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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책]우에노 치즈코,『내셔널리즘과 젠더』(박정미)

by 마리산인1324 2007. 1. 10.

 

<진보평론>  제5호

http://jbreview.jinbo.net/

2003-02-18 10:41:24

 

 

 

여성주의는 민족주의를 초월할 수 있는가?


 
박정미(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 우에노 치즈코,『내셔널리즘과 젠더』이선이 옳김,(1999, 박종철 출판사)

1.

얼마 전 후배에게서 어느 여학교의 교훈이 “겨레의 밭”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린 여학생들을 부계혈통을 이어주기 위해 잠시 배를 빌려주는 존재로, 그것도 가족의 범위를 넘어 국가적 차원의 ‘씨받이’로 훈육하는 그 엄청난 상징 폭력에 기가 질렸던 기억이 난다.

여성주의자로서 나는 국가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그것의 궁극적인 해방적 함의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족해방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의 의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또 그 전선에서 여성주의자들이 연대해야할 쟁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주의가 해방의 궁극적인 비전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배제(우리/너희)를 수반하고, 그 배제의 근거는 (부계적일 수밖에 없는) 혈통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주의자의 관점에서 ‘내셔널리즘’을 일관되게 비판하는 우에노 치즈코의 논의에서 깊은 공감을 얻었다.

게다가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호전적인, 그러나 상처 입은 터프가이들이 군가산점제 문제로 여성들에게 테러를 일삼던 때였다. 그들 폭력의 무지막지함도 충격이었지만(“헌법소원한 여자들 정신대 보내서 똥꾸녕 찢어지게 고생 좀 시키자”<나우누리 plaza 35492번, ID: 러브어겐> - 몇 번 인용했지만, 나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표현이다), 병역을 수행해야만 국민으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는 국가주의를 너무나 당연하게 내면화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놀라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연하게도 당시에 소개된 치즈코의 ꡔ내셔널리즘과 젠더ꡕ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녀는 탁월한 분석이었지만, 약간 딱딱하고 지루했던 ꡔ가부장제와 자본주의ꡕ(이승희 역, 녹두, 1994)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저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전 저작이 ‘국가’의 범주가 누락된 ‘시장’과 ‘가족’의 이원론을 축으로 서술된 것에 비해, ꡔ내셔널리즘과 젠더ꡕ는 국가(식민 모국과 식민지)와 당시 일본 여성운동 지도자, 현재 한국의 여성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 등을 역동적으로 다룬 분석으로 나에게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저자에 대해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고 짐작할 뿐 이 두 저작을 제외하고는 학문적, 실천적 경력에 대해서 더 이상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최근 ꡔ여성과 사회ꡕ에 실린 강정숙씨의 비판적인 서평을 읽고, 전쟁 책임이 있는 국가의, 또 운동가가 아닌 학자로서의 그녀의 위치로 인해 이 글이 매우 논쟁적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2.

나는 이 글을 두 가지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근대적 시민의 배제성을 근본적으로 문제삼지 않는 시민권 운동에 대한 비판과 민족주의의 가부장성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먼저 전자에 대해서 살펴보자. 저자는 여성이 국민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흔히 인권 선언이라고 번역되는 프랑스의 ‘남자 및 시민의 권리(les droits de I’homme et du citoyen)’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여성의 국민화는 여성에게 스스로의 선택이 배제된 딜레마를 강제한다. 곧 ‘남성과 똑같은 방식으로(곧 국방의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국민이 되거나, 반대로 ‘모성을 통해 국가에 봉사함으로써(곧 국민 재생산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국민으로 승인받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각각 ‘참여형’ 전략과 ‘분리형’ 전략이라고 부르고, 일본 등과 같이 파시즘 국가에서 주로 취한 전략인 전자의 전략에 대해 분석을 할애한다.

저자는 여성이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것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한 당시 일본 여성운동이 전쟁 참여를 결과했다고 본다. 그녀들에게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넘어 여성의 국민화, 곧 그 동안 산적해 온 여성 문제, 여성의 노동 참가와 모성 보호, 여성의 공적 활동과 법적, 정치적 지위 향상 등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로 여겨진 것이다. 이를 흥분과 사명감으로 받아들인 “전쟁의 치어리더들”은 여성이 모성을 통해 국가에 공헌 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여성 징병까지 주창했다. 그러나 여성 징병은 국가로부터 거부당했기 때문에 그들은 모성을 통해, 곧 건강하고 호전적인 전사를 생산해내는 ‘겨레의 밭’으로서 국민의 자격을 얻는 데 만족하게 된다. 일본은 1938년에는 모자보호법, 1940년에는 국민 우생법을 통과시킴으로써, 국민을 양적, 질적으로 관리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이 여성 시민권의 확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단지 파시즘 국가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서구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주어진 때가 1차 대전 이후라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지하다시피 여성의 시민권은 현재에도 완성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직도 많은 남성과 여성들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국방의 의무(현재 남아있는 최종의 젠더 경계)를 수행하면 보다 완전한 시민권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미국 여성 단체인 ‘전국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는 걸프전에서 여성 병사의 전투 참가 해금을 평등이라는 이름 하에 요구했다고 한다.

저자는 ‘국민 국가’가 군사력과 생산력 증강을 국가 목표로 ‘국민’을 ‘인구’, 즉 병력과 노동력으로 환원할 경우 ‘병역’은 ‘국민화’의 열쇠가 된다고 주장한다. 애초부터 공민권의 근거에 병역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국민’과 ‘남성성’의 은밀한 그러나 결정적인 동맹, 곧 공민성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남성으로 젠더화된(genderized)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근대적 내셔널리즘의 정의, 곧 그것의 배타성을 근본적으로 문제삼지 않고서 시민권 운동에 전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된다.

이는 앞서 언급한 군가산점 문제 뿐 아니라, 여성의 제도정치 참여를 여성운동의 진보와 등치시키는 일부 엘리트 여성운동에 대해서도 중요한 비판의 근거를 제공한다. 공허한 메아리만 남은, 애초부터 아무도 실현될 것이라고 믿지 않은 ‘전국구 여성비례대표제 30% 할당’에 왜 유독 일부 여성운동 세력들만 들떴었는지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현재의 정치체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하지 않고 제도 정치권에 기대어 영입된 몇 안 되는 여성정치가의 의정 활동이 여성 전체의 권익을 실현시킬 수 있었는지, 아님 단지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명예 남성’으로서 정당의 거수기로 역할해 왔는지를 진지하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명예 백인’으로서 전쟁에 총알받이로 동원된 흑인 병사가 전쟁 이후 해방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또한 이는 여성을 가부장제의 일방적인 피해자로 가정해온 급진적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비록 공식적인 역사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국가와 계급으로 분리되어 다른 국가와 계급 여성을 억압하는데 침묵하거나 동참해 왔던 것이다.

이상에서 식민 모국의 국가주의와 엘리트 여성운동의 관계를 분석한 것에 이어 저자는 식민지 여성에게 식민지 국가의 내셔널리즘(종종 저항적 민족주의로 표현되기도 하는데)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질문한다.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의 내셔널리즘과 질적 차이가 있는가? “같은 내셔널리즘인데도 ‘민족주의’는 올바르고 ‘국가주의’는 잘못된 것인가?”
저자는 이러한 저항적 민족주의가 한편으로는 지극히 당연하고 타당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 깔린 가부장제의 논리를 경계한다.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를 민족의 치욕으로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이는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 인권 침해를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간에 벌어지는 재산권 싸움으로 환원하여 결과적으로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가부장제 패러다임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곧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와 재산이며 그것을 침해하는 것은 당사자 여성에 대한 능욕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능욕당한 여성이 속하는 남성 집단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제국주의 국가의 군대의 논리의 거울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수없이 행해져온 전시강간을 통해 이를 몸소 실천해왔다. 저자는 전시 강간은 주로 윤간의 성격을 지니는데, 이는 약자에 대한 공격을 통해 연대 의식을 확립하기 위한 일종의 의례로서 역할한다고 본다. 사실 전시 강간이 종종 ‘관객’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스스로 그것은 ‘적’ 남성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모욕이며 자기 힘의 과시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가 텔레비전에 보도될 때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채널을 돌리는 식민지 국가의 ‘양심적인’ 가장은, 동시에 베트남 전에서 남편과 자식이 보는 앞에서 부녀자들을 잔인하게 유린한 한국군 병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둘 사이에는 별다른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3.

그렇다면 가부장적 혈통 논리에 종속되고, 여성을 분할하는 내셔널리즘을 넘어 여성들이 연대하는 일은 가능한가? 이에 대해 저자나 현재 여성 운동이나 ‘준비된’ 대안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잃을 것은 ‘그녀의 육체와 노동을 둘러싼 모든 억압’ 밖에 없는 여성들이 국경을 넘어 단결하는 것은 잃을 것이 쇠사슬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의 경우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결코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이에 대해 저자는 “페미니즘은 국가를 초월한 적이 없었다는 역사에 근거해 페미니즘은 국가를 초월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각자의 국적 하에 분단되어 버린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이 내셔널리즘을 초월해야하는 당위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저자는 그것이 “근대 페미니즘의 역설, 즉 페미니즘이 근대의 배리 자체이며, 따라서 근대를 물어 찢는 것 외에 활로를 찾아낼 수 없다고 하는 필연”이라고 본다.

분석의 명쾌함과는 대조적으로 미진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분명 저자의 한계만은 아니다. 그것은 현재 여성운동의 현주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결론은 앞에서의 고민에 비해 너무 수월하게 내려지고, 따라서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고통을 당한 식민지 여성에게 민족과 국적은 가해국의 여성과 달리 그렇게 쉽게 훌쩍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술적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입은 고통은 여성으로서의 고통뿐 아니라 억압받는 민족으로서의 고통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니 억압받는 민족의, 더욱 억압받는 여성으로서의 고통이라는 범주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따라서 한국의 ‘군대위안부’ 여성들이 일본 위안부와 달리 강제로 끌려갔음을 강조하는 한국의 여성운동이 “강제 매춘과 임의 매춘을 구별”하여 “여성의 분단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는 주장은 분명 과도하다. 이는 ‘자매애는 세계적이다’고 주장하면서, 계급과 인종의 범주를 사상시키고 모든 여성들에게 그것을 뛰어넘기를 강요하는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의 오류를 떠올리게 한다.

해방을 향한 연대는 모든 운동의 당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연대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너무나 낭만적으로 생각해 온 경향이 있다. 운동이 발전하면서 생겨나는 위계와 갈등에 대해서 통 큰(이 역시 얼마나 남근적인 표현인가) 단결을 외치는 것은 결과적으로 소수 세력에 대한 억압으로 역할한다. 연대는 마음 좋은 사람들이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것 역시 지속적인 투쟁의 과정인 것이다. “당신이 제휴(coalition)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누군가와 협력하는 것을 고려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당신이 생존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주)

*주) Bernice Johnson Reagon, “Coalition Politics: Turning the Century.” in Barbara Smith (ed.), Home Girls: A Black Feminist Anthropology, Kitchen Table, Women of Color Press, New York, 1983, p. 357.

4.

여성주의자는 민족주의자와 연대할 수 있는가? 민족주의가 가부장적인 혈통의 논리로 무장하고, 여성을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의 희생양, 곧 민족 정신의 숭고한 어머니(혹은 여신)로 삼는 이상, 연대는 불가능하다. 비단 이는 민족주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겨레의 밭’까지는 아니더라도, “온 가족의 밥줄이 달려있는 하늘같은 당신”(1997년 ‘국민승리 21’ 대선 포스터), “치마폭 감싸주시던 어머님의 주름살 가슴에 새겨”(민중권력 쟁취가) “사나이 한 평생”(진짜 노동자 Ⅲ), “투쟁하는 ‘당신만이 희망”(1999년 메이데이 포스터)인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전 세계 여성주의자들은 단결할 수 있는가? 여성운동이 여성들간의 수많은 차이를 무시하고 여성의 범주만을 특권화시킬 때, 혹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무수한 차이로 와해시켜버릴 때, 역시 연대는 불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필요한 것은 연대라는 당위를 위해서 현재의 갈등과 위계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두 눈을 부릅뜨는 일이다.
 

2003-02-18 10:4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