옥스포드에 넘기는 조건으로 백지수표를 제시했으나 브래포드가 거절했다는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이야기의 신빙성이 얼마나 있는지 간에 평화를 불가능한 이상으로 배안시하던 주류 현실주의자들 속에서 평화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인으로 나는 이해했다. 평화는 값으로 환산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가치를 가진 보물이다. 이 보물을 간직한 평화교회들이 우리 한국교회 안에도 많이 등장해야 한다.


정지석 l 목사는 영국 우드부록(Woodbrooke) 대학원에서 ‘퀘이커리즘과 함석헌의 평화 사상 비교 연구’로 박사(Ph. D.)학위를 받았다. KNCC,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UNESCO-APEIU 국제이해교육원에서 평화교육가로 일했으며 성공회 대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평화윤리와 교육을 강의하였다. 한국 YMCA 생명평화센터 소장이며 현재 미국 펜들힐에서 연수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