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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퀘이커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8) /기독교사상2012년1월호

by 마리산인1324 2013. 2. 14.

<기독교사상> 2012년 1월호

http://www.clsk.org/gisang/gisang_view.asp?tab=sasang_theologry&flag=01&board_idx=706&page=3&block=0&theologry_sec=&set_year=2013&set_month=01&view_year=2012&view_month=01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8)
함석헌과 퀘이커리즘

 

- 정지석 -

 

‘이미 퀘이커’(already Quaker) 함석헌
1962년 미국에 가게 되었을 때 함석헌은 미국 퀘이커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 퀘이커 성인 학교인 펜들힐에서 한 학기를 머물면서 퀘이커리즘을 공부하고 경험했다. 그때 그의 나이 예순 둘이었다. 이미 원숙한 종교 사상가요 구도자로서의 면모를 갖고 있던 때이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노장 사상, 그리고 불교 경전과 힌두교의 바가바드기타 같은 동서양의 경전을 두루 읽으며 함석헌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새로운 종교를 모색했고, 또 그 출현을 기다렸다. 그런 그에게 퀘이커리즘은 새로운 종교의 가능성을 잉태한 종교처럼 보였다. 특히 삶에서 증언되고 실천되는 퀘이커들의 신앙과 실천의 합일된 삶의 모습은 함석헌을 크게 감동시켰고, 후에 함석헌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퀘이커에 입교하고자 하는 의욕을 갖게 했다. 퀘이커 친구들의 배려에 고마운 마음이 든 함석헌은 “이제 내가 퀘이커가 되어야겠습니다.”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퀘이커는 “함 선생님, 당신은 이미 퀘이커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퀘이커 모임에는 회원이 되는 특별한 절차를 밟는 과정이 있다. 그러나 보통 퀘이커들은 회원이 되기를 권하지 않으며, 회원이 되지 않았다고 하여도 모임 활동에서 아무런 차별이 없다. 오히려 회원이 되면 공식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의무 사항이 있을 뿐이다. 퀘이커가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것은 회원 가입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적 인정이 중요한 조건이며 더 중요한 점은 퀘이커다운 진리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이제 퀘이커가 되어야겠다고 했을 때, 퀘이커 친구의 눈에 비친 함석헌은 ‘이미 퀘이커’(already Quaker)였던 것이다. 퀘이커 예배 모임에 참여하면 모두 ‘친구’(friend)라고 부른다. ‘친구’는 퀘이커들이 서로 부르는 호칭이다. 함석헌은 펜들힐에서 쓴 글에서 예수가 자신을 배반한 가룟 유다를 ‘친구여’ 라고 불렀다고 쓰고 있다. 좋은 친구가 되는 일은 퀘이커들이 추구하는 삶의 길이다. 이것은 함석헌이 평생 갈망했던 길이기도 하다. 함석헌은 그 갈망을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로 표현한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미래의 종교
함석헌은 퀘이커리즘을 매우 좋아했는데 특히 세 가지 점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 높게 평가했다. 첫째는 기록을 잘 남기는 퀘이커리즘에게서 미래의 종교성을 본 것이며, 둘째는 고난 받는 자매 형제를 협력하여 돕는 퀘이커 공동체의 형제애에서 고난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영성을 느낀 것이며, 셋째는 국가들의 전쟁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퀘이커들의 평화 신앙 실천의 모습에서 평화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런 퀘이커리즘의 면모에서 함석헌은 미래의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예견했다.


함석헌은 방대한 역사 기록 자료를 가진 퀘이커리즘을 보면서 “기록을 충실히 남기는 종교는 미래를 준비하는 종교”라고 느꼈다. 퀘이커들은 모임의 회의 자료를 비롯하여 역사적 활동 자료, 개인의 신앙 증언과 삶의 자료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열심이다. 역사적 기록을 충실히 남기려는 것은 미래 후손을 위한 작업이다. 퀘이커들은 공동체의 내부 운영과 결정 사항, 그리고 사회적 증언과 활동 내용을 되도록 세심하게 기록으로 남긴다. 그래서 회의를 기록하는 서기(Recording Clerk)의 역할은 퀘이커 모임에서 매우 중요하다.


나 역시 퀘이커리즘을 연구하는 동안 퀘이커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방대한 기록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차곡차곡 보존되어 있는 기록물들은 수백 년 전 퀘이커들이 어떤 신앙과 삶을 추구했는지를 소상하게 볼 수 있는 자료였다. 영국 우드부룩 대학원에는 퀘이커 도서관이 별도로 있으며, 미국 스와스모어 대학에도 퀘이커 역사 도서관이 별도로 있다. 나는 종종 퀘이커 도서관에서 후손들이 선조들의 신앙과 삶을 찾아 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이 속한 퀘이커 모임의 역사를 찾아보러 오는 퀘이커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우리 신학교에는 신학 서적들이 소장되어 있다면 퀘이커 도서관에는 퀘이커 신앙의 선배들의 삶의 이야기들이 소장되어 있다. 퀘이커들은 현재의 삶이 미래의 존재기반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며 그러므로 현재의 삶과 신앙의 기록을 남기는 일을 중시한다. 이 삶과 신앙의 기록은 그들이 삶의 현실에서 만나고 체험한 하나님을 기록해 놓는 일과 같다. 하나님의 계시 사건은 성서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삶에서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졌기에 퀘이커들은 현재에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난 기록을 남기며 그것은 미래에도 영원히 계속되어 질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현재의 삶과 신앙의 기록을 남기는데 충실했던 퀘이커들을 보면서 함석헌은 “퀘이커리즘은 미래를 향해 열린 종교”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록을 남긴 퀘이커들은 모두 역사가이며 신학자라고 말 할 수 있다. 우리 교회들 가운데서도 교회 역사를 기록하고 남기는데 열심인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대개 50주년 기념, 또는 100주년 기념의 형식으로 한다. 그리고 교회사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시점에서 미래 세대를 위해 기록을 남긴다기보다는 과거를 정리해 놓는다는 의미가 더 크고, 자기 자신들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역사가의 작업에 의존으로써 제 3자의 입장이 반영되고 편집될 수 밖에 없다. 퀘이커의 기록정신은 미래로 전진하는 종교가 될 것이냐 아니면 과거를 정리하는 종교로 남을 것이냐를 우리로 하여금 성찰하게 한다.

고난의 영성
퀘이커들은 초기 운동 당시 많은 이들이 종종 감옥에 갇혔고, 매를 맞고 병이 들곤 했다. 많은 이들이 죽었고 배고픔에 시달렸다. 퀘이커 자녀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이런 극심한 핍박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퀘이커 운동이 존속할 수 있었던 데에는 고난의 짐을 함께 나누려는 공동체적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나는 퀘이커 고난의 영성이라 말하고 싶다. 동병상련의 영성이라고 할까? 고난을 겪어 본 사람들은 고난 받는 사람과 친밀감이 있으며, 도우려는 우정이 있다. 함석헌은 퀘이커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핍박을 받을 때 서로 도우면서 그것을 이겨갔다는 이야기에 크게 감동했다. 가장이 감옥에 가게 되면 무엇보다 힘든 것은 밖에 남은 가족들의 생계이다. 그런데 퀘이커들은 협력하여 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감옥에 들어간 동료 퀘이커의 옥바라지를 한다. 감옥에 가게 될 때 밖에 남은 가족의 생계 걱정을 덜 수 있도록 서로 돕는 믿음의 공동체인 퀘이커를 함석헌은 참으로 부러워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공동체의 본질이 아닌가?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신앙 공동체에서 초대 교회의 부활을 느꼈던 듯하다. 고난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신앙 공동체는 결코 실패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함석헌의 감동이 진했던 것은 그 자신 감옥에 갔던 체험 때문이리라.


퀘이커들은 고난의 영성을 퀘이커리즘의 핵심 영성으로 계승해 오고 있다. 19세기 이래 퀘이커들은 비교적 안정된 삶을 회복했고, 지금은 영미권에서 상층계급을 유지하는 이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고난의 경험을 망각하지 않고 신앙의 귀중한 유산으로 이어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고난위원회(Suffering Committee)이다. 모든 퀘이커 모임 안에는 고난위원회가 있으며, 퀘이커 공동체 안에서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고난당하는 이들의 외침에 응답한다. 퀘이커 고난의 영성은 퀘이커 공동체 안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실천된다. 세상에 고난 받는 사람들의 소식이 들려오면 퀘이커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고난에 응답하는 일은 퀘이커 신앙 실천의 핵심이 되어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의 고난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이런 사람들의 문제를 어떻게 다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퀘이커들은 말한다. 우리는 비록 작은 수효의 규모이지만 이 세상의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와 실질적 도움을 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퀘이커들의 고난의 영성은 자신들이 가진 재물을 통해 위급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구호와 자선활동에서부터 사회 구조적 불의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두루 포함한다. 함석헌이 정치적 억압을 받고 옥에 갇혔을 때 영국과 미국,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 있는 퀘이커들은 한국 정부에 항의 서한을 보내고 국제 여론을 일으켰다. 이 일을 주도한 곳이 고난위원회이다. 오늘날도 고난 위원회는 퀘이커 정의 평화 활동의 주요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전쟁이나 자연 재해가 일어나 사람들이 고난당할 때 퀘이커 고난위원회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초기 퀘이커들의 경험처럼 오늘날도 퀘이커 신앙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다가 감옥에 갇힌 이의 가족들을 돕는 일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렇게 뒤를 봐주는 든든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신념과 진리에 투신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함석헌은 그런 믿음의 공동체들이 한국에도 많이 생기기를 갈망했다. 이런 형제애의 실천이 일어나는 곳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며, 이런 교회들이 있음으로 해서 예수의 운동은 오늘날도 역사 속에서 활발하게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고난 받는 사람들과 구체적인 연대감을 나누는 종교는 미래의 새로운 종교가 될 수 있다고 함석헌은 본 것이다.

평화의 영성
함석헌은 퀘이커들과 폭넓은 교제를 가졌고 퀘이커 세계 모임에 초대되곤 했다. 특히 미국 퀘이커들은 함석헌을 좋아했다. 1967년 미국 캐롤라이나에 있는 퀘이커 대학인 길포드 대학에서 세계 퀘이커 대회가 열렸을 때 함석헌도 초청받아 참가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는 반전 운동이 드높던 시절이었는데, 이 운동에 퀘이커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세계 퀘이커 대회 분위기도 베트남 반전 운동으로 넘쳤다. 함석헌은 일찍이 퀘이커의 반전 운동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퀘이커들의 반전 평화 운동을 체험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귀국한 후에 함석헌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는 베트남 파병에 반대하는 단식을 시작했다. 여론은 베트남 파병이 경제 발전과 군사력 증강을 위해 좋은 기회라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던 때였다. 교회도 베트남 파병을 지지했다. 함석헌의 베트남 파병 반대 단식은 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외로울수록 그의 신념은 더욱 확고했다.


한국교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공산당에 맞서 싸우는 전쟁에는 적극적인 지지를 한다.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전쟁은 신앙적 사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her)도 처음에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공산주의와의 전쟁으로 생각하고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입장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베트남 반전 운동으로 돌아섰다. 한국 교회는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베트남 파병을 지지했다.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 총무가 지지했고, 대학생 선교회(CCC)의 김준곤 목사는 공산주의와의 전쟁에 기독 대학생들이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정당한 전쟁론이다.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인일지라도 죽고 죽이는 전쟁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생각은 달랐다. 전쟁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그런 이유들은 그럴 듯 하게 들려도 전쟁은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죄악일 뿐이다. 베트남으로 가면 돈 벌고 국가도 부강해질 수 있다는 선전은 한국 민중들의 욕망을 부추긴 것이다. 함석헌은 아무리 돈이 좋고 강력한 무기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기본 양심을 지키는 것이 올바른 민족의 길이라 믿었고, 한국교회가 민족 양심을 일깨우는 대신 국가의 부국강병론을 찬동하여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에 크게 실망했다. 공산주의와의 전쟁에 대한 입장에서도 함석헌은 한국교회의 입장과 달랐다. 함석헌은 신의주에서 공산당에 잡혀 고문과 죽을 고비를 넘긴 체험적 반공주의자였지만, 그렇다고 공산주의자들을 쳐부수기 위한 전쟁을 정당한 전쟁이라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는 어떤 이유로도 전쟁을 찬성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비록 공산주의자가 적일지라도 그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함석헌의 평화영성은 퀘이커리즘과 같다. 함석헌은 퀘이커리즘을 평화의 종교로서 좋아했다. 함석헌이 예순이 넘어 미국 퀘이커 학교인 펜들힐에 찾아가고 그곳에서 퀘이커리즘을 공부한 것은 그 기본 동기가 평화의 종교로서 퀘이커리즘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 퀘이커 평화단체로서 194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미국 퀘이커 봉사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AFSC)는 함석헌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한국 퀘이커로서 함석헌의 비폭력 민주화 인권 운동에 대한 신념과 헌신이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두 종교철학자들: 함석헌과 존 힉(John Hick)
함석헌과 퀘이커리즘을 연결하여 소개하는 이 지면을 통해 한가지 분명하게 구별해 둘 필요가 있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함석헌의 종교성을 말할 때 무교회주의와 퀘이커리즘을 혼동하여 말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함석헌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무교회주의자이며 퀘이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잘 구별해서 해야 한다. 무교회주의와 퀘이커리즘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둘을 같은 것이거나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둘은 다르다. 출현한 역사적 배경뿐만 아니라 신앙 추구와 형식도 다르다. 무교회주의는 우치무라 간조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일어난 신앙운동이다. 무교회 형식을 띠고 있다고 해서 무교회 운동이라 불린 것이다. 퀘이커리즘은 조지 폭스를 중심으로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이다. 무교회주의는 성경에 기초한 복음주의 신앙을 추구한다면 퀘이커리즘은 하나님과의 직접 체험 신앙을 추구한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무교회주의와 퀘이커리즘을 구별하지 않고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둘 다 목사를 두지 않고, 성례전도 없이 일반 교회와는 달리형식을 중시하지 않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제도 교회에 익숙한 신자들의 눈으로 보아서는 이들의 비제도적인 모임 형태가 둘을 유사한 종교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무교회 운동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는 미국 유학 시절 퀘이커리즘을 경험했지만, 그의 무교회 운동이 퀘이커리즘의 무형식의 신앙에 영향을 받아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함석헌의 신앙 여정이 종국에 퀘이커리즘과 만난 것을 매우 의미 있게 본다. 그는 유교집안에서 자라나 어린 시절 선교사들의 전해 준 근본주의 신앙으로 기독교에 입문했고 이십대에 무교회 신앙을 체험했다. 무교회주의 신앙인으로서 함석헌은 제도교회와 결별한 것이다. 사십대에 동양 종교와 사상을 공부하기 시작한 이래 오십 대에 무교회주의의 기독교 복음주의 신앙과는 결별 선언을 하고 보편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나아갔다. 이런 신앙 여정 이후 함석헌이 퀘이커리즘을 만난 것은 매우 자연스런 흐름처럼 보인다. 퀘이커리즘은 개인의 내밀한 신앙 체험을 존중하면서도 기독교 복음주의를 넘어서 보편주의 신앙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육십 대부터 퀘이커에 본격적으로 입문하여 세계 퀘이커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한국 퀘이커 모임을 이끌었다. 그는 동서양 종교 사상을 두루 포괄하는 보편적 종교 진리를 추구하면서 퀘이커리즘과 어울렸다. 자유로운 종교적 영성의 구도자(Seeker)로서 함석헌과 퀘이커리즘은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동서양의 종교를 두루 섭렵하면서 종교 다원주의 시대를 미리 살았고 준비했던 종교 철학자였다. 영국의 종교철학자 존 힉(John Hick)은 자신의 종교적 여정을 설명하면서 오늘 자신이 닻을 내리고 있는 곳은 퀘이커라고 말한다. 장로교 목사이기도 한 그가 요즘은 버밍험의 퀘이커 모임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두 종교 철학자들의 신앙 여정을 통해 우리는 단일한 종교적 교리를 추종하던 시대에서 다양하고 풍요로운 영성 체험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종교의 시대의 도래를 예견해 본다면 억측일까?


무교회주의와 퀘이커리즘은 정통 기독교가 아니며 사이비가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현상은 자신의 신앙과 다르거나 낯선 종파에 대해서 이단으로 정죄하는데 익숙한 신앙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교회주의와 퀘이커리즘은 독특한 자기 나름의 예배 형식과 신앙체험을 추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이 제도 교회와 다른 모습을 갖는다고 하여 기독교를 빙자하여 사리사욕을 취하거나 신도들을 파탄으로 이끄는 사이비 이단 종교들과 같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일본의 무교회 신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는 데 열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믿는 복음주의 신앙을 신봉한다. 이들은 일본 내에서 지성 있는 크리스찬으로 알려져 있다. 퀘이커리즘은 미국 영국에서는 오랜 전통을 가진 종교개혁 교회이며 현재는 지식인들이 많이 찾는 기독교 소종파 교회이다. 미국 퀘이커들은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아직도 한국 보수 근본주의 교회는 무교회주의와 퀘이커를 이단적 기독교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자. 무교회주의와 퀘이커리즘은 기독교 전통에 속한 신앙이다. 다만 기존 교회와는 다른 기독교라는 것이다. 이 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정지석 l 목사는 영국 우드부록(Woodbrooke) 대학원에서 ‘퀘이커리즘과 함석헌의 평화 사상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KNCC,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UNESCO-APEIU 국제이해교육원에서 평화교육가로 일했으며 성공회대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평화윤리와 교육을 강의했다. 한국 YMCA 생명평화센터 소장이며, 작년 펜들힐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현재는 철원에서 국경선 평화학교 설립을 준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