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2012년 6월호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13) |
펜들힐 일기(3) |
아침 침묵예배(1)
한 20여분 지났을까. 내 옆에 앉아있던 여인이 일어나서 영적 증언을 하기 시작한다. 영적 증언이란 깊은 침묵 속에서부터 들여오는 내면의 소리(퀘이커들은 이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다)를 사람들 앞에 말하는 것이다. 그 증언은 아프리카 케냐의 한 시골 학교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그곳은 전기도 없고, 먹을 물도 없는 아주 외진 시골 마을이라 한다. 미국의 퀘이커 두 사람이 ‘공정하게 나누는 세계’(Fair Sharing World)의 일원들과 함께 그 시골에 있는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총을 든 젊은이들이 뛰어들어 그들을 위협하고 돈과 물품을 약탈해 갔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여인은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을 기억하자고 한다. 총을 들고 뛰어 든 젊은 약탈자들의 형편도 함께 기억하자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국 땅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면서 증언을 끝맺는다.
나는 그 증언을 들으면서 가슴 깊이 공명하는 소리를 듣는다. 무언가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이 있다. 나는 한국에서 두 딸을 데리고 미국에 와 있다. 딸들은 펜들힐 근처 공립학교에 다닌다. 비교적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에 있는 학교이다. 이런 조건과 환경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세계의 어디서인가 고통과 불안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 그런데 오늘 아침 케냐의 시골 마을에서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염려하며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밤을 보내고 있는 어린이들에 대한 증언을 들으면서 나는 정신이 번쩍 들고 새로운 깨우침을 갖는다. 내 딸들이 그런 경우에 있다면 얼마나 가슴 아플 것인가, 케냐 시골 마을의 어린이들의 부모들 역시 같은 심정일 것이다. 내 자식이 사랑스럽고, 보살피고 양육할 책임감이 있다면, 다른 자식에 대한, 곤경에 빠져 구호를 호소하는 아이들을 위한 책임감을 또한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 아침 여인의 증언은 그것을 깨우친다. 내 안의 양심의 가책은 그것을 망각하며 살아가는 무딘 양심을 깨뜨린 것이다. 내 자식만을 위해 삶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매일 매일 회심이 필요한 일이다.
총을 들고 난입했던 그 청년 약탈자의 형편까지 성찰해보자는 증언 역시 내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퀘이커의 초월적 평등의 영성이 나의 묵은 사고 습관을 깨뜨린 아침 침묵 예배이다.
아침 침묵예배(2)
오늘 아침 침묵 중에 내 기억 밑바닥에 놓여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동성애 문제를 다룬 새길 교회 토론 모임에서의 일이었다. 나는 그 모임의 사회를 맡았었다. 여성과 남성 동성애자 두 사람을 초청한 토론회의 목적은 동성애자들로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다. 청중들은 동성애자에 대하여 이해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뭔가 거리끼고, 마음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임의 사회를 맡았던 나 역시 사회를 맡고 싶지 않은 낯설고 무지한 주제여서 말과 표현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이 있었다. 토론자로 나선 여성 동성애자는 교회에 나가고 싶어도 교회에서 수용해주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을 토로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다니고 싶은데 왜 교회는 동성애자를 받아들여주지 않느냐.’ 이 호소는 가슴 아프게 부딪쳤다. 다른 패널 토론자인 여성 신학자는 교회의 반성과 변화를 촉구했다. ‘차이를 수용할 줄 아는 교회와 기독교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났다. 그는 동성애자 옹호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좀 거슬렸던 것 같다. 그는 동성애자와 여신학자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질문했다. ‘동성애자에 대한 네 입장은 어떤 것인가? 그때 나는 좀 난처 했던 것 같다. 나 역시 동성애에 대한 입장이 모 호 했기 때문이다. 모든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기본 입장에서는 동성애자도 제외될 수 없다는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동성애 행위를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입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의 인권은 존중하자면서, 동성애자들을 옹호할 수 없다는 이 입장은 얼마나 애매모호한 것인가? 그 동안 나는 동성애 문제를 신학적으로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냥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말하라고 하니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것 같다. ‘하나님의 뜻이란 게 얼마나 깊고 넓은 것인지 나 같은 사람이 잘 알 수 없다.’ 내 대답은 회피였다. 예스와 노의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못한 사람의 답변이었다. 이런 대답에 청중들은 웃었고, 모임 후에 어떤 사람은 내게 와서 우둔한 질문(아마도 동성애자에 우호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런 도전적 질문이 매우 언짢은 것이었나 보다)에 아주 멋진 카운터 펀치를 날린 대답이라고 기분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가슴 한편이 무거웠다. 그 대답을 하면서 아차, 잘못했구나 하는 후회스런 마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질문을 한 사람에게 진지하지 못하다는 자책감 같은 것이었다. 생각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간에 질문자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을 것인데 내 대답에 그의 질문은 일시에 어리석은 질문처럼 되어 버렸다. 청중들의 반응을 보면서 나는 미안한 마음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만회할 기회는 없었다. 이 기억이 오늘 아침 펜들힐 침묵 예배시간에 떠오르며 그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오늘 아침 묵상 속에서 그 질문을 했던 사람에게 사과하는 마음이 생긴다. 나의 회피적인 태도를 반성한다.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애매모호한 타협을 했던 나의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반성해 본다. 동성애 문제에 대해 좀더 공부해 보기로 한다.
아침 침묵예배(3)
펜들힐의 하루는 아침 침묵 예배와 함께 시작된다.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퀘이커의 예배 방식이다. 펜들힐 중앙에 위치한 조그맣고 오래된 이층 건물 이름이 반(Barn)인데, 그 안에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가 4각형으로 놓여있고, 펜들힐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곳에 나와 앉아 예배를 드린다. 특별한 신앙 신조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단지 침묵으로 앉아있는 것이니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도 아무런 부담을 갖지 않고 조용히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평소 조용한 삶을 좋아한 사람이나, 바쁜 일상에서 잠시나마 자기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 시간을 퍽 좋아한다.
이제 나도 이 시간을 즐긴다. 사실 정신 없이 바쁜 생활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조용한 침묵 가운데서 앉아 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성격이 급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일수록 침묵의 시간은 요긴하다. 침묵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막상 침묵시간을 가지면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진다. 침묵하면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있다는 것이 뭔가 어색하고, 시간 낭비 같고, 불안한가 보다. 늘 뭔가 눈에 보이는 목적을 목표로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의미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앉아 보내는 시간이 힘들다. 오늘 우리 시대 교회 신자들의 삶의 모습도 이런 것은 아닐까? 신앙 생활은 어떤가? 뭔가 가시적인 것을 하고 있어야만 잘 믿고 잘 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찬양도 힘차게 부르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해도 있는 힘껏 유창하게 소리를 질러가면서 해야 뭔가 잘 믿고 사는 것 같다. 조용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시원치 않다. 조용조용 설교하는 것보다 웅변처럼 사람 가슴을 뒤흔들어 놓는 설교를 해야 가슴도 시원하고 뭔가 느낌이 온다. 다른 사람 이야기 할 것 없다. 나 자신 어떤가. 침묵 가운데 1시간 앉아있는 것이 어떤가.
조용하게 앉아 있으면 내면의 움직임에 민감해진다. 속의 소리를 듣게 된다. 침묵은 외적 신앙에서 내적 신앙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처음에는 쉽지 않지만 자꾸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요즘 펜들힐 아침 침묵 예배시간이 좋다. 침묵 가운데 증언하는 이들에 귀 기울여 듣는 것도 좋다. 침묵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다리는, 이런 영적 전통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취했던 모습과 유사한 것이었다고 깨닫는다. 때때로 예수는 몰려드는 군중을 피해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영적 체험가들은 조용한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곤 했다. 침묵 가운데 영적 증언은 묘한 불일치이다. 말을 하는 순간 형식적인 침묵은 깨어진다. 그러나 퀘이커들은 침묵 가운데 깨진 침묵을 듣는다. 침묵은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침묵이 된다. 침묵을 잘해야 메시지도 잘 듣는다. 이것을 아침 침묵 예배 시간에 깨닫는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를 입으로 증언하는 사람의 메시지, 둘은 같은 것이지만, 둘 모두 침묵 가운데서 가장 잘 들을 수 있다.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의 영적 체험은 그이의 영적 증언의 메시지를 듣는 공동체의 사람들 모두 영적 체험이 된다. 이런 영적 체험이 일어나는 침묵,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다리는 침묵, 메신저의 증언을 귀 기울여 들으려는 침묵을 퀘이커들은 적극적인 침묵(Active silence) 혹은 듣는 침묵(Listening Silence)라고 부른다. 아침 펜들힐 침묵 예배에서 오늘 우리 한국교회를 생각해 본다.
치유자가 되려는 용기
펜들힐 강좌 가운데 ‘퀘이커리즘의 치유 전통’(Healing Tradition in Quakerism)을 수강했다. 나 자신을 많이 뒤돌아보고, 편안한 쉼도 덩달아 있었던 선물 같은 강좌였다. 종강을 하면서 내 안에서 발견되는 점들이 있다.
첫째, 치유자로서의 나의 발견이다. 나는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치유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치유자였고 지금도 내 안에서, 우리들 사이에서 치유자로 존재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악령을 쫓아내고, 모든 질병을 낫게 하고, 모든 병을 치유하는 권위와 능력을 준다.(마 10:1; 눅 6:12; 막 3:15) 나는 이 성서를 읽으면서도 무시하고 살았다. 나는 아픈 자를 위해 기도했으나 이 치유 능력 없이 기도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치유자로서 확신을 갖고 기도할 수 있다.
둘째, 사랑의 발견이다. 사랑은 치유과정의 핵심이다. 사랑은 치유 능력의 핵심이다. 이 발견은 나에게 커다란 깨우침이다. 사랑이 없이는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 동안 나는 아픈 이를 위해 기도할 때 사랑을 품고 했던가. 사랑은 내 기도를 진실하고 간절하게 치유하는 기도가 되게 할 것이다. “모든 것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고전 13:2)
셋째, 용기이다. 치유자가 되고자 하는 용기, 사랑하려는 용기, 하나님이 내게 치유하는 능력을 주셨음을 믿는 용기,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는다는 것을 신뢰하려는 용기, 그리고 내 안에 있는(부여된) 치유하는 힘을 실천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 동안 나는 아픈 이를 위해 나의 치유 능력을 사용하는데 주저했다. 이제 용기를 내자. 왜, 무엇이 주저하게 하는가? 사랑하면 용기가 생긴다. 사랑이 있는데 무엇을 주저하는가.
한가지 숙제가 마음 속에 남는다. 어떻게 이 치유의 능력은 사회적으로 확장될 수 있을까? 어떻게 개인적 치유자임과 동시에 사회적 치유자(Social Healer)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아픈 한 사람을 치유하면서, 사회를 치유하는 치유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항상 깨어있는 마음(Mindfulness)
일상 삶에 늘 깨어 사는 삶은 종교적 구도자의 삶이다. 예수는 늘 깨어 있으라고 가르쳤으며, 붓다는 깨어있는 각성심을 강조했다. 고요한 가운데 하는 불교의 참선 수행은 이 깨어있음을 향한 수행이다. 기독교 전통에도 고요한 가운데 깨어 기도하는 명상의 전통이 있다. 퀘이커는 조용한 침묵 가운데 예배한다.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는 침묵을 한다. 기독교는 성서와 예전을 강조하는 종교가 되어있다. 개신교회는 통성기도라고 하여 열렬하게 소리지르며 기도하는 전통이 생겨서 일반 사람들에게는 시끄러운 종교처럼 되어있다. 기독교 전통 안에도 고요한 가운데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전통이 있다는 각성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현대 서구 기독교인들은 고요한 가운데 종교적 체험을 하는 불교에 몰려들고 있다. 불교의 선 명상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교적 명상과 퀘이커리즘의 침묵은 차이가 있는 것인가 비슷한 것인가. 틱낫한은 불교 선 명상의 핵심은 일상 삶에 깨어있는 마음(Mindfulness)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설명하는 ‘매사에 깨어사는 삶과 집중력을 기르는 일’, 이것은 내가 체험한 퀘이커 침묵에서 불교적 명상과 비슷하다 느껴진 점들이다.
매사에 깨어 사는 삶 To shed light on all things? 모든 것들에 빛을 비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만약 내가 깨어있는 마음에 살지 못하고 망각의 삶을 산다면 나는 까뮈(Albert Camus)가 ‘이방인’에서 묘사한대로 죽은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오랜 옛날 선승들은 ‘만약 우리가 망각 속에 산다면 우리는 한낱 꿈속에서 죽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처럼 사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생명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가 하는 일들에 깨어있고 마음을 쓰는 것이다. 우리는 명상 속에서 먹고 마시고 앉아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망각하는 삶 속에서 우리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집중력을 기르는 일To produce the power of concentration?
항상 깨어있는 마음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고 주의를 기울이도록 돕는다. 우리는 사회에 갇혀 사는 죄수들이다. 우리 에너지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우리 몸과 마음은 조화롭지 못하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하고 있는가, 생각하는가를 알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주변환경과 잘못된 인식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식의 등불이 켜질 때, 우리 존재 전체도 불이 켜지며, 생각과 감정 또한 불이 켜진다. 자기 신뢰감이 다시 형성되고, 망상의 그림자는 더 이상 우리를 뒤덮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의 집중력은 최고로 발전한다. 우리는 이전과 같이 손을 씻고 옷을 입고 매일 행동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과 말과 생각을 안다. 항상 깨어있는 삶은 초심자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평생 하는 일이다. 붓다도 그렇게 살았다. 깨어있는 마음과 집중의 힘은 인간 역사상 위대한 사람들이 지녔던 영적인 힘이다.
함석헌 선생은 불교 명상과 퀘이커 침묵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구태여 말한다면 불교 명상은 비움을 강조한다면 퀘이커들은 침묵 속에서 채워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했다. ‘깨어살라’ 이것은 모든 성현의 가르침이 아닌가. 예수님도 ‘늘 깨어 기도하라’ 하셨다. 오늘 아침은 조용한 침묵 가운데 늘 깨어 사는 삶을 갈망해 본다.
아무거나 영성 - <푸른 마을 펜들힐 교회> 가정 예배 이야기
펜들힐에서 맞이하는 일요일, 딸 둘과 옆집 꼬마가 참석한 가족 예배를 드린다. 둘째 딸 하영이가 오늘 예배 인도를 한다. 제 방에 들어가 뭔가를 쓱쓱 써 갖고 나온다. 예배 순서지이다. 오전 11시 예배가 시작된다.
첫 번째 순서. 서로 인사.
어디서 뭘 좀 본 모양이다. 예배 순서중에 서로 인사하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가장 인상깊었나 보다. 늘 같이 붙어 사는 가족 사이어서 특별히 소개하고 인사할 것도 없는 탓에 어정쩡한 순간, 인도자 하영이가 먼저 옆에 앉은 옆집 꼬마 서영이를 포옹한다. 덩달아 아빠와 첫째 딸 세온이도 서로 포옹하며 인사한다. 그렇게 하고 보니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통상 인사 소개는 예배 나중 순서로 하는 것인데, 처음 순서에 하는 것도 좋겠다. 좋은 배움이다.
두 번째 순서. 시편 23편.
시편 23편은 우리 가족의 성경말씀이다. 한국에 살 때도 매일 식사 시간 기도문으로 함께 읽었던 성경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외우고 있는 구절이다. 새길교회 1부 예배에 참석해 본 경험이 있는 하영이는 예배 순서에 성경읽기를 넣어야 하는 것을 기억하고 이 순서를 넣었나 보다. 하영이의 선창으로 모두 한 목소리로 시편 23편을 소리 내어 읽는다. 성경 구절을 모두 외워 함께 소리 내어 읽는 것도 퍽 괜찮다. 영적인 일치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세 번째 순서.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문장은 좀 서툴지만 의도는 매우 신학적이다. 그런데 참석자들은 순간 당황스럽다. 하영이가 먼저 예수님에 대한 자기 의견을 말한다. 예수님은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원수를 사랑하는 분이라고 한다. 어린 하영이의 입에서 듣게 되는 산상수훈의 말씀이 귀에 꽂힌다. 녀석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나 하는 말일까? 세온이 순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이고 사랑이 많은 분이시라는 둥 나름대로 자기가 아는 예수님을 말하는데 매우 신학적이다. 사랑의 예수님, 자연스레 우리들 오늘 가족 예배의 주제말씀으로 떠오른다.
네 번째 순서. 목사님의 축복.
이것도 어디서 보긴 본 모양의 순서이다. 이 순서에 접하자 내 마음이 잠시 숙연해지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된다. 세온, 하영, 서영을 위해 차례로 기도하고, 한국에 있는 엄마, 친구, 그리고 요즘 아이들이 염려하는 한국에 두고 온 햄스터를 위해 기도한다. 덕분에 햄스터의 안녕을 위해 축복기도 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다섯번째 순서. 정세온의 찬양.
모든 참석자들을 예배 순서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인도자의 마음이 돋보이는 순서이다. 요즘 제법 컷다고 사람들 앞에서 노래부르기를 꺼려하는 세온이지만, 경건한 예배 인도자의 권위를 거슬리지 못하고 일어나 찬양한다. 어린이 찬송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모두가 한 목소리로 찬양한다.
여섯번째 순서. 예배 끝의 기도 - 아무거나 -
철자가 틀렸지만 예배 참석자 모두가 다 잘 이해한다. 이것이 예배 끝나는 기도순서라는 것을. 예배는 기도로 끝난다는 이것도 어디서 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옆에 “아무거나’ 라고 써 넣은 데서 예배 인도자의 고뇌가 엿보인다. 뭔가 기도로 예배를 끝마쳐야 할 것 같은데, 누굴 시키기도 그렇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하나, 무슨 기도를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이 된 듯 하다. 무언가 제시는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끝에 나온 묘안이 “아무거나”인 듯하다.
인도자 하영이는 아무거나 하자고 하는데, 참석자들이 어리둥절하니… 난감… 그래서 주기도문으로 합의하여 예배를 은혜로이 마친다. 인도자 하영이는 비로소 긴장이 좀 풀리는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예배 끝’을 외친다. 아무거나에 깃든 영성이 내 가슴 속 깊이 여운으로 남는다.
정지석 l 목사는 영국 우드부룩(Woodbrooke)대학원에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KNCC,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UNESCO-APEIU 국제이해교육원에서 평화교육가로 일했으며, 성공회대와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평화윤리와 교육을 강의했다. 한국 YMCA 생명평화센터 소장이며, 작년 펜들힐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현재는 철원에서 국경선 평화학교 설립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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