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2012년 5월호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12) |
펜들힐 일기(2) |
5월의 펜들힐
5월의 펜들힐은 아름답다. 겨울동안 앙상했던 나무들이 어느새 푸르른 잎들로 풍성해져 있다. 아침 예배 후에 펜들힐 숲속 길을 걸었다. ‘우드 칩’이라고 부르는 잘게 쪼갠 나무 조각들을 덮어 만든 펜들힐 산책길은 푹신푹신하다. 이런 ‘우드 칩’ 길이 펜들힐 둘레길로 만들어져 있다.
5월의 싱그러운 나뭇잎들이 무성하게 하늘을 덮고 있다. 그 속에 들어가니 신비로운 베일 속에 가려져 마치 비밀스런 장소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그 속에서 나는 연초록 잎들 사이로 들어오는 빛나는 햇빛을 본다. 잎들 사이로 들어오는 빛과 잎들을 통해 들어오는 빛깔이 다르다.
오후 ‘연극 실험실’이란 강의 시간에 강의 진행자 베쓰 폴카는 “한 주간 지내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보면서 살았는지 서로 이야기 해보자” 한다. 영적인 세계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꿈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오늘 아침에 펜들힐 숲속 길을 걸으면서 보았던 5월의 녹색(green) 이야기를 했다. 녹색이 한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라는 것, 그렇듯 우리 생명의 빛깔도 그렇게 여러 가지일 것이라 말했다. 짙은 녹색, 밝은 녹색 (dark green and light green), 햇빛을 담은 녹색 그림자 진 녹색 (sunshining green and shadowed green), 연한 녹색 핑크빛 녹색 (baby soft green and pink green)…등등
5월의 햇살로 싱그러운, 푸르러진 나뭇잎으로 인해 깊은 숲속처럼 변한 펜들힐 둘레길을 걸으면서 나는 앞으로 살아갈 길에 대해 생각해 봤다. 예전에는 살아 온 길을 회상하곤 했지만 이제는 앞으로 살아 갈 길을 생각하곤 한다. 새로운 길을 만들면서 살아가고 싶다. 오늘 아침 예배 침묵 중에도 그 길이 비쳤다.
철원 산골짜기에 작고 소박한 집을 짓고 기도하며 살고 싶다. 지난번에 갔던 월든의 작은 집이 떠오른다. 그런 작은 집 옆에 기도실을 하나 붙여 살면 좋겠다 싶다. 소로우(H. D. Thoreau)는 홀로 살았지만 나는 친구들과 함께 살고 싶다. 함께 일하고 기도하고 먹고 노래하고 이야기 나누는 그런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고 싶다.
펜들힐 둘레길은 누군가가 처음 걸으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익숙한 듯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그 길도 처음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다음 사람이 그 길을 따라 걷고, 또 그 다음 사람이 그 길을 찾아 걸었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새로운 길을 걷고 싶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사는 삶의 의미를 충만하게 누리고 싶다.
길이 어디 있는가? 스승은 대답한다.
‘길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가기 시작할 때 길은 생기는 것이다.’
아침예배 시간마다 우는 사람
펜들힐의 하루는 아침 침묵 예배와 함께 시작된다.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퀘이커의 예배 방식이다. 펜들힐 중앙에 위치한 조그맣고 오래된 이층 건물 이름이 반(Barn)인데, 그 안에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가 4각형으로 놓여있다. 펜들힐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나와 앉아 매일 아침 예배를 드린다. 특별한 신앙 신조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단지 침묵으로 앉아있는 것이니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도 아무런 부담을 갖지 않고 조용히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평소 조용한 삶을 좋아한 사람이나, 바쁜 일상에서 잠시나마 자기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 시간을 퍽 좋아한다.
나도 이 시간을 즐기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 펜들힐에 와서는 이 아침 침묵 예배 시간이 즐겁다. 소득이라면 큰 소득이다. 사실 조용한 침묵 가운데서 30분씩 앉아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격이 급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특히 그런 것 같다.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진다. 가만히 뒤돌아 생각해 보면 침묵이 지금처럼 편안하지는 않았다. 조용히 앉아있는 것은 뭔가 어색하고, 시간 낭비 같고, 수 없는 잡념에 시달리게 했다. 무언가 눈에 보이는 목적을 추구하면서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나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침묵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우리 교회 신자들의 신앙 생활도 그렇다. 뭔가를 해야만 잘 믿는 것 같다. 찬양을 힘차게 부르든지, 성경을 많이 읽든지, 기도를 해도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가면서 해야 뭔가 잘 믿는 것 같다고 느낀다. 조용하게 침묵하는 가운데 예배드린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안 한 것 같다고 느낀다. 쉬운 일은 아니다. 설교도 그렇다. 웅변처럼 큰소리로 사람 가슴을 뒤흔들어 놓는 설교를 해야 잘 하는 설교처럼 생각한다. 우리 삶이 너무 물리적, 외형적 것에 익숙해진 탓이 아닐까 싶다. 조용하게 앉아 있으면 내면의 움직임에 민감해진다. 속의 소리를 듣게 된다. 침묵은 외적 신앙에서 내적 신앙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처음에는 쉽지 않지만 자꾸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외적 성장으로 달려 온 우리 교회 신자들의 정처 없이 허전한 영성이 이제는 침묵의 길을 배웠으면 좋겠다.
펜들힐의 아침 침묵 예배 중에 늘 훌쩍이며 우는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린다인데 워싱턴 근교에 살고 있는 오십 대 중반의 퀘이커이며, 지금은 펜들힐에 학생으로 와 있다. 그녀는 거의 매일 아침 침묵 예배 시간에 훌쩍거리면서 운다. 조용한 가운데서 훌쩍거리면서 우는 소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린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제지하거나, 문제시 하지 않는다. 인도에서 온 노인 퀘이커는 예배가 끝나고 나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곤 한다. 린다가 왜 그리 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린다가 스스로 그 이유를 말할 때까지 모두 기다려 주는 듯 하다. 린다는 평생 홀로 살아온 독신녀이다. 일 년 전 함께 살던 어머니와 사별한 후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말도 잘하고, 토론에도 참석하고, 도자기 예능 창작 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한다. 그런 점으로 보아 자신의 우울과 근심을 떨쳐내고자 펜들힐에 온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오늘 아침에도 린다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린다는 왜 아침 침묵 예배시간이면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오늘 아침 침묵 중에 나는 린다에 집중했다. 린다의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또 한 사람이 떠오른다. 10년 전 펜들힐에 와서 침묵 예배에 처음 참석한 날, 눈물을 쏟았던 한국 사람이다. 그녀는 아무런 이유도 알 수 없이 그냥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녀 역시 홀로 사는 사람이다. 외로이 살아 온 삶 가운데 남모르게 축적되어온 슬픔을 고요한 침묵 가운데서 만난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깊은 속에 있는 슬픔은 하나님의 그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일까? 오늘 침묵 예배 속에서 린다의 훌쩍거리며 눈물 흘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7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오른다. 내 마음 속 깊은 어딘가에 그가 있음을 깨닫는다.
하워드 브린톤의 펜들힐 비전
하워드 브린튼(1884-1973)은 펜들힐 2대 학장이다. 물리학을 공부한 자연과학도이지만 퀘이커리즘에 대한 책을 수십 권 썼고, 50세 이후 펜들힐에서 그의 평생을 지내면서 퀘이커리즘을 강의했다. 아마도 20세기 미국 퀘이커들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퀘이커 사상가라 할 수 있다. 1962년 함석헌이 펜들힐에 갔을 때 브린턴을 만났고 그의 퀘이커리즘 강의를 들었다. 그 후 둘 사이에는 깊은 영적인 교류와 사귐이 있었다. 함석헌은 일흔 가까운 나이에 브린턴의 저서 『퀘이커 300년 역사』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당시 아흔을 바라보던 브린턴은 자신의 책을 번역한 함석헌에게 출판 비용을 보냈다.
하워드 브린턴은 15년간(1935-1950) 학장으로 있으면서 펜들힐의 교육과 공동체 생활 문화를 만들었다. 헨리 호드킨이 펜들힐의 밑그림을 그려 놓았다면 브린턴은 그 위에 오늘의 펜들힐을 설계하고 건축했다. 브린턴이 펜들힐 학장으로 일한 나이를 보니 쉰한 살부터 예순일곱 살까지이다. 사상으로나 경험으로 무르익은 나이였다. 2차 세계 전쟁시기였는데 내외의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펜들힐이 중단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80여 년을 이어오게 된 데는 브린턴의 역할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브린턴이 은퇴한 후에는 그의 아내 안나 브린턴이 학장으로 펜들힐을 이끌었다. 안나 브린턴 역시 퀘이커리즘에 관한 저서를 낼 만큼 지성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보다 안나 브린턴이 펜들힐 역사에 기연한 괄목한 점은 재정을 건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학자나 사상가들에게 취약한 부분이 재정인데 안나 브린턴은 펜들힐의 살림 규모를 탄탄하게 만들었다고 『펜들힐 80년사』를 집필중인 덕 귄은 말한다.
브린턴은 펜들힐을 퀘이커 집단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 기여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의 펜들힐 비전은 어떤 것이었는가? 브린턴은 퀘이커리즘의 4가지 사회증언 정신에서 그것을 추구했다.
첫째, 기회의 평등과 개인 존중정신이다. 펜들힐에서는 어떤 이유로든 차별이 없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존중받는다. 흑인과 백인, 여성과 남성, 어린이와 어른, 그리고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모두 평등한 사람으로 존중받는다. 이 점은 펜들힐의 기본 정신이다.
둘째, 교육과 생활에서 단순 소박한 삶을 사는 것이다. 펜들힐은 화려한 건물이나 가구, 최신식 컴퓨터 시설이 없다. 단순하고 소박하다. 기숙사 방에도 책상과 의자, 그리고 소박한 침대 하나 뿐이다. 마치 수도원에 들어온 것 같다. 교수진들과 일반 직원들의 봉급도 거의 대동소이하다. 단순 소박하면서 정갈하고 잘 정리되어 있다.
셋째, 내적 외적 행동에서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한다. 한마디로 속과 겉이 같은 삶을 추구한다. 그래서 펜들힐 사람들은 신실하고 솔직하다. 서로간에 할 수 있는 것, 못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보살피는 방식으로 한다. 펜들힐 안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에 치우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넷째, 일상 삶에서, 그리고 영적인 삶의 추구에서도 공동체적 삶을 중시하는 것이다. 펜들힐에서는 매일 아침 모든 사람들이 모여 침묵 예배 시간을 갖는다. 식사도 공동으로 함께 한다. 매주 수요일에는 모두 함께 일한다. 청소하고 정리하고 잔디를 깎는 일 등을 분담하여 한다. 먹고 일하고 기도하는 일에서 공동체 정신이 실현된다.
펜들힐에는 하워드 브린턴의 이름을 붙인 ‘브린턴 하우스’가 있다. 그 집에서 브린턴이 말년을 지냈다고 한다. 나는 거의 매일 브린턴 하우스 길을 산책한다. 평생 공부하고, 가르치며, 펜들힐이란 학교 공동체를 만든 그의 삶은 어떤 것이었는가 생각해 본다. 수십 년 전 함석헌도 이 길을 걸었으리라. 브린턴과 함석헌과 지금 나 사이에 무언가 연결되는 것이 있음을 느낀다.
사려 깊은 죽음 (Mindful Dying)
“목적을 가진 삶과 사려 깊은 죽음”(Intentional Living and Mindful Dying)(2011년 5월 13-15일, 펜들힐). 이번 주 펜들힐 주말 강좌의 제목이다. 사려 깊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목적을 가진 삶은 종종 들어봤는데 사려 깊은 죽음이란 어떻게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강좌에는 15명이 참석했다. 모두 연로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내가 가장 젊다. 강좌 진행자는 오랫동안 호스피스 경험을 한 간호사 출신 할머니이다. 자기 소개를 돌아가면서 한다. 이름과 이 강좌를 선택한 동기와 기대를 말한다. 그리고 3명씩 그룹을 이뤄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각자의 생각을 나눈다. 처음 나와 같은 그룹이 된 할머니들은 변호사와 간호학 은퇴 교수이다. 2박 3일간 참여자들은 대화를 많이 나눈다. 강좌 진행자는 직접 경험한 사례들을 이야기 해주면서 우리들의 대화를 이끌어간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거부하지도, 그렇다고 가볍게, 우습게 생각하지도 않는 길, 이것이 ‘마인드풀 다잉’이다. 마인드풀 죽음은 두 가지를 요청한다. 바로 용기와 사랑이다.
용기. 죽음을 직면하고 수용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죽어가는 자를 잘 보내주는 용기가 필요하다. 전자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용기이며, 후자는 죽어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용기이다. 죽음을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잘 맞이했던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 사람은 죽어가기 직전에 친구들과 가족들을 모두 초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영적 증언을 요청했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그 사람과의 살아있는 동안 맺었던 인연을 이야기하며 울고 웃었다. 끝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살아남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증언을 했다. “이게 나의 살아있는 동안의 마지막 증언”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이 마지막 증언을 경청한다. 그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삶과 사회정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을 살아남은 이들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편안하게 보였다.
살아남은 이로서 죽어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잘 보낸 한 아내의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남편은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뒤에 남은 가족들에 대한 염려, 아내를 홀로 남겨둔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 등이 그로 하여금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했다. 육신의 고통과 함께 영적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말했다. “염려하지 말고 잘 가세요 go well”. 이렇게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살아남은 이로서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사랑. 죽어가는 사람에게 제일 두려운 것은 홀로 죽어야 한다는 외로움과 고독이다. 외로움과 고독을 치유하고 극복하게 하는 힘은 사랑이다. 사랑은 내가 홀로 있지 않음을 확인시켜주는 영적인 힘이다. 사랑은 하나님과 나를 연결시키고, 가족과 친구와 연결하는 것이다. 비록 몸으로는 홀로 있을 지라도 사랑은 자신이 하나님과 사랑하는 이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죽음을 사려 깊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영적인 힘이다.
이 강좌를 들으면서 나는 목적 있는 삶과 사려 깊은 죽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1년 동안 월별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마치 파티처럼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이런 여유를 가진 사람은 의미와 보람으로 충만한 삶(Intentional Living)을 살 것이리라.
나를 돌아본다. 나는 죽어가는 이에게 잘 가시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함으로서 나는 오늘의 삶을 충만하게 살아가는가?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을 왜일까? 소멸되어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가? 망각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가? 이 세상 그리운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슬픔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가? 나는 이 세상에 더 살고 싶다는 갈망이 좌절된다는 것이 두렵다. 더 살아서 뭔가 해야 하는데 그것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죽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깝고 두렵고 슬프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내가 아직은 젊은가 보다.
한국에서 함께 지내던 사랑하는 후배 오용선 박사의 죽음 소식을 들으며 나는 깜짝 놀랐다. 아침 침묵 예배에 그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가 죽음에 임박해 있을 때 함께 있지 못했다는 것이 미안하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면, 나의 생명을 나누고자 했더라면, 그가 그리 일찍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생명이다. 죽어가는 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생명을 나누는 일이리라. 이 말은 살아있는 동안 시간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리라. 친구가 힘들게 죽어가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펜들힐에서 편안한 시간을 누리고 있지 않았나 생각하니 미안하다. 병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 속에 있는 그를 위해 매일 기도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종종 아침 예배 때마다 나는 그를 떠올리며 기도하곤 했다. 그러나 나의 기도가 부족했다. 그것이 미안하다.
오용선이 살아있을 때 그와 나는 생명 평화 학교를 만들어 가르치고 토론하며 세계 변혁을 위해 행동으로 참여하는 삶을 꿈꾸곤 했다. 이제 이 일은 나에게 남겨진 몫이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은 그 꿈의 실현을 향해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리라. 학교가 시작되면 그 안에 ‘오용선 강좌’를 만들어 그가 남긴 꿈과 정신과 희망을 이야기 해 볼 생각이다. 죽음과 삶은 하나로 이어진다.
아미쉬 마을에서
아미쉬 마을(Armish Village)에는 관광객을 위한 작은 모형의 아미쉬 마을이 있다. 처음 들어가면, 안내자가 아미쉬의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재세례파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서 독일 남부 지역과 스위스와 네덜란드 지역에서 메노 사이몬이라는 지도자를 따랐다고 붙여진 이름이 메노나이트(Mennonites)이다. 메노는 가톨릭 신부였지만 재세례파 신앙으로 회심하고 많은 신앙적 글을 써서 메노나이트 교회를 형성했다. 메노나이트 교회들 가운데는 세속사회 문명과 관계를 맺는 태도에서 진보적인 이들부터 보수적인 이들까지 다양한데 아미쉬는 보수적인 메노나이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세속 사회와 현대 문명과는 거리를 두고 아직도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한다. 미국의 많은 사람들은 현대문명과는 아랑곳없이 옛스런 신앙생활을 사는 아미쉬들을 보고자 이 마을을 찾아온다.
아미쉬 마을 안내자는 아미쉬의 가정 생활을 안내한다. 아미쉬들은 가정생활을 외부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관광객들은 매우 궁금할 수 밖에 없다. 모형으로 된 아미쉬 가정은 침실과 아이들 방으로 단순하다. 아미쉬는 피임이나 낙태를 금하기 때문에 보통 4-5명 이상 자녀들이 있다고 한다. 비교적 일찍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다. 옷은 엄마가 손수 만들고, 첫 아이의 옷은 동생이 물려받아 입는다. 검소한 생활이다. 벽에 걸린 옷걸이에 주로 검정색과 흰색으로 된 옷들이 크기대로 걸려있는 것이 재미있다. 아미쉬들은 되도록 색깔 있는 옷은 잘 안 입는다고 한다. 사치한 삶을 살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전기는 쓰지 않고, 가스로 전등을 켜고 요리를 한다.
반(Barn)은 큰 창고 건물인데 말과 나귀가 그 안에 있다. 그 옆으로 붙여 지은 가축 우리에는 돼지, 염소, 양, 닭장이 있다. 예전 우리네 가축 우리 같은데 비교적 동물권이 보장된 환경처럼 보인다.
아미쉬 공동체는 학교를 중시한다. 학교 교실에는 나무 책상 걸상들과 칠판이 걸려 있다. 내가 어릴 적 다니던 학교 교실과 비슷하다. 아미쉬 어린이들은 한 교실에서 유치원부터 고학년까지 같이 배운다. 칠판이 여러 칸으로 나뉘어진 것은 학년별 구분이다. 앞에는 저학년 어린이들을 위한 작고 낮은 책상이 있고 뒷쪽으로는 고학년 책상이 있다. 교실 뒷벽에는 우리나라 초등학교처럼 그림들과 표어들이 붙어있다. 대부분 표어들이 성경 귀절이다. 앞쪽 벽에 굵은 글씨로 쓰여있는 글이 인상 깊다. 아마도 아미쉬 학교의 교육 정신을 말하는 듯 보여 적어본다.
“네가 다른 친구보다 더 빠르냐 느리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너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No matter if you are quicker or slower than the rest. The main thing is to do your best.)
“자녀들이여, 너희 부모에 순종하라.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Children, obey your parents for this pleases the Lord.)
전통을 지키며 삶의 미덕을 다시 깨닫는다. 전통이라고 다 고루하고 답답한 것은 아니리라. 아미쉬 마을에서 우리의 행복과 불행이 바깥 환경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것임을 깨닫는다. (2011년 5월 22일)
정지석 l 목사는 영국 우드부룩(Woodbrooke)대학원에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KNCC,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UNESCO-APEIU 국제이해교육원에서 평화교육가로 일했으며, 성공회대와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평화윤리와 교육을 강의했다. 한국 YMCA 생명평화센터 소장이며, 작년 펜들힐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현재는 철원에서 국경선 평화학교 설립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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