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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턴의 생애와 영성 |
토머스 머턴(Thomas Merton, 1915~1968)은 20세기 대표적인 영적 안내자 중에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1948년 출판해 ‘20세기의 고백록’으로 평가받는 자서전 「칠층산」(1999, 성바오로출판사)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머턴은 많은 글들을 통해 기도와 묵상 안에서 발견한 영적 통찰을 나눠 주었다. 그가 1968년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7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출판되고 있다. 특히 그의 생전에 소개되지 않았던 4,000여 통의 편지와 일기가 출판되어 더욱 많은 사람들이 깊고 친밀하게 머턴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글을 즐겨 읽는 독자층에는 청년, 노인, 학자, 구도자뿐 아니라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그렇다면 토머스 머턴의 무엇이 이렇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인가? 머턴은 어떤 인물이고 자신의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출생과 어린 시절 머턴은 1915년 1월 31일 프랑스 프라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웬 머턴은 뉴질랜드 출신의 화가였고, 어머니 루스 젠킨스는 미국 오하이오 주 출신의 화가였다. 두 사람은 프랑스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중에 만났다. 아버지는 성공회 신자였으나 거의 예배에 출석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간혹 퀘이커 교도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정도였다. 머턴은 성공회 교회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지만, 가정에서 정규적인 신앙 교육은 이뤄지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머턴 가족은 1916년 8월 15일에 어머니 젠킨스의 양친이 있는 미국 롱아일랜드 더글라스턴으로 돌아왔다. 1918년 11월 2일 퀸즈의 플러싱에 정착한 머턴 가족에게 머턴의 유일한 동생인 요한 바울이 태어났다. 1921년 10월 3일 머턴이 6세 때 어머니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사건은 어린 머턴에게 엄청난 슬픔과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그 후 아버지가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기 위해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는 동안 머턴과 동생은 외조부모와 함께 지내야만 했다. 머턴의 아버지는 1925년 8월 25일 큰 아들 머턴만 프랑스로 데리고 가서 몬타우반의 학교 리세 잉그레스로 보냈다. 1928년 5월 머턴은 아버지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남학생들만을 위한 리플리 코트를 다녔다. 그곳은 머턴의 생애에서 종교적인 실천이 처음으로 삶의 한 부분이 된 장소였다. 학생들은 잠자리에 들거나 식사하기 전에 공개적으로 기도하며, 주일에 모든 소년들이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이런 신앙의 모습은 지속되진 않았다. 1929년 8월 머턴은 오캄사립고등학교에 입학해 학교 신문 기자와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그 기간에 머턴은 영문학에 대한 관심을 크게 발전시켰는데 윌리엄 블레이크, D. H. 로렌스, 제임스 조이스 등을 좋아했다. 그때 머턴은 이전과 전혀 다른 면의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홀로됨을 경험했던 10대 소년이 고독과 조용한 시간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1931년 1월 18일 머턴이 만 16세가 되기도 전에 그의 아버지마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회심과 세례 1933년 머턴은 18세가 되어 로마를 여행하다가 뜻밖에도 교회의 비잔틴 모자이크에 매력을 느꼈다. 수많은 모자이크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한 사람을 표현하고 있었다. 「칠층산」에 따르면, 비록 그는 막연했지만 생전 처음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 것이다. 여행 중이던 머턴은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하루는 그가 호텔방에 있을 때 갑자기 죽은 아버지가 곁에 있는 것 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 자신의 삶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고, 영혼의 부패함을 깨달으면서 그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렬한 생각과 자유에 대한 진지한 갈망이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그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과 함께 하나님께 진정한 기도를 올렸다. 다음날 토머스 머턴은 교회로 가서 통회의 기도를 드리지만, 눈물의 회개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33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클레어대학에 입학한 머턴은 술과 담배와 이성 교제로 세월을 보냈다. 이런 무책임하고 방탕한 생활로 인해 격노한 대부는 머턴을 외조부모가 있는 미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런 조치는 결과적으로 머턴에게 복이 되었다. 20세가 되던 1935년 머턴은 영문학을 전공하기 위해 미국 뉴욕 주의 콜롬비아대학교에 입학했다. “하나님의 빛 아래서, 우리는 빛을 볼 것이다”라는 콜롬비아대학교의 표어는 마치 머턴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토머스 머턴에게 있어서 콜롬비아대학교는 빛과 신선한 공기로 가득했다. 그를 휘감고 있는 듯한 찬란한 빛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머턴을 압도했던 내면의 어두움을 곧 날려버렸다. 그곳에서 머턴은 로버트 랙스, 에드 라이스, 사이 프리드굿, 로버트 기룩스 등 친구들과 영문학자 마크 반 도렌 교수도 만났다. 1937년 2월 머턴은 에티엔 질송(Etienne Gilson)의 「중세 철학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발견했다. 그는 질송의 글을 읽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하나님을 요란스럽고 격정적인 인물, 알쏭달쏭하고 질투심이 강한 숨어 있는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머턴은 질송의 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자존성’ 즉 ‘하나님은 그 자체로 존재하심’을 깨달은 것이다. 이 깨달음은 머턴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고, 기독교의 철학과 신앙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갖게 해주었다. 1938년 9월에 G. F. 레이히가 쓴 영국의 시인 제럴드 맨리 홉킨스의 삶에 관한 글을 읽고 있던 중에 머턴은 갑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 치솟아 올라 자신을 재촉하는 듯한 움직임을 느꼈다. 그것은 머턴에게 “너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니? 왜 아직도 주저하고 있니? 너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잖아. 그런데 왜 그것을 하지 않지?”라고 묻고 있었다. 그것은 홉킨스의 책에 묘사돼 있는 홉킨스의 경험이면서 동시에 머턴의 경험이 되었다. 이런 내면의 재촉으로 인해 머턴은 주체할 수 없어 성체축일교회까지 아홉 블록을 걸어갔다. 그리고 신부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조지 포드 신부의 지도를 받은 지 두 달 후에 토머스 머턴은 1938년 11월 16일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수도자로서 삶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논문으로 1939년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영문학 박사 과정을 공부할 계획이던 머턴은 이듬해 사제가 되고 싶은 강한 열망을 깨달았다. 그 중요한 순간에 머턴에게 사제성소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택하도록 도운 인물은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를 강의하던 댄 윌시 교수였다. 처음에 머턴은 프란시스코수도회에 입회 허락을 받고자 지원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좌절을 맛본 머턴은 1940년 9월부터 뉴욕 올리안의 프란시스코회 소속의 성 보나벤투라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머턴은 수도자로 살 수는 없었지만, 평생을 수도하는 자세로 살려고 그 기간 동안 거의 수도자적인 삶을 영위했다. 1941년 고난 주간 동안 켄터키 주 루이빌의 겟세마니수도원에서 기도하던 머턴은 고독의 신비를 깨닫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당시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승이 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며 기도했는데, 그때 고독으로의 부르심을 체험하면서 마침내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소유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작은 가방 하나만 손에 들고 ‘영혼의 놀랍고 기쁜 환희’를 가지고 1941년 12월 10일 겟세마니수도원에 도착했다. 그 후 27년 동안 그는 겟세마니수도원의 트라피스트수도회 수도승으로 살았다. 참된 고독을 찾아서 트라피스트수도회에 입회할 당시 머턴은 자신이 완전히 세상을 떠났다고 느꼈고, 철저하게 하나님만 추구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이렇게 침묵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깊이 만나려는 열망을 갖고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머턴은 바쁘고 소란스러운 환경에 처해 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수도원장과 영성 지도자는 더욱 더 많은 글을 쓰도록 요구했고, 밭에서 많은 일을 해야 했으며, 여러 분야에서 또 다른 임무들이 주어졌다. 비교적 바쁜 일과에서 내면이 쉼을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순수한 관상 생활로 진정 부르심을 받았는가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다. 고독에 대한 자신의 갈망이 자기 중심적인 것은 아닌지 고뇌하다가 결국 머턴은 수도자로서 ‘관상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일상의 관상적인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정한 고독은 단순한 일상에서 추구하고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는 사막은 반드시 지형적일 필요가 없고, 마음의 가난과 고독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 시기에 머턴은 ‘관상은 관상에 대해 배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침묵은 침묵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며, 고독은 하나님과만 함께 하며 마음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생각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머턴은 자신이 관상에 대해 너무 지적이고 이성적으로만 접근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중에 머턴은 겟세마니수도원에서 활동들이 관상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느껴 더 엄격한 관상 수도회인 가말돌리회나 카르투시안 공동체로 옮기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바로 그때 머턴은 새로운 차원의 고독이 자신 안에서 자라고 있음을 보았다. 이 고독은 더 이상 머턴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분주하지 않게 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걱정하지 않게 해주며,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기도해야 할 것인지에 골몰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지 않게 해주었다. 머턴은 고독에 대한 새로운 체험과 함께 작가로서 소명과 비전도 바뀌게 되었다. 그때까지 머턴은 글을 쓰는 일이 기도 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제 글을 쓰는 것이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침묵과 고독에 이르는 관문임을 깨달은 것이다. 토머스 머턴은 작가로서 글을 쓰면서 가난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글을 씀으로써 자신과 내면의 가장 깊은 감정과 생각들이 대중의 소유로 되는 것을 보았다. 글을 써서 그것을 나눔으로써 자신은 가난해지고, 다른 사람들은 수도원의 침묵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원리로 그는 작가로서 명성을 얻으면 얻을수록, 오히려 영적으로 더욱 가난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적 가난은 머턴으로 하여금 주위의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그를 더욱 가난하게도 하고 동시에 부유하게도 하며,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경험으로 그는 더욱 깊은 침묵과 고독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1948년 그 유명한 「칠층산」을 출간했고, 연이어 출판된 그의 많은 서적들과 기사들도 독자들의 영성 생활을 깊게 했다. 1949년 신부 서품 이후, 15년 동안 수도원에서 수사들의 교육을 책임지게 된 토머스 머턴은 처음 5년간은 사제 지망생들의 교육 책임자로, 그 후 10년간은 수련 수사들의 수련장으로 일했다. 그때 영성 지도를 위해 수사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과 더불어 정기적으로 수사들을 교육하는 시간을 가졌다. 머턴이 이런 중요한 일을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수도원장의 인정을 받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장기간의 봉직이 겟세마니에서 영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암시한다. 세상으로의 회귀 1958년 3월 18일 머턴은 복잡한 루이빌 시내의 한 구석에서 갑자기 신비적이라 할 수 있는 영적 경험을 했다. 머턴은 그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들이 내게 속하고 나는 그들에게 속했으며, 우리는 완전히 낯선 자들이지만 서로 이방인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 분리된 거룩한 존재에 대한 모든 환상은 하나의 꿈이다. 이것은 나의 소명이나 수도원적 생활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도원 안에서 너무나 쉽게 갖는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라는 개념은 완전한 환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서원함으로써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 천사와 비슷한 자들, 영적인 사람들, 내적 삶의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환상이다.” 이 체험은 머턴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더 이상 머턴에게 영성은 세상과 이웃으로부터 분리가 아니다. 머턴에게 영성이란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을 의미하며, 또한 사람들과의 하나됨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머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과 일치하면 할수록 그분과 일치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더욱 일치할 것이다.” 이 체험을 시점으로 머턴은 주도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세상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머턴은 20세기의 진정한 예언자들 중에 가장 주목받는 한 목소리가 되었다. 머턴은 영적 문제뿐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 전쟁, 과학 기술 등 전반에 걸쳐 기독교 관상가로서 관상적인 시각을 갖고 사안이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진단하며 비전을 제시하는 예언자로서 사명을 감당했다. 1965년 머턴은 처음으로 미국 트라피스트회로부터 겟세마니수도원의 한 곳에서 은수자로 살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가 수도자로 살아간 27년 동안 때로 의사들의 진료를 받기 위해 루이빌 시내로 나오거나 병원에 입원한 것을 제외하고선 여행을 위해 단 세 번의 외출이 있었을 뿐이었다. 첫 번째는 대수도원장 돔 제임스 폭스와 함께 미네소타의 콜리지빌에 간 것이고, 두 번째는 저술가 D. T. 스즈키를 만나기 위해 뉴욕에 간 짧은 여행이었다. 세 번째는 1968년에 새로운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고 미국 뉴멕시코, 알래스카, 캘리포니아를 거쳐 수도원상호협력기구의 초청으로 연설을 하기 위해 아시아로 갔던 긴 여행이었다. 1968년 12월 10일 머턴은 태국 방콕에서 연설한 후에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목격자가 없어서 정확하지 않다. 다만 일반적인 추론으로 샤워 후에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지면서 서 있던 선풍기를 붙잡게 되었고, 그 선풍기가 쓰러지면서 감전돼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사체는 미군 군용 수송기로 운송돼 12월 17일 겟세마니수도원에 안장되었다. 21세기의 영적 안내자 토머스 머턴은 생애 동안 아주 넓은 독자층을 갖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죽은 지 40년이 되어 가는데도 독자들의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해가 지나면서 쇄가 거듭되고, 여러 언어로 번역돼 이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고 있다. 머턴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폭넓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기독교 영성 작가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토머스 머턴의 무엇이 현대인들을 매료시키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머턴의 생애와 그의 글에 매력을 느끼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아마 글을 통해 독자들과 단순한 의사 소통을 넘어 교통(communion)에 이르고자 하는 그의 성향일 것이다. 머턴은 탁월한 의사 소통을 통해 독자들과 진정한 교통을 이뤘다. 어떻게 이런 깊은 영적 교제가 가능했을까? 첫째로 머턴은 자신이 하나님께 속했으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연결돼 있음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곧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공통되는 근원을 찾으려고 했다. 둘째로 독자들은 머턴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인간적인 면을 접하게 된다. 독자는 자신과 비슷한 열망과 고뇌를 가진 한 사람을 만나고, 그와 함께 울고 웃으며 기도하고 영적 여정을 걷게 되는 것이다. 머턴이 평생에 걸쳐 가졌던 일차적인 기도 제목과 마음의 소원은,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뤄 나가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삶이 완전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성인이 되고자 노력했으나, 그가 말하는 성인이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머턴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삶에 응답하며 충실히 살다간 인물이다. 그는 허위와 가식을 혐오했다. 부조리하거나 어둡고 어려운 어떤 상황에서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과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머턴에게서 인간의 나약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도 어린 시절에 방황의 순간이 있었고, 인생에서 실패와 허물과 어둠이 있었다. 또 보통 사람 이상의 시련도 있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하나밖에 없던 동생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에게도 하나님과의 일치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어버려야 하는 집착의 대상이 있었고, 벗어내야 할 환상이 있었다. 머턴은 자신의 인간적으로 연약한 부분들을 숨기거나 부정하지 않으려 했다. 아마 머턴처럼 하나님을 향한 여정에서 생기는 내면의 다양한 경험과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많이 나눠준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의 평생에 걸쳐 쓴 편지와 일기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셋째로 머턴이 갖고 있었던 탁월한 의사 소통 능력을 들 수 있다. 머턴은 인간의 사정을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모호한 상황, 내면의 다양한 갈등과 고뇌 및 환호, 하나님을 향한 깊은 열망 등을 그대로 표현하는 능력이다. 이런 의사 소통 능력은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여러 문화에 속한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들과 머턴을 동일시하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머턴 안에서 보고, 머턴이 인생을 숙고하고 말하는 것을 자주 자신들의 생활에서 느끼게 된다. 머턴은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에서, 그가 표현해 주기 전에 전혀 몰랐던 생각과 직관을 밖으로 꺼내 주었다. 이런 의사 소통의 능력은 그의 성장과 교육적 배경에서 기인한다. 그는 영어, 라틴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에 능했고 약간의 독일어와 러시아어 및 중국어에도 일시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의 교육은 프랑스, 영국, 미국에 걸쳐 이뤄졌고, 어린 시절에 유럽과 북미를 자주 넘나드는 여행 경험을 갖고 있었다.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대학 경험과 다양한 작가들과 문학의 만남 등이 하나님께 대한 현대인들의 갈망을 표현하는 데 귀한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머턴은 자신의 삶과 세대를 초월해 사람들의 상황을 꿰뚫어보는 지혜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말이 지금 세대에 말하고 있고, 앞으로 올 세대에도 말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이유다. 머턴은 인간의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관심과 질문들을 알아챌 수 있는 지혜와 통찰력을 갖고 있는 예언자였다. 그는 기독교의 다양한 영성 전통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사실적이고 정보적인 지식뿐 아니라 뛰어난 통찰력과 상상력을 갖춘 지혜를 가지게 되었다.[object TEXTAREA] | |||
오방식_장신대 실천신학 전임 강사 | 2006.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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