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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의 생애와 신학
1.토마스 머튼3)의 생애 (1915-1968)
토마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 뉴질랜드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프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미술가였으며, 그들의 예술가적 기질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여러곳을 옮겨 다니는 생활을 하게된다. 토마스 머튼에게는 남동생 존 폴 머튼이 있었는데 그의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 유일하게 남은 동생 존은 2차 대전 중 영국 해협에서 공군기 조종사로 복무하다 전사 했다. 머튼의 가정 분위기는 종교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토마스 머튼은 자신의 부모님이 종교교육에 관해서는 전혀 무관심 했다고 회고한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에 거의 다니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는 때때로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도리어 관습적인 태도나 종교적 가정 분위기 보다는 진실을 찾아 꾸준히 살아갔던 아버지에게서 토마스 머튼은 더 큰, 관행을 탈피한 종교적 영향과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기존 종교제도, 교리, 집회등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퀘이커 교도가 되기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어린 토마스 머튼은 이런 어른들의 신앙관으로 부터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자랐다. 머튼이 후에 참된 수도자가 된 것은 그릇되고 형식적인 종교 교육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6세때 어머님과 사별한 후 미국의 외가에서 생활하다 다시 프랑스에 있는 아버지와 합류하여 그곳에서 그의 소년시절을 보내게 되는데, 이 시기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캐톨맄 문화 에 젖게 되었음을 그는 후에 고백하고 있다.
열네살이 되던 해 그는 아버지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오캄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이 기간에 그는 영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윌리암 블레이크, 로렌스, 제임스 조이스는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이었다. 머튼의 이러한 문학적 관심이 그가 나중에 많은 신학적 사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했다.
1931년 토마스 머튼은 아버지마저 잃게 된다. 토마스의 아버지는 런던에서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그 때 16세였던 토마스 머튼은 1934년까지 영국 캠브리지 클래어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고, 방학중엔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이 시기의 토마스 머튼은 행복과 만족을 찾지 못하는 매우 불안정하고 방황하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후에 그의 유명한 자서전'칠층산'의 책 제목을 얻는 단테의 신곡을 접하게 되는 시기도 캠브리지 시절이었다.
1935년 2월, 20세가 된 그는 콜럼비아 대학교에 들어가서 스페인어, 독어, 지질학, 헌법 그리고 불문학을 공부한다. 거기서 그는 공산주의 청년운동에 가입하였고, 학생기관지「제스터」의 예술부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토마스 머튼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의 심령은 참된 사물의 근원뿌리와 그의 영혼이 쉼을 얻을 진리와 진실을 찾아 목마른 사슴처럼 그 무엇인가를 찾으면서 청년시절의 정신적 방랑과 영적 순례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토마스머튼은 에띠엔느 질송의"중세 철학의 정신"을 읽게 되면서 특히 질송의 하나님에 대한정의에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질송은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이다." 라고 설명하면서, "....신은 그 존재에 대하여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으며, 그 어떤 원인에 의하지 않는 신이라는 그 사실 하나에 의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존의 순수행위이다."라고 하였다. 질송을 통하여 스콜라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된 그는 다니엘 왈쉬가 강의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에 대한 과목을 공부했다. 다니엘 왈쉬는 뒤에 머튼의 친구가 된다. 이 근년에 그는 또한 브라마차리와 친밀한 우정을 돈독히 하였다. 브라마차리는 불교 수사로서 머튼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풍요에 주의를 돌리게 하였다. 1938년 드디어 그는 무어 신부를 통해 영세를 받고 카톨릭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토마스 머튼은 스물 네 살되던 해 콜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뉴욕주에 소재한 콜럼비아대학 부속 교육기관에서 영어교사로서 일하면서「뉴욕 타임즈」「뉴욕 헤랄드 트리뷴」지의 고정 서평자로서 일했으며 1939-41젼까지 는 오를레앙에 있는 성 보나벤츄라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침으로써 영문학을 전공한 그로서 세상적인 입신출세의 길은 밝게 열린편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그의 친한 친구 봅 렉스와의 깊은 대화를 나누며 십자가의 성요한을 공부하게 되고 수사나 사제의 길을 생각하게 된다. 1941년엔 영문학 교사로서의 좋은 여건과 환경인 보나벤츄라 대학을 갑자기 사임하고 그는 흑인들의 빈민가에 들어가 일하는 경험을 쌓으며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몸으로 체험한다. 그동안 그는 두어차례 케터키주에 있는 트라피스트 겟세마네 수도원을 방문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는 모든것을 털어버리고 겟세마네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1942년 26세로 들어간 후 1968년까지 26년간의 생활을 이곳에서 하게된다.
그는 침묵의 수도 생활속에서 명상과 기도를 통하여 점점 더 깊히 절대자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저술할수 있는 허락을 받게되면서 저술할동을 시작할 수 있게된다. 수도원 안에서 그는 더 넓고 큰 안목으로 깨어서 세상을 보게 된다. 1949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자서전'칠층산'이 출판되었다. 칠층산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예언자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1950년에는 미국 시민이 되었으며 50년대에 미국 지성인들의 의식을 일깨우던 문제들인 인종 평등을 향한 갈등, 전쟁과 평화의 문제등,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가 속한 사회에 매우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으며 밀착되어 있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머튼의 기도와 관상의 생활은 한번도 인간적 관심과 사회적,정치적문제와 분리된적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예로서 그는 기도와 저술 활동을 통하여 마틴 루터킹목사의 인권 운동에 발맞추었는데 이러한 일은 그를 현실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황에 까지 몰고 가곤 하였다.
머튼의 이름이 세상에 점점 더 알려지자 겟세마니 수도원은 구도자들을 위한 일종의 메카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더 깊은 고독의 장소를 원했고 드디어 겟세마니 수도원 가까운 숲속에 암자를 지어 거의 은둔자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1968년 그는 뱅콕에서 열리는 한 학술회의에 참여하기 위하여 수도원을 떠나게 되는데, 이어 앞서 그는 먼저 스리랑카 등지를 여행하면서 불승들의 영성 훈련 방법을 배우려는 노력을 하였으며 망명중인 달라이 라마도 만나게 되었다. 방콕의 학술 대회에서 그는 "맑시즘과 수도원적 관심"이라는 강연을 하였다. 그 강연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온 후 선풍기에 감전되어 미처 완성하지 못한 많은 일을 뒤에 남겨두고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일주일 후 겟세마니 수도원으로 옮겨져 그 곳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2. 토마스 머튼의 영성신학
토마스 머튼의 영성신학의 특징은 그가 현대 인간이 부딪히고 있는 내면적 위기와 외면적 위기를 충분히 인식하면서 그것들의 극복을 위하여 인간 심령 세계의 깊이의 차원에서의 심도깊은 자기 성찰과 영적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4).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은 본질상 그의 생명의 근원자와의 끊임없는 교제 또는 교류 속에서만 그 싱싱하고도 건강한 생명의 모습을 지속한다. 사람의 생명은 본래 신비한 생령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을 닮은 신령한 존재이다. 인간의 생명은 일종의 선물로서, 빛이 만물 위에 쏟아져 만물을 포영하고 밝게 비추며 생육시키듯, 하나님이라 일컫는 생명의 창조주의 영적인 빛, 생명력의 은혜로운 현존, 자유와 사랑의 충만한 충일과 그에 대한 자유롭고 사랑에 의해 촉발된 응답으로서 이루어져 나간다.
토마스 머튼의 영성신학은 성 베네직트 수도원 정신의 맥을 잇고 있는 12세기 시스터시안 수도원 운동의 전통에 서 있다. 사랑의 신비주의를 우리는 기억한다. 빨갛게 달구어진 쇳덩어리는 백열 상태 속에서 불과 쇠를 구별할 수 없듯이 하나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쇠는 쇠의 평소 강도와 색깔과 특성을 잃고 불의 열기 속에서 불과 하나가 되어 용강로 속의 쇳물은 그것자체가 불이되어 버리지만 그 본질의 속성에 변질이 오는 것은 아니다5).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영의 현존과 그의 무한한 영광, 진리,권능,사랑의 빛에 감싸일 때 인간의 심령은 하나님의 사랑의 빛에 녹아 없어져 하나가 되지만, 인간이 하나님으로 변하거나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으로 변질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수도원 전통의 유산이 꼭 그러해서만이 아니라 토마스 머튼은 인간이란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는 존재로 규정하고 이해하며, 동료 인간과 피조물을 참으로 깊은 곳에서 만나고 이해함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한다고 말한다. 토마스 머튼은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 형제를 참으로 올바르게 깊은 자리에서 만나려 한다면 인간은 그의 홀로 있는 고독과 외로움,또는 그 자신의 마음의 깊은 문을 열고 자기 홀로 서는 용기와 시간이 절대 필요하다고 본다. 더불어 함께 있기 위하여, 인간의 본질은 참으로 더불어 함께 삶인데,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홀로 있어 보는 훈련을 가져야 한다. 모든 소유,이념 체계,망상,자신의 마음이 그려놓은 온갖 관념 체계와 세계의 허상을 버리고'어두운 밤'을 홀로 자기 생명 깊은곳에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6). 하나님과 이웃 형제를 돕거나 구원하기 전에 자기를 먼저 정화시켜야 한다.
토마스 머튼의 영성신학의 기초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영성과 거룩성은 인간에게 덧붙인 후천적 종교 덕목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신성과 거룩성을 향해, 참여함으로써만 인간다움의 인간성이 발현되도록 지음받았다는 것이다. 거룩한 삶은 인위적인 종교적 노력과 도덕적 공적으로 쌓아지는 덕목이 아니다. 인간의 영성적 삶은 '행위'의 문제이기 전에'존재'의 문제다. 행위와 존재는 분리할 수 없지만 구별한다면 토마스 머튼의 영성신학은 존재가 행위보다 존재론적으로 앞서야 한다고 본다7).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생명의 중심이다. 모든 생명은 그를 지향하며 원심력과 구심력의 관계처럼 떨어질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과 자유가 인간 존재 이유라는 말과 같으며 사랑함으로써만, 자유 가운데서만 인간은 서로 사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한다는 뜻이다. 자유와 사랑을 향한 개방성이 인간성의 비밀이다8). "사랑이 없는 저는 사랑이신 임이 당신 자신을 저와 동일시 해주지 않으면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임께서 바로 자신이신 임의 사랑을 보내셔서 저와 제가 하는 모든것 안에서 행동 하고 사랑하게 하시면 그 때에 저는 변화되어 제가 누구인지를 발견할 것이며 임안에서 저 자신을 잃음으로써 제 참된 본성을 지니게 될것입니다9).
토마스 머튼은 인간의 생명의 신비는 그 본질상 자기초월적 존재요 영적으로 상호교통.교류하는 존재로 보기 때문에,공동체를 떠난 개인주의나, 개인의 자유와 자발성이 억압된 집단주의를 동시에 비판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지향하도록 지음되었기에 인간의 최대의 과제는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과 일치되어 자유와 사랑속에서 그의 영성적 생명을 완성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은 혼자서가 아니라 이웃 형제와 만물을 사랑하는 길을 통해서 하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성 깊이에서, 마음 안에서, 만물 안에서, 존재의 살 속에서 인간을 가깝게 부른다. 하나님은 인간 자신이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가까이 인간 곁에, 안에, 앞에, 위에 계시므로 인간의 자기 발견과 하나님 발견은 동시적 사건이 된다. 하나님은 무한히 그 피조물과 인간성을 초월해 계시는 절대자이지만 동시에 무한히그 안에 계시고, 그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신비이신 분'이므로 인간이 자기 발견은 동시에 하나님 발견, 참 하나님 발견은 인간의 참 자기 발견이 된다.
인간이 참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려면, 또는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려면, 자신을 철더히 비우고 부정하여 일단 무화(無化)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함으로써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버리기를 배워야 한다. 자신의 심령을 맑게 허심탄회하게 비우고 정화하고 겸손히 기다리기 전에는 하나님의 빛은 비춰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은 들려오지 않는다. 생명의 씨앗은 움터오지 않는다.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팽개쳐 버리고 모든 심상과 욕망을 버리는 것, 그 이상을 의미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이 발견하시는 것이다10).
토머스 머튼에 의하면 인간이 자신의 속 심령을 겸허하게 비우고 정화하여 자신의 깊은 중심을 통과하여 하나님에게 이르기 위해서는 대단히 역설적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나와서 사심없는 깨끗한 마음 가운데서 동료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에게 자신을 개방하여 내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몸을 성전으로 삼고 그 안에 거하시며, 사람몸으로 성육하시며 자신을 피조물에게 내어줌으로써 피조물을 창조적 새로움의 세계로 이끌어 내는 화육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순수의식 가운데서의 초월의 경험은 곧 일상적 자아를 넘어선 하나님에게 그 존재를 뿌리박고 숨쉬고 있는 참 자기 의 초월적 인식이다. 토마스 머튼은 인간 영성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만물은 통하고 숨쉬고 있다고 믿고 체험한다. 하나님 인식.세계 인식. 인간의 자기 인식은 동시 사건이 된다. " 하나님은 제 본래 보습의 비밀을 품고 이 파견으로 제 안에 들어와 창조주로서 뿐만아니라 저의 참 나로 살기 시작하시니, 이 파견으로 말미암아 제 본 면모의 발견이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저는 이제 죽고 오직 제안에 그리수도께서 살아 계십니다11)." 이제 그의 영성신학의 더 중요한 세계인 기도에 관한 것은 다음장에서 더 다루기로 한다.
III. 명상기도와 관상기도
1. 기도의 성격
머튼에 의하면, 인간은 관상가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영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관상적 비젼의 통일로 부터 타락하여 외적 사물의 혼란속으로 빠져 하나님과 참된 자기로 부터 추방되었다. 결국 인간은 거짓 자기의 그늘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혼의 심연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자연 합일을 이루고 있기에, 우리의 전체 생명이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사랑스런 영적 교통속으로 변형되어 들어감으로써 우리의 영적 생명 전체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다. 인간의 존재이유이자 실현인 이러한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머튼에 의하면, '관상적 비젼의통일'의 회복으로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도 하나님 안에서 우리자신을 발견하려면, 우리는 아담의 여행을 반대로 하여 그가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한다. 그 길은 우리 영혼의 중심을 통해 놓여있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자신을 끌어냈고, 자신을 통과하여 피조물 속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외적인 사물로부터 우리 자신을 끌어내고, 우리 영혼의 중심을 통과하여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과도한 욕망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우리의 참된 자기를 되찾아야 한다12).
아담이 '관상적 비젼의 통일'로부터 이른바'이중운동'을 통하여 타락하였으므로, 그 회복도 '이중운동'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회복의 이중운동은 타락의 그것을 거꾸로 돌이키는 이중운동이다. 즉 타락의 길이 하나님?나의 중심?외적인 것의 과정이었다면, 회복의 길은 외적인 것?나의 중심?하나님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 중심 속으로 뚫고 나아감이 우리 자신의 참다운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다13).
따라서 기도란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가졌던 관계로 접근하는 수단을 획득하기위한 몸부림이다. 그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성자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되라는 성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의 존재는 기도로써 지고한 완성에 도달하며, 기도는 우리의 가장 완전한 행위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된다.
머튼은, 기도를 크게 명상기도 와 관상기도의 두단계로 구분한다. 자연적 단계의 기도가 능동적 기도인 명상기도이며, 초자연적 단계의 기도가 수동적 기도인 관상기도이다. 그리고 인간 영성의 저정인 신비합일은 관상기도의 완성에서 이루어진다.
2. 명상기도와 관상기도
1) 명상기도
명상기도는 회복의'이중운동'에서'외적인 것에서 나의중심'으로 향하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관상기도를 주부적 명상 또는 수동적 명상이라고 하는 반면 명상기도는 능동적 명상, 의지적 명상이라 할 수 있다. 관상기도로 들어가기 위한 인간행위가 동인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명상기도도 간접적인 은총의 한부분이기도 한다. 능동적 명상에는 사고와 행위 그리고 의지작용이 요청된다. 명상의 기능은 정신을 일깨어 준비시키고 하나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좀더 알고자 하는 그리고 그분안에 쉬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켜 준다. 묵상을 배운다는 것은 단순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혹은 하나님의 원의 구체적인 요구를 거절하는 데 기인하는 마음의 습관적인 완고함과 정신적 마비와 과장으로부터서서히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14).
하나님을 완전히 찾는다 함은 곧 환상과 쾌락 세속적 근심과 욕망, 하나님이 원치않으시는 일과 사랑만을 자랑하는 영광에서 퇴각하는 것, 내 자유가 임의 뜻에 순종할수 있도록 정신의 분산을 극복하는 것 내마음의 침묵을 즐기고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피조물의 개념과영상에서 우리 지능을 해방시켜 신앙으로 은밀히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겸손에 머무르고 남과의 투쟁과 경쟁에서 물러나와 평화를 발견하는 것, 쟁의를 피하고 판단과 비평의 짐을 벗어 버리고 말할 의무가 없는 참견을 삼가는 것, 내의지를 꺽고 영혼의 힘을 기울여 내 안에 깊이 들어가 조용히 하나님의 임하심을 기다리는 것, 내가 임께 매달려 있는 점에다, 종용히 힘들이지 않고 온 힘을 집중시켜 균형을 잡는 것, 내 전부, 내가 가진 모든 것, 내가 할수 있고, 될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대한 순수한 신뢰와, 맹목적 신앙과 완전한 사랑으로 모두 임의 뜻에 바쳐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음을 비워 모든것을 4잊은체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다.15)
무엇보다도 먼저, 명상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정체성의 가장깊은 터전을 찾으려는 자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면서, 생명과 신앙의 가장 깊은 진실에 대한 직접적 실존적인 파악과 개인적인 체험을 추구한다.16) 명상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생명의 가장 깊은 터전에 들어가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 의존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려고 노력한다17). 그러므로 명상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을 회복한다는 것은 우리의 외적인 일상적 자기가 그 대부분이 하나의 가면이며 조작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을 함축한다18). 그런데 우리의 참자기는 발견하기 쉽지 않다. 참자기는 어두움과 무속에,우리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그 중심점에 숨겨져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 명상의 현실은 이것을 인식하는데 달려있으므로, 사실 이것없이 명상하려는 모든 시도는 자기 모순이다19). 그러므로 우리 존재내부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앎과 사랑이 스며들고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하나님을 알게되는 것이 명상기도가 목적하는 바다. 그분의 진리가 우리 존재의 원천이요,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이 우리의 생명과 생활의 심장인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한다20).
둘째로, 명상기도는 사랑에로 통하는 길을 닦아주고, 순종과 겸손을 가르쳐 준다. 머튼에 따르면, 명상기도의 목표는"순수한 마음"이다. 순수한 마음이란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이고 완전히 겸손한 항복,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우리 자신과 처지에 대한 전적인 수용21)"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온갖 망상과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한 모든 과분한 평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셋째로, 명상기도에서 필요한 우리들의 노력은 능동적이며 의식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것은 아직도 기도하는 힘의 원천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결국 명상기도는 하나님의 현존과 사랑을 향한 우리들 전 존재의 의도적 개방이며, 우리 영혼의 거룩한 중심으로 뚫고 들어감이다.
2) 관상기도(contrmplatifve prayer)
관상기도는 회복의'이중운동'에서, '나의 중심에서 하나님'으로 향하는 과정에 있다 하겠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하여 비로소 능동적인 기도는 수동적인 관상기도로 질적인 전환을 하게 되고 확실한 믿음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직접 개입은 완성이 아니라 심화된 기도의 시작에 불과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직접 개입을 통하여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새로운 세계, 모든 자연적인 지식과 모든 자연적인 사랑의 단계를 뛰어넘는 풍부한 체험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때부터 우리의 온 삶은 변화된다. 그리고 모든 은혜와 선물을 초월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완전한 합일, 즉 신비합일은 관상기도의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1)관상이란 무엇인가.
관상은 종교에 있어서의 인식 양식의 하나인데 실천적 태도와는 상대적인 정관적인 태도를 말하며 다른 의미로는 신비적 사상이나 초감각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를 직관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행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22).
카톨릭 교회의 전통은 언제나 이 관상을 기독교인의 영성생활의 최고의 극치로 간주해왔다. 주부적 혹은 신비적 명상으로 또는 수동적 명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에서 난 하나님에대한 직관을 말한다23). 이것은 그분외에 다른 것들에 대한 모든 애착을 깨끗이 비워내는 정도에 따라 영혼에게 주시는 선물이며, 게다가 그들이 그문을 사랑하게 되는 그 사랑조차 역시 그분의 선물이라고 본다24).
관상기도의 분위기는 "비우는 것"이요, 수동적인 것이다. 관상기도를 수동적인 기도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계의 기도에서는 명상기도 단계에서 필여로 헸던 말, 개념, 상상, 이성들 이른바 자연기관들을 통한 도움도 비워져야한다. 특히 머튼은 이 관상기도의 단계에서 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에서 초탈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집착도 무의식적 형태의 이기심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는 머튼의 표현은 강력하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영적인 집착의 해독을 위험시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영적인 "선물"정도에 안주하여 할때 하나님과의 합일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머튼은 관상기도 중에 할수 있는것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25)
"우리가 그것을 얻고 누리고 늘리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자신의 행위는 그 대부분이 이 평화스런 빝, 평화스럽게 하는 빛을 쏟아 붓는데 장애만 된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복종에 의한 어떤 행위와 사업을 요구하시고 그런 것들을 통하여 그러나 우리의 충성 때문이 아니라 임께서 그러기를 즐기시는 까닭에 임과의 깊은 체험적 합일에 보존해 주실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잘해야 이큰 은혜를 받기 위하여 스스로를 가다듬을 수 있을 따름이다. 기도의 분위기는 그저 "비워버린 상태"며 "침묵속의 들음"이다. 침묵속의 들음이란, 들으려는 욕심 , 들으려는 생각없이 듣는 것이며, 들음없이 듣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들음을 머튼은"내적행동"이라고 한다.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참나가 들음이요 하나님 형상에서의 들음이다.26)
기도와 함께 병행되는 자기 정화의 노력은 이 단계에서는 노력없는 노력, 끊임없음, 끊음으로 승화된다. 머튼은 이러한 정화를 수동적인 정화라 하며 능동적인 단계의 정화와 구분하고 있다. 정화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는 내적인 정화이다. 이러한 자기 정화는 내가 완전히 비워버리는 것이며, 상징적으로는 "나"의 완전한 죽음을 말한다.이러한 죽음을 통하여 참나의 구현 , 하나님과의 연합이 가능하다.
2. 하나님과의 연합
머튼에게 있어서 관상이란 다만 경험의 심화만이 아니고, 한 인간의 존재와 삶의 방법에 대한 급진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이러한 변화의 본질은 외적수단에 의한 외향적 목적에 의존하는 삶의 태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임을 강조하였다.머튼의 관상적 기도 에서 가장 기본되는 개념인 하나님과의 연합을 그는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다루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생활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에게 방향지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27)
이렇듯 인간은 그 존재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도록 불리어졌으므로 인간이 자신의 온전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해지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내가 진정한 내 자신이 되는 길, 또한 나의 실존을 완성시킬수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일치되어 그와 하나가 되는 길 외엔 없다는 결론에이르게 된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와 유사한 상태로 바꾸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머튼이 보는 기도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과 일치됨의 인식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기도하는 생활이 머튼에게 있어서는 영적인 생활이랄수 있겠는데, 하나님과의 연합에 근거하는 이러한 영적 삶에서는 항상 두 종류의 경험을 동시에 하게 된다. 28)
첫째로, 인간의 자기 완성은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발견됨으로 먼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의 선하심을 민감하게 의식하여야 하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로 들어가야만 한다.
둘째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것을 인식한 사람에게 실제적으로 그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머튼에게 영적인 생활은 그것이 정신적인 생활만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사고에만 그치는 머리만의 생활에 국한된 것도 아니고 그것은 감각이나 느낌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머튼이 의미하는 영적인 생활은 사고와 감정이 함께 포함된 균형잡힌 삶의 모습을 나타냄을 곧 알수 있다. 29)그렇게 될때에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에로 나아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머튼의 이러한 생각은 그런 의미에서 모든 기독교인은 영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그들이 생활에서 살아 있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듯하다. 머튼이 그토록 강조하는 관상의 기도는 인간이 추구하는 신과의 이러한 만남으로 열어주는 하나의 길잡이로서의 역활을 해 주는 것이므로 그의 영성에 핵심이 되는 것이다.
3. 관상의 기도와 그 한계성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 임재하시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먼저 참된 자신을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참된 자신을 의식할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참된 자신을 발견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자기 의식이야말로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해야할 필수적인 조건인 자신을 찾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랄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는 일은 언제나 이중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게 된다.30)먼저 인간은 관상의 기도속에서 그 자신의 가장 깊은 중심에로 들어 간다. 그 중심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를 찾고 경험하게 되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다. 자기자신을 알수 없을때 하나님 또한 알수 없다.
이렇게 볼때 관상은 하나님의 임재안에서 인간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과 혼자서는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낟. 그런 의미에서 그 과정의 시작 자체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먼저 자신의 공허하고 무력함을 깨닫지 못하는 한 누구도 결코 하나님에게 자신이 소유되어 있음을 알수 없다. 자신을 포기하고 사고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을 망각할 때 하나님과의 연합에 도달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상적 기도의 한계성과 연결하여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하나님과의 연합되는 경험이 아니 그 필요를 인식하는 것 부터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라는 점에 부딪칠때 머튼의 주장대로 모든 사람들이 신비한 경험을 기계적으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머튼의 주장을 들어보자. 그에 의하면 관상이란 하나님에대한 종교적 이해이며, 또한 그것은 종교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거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관상의 기도에서 물론 인간의 노력과 갈구가 계속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이나 그 노력은 하나님의 행위에 의하여 완전히 교체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의 노력이며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인간은 은총에 자신을 복종시켜 가도록 인도된다. 이것은 관상의 경지에서 인간이 성령의 숨겨진 행위를 향하여 주의깊게 수용하는 태도를 갖고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명상이나 관상이란 언제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기를 원하는때에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31)그렇다면 관상과 같은 영적 훈련 으로 하나님과 하나되는 신비한 연합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다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머튼의 영적 경험 및 영적 훈련을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로서 대두된다. 그러므로 관상의 기도가 반드시 하나님과 일치되는 체험을 가져오며, 의식의 변혁을 일으켜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되는 통로가 될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그것을 주실때 그것을 경험하게 될 뿐이다.
V. 관상과 행동
1. 관상과 행동의 관계성
복음서에 있는 관상과 행위는 예수니의 삶속에 결합되어 있다. 주님은 자신의 주위세계의 문제들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고, 또는 홀로 광야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즉 주님의 관상은 행위와 결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위기때와 어려운 순간에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더욱 기도하셨다. 하나님아라에 대해 말하실때 인간 가운데 그들의 모든 문제와 죄악과 함께 존재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상과 행위에 대한 가르침들 중 가장 문제되는 것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이다.(눅10:38-42) 여기서 마르다가 음식을 바쁘게 준비하는 동안 마리아는 ㄴ주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있었다. 이것의 상징적 의미는 마리아는 관상을 의미하고 마르다는 행위를 의미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것은 교회의 가르침에서 사회적 행동보다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것이 더 훌륭하다고 말해져 왔다. 머튼은 이를 다시 해석한다. 즉 그것은 관상과 행위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것들은 서로 갈등을 일으키기 보다는 상호조화를 이루고 상호 보충하고 있다고 표현한다32). 사실 관상은 활동을 초월하는 것이다33). 그러나 머튼은 행위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내적 관계에서 성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머튼에게 있어서 관상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으며, 우선성의 문제이지 결코 관상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수도자들의 참된 성소는 활동을 거스려 관상을 위한 투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옛날의 조화있고 위기적인 양자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는데 있다는 것이 명백해지고 있다. 양자는 다 필요하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이다. 관상과 활동 양쪽 모두 다른 한편이 없으면 하나님의 어좌에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이다34)." 머튼은 호로 그 자신 만을 위하여 수도원으로 피해 갈수 없음을 발견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어불어 함께 구원을 찾아 가는 것이다.'라고 깨닫게 된다.
"활동과 관상에 대한 문제를 취급한다는 것은 이것을 해결 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크고 심각한 문제점들을 야기 시키는 것처럼 생각된다. 두 사이의 알력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교회안에서 우리 자신의 개인 성소에 의해 요구되는 균형을 달성하는데 있다.35)"머튼은 관상과 행동은 반드시 모든 경건함에 각각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은 공존한다. 사실상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 양쪽을 다 사랑하여야 할 계명을 받은 이래 이 두가지는 다 애덕으로써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하는 관상과 인간의 행동은 둘로 갈라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활동은 결코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전례예배에 있어 관상정신이 없다면 -즉 그분이 하느님이신 고로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흠숭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전례는 그리수도의 사랑에 기초를 두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수행되는 참으로 그리스도적인 사도직을 양육하지 못할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요구는 관상정신으로 키워진 내적 진실이다. 즉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사랑, 그리스도의 내림을 위한 열망, 하느님의 영광, 그분의 진리, 그분의 정의, 현세안에서의 그분의 왕국을 구축하려는 갈망이다. 이러한 것이 '관상'의 특색이며, 그리스도인 마음안의 종말론적 포부이며, 수도자의 기도의 참본질이다. 이런 것이없는 사도직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 관상적 방향 없이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것은 그분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현재를 즐기고 있는 사회 구조나 가치나 이익을 더 견고하게 확립하려는 것이다. 이 관상적 기초 없이 우리의 실교나 사고직은 절대로 사도직일 수 없고, 다만 자신의 일반적인 생활방법으로 개종자의 수만 많아지게 할 것이다. 관상과 내적 기도 없이 교회는 인류를 변화시키고 구원해야 할 그의 사명을 다할수 없다. 또한 관상이 없는 교회는 냉정하고 세속적인 권력의 종으로 변할 것이고, 그의 신도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문제시 하지도 아니할 것이다. 진실하고 갚은 관상적 열망 없이,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사랑과 그분의 진리를 위하여 타협할 줄 모르는 갈망 없이 종교는 결국 하나의 아편이 된고 말 것이다36)."
VI.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토마스 머튼의 관상적 기도를 살펴보았다. 카톨릭 교회의 전통은 언제나 관상을 기독교인의 영성생활의 최고의 극치를 간주해 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관상이라는 개념이 난해하다. 따라서 본 논문을 맺으면서 토마스 머튼의 [관상]을 거스타트슨의 [경건]정의37)에 비추어 그 의미를 정리하고자 한다.
그러나,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토마스 머튼은 특히 수도원 관상이 모든 사람에게 규범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서로 다른 상황에 있는 개개인들은 그들의 상황에서 요구되고 필요로 하는 정도의 관상이나 영성 훈련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여기에는 기도나 예배 의식과 같은 보다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형태의 방법도 물론 포함된다고 하였다38). 따라서 여기서의 관상은 방법적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토마스 머튼의 관상기도가 가지는 속성을 말한 것이다.
이점을 유념하고 경건과 관상을 서로 비추어 보려고 한다.
첫째, 경건의 정의를 통하여 관상의 속성을 살피고자 한다. 거스타프슨은 "경건은 세계와 인간의 삶 속에 주어진 것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인 자세이다. 그것은 우리가 창조하거나 충분히 지배할 수 없는 힘들에 대한 인간의 의존의 경험에 의해 생기는 환경과 경외와 심지어는 헌신의 태도와 성향이다.39)"라고 정의하였다.
거스타프슨은 경건정의 속에서 경건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경험속에서 오는것이며 우리를 우지하고 압도하는 궁극적 힘에대한 종교적 경험에서 온다고 한다. 즉 경험은 경건을 이끌어내고 야기한다는 것이다40).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이러한 경험을 씨앗으로 표현되고 있다. "매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그의 영혼에 무엇인가를 심어 놓습니다. 마치 바람이 솜털 달린 수 많은 씨들을 옮겨 주듯이 매순간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에 남몰레 스며드는 영적인 생명력의 어린 씨앗을 날라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지가 표현되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그러므로 새생활을 위한 씨앗이 됩니다.41)" 세상과 인간속에서의 사건들과 하나님의 의지가 관상의 씨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은 경건을 이끌어내고 토마스 머튼이 말하는 매순간의 씨앗들을 관상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또한 거스타프슨은 경건을 성향과 태도로서의 정서적인 것임을 정의에서 말하고 있다42). 토마스 머튼은 그의 관상적 기도에서 마음을 특히 중요시 한다. 머튼은 묵상에 있어서 '방법''체제'를 찾기보다 오히려'태도''시야' 즉 신앙,개방,경청,공경,기대,탄원,신뢰,기쁨같은 정서적인 것을 배양해야 한다고 한다43). 거스타프슨이 그의 경건 정의에서 경건을 정서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지성과 의지적인면까지 종합한 것처럼 토마스 머튼 역시 관상기도에 이 모든 것의 종합을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좀체로 '정신'하나만 가지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기도는 인간전부를 가담시키며 인간존재의'중심'즉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총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인간의'마음'에서부터 발하는 것이다.44)"
거스타프슨의 경건의 정의를 통하여 우리는 같은 맥락하에서 관상의 매개와 성격을 알아 보았다. 이제 우리는 경건과 관상을 일정 한계내에서 동시에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건과 관상은 세계와 인간의 삶 속에 주어진 것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 자세이며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다.
둘째로, 경건과 관상에서 나타나는 자기부정의 삶을 살펴보자. 거스타프슨은 자기 부정의 삶이 기독교 윤리를 일반 윤리로부터 구분하는 독특한 의미를 제시한다고 하였다. 기독교라는 말은 자기보정을 언급한다. 그는 다기부정이 신 중심적인 경건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공동체적 삶의 필수요소라고 한다45). 토마스머튼의 자기 부정은 참된 자기발견과 함께 그의 영성 신학 전반의 목표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해 토마스 머튼은 말한다. "우리는 자아 부정과 희생이 기도 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인 본질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한다46). 기도와 희생은 상호작용한다. 희생이 없는 곳에는 결국 기도가 없는 것이 되고 말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성숙한 사랑과 결합된 진실하고 겸손한 기도는 몸에 배인 희생정신에서 무의식 중에 나타날 것이다.47)" 칼빈은 기독교적 생활의 핵심을 자기부정의 삶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신중심적인 경건과 관상은 예외없이 양자 모두 우리에게 자기부정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셋째로, 경건과 도덕, 관상과 활동의 문제를 고찰해보자. 거스타프슨은 영적 생활과 도덕적 생활을 연결지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마음을 이웃과 피조물을 향한 인간의 헌신과 이웃을 향한 인간의 봉사 사이에는 항상 본래적이고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경건은 이웃사랑의 윤리적인 삶에 영향을 준다48). 토마스 머튼 역시 관상과 활동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토마스 머튼은 관상 생활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는데 있다고 한다. 그는 관상 기도와 활동기도를 마르다와 마리아를 들어 상호 조화를 이루고 상호 보충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수도자는 다만 자기 자신의 마음만을 탐구하는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이 세상을 '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격리되고 있는 그 세상의 한복판에 깊이 잠겨있기 때문이다. 사실 수도자는 현세의 저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가장 깊고, 가장 등한시 된 소리에 더욱 열심히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만 현세를 포기한 것이다.48)" 마지막으로, 경건과 관상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신중심적 자세를 살펴보자. 거스타프슨에게 경건은 자체 발생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우리를 유지하고 압도하는 대상적인 힘에 대한 반응이다49). 즉, 하나님의 은총이 경건의 동인인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데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있을 수 없다. 또한 그 하나님의 경험의 핵심으로서의 경건도 그 하나님이 없이는 생길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경건이 야기되며, 그 경건이 있어야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요구하는 신중심적 윤리가 전개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50). 한편 토머스 머튼에게 관상은 그 자체가 이미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없는 사랑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또한 관상의 목적 목표 역시 그분의 자비로우신 원의를 알고 이 원의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관상의 출처와 목표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말한다.
"우리 자신을 깨우기로 결정하는 이는 우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51)"
지금까지 우리는 거스타프슨의 경건저의속에서 토마스 머튼의 관상을 함께 비추어보는 일을 하였다. 경건과 관상은 그 정의에서 출발하여 두 삶이 가지는 자기 부정의 양사오가 종교적 수직.수평의 조화 문제등에 대하여 그 흐름을 서로 비추어 볼 수 있다는 것과 궁극적으로 두가지 모두 신중심적임에 있어서 그 길을 달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의 21세기는 바야흐로 성령과 영성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제 토마스 머튼의 영성신학을 살펴봄은 우리에게 당면한 인간존재와 소외 그리고 종교의 근본적 문제들로 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함이다.
이제 우리는 머튼의 관상적 기도의 속성과 참 의미를 먼저 깨달음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참 자아를 찾고 우리의 받은 바 소명에로의 순종을 시작 할때이다.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며, 성령과 꾸밈없는 사랑과 그리고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오른손에도 왼손에도 정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을 때나 칭찬을 받을때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일군답게 살아 갑니다. 남들은 우리를 사기군으로 치지만 우리는 유명하고, 죽은 것으로 치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주고,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사실은 모든것을 가지고 있습니다."52)
--참고 문헌--
단 행 본
Thomas.Merton, 칠층산,정진석역, 서울:성 바오로출판사, 1988.
-----------,마음의기도,이영식역 서울:성바 오로출판사,1988.
-----------,명상의씨,조철웅역,서울:카톨맄 출판사,1987.
-----------,명상의씨앗,황남주역,서울:늘푸 름출판사,1993.(개정증보판)
노영상,경건과윤리,서울:성광문화사,1994.
논 문
김경재,"토마스머튼의 영성신학" 기독교사상사 제30호 제3권(1986.7)
사미자,"토마스머튼의 관상적 기도에관한 연구" 교회와 신학 제18집(1986).
박홍철,"토마스머튼의 영성신학",한신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1990).
조종국,"토마스머튼의 관상적 기도에 관한 연구",장로회 신학대학 대학원석사학위 논문(1991).
1)김경재 ,"토마스 머튼 의 영성신학"기독교 사상사 제30호 제3권.(1986.7),p.134.
2) Ibid.,p.128.
3.Thomas Merton,[ 칠층산 ] ,정진석 역, (서울: 성 바오로출판사, 1988)
Thomas Merton, [ 명상의 씨앗],황남주역, (서울:늘푸름 출판사, 1933),pp.259-278.
여기 소개한 간략한 생애 약력은 위의 책들은 주요 골격으로 하여 살을 붙였다. 자세한 생애는 칠충산을 참조하라.
4)김경재,"토마스 머튼의 영성신학", 기독교 사상사 제30호 제3권,(1986.7)
5)Ibid.,p.133.
6)T.Merton,마음의 기도, 이영식 역,(서울:성바오로 출판사,1988), p.54.
7)T.Merton,명상의 씨앗,황남주역,(서울:늘푸름출판사,1993),pp.24~25.
8)Ibid.,p.67.
9)Ibid.,p.68.
10)Ibid.,pp.50~51.
11)Ibid.,p.52.
12)박홍철,"토마스 머튼의 영성신학",(한신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1990),pp.27-28.
13)Ibid.,p.28.
14) T.Merton, 마음의 기도 ,이영식,(서울:성바오로출판사,1988),p.104.
15) T.Merton,명상의 씨앗,황남주역,(서울:늘푸름출판사,1933),p.55.
16) op.cit.,p.96.
17)Ibid.,pp.99-100.
18)Ibid.,p.103.
19 Ibid.,pp103-104
20 Ibid.,p.127
21 Ibid.,p.98.
22 조종국, "Merton의 관상적 기도에 관한 연구",(장순희 신학대학신학대학원석사학위 논문,1991)p.41.
23 T.Merton,명상의 씨앗,황남주역,(서울:늘푸름출판사,1993),p.22.
24 Ibid.,p.26.
25조철웅역 , 명상의 씨, (서울:카톨릭출판사. 1990),P124.
26IBID.,P.125.
27사미자,"토마스 머튼의 관상적 기도에 관한 연구" 교회와 신학 제 18집 (1986),P.200.
28ibid.,p.202.
29Ibid.,p.202.
30Ibid.,p.203.
31Ibid.,p.208.
32 Thomas.Merton,마음의 기도,이영식역,(서울:성바오로출판사,1988) ,pp.72-73.
33 Ibid.,p.67.
34 Ibid.,p.94.
35 Ibid.,pp.69-70
36 Ibid., pp.186-187.
37 노영상, 경건과 윤리 :James Moody Gustafson의 윤리사상에 나타난 경건에 관한 연구, (서울 : 성광문화사,1994).
지금부터 본문에 나오는 '경건'은 모두 이책을 바탕으로 한다.
38 Thomas Merton, 마음의 기도, 이영식역, (서울:성바오로출판사,1988), p.51.
39 Op.cit., p.61.
40 Ibid., p.62.
41 Thomas Merton, 명상의 씨앗,황남주 역,(서울:늘푸름출판사,1993),p.30.
42 Op.cit., p.87.
43 T.Merton, 마음의 기도, 이영식역,(서울:성바오로출판사,1988),p.34.
44 Ibid., pp.26-27.
45 Op.cit.,p.113.
46 Op.cit., p.106.
47 Ibid., p.110.
48 Op. cit., pp.150-151.
48 op.cit., p.13.
49 op.cit.,p.61.
50 Ibid.,pp.139-140.
51 T.Morton , 명성의 씨앗,황남주역,(서울:늘푸름출판사,1993),p.26.
52 T.Merton, 마음의 기도, 이영식역,(서울:성바오로출판사,1988),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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