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형, 신자유주의의 빛과 그림자: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와 경제(1999, 한길사)
‘잃어버린 10년’. 한때 ‘혁명의 대륙’으로 일컬어졌던 라틴아메리카의 1980년대를 상징하는 이 표현이 ‘빈곤’, ‘저발전’, ‘독재’로 점철된 ‘주변부’로부터의 오솔길을 빠져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반면 같은 시기 지구촌 반대쪽에 위치해 있던 동아시아는 ‘고진감래(苦盡甘來)의 10년’을 누릴 수 있었다. 일본을 선두로 하는 동아시아의 ‘기러기대형’(flying -geese pattern)의 성장이 1980년대초의 위기국면을 돌파하면서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물론이고 여타 제 3세계 지역의 선망의 대상으로 부상한 것이다. 특히 같은 동아시아권내에서도 한국은 동남아시아 후발 주자들의 학습 교재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이 추진하였던 ‘동방정책’(Look East Policy) 역시 ‘한국 모델’에 대한 깊은 관심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1997년 동남아를 휩쓸기 시작한 외환위기라는 바이러스균에 ‘건실한 펀드멘탈’을 자랑하던 한국이 돌연 감염되자 그 성장의 신화가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한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신자유주의 실험’, 특히 멕시코의 경험이 타산지석의 교본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동아시아 모델’에 대한 국제통화기금(IMF)을 필두로 하는 ‘워싱턴 콘센서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동아시아의 위기는 ‘크로니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한계와 ‘국가의 실패’를 여실히 보여준 좋은 사례이며 그 대안은 ‘영미형 모델’이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반격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이성형 교수의 ꡔ신자유주의의 빛과 그림자: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와 경제ꡕ(이하 ꡔ신자유주의의 빛과 그림자ꡕ는 바로 “라틴아메리카에서 배우자”라는 구호를 앞세워 ‘시장에 의한 처방’을 신비화하는 국내외 신자유주의 대안론에 쐐기를 박는 구체분석의 성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교수는 풍부한 라틴아메리카 사례를 토대로 1980년대 중후반 사회구성체 논쟁에도 관여한 바 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ꡔ라틴아메리카 자본주의 논쟁사ꡕ(1990)는 한국 사회성격에 대한 규명 작업에 진력하였던 비판 사회과학의 질을 끌어올리는데 적잖은 기여를 하였다. 뒤이어 그는 한국사회의 진보를 위한 대안적 패러다임으로서의 일반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를 둘러싼 공론의 장을 선도한 연구자 중의 일인이기도 하였다. 요컨대 그의 지적 궤적은 한국 비판 사회과학계에 첨예한 쟁점으로 떠올랐던 사안과 항상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오로지 아카데미즘에 안주하는 지역연구자가 아님을, 그리고 그의 라틴아메리카학이 한국사회의 진보를 꿈꾸는 지성의 대열과 항상 함께 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ꡔ신자유주의의 빛과 그림자ꡕ는 ꡔIMF 시대의 멕시코: 신자유주의 개혁의 명암, 1982-1997ꡕ(1998)과 함께 ‘전환의 진통’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사회에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임은 물론이다.
이 책에서 이성형교수는 라틴아메리카를 신자유주의 이념이 가장 강력하게 유포된 지역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를 1960년대의 종속과 다른 “지식과 인식체계의 종속” 현상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이교수의 지적은 ‘대안적 모델’의 부재상황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과 관료들이 “이 길밖에 없다”는 말로 워싱턴 컨센서스란 패키지를 내밀었고, 1980년대에 오랜 경제적 정체와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악몽처럼 겪은 대중들은 아무런 반성적 사고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현상을 꼬집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위기가 조성된 데에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그리고 미 재무부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안정화, 구조조정의 내용과 속도를 조절한 최종 책임자는 바로 국내의 정부 관료들과 정치세력들이었다는 것이다.
이교수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는 1973년 이후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나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지탱된 아르헨티나 군정에서 이미 시험되었다. 이 당시 군정들은 ‘기관총을 통해’ 경제개방과 구조조정을 시도한 바 있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비극적인 실패로 끝났고, 칠레에서는 부분적으로 국제경쟁력 있는 애그리비지니스를 만들어냈지만 전반적으로는 탈산업화로 부정적인 효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확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는 우선적으로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진행되기 시작한 ‘범지구적 통화주의’의 공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범지구적 통화주의의 라틴아메리카판(版)은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위기의 원인을 국가부문의 과잉성과 경제적 포퓰리즘에서 찾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처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처방은 대내적으로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탈규제로써 사적 부문의 이니셔티브를 제고하는 등 경제적 민중주의의 해체와 사적 부문의 이니셔티브 제공에 있고, 대외적으로는 국제무역의 개방, 보호주의적 수입대체산업화정책의 폐기, 그리고 동아시아형의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정책 모방 등을 통해 신국제분업구조 속의 한 고리로 편입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은 사회 전반의 제도 개혁으로도 표현된다. 우선적으로 저임금을 통한 수출산업육성 정책이 시도되기 때문에 노조의 조직력 약화를 겨냥한 노동관계법 개변을 필두로 하는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시도된다. 그리고 민영화 바람에 따른 ‘공공재의 사유화’ 현상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실험이 낳은 정치, 사회적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교수는 이를 비공식부문의 확대, 빈곤의 확산, 정치적 퇴행, 코포라티즘 노사관계의 위기 등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유주의로 인해 드리워진 그늘을 거두려는 ‘신구조주의’로 통칭되는 중도파와 좌파세력들의 대안적 논의를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신구조주의자들은 과거 ‘구조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했던 ‘구조개혁’을 통해 현재 심화되고 있는 소득불평등의 구조를 개선하여 ‘형평을 동반한 성장’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이때 ‘구’구조주의자들과 대별되는 이들의 주장은 국가개입 일반을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의 핵심 논리를 비판하지만, 지대추구행위자들의 특수이익에 포획된 ‘국가의 실패’, 수입대체산업화 시기의 ‘낭비적 보호주의’의 폐해 등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보수적 근대화노선에 해당하는 신자유주의와 달리, 이들은 시장의 활성화에는 야경국가의 기능을 넘어선 국가의 조정기능이 중요함을 지적한다. 더구나 국민국가간의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해진 이 시점에서, 국가가 재정수지 균형이란 협애한 목표에만 골몰할 경우 국민경제의 지위는 더욱 뒤쳐질 것이고 비교우위가 있는 전략산업을 빠른 시간내에 육성하기 위해서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구조주의적 대안은 이교수가 소개하고 있는 부스꼬비치의 ‘교정전략’과 친화력이 있어 보인다. 교정전략은 사회개혁 세력들과 CEPAL 등 유엔 관계기관들이 추천하는 전략으로서, 민주화를 걷고 있는 각 나라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협약을 맺어 인플레이션이나 임금협상을 타결하려는 시도이다. 이교수는 이러한 개혁주의적 전략이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개혁을 지향하는 변혁적 대안보다 외채위기 속에 놓여 있는 라틴아메리카 현실속에서 대중들에게 훨씬 더 어필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판단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사회개량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 이념이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한 하나의 대안 개념으로서 많은 좌파세력과 중도파 정치세력의 공감을 얻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그의 현실 분석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의 ‘국가중심적 모델’이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 속에서 해체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국가개입을 통해 ‘시장의 실패’를 교정하려는 사회민주주의적 대안이 국내외적 제약조건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본다. 사회민주주의적 대안이 ‘비정통적 경제안정화’ 정책의 형태로 실험된 적이 있지만 오히려 국제금융기관의 주구 노릇을 한다고 비판을 받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적 경향에 가까워지고 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예가 이교수의 전망을 뒷받침해 준다. ‘개방경제형 사회민주주의 실험’의 험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교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대중과 정치권력 사이의 대표성을 제고하고 이익매개의 제도를 근대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경우, 사회민주주의 붐은 이념의 측면에서 민중주의를 근대화한 것에 불과한, ‘낡은 부대에 담긴 새술’에 머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때 ‘노동자주도의 참여민주주의 모델’을 기치로 하는 브라질 노동자당의 정치적 경로는 이교수에게 “새로운 현대 사회주의 상을 조심스럽게 모색”하고 있는 도전적 실험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레닌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노동자당의 경우 1990년대에 들어와 “통치수단의 사회화, 권력의 분산, 정치적 다양성의 인정”을 강조하면서 “민주적이고 전략적인 사회적 지향의 계획 아래 통제되는 시장은 우리들의 사회주의 건설 이념과도 양립”함을 선언하면서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유러코뮤니즘에 가까운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교수가 소개하고 있는 멕시코의 신자유주의 실험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선 이교수는 코포라티즘적 노사관계나 에히도(공동경작지)와 같은 제도가 효율성에 반하는 것으로 매도되고 미래를 국제화와 시장논리에 찾는 멕시코에서의 신자유주의 실험의 진행을 ‘기억의 공동체’(community of memory)에서 ‘이해의 공동체’(community of interest)로의 이행으로 평가한다.
이때 멕시코에서의 개방의 정치적 효과는 이중적이다. 대외개방의 물결이 밀려듦에 따라 민족주의가 약화되고 ‘탈영토화’, ‘탈국적화’ 등과 같은 부정적 현상이 심화될 가능성도 높지만 다원주의적 정치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전통적 우익정당이며 제1야당이기도 한 국민행동당이 대의제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세력으로 변화하였는데, 이러한 변화는 멕시코 정치체제의 민주화에 긍정적 조짐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 걸맞게 ‘종속적 신자유주의’의 명암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 한 권의 책으로부터 우리는 지구촌을 ‘정글 사회’로 몰아가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속에서도 ‘진보’의 여지를 내미는 ‘역사적 개연성’(historical contingency)과 이를 지혜롭게 포착해 낼 수 있는 ‘현실성 있는 유토피아 프로젝트’(the real utopias project)의 중요성을 간취해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