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이 지난 2002년부터 3년간 진행한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기획연재가 65회로 끝이 나고, 그 의미를 짚어보는 좌담회를 개최했다. 필자 김용준 교수를 비롯해 당시 ‘씨알의 소리’에서 함께 편집기획위원을 지냈고 현재 ‘씨알의 소리’를 만들고 있는 김영호 인하대 교수, 함석헌의 사상을 최초로 철학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주목을 받고 있는 김상봉 전남대 교수와 함께 앞으로 함석헌에 대한 연구와 계승이 어떤 식으로 이어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을 나눠보았다.
●일 시: 2005년 10월 8일 토요일 오후 3시 ●장 소: 교수신문사 2층 회의실
●사 회: 이영수 교수신문사 발행인, 경기대 교수(교육학) ●참석자: 김용준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김영호 인하대 교수(철학) |
사회: 오늘 이렇게 모이고 보니 처음 김용준 선생께 연재를 부탁드릴 때가 생각나는군요. 그 때 사양하시는 걸 억지로 강권한 것은 자칫 이런 기록이 지나가고 남지 않을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지난 65회분의 연재를 다시 읽으면서 가슴이 메이기도 하고, 눈물이 글썽글썽하기도 하더군요. 제가 젊을 적 산천동에 살 때 함석헌 선생이 바로 그 근처에 사셨습니다. 저는 대학생으로 한얼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함석헌, 장준하, 김성수 선생님을 모셔와서 강의를 듣곤 했죠. 돈이 없어 강연료도 못드리고 원고지를 두텁게 싸가지고는 그걸 선물로 드리기도 했습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함석헌 선생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고, 심지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문에서 함 선생의 삶과 사상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함석헌’에 집중해서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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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자꾸 무교회주의에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함석헌 사상의 전모를 봐야 합니다. 후학들의 폭넓은 독서가 필요해요” © |
김용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쓸 수 없었을 텐데 말이죠. 이걸 쓰게 된 것은 마음을 먹게 된 것은 내 동기 송석중과 관련이 깊습니다. 1940년대 후반 김교신, 함석헌 선생 등이 여름, 겨울 송두용 선생 댁에 모여 집회를 했습니다. 송두용 선생 아들인 송석중 씨가 저와 동기간인데 1949년 이전은 내가 모르니까 송석중이 니가 쓰고, 그 후는 내가 써서 우리가 함석헌 전집을 하나 내자, 이런 약속을 했었는데 이뤄지지 못하고 미뤄져 왔습니다.
그래서 연재를 하게 되었는데, 군사독재 때 함석헌 선생의 반독재 활동은 글에 많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꽤 많이 이야기가 돼왔기에 내가 본 함석헌, 거기에 초점을 뒀던 것이죠. 다만 운동권에 대한 함 선생의 크리티시즘이 있었는데, 그걸 내 나름대로 담으려 했고, 느낀대로 적었을 뿐입니다.
김영호: 저는 함 선생님과 신앙적인 연결고리, 사상적인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군대 갔다와서 철학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때 누가 안병무 선생을 만나보라 해서 중앙신학(현재의 강남대)에 찾아갔더니 거기 함 선생님이 강의를 나오신 거예요. 함 선생님은 목소리가 참 크셨습니다. ‘굳은 분’이라 느꼈죠. 가니까 인도고전을 프린트해서 강의를 하시고 다석 유영모 선생이 그 앞에 앉아계셨던 게 기억이 나요. 호랑이 만나러 갔다가 사자를 만난 격인데, 안병무, 함석헌 두 분이 내 인생의 스승이었습니다.
오늘 모인 분들을 보니까, 김용준 선생님은 함 선생님께 배운 1세대이시고, 저는 1.5세대, 김상봉 박사는 2세대인 것 같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가끔 ‘진리의 바통’ 얘기를 하셨는데요, 이걸 누구한테 넘겨줄 것인가 하면서 말이죠. 김용준 선생은 1세대니까 복이 많으시고. 2세대 3세대도 나와서 참 좋습니다.
김상봉: 대학 때 책을 읽은 기억은 있습니다. 하지만 함 선생님이 책에서 보여줬던 열정, 애정, 비통함, 고뇌 같은 것들을 같이 느끼면서도 뭔가 구체적인 결실을 맺지 못하고 독서만 끝낸 셈이었죠. 그러다가 1992년에 공부를 마치고 독일에서 돌아와 다시 함석헌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른 느낌이 들더군요.
그 때 제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 것이 자아와 주체성의 문제였습니다. 서양과 달리 한국에서 주체성은 굉장히 남과 북, 전통과 현대 등으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함석헌 책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책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죠. 아, 이게 단순한 자기역사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절망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길어내려고 하는 시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순수 철학적인 텍스트로 눈에 확 들어와 그 후 한국 20세기의 유일한 철학자는 함석헌 선생이구나 하는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굉장히 경이롭게 느꼈던 게 함 선생 책은 꼭 플라톤의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당시 아테네의 일상적인 생활들을 늘어놓으면서 거기 철학적인 화두를 늘어 놓았는데 제가 함 선생 책을 읽을 때마다 감동을 받는 것이 그 분이 자기 시대를 치열하게 통과하면서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사유, 정신적인 사투를 벌이면서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저는 2세대로서 함 선생님을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사도바울처럼 정말 우연한 기회에 말씀만으로 감화를 받은 사람인데, 그것이 도리어 함 선생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지성계, 학계에 우리가 이런 자랑스런 철학자를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하고 싶구요.
김영호:앞으로 2, 3세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제시한 것 같습니다. 여기 모인 이들이 함 선생과 맺고 있는 연결고리의 성격이 다르지만, 사상적인 연결고리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런 면에서 ‘우리가 함 선생을 넘어설 수 있을까’를 묻고 싶고, 그 질문에서 함선생의 사상에 대한 의미가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함 선생님은 참으로 폭넓은 분이셨습니다. 하나의 종교에 머무르신 분이 아니잖아요. 기독교, 노장사상, 인도종교, 순환사관, 불교철학적 측면도 있고요. 나의 문제를 자각하라는 모토가 불교와 밀접하게 연결돼있거든요. 저는 아직 함 선생 발길에 차여서 살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그 분이 제시하는 사상의 틀을 넘어서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론적으로 한국의 민주화도 함 선생이 주도한 비폭력 혁명이었다고 봅니다. 또 함 선생이 내세웠던 국가를 극복하는 문제, 함 선생이 민족주의자가 아니진 않지만 말하자면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분 아닙니까. 그리고 그분 사상의 응축된 개념인 ‘씨알’ 민중사상의 한 단초를 제공하셨는데, 모두 그분한테서 얻어서 민중사상을 전개한 것 아닙니까.
民이라는 말, 민이 씨알이다는 화두를 유영모 선생이 던져놓았는데, 함 선생은 이걸 갖고 나름대로 체계화시키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씨ㅇ·ㄹ사상’은 정말 체계와 깊이가 있어요. 여기엔 누구나 참고해야할 인문학적으로 아주 깊은 뜻이 담겨있거든요. 우리가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는 ‘씨ㅇ·ㄹ’이란 말에 들어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함석헌 연구, 종교 분야에 치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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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 교수신문 발행인. “지금 젊은 사람들은 함석헌 선생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고, 심지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 |
사회: 김상봉 선생께 다시 여쭤보고 싶은데요. 현재 함 선생의 철학, 사상 등에 대해 스터디를 진행했거나 진행되고 있는 게 있습니까.
김상봉: 지금까지 꾸준히 연구가 되어오긴 했죠. 아무래도 신학 쪽에서 주도적으로 연구를 해왔는데, 제가 보태고 싶은 말은 최근 철학자들 가운데서 “아 함석헌은 철학자였다”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교수신문에서 ‘우리시대의 고전’을 선정한 적이 있어 선정위원으로 참가했었는데, 함석헌 책이 목록에 빠져있어서 제가 우겨서 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은 우리 시대 철학책을 쓰는 분 가운데 자기의 고유사상과 개념을 쓰는 분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만약 함 선생이 학교에 계셨다면, 아마 일찍이 학파를 형성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자꾸만 길에서 운동하시던 분으로만 여겨서, 철학 쪽에서는 소외되어 왔어요. 최근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 대화한 적이 있는데, 통일문제와 관련해 함석헌 사상을 얘기하고 싶다고 하길래 이런 것을 보면 함석헌 사상이 점점더 연구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영호: 맞아요. 사실 지금까지 신학 쪽에서만 연구가 돼 와서 다채롭지 못했습니다. 함 선생은 큰 코끼리 같은 분이신데 말이죠. 그래서 후학들이 여러 방면에서 연구해야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텐데, 김상봉 교수 같은 분이 있어 여러 학자들이 서서히 참여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정치적 실천과 견고한 사유의 同行
김상봉: 저는 함 선생님을 연구하면서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함 선생과 유영모 선생의 비교인데요, 두분 다 철학적이신데, 유독 함 선생만 정치적인 문제에 앙가주망을 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에 함 선생의 고유성 같은 게 있는 건지, 함 선생이 정치적인 실천과 철학적인 견고한 사유를 언제나 함께 견지할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합니다.
김영호: 유영모 선생은 좀 추상적이었던 분이 아니었나 합니다. 일단 보통사람은 접근할 수 없는 뜻이 깊은 우리말을 구사하셨죠. 그게 현실과 좀 거리가 있는 것 아닌가 싶고, 유영모 선생도 출발은 기독교이신데 나중에 살아가시는 걸 보면 동양적인 은자의 기풍을 보여줬죠. 함 선생은 행동적인 걸 파악하시고 그쪽으로 나아가셨고요.
유영모와 함석헌의 결정적 차이
김용준: 함 선생은 원래 촌놈이었는데, 유영모 선생을 만나면서 전광석화처럼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내가 유영모 선생도 함석헌 선생과 함께 꽤 따라다녔는데, 유 선생은 워낙 기지가 튀시는 분이예요. 하루에 밥을 한 끼 먹는 것도 기인이고, 쉰둘에 해혼식을 하고 부인과 성관계를 끊은 것도 그렇고요. 어떻든 그 양반의 삶이 그래요. 생활이 기인이고 수재이고, 그게 유영모 선생님의 다예요. 누구에게 영감을 주기는 하지만 함 선생 말마따나 아마추어이지. 그것 이상으로 함 선생도 평가를 안 하셨습니다. 유영모 선생과 비하면 함 선생님은 그래도 현대라는 콘텍스트 속에서 제대로의 교육을 받았던 것이죠. 일제시대의 고등사범이면 대단한 것이예요. 동경대하고 맞먹는 것이죠.
사회 : 아쉬운 것은 함 선생이 자라고 성장한 과정에서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정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상봉: 저도 1949년 이전의 함 선생님의 학문적인 성장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혹시 우치무라 간조와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가 된 것이 있습니까.
김영호: 지난해 논문이 2편 정도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까 질문과 연계해서 느끼는 것은 유 선생과 함 선생이 사제적 관계는 있었는데, 나중에는 단절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함 선생님은 오히려 간디, 톨스토이, 소로우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함 선생 속에서 자라나온 생각이 이 분들을 만나서 스파크가 일어난 것입니다. 유 선생님은 우리 말을 통한 전통, 동양전통에 충실한 분인데, 함 선생님은 개방된 분이니까 모든 사상을 다 흡수하시잖아요. 그런 점에서 퀘이커의 평화주의, 행동주의거든요. 소로우도 감옥에서 항의를 하고, 세금도 안내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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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교수. “함석헌은 플라톤을 연상시킵니다. 생활 속에 화두를 심어놓는데, 그것이 치열한 시대적 윤리의식의 산물이었죠 .” © |
김상봉: 저는 철학공부 하면서 문체에 대해서 나름의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사유와 글은 따로 놀지 않죠. 칸트와 헤겔이 다른 철학자와 다른 것은 사유내용 이전의 문체의 차이죠. 문체는 자기의 사유가 깊은 만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인데, 함 선생님의 사유는 가장 민중적인 사유이거든요. 마치 성경을 보면 그렇잖아요. 가장 쉽게 씌어졌지만 가장 심오한 문체를 보여주는 것처럼, 함 선생의 글은 가장 평범한 글인데, 가장 심오한 생각이 담길 수 있는 게 경이롭습니다.
김용준: 노명식 선생이 언젠가 함 선생 얘기하길, “군정시대가 아닌 평화로운 시대에 살았다면 로망롤랑 이상의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한마디로 글재주가 있다는 말씀이죠. 우익인사 중에서도 함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장길여 선생이 대표적인데 “청산유수지, 생수가 흐르듯 쏟아져 나오는데 저건 아무도 못해”라고 하셨거든요. 이런 글쓰기는 결국 넓은 독서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해요. 함 선생의 독서범위는 굉장히 넓습니다. 그리고 그 양반이 역사를 공부하면서 토인비에 대해 굉장히 깊이 연구를 했잖아요. 한때 에디슨관에서 공부한 뒤 토인비 얘기만 계속하셨단 말이에요. 토인비에 대해 굉장히 매료되어 영국에서 직접 만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웰스에 대해 말씀을 많이 하셨죠.
김영호: 저도 함 선생님이 웰스에게서 민중사관을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사회: 혹시 두 분이 함석헌론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한 적이나 계획은 없으신지요.
김상봉: 제가 해야할 일은 함선생의 정신적 지형도를 그려 보이는 일입니다. 제가 전남대에 가서 할 일들 중에, 20세기 철학사를 재구성하는 게 있는데, 그 첫 번째가 함석헌의 철학을 드러내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비유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 고유의 사상을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것이죠. 플라톤이 저술을 하나도 안 남겼지만, 함 선생은 이렇게 많은 글까지 남겼는데 연구가 안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의 글을 보면 철학적인 세계관, 윤리관, 미학관까지 견고하게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걸 이끌어내고 객관적으로 철학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당장 임박해있는 과제라고 봅니다.
김영호: 종교와 교육 쪽으로도 가르침을 정리해서 전달하는 그런 작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용준: 함석헌 기념사업회는 처음엔 너무 정치적으로 흐르는 것 같아 좀 그랬는데, 요즘에는 오래 지속이 되니까 좋은 글들이 나오는 것 같아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역사가 흐르면 웬만한 앙금들은 필터가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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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교수. “함석헌 선생은 투철한 행동주의자였으니까 진정한 함석헌 정신의 계승은 평화운동 등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 |
김영호: 제가 언젠가 함석헌 기념사업회를 발전적으로 바꿔 함석헌평화재단을 만들어보자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함석헌 선생 뜻이 구체적으로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꼭 금전적인 지원문제를 떠나 함석헌 선생은 행동주의자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차원에서의 계승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김용준: 최근 무교회주의에 관한 어떤 여 교수의 논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함 선생의 글을 좀더 봤으면 하는 마음인데요, 자꾸 무교회에만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전모를 봐야 합니다. 나도 함선생 사상 전체를 파헤쳐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특히 과학과 종교 사이를 죽기 전에 좀더 파헤치고 싶은데, 그러면서 함 선생의 과학사상을 좀더 파헤치고 싶은 욕심은 좀 있습니다. 하지만 여든이 다 되어서 사실 한계를 느끼죠.
사회: 선생님들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실천적인 활동을 통해 함석헌 사상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운동과 학문적인 탐구가 균형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정리 강성민·이은혜 기자 editor@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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