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다섯 비구를 상대로 한 첫 설법 내용을 우리는 보통 중도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룬 뒤에 “나는 중도의 길을 통해 깨달았다.
오직 중도의 길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고 첫 법문을 베풀었습니다.
중도란 무엇입니까? 솔직히 저는 중도가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중도의 완전한 실천 수행법인 팔정도에대해서도 말을 많이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견 곧 바른 견해, 정사유 곧 바른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라고 하는데, 이 “바르다”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상태인지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정리되지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실제의 생활에서 어떻게 응용하고 또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입이 닳도록 팔정도를 이야기하지만 실재 생활을 보면 팔정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중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꼭 일러 둘 말이 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는 부처님이
출가해서 열심히 고행했으니
열심히 부처님의 고행을 본받아야
한다고 그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알다시피 부처님은 고행주의를
거부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생애에서 성도하기 이전의
자취에서 본받을 것이 있다면,
하나는 대비 원력의 발심이고,
다른 하나는 줄기찬 출가 정신의
실천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고행을 본받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는 셈이 됩니다. 부처님은 고행이란 성스러운 길이
아니므로 이익이 없다고 하면서 그 길을 부정했습니다.
고행을 포기한 것을 두고 온 세상이 비난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히 고행을 포기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저 막연하게 부처님이
육년 동안 고행을 하였으니 우리도 고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참으로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기울여 본받아야 할 것은 깨달은 이후의 부처님의 가르침과
삶의 태도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다음에, 고행주의도 향락주의도 아니고 오로지 중도만이
참다운 길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고행주의나 향락주의는
대상으로서 바깥에 존재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옛 인도 사회의 고행주의,
인간 사회의 향락주의 따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 자신의 사고 방식과 사고의 속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대개가 고행주의 아니면 향락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보면, 미혹한 중생들은 어떤 형태로든
이 두 개의 극단에 빠져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바깥에 있는
객관적 대상으로서 고행주의,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향락주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로 초점을 돌이켜 봄으로써
우리 자신속에서 그 문제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문제는 해결할 수 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 속에서 끊임없이 욕망을 향해 치닫는 것이 향락주의입니다.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더 좋은 집에 살고 싶다, 싸워서 이기고 싶다,
신나게 놀고 싶다, 담배를 피고 싶다, 술을 먹고 싶다 하는 이 모든 것이 향락주의입니다.
고행주의는 우리가 살아온 것에 대한 일종의 죄 의식 같은 것입니다. 업이 많다.
전생에 죄가 많다 등등의 의식이 다 일종의 고행주의입니다. 향락을 좇는 것도 번뇌지만
죄 의식에 빠지는 것도 또 한번 번뇌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기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자기 바깥에서 이향락주의, 저고행주의 하며 대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한 우리는
고행주의와 향락주의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고행주의와 향락주의로 표현되는 양 극단은
바로 전도된 몽상에 빠져 있는 자기 자신의 문제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