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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책]김동춘, '근대의 그늘'(정병기)

by 마리산인1324 2007. 1. 10.

 

<진보평론>  제5호

http://jbreview.jinbo.net/

2003-02-18 11:02:20

 

 

 

근대의 그늘을 어떻게 걷어 낼 것인가?


 
정병기(아주대학교 강사/ 정치학)

* 김동춘, ꡔ근대의 그늘』(2000, 당대)

‘근대의 해부학자’. 교수신문(182호)의 한 기자가 ꡔ근대의 그늘ꡕ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저자인 김동춘 교수를 두고 한 말이다. 김교수는 오랜 세월동안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을 규명하기 위해 과거를 궁구하며 진보를 논해 왔다. 올해 펴낸 ꡔ근대의 그늘ꡕ 또한 이 주제를 두고 그간 써 온 글들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역사적 접근방법에 따라 한국의 근대를 밝힌 많은 글을 읽으면서 과연 저자는 ‘근대의 해부학자’다운 면모를 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의 근대성과 민족주의’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제1부에서 한국의 근대와 국가폭력을 다루고, 제2부에서는 한국 근대의 국민과 계급을 성찰하며, 제3부에서 한국의 근대와 민족주의로 맺는다.

한국의 근대나 정치사회학의 전공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평자는 이 책에 대해 학술적으로 깊이 있게 평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다만 한국의 현실과 정치사회학에 관심이 있는 한 사람의 정치학자로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이 책을 나름의 관점에서 주의 깊게 읽어보았다. “1994년 이후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국제화․세계화․신자유주의 담론들은 자본주의/사회주의라는 사고의 틀을 벗어나 ‘시민사회’, ‘근대’, ‘근대성’에 눈길을 돌리도록 요구하였다”(6쪽)는 것이 김교수의 저서 동기였다면, 평자는 같은 이유에서 출발하지만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는 포기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대답은 ‘근대’와 ‘시민사회’로 가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이 책을 접했다. 그러나 ‘다르게 읽기’였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해석과 예리한 통사적 관찰에도 불구하고 평자의 읽기는 적지 않은 의문에 부딪혔다.

정치사회학적 측면에서 이 책은 저자 스스로 짚었듯이 한국의 50년대에 대해 과도기로 규정하는, 근대와 전통이라는 기존의 이분법적 관점을 부정하고, 이후 시대를 제약하는 기점이자 한국 “시민사회의 연원”(89쪽)을 이루는 시기라고 본 점에서 도전적 공헌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 논하는 한국의 ‘근대성’을 이해하려면 그의 독자적 ‘50년대론’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전쟁이 끝난 지 40여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혼돈은 “전통의 부정적 요인과 근대의 부정적 요인이 한꺼번에 결합된 ‘근대의 양상’”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바로 산업화가 시작되기전 50년대 한국 농촌의 모습에서 기원한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과거 지배계급인 양반층이 견지했던 친족적인 사회관계, 가족과 친족집단 내에서의 수직적인 상하관계가 곧바로 근대적이고 수평적인 인간관계나 지역 단위의 수평적인 연대로 발전하기보다는, 친족중심의 사회관계, 핵가족화로 인한 현대판 가족주의, 새로운 사회조직에 대한 소극성과 무관심, 국가와 핵가족과의 일대일의 수직적인 관계로 재편”(p. 88)된 것이 50년대 한국 농촌의 모습이다. 또한 “서양, 그 중에서도 미국에 의해 근대의 형식 - 특히 조직, 참여, 민주주의 등의 규범 - 이 이식되었으나, 그것은 자생적 근대의 길을 강압적으로 차단한 조건에서 이식된 것이어서 우리 농민들의 의식과 행동에 뿌리내리지는 못했다”(88쪽)고 한다. 이것이 곧 극복해야 할 한국의 ‘소극적 근대’의 모습이다.

제1부에서 저자는 한국 근대성의 부정적 측면 중에서도 국가폭력과 관련하여 분석하면서 일제 식민지 시대까지 거슬러 이후 냉전체제와 분단국가 형성과정에 주목하였다. 우리에게는 “일본 식민지 시절의 파시즘적 식민지 지배체제가 국가 폭력의 기원”을 이루며, “이후 냉전까지 포함하는 기간에 ‘법의 지배’보다는 내부의 적을 향한 폭력의 행사가 더욱더 노골화되었다”는 것이다(20쪽). 50년대를 거치면서 틀이 짜여진 이러한 국가통제는 한국적인 민족주의와 근대의 여러 “사상의 등장을 억제하였고, 국가를 유일한 신으로 만들었다”(280쪽)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아직 온전한 의미의 근대적 민족국가가 수립되지 않았다. 분단국가는 곧 ‘미완성’ 국가인 것이다. “오늘날 사회란 곧 정치적 단위인 국가와 동일하다고 본다면, 근대적 국가의 부재는 결국 ‘사회’의 부재를 말해” 주며, 사회의 부재는 또한 “근대국가의 자유주의적인 ‘계약’의 원리가 온전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 법의 제정과 적용 과정에 지배집단의 자의성 개입, 사회의 기본 규범의 부재 - 을” 의미한다(44쪽).

“우리에게 ‘근대’ 혹은 ‘근대성’은 무엇이었나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의 형태”(5쪽)가 이 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지만 그는 ‘근대’의 개념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근대’와 ‘근대성’이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다만 한국에서는 그 ‘근대’의 부정적 측면이 전통의 부정적 측면과 결합하여 오늘의 ‘그늘’인 ‘소극적 근대’를 결과했다는 것이 관심사다. 그러나 간접적으로나마 그가 의미하는 온전한 근대성이란 자유주의적 기본규범이 실재함으로써 서구적 시민사회를 보장하는 근대 민족국가임이 제1부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

‘민족주의’와 ‘민족국가’가 부제에서도 주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에 대한 그의 대답은 언제나 민족주의와 얽혀서 전개되고 있다.

제2부에서 한국의 ‘교육열’에 대한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연구도 같은 맥락에 서 있다. 비뚤어진 근대의 한 음영인 지나친 교육열은 “한국전쟁으로 이익집단의 참여 혹은 계급정치의 공간이 거의 폐쇄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교육열은 사회 내에서의 이익표현의 제도화의 한 방식 혹은 계급갈등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볼 때, 한국의 높은 교육열은 바로 반공국가에 의해서 억제된 계급갈등의 반사적 표현”(170쪽)이며, “교육을 통해 대중을 탈정치화”하려는 정치계급의 전략으로 파악된다. 곧 “한국은 남북한 분단상황으로 좌익은 물론 집합주의적인 밑으로부터의 정치사회운동이 차단됨으로써 오직 국가공인의 학력추구를 통해서만 계급이동이 이루어지도록 유도되고 있다”(173쪽).

미완성 ‘국가’인 한국의 ‘국민’은 대구 10․1사건, 제주도 4․3사건, 여순 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소위 ‘반공국민’만이 인정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과 전쟁은 “모두 ‘국민’국가의 주역이 누가 되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민족내부의 갈등”으로서 왜곡되고 제약된 형태의 ‘근대적 국민’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빨갱이’를 배척하는 ‘반공국민’의 왜곡된 유대감은 “국제적으로 ‘피를 나눈 유대’라는 정치적 수사를 동원해 ‘자유진영’주민으로서 갖는 가(家)의 유대감”으로 “거의 종교적으로 승화”되었다고 지적한다(190쪽).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 의미도 분단국가 한국의 지배층이 유포한 지배전략의 하나일 뿐 혈맹과 우방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되었던 미국은 한국민을 열등한 황인종으로 보았을 뿐이라고 덧붙인다.

이와 같이 국민과 계급을 논하는 제2부에서도 계급에 대한 관심은 근대 민족국가의 ‘국민’에 맞추어져 있다. 계급을 아우르는 온전한 ‘국민’이 형성되지 못한 것도 한국 근대의 그늘에 도사려 핀 독초로 파악된다. 70년대 이후 노동자와 빈민의 정치 사회적 집단화에 대한 언급은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곧 한국 전쟁을 전후해 민족 내부의 갈등이 정리되어 한국의 국민은 ‘반공국민’만으로 제한된 후 “70년대에 와서야 ‘인간취급’ 받지 못하는 ‘새로운 국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70년대에 와서 한국 전쟁 이전과 같이 민족 내부에 ‘국민’의 주역을 둔 갈등이 다시 생겨났음을 뜻한다. 산업화에 따른 과거와의 단절과 새로운 계층분화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과도기나 공백기를 부정하고 50년대가 한국 근대를 형성한 기점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50/60년대의 공백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다시 부딪치게 된다. 전통과 근대의 부정적 측면들이 결합하여 오늘의 모습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50년대가 형성의 연원이라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산업화를 통해 사회의 생산력이 변하면서 계급과 계층분화가 일어나 새로운 형태의 계급갈등이 일어났다고 보는 기존의 설명이 반박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근대와 민족주의를 논하는 제3부는 사회주의라는 진보적 대안의 가능성과 관련된 평자의 물음에 가장 근접한 부분이다. 김교수는 “20세기 초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각국의 정치사회사상은 일차적으로는 세계자본주의와 그 불균등발전에 대한 지적 대응의 결과물”(242쪽)이며, 민족주의와 민족국가의 형성도 “근대 자본주의 발전의 내적 모순과 세계적 불균등성의 산물”(292쪽)인 것이다. 비록 세계 자본주의와 그 불균등 발전에 관한 별도의 설명은 없지만 역사적 접근방법에 따른 한국 사회분석은 대체로 이러한 관점에 따라 이루어졌다.

저자에 따르면 “일상적 영역에서 행동의 준거를 제시해주는 논리로서의 근대적 윤리․가치체계․사상이 실제로는 아직 굳건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275쪽)에서 “민족주의만이 이 땅에서 하나의 일관된 논리로 존립”한다고 한다. 그런데 냉전과 분단, 성장하는 제3세계 국가라는 조건으로 인해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산업화의 역사와 더불어 쇠퇴해 온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점점 더 ‘고전적인’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369쪽)고 주장한다. 50년대는 “민족주의의 부재상황”--이 점도 그의 ‘50년대론’에서 다시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다--이었고, 70년대 들어 “민중민족주의”가 나타났으며, 80년대 초․중반에는 “반제․반미 민족해방론으로 극단화되었다가 80년대 후반에 와서는 민족지상주의적 경향으로까지 나아갔”(p. 369)는데, 특히 “80년대 중반의 반제민족주의는 일제 식민지하, 1945년 직후의 민족해방론이 부활”된 형태이다. 곧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반적 경우와 비교해 거꾸로 진행된 것일 뿐 아니라, “변화된 사회상황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지식인 외의 생활인들에게 그 영향력을 확대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370쪽).

그렇다면 한국 근대의 그늘 또한 자본주의 질서의 전개 과정이자 결과라고 할 때 사회주의는 진보적 대안이 아니며 될 수 없는 것인가? 저자의 결론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며, “인간의 해방을 위한 새로운 진보사상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한국은 그간 우리를 짓눌러온 ‘수동적 근대성’에서 벗어나 ‘적극적 근대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281쪽).

사회주의에 대한 분석은 이 책의 대상이 아니므로 애초의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를 부정하고 ‘근대’와 ‘민족주의’를 다루는 가운데 저자의 대안은 이미 드러나 있다. ‘새로운 진보사상’과 ‘적극적 근대성’에 대한 구체적 제시도 없지만, 전체 맥락으로 볼 때 그것은 ‘시민적 민족주의’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저자는 시민사회단체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는 합리적 근대와 시민사회적 민족국가를 강조하는 듯하다. 그의 관심은 ‘시민적 민족주의’가 생활인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진적인 이데올로기로서의 힘”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정치사회사상은 일반적인 경우에도 그렇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민족이라는 새로운 상징과 결합될 때” 민중의 에너지를 동원할 수 있다”(276쪽)는 주장이다.

결론적인 의문은 저자 스스로 근대 자본주의 발전의 내적 모순과 세계적 불균등성이 한 국가의 사상과 사회발전의 배경이 된다고 했는데, ‘근대’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 질서의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까하는 점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시각이 한국의 거꾸로 발전하는 민족주의와 왜곡된 근대성에만 한정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2003-02-18 11: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