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에코페미니즘』손덕수․이난아 옳김,(2000, 창작과 비평사)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론)은 여성해방과 자연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론이자 운동이다. ‘에코페미니즘’은 프랑쑤아즈 도본느의 저서 ꡔ여성해방인가 죽음인가ꡕ(1974)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여성운동, 평화운동, 환경운동 등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의 다양한 사회운동으로부터 성장해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에코페미니즘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도 어렵거니와 아직은 이것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 하나는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아직은 여성론 내의 주변적인 이론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제3의 여해방물결이 될 것이라는 평가 등이다. 여성해방과 자연해방의 결합은 이론과 운동에서 각각 다른 뿌리를 갖고 출발했지만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의 연결 고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며, 에코페미니즘은 적어도 이러한 결합의 당위성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리아 미스와 반다나 시바의 ꡔ에코페미니즘ꡕ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탄생했다. 이 책은 모두 7부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들의 물리적 입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가지의 입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땅(자연)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존재의 핵심이다. 이들이 개발에 맞서 싸우는 인도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설명하듯이, 땅은 여전히 ‘신성한 어머니’이다(7장). 개발이란 자연과의 생태적․문화적 유대가 갑작스럽게 단절되는 것을 뜻한다. 땅은 단순한 생산요소가 아니라 사회의 영혼이다. 그것은 생물적 삶 뿐만 아니라 문화적․영적 삶의 재생산을 위한 자궁이다. 땅은 생계유지의 모든 원천이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집’이다. 환경(ecology)이란 단어는 가계(household)를 뜻하는 ‘오이코스’(oikos)에서 파생된 것이므로, 환경파괴란 본질상 영적․생태적 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에 의한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어머니 땅’은 ‘남성화’(8장)되어 가고 있다.
둘째, 마리아와 반다나가 비판하는 핵심은 한 마디로 가부장적 자본주의사회의 남성지배체제이다. 이들은 지구상의 생명체를 위협하는 파괴적 경향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자본주의 가부장제 세계체제라는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가부장제는 ‘근대’ 문명과 등치될 수 있는데, 이것은 현실을 구조적으로 양분하고 이 양자를 위계화하여 서로 적대시하는 우주론과 인류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타자나 대상을 단지 다른 것이 아니라 ‘적’으로 간주한다. 가부장적 개념구조는 이원론적 세계관이며, 타자를 분리하고 차등화하는 도구주의적 세계관이다. 산업자본주의-가부장제사회는 남성과 자연, 남성과 여성, 도시와 시골, 대도시와 식민지, 노동과 삶, 자연과 문화 등을 가르는 근본적인 이분법에 토대를 둔다. 필자들은 이러한 이분법을 ‘식민주의’(10장)라고 부른다. 이제 여성과 제3세계는 타자로 규정된다. 그러나 백인남성은 자연과 여성을 명백히 외부이자 식민지라고 규정하면서도, 소비주의적 방식으로 자연(관광)과 여성(매춘)을 경험하려는 이율배반 속에 있다. 제 3세계에서 행해지는 섹스관광은 자본주의적 욕망을 취하려는 권력과 다름 아니다.
셋째, 이들은 세계체제를 기본적으로 중심부의 주변부에 대한 지배와 착취관계로 규정한다. 과잉개발된 중심과 저개발된 주변의 관계는 식민지적이다. 오늘날 이와 유사한 식민관계가 인간과 자연 사이에,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한다. 필자들은 이것들을 백인남성의 ‘식민지라 부른다. 주변이 ‘따라잡기식 전략’(4장)을 구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늘 지는 게임이다. 왜냐하면 식민지의 진보 자체가 식민지라는 존재와 그에 대한 착취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GATT협상은 부유한 ‘북’과 가난한 ‘남’의 비대칭적이고 위계적인 관계(15장)를 나타낸다. ‘하나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은 허울에 불과하다. 새롭게 개발된 미국산 종자의 수출을 위해 제 3세계 시장을 개방하고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 등은 중심국과 후진국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다(11장).
넷째, 인종주의․성차별주의․자연파괴 등은 탈역사적인 보편적 현상이 아니라 유럽의 식민지확장과 근대과학의 발생과 관련된 것이다. 자연이 인간에 의해 취급받는 방식과 여성이 남성에 의해 취급받는 방식이 유사할뿐더러, 이렇게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타자로만 이용당한 역사는 백인남성의 계몽주의적 이데올로기부터 가능하다(12장). 이것은 근대 민족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비롯된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와 관계한다. 필자들은 근대 민족국가를 ‘아버지의 땅’으로 규정하고, 파괴 이전의 자연으로서의 고향을 ‘어머니 땅’으로 대비시킨다(9장). 이것은 근대 민족국가가 여성의 성과 출산력, 작업능력 및 노동력을 통제했다는 뜻이다. 이 식민지를 통해서 자본주의도 근대 민족국가도 지속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외국의 ‘어머니 땅’을 침략하고 정복하는 ‘세계체제’로 기능함으로써, 중심에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거기에 근대국가를 세운 것이다. 이 세계체제의 중심부 국가들과 주변부․식민지들 간의 경제관계는 일방통행이다. 그러므로 ‘따라잡기식 개발 전략’이란 전지구적 세계시장에 대한 지향과 자국의 이익 간의 모순을 생산할 따름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관계를 내부 혹은 외부로부터의 저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근대 민족국가는 폭력과 강제를 행사해야만 한다. 예컨대 걸프전은 희소자원의 분배를 둘러싼 북과 남의 국가들이 벌인 최초의 신식민지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근본적 문제들에 대해서 마리아와 반다나가 제시하는 대안적 세계관은 무엇일까?
첫째, 그들의 에코페미니즘은 자연 속의 생명이 협력과 상호 보살핌, 사랑을 통해 유지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새로운 우주론과 새로운 인류학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같은 노력은 인간의 자유와 행복이 자연으로부터의 지속적인 해방의 과정이 이성과 합리성의 능력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계몽주의적 시각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둘째, 계몽주의의 도구적 세계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이들의 이념과 원리는 ‘영적’(spiritual) 차원이다. 이들이 강조하는 영은 여성적인 것이지만 물질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력으로 간주된다. 생태적 원리로서의 여성적 원리는 여성만의 본성이라 불리는 직관, 모성, 보육, 감성 등을 지칭하기보다는 이를 포함한 생명력, 다양성, 역동성, 순환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리는 세계를 상극적 경쟁관계로 파악하기보다는 상보적․상생적 협력관계로 파악한다.
셋째, 에코페미니즘이 이러한 사회를 목표로 할 때, ‘지속 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은 지양되어야 한다. 물론 나이로비 세계여성회의가 채택한 ‘미래전략’과 뻬이징 ‘행동강령’은 여성이 발전에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은 물론, 발전으로부터 발생하는 공유할 수 있는 권리의 평등을 보장할 것을 권고하고 있긴 하지만, 이들이 보기에 대부분 지역의 대다수 주민들에게 개발은 환경파괴와 빈곤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따라서 반다나와 미스가 제안하는 새로운 발전모델은 ‘지속 가능한 생존’(sustainable substance)이다. 또한 이 발전모델은 영성과 여성적 원리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결국 필자들은 이 책에 언급된 많은 민중적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에 지식과 영감을 제공한 것을 ‘자급적 관점’이라고 부른다(20장). 자급적 관점은 호전적이고 착취적이며 환경을 파괴하는 과학, 기술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상품생산과 성장지향적인 자본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산업체제에 대한 실제적인 비판이다. 자급적 관점이 추구하는 경제활동의 목표는 상품과 화폐를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 혹은 재창조이다. 이러한 경제활동은 자연과 사람의 ‘관계’에 근거를 둔다. 즉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에 대한 존중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의 상호연관성은 에코페미니즘의 중요한 토대 중의 하나이다. 이들이 자급적 관점을 주장하는 이유는 자연을 ‘초월’한다는 것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으며 대신 자연의 생존잠재력이 모든 차원과 모든 발현양태에서 가꿔지고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필요의 영역 내에서의 자유는 모든 이에게 보편화될 수 있지만 필요로부터의 자유는 소수에게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마리아와 반다나의 에코페미니즘을 간단히 서술함으로써 그들의 사상적 원리가 정치 지형학적으로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진단해 보았다. 신자유주의가 창궐하는 시기에 이들이 세계체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유효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는 문제가 있다.
첫째, 그것은 계급과 성이 중첩됨으로써 그들이 의도하고자 했던 다양성과 전체적인 세계관이 오히려 실천적 대안에 모호한 과제를 남긴다는 점이다. 즉 ‘왜 여성만이 환경운동에 적극적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영적인 것’이 인간 모두에게 내재하는 것이라는 그들의 선언적 주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지속적으로 중심부와 주변부의 지배와 착취관계를 계급적 관점에서 언급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의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윤리적 의식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에코페미니즘과 맑스주의의 차별성을 부각함에 있어서, 에코페미니즘의 ‘영적인 차원’이 맑스주의적 유물론에는 없다는 규정을 함으로써 스스로 민중적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의 도덕적 운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맑스의 ꡔ강요ꡕ에서 보듯이 맑스가 의도했던 궁극적 목표도 개인의 자유였으며, 그 자유를 위해 사회가 어떻게 변혁되어야 하는가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있다고 한다면, 끊임없이 세계체제의 모순을 강조하면서도 그 해답을 의식적 차원에서 찾고자 하는 이들의 대안은 어디까지 유효할지를 생각해 볼일이다.
에코페미니즘 내부의 불일치가 시사하는 것처럼 한마디로 마리아와 반다나가 어떻게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의 고리를 설명해는가를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어찌 보면 에코페미니즘 진영 내의 과제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전지구화하고 있고 욕망이 과잉생산되는 이 시대에 여성과 환경이라는 범주만으로 사회운동을 추동해 나가기가 역부족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운동과 환경운동 그리고 에코페미니즘이 본질주의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면, 세계를 해석하고 세계체제를 변혁해 나가는 중요한 계기로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와 반다나의 ꡔ에코페미니즘ꡕ은 타자로서 취급받는 대상들과 그 구조에 대해서 절실하게 고민하게 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