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2012년 4월호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11) |
펜들힐 일기(1) |
- 정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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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조용한 하루
오늘은 로이드와 ‘영적 양육’(spiritual nurturing)의 만남을 갖는 날이다. 이 일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펜들힐의 전통이다. 펜들힐에 처음 와서 장기간 거주하는 사람들은 펜들힐 선생들이나 오래 거주한 사람들과 짝을 맺어 매주 한 차례씩 만나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갖는다. 펜들힐에 처음 온 사람에게는 낯선 공동체 환경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친구를 가졌다는 점에서 든든하고, 이미 펜들힐 생활에 익숙하게 살고 있는 사람은 새로 온 사람에게 생활의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실용적인 유익함이 있다. 그런데 이 만남은 다만 이런 공동체적 실용주의를 넘어 ‘영적인 파트너쉽’을 목적으로 한다. ‘영적 양육’이라는 표현에서처럼 이 만남은 더 깊은 삶과 영성 나눔의 만남을 지향한다.
우리는 만나면 먼저 조용하게 침묵하는 시간을 갖는다. 로이드의 집에서 조용히 앉을 때도 있고, 따뜻한 햇볕이 있는 날에는 펜들힐 연못 벤치에서 우리는 조용히 마주앉아 침묵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로 내가 말하고 로이드는 듣는다. 듣는 일(Listening)은 퀘이커 영성의 중심이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수 백 년 동안 이어 온 사람들의 영혼 깊숙이 나있는 길처럼 이 사람들은 듣기를 잘 기다린다. 내가 할 말이 없어 그냥 조용하게 있으면 로이드는 그저 조용하게 기다린다. 펜들힐 작은 공동체 안에서 매일 만나고 부딪치는 사이이지만 이렇게 영적 대화의 만남으로 앉아, 아무런 말 없이 한동안 시간이 흘러가도 어색하지 않고 편안하다. 말이 없이도 이심전심의 소통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신뢰와 배려와 기다림이 그것을 만든다.
오늘은 펜들힐에 눈이 가득 쌓였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펜들힐 산책로를 따라 눈길을 걷는다. 아무도 걷지 않은 하얀 눈길 위로 두 줄기 선명한 선이 나 있다. 누군가 이른 아침 스키를 타고 지나간 모양이다. 눈이 솜털처럼 가볍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내려앉은 눈 무게에 힘이 겨운 푸른 소나무가 휘어 넘어져 있다. 눈이 녹으면 다시 일어날 것이다. 메인 하우스로 돌아와 따뜻한 차를 마신다. 나는 카모마일 허브 차를, 로이드는 코코아차를 마신다. 로이드와 리딩 룸(Reading Room)에 앉는다. 다시 잠시 눈을 감는다. 참으로 조용한 하루이다. 세상도 조용하고 내 마음도 조용하다.
펜들힐의 아침
오늘 아침도 펜들힐 사람들은 모두 반(Bahn) 예배실에 모여 앉는다. 반(Bahn)은 예전에 창고로 쓰던 것을 개조해 만든 작은 예배실이다. 이곳에서 펜들힐의 하루는 매일 아침 30분간의 침묵 예배로 시작된다.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다. 침묵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음성은 어디에서 어떻게 들려오는 것인가. 이것은 무엇이라 딱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 그것은 오직 체험으로 알게 되는 신비이다.
자기 자신의 소리와 하나님의 소리는 분별될 수 있는가? 퀘이커들은 침묵 가운데 이것을 분별한다. 이들은 내면의 참 자아의 소리는 내재하는 하나님의 소리와 일치한다고 믿는다. 이 일치된 소리가 진리의 소리이다. 이것을 들을 수 있기를 퀘이커들은 조용한 침묵 가운데서 기다린다. 침묵 가운데 진리의 음성을 기다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진리를 구하는 꾸준한 인내와 집중이 필요하다. 매일 아침 침묵 가운데 앉아 있으면 수 없는 잡념과 망상이 지나가고, 때로는 졸음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꾸준하게 진리의 소리를 듣기를 기다린다. 매일하다 보면 몸에 밴 듯 친숙하여져서 중심으로 몰입하게 된다. 잘 듣고자 집중하여 기다림은 퀘이커 침묵 예배의 핵심이다. 펜들힐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매일 아침 침묵 속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배운다.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데 익숙해진 신앙생활은 잘 듣는 생활태도를 만든다. 그래서 그런지 펜들힐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잘 듣는다. 깊이 듣고 진실한 소리를 분별하여 듣는다. 건성건성 듣거나, 자기 생각에 맞춰 듣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의 말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들으려고 한다. 이렇게 잘 듣는 능력은 아무래도 침묵 예배에서 체득된 것이 아닌가 싶다.
잘 듣는 사람 앞에서는 말하는 사람도 말을 잘한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진실을 깨닫는다. ‘잘 들으면 잘 말한다.’ ‘듣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이 잘 들으니 말하는 사람도 잘 말하게 되고,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진실을 깨달으면서 말하게 된다. 듣는 사람은 잘 듣는 것으로 자신의 진심을 말하고, 말하는 사람은 잘 말함으로써 자신의 진심을 들려준다. 이것이 이심전심의 대화이다. 나는 이런 대화가 우리 가정과 시민 사회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교회 예배는 이심전심의 대화를 체험하는 원초적 자리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이심전심의 대화이다. 교회 공동체는 신자들 간의 이심전심의 대화가 일어나는 자리이다. 그러려면 먼저 잘 들어야 한다. 말하기 전에 들어야 한다. 듣는 것이 곧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데 익숙한 신앙 공동체의 미덕이요, 신앙의 본질이다. 잘 듣는 일이 교회 영성의 핵심이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무슨 말을 많이 하려는데 급급할 필요가 없다. 나는 펜들힐에서 지내면서 기승전결의 설교 패턴을 버렸다. 중요한 것은 말의 짜임새가 아니라 잘 듣는 것임을 알았다. 잘 들을 때 잘 말할 수 있는 법을 배웠다.
어떻게 해야 잘 들을 수 있는가? 내 안에서부터 잘 듣는 일은 추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일어난다. 진리를 묻고 추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잘 듣는다. 내 삶을 전적으로 투신할 길을 찾을 때 잘 들을 수 있다. ‘찾고 두드리라’는 예수의 말씀은 잘 듣는 길을 보여준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런 체험이 일어나야 한다. 가정은 이심전심의 대화의 교육장이어야 한다. 직장과 학교에서도 이심전심의 대화는 일어나야 한다. 새로운 공동체 운동에서 이심전심의 대화는 일어나야 한다.
어느 공동체 안에서든지 잘 듣고 잘 말하는 삶의 태도가 공동체를 성장시킨다. 요즘 많은 곳에서, 특히 종교 집단과 시민사회 단체에서 소통의 부재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소통하는 공동체는 이심전심의 대화가 일어나는 공동체이다. 소통이 막힌 공동체는 메마르고 퇴보한다. 자기 개성은 강하나 다른 사람의 개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미성숙함, 상명하달식의 권위적 지시 문화, ‘빨리빨리’로 표현되는 효율성 지상주의 사고방식이 소통 부재 현상을 일으킨다. 비록 속도는 떨어질지라도 꾸준하게 서로의 다름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배우면서 이심전심의 소통을 만들어 가자. 그것이 사실은 빠른 길이요, 효율적인 길이며, 친구들과 즐겁게 걷는 새로운 길이다. 나도 살아나고 공동체도 살아나는 길이다. 그 비결은 단순하다. ‘잘 듣는 사람이 잘 말한다.’ 펜들힐에서 하루는 밤 9시 15분 다시 침묵의 에필로그로 마감한다.
엘더링(Eldering)
펜들힐에는 엘더링이란 문화가 있다. 엘더(elder)는 ‘경험이 많은’ ‘연장자’, ‘교회 장로’를 의미한다. 퀘이커들 사이에서 엘더는 누군가를 영적으로 든든히 지탱해 주는 사람으로 불린다. 누군가를 곁에서 물리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 지지해주고 도와주는 일을 퀘이커들은 ‘엘더링’이라 한다. 이 신앙 문화는 일반 교회에서 인식되는 장로의 역할과는 매우 다른 것이어서 흥미롭다.
펜들힐 교실에는 종종 선생과 엘더가 함께 하는 경우가 있다. 선생이 엘더를 초대한 것이다. 자신의 강의를 보다 더 영적인 것으로 하고자 하는 선생들이 주로 그렇게 한다. ‘퀘이커 치유와 영성’이란 주제의 강의를 이끈 에블린 선생은 엘더링을 했다. 첫 수업시간 한 남자가 선생 옆에 앉아 있다. 돌아가면서 소개를 하는데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을 뿐 수업에 간여하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학생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다. 그는 수업시간 내내 시종일관 선생 옆에 조용하게 앉아 있다가, 가끔 강의 기자재 설치를 돕는다든지 자질구레한 보조 역할을 한다. 그의 이름이 테리라는 것을 안 것은 몇 주가 지난 후이다. 선생 옆에 앉아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을 영적으로 지지해주는 것이 그의 역할이란 것을 안 것도 그 후의 일이다. 내가 11년 전에도 펜들힐에서 1년간 지냈지만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이번에 이렇게 하는 것이 엘더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독특한 문화는 펜들힐의 교실을 단순히 지식을 전수받는 장소가 아닌 영적 체험이 일어나는 곳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 앞에 설 때, 무언가 발표를 하게 될 때, 긴장하고 떨린다. 이런 경우 엘더가 필요하다. 퀘이커들은 자신을 영적으로 지지해주는 엘더를 초대하여 자신의 곁에 함께 있어주기를 바란다. 펜들힐에서 학기 마지막 주간은 축제주간(festival week)이라고 하여 자신의 한 학기 동안의 배움과 영적 체험과 자기 발견을 발표하는 시간으로 보낸다. 발표 시간에 엘더링을 하는 친구들도 있다. 이 경우 보통 친한 친구가 엘더로 초대된다. 엘더는 친구가 발표하는 동안 그 옆에 조용히 앉아 기도한다.
나의 대화 친구였던 로이드는 자신의 엘더링 체험을 들려준다. 그는 이십 여 년 넘게 펜들힐의 정원을 관리하고 전반적인 시설 유지를 책임지고 일하는 사람인데 어느 해인가 ‘자연과 영성’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주로 몸으로 일하는데 익숙한 사람이 교실에서 강의를 하게 되니 심리적으로 지지해 줄 엘더가 필요했다. 그는 평소 좋아하던 친구에게 엘더링을 요청했다. 강의 첫 시간, 그는 자연과 사람의 영성이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가를 사례로 자신의 어린 시절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를 했다. 오하이오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로이드는 10살 소년 시절 병에 걸려 도시 병원에서 오랜 동안 입원하고 지내야 했다. 병실은 하얀 시멘트와 플라스틱이었다. 어린 시골 소년 로이드에게 도시 병실은 낯설고 무서웠다. 어느 날 어머니는 로이드에게 시골집의 작은 나무를 갖다 주었다. 그는 나무를 보면서 생기를 찾았고 마음이 안정되었다. 로이드는 자신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 준 어머니의 마음이 고마웠다. 이 이야기를 하던 중 로이드는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수십 년이 지난 이야기였지만, 마음 깊이 간직되어 있던 감동이 되살아나서, 예상치 않게 터져 나오는 눈물을 로이드는 주체할 수 없었다. 갑작스런 일이었다. 로이드는 물론 학생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때 로이드 옆에 앉아 있던 엘더는 교실 안의 모든 사람에게 잠시 동안 침묵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침묵 시간을 가지면서 로이드는 마음을 안정시켰고, 교실은 조용한 감동 속에 분위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좋은 엘더링 덕분이다.
로리는 펜들힐의 원장이다. 그녀는 볼티모어 퀘이커 연례모임의 서기(의장)로 회의를 진행할 때 자신이 체험했던 ‘엘더링’의 신비로운 역할에 대해 말했다. 로리는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회의 참석자 가운데 네 사람에게 회의를 위한 엘더링을 부탁했다. 이를 수락한 사람들은 엘더로서 회의장의 네 모서리에 앉았다. 그들의 역할은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조용한 침묵 가운데 회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사회자를 위해 기도하고, 회의 참여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회의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기를 기도한다.
로리는 다양한 의견들이 충돌할 때 매우 힘이 들고 지치곤 했다. 때로는 아무런 결실 없이 회의를 끝마쳐야 할 때도 있었다. 퀘이커 회의는 다수결 원칙이 아니라 만장일치제이기 때문에 민감한 사안인 경우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가 있다. 민감한 주제를 토론할 때면 사회자는 무척 힘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런 때에 로리는 자신의 뒤와 앞의 구석에 앉아 기도하는 엘더들의 존재감으로부터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고,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곤 했다고 말한다. 토론이 과열되는 경우, 의견이 충돌하여 감정적 대결로 치달을 때 로리는 회중에게 잠시 침묵 시간을 제안한다. 이것은 퀘이커들에게 익숙한 회의 문화이다. 회중은 잠시 침묵한다. 회중은 네 모서리에 앉은 엘더들의 존재를 인식한다. 회중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회의를 기도한다. 엘더링은 영적인 회의를 만든다.
그렇다면 네 모서리에 앉아 기도하는 엘더들의 경우 어떤 경험을 할까? 회의에 참석했다가 엘더링의 초대를 받은 여성 변호사는 한쪽 구석에 앉아 회의를 위해 기도했다. 퀘이커들은 기도를 ‘빛 가운데 붙든다’(Hold In The Light)라고 말한다. 한 시간 동안 회의 전체를 빛 가운데 붙잡는 엘더링을 하면서 그녀는 영적 힘의 실체를 체험했다. 기진맥진 하는 체험이었다고 한다. 매우 힘들었으나 그녀는 공동체 회중에 임재하는 성령을 체험할 수 있었다.
퀘이커 회의는 단순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토론하고 결정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결실을 맺고자 한다. 퀘이커는 이런 마음가짐에서 회의에 임한다. 퀘이커에게 회의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또 다른 형식의 예배이다. 이 점은 우리가 퀘이커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다. 일반 교회에서는 예배를 드린 후에 회의를 한다. 예배와 회의는 구분된다. 그런 까닭에 예배 시간에는 경건하던 사람들이 회의 시간에는 돌변하여 고함을 지르고 심지어 몸싸움까지 한다. 교회의 회의는 예배의 연장이라는 믿음을 갖는다면 과연 그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 예배 중에도 싸우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영이 현존하는 교회는 아니다.
퀘이커의 엘더링 문화는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퀘이커리즘 영성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엘더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있음을 믿는다면 누구나 엘더링을 할 수 있다.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영의 임재 속에서 살고자 한다. 그러므로 매일 사는 일이 예배이고 성례전이다. 엘더링은 강의실, 사업을 토론하는 회의, 발표회등 공동체의 일상적인 삶을 영적으로 살고자 하는 퀘이커 영성이 낳은 삶의 문화이다. 엘더링은 우리의 일상이 거룩함과 만나고 있음을 일깨운다. 엘더링은 무언가 홀로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을 옆에서 지지하고 도와주는 일이 믿음생활의 중요한 덕목임을 일깨운다. 엘더링은 사랑의 영성의 실천이다. 이 엘더링이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사회운동가
펜들힐 강좌 중에 ‘사회행동과 영성’이란 제목이 있다. 사회정의와 평화, 사회 개혁운동을 함에 있어 영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만들어진 강좌이다. 이 강좌를 들으면서 그동안 해왔던 나의 사회 운동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로서, 에큐메니칼 정신을 가진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무엇을 목적으로 사회 행동을 했는가를 생각해 본다. 몇 가지 깨닫게 되는 점들이 있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 나 자신을 여긴다면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 적어본다.
사회 운동하는 사람들은 책을 읽고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럴 때 사회운동은 성장한다. 사회운동가는 자기실현을 갈망하고 자신의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자기실현은 세속의 권력과 명예를 통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만나는 삶에서 성취된다. 그러므로 사회운동가는 종교인처럼 경전을 읽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내면의 영성을 풍요롭게 하고 확신에 찬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운동가는 학자처럼 책을 읽고 연구해야 한다.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키울 수 있고, 사회 현상을 근원에서부터 파악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운동가는 작가처럼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쓰게 되면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게 되고, 경험을 축적하며 후대에 전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사회운동가는 종교인과 학자, 그리고 작가의 품격을 지녀야 한다. 매일 기도하고 읽고 쓰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자.
사회운동가들은 생각이 얕아지고, 마음이 조급해지고, 행동이 가벼워지면 안 된다. 세상을 구하려고 악에 맞서려다가 세상 속에 빠져 또 하나의 악이 되고 마는 사회운동가들이 있다. 자기 성장과 실현은 사회운동가가 사회 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과 함께 추구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이 희생의 진정한 의미이며, 정직한 사회 운동이 되어 후대로 이어지며 성장하는 길이다. 사회운동가로서 피곤해지지 않고, 가족의 신뢰를 얻는 길이다. 그리 할 때에 비로소 사회운동은 부모에서 자식에게로 전승되고, 선배로부터 더 많은 후배들로 커지고 깊어질 것이다. 이것이 성장하는 사회운동의 비결이다.
농부
펜들힐에 봄이 왔다. 펜들힐의 봄은 어느 날 갑자기 온 듯 아침에 일어나니 정원 풀들과 나무들에 연푸른 싹들이 불쑥 돋아 있다. 펜들힐 도서관 뒷편 정원 한쪽에는 유기농 채소밭이 있다. 이곳에 나는 몇 주 전 밭에 콩을 심었다. 세알씩 심었다. 한 알은 땅 속의 생명들이 먹게 하고, 한 알은 새가 쪼아 먹게 하고 그리고 마지막 한 알은 싹이 트고 자라서 사람이 먹는다. 지난 해 3월 하늘나라에 먼저 간 오용선 박사는 ‘콩 세알 정신’이 생태계 위기에 처한 지구를 살리는 정신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 정신을 기억하면서 나는 콩 세알을 땅 속에 묻었다.
콩을 심은 후에는 나는 잘 자라는지 궁금하여 하루가 멀다하고 밭에 나가보곤 했다. 두주쯤 지났을까, 조그마한 싹들이 나와 있다. 놀랍고 기쁘고 그리고 고맙다. 싹이 나온 후에도 매일 찾아가 본다. 옆에 자라나는 다른 풀들과 함께 콩잎도 자라난다. 하루 햇살이 콩잎을 키우고, 봄비가 뿌리를 튼튼하게 한다. 내게는 하루 시간이 허무하게 속절없이 빠르게 지나가지만 콩잎은 시간을 몸에 담아 자라난다. 아침 햇살에 잎이 자라고 저녁 햇빛에 줄기가 자란다. 농부는 생명이 자라는 것을 안다. 부지런하게 생명을 가꾼다. 나도 농부가 되기를 기도해 본다.
남자와 여자
펜들힐에는 동성애자가 많다. 많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항시 거주하는 오십 여 명 사람들 가운데 오륙 명이 동성애자들이니 상대적으로 많다고 느껴지는 것 같다.
퀘이커들은 일찍부터 동성애자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동성애자들이 사회적으로 소수자요 약자로 고난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고난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감은 퀘이커들의 마음 깊이 심어져 있는 정신이다. 이들 역시 종교개혁 초기 영국에서 이단자로 몰려 혹독한 핍박의 고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난 경험을 통해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사람들을 돕고 지지하는 영성을 간직해 오고 있다. 현재는 영국과 미국 사회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중산층이요, 지식인층을 형성하고 있지만, 여전히 변치 않고 퀘이커들은 고난 받는 사람들과의 사랑의 연대감을 고귀한 영적 유산으로 여긴다. 미국에서는 펜실바니아를 통치할만큼 퀘이커들이 정치적 영향력도 가졌지만, 이 정신에는 변함이 없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올라가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감정이 예전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퀘이커들은 고난 받는 사람을 지지하는 영성을 변함없이 유지한다.
동성애자는 미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소수자이며 약자로서 고난 받는다. 그들은 가정에서, 사회에서 늘 두려움 속에 살며, 조심하며, 긴장된 삶을 산다. 퀘이커 학교 공동체인 펜들힐은 그런 동성애자들에게 편안한 피난처요 보호처 같은 곳이다. 고난 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연대감,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그 처지와 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평등하다는 퀘이커 신앙은 동성애자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인간 차별은 예수 신앙에서는 불가능한 말이다.
정지석 l 목사는 영국 우드부룩(Woodbrooke)대학원에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KNCC,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UNESCO-APEIU 국제이해교육원에서 평화교육가로 일했으며, 성공회대와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평화윤리와 교육을 강의했다. 한국 YMCA 생명평화센터 소장이며, 작년 펜들힐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현재는 철원에서 국경선 평화학교 설립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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