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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소리> 2012-05-02 (수)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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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평화통일 사상   

 

- 정 지석 -


함석헌은 남북한 분단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시작한 것은 1958년 <사상계> 8월호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에서이다. 함석헌은 남북한 통일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함석헌은 북한을 고향으로 둔 실향민으로서 개인적으로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터이지만 그의 남북한 평화통일 사상은 개인적 감회에 휘둘리지 않고 시대적인 예언자적 정신과 민족적 세계적 관점을 갖춘 것이며, 특별히 그의 사상의 기반을 형성하는 종교사상으로서 고난의 메시아 사상이 그 기저를 형성하고 있다. 
 

 

함석헌의 평화통일 사상은 단순히 정치 사상에 머물지 않고 종교와 역사, 그리고 새로운 세계 문명 사상으로서의 평화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함석헌은 남북한 통일에 대한 자신의 사상 체계에서 매우 뚜렷하면서 독창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 글은 두가지 목표를 갖는다. 첫째, 함석헌의 평화통일 사상을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살펴본다. 둘째, 오늘 우리 상황에서 그것이 주는 의미를 밝혀본다.  

 

함석헌 평화통일 사상의 역사적 전개와 의미

 

함석헌 남북한 평화통일 사상은 한국 전쟁 이후 1950년대의 남북한 상황, 1960년 4.19 혁명기의 남한의 통일운동기, 1961년 5.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로 크게 나눠 볼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 정부는 체제 경쟁과 그에 따른 통일 정책을 추구했다.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휴전 협정 폐지와 무력 북진 통일론(1955.8.13)을 주장했고, 북한 김일성 정권은 ‘인민 경제 복구’를 우선으로 하는 평화 통일 전술을 사용했다. 1956년 4월 28일 조선 노동당 제 3차 대회에서 전 조선인민의 총선거, 조선에서의 평화 유지와 조선 문제의 평화적 해결위한 국제적 협정 체결 등을 내용으로 하는 평화통일 선언 채택하고 다음 달인 5월 31일 병력 축소에 관한 성명 발표와 함께 인민군 병력 8만명을 축소했다. 같은 달 남한 진보당 당수 조봉암은 이승만 정부의 북진 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 통일론을 주장하였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간부 7명과 함께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인 1959년 7월 조봉암은 사형당한다. 남북한 통일은 정치적으로 뜨거운 주제였으나 그 방법과 주장은 상이했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1953.8), 국회의 미군 철수 반대 결의(1954.8),주한 미군사 원조 고문단 설치(1955.5), 한․미 원자력 협정(1955.7), 이승만, 휴전협정 폐기와 북진 통일론 주장(1955.8.13), 주한미군의 원자무장화 착수(1957.7), 주한미군 핵병기 도입(1958.1), 한.미 국군 6만 감군(1958.3), 신국가보안법 통과 (1958. 12)를 했다.

 

휴전협정이후 북한 김일성 정권은 인민경제 복구에 총력(1953.8), 중공군 6개 사단 철수(1954.9-1955.4),북한 최고인민회의, 남북평화통일을 위한 외국군대 철수, 남북군대의 축소, 조선문제조정 국제회의 제의(1955.3.11), 원자 및 수소 무기 반대 평양시 군중대회(1955.7), 김일성, 남북 입법기관 협상, 아시아 제국의 극동회의, 남북 정부 대표자 회의 제안(1955.8), 조선 노동당 3차 대회, 조선에서의 평화 유지와 조선 문제의 평화적 해결 위한 국제적 협정 체결을 담은 평화통일 선언 채택(1956.4), 병력 축소 성명과 인민군 병력 8만명 축소(1956.5.31), 최고인민회의, 한국 국회와 남한 사회인사드에게 남북한 평화통일 선언을 담은 서한 발송(1956.11), 북적, 남북 서신 교류 위해 국제적십자사 통해 대한 적십자사 총재에게 서한 발송(1957.1), 평화 옹호 전민족위, 원수폭 무기 사용 및 실험 반대 성명(1957.5), 최고인민회의, 남북의 병력 10만으로 축소, 조선 문제의 평화적 조정위해 남북 조선 대표 참가하는 국제회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투표 방식에 의한 전국 선거를 통한 남북한 통일안 채택(1957. 9), 중공군 완전 철수(1958.10)를 했다.

 

미소간의 핵무기 경쟁이 남북한 관계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심대했으며, 오늘날 남북한 관계를 심각하게 만들고 있는 북한 핵 문제도 이와 연관된 것이기에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의 미국의 핵투하 이후 소련 역시 수소폭탄 보유를 선언(1953.8)하며 미국 원자력 잠수함 노티라스호가 진수되며(1954.1), 소련 원자력 발전 개시(1954.6), 미국 바닷속 원폭 실험(1955.5), 미국 대륙간 탄도탄 실패(1957.6), 미국 공대공핵탄두 로케트 실험(1957.7), 소련 대륙간 횡단유도탄 (ICBM) T-3 실험 완성(1957.8), 소련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성공(1957.10), 미국 대륙간 탄도탄 아틀라스 성공(1957.12)했다.

 

미소간의 핵무기 경쟁은 1957년 8월 소련이 대륙간 횡도 미사일을 갖게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 미군기지에 핵병기를 도입하게 된다. 북한에는 없는 핵무기가 남한에 있게 된 것이며 이 핵무기가 소련을 겨냥한 것이라 할지라도 바로 눈앞의 적대국인 미군 기지 안에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북한 정권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북한은 핵 억제력으로서 핵무기를 필요로 했을 것이나 1968년 8월에서야 소련으로부터 핵 발전기를 제공 받았다.

 

한국 전쟁 후 1950년대는 남북한 간의 적대적 갈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분단 구조가 굳어지는 시기였다. 정치 군사적 갈등뿐 만 아니라 남북한 사람들 간의 증오와 불신도 점점 커지고 있던 때였다. 특히 함석헌이 살고 있었던 남한의 정치적 상황은 반공주의가 국가 이념이 되어있었고, 이승만 정부는 군사적 무력통일론을 국가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던 때였다. 1958년 함석헌은 기독교 평화주의에 기반한 무저항주의, 민중의 각성, 민족 자주를 남북한 통일의 기본 방향으로 삼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입장 발표는 무력 멸공 통일론을 국책으로 삼고있던 이승만 정부의 입장과는 충돌하는 것이어서 경찰에 끌려가 50여일 간 감금되고 고문당하게 되었다. 이미 평화 통일론을 주창했던 정치인 조봉암이 북한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던 때였다. 당시 북한은 이승만 정권과는 달리 평화 통일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민족의 자주적 입장도 북한이 주창하는 입장이었다. 민중적 통일론 역시 맑씨즘와 가까운 입장으로 간주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민중의 평화적 각성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이승만의 군사적 북진 통일론이 국가 정책으로 강조되고 있었던 1958년 쓴 글에서 함석헌은 민족 자주, 민중의 역사적 각성을 강조했다. 민중의 각성은 평화의 각성이다. 함석헌의 평화통일 사상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지는 현실주의 사상을 넘어서는 인간으로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진리를 향한 종교적 구도 사상이 그 기반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함석헌 평화통일 사상이 다른 정치적 평화통일론과는 구별되는 사상사적 의미이다.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이 없지 않은가?(전집 14: 112) 

 

6.25 싸움은 왜 있었나? ...이 역사의 한 길에 앉은 고난의 여왕은 제 욕보고 뺏김당한 것이 어떤 까닭임을 생각하나, 아니하나? 6.25 싸움의 직접 원인은 38선을 그어 놓은데 있다. ...이 싸움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다. 그러나 다시금 한번 생각해 볼 때 아무리 싸움은 다른 놈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왜 등을 거기 내놓았던가? 왜 남의 미끼가 됐던가? 거기는 우리 속에서 찾을 까닭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역사적 현실은 자신이 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운 것은 미국도 소련도 아니며, 일본도 아니요 우리 자신이다. 왜 허리 꼬부린 새우가 됐던가?(14: 110-111) 

 

...어느 한 사람도 팔을 벌리고 ‘들어오너라, 너를 대항해 죽이기보다는 나는 차라리 네 칼에 죽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땅이 소원이면 가져라, 물자가 목적이면 마음대로 해라, 정권이 쥐고 싶어 그런다면 그대로 하려무나. 내가 그것을 너하고야 바꾸겠느냐? 참과야 바꾸겠느냐?’ 한 사람은 없었다. 대항하지 않으면 그져 살겠다고 도망을 쳤을 뿐이다. 그것이 자유하는 혼일까? 사랑하는 마음일까? 만일, 정말 그런 혼의 힘이 국민 전체는 커녕 일부라도 있었다면 소련, 중공이 감히 강제를 할 수 있었을까? 우리 속에 참으로 인해 길러진 혼의 힘이 도무지 없음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해방이 우리 힘으로 되지 않았으니 해방이 될 리 없다. 이제라도 우리 손으로 다시 해방을 해야한다(전집 14:117).  

 

국민 전체가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에서 울음으로 하는 회개말고(그것은 연극이다) 밭에서, 광산에서, 쓴 물결 속에서, 부엌에서, 교실에서, 사무실에서, 피로 땀으로 하는 회개여야 할 것이다. 누구를 나무라는 것 아니요 책망하는 것도 아니다. 나 자신을 보고 하는 말이지...(14: 120) 

 

남북분단은 결국 우리 자신의 문제로부터 찾아야 한다, 이런 내적 각성이 민중에게서 일어날 때 남북한 평화통일은 된다, 이것이 함석헌의 생각이었다. 한국 전쟁이 남긴 상처는 컸다. 애당초 남북한 분단은 소수 정치 엘리뜨들의 권력투쟁에서 된 것이지만, 분단이 민중들 간의 마음 깊은 증오심과 불신으로 이뤄진 것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부터이다. 전쟁은 민중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고, 불신과 증오심으로 차게 한다. 함석헌은 그것을 보았다. 소수 정치 엘리트들 간의 갈등보다 심각한 것은 민중들의 마음이 갈라져서 증오하는 것이다. 이것이 분단을 깊게 한다. 함석헌은 그것을 보았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민중들의 마음이다. 민중이 깨어야 한다. 왜 분단되었고, 왜 싸우게 되었는지를 민중들이 깊이 생각해야 한다. 민중이 각성해야 한다. 그러면 희망이 살아난다. 남북한 평화통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제목으로 글을 쓴 이유이다. 함석헌 평화통일 사상이 민중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1950년대 이것은 나타난다.  

 

함석헌은 북한 사람들을 공산주의 적으로가 아니라 형제, 자매로 보았는데 이러 입장은 당시 북한을 적으로 삼고 있었던 남한 정부의 반공 정책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 교회도 공산주의를 악으로 보는 반공주의 신앙을 강조하던 때였다(김양선 1956: 130-131). 그랬기에 한국교회는 이승만의 반공주의와 무력 북진 통일론을 지지했다(정성한 2002:11). 대표적인 목사의 한 사람인 한경직 목사는 공산주의를 멸망시키는 것이 평화라고 주장했다(한경직, 1971: 75-76). 함석헌의 생각은 달랐다. 그에게 남북한은 서로를 괴뢰(꼭두각시)라고 비난하면서 불신하며 싸우는 참 딱한 민족이다. 외국군 철수를 주장한다고(북한) 자주적인 것도 아니고 무력북진통일론을 공허하게 외치던 남한 이승만 정권도 자주적이지 못하다. 함석헌의 눈에 비친 남북한 두 정권은 민중의 각성을 통한 평화통일을 구하지 않는다. 정권 중심, 체제 중심으로 남북한 관계를 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함석헌은 민중 중심으로 남북한 관계를 본다. 이것이 그의 평화통일 사상의 특징이다. 민중의 각성을 조해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함석헌은 반대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랬기에 그는 공산주의 통일도 반대하고 자유 민주주의 통일 입장에도 서지 않았다. 오히려 남한에 살면서 반공주의를 통일의 심각한 장애물로 인식하면서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전집 14: 119-120).  

 

민심 통일론

 

함석헌의 평화통일사상은 1960년대에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반전, 반 군사주의 비폭력 민중 사상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1960년 4. 19 민주 혁명의 시대적 상황과 그 이후 5.16 쿠데타와 군사정권의 등장과 연관된 것으로 보여 진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함석헌의 평화통일 사상에 종교적 영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1962년 쓴 ‘민족 통일과 종교’라는 글에서 함석헌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은 종교적 존재이다. ...세력있고 지식있어 다스리는 계급에 있는 사람들에겐 종교란 관계없는 방법만이 문제인지 몰라도 다스림을 받는 우리 민중에겐 종교없는 정치, 그것은 어부의 그물이요, 목자의 작대기이다. 사람은 종교적 존재라는 말은 정신이 주인이란 말이다. ...종교는 한나(一元〮同一我〮大我)를 믿음이다. 만물이 다 한 바탈, 곧 생명으로 됐고, 만물이 곧 한 몸임을 믿는 것이 종교다. 소위 종교란 것을 믿거나 말거나 이 종교는 누구나 다 살고 있다. 존재하는 종교다. 그리고 민족을 통일하여 한 나라를 이루는데 이 종교없이 될 수 없다’ (전집 3: 178). 

 

함석헌은 남북한 이데올로기 대립의 바탕에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으로서 추구하는 종교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만큼 깊은 대립이 있음을 본 것이며, 그러기에 이것을 푸는 길로서 민족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인 통일 문제도 다만 정치적, 이념적인 차원에서 다뤄질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데까지 들어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나라란 한개 산 인격이지 결코 기관이나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산 몸에서 종교는 정신이요 정치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종교없는 정치는 아주 옅은 수단이요, 종교를 생각하지 않은 통일론은 보잘 것 없는 껍데기 수작이다‘고 말한다. 종교는 한나(일, 원,동일아, 대아)를 믿는 믿음이다. 만물이 다 한 바탈, 곧 생명으로 됐고, 만물이 곧 한 몸임을 믿는 것이 종교다. ...민족을 통일하여 한 나라를 이루는데 이 종교없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통일 문제도 마땅히 종교적인 데까지 들어가서 생각하고 다루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나라란 한개 산 인격이지 결코 기관이나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산 몸에서 종교는 정신이요 정치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종교 없이는 정치는 아주 옅은 수작이요, 종교를 생각하지 않은 통일론은 보잘 것 없는 껍데기 수작이다(전집 3: 178).  

 

함석헌은 남북한 평화통일은 정치 체제의 통일이 아니라 ‘민심 통일’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1950년대 민중의 마음이 평화통일의 중심 문제라고 본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민심 통일이 되지 않는 통일은 통일이 될 수도 없거니와 된다 해도 진정한 통일이라 보지 않았다. 즉 정치 군사적 통일 일변주의를 거부한 것으로서 이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함석헌은 모세의 출애굽을 비유하면서 노예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 ‘민중에게 종교를 준 것’이라 본다.

 

나는 이런 함석헌의 평화통일 사상을 ‘민심 통일론’이라 부르고 싶다. 오늘날 민심 통일론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남북한 평화통일은 사람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연세대 전우석 교수는 남한에 살고 있는 많은 탈북자들의 마음과 심리적 상태를 정신분석학, 심리학적으로 조사 연구한 후 남북통일은 ‘사람의 통일’을 지향해야 함을 역설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일에 닥쳐서야 해결점을 찾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남북한이 통합되어 7천만이 함께 뒤섞여 살아가게 되었을 때, 마치 오늘날 남한의 탈북민들이 겪는 고통과 불만은 예기치 못한 사회적 갈등과 폭력으로 분출될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적 차원에서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사회 통합으로서의 통일만으론 남북 통일을 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여기에 함석헌의 종교적 평화 영성에 기반한 ‘민심 통일론’의 의미가 있다.  

 

중립화 통일 사상

 

1960년대 함석헌은 통일을 향한 두 가지 길을 강조했는데, 하나는 ‘중립화 통일론’이며 다른 하나는 ‘민중 중심의 민주주의적 통일’이다. 전자는 남한과 북한의 양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것을 의도했다(전집 3: 190). 함석헌은 남북한 통일은 남북한 어느 한쪽의 정치 이념에 의한 일방적인 이념의 승리를 통해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고, 공산주의에 의한 통일도, 반공주의 통일도 모두 거부했다. 중립화 통일 사상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깊이 고려할 점들을 제시한다. 오늘날 한반도는 제주 강정마을 사태로 표현되는 미국과 중국 간의 군사대결의 와중이 있으며, 북핵 문제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전쟁 위협은 심각하다. 그러므로 중립화 평화통일론은 한반도에 드리운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한반도에는 외국 군대와 무기들이 존재하지 않는 평화의 중립화의 길로서 고려할 수 있다. 함석헌이 1960년대 미소 강대국의 다툼 와중에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의 길로서 중립화를 고려했다는 것은 매우 선견자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함석헌은 중립론을 기회주의적 태도이거나 정치적 수단으로만 하는 것에는 반대하면서, 양대 강대국에 의존하여 통일을 이뤄보자는 발상에 대해서도 거부한다. 대신 ‘자주적 중립론’을 주창한다. 이것은 강대국에 의존하는 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결정하는 정신의 힘을 갖는 것이며, 무력적 정복으로 이루는 통일을 반대하면서, 공정성과 상호 인정에 기반하여 통일을 이뤄가는 입장이다. 즉, 북한 공산주의를 증오하여 정복할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동시에 공산주의와 타협해서도 안 된다고 본다. 함석헌은 말한다. ‘통일은 반공(反共)이 아니라 두 주의의 대립을 초월하는 자리에서야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정말 중립이다’(전집 3: 190). 함석헌은 경험적 반공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남한의 반공주의 통일론에 가세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공주의가 통일에 저해 요인이 된다는 점을 잘 알았다. 또한 소위 남한의 자유주의에 의한 통일을 주창하지도 않았다. 그는 주장하길, ‘공산주의가 자유진영을 이겨도 아니되지만 또 자유진영이 공산 진영을 이겨도 아니된다’(전집 3: 190)는 점을 확고히 했다. 적대하는 두 이념을 모두 넘어서는 통일을 주장했다. 이 제 삼의 길은 그의 하나님 신앙에 근거한다. ‘어느 놈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이상, 죄가 혼자서 짓는 법이 없는 이상, 두 놈이 꼭 같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요 또 꼭 같이 용서를 받아 구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전집 3: 190).

 

함석헌의 중립론의 핵심은 민에 기반한 정신적 자강론이요, 자주론이자 평화론이라 볼 수 있다. 이는 후에 남북 정치 협상의 첫 결실이면서 통일 운동사에 이정표가 된 7.4 남북 공동 성명의 자주,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민족 대단결, 평화론에 나타난 입장들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둘 간의 영향 관계를 볼 때 함석헌의 남북 통일론이 보다 선구자적인 것이었다 할 수 있다.  

 

민중 참여의 평화통일사상

 

다른 하나인 민중중심의 민주주의적 통일론은 통일논의에 민중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1970-80년대 민주주의 평화통일론의 토대가 된다. 민주주의 평화통일론은 다만 정치적 민주화를 통일의 주요한 목적으로 삼았다는 점에 그치지 않고, 개인들 전체의 의식을 진보시킴으로 전체를 살리는 민중의 평화적 각성과 연관되어있다. 통일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함석헌의 생각에는 통일이 정치가들이나 전략가들의 문제로만 국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비판 의식과 일반 민중들이 스스로 깨어 일어나 통일 운동에 나설 때에라야 통일은 이뤄지고 또 그 통일이야말로 참된 통일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자리잡고 있다. 함석헌은 극소수 정치가나 전략가, 엘리트들만의 통일론은 현란한 통일 방법론에만 집중되고 정치 전략적인 것으로 전락된다고 보았다. 그런 까닭에 정작 분단의 희생자이자 통일의 수혜자여야 할 다수 민중들은 통일론에서 소외되고 또 통일을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여기며 살아가게 된다. 함석헌은 민중이 남북한 통일운동에 무관심해 가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보았다.

 

함석헌은 사람의 정신과 뿌리와 연관된 근본적인 일에 관한한 정치가 나서서 될 일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종교의 영역이다. 정치는 민중을 힘 있게 일어나게 하기보다는 권력자의 의도대로 세뇌하고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정치는 민중을 분열시키고 민중의식을 천박하게 만든다는 것이 함석헌이 본 정치였다. 또 이런 판단은 오늘날도 매우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정치적 통일론은 현실적으로 정치가 통일 문제를 다루는 제 일선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민중을 소외시키고, 통일 문제에 대한 민중 의식을 왜곡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그러므로 민중의 마음을 일으켜 자발적으로 통일 운동으로 이끌어 내는 힘은 정치에서 기대될 수 없으며 종교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것이 함석헌의 믿음이고 기대였다. 그래서 그는 ‘누웠던 사람이 벌떡 일어날만한, 술잔 들었던 놈 술잔 내던지고, 화투몫 쥐었던 놈 화투몫 내비리고, 그렇담 나도 나서 볼란다!’ 하게 되는 통일론을 해 줄 사람은 없을까?’(전집 3: 179)라고 외치는 것이다.

 

함석헌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가 바라는 통일이 ‘민심 통일’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한반도 분단 사건을 정치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해석했다.  

 

‘38선이 생기기는 정치적으로 생기었어도 해결은 종교로 해야한다. 병이 날 때는 밖에서 병균이 침입해서 되어도 그 병이 나을 때는 내 속에서 힘이 나와서 물리쳐야 하는 모양으로 나라에 문제가 생길 때는 정치적 관계로 생기어도 거기 대한 대답은 국민의 정신으로, 신념으로 해야한다. 그런데 통일 문제를 외교, 정책으로만 다루려 하니 무슨 일인가?’ (전집 3: 180).

 

함석헌은 통일 문제를 종교적 문제로 볼 때 제일먼저 주문하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사회적 시대적 인산의 변화를 가져온다. 분단은 죄악이다. 불행으로 보기 보다는 죄악이라 봐야 하는 것은 운명론적 태도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함석헌은 일반 민중들이 분단을 운명론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민감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불행이란 말 대신 죄악이라 하여 잘잘못의 문제를 확실하게 하고자 한다. 이는 분단의 문제를 풀어가는 주체로서 나(민중)의 책임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분단은 죄악인데 누가 이런 죄악을 저지른 것인가에 대해 함석헌은 먼저 미소 강대국을 지목한다. 미소 강대국의 죄악을 추궁하는 함석헌의 비판은 어느 사회과학적 분석과 비판보다 통렬하고 명료하다. 알아듣기 쉽고 생생하여 일반 민중들의 가슴속에 뜨거운 공명을 남긴다.  

 

‘38선의 잘라짐은 불행이 아니오 죄악이다. 세계적 인류적 큰 죄악이다. 만고에 이런 법이 어디있나? 남의 집 강아지를 두 놈이 갈라 먹어도 용서할 수 없다 하겠는데, 청천 백일하에 오천 년 역사 가지는 남의 나라를 허리를 잘라 두 동강이로 냈다? 이런 죄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통일 문제를 정말 의논하려거든,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로 의논하려거든, 의논이 아니라 오치고 부르짖으려거든, 악을 쓰고 기를 써 하늘 땅에 호소를 하려거든, 우선 미.소를 대가리로 두 편에 갈라져서 이 불쌍하고 파리한 갈보 같은 민족을 발가벗겨 두 다리를 맞잡아 당겨 가랑이를 찢어놓은 저 열강(列强)이라는 나라들을 책망부터 해야 한다’ (전집 3: 180). 

 

이 뻔한 잘못을 책망치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너무 뻔한 잘못을 알면서도 책망치 못하는 것은 민족의 양심이 마르고 의로운 기운이 없어졌기 때문이라 한다. 통렬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는 함석헌이 진정 말하고자하는 대답이 아니다. 그의 종교적 독법은 인간의 긍정적인 잠재력에서 대답을 찾아낸다. 우리 민족이 책망치 못한 것은 양심과 의기가 없어서도 강대국이 무서워서도 아니라 오히려 양심이 있어서 그러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도 그 죄악에 같이 참여했기 때문에 양심에 찔려 감히 책망을 못하는 것’(전집 3: 181)이라고 본다. 인간이 자기 속에 잘못이 있음을 알기에 다른 이의 잘못을 비난하지 않는 것은 진정 양심있는 이들의 모습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양쪽이 분단의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고 증오심과 적대감으로 으르렁거리는 현실 속에서 먼저 분단의 죄악을 저질렀다고 인정하고 회개하자는 주장은 종교적 차원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주장이다. 이런 종교적 통일론은 첫째, 함석헌이 통일의 주체로서 진정 촛점을 맞추고 있던 이들이 정치 현실주의에 물든 정치 권력가들이나 군사 전략가, 또는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이었다는 점을 밝혀주며, 둘째, 정치적 문제를 종교적 차원에서 해결해가려는 것으로서 현실 정치 문제의 진정한 해결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정치의 문제는 근본으로 가면 종교의 문제이며, 종교적 실천은 역시 정치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함석헌 사상의 중심 흐름으로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종교적 영성을 가진 정치적(사회적) 실천, 정치적(사회적) 실천성을 가진 종교적 수행은 오늘 우리 시대와 사회에서 더욱 요청되고 있으며, 특히 현재 복잡하게 전개되는 남북한 관계를 풀어가는 기본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의미있는 길이다.

 

함석헌은 ‘민주주의는 종교’라고 말한다(전집 3: 184). 아흔 아홉 보다 하나가 더 중하다는 종교적 셈법이 통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민주주의를 다수결 원칙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담고 있다. 이는 남북한 정치 권력자들이 남북한 통일의 정치적 방안으로서 주장해 온 남북한 선거 통일론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담고 있다. 또 차별 없는 인간으로 민을 봐야 민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차별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절대 신앙에 의하여 죽음으로 새로 난 변화된, 초월한 인간에게서가 아니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일이다’(전집 3: 185). 이런 점에서 함석헌은 참된 통일은 종교적인 바탕에서라야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세계평화 사상

 

함석헌은 우리 통일문제를 세계 평화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했다. 그는 말하길, ‘우리나라 통일 문제는 세계 평화 문제의 한 부분이요, 세계 평화가 이루어질 기운이 돌아오기 전은 우리나라 통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전집 3: 188). 그러므로 우리의 통일을 이루기위해서라도 세계 평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 여기서 함석헌은 평화주의 사상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함석헌이 이 글을 쓰던 1960년대 초의 세계 정세는 미․소 간 냉전중고, 특히 핵무기 경쟁을 노골화하던 때였다. 그러므로 반핵 평화주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고 특히 핵무기의 출현으로 정당한 전쟁론의 의미가 쇠퇴하고 절대 평화주의의 효용성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때였다. 함석헌은 이런 세계 평화주의 사상의 흐름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 앞으로 발달되는 무기를 써서 세계적인 전쟁이 일어나기만 한다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망해 보리고 말 것이라는 것은 전문 과학자들의 말이다’(전집 3: 188).

 

함석헌은 말한다. ‘우리의 잘 참는 것이 평화 운동이다. 38선에 걸엎디어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하면서도 우리가 절대 폭력주의나 원망이나 미움이나 원수 갚음의 생각을 품지 않고 프로메테우스같이 영웅답게 참음으로써 우리는 세계 여러나라의 양심을 때릴 수 있다’(전집 3: 188). 분단의 고통을 통해 평화주의 사상을 체득한 새로운 민으로 거듭나서 남북 통일을 이루고 세계 평화를 일깨울 수 있기를 바라는 함석헌은 입장은 마치 전체 민의 종교적 수련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민족 분열의 뒷면에는 이러한 인류적인 죄악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쟁이나 정치로만은 해결이 아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세계적인 문제요, 도덕종교철학에 관련된 깊은 정신적인 문제이다’(전집 17: 23). 

 

함석헌은 민족내부의 문제로 보지 않고 세계사적인 문제로 보았고, 또 남북한 통일을 단순히 정치와 정권적 차원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이는 사람의 의식이 전적으로 바뀌어 새로운 정신 세계를 체험하는 자리에 올라가서야 해결되는 문명사적인 문제로 보았다. 그렇기에 함석헌은 분단을 고통이지만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출발의 기회로 생각했다. 정치 현실주의 차원의 통일론인 전쟁과 군사력에 의해, 서로 증오하고 적개심을 가짐으로서 해결될 수 없고 또 그리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집 17: 23-24).

 

평화주의 통일 사상

 

함석헌은 ‘전쟁에 의한 통일’을 절대적으로 반대했을 뿐 아니라 ‘통일을 위한 군사력 증강론’도 반대하면서 오직 평화적 방법을 통한 ‘평화 통일론’을 주장했다. 함석헌은 대량 살상을 초래하는 현대 전쟁의 성격을 잘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전쟁을 통한 통일론을 결사반대했다. 그리고 통일은 오직 ‘비폭력 통일’로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비폭력 통일론은 양쪽 민중들이 요구할 때에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 조건으로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강조했다. 민주주의 실현은 평화 통일의 선결 조건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1964년 어느 대담에서 한 함석헌의 말을 들어보자. 

 

앞으로의 통일, 물론 총부리 맞대고 피 흘려서 오지 않아. 누구도 그런 피의 통일은 원치 않을 거야. 비폭력으로 통일을 갈망하지만 문제는 데모크라시야. ...오로지 비폭력으로 통일해야지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내 신조야. 양쪽 민중이 그것을 절실히 요구할 때만이 가능하게 된다(전집 17: 379).  

 

함석헌은 정치 권력가들의 ‘전쟁 통일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이런 통일론은 정치 권력자들이 자기 권력 유지 수단으로 통일 문제를 이용하는 것이지 진정으로 통일을 이루려는데 있지 않다고 보았다. 1968년 <사상계>에 쓴 글에서 함석헌은 주장하길,

 

통일하기 위해 전쟁은 불가피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속이는 말입니다. 전쟁으로 통일 절대 아니됩니다. 전쟁을 말하는 목적은 ’통일이 안되더라도 정권은 내가 쥐어야‘한다는 데 있습니다(전집 10: 24).

 

함석헌은 남북한 사이에 상호 신뢰를 쌓는 길 만이 통일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전집 17: 380). 남북한 사이의 증오심이야말로 통일을 저해하는 실질적이고도 명백한 장애물이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우리 형제요 자매라고 생각한다면 죽인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임을 강조했다(전집 9: 394). 우리는 여기서 이념보다 인도주의 정신을 앞세운 함석헌 사상의 면모를 볼 수 있다. 함석헌의 평화 통일론은 기본적으로 인도주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1968년 북한의 특수 부대가 청와대를 기습했을 때, 남북한 사이에는 무력 충돌의 위기가 있었다. 이때에도 함석헌은 전쟁과 군사력 증강론을 반대하면서, 더 나아가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버릴 것을 호소하고 있다(전집 9: 394-395).  

 

씨알의 평화주의

 

1970년대 들어와 함석헌은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평화주의적 통일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1971년에 쓴 글에서 그는 세 단계 평화 통일론을 제사하는데, 첫째 단계는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상호 군축을 하는 일이며, 세 번째 단계는 평화를 국시로 채택하는 것이다(전집 14: 59-60). 이는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기 1년 전의 제안으로서 평화 통일론의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함석헌의 이 평화 통일론에 담긴 제안은 1988년 NCC 통일선언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1976년 함석헌은 씨알의 평화주의만이 민족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평화주의라면 몰라서 우습게 여겨서 그렇치 사실은 힘 중에 이런 힘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어요? 그거는 칼 하나 안 쓰고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 이런 무서운 정신력을 가지는 씨은 불별체라 그 말이오. 불로 태울 수도, 물에 빠뜨릴 수도, 칼로 찍을 수도 없는 것이 씨이라 그 말이오. 우리 민족의 제일 과제인 남북통일도 그 외에 길이 없다고 나는 그래요. 그게 무슨 소린고 하니 민족의 정도가 낮다 그 말이야. 남북문제도 그렇고 세계문제도 그렇고 전체 씨이 동원되는 외에 길 없을걸요(전집 14: 386) 

 

요약하자면 함석헌은 평화주의를 남북한 통일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동시에 반공주의와 군사력 증강보다 더욱 현실적인 방안으로서 생각했다. 그래서 반전 반 군사주의 입장을 확고히 하면서, 남북한 통일의 평화적 과정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구체적인 실천 지침들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민주주의, 민족 자주, 민중 주체로 표현되었다.  

 

민주주의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는 4.19 민주혁명을 중단시켰고 아울러 활발한 통일운동과 논의 또한 중단되었다. 쿠데타 정권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 정책을 강화시켰다(조동진 1994: 32-34). 그러나 함석헌은 그의 통일론을 일관되게 주장했고, 군사 쿠데타 이후부터 그의 통일론은 군사 정권을 비판하는 것을 담기 시작했으며, 이는 통일과 민주주의는 서로 필수불가결하게 연결되는 민주주의 통일론으로 나타나게 된다. 좀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민주적 평화 통일론’이다.

 

1963년 쓴 글에서 함석헌은 군사 정권이 반공주의를 국가 정책으로 삼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반공이 국시란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무식해서 한 소리입니다. 국시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반공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국시야 첨부터 환한 데모크라시가 국시지, 반공은 그 영원한 진리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전집 14: 148). 이는 민주주의를 반공주의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주장한 것이다. 함석헌이 이런 주장을 했던 때에서 23년이 지난 1986년 국회에서 통일 국시론을 주창했던 유성환 의원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던 것을 상기해 본다면 군사 정권 초기에 반공주의 국시를 거부하고 민주주의 국시론을 주창했던 함석헌의 주장의 과감성과 예언자 정신을 볼 수 있다. 박정희 군사정권 이후 함석헌의 통일론은 민주주의 정치 투쟁과 밀접히 연결되어 졌다.  

 

함석헌은 군사정권을 민중의 자유로운 뜻과는 위배되는 것으로 보았고, 군사정권의 통일정책 또한 민중의 뜻을 반영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하고 무시하는 것으로 전개된다고 보았다. 함석헌은 이런 민중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남북한 정권을 모두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민족 분단을 초래한 주범은 남북한 정치인들의 권력욕과 이기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분단의 주범을 미소 두 강대국의 개입이라는 외적인 요인보다는 남북한 정치 엘리트들 간의 갈등이라는 내적인 요인을 강조했다. 남북한 정권이 분단을 자신들의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비판했다. 남북한 정치 권력자들은 전쟁을 통한 통일을 주장하곤 했으니 함석헌은 이를 자신들의 권력 유지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으며, 동시에 민중만이 분단을 해결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민족 자주-민중주체

민족 분단 문제에 있어 함석헌의 민족 자주 사상은 그의 종교적 통일론에서부터 엿보이기 시작한다. 민족이 스스로 정신적인 힘을 갖는 것은 그의 종교적 통일론의 핵심인데, 여기서 민족의 자주적 정신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주적 민족 정신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종교적 각성이라는 것이 함석헌의 지론이다. 함석헌은 남한의 민족 자주 정신의 결핍을 가장 안타까운 일로서 생각하곤 했다(전집 17: 9-26; 전집 14:65-83).

 

함석헌은 한국 전쟁과 민족 분단을 민족 자주 정신의 결핍에서 온 것으로 이해했다. 1958년 한국 전쟁을 반성하면서 쓴 글에서 그는 북한의 공산주의 통일과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통일 모두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전집 14: 119-120). 이러한 입장은 이후 1962년 쓴 글에 나타난 그의 중립론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진술되고 있는데, 남과 북의 이념 모두를 초월하는 제 삼의 자리에서의 통일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태도는 기독교 평화주의 신앙과 보편적인 사랑의 하나님 신앙에 기반하는 것으로서, 이런 점에서 함석헌의 민족 자주 통일론은 종교적 평화 통일론과 사상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64년에도 함석헌은 통일에서 우선 중요한 일은 민족의 자각을 들고있다. ‘잃어버린 나를 찾고 볼 일이지 민족의 아무런 자각 없이 어떻게 통일을 말하겠는가’(전집 17: 376). 그는 분단의 우선 책임을 외세에게 라기보다는 우리 민족 모두, 특별히 남북한 양쪽의 일분 집권자들에게 두고있다. 그는 ‘과거 남한에 극단적인 친미주의자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에 극단적인 친소주의자가 있어서 서로가 자기의 직위, 자기만의 번영을 위해서 나라를 민중의 뜻과는 달리 요리하려 했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전집 17: 376).  

 

함석헌의 민족 자주 통일론은 1970년대에 더욱 활발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는 민족은 하나의 인격적 존재라고 말하면서 그러기에 사람이 자각함으로 삶을 증진시키듯이 민족도 자각하는 존재이며 그럴 때만이 민족이 새롭게 진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전집 9: 297-298)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민족 자주 없이 사회개혁과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즉, 외세의 개입과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외세가 시키는 대로 하는 정치 권력자들이 있는 한 통일은 불가능하다(전집 9: 300). 이 정치 권력자들은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민중 의식을 왜곡시키고 동시에 민중을 억압한다. ‘간악한 지배자들이 민족의운명이라는 이름을 악용하여 그 뒤에서 대중착취를 하고 있지만 절대로 오래갈 수 없다’(전집 9: 301). 이를 ‘반동적인 민족주의’라고 부른다. 이런 지배자의 왜곡작업에 속아서는 안 되는데 속지 않기 위해 민족의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배자들이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국가 지상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민중을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의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함석헌의 민족 자주 사상은 민중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점이 여기에 있다.  

 

1971년 함석헌은 남북한 정부 모두 외세를 따라 민족을 분단시키는데 앞장 선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물러나야 한다고 역설했다(전집 14: 58). 이런 정치 변혁이 통일의 선결 과제라 계속해서 주장했다(전집 17: 18-19). 남북한 정권 모두에 대한 동시 비판을 통해보면 함석헌의 양쪽 이념을 초월하는 ‘중립화 통일론’(전집 14: 59-60)이 정치적 급진론임을 알 수 있다. 더 나아 가 매우 체제 비판적이며 반국가주의적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두 정권이 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통일의 첫 단계다. ...두려움 없이 하는 말로, 오늘 우리의 두 정권은 다 그들(미쏘)의 제자다. ...새 한국을 위한 역사적 합창 수술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독소는 국가지상주의이다. 그것에 자본주의형이 있고 공산주의형이 있으나 민중을 썩히는 독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오늘보다 높은 형의 정부를 세우지 못하겠거든 차라리 통일 소리 말라 (전집 17: 19). 

 

‘통일은 그만두고 남한에 사는 동포들 사이에도 터놓고 얘기하지 못하고 있은 지 10년이 넘어 20년 다 된다. 집권자들은 한 번이라도 민중의 소리를 들어 준 일이 있는가. 자기네들 멋대로 민중을 다스린다고 말해놓고 이랬다저랬다하니 누가 정부에서 하는 일 믿게 되었나. 아니 민중들이 그 누가 저들더러 나와 달랬어. 누가 그따위로 다스려달랬는가 말야’ (전집 17: 376).  

 

참으로 통일을 말하려면 민중의 뜻을 먼저 따르고 민중의 소리를 듣는 것이 통일의 진정한 자세라는 것이다.

1970년대 함석헌의 평화통일 사상은 민주화 통일 사상의 기반을 형성했다. 참된 통일은 민중 민주주의를 통해서 라는 것이다(전집 14: 63-83). 이 당시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민주화 투쟁이 가열되던 때였고, 함석헌은 국가 안보를 핑계로 통일논의를 독점하려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 통일 문제를 독재 권력의 유지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질타했다(전집 17: 12). 함석헌은 통일 논의에 민중이 참여하는 것을 강조했다. 1971년 <씨의 소리> 10월호에서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쓴 글에서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족 통일은 곧 혁명입니다. 이것은 민족혁명만도 아니요, 그보다도 더 크고 더 깊고 더 새로운 혁명입니다. ...다른 나라 정부들은 물론 믿을 수 없고 우리 남북에 있는 정부들을 믿어서도 아니됩니다. ...지금있는 정치기구들은 다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지난 시대의 물건입니다. ...통일은 결코 한 정치주권 밑에 들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전집 14: 201). 

 

그는 정권적 차원의 통일 논의를 본질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고, 오직 남북한 민중이 주인공으로 나서서 이루는 남북 통일을 고대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민중이 주인공으로 나설 수 있을까? 남한에서는 군사 독재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이루는 길이다. 북한에서는 어떠해야하나? 아무런 방안이 없을까? 아마도 함석헌이 <씨의 소리>에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게 된 동기가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남북한 민중이 통일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통일은 남한 정권이든 북한 정권이든 어느 한 정권 아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전적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일이 바로 통일임을 알리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의 권위주의 아래 짓눌리고 자유로운 영성을 빼앗고 노예화시키는 권력자들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려는 정신적 힘을 키우는 길 뿐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양쪽 정권과 정치 권력자들은 통일을 한다해도 오직 한 정권으로 하는 낡은 통일을 추구하고, 그러기에 통일한다는 일이 오히려 통일을 가로막는 일을 만들고 있으며 이에 민중들을 끌어들이고 민중 의식을 왜곡시키는데, 이렇게 가다간 통일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니 통일을 하자면 어렵더라도 남북한 민중이 깨어나서 권력자의 노예 됨에서 벗어나서 진정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새로운 통일의 길을 걸어가자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서 함석헌은 통일을 혁명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그 새로운 나라 새로운 길은 민중들의 선한 양심과 비폭력 평화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이 함석헌의 믿음이자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될 수만 있다면야 더 할 나위 없는 것이지만 정치적 현실에서 보면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 프로그램이 결여된 사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남북한 정권 차원의 통일 논의의 무용성과 해악성을 그 본질로부터 꿰뚫어 보고 있는 함석헌이었기에 이를 극복하고 통일을 이룰 대안 세력으로 남북한 민중들에게 촛점을 맞추었고, 이런 사상적 방향 제시는 비록 정치적 실천 프로그램의 존재 여부와 타당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통일논의와 실천에 획기적인 전환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함석헌은 정치적 전략적 통일과 민중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통일을 구별했다. 함석헌은 민중의 힘을 믿었고, 그 민중의 힘은 평화 정신에서 나오는 힘이라 믿었다. ‘민중은 손에 무기를 쥐어줄 때 강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용서와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맨손을 들고 나설 때 정말 강합니다’(전집 14: 203). 함석헌의 민중 통일론은 그의 평화주의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참고문헌-

함석헌 기념사업회. 민족의 큰 사상가 함석헌 선생(서울: 한길사, 2001).
함석헌 전집 3: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서울:한길사, 1993).
- ‘민족 통일의 종교’(177-191)
전집 9: 歷史와 民族
전집 10: 달라지는 世界의 한길 위에서
전집 14: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전집 17: 民族統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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