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2011년 9월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4) |
오래된 새길… 결국 다시 사람인가? |
- 정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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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들힐에서 만난 사람들-
퀘이커 영성 평화학교인 펜들힐(Pendle Hill)을 떠나면서 펜들힐에서 만났던 많은 퀘이커 친구들을 기억하게 된다. 퀘이커 영성은 결국 퀘이커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와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종교든 세속사회든 마찬가지이다. 나 역시 이번에 펜들힐에 와서 지내면서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의 삶을 뒤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새로이 그려보곤 했다. 펜들힐에서 만난 퀘이커 친구들은 참 평범하면서도 특별하다. 그 가운데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들이 있다. 펜들힐 80주년 기념 강연에 왔던 파커 팔머, 재즈 피아노 치는 평화 운동가 조지 라키, 펜들힐 아침 침묵 예배에 들어와 작은 소동을 일으켰던 꼬마 매튜, 그리고 매일 아침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영적 청중’, 펜들힐의 퀘이커 친구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결국, 사람이 희망인가
펜들힐 80주년 기념강연으로 파커 팔머가 왔다. 펜들힐 학장을 했고, 많은 미국 퀘이커들에게 존경을 받는 퀘이커이다. 1974년 처음 학생으로 왔고, 그 후에는 선생과 학장으로 지내면서 펜들힐과 인연을 맺었고, 펜들힐과 인연을 가진 이래 그는 감리교인에서 퀘이커로 이동했다. 사회학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로서, 7권의 책과 많은 글들을 쓴 저자로서, 영적 훈련과 민주주의 시민교육을 하는 공동체의 선생이자 리더로서 그는 현재 71살의 나이가 된 사람이다. 그는 오늘 많은 청중들 앞에서 자신의 펜들힐 경험을 이야기했다. 이곳에서 만났던 중국 친구와의 이야기, 펜들힐 원장이었던 더글라스 스티어와의 만남과 그로인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게 된 이야기(더글라스 스티어는 함석헌 선생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데 기여한 퀘이커이다), 그리고 낯설었던 퀘이커리즘과 문화, 공동체의 삶을 재미있게 이야기 했다. 그 가운데 나의 가슴에 남은 이야기 몇 가지를 기억해 본다.
‘숨겨진 커리큘럼’(A Hidden Curriculum):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니 표면으로 드러난 일들에서보다 안 보이는데서 더욱 자신을 이끌었던 교육이 있었음을 깨달았는데 그는 이것을 ‘숨겨진 커리큘럼’(A hidden curriculum)이라 불렀다. 그의 지난 인생 가운데 펜들힐에서의 삶도 숨겨진 커리큘럼의 과정이었다. 누구에게나 그 인생 안에는 숨겨진 커리큘럼이 작동하고 있으니 어느 곳, 어느 상황에 있든지 자신을 실현하는 길을 찾아라, 문은 언제나 열려있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 인생 안에 작동하는 숨겨진 커리큘럼! 참 좋은 표현이다. 나도 종종 나의 삶 가운데 이런 일들을 깨달을 때마다 하나님의 섭리 혹은 ‘안 보이시는 그분의 손길’이라 불렀는데, 팔머는 이 삶의 비밀을 숨겨진 커리큘럼이라 부른다.
팔머는 의미 있는 삶은 계속해서 살아있는 존재로 되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평범한 말인 듯하지만 이제는 노년기에 접어든 그에게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말이다. 늙어감이 허무와 죽음의 공포로 채워져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로 넘치고 살아있는 존재감으로 채우며 살아가는 비결은 무엇인가? 우리 인생 속에 숨겨진 커리큘럼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일, 이것이 팔머가 발견하고 권면하는 의미 있는 삶의 길이다.
공동체(Community): 공동체는 무엇인가? 팔머는 세 가지 설명으로 공동체와 펜들힐의 의미를 밝혀준다. 첫째, 공동체는 ‘끊임없이 계속 실천하는 용서’라고 팔머는 말한다. 공동체는 사람이 떠나면 다시 다음 사람이 그 자리에 오는 곳이며, 그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은 용서라는 것이다. 공동체는 용서가 일어나는 자리이며, 용서는 공동체를 존재케 하는 영적인 힘이다. 펜들힐 80년 공동체의 역사적 의미를 이렇게 간결하고도 깊이 있게 표현해 주는 설명이 또 있을까 싶다. 매우 사실적이고 생활적인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찾아오고 또 떠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생각해본다. 사실 지구 공동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닌가. 한 세대가 떠나면 다음 세대가 태어나서(찾아와서) 살고 또 떠나고 찾아오는 곳 그곳이 지구 공동체이다. 우리는 크게 지구 공동체 안에 살며, 작게는 일터와 가족 공동체 안에서 산다. 이 공동체를 존재케 하는 내적 힘은 용서이다. 계속 용서하는 곳이 우리가 사는 공동체이다.
둘째,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만난다. 만남이 일어나는 곳이 공동체이다. 사람들은 만남을 통해 또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난다. 존재를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만남이다. 퀘이커는 그 만남의 중심에 예배 모임(meeting for worship)이 있다고 믿는다. 팔머는 퀘이커 예배 모임에서 자신이 정돈되고 다듬어짐을 경험했는데, 마치 목공소의 대패가 거친 나무를 다듬듯이, 예배 모임에서 자신이 다듬어졌다고 고백한다. 공동체의 중심은 예배의 만남이다. 셋째, 팔머는 안전한 공동체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세상은 위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불안함이 지배한다. 이런 곳에서 사람들은 안심하고 깊은 영성을 체험하며 의미 있는 배움을 지속해 갈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팔머는 펜들힐의 세상을 향한 공동체적 의미를 강조한다. 오늘 같은 불안함이 지배하는 시대에 세계 도처에 펜들힐 같은 공동체가 많이 생겨나길 기대한다.
신실한 태도(Faithful rather than Affective): 감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려는 태도보다는 충실하게 대하는 태도가 좋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팔머는 말한다. 그가 일흔 살을 넘어오면서 깨달은 삶의 진리이다. 신실한 마음과 태도는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고, 사람들 사이의 비극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길이다.
강연 후 몇 가지 질의응답이 오고갔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질문은 21세기 위기 상황에 있는 세계 속에서 퀘이커 영성이 기여할 바 선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거대질문이었다. 그러나 현대 퀘이커들, 그리고 퀘이커리즘의 장점에 기대를 거는 사람에게는 매우 관심을 끄는 질문이다. 팔머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긴 시간을 할애했다. 그만큼 대답하기 곤란한, 커다란 질문이기 때문이리라. 그의 대답을 요약하자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영성’과 ‘삶의 태도를 지속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안전한 장소로서 펜들힐 같은 공동체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는 불안정한 세상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작지만 꼭 필요한 영성으로서 퀘이커리즘과 펜들힐의 가치를 강조했다. 퀘이커 영성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양육하는 영성이어야 한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국 희망을 사람에게 두자는 것이라는 그의 진심을 느꼈다. 팔머는 언제나 영적 추구는 어둠 속에서 시작하느니 만큼 위기라고 여겨지는 때에 영적 여행을 시작하자고 말한다. 영적 여행이라 하면 절망과 무의미함과 이기심으로부터 참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는 거대담론을 일상의 피부에 와 닿는 일에서부터 답변을 구하는 화법을 구사했다. 시시콜콜한 생활 이야기를 중심으로 삼는 여성들의 대화법이랄까? (그래서 여자들의 수다는 언제나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다. 반면에 거대담론을 하는 남자들은 술 없이는 대화가 안 되며, 정치 이야기로 흘러가 꼭 싸우곤 한다)
팔머는 자신의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를 하면서, 청중의 공감을 얻었다. 그는 최근 퀘이커 청년 모임에서 경험한 일을 이야기했다. 청년들은 함께 모였을 때, 노래 부르고, 일하고, 시를 읽으면서 토론도 하더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청년운동 시절 우리가 노래 부르고, 토론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참 암울했던 시절인데 노래를 부르면서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다시 노래 부르자. 희망의 공동체는 노래 부르는 곳이다.
팔머는 자신 안에서부터 갱신되는 경험을 줄곧 이야기했다. 사회 변혁운동은 자기 자신의 내적 갱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결국 그 거대한 질문에 대한 팔머의 대답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결국 사람인가’라는 새삼스런 화두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람이 희망이다. 그러면 사람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람에서 시작한다면 그 사람 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안에서부터 새로운 힘과 성찰과 생각과 신념이 나오는 길, 새로운 종교의 일이며, 새로운 영성이 요청되는 이유이다. 퀘이커리즘이 추구하는 영성이다. 새로운 영적 갱신운동으로부터 사회 변혁으로 나아가는 길, 이것은 오래 전에 예수가 걸었던 길이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걸어온 길이다. 지금 예수의 제자들이 따를 삶의 길이다. 오래된 새길… 결국 다시 사람인가?
재즈 피아노 치는 평화운동가
미국 퀘이커 평화학교인 펜들힐의 밤은 노래 부르는 프로그램이 인기다. 그림도 그리고 도자기도 만드는 아트 스튜디오의 프로그램도 흥미롭고, 도서관에서 요가 하는 프로그램이 같은 시간에 열렸는데, 압도적으로 노래 부르는 프로그램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나도 그곳에 갔다. 내가 그곳에 간 이유는 노래 부르고 싶은 이유보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재즈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같이 부르는 조지 라키(George Lakey)라는 사람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지 라키는 20세기 후반 미국 퀘이커 비폭력 평화운동의 전설 같은 인물이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1960년대 베트남 반전 평화운동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 인권 운동에 참여했고, 1970년대 초반부터는 비폭력 평화운동 실천론을 펜들힐에서 가르쳤다. 어느 날 조지 라키는 펜들힐 학생들과 함께 필라델피아 시내 한복판에서 ‘비폭력 운동론’ 현장 실습을 했다. 비폭력 운동을 선전하는 조지 라키에게 한 시민이 다가와 물었다. “강도가 들어와 네 가족을 유린하는데도 너는 비폭력 할거냐?” 젊은 선생 조지 라키는 당황했고 답변하지 못했다. 풀이 죽어 펜들힐로 돌아온 학생들과 조지 라키는 당시 펜들힐의 명예 학장으로 머물고 있던 하워드 브린톤에게 물었다. “그런 경우에는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하워드 브린턴의 대답은 간단했다. “뭘 어쩌느냐. 비폭력 한다면 같이 죽을 각오를 해야지.” 하워드 브린톤은 20세기 미국 퀘이커 성자로 존경받으며, 함석헌이 펜들힐에서 퀘이커리즘을 공부할 때 선생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던 나는 조지 라키가 재즈 피아노를 친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평생을 비폭력 평화 운동의 외길을 살아 온 여든 살이 넘은 평화 운동가가 재즈 피아노를 치며 노래 부른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약간 흥분했다. 제목도 선정적이다 - “재즈 피아노를 치는 조지 라키와 노래 부르는 밤.” 비폭력 운동가라면 간디처럼 뭔가 자기희생과 금욕 같은 엄숙하고 비장한 삶의 무게를 연상시키는 것인데, 재즈 피아노라니…
추측해 보건대 라키는 재즈 피아노를 치듯이 비폭력 운동을 즐겁게 하려고 했던 사람이던지, 아니면 비폭력 운동의 긴장감을 해소하려고 재즈 피아노를 배웠을 것이다. 9·11 테러이후 미국 사회, 특히 대학 사회에서 평화에 대한 관심은 부쩍 높아졌다. 평화학과를 설치한 대학들이 많이 늘어났고 평화 연구자들도 꽤 많아졌다. 그러나 조지 라키 같은 실천 경험을 겸비한 베테랑은 드물다. 퀘이커가 설립한 미국 동부 명문대학인 스와스모어 대학은 그를 명예 교수로 초빙하여 비폭력 운동론을 대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하고 있다. 수년 전에는 우리나라에도 방문하여 비폭력 갈등 해결론 세미나를 이끌기도 했다. 펜들힐은 라키를 특별 강사로 초청하여 비폭력 평화 연속 강좌를 열었다.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여 시골 농부 같은 조지 라키의 비폭력 평화 운동론 강의는 구수하고 재미있다.
펜들힐 피아노가 있는 반(Barn)의 작은 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흥겹게 노래 부르고 있었다. 악보가 없이 가사만 적인 작은 팜플렛 노래 책자를 들고 흥겹게 노래 부르는데, 다들 익숙하게 잘 부르는 것이 애창곡들인 것 같았다. 가사내용이 젊은 처녀의 사랑이야기, 만남과 이별 이야기, 서정적인 동요까지 다양했다. 아마도 우리네 식으로 하면 “앞마을에 순이 뒷마을 개똥이 ~~~” 하면서 청소년 시절부터 통키타 치며 즐겨 부르던 노래들 일 것이다. 영국에서 온 마가렛 할머니는 얼굴빛이 빨갛게 물들어 소녀처럼 노래에 취했다. 대다수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이 사람들은 20세기 격동기를 살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그 어려움들을 이겨냈을 것이다. 그날을 추억하면서, 그 젊은 날의 뜨거웠던 꿈과 이상을 그리워하면서, 다시 뜨거워지는 청춘을 느끼는가 보다. 흥에 겨워 부르는 노래에는 재즈만한 것이 없다. 제멋대로지만 모두가 잘 어울린다. 그러고 보니 재즈 피아노가 조지 라키와 잘 어울린다. 융통성 있게 사람들과 잘 어울려 흥겨운 것이 조지 라키가 평생 신봉한 퀘이커리즘과 잘 어울려 보인다. 재즈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조지 라키가 부럽고 행복해 보였다. 재즈 피아노를 치며 얼굴빛이 빨갛게 물든 그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꿈과 이상을 노래한다. 이제는 80이 넘은 할아버지가 재즈 피아노를 치면서 청년이 되어있다. 평생 청년인 그가 참으로 부러운 밤이다.
침묵 예배의 꼬마 침입자 매튜
매튜, 세 살 배기 꼬마가 있다. 고집도 세고, 제 뜻대로 안되면 소리치며 울기도 잘하는 개구쟁이이다. 아빠가 미국인, 엄마가 러시아인으로 10년 전 펜들힐에 학생으로 와서 만나 결혼했다. 꼬마는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해서인지, 펜들힐을 쓸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헤이 존, 헤이 마가렛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척을 한다. 존과 마가렛은 영국에서 교수로 은퇴하고 이곳에 와 있는 70세 할아버지, 할머니이다.
오늘 아침 침묵 예배에 이 꼬마가 들어왔다. 대개 어린 꼬마는 예배 모임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오늘은 부모와 함께 들어온 모양이다. 꼬마 매튜가 들어오면서 조용했던 침묵 예배 흐름에 작은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꼬마의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에서부터, 칭얼대는 소리, 그리고 자기 멋대로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예배실에 파동 쳤다. 잠시, 꼬마도 조용한 침묵예배 분위기를 눈치 챘는데 조용하더니, 다시 ‘똑깍 똑깍…’ 혀 소리를 냈다. 간헐적으로 소리를 내는 것 보다 규칙적인 소리가 침묵을 어지럽힌다. 그러나 누구도 그 꼬마를 제지하거나 내 보내지 않는다. 침묵예배가 한 꼬마의 또깍거리는 입소리로 헝클어지려는 순간, 꼬마 곁에 앉아있던 존 할아버지가 일어났다. 그리고 증언을 시작했다.
“제 옆의 이 작은 목사(this small minister)는 펜들힐을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을 부르면서 반가워합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인 것 같지만, 아마도 펜들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장 잘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종종 이 꼬마에게 영어책을 읽어주고 무언가를 가르쳐준다고 하지만, 사실 이 꼬마로부터 배울 때가 많습니다.”
짧은 증언을 하고 존 할아버지는 앉았다. 꼬마의 혀 소리는 그 후에도 ‘또각 또각…’ 계속되었지만 그 소리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침묵 예배의 흐름도 다시 제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위트와 깨달음의 진리를 담은 증언은 전체의 마음속에 조용한 변화를 만들었다. 불쾌한 마음을 유쾌하게, 내쫓고 싶은 마음을 포용하는 마음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영적 깨우침을 주는 소리로 들리게 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적 힘을 가진 증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적 청중, 퀘이커들
펜들힐의 아침은 매일 30분간의 침묵예배로 시작된다. 모든 사람들이 침묵 가운데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 침묵 가운데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린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로서, 자기 자신(자아)의 소리가 아니라 내면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소리이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를 갈망하는 퀘이커들을 나는 영적 청중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펜들힐의 영적 청중들은 매일 아침 조용한 침묵 가운데 앉아있다. 이들은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전심으로 귀 기울인다.
침묵 가운데 거룩한 음성을 듣는 예배 생활은 일상생활에서도 잘 듣는 삶의 문화로 이어진다. 이렇게 잘 듣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건성건성 듣거나, 자기 생각에 맞춰 듣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의 말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들으려고 한다. 말 속에 들어있는 말을 듣는다. 이렇게 깊이 듣는 능력은 침묵 예배에서 체득된 것이다. 또 잘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잘 말하도록 도와준다. 잘 들으니 잘 말하게 되는 것이고 자기 능력 이상으로 말을 잘한다. 잘 듣는 사람은 잘 듣는 일로 말하고, 자신의 말이 잘 들리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잘 말하게 된다. 이것이 이심전심의 대화이다. 이것은 퀘이커 침묵 예배에서 하나님과 나 자신, 그리고 증언하는 이와 공동체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 대화이다.
나는 영적 청중으로서 퀘이커들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청중들을 상상해 본다. 과연 한국교회에는 매 주일 선포되는 설교에 이토록 전심으로 귀 기울이는 영적 청중들이 얼마나 있는가? 나는 한국교회 설교의 위기는 청중의 위기와 동전의 양면으로 서로 맞물려 있다고 본다. 재미있는 만담식의 설교가 많은 청중들에게 인기는 있을지언정 영적인 체험은 빈곤하다. 설교의 위기는 설교의 테크닉 개발에서 극복될 수 없고, 목사의 우렁찬 음성과 언변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의 깊은 영적 추구에서 위기극복의 길이 있을 것이지만, 다른 한편 영적 청중들이 많은 곳에 좋은 설교가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청중들은 영적 청중이 될 수 있을까. 퀘이커 침묵예배 문화에서 나는 그 실마리를 본다. 침묵의 영성은 잘 듣는 영성을 길러준다. 하나님의 소리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별하면서 들을 수 있는 내적 훈련의 장소가 침묵이다. 한국 개신교는 말씀의 종교라는 이유 아래 이 영적 공간을 너무 쉽게 소홀히 해왔다. 한국교회는 영적인 소리를 깊이 듣는 침묵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침묵하는 일은 처음에는 단조롭고 지루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험을 잘 이겨내면 영적 청중이 탄생한다. 내가 퀘이커들을 보고 느낀 점이다.
정지석 l 목사는 영국 우드부록(Woodbrooke) 대학원에서 ‘퀘이커리즘과 함석헌의 평화 사상 비교 연구’로 박사(Ph. D.)학위를 받았다. KNCC,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UNESCO-APEIU 국제이해교육원에서 평화교육가로 일했으며 성공회 대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평화윤리와 교육을 강의하였다. 한국 YMCA 생명평화센터 소장이며 현재 미국 펜들힐에서 연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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