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사상 이야기/퀘이커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5) /기독교사상2011년10월

by 마리산인1324 2013. 2. 14.

<기독교사상> 2011년 10월

http://www.clsk.org/gisang/gisang_view.asp?tab=sasang_theologry&flag=01&board_idx=689&page=4&block=0&theologry_sec=&set_year=2013&set_month=01&view_year=2011&view_month=10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5)
예언자의 학교

 

- 정지석 -

 

10년 전 펜들힐에서 1년을 지내고 귀국하면서 나는 우리나라에도 펜들힐과 같은 공동체 학교를 세워보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학위는 주지 않지만 비전을 심어주고, 심신이 지친 사람들에게 좋은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를 주는 종교적 영성에 기반한 공동체 학교 모델로서 펜들힐 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다시 찾아 간 펜들힐에 머물면서 나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펜들힐의 고민과 어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곳이든지 간에 좋은 점만 보고서는 다 보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번 펜들힐 체류 기간은 좋은 점뿐만 아니라 문제점들도 경험할 수 있어서 앞으로 펜들힐과 같은 공동체를 시도해보고자 하는 나에게는 좋은 시간이었다.


미국 퀘이커들은 펜들힐을 실험학교라고 말한다. 펜들힐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퀘이커리즘을 가르쳤고, 함석헌의 퀘이커리즘 선생이었으며, 펜들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깊은 영향을 끼친 하워드 브린톤은 “펜들힐은 현존하는 어떤 모델과도 맞지 않은 고유한 실험학교”라고 말했다. 그 실험 정신은 지금도 계속 진행중이다. 나는 펜들힐의 실험이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새로운 영성, 교육, 공동체 운동을 벌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되리라고 믿으면서 펜들힐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그 실험 정신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영성 공동체 학교가 80년을 이어오기까지 어떤 요인이 중요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내가 느끼고 감동받은 점들을 중심으로 소개해 보려한다. 결국 오늘의 펜들힐이 있기까지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람이다.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그것을 빛나게 한다는 것을 나는 펜들힐 이야기를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사람들의 비전과 영성 이야기를 소개할 것이다. 아울러 펜들힐이란 구체적인 사례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현대 퀘이커리즘을 이해하고, 20세기 현대 퀘이커들의 주요 관심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펜들힐의 교육 실험
펜들힐(Pendle Hill)은 영국 북부에 있는 산의 이름인데, 1652년 조지 폭스(George Fox)라는 스물 여 덟 살의 젊은이가 이 산을 넘어오던 중 새로운 비전(계시)을 받고 퀘이커 운동의 창시자가 된 곳으로 퀘이커들에게는 의미 있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펜들힐은 퀘이커들에게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비전의 언덕(Hill of Vision)을 의미한다. 미국 퀘이커들이 새로운 교육 공동체 실험을 하면서 펜들힐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 미국 펜들힐에 가면 평평한 땅 뿐이어서 처음 찾은 사람은 어디 언덕(hill)이 있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래서 상징적으로나마 펜들힐 공동체 중앙에 조그마한 언덕을 만들어 놓기도 했지만, 펜들힐이란 이름은 비전과 교육적 목표를 담은 이름이다.


펜들힐 실험학교는 1930년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 월링포드 숲 속에 있는 농가를 구입해 시작되었다. 큰 곡물 창고를 가진 농가였는데 세월이 가면서 주변 땅과 집들을 사들이고 새 건물을 지어 지금은 15개의 건물에 2만 여 평 되는 땅으로 커져있다. 10년 전에는 넓은 숲길을 산책하면서 본 넓은 정원과 집들이 좋게만 보였는데, 이번에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렇게 외형적으로 커진 것이 오히려 건물 유지와 조경 관리비가 많이 들어 심각한 경제적 부담 요인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부담에도 불구하고, 펜들힐이 80년을 지내오면서 외적인 성장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 퀘이커들이 펜들힐에 많은 기부를 했으며 이것은 펜들힐이 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증거이다. 나는 펜들힐이 이렇게 인정받게 된 많은 요인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두 가지 점에 주목한다.


하나는 펜들힐을 처음 설립하는데 헌신했던 창립자들의 실험 정신이며, 또 다른 하나는 펜들힐의 초대 원장으로 기여했던 헨리 호드킨의 비전이다. 이 사람들의 열정과 비전이 펜들힐이란 새로운 형태의 교육적, 공동체적 실험을 20세기 미국 퀘이커 역사 속에 구체화 시킨 것이라고 나는 본다.


십여 명의 작은 무리였던 창립자들은 퀘이커리즘의 갱신과 예언자 정신의 회복을 위한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다가 펜들힐과 같은 영성과 공동체 경험을 할 수 있는 새로운 학교를 구상했다. 이미 많은 퀘이커 대학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학에서는 할 수 없는 일종의 성인 퀘이커들을 위한 예언자적 영성 학교와 같은 것이다. 이들은 이런 구상을 가다듬고 그 실현을 위해 수년간 끈질기게 토론하고 준비했다.


이들은 펜들힐을 구상하면서 실험적 학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실험하는 목표는 세 가지이다. 첫째, 연합과 일치의 실험이다. 19세기 이래 크게 둘로 분열된 미국 퀘이커들은 서로 만나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것을 펜들힐과 같은 학교 형태로 시도했다. 갈라진 양쪽의 퀘이커들은 공동의 교육 공간인 펜들힐에 와서 함께 퀘이커리즘을 배우고 토론하고 대화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분열에서 연합으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길로 그들은 펜들힐이라는 공동체 학교를 만든 것이다. 부분적인 성과도 있었다. 펜들힐이 시작한지 20년이 되는 1950년 둘로 갈라져 있던 필라델피아 퀘이커들의 재결합을 이룬 것이다. 지금도 펜들힐은 미국 전역의 퀘이커들이 모여 퀘이커리즘을 공부하고 서로 다른 신앙 체험을 대화하며 교제를 나누는 일치와 만남의 교육 공동체로서 역할하고 있다.


둘째,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퀘이커 성인 지도력을 길러내는 교육적 실험이다. 영국과 미국의 진보적 퀘이커들은 매년 여름학교를 열어 시대적 메시지를 찾아내고 교육하는 지도력 형성 작업을 해 오곤 했다. 그러나 단기간의 프로그램은 시대적 사회 변화를 읽어내고 젊은 퀘이커들로 하여금 사회의 변혁자(social change-agents)로 나가게 하는데 부족함이 있었다. 퀘이커들은 개인의 영적 확신과 사회적 실천을 일치함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기에 좀더 긴 시간의 숙련 기간이 요청되었다. 이런 각성이 1년 과정의 교육과 영적 체험 프로그램을 가진 펜들힐 학교로 실현되었다. 무엇이든지 진실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실천해 본다는 퀘이커의 실험정신은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이들이 배울 점이다. 비판과 절망과 허무주의는 실험 정신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임을 나는 퀘이커의 펜들힐 실험에서 다시 깨닫는다. 펜들힐은 미국의 퀘이커 지도력뿐 아니라 전 세계의 새로운 지도력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이 되어 있다.


셋째, 영적 수련 공동체로서의 실험이다. 세상 속에서 신앙의 진리를 지키며 사는 삶은 참으로 어렵다. 펜들힐은 이런 삶을 격려하고, 이런 삶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에게 잠시 물러나 쉬면서 영적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대학 졸업 후 사회로 들어가면서 신앙과 현실의 괴리감 사이에서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펜들힐은 영적 갱신과 소명감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펜들힐은 학문성보다는 영성과 공동체에 기반한 배움을 추구한다. 펜들힐의 교육 과정도 독특하다. 선생과 학생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배운다.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대화하는 공동 교육이다. 이 점에서 펜들힐 교육은 실험적이다. 펜들힐 학교에는 시험이나 학점이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삶과 관계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펜들힐이 전 세계에 흩어져 일하고 있는 퀘이커 평화 운동가들을 위한 쉼과 영적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장소로서 처음 구상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화운동은 단시간에 눈에 띄는 성과를 보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평화운동가들은 몇 년이 지나면 심신이 소진되고 소명감도 희미해진다. 1차 세계전쟁 이후 적극적인 평화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퀘이커로서는 이런 상황이 위기감으로 다가왔고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평화 운동가들이 현장에서 물러나와 심신을 쉬면서 소명감을 회복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과 프로그램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펜들힐 공동체 실험 학교가 출발하게 된 첫 동기였다고 나는 들었다. 그런데 펜들힐 역사를 쓰고 있는 퀘이커 학자 덕 귄(Doug Gwyn)이 쓴 펜들힐 교육 실험을 읽으면서 펜들힐이 구상된 배경에 일치와 영성과 지도력 양성이란 목표가 있었음을 보다 상세히 알게 되었다. 나는 펜들힐의 공동체적 교육적 실험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시민사회에서도 매우 필요한 것이라 믿는다. 우리 주변에는 정의, 평화, 생명 운동을 하면서 심신이 지쳐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육체적 피로와 함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소진되어 있다. 쉬고 재충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장에서 떠나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 참으로 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트레스일 수 있다. 그러므로 잘 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공간과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여러 사람들이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모색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펜들힐의 실험은 여러 가지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 준다고 나는 믿는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오늘날 거의 절망 수준에 와 있는 한국 개신교회 일치와 연합 운동이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일치 운동을 전개하고자 한다면 펜들힐의 실험은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시대적 예언자를 길러내고 일치 운동을 이끌어가는 지도력을 길러내는 공동체형 에큐메니칼 학교가 출현하기를 기대한다.

퀘이커 기부정신
펜들힐을 설립함에서 영감의 참고 자료가 된 것은 영국의 우드부룩과 간디의 아쉬람과 수도원 전통과 진보적 교육운동이다. 나는 이 가운데 영국의 우드부룩에서 지낸 적이 있다. 사실 이곳은 일종의 퀘이커 대학원 대학교(Graduate School) 같은 곳으로서 나는 이곳에 앉아 박사 과정을 공부했다. 우드부룩은 영국 버밍험에 있다. 우드부룩에서 나의 잊지 못할 기억은 멋진 정원과 도서관이다. 인공적인 조경보다는 자연미를 살린 정원은 영국에서도 유명한 정원이다. 이 정원에서 여름마다 청년 퀘이커들이 모여 맨발로 걸으며 침묵하고 기도하며 대화하는 모습을 나는 부럽게 바라보곤 했다. 도서관에는 퀘이커 운동 초기부터의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퀘이커들은 모든 회의를 기록하여 남겨 놓는 것을 중시해서 기록서기(recording clerk)라는 직책을 따로 두고 있다. 모임의 모든 활동과 결의 사항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은 후세대를 위한 것이다. 우드부룩 도서관에서 퀘이커들의 상세한 역사 기록을 본 함석헌은 ‘기록하는 종교는 미래를 준비하는 종교’라면서 감동했다.


우드부룩에서 내가 감동한 점은 우드부룩의 탄생 배경이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젊은 퀘이커들을 중심으로 초기 퀘이커리즘의 고유성을 되찾자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기존 제도 기독교로의 합류 경향을 보이던 퀘이커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적 운동이었다. 이들은 초기 퀘이커리즘을 공부하고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공감했던 사람이 카드베리였다. 그는 초콜릿 사업으로 성공한 퀘이커였다. 지금도 카드베리 초콜릿은 영국의 대표적인 초콜릿이다. 그는 자신의 유산을 퀘이커 르네상스 운동에 기부했고, 커다란 저택을 퀘이커리즘 교육과 퀘이커 평화 운동을 증진시키는 장소로 써달라면서 기부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우드부룩 대학원이다. 퀘이커들은 전통적으로 유산을 자손에게 상속하지 않고 퀘이커 재단에 기부하여 퀘이커 운동에 기여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왔다. 우드부룩 학교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재 퀘이커들의 기부정신은 예전만 못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왕성하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수십 만 명에 불과한 아주 작은 소종파 교회지만 퀘이커는 이런 기부금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매우 광범위한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공적 기부정신은 기독교 신앙의 표현이다. 살아있는 동안 은총으로 주어진 재산을 잘 관리하고 사용하다가 죽을 때는 다시 하나님의 재산으로 돌리는, 다시 말하면 이웃 사랑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하는 것은 신앙인의 미덕이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재산을 제 욕심껏 쓰고, 죽을 때에도 남은 재산을 자기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반성할 점이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퀘이커들의 공적 기부 정신으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 펜들힐 역시 오늘날까지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퀘이커들의 기부가 큰 바탕이 되었다.

호드킨의 네 가지 비전
호드킨은 펜들힐의 첫번째 지도자(The First Director)이다. 영국 퀘이커로서 미국 퀘이커 학교의 초대 학장으로 초빙되었다는 것을 보면 그의 인물됨이 남다른 데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더군다나 펜들힐은 미국 퀘이커들이 세계 전쟁(1차)을 경험하고 보다 전문적인 평화운동가를 위한 학교를 구상했고, 이를 위해 수년 간의 토론과 기도와 재정을 모아 고심 끝에 설립한 학교였던 만큼 어떤 모습의 학교로 만들어 가야 할지 기대와 소망이 컸을 것이다. 호드킨의 이력을 보면 펜들힐 설립을 주도했던 미국 퀘이커 지도자들이 왜 미국 퀘이커가 아닌 영국 퀘이커임에도 불구하고 호드킨을 초대 학장으로 초빙했는지 이해할 만하다. 호드킨은 기독학생운동 출신으로 중국에서 퀘이커 선교사로서 25년간 일했고, 귀국해서는 기독교인들의 국제 평화주의 단체인 국제 화해 동지회(International Fellowship Of Reconciliation: IFOR)에서 일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퀘이커였다. 젊은 대학생 시절부터 기독교 사회 운동에 참여한 경험과 중국에서의 선교 활동, 그리고 국제 평화 단체의 지도자요 신학자이기도 한 호드킨이야 말로 펜들힐의 정신을 구축하고 실현하는데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다. 나는 이런 인물을 국적에 관계없이 선택하고 초빙했던 미국 퀘이커 지도자들의 순수한 열정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호드킨이 초빙 받았던 당시 나이는 50대 중반, 지금도 펜들힐 예배실 벽에는 이마가 시원하고 명석해 보이는 그의 사진이 걸려있다. 아쉽게도 그는 정체모를 질병에 걸려 펜들힐에 온지 3년 만에 죽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펜들힐의 네 가지 비전은 80년의 역사를 지속해 오면서 지금도 여전히 펜들힐의 기본 정신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펜들힐의 학장인 로리(Lauri)는 매학기 신입생들에게 호드킨의 펜들힐의 비전을 들려준다.

첫째 비전. 편안한 안식처(A Haven of Rest)
펜들힐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이다. 이것이 펜들힐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쉬는 것을 비전을 삼는 학교라니 참 놀랍다. 미국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청교도 정신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이고, 그래서 열심히,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러기에 쉰다는 말은 경쟁의 패배자나 실업자의 말이다.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있다. 열심히 일하고 남는 시간을 쉬는 것이지, 아주 본격적으로 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욕먹을 일이고, 우리 표현대로 팔자 좋은 이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80여 년 전인 1930년은 대공황이 일어나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였다. 그런 때에 휴식을 비전으로 삼았다? 무슨 의미로 이런 비전을 내세운 것일까?
호드킨이 말하는 쉼은 그저 아무 일도 안하고 무의도식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러한 쉼은 쉼이 아니라 스트레스이다. 호드킨이 공동체 학교의 비전으로 내세운 쉼은 마음의 쉼이다. 분주했던 마음,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온 마음의 피로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에서 피곤해진 마음, 가까이 있는 사람에서부터 손이 안 닿는 구조악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분노, 그리고 좌절로 망가진 마음을 쉬는 것이다. 호드킨은 특히 평화운동가들에게 필요한 것이 쉼이란 것을 알았던 사람이다. 아마도 그 자신이 절실하게 체험했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의 쉼이란 마음의 평화이다. 이 마음의 쉼에서 새로운 회복이 생기고, 쉼 없이 지속되는 마음의 피로와 분노와 좌절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호드킨은 마음이 쉬는 것을 영혼의 깊은 침묵(the deep quiet of the spirit)이라 표현한다. 영혼의 깊은 침묵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의 영적 토양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새 힘과 희망을 길어 올린다.
크리스천 퀘이커인 호드킨은 이런 마음의 쉼과 영적 깊음의 전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참되게 만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신앙인에게 이것은 궁극적 삶의 목적이다. 간디도 비폭력 운동을 하는 궁극적 목적을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기 위한 것이라 말했다. 즉, 자기실현이다. 펜들힐이 이런 곳이 되기를 호드킨은 원했다. Haven of Rest! 거친 풍랑을 헤치고 항해를 마친 배가 정박하여 쉬듯이 세상에서 심신이 지친 사람들, 특별히 신앙의 선한 싸움을 하다가 피곤해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영적 재충전을 하며 쉴 수 있는 곳이 오늘 우리 한국 땅에도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둘째 비전. 예언자 학교(A School for the Prophets)
호드킨은 말한다. “나의 학교 꿈은 흥미로운 다양한 주제들을 백화점처럼 다양하게 펼쳐놓고 가르치는 학교보다는 꼭 필요한 몇 개 주제를 잘 선정해 철저하게 하는 것이다.” 흥미롭거나 실용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는 지금이나 그 당시에나 많이 있다. 취미나 교양을 쌓는 강좌들도 많이 있다. 호드킨은 펜들힐이 그런 지식을 가르치는 또 하나의 학교가 되길 원치 않았다. 새로운 학교(New School)의 비전, 그것은 예언자 학교의 비전이었다. 예언자의 학교는 사회개혁의 소명감을 갖고 살고자 하는 예언자를 길러내는 학교, 사회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육성하는 학교이다. 펜들힐은 세상의 잘 먹고, 출세하기 위해 다니는 학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학교의 비전을 품은 것이다. 구약성서에도 보면 예언자들의 학교가 있었다. 예언자들이 예언자를 양육하는 학교이다.
나는 호드킨의 예언자 학교의 비전을 읽으면서 20세기 시대 상황에서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예언자들이 매년 줄을 이어 졸업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학비를 받을 것인가? 호드킨은 No라고 말한다. 적어도 예언자들은 학비 문제로 그 영감과 신념이 축소되지 않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예언자의 학교에 등록하는 학생은 오직 자신의 예언자적 영감을 강화시키는 데만 전력을 다하도록 재정적 뒷받침을 해 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비전을 세웠다. 그래서 견실한 장학금을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자 했다. 지금도 펜들힐은 여러 종류의 장학금이 있다. 나 역시 윌머 영 장학금(Wilmer Young Scholarship)을 받고 펜들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펜들힐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기여한 윌머 영이라는 퀘이커가 평화 연구자나 평화 운동가에게 주라고 기부한 재산으로 만들어진 장학금이다. 펜들힐 설립 초기 예언자들을 위한 학교(A School for the Prophet)라는 비전을 세웠던 호드킨이 남겨준 빛나는 유산이다.

셋째 비전. 사상의 실험실(Laboratory of Ideas)
펜들힐은 모든 사상이 자유로이 토론되고, 안전하게 보호받는 곳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의 실천과 적용을 실험하는 자리이다. 이 비전은 지금도 펜들힐에서 실현되고 있다. 펜들힐은 퀘이커들의 학교이지만 비 퀘이커 기독교인들과 타 종교인들, 그리고 비종교인들까지 아무런 차별 없이 받아들인다. 종교적 신앙과 사상의 차이 때문에 차별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일은 펜들힐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퀘이커들은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영적 평등주의자이다. 이것은 퀘이커들로 하여금 사상과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영적 원천이다. 호드킨은 펜들힐이 모든 사상과 종교들이 관용되고, 새로운 사상을 실험해 보는 사상의 실험실이 되기를 바랐다. 나는 호드킨의 이와 같은 비전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실현하는 것이며 한국교회가 깊이 반성하며 배워야 할 점이라 믿는다.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 신앙과 남북한 이데올로기 갈등의 한편에 서 있는 한국교회가 다원화 시대와 통일 시대를 이끌어 나갈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개신교 안에도 사상의 실험실과 같은 교육 공간이 하루속히 만들어 지기를 희망한다.

넷째 비전. 협력의 동지애(Fellowship of Cooperation)
호드킨은 공동체적 배움 과정을 중시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과 영을 다함께 수련하는 길로서 노동과 공부와 예배라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생활 원칙과 수련 전통을 참고로 삼았다. 펜들힐은 공동체의 삶과 배움을 매일 체험하고 실천하는 곳이다. 함께 일하고, 공부하고, 예배드리는 삶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고, 소명감을 새로이 가다듬고,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일을 찾았다. 호드킨의 이 비전은 지금도 펜들힐에서 실현되고 있다. 매주 수요일 오전에는 펜들힐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학장에서부터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학생들이 모두 공동 노동 시간을 갖는다. 전체 사람들이 공동 노동을 통해 몸으로 일하면서 공동체적 섬김과 봉사, 그리고 일하면서 개인들 사이에 공동체적 사귐과 교제를 체험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개인이면서 공동체와 하나되는 체험을 한다. 개인과 공동체의 일치감, 공동체에 대한 헌신성은 펜들힐 교육 실험의 주요 목표이다.


펜들힐은 한국 사회와 교회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1962년 함석헌이 처음 펜들힐에서 가을학기를 지낸 후 두 차례 더 그곳을 찾아갔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한국의 몇 안 되는 퀘이커들이 드문드문 펜들힐을 찾아가다가, 최근 10여년 사이에는 종교에 관계없이 매년 비교적 많은 한국 사람들이 펜들힐을 다녀와서 비공식적이지만 펜들힐 동문회 모임도 간간히 모이곤 한다. 그 가운데 펜들힐에 머물던 한명숙 선생(전 총리)의 권유로 펜들힐에서 안식년을 보낸 신인령 교수(전 이대 총장)는 우리나라에도 펜들힐 같은 곳이 꼭 있어야 한다고 기대하는 펜들힐 애호가이다. 두 사람 모두 퀘이커가 아니고, 퀘이커리즘을 공부하기 위해 펜들힐을 찾아 간 것도 아니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을 매우 즐겁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펜들힐이 참으로 좋은 곳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적 영성에 기초를 두면서도 다른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개방된, 시대적 예언자들을 길러내는 펜들힐 같은 공동체 예언자 학교가 우리 땅에도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정지석 l 목사는 영국 우드부록(Woodbrooke) 대학원에서 ‘퀘이커리즘과 함석헌의 평화 사상 비교 연구’로 박사(Ph. D.)학위를 받았다. KNCC,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UNESCO-APEIU 국제이해교육원에서 평화교육가로 일했으며 성공회 대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평화윤리와 교육을 강의하였다. 한국 YMCA 생명평화센터 소장이며 현재 미국 펜들힐에서 연수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