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2011년 12월호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7) |
퀘이커리즘의 다섯 가지 영성 원리(2) |
- 정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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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성의 영성(Spirituality of Honesty)
정직성을 기독교의 중요한 실천 영성으로 고집하는 이들이 있다. 누구나 당연히 지켜야 하는 미덕으로 칭송되면서도, 지키지 않아도 별 문제없고, 지키면 오히려 바보 취급 받거나 어울리기 불편한 사람으로 만드는 이 현실 배반의 모순 가치인 정직성(Honesty)을 신앙 실천의 핵심 영성으로 삼고 고집스럽게 지켜 온 이들은 퀘이커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퀘이커들은 정직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무엇이 정직하고 정직하지 못한 것인가 판단기준이 제각각이겠지만, 내가 보기에 퀘이커들은 앞뒤가 같은 사람들이며,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며, 실천하지 못할 일은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점에서 정직한 신앙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퀘이커들이 말하는 정직의 영성은 자기 성실성, 즉 자기양심에 비추어 진실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직은 진리를 사는 것과 같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삶의 길이며, 영적인 삶의 필수품이 된다. 그러므로 퀘이커들은 정직함의 영성을 실천 영성 원리로 삼고 중시한다.
퀘이커들은 정직성을 말로 강조하지 않으며, 퀘이커 모임이나 학교에서 정직을 신조처럼 외우거나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펜들힐에서 함께 생활하며 경험한 이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소박하면서도 정직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우선 이 사람들은 과장된 몸짓을 한다거나 지키지 않을 거짓 약속 같은 것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친절하지만 예스(YES)와 노(NO)가 비교적 분명하다. 이들은 도움을 청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 판단되면 ‘NO’ 한다. 자신이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해주겠다는 식으로 함부로 약속을 하지 않는다. 임기응변식의 정치적 수사는 퀘이커식 삶에서는 통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은 못하지만 그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나 방법을 찾는데 성심을 다한다. 자신이 YES한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지고 그 일을 수행한다.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수행한다. 물론 모든 퀘이커들이 다 그렇다고 확신할 수 없으나, 대체로 내가 경험한 퀘이커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정직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판단되는 가치이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내적 윤리적 가치이다. 이 점에서 퀘이커들은 높은 수준의 정직성을 유지하며 살도록 요구된다. 퀘이커들은 개인적으로 영적 존재로서의 삶의 모범을 지키고자 하였고, 정직을 어떤 외적 교리나 신앙 규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지키는 개인의 자율적인 삶의 기준으로 삼고 지킨다.
퀘이커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권모술수를 쓴다거나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런 삶을 오랜 역사 동안 살아온 덕택에 지금 미국과 영국 사회에서 퀘이커들은 믿을만한 사람들, 정직한 사람들로 평판이 높다. 예를 들면 미국과 영국에는 퀘이커로서 정치인들이 여럿 있다. 이들은 종종 정파적 이해보다 자신의 신앙 양심을 따르는 길을 좇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당파성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판에서도 퀘이커 정치인들은 양심에 따른 영성을 따른다. 예를 들면 평화로비 활동은 퀘이커 정치인들의 좋은 평판이 잘 활용되는 사례이다. 퀘이커 평화 운동가들은 정치인들을 상대로 평화의 정보를 제시하거나 갈등 당사국의 정치인들을 초청하여 중재하는 평화로비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퀘이커 정치인들은 정파를 넘어서 동료 정치인들을 퀘이커 평화 로비스트들에게 소개하고 초청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서로 갈등하는 정파나 국가들의 정치인들이나 외교관들이 퀘이커들의 초청에 호응하는 것은 퀘이커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정직한 영성과 신뢰 때문이다. 퀘이커들은 정직한 사람들이며, 해를 미치지 않고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라는 신뢰감이 두루 퍼져 있다. 세계 1차 전쟁 시기 미국 대통령 윌슨은 퀘이커의 정직한 영성을 평소 높게 평가하던 사람이었다. 신앙 양심에 따라 군대 참여를 거부하는 일이 일어나자 일반 사람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신앙양심을 핑계 대는 것이라고 퀘이커들을 비난하는데 열을 올렸지만 윌슨 대통령은 퀘이커들의 신앙 양심의 진실성을 믿었고, 퀘이커들의 양심적 병역거부와 전쟁 참여 거부를 존중하는 법령을 제정, 실시했다. 이것은 평소 기독교인으로서 신실하게 신앙양심을 지켜 온 데 대한 평가를 받은 것이다.
퀘이커들은 정치 영역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정치판이라는 곳은 워낙 정파적 이해와 충돌이 강하게 일어나는 곳이며, 권모술수가 지배하기 때문에 정직한 영성을 지키면서 활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퀘이커 정치인들 가운데 정치판에서 빠져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퀘이커들이 정치와 퀘이커 영성이 양립할 수 없음을 느낄 때 영적 삶을 추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미국의 퀘이커 가문 출신의 대통령으로 닉슨이 있다. 그러나 닉슨은 대통령 시절 정직하지 못한 스캔들로 심판을 받았다. 내가 펜들힐에서 만난 미국 퀘이커들은 닉슨을 퀘이커라고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퀘이커로서 대통령이 나온 것은 자랑스러울 법한 일인데도 그들은 닉슨 대통령이 퀘이커가 아니라는 점을 극구 강조했다.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닉슨은 공개석상에서도 자신을 퀘이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여기에 대해 미국 퀘이커들은 말한다. “그 어머니가 퀘이커일 뿐 닉슨은 퀘이커가 아니라고.”
법정 맹세 거부
퀘이커들이 신앙생활의 참고서로 삼는 좬신앙과 실천좭(Faith and Practice)에는 정직한 삶의 길을 세 가지로 권면한다. 첫째, ‘너는 네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일에서 진실하고 정직한가?’ 둘째, ‘너는 사업거래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단체생활에서 진실하고 성실한 태도를 지키는가?’ 셋째, ‘너는 책임감과 분별력을 가지고 너에게 맡겨진 돈과 정보를 사용하는가?’
퀘이커에게 정직함의 영성이란 말하고 행하는 모든 일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삶을 의미한다. 어떻게 사람이 모든 일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말하고 행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나올법한데도 퀘이커들은 그런 질문에 무관심 한 듯하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그런 진실과 정직의 삶을 내가 지금 살고 있느냐에 집중한다. 정직은 누가 강요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참된 신앙은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복종이다. 이 점에서 정직과 신앙은 본질상 같다. 내가 정직한 삶을 사는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퀘이커리즘의 표현으로 한다면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것’ 또는 ‘하나님의 내적 빛’(Inner Light of God)이 나의 진실성을 판단한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진실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빛(Inner Light)이 있기 때문이다. 속의 빛은 양심이라고도 한다. 이런 퀘이커리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퀘이커 정직의 영성은 부단한 자아 성찰을 통해 꽃이 피고 결실을 맺는 것이다. 부족하든지 또는 넘쳐나든지 퀘이커들은 모든 일에 정직하고 진실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삶의 길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퀘이커들은 자기 자신의 내적 진실의 진정성을 시험하고 왜곡할 수 있는 외부 형식과 제도에 대해서 비타협적인 저항을 했다. 이것은 퀘이커들을 고집 센 신앙인으로 보이게끔 한 요인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고 진실하다고 확신하면 퀘이커들은 그 무엇으로도 그것을 테스트 받거나 판단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법정 진실 증언에 대한 거부이다.
퀘이커들은 법정에서 서약을 맹세하지 않는다. 법정에서 증인은 성서 위에 손을 얹고 진실을 증언할 것을 맹세한다. 퀘이커들은 이런 진실증언 맹세를 거부했다. 성경에는 ‘맹세하지 말라’(마 5: 34)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나라들에서 맹세 증언을 한다.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성서에 손을 얹고 진실 증언 맹세를 하게 한다. 인간은 진실하지 못한 존재이므로 정의의 법정 앞에서만큼은 진실을 증언하도록 성서의 권위를 빌어 진실 맹세 서약을 하도록 하는 것일까. 그러나 퀘이커들은 이런 진실 증언 맹세 서약을 거부했다. 무슨 이유일까? 성서의 맹세 서약 금지 가르침을 준수하기 위해서인가? 퀘이커들이 맹세 서약을 거부하는 이유는 좀더 근본적이다.
첫째, 진실 맹세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지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다. 자기 자신의 진실의 진정성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인위적인 제도나 규칙이 이것을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퀘이커들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 처해서든지 진실하게 말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진실한 삶의 항시성, 보편성에 대한 퀘이커들의 실천적 믿음이다. 그러므로 진실 맹세란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아니며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만약 법정에서처럼 특별한 경우에만 정직하게 진실을 말할 것을 맹세하도록 한다면, 다른 보통 때에는 부정직하게 말하고 진실함 없이 행동하면서 살아도 된다는 말이 되니, 진실 맹세란 오히려 사람을 부정직하게 만드는 나쁜 형식이요 제도라는 것이다. 법정에서 특별히 성경에 손을 얹고 진실 증언을 맹세하는 것을 퀘이커들이 거부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사람이 정직하게 살고 진실을 말하는 것은 맹세 이전에 당연이 해야 하는 삶의 기본 도리요, 신앙인의 최소 의무라는 것이 퀘이커들의 생각이며 신념이다. 어떤 사람들은 퀘이커들이 법정 맹세 서약 거부를 성서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믿고 실천하는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들은 퀘이커들이 매우 고지식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신앙주의자처럼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이다. 퀘이커들이 법정 진실 증언 맹세를 거부하는 것은 사람은 언제나 정직한 증언을 하고 진실한 행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믿음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실의 진정성은 자기 자신에 속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만 하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것이 퀘이커 정직함의 영성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퀘이커 상인 이야기
퀘이커는 다른 사람과의 삶의 관계 속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삶을 살기를 권면한다. 진실하고 정직한 삶은 다른 사람의 삶, 상대방의 반응, 사회적 조건과 환경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사회 논리는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고 하듯이 상호적 원리가 지배한다. 그러나 퀘이커 정직의 영성은 진리를 실천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므로 상호성을 초월한다. 퀘이커들은 다른 사람 혹은 단체나 기관과 관계하면서 상대방의 반응 여부에 따라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직성에 기반 하여 변함없이 진실한 태도를 지키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찌하든지 그것에 관계없이 나 자신 진실을 지키는 것이 퀘이커들이 추구하는 영적 삶이다. 퀘이커들은 근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상대하는 사람이 거짓을 행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 안에 진리의 씨앗이 있음을 믿으며 진실과 정직함으로 대한다는 것이 퀘이커들이 취하는 영적 삶의 태도이다. 만약 퀘이커들이 일반 세속 사회와 떨어져서 같은 신앙의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간다면 정직함의 영성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비교적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퀘이커들은 일반 세속 사회 속에 들어와 같이 산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영성을 포기하거나 타협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 살아감에 있어 많은 곤경과 불편함, 오해와 편견과 핍박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선한 본성에 기반한 것이므로 동조자들이 늘어났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도 했다.
세속 사회 속에서 일반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도 정직한 삶의 영성을 추구했던 초기 퀘이커들의 이야기 가운데 퀘이커 상인 이야기가 있다. 초기 퀘이커들은 사회적 불순분자로 낙인 찍힌 탓에 공직을 비롯하여 일반 사회 직장을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농업이나 자영업, 장사를 주로 했다. 농업과는 달리 장사는 물건 값을 흥정하면서 이윤을 남기는 일이기 때문에 정직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매우 애매하고 쉽지 않은 일이었다. 퀘이커들은 장사 때문에 신앙을 포기할 수 없고, 장사도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것이 오늘날 널리 통용되게 된 정찰제 가격 표시이다. 퀘이커 상인들은 정직한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장사로 이윤을 얻는 길로서 물건에 자신이 양심껏 받을 값을 정해 붙였다. 퀘이커 상점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는 일은 사라졌다. 정액제 상거래의 기원이 퀘이커라는 속설은 이렇게 하여 생겨났다. 그 후로 퀘이커들은 장사를 해도 정직하게 하는 것으로 소문이 났고, 물건의 질이나 가격에서 속이지 않는 것으로 신뢰를 얻었다. 퀘이커 상인들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나는 최근에도 미국 퀘이커 도시라 불리는 필라델피아에서 퀘이커 이름을 붙인 가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퀘이커들이 운영하는 곳은 드물다고 한다. 일반 장사꾼들이 퀘이커의 명성을 이용하는 것이라 한다. 퀘이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상인들이 퀘이커 이름을 쓰는 것에 대해 필라델피아 퀘이커들은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정직은 이름과 같은 외적 형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자기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름을 가져다 사용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나는 퀘이커들의 여유와 관용이 느껴졌다.
재산을 선용하는 퀘이커
현대 퀘이커들은 돈과 정보를 책임성과 분별력을 갖고 사용하는 일을 정직한 삶과 영성의 주요한 요인으로 삼는다. 가난했던 초기 퀘이커들은 정직하게 돈을 벌려고 노력했고, 절약하며 살았다. 그런 까닭에 점차 퀘이커들은 재산을 축적하게 되었다. 퀘이커들은 재산을 정직하게 사용하는 길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퀘이커들에게 정직한 재산 사용이란 하나님의 뜻에 걸 맞는 청지기로서의 재산 사용을 의미한다. 퀘이커들은 재산을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고 선한 일에 쓰도록 기부하는 전통을 만들어왔다. 그래서 적은 수에 지나지 않은 종파이지만 퀘이커들은 많은 교육기관들과 복지 기관들을 세웠고 지금도 세계 분쟁 지역에서 평화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나는 영국 버밍험에 있는 우드부룩이라는 퀘이커 학교에서 지내면서 퀘이커들이 재산을 기부하는 이야기들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감명 깊은 이야기들 가운데 우드부룩과 카드베리 이야기는 지금도 유명하게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퀘이커 카드베리는 쵸코렛 사업으로 거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살던 집을 통째로 퀘이커 후진 양성과 평화 교육을 위해 기부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우드부룩 학교이다. 그는 버밍험 대학의 부지도 기부하였고, 지금도 그가 남겨놓은 카드베리 재단은 장학 사업과 가난한 사람을 돕는 복지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이렇게 돈을 잘 사용하는 것은 퀘이커 정직의 영성을 실천하는 중요한 덕목이다. 카드베리는 돈보다 사람을 중히 여겼다. 자신이 운영하던 쵸코렛 공장 노동자들을 단순히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에서 보지 않고 한 사람의 인간이요 하나님의 평등한 자녀로 대하면서 주택과 주거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영국 중부의 공업 도시인 버밍험의 근교에 지금도 나무들로 푸르른 샐리옥(Selly-Oak)이란 지역이 있다. 퀘이커 우드부룩 대학원과 버밍험 대학, 그리고 영국 성공회와 개혁교회, 감리교 등의 연합 신학대학원이 자리하고 있다. 샐리옥 마을 옆에는 카드베리 쵸코렛 공장과 공원과 멋진 주택들이 있다. 봄빌(Bournville)이란 마을인데 푸른 공원과 나무들이 무성하여 중산층 마을이다. 이 마을이 카드베리가 쵸코렛 노동자들을 위해 조성한 곳이다. 카드베리는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실천에 옮겼다. 봄빌 마을은 오늘날도 영국 버밍험의 가장 살기 좋은 중산층 마을 중 하나로 손꼽힌다. 나는 카드베리를 생각할 때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윤 추구를 기업의 최대 목적으로 삼아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 사업자들 중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비교해 본다. 카드베리와 일반 사업가들과 다름없는 기독교인 사업가와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카드베리는 신앙 양심을 지키고자 노력하면서 사업을 했다. 신앙 양심을 지키는 것과 포기하고 사는 것 그것이 차이일 것이다. 이 단순한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 퀘이커리즘은 정직의 영성을 중시한다. 정직의 영성은 신앙 양심을 현실 삶에서 지키는 영성이다. 퀘이커들은 삶에서 실천되지 않는 신앙은 거짓 의식이요, 미신이라고 믿는다.
정직성은 신앙 진리의 기본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길이다. 그런데 이런 신앙의 길을 믿고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할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이 아니겠냐고 정통신학은 강변한다. 그렇다면 밥 먹듯이 거짓말하고 회개하기를 반복하면서 평생을 그렇게 사는 것이 ‘정통’ 기독교인의 신앙이요 삶이어야 한단 말인가? 아마도 퀘이커들은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faith)이 신뢰받지 못하게 된 데에는 이렇게 정통하지 못한 ‘정통’ 신학들의 변명에 그 책임이 있다고… 정통신학은 가공되지 않은 신앙 진리를 실천하는 일은 세속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정하고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신앙들로 가공했다. 그런데 그런 가공된 신앙과 신학을 실천하면서 도달한 오늘의 교회와 사회 현실은 어떠한가. 퀘이커의 영성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면 하고 불가능하면 하지 않는 ‘현실적’ 신앙을 거부한다. 퀘이커 영성은 그 길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분별하는데 집중한다. 그리고 진리라고 확신한 길은 우직스럽게 따라 살고자 한다. 정직의 영성은 그런 퀘이커식 삶과 신앙을 보여준다.
정직은 신앙인의 기본적인 영성이다. 아주 상식적인 이 말이 특별하게 들리는 것은 오늘 우리 기독교 신앙이 비상식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퀘이커 정직의 영성은 권모술수와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 삶과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저항의 영성이다. 정직한 삶은 신앙인의 미덕임에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기독교인들에게는 아주 오래된 진리처럼 색이 바라서 낯설은 삶의 모습 같은 느낌이 든다.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믿고 구원받는 종교적 주술처럼 되어버린 탓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본래 영성을 세상 논리와 타협하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온 퀘이커들의 영적 삶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기성 기독교인들에게 성찰할만한 자료들을 제공한다. 오늘 우리 교회와 기독교인은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퀘이커 정직의 영성은 불신화된 신앙을 신뢰받는 신앙으로 전환하는 길을 보여준다. 정직성은 신앙 진리의 기본이다. 믿는 바를 실천하고 실천하지 못할 것은 믿는다고 말하지 말자. 이렇게 간단명료한 진리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퀘이커의 정직의 영성이다.
정지석 l 목사는 영국 우드부록(Woodbrooke) 대학원에서 ‘퀘이커리즘과 함석헌의 평화 사상 비교 연구’로 박사(Ph. D.)학위를 받았다. KNCC,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UNESCO-APEIU 국제이해교육원에서 평화교육가로 일했으며 성공회 대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평화윤리와 교육을 강의하였다. 한국 YMCA 생명평화센터 소장이며 현재 미국 펜들힐에서 연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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