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2012년 2월호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9) |
화해자와 예언자 |
퀘이커 평화 영성
20세기 들어와 퀘이커들의 평화운동은 화해자와 예언자의 면모를 갖는다. 20세기는 현대 평화운동이 일어난 세기이다. 현대 평화운동의 주동 세력인 퀘이커는 다양한 평화운동 방법들을 시도하고 발전시켰는데, 그것들을 요약하면 화해자와 예언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모습은 서로 상치된다.
화해자는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만든다. 그러므로 되도록 중립적인 위치에 서야 하며 자신은 싸움에 휘말려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이에 반해 예언자는 평화를 위협하는 권력자를 비판하고 저항한다. 그러므로 그 자신 싸움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평화를 위해 권력자와의 갈등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독재자에 맞서 싸우는 함석헌을 가리켜 ‘싸우는 평화주의자’라고 부른 것이 이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퀘이커 평화운동가(Quaker Peacemaker)는 이 두 가지 모습, 화해자와 예언자의 모습을 다 갖고 있다.
이런 퀘이커들의 모습은 오늘날 평화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우리 교회와 크리스천들에게 좋은 안내 모델이 된다. 종교에서 말하는 평화는 흔히 매우 정적이고 조용한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까닭에 종교인들은 시끄럽고 복잡한 정치 사회적인 일에 간여하지 않고 최대한 피하는 것을 평화의 길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마음의 평화와 사회의 평화가 분리될 수 있는가? 사회가 갈등에 휩싸였을 때 마음이 평화로울 수 없으며, 마음이 어지러운데 사회가 평화로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수의 평화는 이 둘을 분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 역사 현장에서 화해자요 예언자로 활동했다. 예수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마 5:8)이 될 것을 가르쳤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자였으며, 인간들 사이에서 화해자였다. 그리고 예수는 세상 권력자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말했던 예언자였다. 퀘이커의 평화 영성은 화해자요 예언자였던 예수의 길을 따르려는 영성이다. 퀘이커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깊은 마음의 평화를 추구할 뿐 아니라 이 사회와 세계 속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peacemakers)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 모습은 때로는 화해자로서, 때로는 예언자로서 나타난다. 퀘이커의 평화 영성과 실천은 오늘날 예수의 모습을 회복하고 재현한다.
화해자
퀘이커들이 화해자로서 역할을 한 것은 비교적 초기 운동시절부터이다. 종교개혁 운동을 지나 퀘이커 운동이 정착하면서, 퀘이커들은 세상 속에서 싸우는 일을 금지하는 평화신앙 선언을 한 이래 평화의 삶을 추구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시시비비를 무력 전쟁으로 해결하던 시대에 퀘이커들은 되도록 평화적인 해결 수단을 찾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퀘이커가 정부 권력을 잡았던 미국 펜실베니아에서도 그랬다. 권력자로서 퀘이커는 힘으로 문제 해결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인디언들과 백인들의 갈등이 수시로 일어날 때에도 퀘이커 정부는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양자 간에 협상과 화해를 구했다. 당시 펜실베니아 지도자였던 윌리엄 펜은 백인들의 무차별 살육을 피해 펜실베니아로 들어 온 인디언들과 갈등을 피하고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상호 개방 조약(Open-door Treaty)을 맺고 서로 왕래하고 교류하면서 살도록 했다. 이러한 화해자로서의 모습은 퀘이커 운동초기부터 평화신앙의 실천 전통으로 오늘까지 이어져 왔다.
화해자로서 평화운동은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싸움을 종식시키는 일,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 평화적 문제 해결을 해 주는 일, 그리고 싸우고 난 후에 사람들이 서로 보복하고 원한을 갖지 않도록 하는 일들을 포함한다. 20세기 냉전 시대에 퀘이커들은 작고 큰 분쟁 상황에 들어가 화해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래서 오늘날 퀘이커들 가운데는 많은 국제 분쟁 전문가들이 있다. 이들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갈등해결 방법론을 발전시켜 왔고 이를 통해 크고 작은 갈등 문제 해결에 기여한다. 그렇다면 퀘이커들은 어떤 방식으로 분쟁 상황에서 화해자로서 일하는가? 화해자로서 일하려면 갈등 당사자들이 요청한다든지, 아니면 무언가 공식화된 권위와 인정을 받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데, 퀘이커들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더군다나 퀘이커는 소종파로서 그리 잘 알려진 사람들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한 종파의 사람들 정도로 인식되는 상황이다.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퀘이커는 평화운동의 대명사로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는 물론 다른 세계에서는 잘 모르는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에는 거의 대부분 퀘이커 평화운동가(peacemaker)들이 들어가 활동하고 있다.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분쟁 상황에 들어가 화해자 역할을 하는 것인가.
나는 영국 퀘이커 학교인 우드부룩에서 머물 때 게시판에서 자원 평화운동가를 모집하는 공고를 자주보곤 했다. 그리고 현지에 들어가기 전에 우드부룩에 머물면서 교육과 훈련의 준비 시간을 보내는 평화운동가들을 만나곤 했다. 예를 들면, 퀘이커 평화행동단체(Quaker Peace Action Group)나 평화팀(Quaker Peace Team)의 이름으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 현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들은 전문적인 평화운동가들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로서 자원하여 1년 또는 2년간 피스메이커로서 분쟁지역에서 화해의 사역을 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은 퀘이커 본부의 평화위원회나 각 지역 퀘이커 모임이 한다. 우리 교회로 말하자면, 해외 선교사를 교단 본부에서 지원하든지 아니면 개 교회가 지원하는 것과 같다. 퀘이커 평화 팀은 분쟁 현장에 들어가면 먼저 현지 상황을 이해하고, 현지 평화 단체들과 관계를 맺고, 현지 상황에 적합한 화해와 평화 활동을 전개한다. 이 모든 일은 현지에 파견된 평화 활동가의 판단으로 실행된다.
평화 선교사
1999년 12월 미국 펜들힐에 머물 때 나는 우리나라에서 평화활동을 하는 퀘이커 평화 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미국 AFSC는 남북한 평화 형성을 주요 목표로 삼고일본 동경에 동북아 퀘이커 사무소를 두고 두 사람의 평화운동가를 파견했다. 이들은 수개월 동안 한국에서 머물면서 자신들이 어떤 활동을 펼칠 것인가를 조사한 후 미국 필라델피아 AFSC 본부에 와 있었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많은 시민운동가, 학자 그리고 평화운동가들을 만났고, 두가지 계획을 수립했다. 하나는 남한 사회에서 갈등 해결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갈등해결론 교육은 남북한 갈등 문제에 대한 화해자적 접근이라면,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국가권력에 대한 예언자적 접근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두 가지 일을 모두 수행했다. 그 결과 한국시민 사회에서 갈등 해결 운동이 일어났다. 현재 한국의 평화, 여성, 교육 시민단체에서 갈등 해결 운동이 일어나는데 퀘이커들의 기여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퀘이커들은 조용하게 이 일을 수행하고 돌아갔다.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한국 군부의 반응이 민감했다. 그동안 소외된 채로 억압당하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군복무 거부와 감옥살이 이야기가 여론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 국회의원들은 양심적 거부자들을 위한 대안 복무제를 합법화 시키는 법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입법 직전에 이 일은 일반 시민들의 보수적 정서와 보수 언론의 비판, 특히 한국 기독교 보수 세력의 반대로 무산 되었다. 사실 퀘이커들의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은 신앙양심이 국가 권력보다 더 우선적 가치를 가진다는 신학적, 신앙적 고백 운동이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다른 세력보다도 기독교 세력에 의해 그것이 좌절되었다는 것이 아니러니(irony)이다. 후에 나는 한국에서 이 운동을 촉발한 퀘이커 평화운동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중국과 대치하는 상황에 있는 대만에서 대안적 복무 제도가 합법화 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이 일로 인해 감옥에 들어간 젊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고통에 그녀는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퀘이커들은 비록 소수지만, 갈등과 분쟁 지역에서 화해자의 역할을 하는데 열심이다. 그들은 종교를 전파하기보다는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한다. 나는 이런 퀘이커 해외 파견 평화운동가를 ‘평화 선교사’라고 부르고 싶다.
퀘이커들의 화해자로서의 역할은 갈등을 사전에 예방하는 일에도 적용된다. 2001년 9·11 테러 사건 직후 미국 퀘이커 학교인 펜들힐은 모든 예정된 일정을 취소하고 이슬람 이해 프로그램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미국 부시 정부와 대다수 미국 기독교회들이 취했던 태도와는 매우 대조되는 태도였다. 부시 정부는 즉각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름 아래 보복 전쟁을 선포했다. 많은 미국 시민들은 이것을 지지했다. 특히 보수 복음주의 교회 지도자들은 이슬람에 대한 ‘성전’을 공공연히 부추겼다. 결국 전쟁은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이라크로 확대되었고, 수 십만 명이 죽고, 막대한 문화 유물들이 파괴되었다. 미국 퀘이커들은 전쟁을 막으려는 노력을 했다. 그들은 테러에 의해 희생된 시민들을 위로하는 한편, 보복 전쟁의 길보다는 이슬람을 이해하는 길을 실천했다. 세계 이슬람 국가들은 물론 미국 사회에서 살고 있던 무슬림들은 폭력의 공포로 시달렸다.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평화와 화해의 길로 갈 것인가 하는 길목에서 퀘이커들은 후자의 길을 몸소 실천하고 또 그 길을 미국 사회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지금은 미국의 많은 시민들이 부시 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러나 이미 막대한 인명 피해와 천문학적 전쟁 비용이 소비된 후이다. 미국 시민들의 가슴 속에 어떤 종교가 참 진리의 종교로 자리 잡을까?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했던 미국 보수 복음주의 교회일까 아니면 이슬람 이해와 평화의 길을 촉구했던 퀘이커들일까. 이 질문은 오늘 우리 사회, 우리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유용한 성찰의 자료를 제공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예언자 : 권력에게 진리를 말하라
최근 공개된 자료에서 미국 부시 정부는 미국 퀘이커 평화 본부인 친우봉사회(AFSC)를 테러리스트 동조 집단으로 감시해 왔다는 것이 폭로되어 파문을 일으켰다. AFSC만이 아니었다. 9·11 뉴욕 테러사건을 겪은 후 미국 정보기구는 그린피스를 비롯한 미국내 반전 평화단체들을 모두 테러 집단으로 분류해 감시해 왔다는 것이 폭로된 것이다. 미국 퀘이커 평화운동가들은 부시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운동을 계속해서 벌여왔다. 이것은 아무리 국가권력일지라도 전쟁을 도모하는 경우에는 그에 맞서 진리를 말하라는 퀘이커의 예언자적 평화 영성을 실천한 것이다. 그 결과 AFSC는 미국 정부 당국에 의해 친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낙인 찍힌 것이다.
전쟁 시기는 국가적 비상 사태이기 때문에 국가권력은 평상시보다 더 절대적인 권력행사를 하며, 국민들도 열광적인 애국심으로 그것을 지지한다. 이런 경우 국가권력에 맞서 ‘아니오!(No!)’라고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퀘이커들은 언제나 ‘No’ 한다. 퀘이커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국가 권력보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더 우선시하는 평화신앙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퀘이커들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적과 아군을 구별하여, 사람을 살육하는 전쟁은 용납될 수 없다. 두 번째, 퀘이커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예수의 제자로서 충실히 따르고자 한다. 그러므로 전쟁은 용납될 수 없으며 모든 폭력적 문제 해결 방식도 거부된다. 셋째, 퀘이커들은 전쟁은 결코 합리적인 문제 해결책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일반 시민들이 국가권력의 비합리적인 전쟁 정책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합리적 비판의식을 갖는 한 전쟁은 일어날 수 없다. 이 점에서 퀘이커들은 죄악의 인간 사회에서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믿는 일반 기독교인들과 달리 전쟁은 얼마든지 예방될 수 있다고 믿는 낙관론자이다. ‘국가 권력에 진리를 말하라’(speak the truth to power)는 퀘이커의 예언자적 평화영성은 신앙과 합리적 인간 이성 능력에 대한 신뢰에 기반 한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전쟁과 핵무기를 경험한 퀘이커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평화신앙을 지키는데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평화적 각성을 했다. 이 평화적 각성은 필요한 경우 국가 권력과의 충돌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포함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퀘이커들은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는 신앙 전통을 이어왔고, 일반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는 신앙 실천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전쟁과 폭력 문제에 관한한 예외이다. 특히 20세기 후반 핵무기와 대량살상 무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퀘이커 평화 영성은 더욱 예리하고 민감해졌고, 예언자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퀘이커 평화운동은 국가 권력과 종종 갈등을 일으켰고, 퀘이커 집단 내부에서도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베트남 전쟁 시기, 퀘이커들이 미국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베트콩)을 지원한 일이다. 퀘이커 평화운동가들의 모체인 AFSC는 미국의 군사 봉쇄로 인해 북베트남사람들이 심각한 식량난과 물자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북베트남에 원조 물자를 실은 구호선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미국과 전쟁중인 북 베트남을 돕는 일은 적국을 돕는 반국가적 행위로 금지되었고, 미국 군 당국은 구호선을 보낼 경우 침몰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퀘이커 평화운동가들은 직접 구호선에 타고 북베트남으로 들어가 식량과 생필품을 전달했다. 다른 한편 북베트남에게도 미국 선박이 들어오는 일은 허락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인도주의적 구호라고 해도 전쟁중인 적국으로부터 식량과 물자를 받는다는 일은 꺼림칙한 일이었다. 퀘이커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퀘이커 평화 구호 활동의 진정성을 베트콩 지도자들에게 전달했고, 퀘이커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이해한 베트콩 지도자들은 미국 퀘이커 구호선을 받아들였다. 이런 일은 참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지만, 퀘이커들은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을 국가 권력의 명령보다 우위에 있는 가치로 믿고 실천한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 퀘이커 집단내부에서 비판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비판의 요지는 퀘이커 평화운동이 균형감각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전쟁 중인 쌍방 사이에서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한데, 퀘이커 평화운동가들(AFSC)은 미국 정부와 맞서는 반면에 북베트남 편을 드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서 평화화해자로서의 역할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을 계기로 퀘이커 평화운동은 이전의 반전 평화운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국 정부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일반 대중 여론도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퀘이커 평화운동가들은 변함없이 북베트남 경제 봉쇄를 하는 미국 정부를 비판하고 해제를 요구했다. 이들에게 북베트남 사람들은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며, 배고픔과 생필품 부족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돕는 인도주의 구호 활동은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신앙적 의무였다. 이 사건은 퀘이커 평화운동의 정체성 논쟁, 즉 예언자의 역할과 화해자의 역할이 갈등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북한 인도주의 구호 활동을 성찰하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고 본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다양한 방식과 경로를 통해 북한을 돕는 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이 일들은 상당부분 정부의 통제 아래 진행됐다. 한국교회는 자신의 견실한 신앙고백과 인도주의 평화신학을 갖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교회의 인도주의 구호 활동은 정부의 눈치를 보고, 남북한 정치권력 간의 입장에 따라 좌우됐다. 최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한국 정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독자적 판단아래 북한에 식량을 보냈다. 이 일은 비록 정부와는 갈등을 빚었지만,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평화 영성을 회복하는 신호탄이 되었다고 나는 본다. 신앙 양심에 근거한 인도주의 구호 활동은 교회가 국가 권력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전개해 나가도 좋은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일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진리를 증언하는 길이 아닌가.
국가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 구호 물자를 보냈던 퀘이커들의 예언자적 평화 운동은 후에 미국과 베트남 사이에 화해를 이루는 토양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베트남인들은 퀘이커 평화운동을 높이 평가했다. 특별한 사례로서, 워싱턴 근교에 살던 퀘이커는 베트남 승려의 분신 소식을 듣고, 베트남 전쟁 중단을 요구하며 백악관 앞에서 분신했다. 전쟁 후, 베트남 정부는 백악관 앞에서 분신한 퀘이커의 가족을 베트남에 초청하고 위로와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생각한다. 전쟁 중 미국 국가권력에 맞서 진리를 실천했던 퀘이커들의 예언자적 행동은 전쟁 후 미국과 베트남 사이에 화해의 길을 예비한 선견자적인 행동일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화해자로서의 평화운동과 예언자로서의 평화운동은 궁극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교회는 국가권력을 향해 진리를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론 진리를 증거하는 예언자로서 때론 화해자로서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기에 교회의 평화운동은 국가 권력을 초월하려는 영성을 요청한다. 퀘이커들은 국가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평화 영성을 오랫동안 실천해 왔다. 남북한 갈등의 깊은 수렁에 빠져있는 우리 상황에서 우리 교회가 남북한 권력 사이에서 평화의 화해자와 예언자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 퀘이커 평화 영성으로부터 참고할 점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정지석 l 목사는 영국 우드부룩(Woodbrooke)대학원에서 ‘퀘이커리즘과 함석헌의 평화사상 비교연구’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KNCC,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UNESCO-APEIU 국제이해교육원에서 평화교육가로 일했으며, 성공회대와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평화윤리와 교육을 강의했다. 한국 YMCA 생명평화센터 소장이며, 작년 펜들힐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현재는 철원에서 국경선 평화학교 설립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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