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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세계

체 게바라, 그는 왜 쿠바를 떠났는가? /채널예스

by 마리산인1324 2013. 8. 27.

<채널예스>

http://ch.yes24.com/Article/View/22358

 

 

체 게바라, 그는 왜 쿠바를 떠났는가?

볼리비아에서 붙잡힌 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 최경진 -

 

6월 14일은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혁명가이자 ‘남미의 예수’로도 불리우는 체 게바라의 생일이기도 하다. 지난 세기 낭만적인 혁명가로 ‘소비’되었지만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맑스주의에 입각한 경제 정책을 고안하고 실행했던 정치가로 활발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는 체 게바라(Che Guevara)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정치가, 의사, 저술가이며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이다.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바스크-아일랜드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게바라는 폐렴에 걸려 2세 때 심한 천식을 앓는다. 그의 부모님은 아들의 건강을 우선시하여 천식 치료에 좋은 환경을 찾아 몇 번이나 이사를 했다. 어렸을 때는 경련을 동반하는 천식 발작에 위기에 빠진 적도 많았으며, 그 때마다 산소 호흡기를 사용하여 회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럭비 같은 격렬한 스포츠를 사랑했으며, 발작할 때는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며 경기에 돌아오곤 했다. 중증 천식은 그를 평생 괴롭혔다.


게바라는 운동, 여행, 문학을 사랑하는 청년으로 자라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진학하여 의학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951년에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남미를 돌아 방랑 여행을 했다. (이때 남긴 기록을 토대로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가 나왔다) 이 무렵 남미 각 나라들은 우익 쿠데타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했다. 하지만 빈부의 격차와 노동착취가 매우 심했으며 부유층은 최상의 삶을 누리는 반면 서민층은 극도로 빈곤한 삶을 살아야했다. 이러한 상황을 견문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타난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으며, 마르크스 주의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 이 여행을 계기로 게바라는 평범한 의사에서 혁명가로의 첫 의식 변화가 이루어졌다.

1953년에는 대학을 졸업한 후 25일만에 친구 카를로스 페레로와 함께 다시 남미 방랑 여행을 떠난다. 혁명이 진행되는 볼리비아를 여행하면서 그때까지 억압을 받아왔던 인디오가 해방되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를 여행하고 하코보 아르벤스 그스만 시대 포프리스모 정권 하에 있는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과테말라에서 의사를 계속하다가 조국 페루에서 쫓겨나 과테말라에 망명하고 있던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와 만나 교감하여 사회주의에 급속히 눈을 뜨고, 그녀와 결혼한다.

과테말라 아루벤스 정부는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지속된 구조화된 수탈과 오랜 독재 부패 정권에 의해 유린된 사회의 개혁을 진행 중이었다. 미국기업의 착취에서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고, 농업 자본주의 경제 확립을 위해 마야계 인디오의 복권을 시도하였다. 착취만 당하였던 소작농에 대한 농지 분배 등 과테말라 혁명이라 불릴 정도의 급진적인 개혁을 진행했다. 아루벤스 정권이 미국 유나이티드 프루츠 사의 사유지에 손을 쓰면서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를 맹비난 하였다. 게바라는 이 정부의 활동을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로 평했다. 그러나 군부의 배신으로 미국 CIA가 지원한 반정부 세력 ‘까스띠요 아르마스’에 의해 아루벤스 정부가 전복되면서 (PBSUCCESS 전략), 민주 선거로 선출된 과테말라 정통 혁명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게바라는 무력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진심으로 지향하게 됐다.

그 후 새로 집권한 아르마스 정권에 의해 게바라의 암살령이 내려졌다. 게바라는 아내와 함께 실망과 분노를 안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1955년 7월 이곳에 망명 중인 반체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다. 쿠바 후르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 타도를 목표로 동료들을 인솔하고 있는 카스트로에 공감하게 되었다. 게바라는 이때, 하룻밤 사이에 반 바티스타 무장 게릴라 투쟁에 참여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와 딸을 멕시코에 남겨두고 혼자서 쿠바로 향한다. 1956년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를 반군 지도자로 하여 총 82명이 8인승 레저 보트 ‘데셈바르코(그란마)’에 탑승하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이 타서 위생 등의 환경이 열악하였다. 또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폭풍 속에 출발했기 때문에 7일 후 12월 쿠바에 도착했을 때 많이 지치고 사기도 떨어졌다. 반군의 상륙 계획을 카스트로가 미리 발표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쿠바 정부에 유출되어 반란군은 도착 직후부터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괴멸 상태가 되었다. 결국 살아서 도착할 수 있었던 사람은 82명 중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등 12명뿐이었다.

상륙 후, 반군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잠복하여, 산골 마을을 전전하면서 군 재건을 도모했다. 이후 쿠바 국내에서 활동하던 반정부 세력과 합류에 성공하여 반군 세력은 점차 강화되어 갔다. 당초 부대에서 게바라의 역할은 군의관이었지만, 혁명군의 정치 방송을 하는 라디오 방송국(라디오 레베르데)을 설립하는 등 정부군과 전투에서 그 인내심과 성실, 상황 분석, 냉정한 판단력,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점차 반군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도착 1년 후 카스트로부터 제 2군 ‘코만단테’에 임명되어 지휘권과 소령의 계급을 받아 카스트로에 이어 명실상부한 반군 이인자가 되었다.

1958년 12월 29일에 제 2군을 이끌고 쿠바 제 2의 도시 산타클라라에 돌입한다. 많은 시민의 가세로 적들을 제압하고 수도 아바나로 가는 길을 열었다. 1959년 1월 1일 르헨시오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망명하자, 1월 8일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하여 쿠바 혁명이 달성되었다. 체 게바라는 투쟁적인 업적과 헌신적인 작업으로 쿠바 시민권을 부여받아 쿠바 새 정부의 각료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쿠바혁명 승리후 쿠바 공산당과 쿠바 혁명정부의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쿠바혁명에서 얻은 것들을 지키며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형제를 부활시켜 친미또는 반혁명세력 약 14,000명을 죽였다. 쿠바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발전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토지개혁의 준비에 참가하였다. 쿠바국립은행총재, 쿠바산업부장관,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 등에서 일하여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그는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게바라는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1967년 10월 9일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그의 시체는 정부에 의해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체 게바라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와 달리 그의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면서 다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의 시체는 30년후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

체 게바라는 사후에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르헨티나 의사의 자리를 버리고 전 아메리카의 쿠데타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에 뛰어들었으며,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이를 박차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쿠바, 콩고, 볼리비아에서 벌인 일련의 혁명과정에서 반혁명 세력과 수많은 농민들의 피해를 가져왔음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쿠바에 살았던 사람들은 체 게바라를 ‘아바나 백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많은 글들을 남겼다. 혁명 중에도 일기를 썼으며,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틈틈이 엽서를 부쳤다. 볼리비아에서 붙잡혀 그의 혁명이 마감되던 순간, 볼리비아 장교가 체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마지막 질문을 했다.

“게바라,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그러자 체는 대답했다.
“혁명의 불멸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신념을 추구했던 사람.
그 모습을 존경하기에, 체 게바라의 생각과 자유로움, 혁명에 대한 열정이 그대로 담겨있는 글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