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1892호 http://weekly.chosun.com/wdata/html/news/200602/20060215000042.html 2006.02.20.
위기의 한국 농업 ‘해법은 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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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50개 주의 농무장관 중 14명이 농민 출신이다. 멕시코의 우사비아가 농무장관도 평범한 농부였다. 이탈리아에선 농민조합의 대표들이 농무장관과 정책을 논의한다. 농업 선진국일수록 ‘농정(農政)은 농민에게 맡기는 체제’가 보편화해 있다. ‘정책 수립은 학자나 관료의 몫’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한국에선 낯선 풍경이다.
그런 한국에 변화가 일고 있다. 우선 농민 출신의 첫 농림부 장관이 임명됐다. 박홍수 장관은 경남 남해군 장포리에서 양돈 축산업을 했다. 박 장관은 농민 출신답게 농업법인이나 농민단체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즐긴다. 현 정부에서 어떤 분야보다 국민의 참여가 활발한 부서가 바로 농림부다.
코앞에 닥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도하개발아젠다(DDA) 등 거센 농업개방의 물결 속에서 한국 농업을 지키고 국제경쟁력을 키울 방안을 모색하는 그에게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는 농민은 농경제학자와 농업관료에 이은 ‘제3의 두뇌’다. 지난 1월엔 농업법인 성공사례 10건을 모아 ‘농자천하지대박’이란 홍보책자를 만들고, 그 책에 소개된 10명의 법인 대표를 초청해 농정에 대한 자문을 얻기도 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도 “여러분은 전문경영인과 신기술, 자본이 결합하면 농업도 무한한 성장 잠재력이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고 극찬했다. 박 장관은 그 중 몇몇 농업법인 대표들과 나중에 개별 면담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정책 입안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비전을 가진 농업 혁명가들, 그들의 성공스토리가 혹시 한국 농업정책의 대안이 될 수 있진 않을까? 그들은 어떤 식으로 총체적으로 맞고 있는 농업의 위기를 탈출했나?
성공한 농업법인들은 공통된 키워드를 가지고 있었다. 시장(market)과 유통(circulation)이다.
“생산자보다 고객(시장) 중심의 사고 혁명이 필요하다.”(참다래유통사업단 대표 정운천) “한국 농산물은 시장의 수요를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농민이 팔리지 않을 작물을 재배한다.”(해드림 대표 이종우)
“문제는 판로(販路)다. 유통체제를 정비하지 않고 생산에만 투자해봤자 도로는 안 만들고 자동차만 계속 찍어내는 꼴이 된다.”(학사농장 대표 강용)
성공한 농민 사장들이 시장과 유통을 강조한 것은 당연하다. 그들 대부분이 생산부문에 대한 투자보다 소비시장의 개척에 전력해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기르는 농업에서 판매하는 농업으로
이를테면 ‘학사농장’은 유통전문법인이다. 1993년에 농대를 갓 졸업한 강용(40) 사장이 비닐하우스에서 먹고 자며 기르기 시작한 친환경 유기농 야채가 할인점에서 신뢰를 쌓은 뒤, 전국 45개 농가와 유기농 계약을 확대해 판매대행업으로 연간 3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해드림’은 인터넷 쌀가게다. 천안시 성환읍의 농민 이종우(53)씨가 인근 농가의 최상품 쌀만 엄선해서 인터넷으로 판매해 브랜드 파워를 얻었다. 이씨는 온라인으로 소비자가 원하는 쌀을 고를 수 있게 했고 고객의 취향에 맞게 도정해주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해드림의 쌀은 일반 쌀보다 20%나 비싼데도 90%가 재주문 고객이다.
‘참다래유통사업단’은 해남군 670여 키위 재배농가의 유통뿐 아니라 뉴질랜드 제스프리사의 키위 수입판매권까지 잡아서 연간 274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데 최근엔 고구마 판매로도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문제는 유통이더군요. 해남 고구마의 품질이야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다래 유통망에 고구마를 얹었더니 매출이 15배나 늘어났습니다.” 정운천(53) 사장의 말이다.
농업법인 대표들은 “농산물 시장의 혈류가 막혀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농산물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과잉’이란 항간의 통념을 비판하면서 “수요는 많다. 다만 시장조사가 불충분해 수요처가 어디인지, 수요량이 얼마인지 알지 못할 뿐이다. 결국 도시민은 배추가 부족한데 배추 농가는 밭을 갈아엎는 안타까운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역대 농정(農政)이 생산력 증진에만 편집한 결과다. 보릿고개는 이미 박정희 정권 때 사라졌는데도 뒤이은 정부까지 계속 증산에만 매달렸다. YS·DJ 정부 시절, 농촌에 지원된 68조원 중 42%가 경지정리, 축산구조 개선 등 생산기반 확충에 쓰인 반면 유통개선과 수출확대에 풀린 돈은 7%에 불과했다. 결국 많이 재배해서 그냥 썩히고 있다. “한국의 농산물 유통 시스템은 아직도 자급자족 시대의 5일장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강용씨는 말했다. 도시민이 집 주변에서 농산물을 사기란 쉽지 않다. 차를 타고 한참 나가야 하지만 주차공간이 없는 시장이 대부분이다. 차를 타고 쇼핑할 수 있는 대형 할인점은 그래서 인기를 끌 수밖에 없다.
“FTA 협상을 앞두고 정부는 ‘119조원의 정부 보조금을 농촌에 지원하겠다’고 말했지만 돈의 액수보다 어디에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돈만 쏟아부어선 실패한다’는 교훈을 농민들은 지난 10년간의 쓰라린 체험을 통해 얻었다. 1993년 말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과 함께 정부는 ‘전업농 육성으로 농산물 개방에 대처한다’며 10년간 농촌에 68조원을 퍼부었지만 결과는 농가의 빚만 늘었다. “실패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생산농가에만 돈을 쏟아붓고 시장 개발은 등한시했기 때문이죠.” 정운천씨의 말이다.
“농업이야말로 구조조정 시급”
농산물이 상품이 된 지 오래지만 대규모 기업농의 발전은 미미하다. 미국의 썬키스트, 네덜란드의 그리너리, 뉴질랜드의 제스프리, 이탈리아의 아포 같은 연간 매출액이 1조~2조원에 달하는 농민 출자 거대기업이 한국에는 없다. 공업이나 서비스업의 경우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시장조사를 할 만한 기업이 많아 특정상품의 과잉공급을 예견하고 막을 수 있다. 가령 휴대폰 회사들은 신상품 개발 전에 자체적으로 수요를 예측한다. 만일 한국에 전국 규모의 과일회사가 2개만 있어도 실컷 키운 과일을 썩혀버리는 농가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한국은 땅이 좁고 땅값이 비싸서 큰 농기업이 성공하기 힘들다”는 비관론도 있다. 그러나 땅은 큰 문제가 아닌 듯하다. ‘농자천하지대박’에 소개된 법인 중 넓은 토지를 소유한 법인은 없다. 작게는 10여 농가, 많게는 670개 농가와 재배계약을 체결해 운영할 뿐이다. “오히려 일반인의 농업분야 투자를 제한한 그간의 제도가 농기업 형성의 걸림돌이었다”고 농업법인 대표들은 말했다. 강용씨는 “일반인은 농업법인에 50% 이상의 지분을 가질 수 없고 의결권을 행사할 수도 없게끔 제한한 농업회사법인제도가 그 동안 기업농을 가로막았다. 과거에 비농민이 농업법인의 형태로 땅투기를 할까봐 마련한 조항이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이 민간투자를 막은 셈”이라고 말했다. 이종우씨는 “한국농업을 치유하려면 새로운 피, 즉 주식시장의 돈이 수혈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금에서 빼주는 정부 보조금이나 은행 융자금 대신 민간의 투자금이 들어와야 ‘내 돈’이란 애착이 생기고 방만한 경영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농업행정은 농민의 투정을 달래기 위한 국가의 ‘빚 잔치’였다. “119조원을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보다 그 10%의 금액이라도 민간 주식시장에서 흘러 들어가게끔 물꼬를 터주는 게 혁신전략”이라고 법인 대표들은 진단한다.
농림부도 기업농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2004년 6월 ‘농업경영체 활성화 방안’을 내놓았다. 그 내용은 비농업인도 50%를 넘어 75%까지 출자할 수 있도록 진입장벽을 완화하고 5년간 농업소득세를 면제해주는 등의 파격적인 세제지원책이다. 그러나 민자(民資)를 유치하려면 수익이 나야 한다. 부동산 투자보다 농업법인 투자의 이윤이 낮다면 누가 돈을 댈 것인가? 과연 농업에 그만한 가능성이 있을까?
분업으로 원가 절감
탤런트 하희라의 광고로 유명해진 전북 익산시의 ㈜하림은 닭고기 직판의 이윤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가공공장을 세워 200가지 신선육 제품과 180여가지의 육가공 제품을 자체 생산한다. 경남 진주시의 ‘장생도라지’도 도라지 가공공장을 세워 사탕, 화장품, 비누 등 20여종의 상품을 생산해 연간 3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경기도 이천시의 ‘도드람 양돈협동조합’은 직영음식점을 운영해 상품을 자체소비하고 제품 홍보와 소비자 기호 파악에 활용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농업법인에 속한 개별 농가는 생산 전담과 가공 전담으로 나뉘고, 생산농가는 다시 쌈채 재배 농가와 토마토 재배 농가 등으로 나뉘면서 분업체제를 이루었다. 분업은 원가 절감으로 이어졌다. “한국 농민은 파종, 재배, 포장, 판매까지 일인다역을 수행합니다. 그런 전근대적 소농 시스템은 국가적 낭비입니다.” 강용씨의 말이다.
그러나 정부의 농정은 분업화에 역행해왔다. UR 타결 직후 YS정부는 그 동안 면에서 한 명만 선정하던 전업농을 10명 가까이 늘려 융자금을 지급했다. 10명의 전업농은 정부에서 빌린 돈으로 제각각 트랙터와 트럭과 경작지를 사들였다. 결국 농촌의 땅값만 높아졌고 농기계를 빌려주는 위탁영농회사는 문을 닫았다.
강용씨는 “이곳 장성군 남면의 경우 전체 농가가 1년 농사를 짓는 데 트랙터 5대로 충분히 돌려가며 쓸 수 있는데도 대부분의 농가가 3000만~5000만원씩 하는 트랙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콩은 쌀 다음으로 많이 경작하는 작물이지만 탈곡기도 없어 농민은 아직도 조선시대에 쓰던 도리깨로 콩을 털고, 1억원짜리 콩 선별기계 한 대면 남면 전체에서 간단히 해결될 콩 선별작업을 손으로 하느라 노인들이 전등불 밑에서 밤을 새고 있다.
분업화는 원가절감 외에도 재배농가의 스트레스를 덜어준다. 학사농장과 계약한 장성군 남면 분향리의 최용주씨는 “농사만 지으니까 맘이 편하다. 그래도 수익은 1.5배나 늘어났다”고 했다. 최씨가 재배할 작물의 종류와 수량은 파종하기 전에 학사농장의 연간 납품 계약을 토대로 산출된다. 즉 농민이 씨를 뿌리기 전에 그 채소가 언제, 어느 매장에 얼마의 가격으로 출하될지 데이터가 나와 있다.
학사농장 역시 포장만 하고 수송은 운송업체에 맡긴다. “우리가 직접 수송하면 물류비용이 줄기는커녕 차량 유지비에 보험료가 더 듭니다.” 아웃소싱은 어디에서나 비용절감의 지름길이다. 해드림도 인터넷 쌀가게지만 온라인 주문배송은 전문업체에 맡긴다. 사실 이종우 사장은 거의 컴맹이다. “홈페이지를 제작한 인터넷업체에 월 20만원의 관리비만 지불하면 다 알아서 해주는데 뭐 하러 직원을 고용합니까? 나는 품질관리, 고객관리만 하면 되지요.”
농업과 농민복지 문제 분리해야
성공한 농민사장들에게 물었다. ‘당신이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농업을 개혁할 것인가?’ 그들은 농정분리(農政分離)를 말했다. “농업은 냉정한 비즈니스로 봐야 하며 그를 위해 농업을 정치에서 분리해야 합니다. 농업 문제는 시장원리로, 농민 문제는 복지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데 농업을 손봐서 농민 복지까지 해결하려니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것이죠.”
사실 선거 때마다 농촌은 선심공약의 혜택을 입어왔고 농심(農心)을 달래는 것이 선거참모들의 최우선 과제였다. 농민 스스로도 “응급처치식으로 처방한 약이 아편이 되었다”고 토로할 정도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농촌의 표밭을 무시하고 농촌의 구조조정을 실시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농촌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될수록 오히려 농업은 후퇴하는 정책이 속출했다. 대표적인 예가 DJ정부의 소농 보호정책이다.
YS정부 시절 조일호 농림부 차관팀이 소수의 기업농을 육성하는 엘리트 농정을 구상한 적이 있었다. 골자는 매년 농대 졸업자 중 우수인력을 선정해 3억원씩 융자해서 엘리트 농가로 키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 농민 출신 영농 후계자들은 뒷전이냐’는 농민단체의 반발에 부딪혀 백지화됐다. 그 후 DJ정부에서 김성훈 농림부 장관은 소농보호정책으로 전환하면서 결국 정부자금이 농촌 구조조정보다는 생산기반 확충 쪽으로 흘렀고, 그것이 지난 10년간 한국농업이 실패한 큰 원인으로 풀이되고 있다. 지금도 현 정부의 성향이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하고 있으므로 엘리트 기업농 육성 등 과감한 개혁드라이브는 힘들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농업법인 대표들은 “정책의 방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일관성”이라고 했다. 강용씨는 한국농업을 축구에 비유하며 재미있는 방안을 내놓았다. “외국에서 히딩크 같은 농업감독을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네덜란드 등 농업선진국의 베테랑 행정가를 영입해 10년 임기를 보장하고 농업의 전권을 위임하겠다. 그러면 우리도 ‘농업 4강’에 오를 수 있다. 히딩크 감독처럼 외국 인사는 정치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정운천씨는 “오히려 임기가 불확실한 농림부 장관보다 4년의 임기가 보장된 군수나 시장이 농업개혁을 펼치기엔 더 유리하다. 그래서 각 지자체 단위의 농업혁명이 현실적으로 빠른 길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미 그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전북 정읍시는 지난 연말에 3000명 농민의 출자를 받아서 ‘정읍 농산물유통주식회사’를 차렸다. 농민 출자 50%, 정읍시와 정읍농협 공동출자 50%로 15억원의 자금을 만들었다. 뜻이 모이면 돈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3000명이 30만원씩 내면 9억원이다. 정읍 농산물유통주식회사는 최근 뉴코아백화점 상무 출신의 전문경영인을 CEO로 영입하고 온라인 마켓과 오프라인 마켓을 함께 운영하며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올 연말이면 전남 함평군과 보성군에도 정읍시를 벤치마킹한 대형 농산물유통회사가 설립된다.
허만갑 주간조선 기자(mghuh@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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