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ok> 2012.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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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론 비판
- 박가분 -
이번 글은 기본소득을 단순히 ‘비난’하거나 ‘기각’하기 위한 글은 아니다. 다만 기본소득론을 그것의 논리적 일관성의 측면에 대해 생각하고 나아가 변혁운동의 이념과 목표에 대해 원리적인 사항들을 다시 점검해보기 위한 것이다.
기본소득이란 노동여부와 소득에 대한 심사 없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평등하고 무조건적으로 현금으로 지급되는 복지를 의미한다.
이른바 ‘기본소득’을 변혁운동의 중심의제 혹은 단일의제로 설정할 것을 요구하는 ‘기본소득론’이라는 것이 지난 몇 년 동안 진보적 운동사회에서 회자되어 왔다. 그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결국 기본소득론의 골자는 기본소득이 사회변혁의 중심적인 의제가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에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들 역시 만만치 않다. 예컨대 이에 대한 가장 원리적인 비판은 기본소득 운동이 생산에서의 변혁을 외면하고 분배투쟁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이 부딪히는 곤란한 점들은 결국 기본소득론 자체의 ‘유연성’에 있다. 기본소득론 역시 원리적으로는 생산에서의 변혁이나 노동운동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몇몇 기본소득론자(강남훈 등)들은 기본소득을 통해 실현되는 분배원리의 변화가 역으로 생산관계에서의 변화와 노동운동을 촉진하거나 그것에 대한 긍정적인 조건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론상에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생산 우위의 테제(생산관계가 분배원리와 교환원리를 결정한다)를 당위적으로 고수하는 것만으로는 기본소득론을 충분히 비판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기본소득론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일관성에서의 결함이다. 우선적으로 기본소득론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비판의 출발점은 바로 기본소득의 ‘재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묻는 데서 시작된다. 기본소득론자들은 공통적으로 보편적 기본소득의 재원이 바로 (탐욕스럽고 비생산적인) 금융자본가들의 ‘호주머니’ 속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그렇다면 그러한 금융자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돈이 어디서 유래하느냐는 데 있다. 만일 기본소득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금융자본이 정말로 그렇게 ‘비생산적’이라고 한다면 결국 금융자본이 굴리는 돈은 금융자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수취한 다른 생산적 영역에서 생산해낸 ‘잉여가치’에 있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금융자본의 지분은 바로 생산적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에 의존한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세금, 유통자본의 이윤에도 해당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반론은 현대 탈산업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원리’ 자체가 바뀌었다는 데 있다. 즉 남성 중심의 육체노동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대공장에서만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그러나 이는 애초에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에 대한 개념적 구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산에 불과하다], 종래에 ‘비생산적’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영역에서도 가치를 생산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론의 출발점은 바로 가치를 ‘생산’하는 영역(생산적 노동이 이뤄지는 영역)과 그것을 ‘교환’하고 ‘분배’하는 영역(비생산적 노동이 이뤄지는 영역)의 구분을 [더 나아가 경제적 가치를 재생산하고 축적하는 경제적 재생산과 노동력과 자연을 재생산하는 사회적 재생산 영역의 구분을] 철폐하고, 가치의 생산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을 산출해내는 어떠한 영역(이를테면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에서든 이뤄진다는 데 있다. 물론 정치경제학 비판의 구분에 따른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모두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을 산출한다. 그런데 사회적 유용성의 잣대만을 적용하자면 결국 이 모두 가치를 생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딱히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주류 경제학에서도 일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장에서 유용한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것은 무엇이든지 새롭게 생산된 가치로 인정될 수 있다. 그리고 언뜻 보면 주류경제학(신고전파 경제학)과 대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제도파 경제학(장하준 등등) 역시 가치가 가치로서 인정되는 영역을 시장에서 국가/시민사회의 영역으로 확장할 뿐 가치를 사회적으로 유용하다고 인정받은 물질적/비물질적 활동 전반으로 확장하는 것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물론 마르크스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그리고 경제적 재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을 구분한 요점은 이 둘을 위계적으로 차이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스스로를 물적으로 재생산하는 사회적 방식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행한 그러한 구분이 앞으로 영속적이라는 것, 경제적 가치의 생산이 그 외의 다른 노동과 활동에 대해 앞으로 특권적이라는 것을 함축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무엇보다 가라타니의 말대로 “마르크스는 기존의 가치법칙을 대안적인 사회에서는 철폐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철폐를 자본주의 내에서 당장 이룰 수 있을 것처럼 간주하는 사고방식이다.
아무튼 가치의 생산을 사회적 유용성의 생산과 곧바로 동일시 하는 것은 근대 사회에서 ‘성립된’ 교환가치(경제적 가치)와 사용가치(사회적 유용성)의 구분 자체를 망각하는 정치경제학 비판 ‘이전’의 시점으로 퇴행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치를 단순히 사회적 유용성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물질적 측면에서 사고하는 마르크스의 사고로부터 후퇴한 것이다. 즉 가치란 비판적인 정치경제학적 사고 속에서 단순히 사회적인 가치평가일 뿐만 아니라 한 사회를 물질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물적 범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기본소득론자들은 가치를 바로 정확히 전자의 의미에서만 사고하며 사회변혁의 관건을 단순히 어떤 활동이 ‘유용하다’는 것을 (시민사회나 국가에 의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으로 돌려놓는다. 이러한 사고는 극단적으로는 경제적 가치가 바로 그것을 ‘유용하다’고 인정하거나 명령하는 어떤 ‘정치적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비경제학적이고 소아병적인 사고방식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본소득론이 단순히 마르크스의 사고로부터 ‘이탈’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사고에서 주류경제학의 통념으로 후퇴해서 스스로 떠안게 되는 ‘모순’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컨대 사회적으로 유용한 모든 것을 가치의 생산으로 인정하는 기본소득론의 맹점은 바로 그것이 비난하는 ‘금융자본’이 ‘기생적’이고 ‘비생산적’이라는 것을 더 이상 논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물론 지난날 금융자본의 비대화가 경제의 불균형과 양극화를 초래하고 나아가 금융불안을 초래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금융자본의 활동이 만들어내는 있는 사회적 유용성을 부정할 수 없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에도 불구하고 다른 건재해 있는 금융자본은 여전히 불확실한 투자에 자금을 대주고, (기본소득론자들이 예찬하는) ‘유연한’ 삶의 방식을 실현할 수 있는 금융공학에 기반한 금융상품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9년의 사례만을 들면서 금융자본이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른 생산적 활동을 착취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다고 한다면 기본소득론자들은 금융자본의 활동 역시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을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른 이야기이지만 기본소득론자들의 다수는 금융자본이 비대화된 현상 자체는 언급해도, 그것이 비대화된 원인 자체에 대해서는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애초에 왜 금융자본이 비대화된 것인지에 관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바로 생산 우위의 테제를 검증할 수 있는 핵심적인 장소이다.
무엇보다 기본소득론자들이 예찬하는 ‘잉여’적인 삶의 방식(소위 말하는 프레카리아트의 생활감정) 역시 사실은 그들이 그토록 비난하는 금융자본주의가 확립된 이후의 자본주의 시스템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프레카리아트의 생활감정의 핵심은 바로 노동이 향유와 분리되는 것, 그리고 노동이 유예된 삶의 방식을 예찬하는 것에 있는데,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빚 자체를 또 다른 빚으로 끊임없이 돌려막을 수 있는 금융공학의 기법이 없으면 (그러한 금융공학이 지난 2008년에 드러낸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실화’될 수 없는 생활감정이기도 하다. 기본소득론자들에 의해 이뤄지는 금융자본에 대한 비난 중 상당수는 기본소득론의 가능성을 배태한 역사적 기원과 조건을 망각했다고 해도 좋다.
다시 기본소득의 재원 문제로 돌아가 보자. 지금까지의 논증에 대해, 아마 많은 기본소득론자들은 자신들이 과세의 대상으로 겨냥하며, 한편으로는 도덕적으로도 비난하기도 하는 저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이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주창하는 기본소득론(과 그것이 옹호하는 프레카리아트적 생활감정)의 역사적 조건을 형성했다는 것을 거리낌 없이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그것만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당수 기본소득론자들은 여전히 현행 ‘후기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기본소득의 실현이 비물질적 탈산업 경제를 이룩한 자족적인 지역 공동체와 그 안에서의 생태주의적 삶과 ‘친화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앙드레 고르).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기본소득론의 논리적 일관성을 여전히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장하준 역시 결국 기본소득이든 무엇이든 어떤 형태의 보편적 복지이든 그 재원이 결국 생산적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다. 산업적 기반이 갖춰지지 않은 국가에서 기본소득이나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것은 공허하다. 예컨대 이번 유럽발 금융불안의 진앙지였던 그리스에서 진정한 위기의 원인은 바로 선진 유럽국가의 금융자본에 재정적으로 의존한 채 독자적인 산업구조를 키울 수 없었던 그리스의 기형적 산업구조에 있었다. 물론 이러한 그리스의 기형적 산업구조가 바로 금융자본주의가 초래한 모순이라는 것을 말할 것도 없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러한 산업구조를 초래한 금융자본의 국적이 역설적으로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선진적인 산업자본주의 국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리스 역시 독자적인 산업기반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기본소득이든 무엇이든 어떤 독자적인 분배정책도 그리스를 그러한 종속적인 구조에서 탈출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생산적 노동을 벤 파인과 해리스가 제안하듯이 산업자본에 의해 고용된 노동을 의미한다면, 보편적 복지의 재원이 생산적 노동이 생산한 잉여가치에 있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그러한 재원의 지속가능성이 산업자본의 생산성 향상에 달려 있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서 기본소득이 그 옹호자들이 주장하듯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당장 철폐하지 않고서 사회적 변혁을 유도해낼 수 있는 21세기 대안전략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결국 부딪히는 모순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과 같은 보편적 복지에 대한 ‘옹호’가 전제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의 산업구조는 그러한 옹호자들이 표면상 스스로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생태주의’와 ‘자족적 지역공동체’의 전망과 한참 거리가 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기본소득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당장 자본주의 자체의 생산원리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기본소득을 통해 그러한 생태주의와 지역공동체가 실현한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이 의존하는 물질적/사회적 기반은 바로 선진적인 산업자본주의의 경쟁력과 기술수준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 선진적인 생태주의적 공동체 역시 그 기술과 재원에 있어 산업자본의 기술과 그것의 축적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역으로 일국을 넘어선 생태주의 문제를 발생시키고 다른 국가의 지역공동체의 균형을 교란시킬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일국에서 기본소득이 실현된다고 한다면 그것을 담당할 국민국가는 그러한 기본소득의 재원을 유지하기 위해 산업자본의 생산성을 추구하는 데 더욱 열심일 것이고, 그리고 그러한 산업자본을 지원하기 위해서라도 금융자본 역시 (지금보다는 양적으로 덜 비대해질지라도) 더욱 더 필수불가결하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이 만일 대중적으로 강력한 지지를 얻으며 국가정책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면 [장하준이 정직하게 인정하듯이]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경쟁적 구조는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생산 우위의 테제’를 다시 한 번 실천적/이론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생산영역에서의 활동이 다른 경제적 활동영역에 대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러한 생산 우위의 테제는 단순히 말해서 ‘생산관계’를 바꾸지 않은 채 이뤄지는 분배원리의 변혁이 어떠한 대가를 치루고 현실화될 수 있는지를 고찰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생태주의와 지역공동체를 실현할 것으로 ‘기대’되는 기본소득 및 이와 유사한 보편적 복지의 분배정책들이 ‘여전히’ 의존해야만 하는 생산관계가 무엇인지를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여기서 다시 한 번, (마르크스에 의해 제기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은 바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사이에 초래된 ‘불균형’에 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경쟁이 초래한 생산력의 눈부신 발전에 의해 오늘날 사회는 이전과 달리 더 이상 산업자본에 의해 고용된 노동자들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에 종래에 비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되는 경제적 활동의 범위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더 확장되었다. [물론 이러한 현실인식 자체가 과장되었다는 장하준의 지적 역시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행 자본주의는 생산적 노동에서 이뤄지는 장시간/고강도 노동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비생산적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데 무능력하다. 네그리의 말대로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은 더 이상 노동에 대한 정당한[fair] 가치를 지불하는 데 있어 총체적으로 무능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그 자체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을 철폐하는 충분조건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노동에 대한 ‘정당한’[즉 노동시간과 그 강도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보상에 기반한] 보수의 지급여부가 자본주의적 생산원리를 변경시키는 것은 아니며, 역사적으로 어떠한 단계의 자본주의도 모든 노동에 대한 그러한 정당한 보수의 지급을 자신의 유일한 분배원리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다시 한 번,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즉 생산영역에서 ‘노동자의 생산수단으로부터의 분리’를 핵심으로 하는 그러한 사회적 관계가 변경되지 않는 한, 비생산적 노동이 여전히 생산적 노동을 통한 잉여가치의 생산 및 착취에 ‘복무’한다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생산적 노동의 축소와 비생산적 노동의 확장 및 다변화라는 사회적 경향을 애써 부인하거나 축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두 번째로, 그렇게 확장되고 다변화된 비생산적 노동이 여전히 생산적 노동이 수행하는 잉여가치의 생산과 착취에 ‘복무’한다는 현실 역시 애써 부인하거나 축소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의 ‘모순’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적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기본소득이 노동과 연계되지 않은 복지라는 기본소득론자들의 주장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을 생각해볼 수 있다. 기본소득이 개개인의 노동과 연계되지 않은 소득이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기본소득과 보편복지의 재원이 산업자본이 착취하는 생산적 노동에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철저히 노동과 연계되어 있다. 물론 기본소득을 수취하는 몇몇 개인들은 노동과 연계되지 않은 복지를 누린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노동을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것은 역으로 기본소득론자들이 노동에 대한 ‘사회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몇몇 개인이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게 소득을 올린다고 해도 여전히 보편적 복지의 재원이 마르크스가 가치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베른슈타인의 언급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미리 상정하는 것을 부인하며 운동 그 자체가 모든 것이라는 ‘수정주의’적 테제를 제출한 바 있다. 그것은 운동이 목적의식적으로 지향해야 할 유토피아적 목표(자본주의적 생산원리가 지양된 공산주의 사회)를 부정하며,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는 운동의 과정이 전부라는 사고에 기반해 있다. 언뜻 보았을 때 기본소득 운동은 이러한 수정주의적 테제와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이 바로 그러한 기본소득의 운동의 ‘목표’로 간주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몇몇 분파들은 그러한 의제를 ‘이행강령’ 내지는 그와 동격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기본소득 운동의 논의수준을 보았을 때 기본소득이 운동의 실제적인 ‘목표’라기보다는 오히려 운동 그 자체를 지속하기 위한 ‘맥거핀’의 성격을 갖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이라는 분배원리의 변화만으로 그러한 기본소득 운동이 쟁점화하는 지역문제, 생태주의 문제, 부문의제, 프레카리아트 운동 등과 같은 다양한 운동들이 자신들이 문제시하고 있는 모순들을 [그 스스로 자처하듯이]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상식적인 사고의 수준에서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으로 그러한 다양한 쟁점들을 중심의제로서 포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나 지향점을 모호하게 하고, 오히려 운동 그 자체만으로 자족하는 악무한으로 퇴행하게끔 만드는 주범에 지나지 않는다.
운동이 궁극적으로 어떤 사회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한 전망은 말할 것도 없이 기본소득이 실현된 사회에 대한 전망만으로는 말할 수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기본소득 운동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생산원리 자체의 변화를 기도하는 각종 운동 역시도 앞으로의 사회에 대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전망을 내놓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생산영역에서의 변혁이 여타 분배영역이나 교환영역에서의 불공정함과 수탈의 개선을 영속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사실’로 간주한다면, 여전히 생산영역에서의 변화 즉 생산영역에서의 생산수단에 대한 자주적이고 사회적인 관리가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교환 및 분배원리의 실현에 대한 필요조건이라는 점을 승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운동 그 자체의 영속을 끊임없이 긍정하는 좌파적인 악무한으로 퇴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생산영역에서의 변혁을 운동의 이념과 목표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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