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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기본소득, '좌파버전'과 '우파버전' 어떻게 다르지?" /프레시안20120309

by 마리산인1324 2013. 7. 20.

<프레시안> 2012-03-09 오후 12:07:25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0309113734

 

"기본소득, '좌파버전'과 '우파버전' 어떻게 다르지?"

[99%를 위한 기본소득] 기본소득의 좌우 버전과 노동운동ㆍ문화운동의 선순환 고리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마포 민중의집 공동대표 

 

유비쿼터스 시대의 역사적 분기점

최근 들어 '기본소득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무조건적으로 일정액의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발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200년 전 샤를르 푸리에가 제기한 이후 19세기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 모토로 자리 잡았다가 사라졌던 이 오랜 발상이 이제 다시 새롭게 등장하게 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 승승장구하던 자본주의가 쇠락의 길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위로는 금융위기가 확산되고 아래로는 소득의 원천인 임금노동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광범위한 현상이 그 지표인 셈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될 경우 그동안 다수의 노동으로 축적된 거대한 부를 그 생산자였던 다수 사회구성원들에게 되돌려 주는 길(기본소득 혹은 보장소득) 이외에 사회 자체가 존속할 수 있는 별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게 된다.

오늘날 소득의 원천인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사라지는 이유는 2차 산업만이 아니라 서비스산업 등 모든 산업 분야에서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에 의해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생산수단 전반이 '자동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생산관계가 그대로 유지된 채 이런 추세가 가속된다면 2020년대에는 현재 남아있는 일자리의 50% 이상이 사라지고, 2030년대가 되면 2% 내외의 일자리만이 남게 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전망(제레미 리프킨)도 나오고 있다. 물론 이런 사정은 OECD 국가에 한정된 것이고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가에서는 비록 저임금일지라도 선진국에서는 사라져버린 일자리가 존재하고 있으며, OECD 국가들에서도 그런 수준의 저임금이라면 얼마든지 새롭게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저임금노동으로 생존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있다. 돈 없이 상호 부조하는 생활공동체와 의식주 일부를 돈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자연환경의 존재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전제조건들은 OECD 국가들에서는 이미 해체되었고,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도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있다.

게다가 한국사회는 상호부조 시스템의 파괴와 일자리의 소멸이라는 이중의 압력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열악한 상황에 부닥쳐 있다. 40년 만에 국민소득이 300배 이상 증가한 세계 최고속 압축 성장을 위해 90% 이상의 인구가 도시로 내몰린 결과, 여타의 개도국이 아직 유지하고 있는 그와 같은 비상품적 생존기반이 사라져 버린데다가, 이제는 OECD 국가와 같은 속도로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고 사회복지 시스템은 OECD 최하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 최고를 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런 추세는 이제 시작이지 끝이 아니라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일자리는 2010년대에 본격화될 GNR 기술혁명(유전자 기술 Genomics, 나노 기술 Nanotechnology, 로봇 기술 Robotics)에 의해 더 빠른 속도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보자본주의의 전도사로 세계적 명성을 날려 온 앨빈 토플러조차 오늘날 자동화된 지식자본주의는 이제 자본주의 자체의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식의 무정형성과 집단지성적인 성격은 자본주의적 상품화의 수량화 및 사유화와 근본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모순을 '지적 재산권'의 형식으로 넘어서려고 하나 이런 형식은 지식생산의 발전에 새로운 족쇄를 채울 따름이기에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낡은 사회적 관계가 새로운 생산력의 발전을 옥죄이는 이런 양상은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발생했던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모순적 공존을 반복하는 것이다. 토플러는 이런 상황을 화폐경제와 비화폐경제의 공존이라고 부르며, 점차 비화폐경제 부문이 증대해 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존속하는 한 '비화폐경제'란 실은 오늘날 늘어나고 있는 비정규직, 불안정노동, 그 가치가 제대로 지불되지 않는 부불노동에 의해 작동하는 경제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화폐경제와 비화폐경제의 결합이란 곧 지불노동과 부불노동의 결합, 다시 말하면 노동과정에서의 착취와 노동과정 외부에서의 수탈이 결합된 '혼합경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오늘날 노동의 양극화, 소득의 양극화, 자산의 양극화, 문화의 양극화의 실질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자나 경영학자들은 이를 '롱테일 곡선', '멱함수분포'라고 시각화하는데, 이런 형태의 양극화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1~10%가 사회적 부의 90%를 소유하고 나머지 90%가 10%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 늘어난 고무줄이 결국에는 끊어지듯이 사회 시스템 자체가 붕괴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의 두 갈래 길

카오스 이론에 의하면 시스템의 요동이 극심하게 되면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미국 헤게모니 하의 현대 자본주의 세계체계가 해체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도 이와 같은 분기점을 향해 요동치고 있다. 그 두 갈래 길의 하나는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새로운 자본주의로 전환하려는 우파적인 길이고, 다른 하나는 차제에 자본주의를 넘어서 대안사회로 나가려는 좌파적 길이다. 생계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는 점증하는 프레카리아트에게 생존의 토대를 제공하기 위한 기본소득 운동에도 이와 유사하게 좌파적인 형태와 우파적인 형태의 두 갈래 길이 나타나게 된다.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판 빠레이스와 앙드레 고르 등에 의해 제기되어 금융위기의 확산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좌파적 기본소득 운동은 전 국민에게 상당액의 기본소득을 지속적으로 지급하여 자본주의를 넘어서 연대적 대안사회로 나가자는 길을 터나 가자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있고 대중적인 관심을 끌게 되자 이를 이용하여 우파적인 형태의 기본소득 공약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전 국민에게 일정액의 기본소득을 일시적으로 지급하여 국민적 불만을 잠재우면서 내수 소비도 증가시켜 일자리 감소의 충격을 완화시키면서 위기를 넘어서자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2006년 이후 독일의 재벌 베르너가 주장해온 기본소득, 2012년 일본에서 주류 연합전선을 물리치고 압승을 거두며 새롭게 대중적 스타로 부상하고 있는 극우 정치인인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도루가 주장하는 기본소득이 바로 그러하다. 그런데 양자는 명칭이 유사하지만, 그 취지와 재원조달 방식, 기본소득정책과 나머지 사회 시스템 전반과의 상관관계에서 확연한 차이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 외형이 유사하여서 일반 대중으로서는 헷갈리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하시모토 도루는 선별적 복지정책은 누가 복지의 대상인가를 가려내는 업무를 복잡하게 만들어 공무원을 늘리고 세금이나 축내며 엉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해당 분야의 공무원을 줄이면 그 비용으로 보편적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조달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어 '기본소득 공약'만으로는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기 어렵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기본소득-반원전 공약하면 진보인가?] <프레시안>, 2012년 2월 19일, 이승선 기자). 그러나 하시모토의 주장은 현재의 국가 규모를 줄인 재원으로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자는 주장이므로 자본의 입장에서도 솔깃한 보수적 주장이 아닐 수 없는 데 반해, 좌파적 기본소득은 사회 전체 소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불로/투기소득'에 대한 세금으로 지속 가능한 기본소득과 보편적 복지의 재원을 마련하자는 주장이므로 우파의 자본 친화적 취지와는 상반된 것이다. 이런 중요한 차이점은 2000년대에 들어 유럽에서 전개되었던 기본소득의 좌파적-우파적 버전 간의 논쟁과정에서 명확히 드러난 바 있다.

진보적-좌파적 버전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본소득의 재원이 불로/투기소득 환수에 기초하면 경제적 양극화를 넘어설 길이 열리게 되며, 이 과정이 지속될 경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이 가능하게 된다. 불로/투기소득을 지속적해서 줄이고 이를 기본소득으로 전환해나갈 수 있다면 현재의 {불로/투기소득 60%+ 노동소득 40%}의 비율로 구성된 자본주의적 경제시스템이 {기본소득 50%+노동소득 50%}의 비율로 구성된 탈자본주의적 경제시스템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곽노완, 2007). 그에 반해 보수적-우파적 버전의 기본소득 공약은 자본의 불로/투기소득 축적 방식은 그대로 놔두고 현재의 정부 재정의 일부를 전 국민에게 나누어주어 국민의 환심을 사서 정권을 장악하고, 전 국민의 소비를 일시적으로 늘여 내수시장을 활성화하여 현 단계 자본주의 위기를 일시적으로 없애면서 축적의 계기를 새롭게 만들자는 '조삼모사'의 방책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목표, 재원, 지속가능성 등에서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기본소득의 차이를 명료히 하지 않으면 극우의 보수 담론과 좌파적 진보 담론 간에 혼선이 발생할 수 있다.

진보적 기본소득 운동의 문화 정치적 전제 조건

이미 거대하게 축적된 불로/투기소득을 사회적으로 환수하여 무조건적-보편적-지속적으로 증대하는 형태로 전체 사회구성원들에게 기본소득(현금+ 무상급식/무상교통/무상주거 등)을 지급하자는 진보적 기본소득 운동은 다음의 두 가지 과정과 연결되지 않으면 우파적 버전으로 쉽게 회귀될 수밖에 없다. (1) 불로/투기소득을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대중적 연대가 이루어져 자본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2) 또한 광범위한 대중적 연대가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해서 유지ㆍ확장되어야 불로/투기소득 전체를 기본소득으로 전환해가는 일이 지속 가능하게 될 것이다. (2)의 경우가 정말 어려운 것은 비록 일시적으로 대중들의 동의가 이루어져 (1)이 실현된다고 해도, 다수의 국민들이 기본소득으로 얻어진 더 많은 화폐와 늘어난 자유 시간을 기왕의 방식대로 자본주의적 상품과 여가 소비에 모두 사용해 버린다면 (2)를 위한 사회정치적 연대는 지속가능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1)과 (2)가 연결된 사회적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으로 늘어난 화폐와 자유시간을 자본주의적인 상품과 여가의 소비가 아니라 일 중독-상품 중독에서 벗어나 파편화된 감수성을 회복하고 자율적-연대적인 존재로 재탄생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 정치적인 활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경제적 기본소득(혹은 보장소득)은 이와 같은 늘어난 자유시간의 질적 활용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기본소득의 쟁취를 위한 경제적 이행전략은 그와 연동된 문화정치적 이행전략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앙드레 고르가 이미 1988년에 제안한 바 있는, 다음과 같은 문화정치적 제안들은 이런 맥락에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그는 (1) 자동기술화의 확산에 따른 노동시간의 감축이 불가피한 상황을 수세적으로 사고하는 대신, 오히려 "기술로부터 유토피아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계기로 간주하면서 노동시간을 지속적으로 감축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모두가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나누고, (2) 그렇게 해서 줄어든 임금을 노동(의 양)과 관계없는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통해 보전하고, (3) 그와 동시에 늘어나게 된 자유시간을 각자가 자아실현과 문화적 향유를 위해 자유롭게 사용하는 <시간-해방 정책>을 실현하기가 그것이다.

앙드레 고르에 의하면, "자동화에 의해 제품의 단위당 비용이 무시될 수 있을 정도로 낮아지는 경향이 있고, 제품들의 교환가치가 폭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회는 불가피하게 개인적인 소비와 집단적인 소비에 관해서 자신의 선택과 우선순위를 반영하는 정치적인 가격체계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Gorz, 1990; 202). 이렇게 "정치적인 가격체계"로 시장가격을 대체하게 된다면(사실상 이는 모든 근대경제에서 발생하는 관행, 과세와 보조금 등을 확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소득 수준이 노동의 양과 무관하게 되고, 그리하여 모든 시민에게 노동과 관계없이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사고가 자연스럽게 도출되기 때문에 좌파만이 아니라 우파에서도 이런 사고가 확산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파적인 최저소득보장 정책은 모든 자선제도와 마찬가지로 - 연대적인 방식으로 지불되는 것이 아니라 - 제도적인 '시혜조치'로서 제시되기 때문에 고르는 이런 시도가 과거의 구빈법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고 비판한다(임시직 노동자에 대한 실업수당 지급처럼).

그는 이런 시도에 반대하여 노동할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규직 노동자와 이로부터 배제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그 대신 '노동의 양과 무관한 소득에 대한 권리'와 '노동에 대한 권리' 사이의 '단절 없는 결합'만이 유일하게 좌파적 대안임을 강조한다. 이는 곧 모든 사람이 나의 인격 전부를 노동에 쏟을 필요도 없지만, 동시에 자신의 생존을 경제정책 결정자의 '선의'에 의존함 없이도 능동적으로 자신의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라야 각 개인은 사회적 관계와 무관한 미시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고립되는 '잉여인간'에서 벗어나 사회적 생산관계 속에서 일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사회적 개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득과 그에 상응하는 일정량의 사회적 노동이 모두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감소해도 소득이 감소하지 않도록 보장"해야 하며, 동시에 "소득이 노동 그 자체로부터 독립해서는 안 되고 [단지] 노동시간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Gorz, 1990; 208) 이런 관점에서 그는 우파적인 보장소득과 좌파적인 보장소득을 확연히 구별하고 있는 데 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Gorz, 1990; 208~212)


(이 표에서 기본소득의 재원이 직접세인가 간접세인가에 따라 우파와 좌파의 버전을 구분하는 앙드레 고르의 주장은 2006년 베르너가 간접세에 의한 우파적 버전을 소개하면서 사실상 무의미해졌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진전된 상황에서는 바람직한 재원 구성은 직접세와 간접세 양자는 물론, 불로-투기 소득까지 포함하는 복합적인 구성으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표에서 나머지 항목의 비교는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이유로 고르에게서 '기본소득'은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의 이행에 꼭 필요한 경제적 수단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목표라기보다는 이행 과정 전체를 가시화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매우 복잡한 다차원적인 이행 경로에서 기본소득의 적실한 역할은 어떤 것일까? 이를 다이어그램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 그림은 고르가 제안하는 좌파적 관점에서의 기본소득 운동은 단순히 모두에게 재화를 재분배하는 데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출발점과 도달해야 할 분명한 목표를, 아울러 출발점과 도달점이 하나의 선순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데 핵심이 있음을 보여준다. (1) 그 출발점(전제)은 노동자 대중을 포함한 전 사회구성원들 간의 강력한 연대를 통해 모두에게 노동할 권리를 주는 것이며, (2) 그 도달점(목표)은 시간해방정책을 통해서 노동시간을 지속적으로 줄이고 자유시간을 지속적으로 늘림과 동시에 각자가 늘어난 자유시간을 자유롭게 설계하여 문화적 향유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3) 그리고 (1)과 (2), 즉 사회적 연대 및 <노동할 권리>와 문화적 향유(문화적 권리)는 서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순환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권과 문화권의 확대 실현이 상호 선순환을 이루지 못할 경우, 기본소득의 지속가능성 역시 불투명해질 것이다. 문화권의 확대 실현이 단지 개인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것일 뿐이라면 지난 30여 년간 그러해 왔듯이 사회적 연대는 오히려 약화될 것이고, 결국 기본소득을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강제할 정치적 힘 역시 약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연대와 긍정적 피드백이 가능한 문화적 향유는 기본소득의 지속가능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역으로 기본소득을 강제할 사회적 연대 역시 비상품적 형태의 문화적 향유라는 새로운 목표가 불투명하면 기본소득으로 얻어진 부와 자유시간을 자본주의적 소비로 소진할 가능성 역시 높은 만큼, 애초에 기본소득 운동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연대의 출발점 자체가 비자본주의적인 문화적 향유와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선순환 구조 만들기

그렇다면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선순환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동안 양자의 협력은 주로 파업 투쟁이나 부당해고 반대투쟁 등에 한정됐지만, 이런 방식은 일상적 차원에서 노동자와 문화활동가들과 예술가들의 주체성의 형태 자체에 변화를 일으키는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주체성의 형태 변화를 위해서는 파업과 물리적인 투쟁 상황에서의 협력을 넘어서서 일상적 차원에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협력이 필요하다. 앙드레 고르가 이런 새로운 형태의 운동 과제를 노동운동에 대해 제시한 내용을 알기 쉽게 도표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런 과제 설정은 단기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변화의 물질적 토대가 될 수 있는 <기본소득 운동>과 함께 겹쳐 볼 경우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전반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중장기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떤 순서로 진행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 위의 과제들 중에는 먼 미래에 실현될 수 있는 일들도 많지만 당장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일들도 있고, 중기적으로나 가능한 일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를 실현 가능한 순서로 재배치해보면 다음과 같은 개략적인 로드맵을 그려 볼 수 있다(심광현, 2011).


우리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1과 2의 과제는 낯선 것이 아니지만, 3과 4의 과제는 매우 생소한 것이다. 물론 3의 과제 중에서 사회운동과의 연대 투쟁은 이골이 난 것이기도 하겠지만, 여기서도 다른 운동과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문화운동과의 연대 역시 파업과 해고반대 투쟁 등의 과정에서만 연대했을 뿐, 일상적인 과정에서 소비문화를 대체할 수 있는 비자본주의적인 형태의 생활문화와 자아실현 및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문화운동과 노동운동이 적극 연대해 본 적은 없다. 80년대 중반의 민중문화운동이 이와 같은 방향을 모색한 적은 있었으나 당시에는 노동조합이나 지역 차원에서 주민자치가 부재했던 관계로 일군의 민중문화운동가들이 힘겹게 벌여나간 작은 실험에 머물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노동조합이 과거에 비해 큰 규모로 발전했고, 지방자치단체와 주민자치 프로그램들도 상당 부분 정착해 있기 때문에 적극적 의지를 갖추고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면, 노동운동-문화운동-지역운동이 상호 결합하여 비상품적 형태의 다양한 상호부조적이고 문화교육적인 프로그램을 상설적으로 운영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공동 노력의 목표와 필요성에 대한 공감이 없고, 이를 마주치게 할 적극적 계기가 없었던 것일 뿐이다. 현재 노동운동의 주체적 조건 역시 매우 열악하지만, 문화운동과 지역운동은 더욱 파편화되고 조악한 상황에 부닥치고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조직적 역량을 여전히 가진 노동운동이 주도적인 역할을 전개하여 지역단위로 '노동자문화교육생활협동센터'(가칭)를 세우고 운영하는 일을 전개해 나갈 필요가 있다.

조합원들이 소비자본주의의 각종 프로그램에 의해 조작되고 길든 오락과 여가 활동의 수동적 소비자이기를 그만둘 수 있도록, 작업장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당장 자아-실현과 적극적인 소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다목적 공간들(개방대학, 공동체 학교와 공동체 센터, 서비스 교환 협동조합과 상호부조조합, 협동적인 형태의 보수와 자율생산 작업장, 토론과 기술 이전을 위한 그룹, 합창단-밴드-공예-그림과 미디어 동아리 스튜디오 등)을 마련하여 노동조합이 단순한 임금협상의 기구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자율적인 생활과 문화활동의 센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센터들은 조합원들만이 아니라 이 센터가 위치할 지역 차원의 주민 및 사회운동단체들이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역단위의 '민중의 집'으로도 확대될 수 있고, 노동운동 차원에서 추진하는 '시간해방-기본소득' 운동이 노동자만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체를 위한 운동이라는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센터에서 진행해야 할 다양한 종류의 프로그램들을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심광현, 2011).

(1) 노동시간 자기 설계 연습: 연간 근무시간을 30주나 40주로 나누어 시간표를 설계하고, 각자의 자유시간을 스스로 설계하는 연습을 통해 노동시간 대와 근무시간 대를 다르게 만들면서, 개개인의 삶을 연간, 5년간, 10년간, 평생에 걸쳐 재설계하는 일의 중요성을 경험하고, 보편적 시간해방-노동권-기본소득을 실현해가는 일의 개인적, 사회적 의미를 깨닫기.
(2) 개인의 오감을 계발하여 즐거움을 창조하기: 취미 생활 및 예술 동아리 활동
(3) 주변 공간환경을 생태적이고 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공공 프로그램: 참여적 공공예술과 도시공간환경 바꾸기, 차 없는 거리 만들기 등
(4) 이웃이나 지역 전반에 걸쳐 사회적 관계와 연대의 형식들을 창조하는 상호부조: 먹거리 생협과 의료생협, 돌봄 활동(공동육아, 청소년 교육, 노인과 장애우 돌봄 활동), 관혼상제 상호부조 등
(5) 우정과 정서적 관계의 개발을 위한 교육적, 예술적 프로그램: 독서모임과 예술치료
(6) 다양한 형태의 DIY 활동: 물건 수리, 목공활동, 식품 재배, 서비스 교환 협동작업
(7) 다양한 사회문화운동들과의 인식의 공유와 협력 작업을 위하여 건강, 교육, 에너지, 도시계획, 생태, 여성, 소비, 정치 영역에서의 다양한 투쟁의 성과와 문제점을 공유하기 위한 교육
(8) 주민자치의 확대와 참여계획경제의 시뮬레이션을 위한 교육
(9) 시간해방정책-보편적 노동권-보편적 기본소득의 선순환 정책 관련 교육 등등

이런 프로그램들은 가능한 것들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지만,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들이 노동자들을 수동적인 문화적 소비자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잠재된 문화적 다중지능을 현실화하는 문화적 생산자이자 창조자로 전환해 나감으로써, 한편으로는 소비중독에서 벗어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중독에서 벗어나 창조적 노동과 창조적 문화활동의 균형을 스스로 잡아가는 새로운 형태의 자율적이고 자치적이며 연대적인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일 것이다. 진보적-좌파적 기본소득 운동은 노동운동-문화운동 간의 이와 같은 선순환 고리 형성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