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대상 서적】
앤서니 기든스 (1998), ꡔ제 3의 길ꡕ, 한상진, 박찬욱 옮김, 생각의 나무
노르베르트 보비오 (1998), ꡔ제 3의 길은 가능한가?ꡕ, 박순열 옮김, 새물결
에릭 홉스봄 외 (1999), ꡔ제 3의 길은 없다ꡕ, 노대명 옮김, 당대
마이클 노박 (1999), ꡔ제 3의 길 이야기ꡕ, 박종찬 옮김, 자유기업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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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의 길'은 무엇인가? 긍정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가진 한계를 버리고 그 장점만을 결합시켜 만들어낸 20세기말 중도좌파의 새로운 대안이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약체화된 좌파가 자신의 우경화된 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이처럼 해석이 엇갈리는 가운데, 최근까지도 이를 둘러싼 논쟁은 한국사회에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켜 왔다. 당연히 이러한 화제의 저작이 20세기말 좌파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이 있음은 부인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의의에 대해 이미 여러 글에서 논의되고 있음을 고려하여 새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 3의 길'이 현재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그 해석의 다양성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현재 '제 3의 길'은 20세기말 한국의 좌파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대안으로 간주되거나, 정치가들의 정략적 계산에 놀아난 서구 일부 지식인의 기만적 담론으로 간주되거나, 좌파가 현재의 위기국면을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과도적 시도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 해석들은 위에 언급된 저서 및 저자들에게서 그 논거를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제 3의 길'에 대한 논의는 한국과 서구의 상이한 조건으로 인해 한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제아무리 과대포장을 하여 실현 가능한 것처럼 만들려해도, 그것이 탄생하게 된 배경인 전통적 복지국가의 위기, 좌파정치세력의 위기는 우리에게 낯설기만 하다. 현재 우리사회가 복지국가의 과대팽창이나 위기를 논할 단계가 아니라 복지부재를 지탄해야 할 단계에 놓여 있으며, 좌파정치세력의 위기를 논하기에 앞서 좌파와 우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야 할 단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구에서 '제 3의 길' 담론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복지국가의 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오랫 동안 좌파의 상표처럼 인식되어왔던 복지국가가 그 재정적 위기에 직면하였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제 3의 길'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인 '도덕적 해이'라는 관점과 개인주의적 자발성과 의지를 통한 빈곤탈출이라는 해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복지예산을 축소해야 할 국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량실업으로 인해 발생한 빈곤계층을 위해서 시급히 복지예산을 늘려가야 할 국면에 처해 있다. 부당한 공공근로 수혜자를 적발하는데 소란을 떨 것이 아니라, 방치된 빈곤계층을 사회복지체계 속에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제 3의 길' 담론 속에는 좌파와 우파의 존재와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록 기든스 저작의 제목이 좌파와 우파의 구분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 그는 좌파와 우파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서구의 현실정치는 여전히 좌파정당과 우파정당간의 힘 겨루기에 의해 좌우되고 있으며, 좌파적 가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공론공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좌파가 존재하면서도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정반대의 경우에 해당한다. 좌파와 우파의 구분 자체는 존재하지만 그것이 정당한 대결이나 공존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다른 일방의 존재를 위협하는 마녀사냥의 기준으로만 존재하여 왔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질성은 '제 3의 길'에 대한 한국 연구자들의 호기심이 얼마가지 못하고 실망으로 바뀌게 된 이유를 말해준다. 물론 실망의 이유 자체도 매우 다양하다. 한편에서는 ‘ꡔ제 3의 길ꡕ 정도라도 논의되고 실현될 수 있는 여건’을 아쉬워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이 좌파의 우경화된 논리에 불과하다’는 실망감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사회에서 ꡔ제 3의 길ꡕ담론은 조건의 이질성과 그 내용상의 취약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실망감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푸라우드(J. Froud)의 지적처럼, “신노동당의 정치적 실천은 제 3의길 담론에서 도출되지도, 제 3의 길 담론에 의해 집행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보다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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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구의 경우 비교적 최근까지도 '제 3의 길'이 제법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물론 그 저변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 정치세력의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좌파의 혁신을 주장하는 사회정치세력이 논의를 주도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반격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위에 나열된 저작들은 이러한 사회정치세력의 이해관계를 직간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물론 국내에 소개된 것 외에도 많은 저작들이 '제 3의 길'을 다루고 있으며, 뚜렌느(Alain Touraine)의 "어떻게 자유주의에서벗어날것인가?"(Commentsortirdulibé ralisme)(1999)와 같은 저작은 '제 3의 길'에 대한 프랑스적 정서와 신사회운동론의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저작들이 아직 국내에 소개되고 있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글의 초반부에 언급한 저작들을 중심으로 최근의 논의들이 어떻게 현실의 사회정치세력과 직간접으로 결부되어 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다소 도식화시켜 말한다면, 기든스(Anthony Giddens), 홉스봄(Eric Hobsbaum) 등이 좌파의 입장을 대변한다면, 노박(Georges Novak)은 우파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리고 좌파 내부를 중심으로 볼 때, 기든스가 중도좌파 혹은 우경화된 좌파세력을 대변하고 있다면, 홉스봄은 신노동당 안팎의 다양한 반대세력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 점에서 최근의 '제 3의 길' 문제는 현실정치세력을 배후에 둔 대리전(代理戰)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위의 저자들이 기든스-블레어 판 '제 3의 길'을 둘러싼 힘 겨루기에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다면, 보비오(Norberto Bobbio)는 매우 원론적 차원에서 좌파와 우파를 넘어선 ꡔ제 3의 길ꡕ 일반의 이론적 함의를 추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좌파와 우파의 존재와 구분은 현실정치에서 필연적이며, 이 둘 사이에는 중도 또한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좌파와 우파를 초월하여 이를 대체하려는 야심적인 중도가 바로 ꡔ제 3의 길ꡕ이다. 하지만 이 초월적 중도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면 “중도파로서의 본질”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비오의 논지는 ꡔ제 3의 길ꡕ이란 역사적으로 볼 때 좌파와 우파라는 현실적 존재를 무시하려는 파시스트적인 시도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기든스가 ‘좌파와 우파간 구분의 필연성’에 대한 보비오의 해석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결국 그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反ꡔ제 3의 길ꡕ담론을 뒤집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보비오는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구분선이 약화되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기든스의 논리적 출발점이 된다. 20세기말 출현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은 더 이상 좌파와 우파의 구도로 해결될 수 없으며, “급진적” 혹은 “적극적”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중도가 좌파와 결합할 수 있음을 설득하는 논리로 이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든스의 논리가 갖는 한계는 자명하다. 부분적으로는 보비오의 저작 내부에서도 그 반론이 제기될 수 있으며, 위에 언급한 다양한 논자들에게서도 그 비판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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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저자들의 비판은 더 이상 당위론적인 비판이거나 이념적 차원의 비판이 아니다. ꡔ제 3의 길ꡕ이 현실에서 추진하고 있는 정책기조 혹은 밑그림에 대한 비판이며, 구체적인 정책내용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여기서 언급하게 될 기든스, 홉스봄, 노박, 이 세 저자는 ꡔ제 3의 길ꡕ에 대한 지지, 좌파내부의 비판, 우파세력의 비판을 고루 반영하는 것이다.
먼저 ꡔ제 3의 길ꡕ에 대한 기든스의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ꡔ제 3의 길ꡕ을 특정한 정책으로 간주하기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과거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수행해야 했던 주기적인 사고전환의 현대적 의미”로 간주한다. 달리 표현하면 좌파의 오랜 자기혁신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혁신의 시도는 항상 구체적인 정책을 수반하며, 기든스가 말하는 ꡔ제 3의 길ꡕ 또한 그 정책이 없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정책은 다름아닌 신노동당의 사회경제정책이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기든스가 말하는 ꡔ제 3의 길ꡕ은 구좌파적 가치인 해방의 정치와 신좌파적 가치인 생활의 정치를 결합시킨 것이고, 사민주의적 복지이념인 사회적 연대성을 자유주의적 이념인 “개인주의”와 결합시킨 것이며, 시민사회의 역할강화를 통해 “적이 없는 국가”를 지향하는 것이며, 국가간의 반목을 넘어 “세계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아마도 기든스의 ꡔ제 3의 길ꡕ이 보여주는 장대한 스케일과 이상적 밑그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탄은 얼마가지 못해 실현가능성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게 된다.
둘째로 ꡔ제 3의 길ꡕ에 대한 좌파내부의 비판을 살펴보기로 하자. 하버마스와 푸코를 결합시키고, 좌파를 보수주의와 결합시켜 세계적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야심찬 발상은 영국내부에서부터 심각한 반론에 직면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1998년 11월, 이미 폐간되었던 ꡔ맑시즘 투데이ꡕ의 편집자들이 모여 출간한 특별호의 번역서인 ꡔ제 3의 길은 없다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영국 좌파 내부에서 생겨난 비판의 목소리이며, ꡔ제 3의 길ꡕ이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잘 지적하고 있다. 홉스봄과 홀(Stewart Hall)에 따르면, ꡔ제 3의 길ꡕ은 20세기말 자본주의가 직면한 구조적인 모순을 우회하려는 교묘한 술책에 지나지 않다. 기든스의 저서에서 나타난 ‘급진적 중도’나 ‘중도좌파’라는 표현과 관련해서 그것이 좌파와 우파를 넘어선 중도를 강조하려는 것인지, 좌파의 온건화를 의미하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으며, 사회적 연대성과 개인주의를 동시에 강조하는 모호한 태도가 현실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점은 ꡔ제 3의 길ꡕ의 논리적 공백과 정책상의 편파성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먼저 그 논리적 공백은 기든스가 사회주의를 계획경제와 동일시함으로서 손쉽게 처리하는 방식을 취하는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20세기 중반이후 좌파의 주장은 계획경제를 벗어나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기든스는 이 점을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ꡔ제 3의 길ꡕ의 정책적 한계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의 입장에 천착할 뿐, 기업과 자본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으며,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구조적 모순과 권력의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홉스봄과 홀에게 있어 ꡔ제 3의 길ꡕ은 우경화된 좌파의 기만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최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여러 국가에서 ꡔ제 3의 길ꡕ을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로 간주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 한다.
셋째로 보수세력에 의한 ꡔ제 3의 길ꡕ비판 또한 매우 흥미롭다. 먼저 ꡔ제 3의 길ꡕ을 “기존의 좌파이데올로기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고 우파적 수단을 수용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레토릭”이라고 소개하는 역자(들)의 주장은 한국사회에서 이 담론이 얼마나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에서 노박의 글은 ꡔ제 3의 길ꡕ이 자본주의의 우월성에 압도당한 사민주의적 좌파정치세력들이 그 강점을 수용하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며, 이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의 집권은 결과적으로 좌파의 승리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승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사례로 블레어의 승리를 들고 있다. 그에 따르면 블레어의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대처였던 것이다. 그러나 노박의 입장은 ꡔ제 3의 길ꡕ을 좌파의 우경화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홉스봄이나 홀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게 된다. 그러나 후자가 우경화의 중단과 좌파노선의 창의적 개발을 주장하고 있음에 반해, 노박은 ꡔ제 3의 길ꡕ이 보다 더 우경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점이 발견된다. 노박의 주장은 복지국가의 위기 및 복지제도로 인한 개인의 도덕적 해이를 비판해 왔던 기존 미국 보수세력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개인의 창의성과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서 복지국가의 해체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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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권의 저작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든스와 블레어의 ꡔ제 3의 길ꡕ이 해방정치를 주장하지만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구조적 모순을 방치함으로서 스스로 해방정치의 의미를 탈각시키고 있으며, 복지국가의 해체를 주장하지는 않지만 미국 복지정책의 개인책임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서 복지국가의 약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먼저 ꡔ제 3의 길ꡕ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구조적 모순을 방치한다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이러한 비판은 홉스봄과 홀의 저작에서 일관되게 제기되고 있는 주장으로, 블레어가 추진했던 정책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른바 블레어의 ꡔ제 3의 길ꡕ은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명하에 저임금을 일반화시켜 기업가들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정책은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세계화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로 간주하고 경제정책을 세계시장과 외국자본의 요구에 맞게 개편한다. 이는 대처 집권기에 공고화된 노동시장 유연성과 저임금구조를 유지하여 외국기업들을 대량으로 유치하는 것이다. 둘째 소비중심의 복지를 고용중심의 복지정책으로 개편한다. 이는 개인의 고용기회를 늘린다는 명분과 복지수혜의 중단을 무기로 삼아 실업자들로 하여금 ‘저임금’을 무릅쓰고 노동시장에 진입하도록 강제하는 것으로 악용될 위험성이 있다. 셋째 EU의 노동시간규제 요청에 따라 98년 10월부터 성인남자에 한해 노동시간을 잔업포함 주당 48시간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다. 대처 집권기에 없었던 이러한 규제가 생겨나게 된 이유는 이것이 EU의 권고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조치는 본인이 원하면 추가노동이 가능하다고 규정함으로써 악용의 소지를 남겨두고 있다. 넷째 99년 4월부터 최저임금제를 실시한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노동시장 유연화와 저임금구조의 폐해를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로 실시되었다. 이 조치에 따르면 99년 4월부터는 최저임금이 3.6파운드로, 20세 미만의 청년의 경우는 3.0파운드로 확정되게 된다. 참고로 이 최저임금은 99년 현재 남자노동자의 평균임금인 4.57파운드에 훨씬 못 미치는 액수이다. 다섯째 노사관계법을 개정한다. 먼저 노동자들에게 우호적인 조치로는 출산휴가 등과 같은 경우 무급에서 유급3개월로 바꾸고, 부당해고에 대한 항소권리를 근속 2년 이상에서 1년 이상으로 바꾸는 조치가 있으며, 기업가들에게 유리한 조치로는 노사협상시 노조의 대표권을 노조원 40%이상일 때에 한해 인정하는 제한조항을 달았다는 점이다.
ꡔ제 3의 길ꡕ이 왜 사회적 불평등을 방치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도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블레어와 슈레더가 1999년 6월 유럽차원에서 ꡔ제 3의 길ꡕ을 공동선언함으로써 유럽 사민주의 좌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을 때, 이들은 프랑스 사회당의 참여를 요청한 바 있었다. 당시 이 공동선언문에 담긴-후에 삭제된-한 문장이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거부감을 초래하였는데, 그것은 기업가들이 현대사회의 ‘스타’와 같은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적은 부분이었다. 이것은 신노동당의 거대담론인 ꡔ제 3의 길ꡕ이 천명하고 있는 사회적 연대정신과는 달리 현실정치에서 기업가들을 일차적 지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프랑스 좌파정당이 경제성장에 무관심하거나 기업의 효율적 운영을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문제의 핵심은 노동자와 기업가가 고통을 분담하는 최소한의 형평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ꡔ제3의길ꡕ이수용하고있는‘일하는복지’(We lfaretoWork)에 대해 간략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점과 관련해 기든스의 입장은 이중적인 것처럼 보인다. 한편에서는 “개인이 노동을 하도록 강제하기 위하여 혜택을 줄이는 것은 이미 포화상태인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그들을 몰아넣는 것과 같다”고 지적함으로써 ‘일하는 복지’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인적자원에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다소 진부한 논리를 근거로 이를 지지하는 순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블레어 집권초기 이미 영국사회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일하는복지’정책이클린턴이추진해왔던‘복지정책’(W orkfare)의 재판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저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기든스는 그것이 미국에서 차용한 것이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로부터 차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기든스 혼자 그렇게 생각하였거나,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거나......
또한 ꡔ제 3의 길ꡕ이 주장하는 ‘일하는 복지’정책은 사회적 연대성의 원칙에 입각해서보다는 정부의 재정적자를 줄이는 방법의 일환으로 모색되었다는 홉스봄 등의 비판 또한 언급할 필요가 있다. 클린턴의 복지정책이 그러하듯, 일하는 복지의 기본이념은 세금납부자들이 게으른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부당하다는 보수주의자들의 발상을 상당부분 수용한 것이며, 빈곤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개인에게 있다는 전제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지란 존재하지 않게 되며, 이러한 제약 앞에서 대다수의 복지수혜자들은 저임금의 노동시장으로 진입함으로서 정부의 사회보장비용을 절감하게 하는데 기여한다. 그렇다고 이들 저학력-비숙련 노동자들이 안정된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을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렇게 볼 때, ꡔ일하는 복지ꡕ는 결과적으로 정부의 재정적자를 덜어주는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는 비판이 적실성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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ꡔ제 3의 길ꡕ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과 비판은 20세기말 좌파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심각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물론 좌파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새로운 탄생을 기다리는 것일지 모른다. 따라서 홀의 지적처럼 좌파의 핵심적인 주장을 포기한 채, 지금껏 자신이 비판하던 논리와 성급하게 절충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가 설득력 있게 들린다. 더욱이 이러한 성급한 포기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탈계급적 투표행태를 근거로 정당화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먼저 이를 불가피한 현실로 수용하는 것이 좌파정치세력을 위해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는 좌파진영의 위기가 왜 도래하게 되었는지 진단하고, 그 대안을 마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좌파가 위기에 직면해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좌파세력이 노동대중들의 시대적 요구에 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착취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이야기하면서도, 이것을 관철시킬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사회의 경우, 좌파를 제약하고 있는 여러 조건이 변수로 작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좌파가 대중적 요구에 부응하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기존에 제기된 다양한 대안들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뒷받침될 때, 좌파의 미래는 비관적이기보다 낙관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