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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적인 삶과 하나님과의 진정한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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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머턴에게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주제 중에 하나다. 머턴은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해 기독교 명상을 설명하면서 우리를 명상으로 초대한다.
명상의 씨 먼저 머턴은 ‘씨’라는 시적 은유를 사용해 명상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하나님께서 매순간 인간의 마음과 의지에 무엇인가를 심어주신다. “매순간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그의 영혼에 무엇인가를 심어 놓습니다. 마치 바람이 솜털 달린 수많은 씨들을 옮겨 주듯이, 매순간은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에 남몰래 스며드는 영적 생명력의 어린 씨앗을 날라 옵니다. …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지가 표현되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따라서 새 생활을 위한 씨앗이 됩니다.” 머턴은 계속해 말한다. “제가 찾는 것이 오직 하나님이라면 매순간 사사건건이 저의 의지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들을 뿌려서 때가 되면 엄청난 수확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서 매순간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지는 씨는 우리 자신의 본래 정체성, 우리 자신의 행복과 거룩함을 이루게 하는 씨다. “저의 본래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안에 있는 본래의 모습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것이 바로 명상하는 삶이다. “나무는 나무가 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의 소명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참된 정체성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협력해야 한다. 그래서 머턴은 우리에게 권한다. “자기 본래의 진면목을 발견하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그분의 자비를 경험하는 명상은 현실과 매일의 삶의 요구로부터 도피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나 환경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의 존재가 어떠하든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아는 일이다. 또한 명상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막연하게 믿는 것을 의식하고 인식하는 일”이다. 어떤 의미로는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사랑과 평화를 이뤄 나아가고자 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일치를 이루는 삶인 것이다. 또한 머턴은 ‘명상의 씨’라는 이미지뿐 아니라 내면의 전투와 전율을 상징하는 ‘사막’의 이미지를 사용해 명상을 묘사하기도 한다. “무미건조함과 무기력함을 이겨 낸 사람, 황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순순히 따른 사람, 순수한 믿음과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 외에 어떤 도움과 안내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약속된 땅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일치하는 평화와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모든 사건에 현존하시며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도 그분에 대해 언제나 현존하시며 위로해 주시는 희미하고 신비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씨’가 봄과 여름의 빛과 생명 그리고 성장의 계절을 상징한다면, ‘사막’은 가을과 겨울의 황량함과 쓸쓸함과 어둠 그리고 죽음의 계절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상반된 계절은 모든 인간들이 경험하는 내면의 시기들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 인생에는 밝음과 위안과 성장의 계절이 있고, 어둠과 고독과 실패와 좌절의 시절이 있다. 머턴은 상반되는 내면의 두 계절을 세심하고 균형 있게 다루지만 특별히 수도자로서 사막 경험의 명상에 대해 애정을 갖고 다루고 있다. 이 글에서 머턴이 사막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해 묘사하는 명상을 탐구하고자 한다. 머턴에게 명상은 사막의 경험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황무지를 개척하는 일이다. 머턴이 어떻게 사막의 경험을 명상으로 제시하는지를 면밀히 살펴보고 우리 기도의 여정에 주는 도움을 모색하고자 한다. 마음의 기도 명상으로서 사막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머턴은 수도원 기도를 소개한다. 그는 수도원 기도를 마음의 기도나 명상이라고 부른다. 수도원 기도는 수도자들의 기도인데, 여기서 머턴은 기도의 기술이나 방법을 말하지 않고 기도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수도원 기도에 대한 머턴의 통찰은 기도를 배우길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배워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유익한 요소들을 담고 있다. 머턴에 의하면 수도원 기도는 본질적으로 단순하다. 실제로 이집트와 시리아에 있었던 첫 수도자들의 기도는 직접적이고 복잡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사막의 교부들의 언행록에 다음과 같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다만 너의 두 팔을 벌리고 ‘주여,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리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이미 잘 알고 계시는 대로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라. 그리고 만일 원수가 너를 억압하거든 ‘주여, 어서 오셔서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하라.” 초기 수도자들은 시편이나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발췌한 짧은 구절로 된 간단한 기도들을 강조했다. 자주 사용된 성경 말씀 중에 하나가 “오, 하나님! 어서 오셔서 나를 도와주소서”(시 69:2)이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 특별 계시나 신비적인 체험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마음의 순결과 사고의 제어를 위해 힘써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봉사를 위해 헌신하는 데 있었다. 첫 수도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었다. 그들의 삶은 성경 말씀에 뿌리를 두었다. 수도자들은 성경 본문을 학문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다. 그들이 성경 말씀을 갖고 드린 기도의 방법은 그들의 마음에 성경 말씀을 두는 것이었다. 그들은 깊고 단순하게 집중하면서 ‘마음으로부터’ 성경 말씀을 기억하고 거듭 반복함으로써 그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특히 시편은 그들의 기도 책이었다. 그들은 시편 안에서 ‘암흑의 세력을 거슬러 싸우는 투쟁에서 경험되는 마음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의 계시’를 보았다. 전투의 시편들을 모든 정욕 및 악마와 더불어 싸우는 내적 투쟁에 관련된 것으로 해석했다. 초기 수도자들의 또 다른 기도는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두는 것’이었다. 동방 교회에서 널리 유행한 예수 기도는 이집트의 사막에서 기원했는데, “예수 기도는 내적 침묵과 망상 망념의 제거와 열정적인 신앙으로 성경에서 취한 말씀을 가지고 주 예수님을 겸손하게 부르는 데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머턴에 의하면 수도원 기도의 초기에서부터 ‘마음’이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수도원적인 묵상, 기도, 명상, 독서에는 인간의 모든 존재가 참여한다. 어떤 종류의 기도이든지 모든 존재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머턴은 이것을 ‘마음의 기도’라고 부른다. 마음의 기도는 인간 존재의 중심 즉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총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기도이다. 머턴은 ‘마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마음은 각자 인격의 가장 깊은 심리적 바탕을 가리키고 그곳에서 자아의 깨달음이 분석적 사고의 피안에 이르며, 미지의 분이지만 현존하시는 분 - 우리가 우리에게 친밀한 것보다 더 우리에게 친밀하신 분 - 의 심연과 더불어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으로 직면하는 내적 성소이다.” 마음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이며 항상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면해 만나는 내적 성소이다. 머턴에 의하면 마음의 기도는 바로 각자 존재의 본바탕인 그 마음 안에서 깊은 주의력을 갖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단순히 우리의 정신이나 감정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바탕에서 신앙과 경이와 사랑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마음 안에서 그분과 상봉하는 것이다. 진정한 기도의 분위기로서 사막 사막으로 나온 첫 수도자들이 전심전력을 다해 추구한 것은 마음의 순결이었다. 그러나 그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음의 가난이나 순결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적인 삶에 있었다. 마음의 가난은 하나님과의 참된 일치에 이르는 중간 과정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마음의 순결은 도덕적으로 완전해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로부터의 집착에서 벗어나고 모든 부적절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하나님께만 몰입된 삶을 사는 데 있다. 즉 마음의 순수함이란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 있는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에만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사막에 나온 이유다. 머턴에 의하면 이런 수도원 기도가 꽃피는 분위기는 사막이다. 그곳에는 사람의 위로도 없고, 인간의 도시가 제공하는 안전한 일상의 지원도 전혀 없다. 그리고 그곳은 순수한 믿음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 기도가 유지돼야 한다. 이와 같이 사막에서 우리의 믿음이 연단을 통해 순수해지고 우리의 내면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에서 사막은 장소적 의미뿐 아니라 실존적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광야는 예수님께서 친히 사탄과 싸운 곳이며 수도원 기도가 시작된 장소이다. 초기의 수도자였던 성 안토니(Saint Anthony)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들어간 곳이 바로 이집트의 사막이었다. 사막의 교부들은 다른 사람들이 체계화하거나 미리 그려 놓은 영적 여정을 전수 받아 그대로 답습하며 살아가지 않았다. 수도자가 아닌 일반 신자들에게 있어서 사막은 우리의 삶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시간과 장소에서 고독한 공간을 찾아냄으로써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머턴은 실존적 의미에서도 기도의 장소는 사막임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사막과 같은 실존적 내면의 고독 중에 내면을 탐색해 하나님의 현존과 우리 존재의 바탕을 추구한다. “여기서 무엇보다 크게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개인의 소명에 대해 수도자 자신이 깊이 있는 실존적 파악을 하는 것이다. 이 파악은 수도자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고독 속에서만 점차적으로 그에게 계시되는 것이다.” 수도자는 그리스도 안에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며 한 은자로서 자기 실존의 내적 황무지를 개척해야 한다. 바로 내면의 황무지를 개척하는 것이 사막 교부들이 힘쓴 것이고 오늘날의 수도자와 그리스도인들이 개척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에 뿌리를 둔 자유’가 아니고 ‘순수한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 직접 의존하는 데 기초를 둔 자유’를 향해 익숙하고 확립돼 있는 안전한 규범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여행이다. 이 자유를 얻기 위해 수도자(그리스도인)는 우선 환상과 거짓 자아의 기만과 치욕에 정면으로 부딪히게 하는 의혹과 질문 그리고 전율을 참아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고독 중에 하는 기도의 차원은 인간에게 흔히 있는 번민, 자기 추구, 자신의 허영심, 허위와 배신의 가능성 등에서 느끼는 메스꺼움의 경험들이다. 자아 도취적 안전 상태에 자신을 정립하려는 것과 반대로 진정한 기도의 길은 ‘기도의 위안’을 기도의 위안으로서만 즐기려 하고 자신만을 위해 살려고 하는 거짓 자아의 기만을 대면하게 한다. 이런 자아는 순전한 환상이고 이와 같은 환상을 위해 또는 이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활하는 자는 끝내 염증이나 정신 착란으로 끝마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따라서 우리는 고독의 기도에서 거짓 자아를 벗겨낼 때에만 진정하지 못한 존재의 속박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내적 진실에 확실히 뿌리를 둔 참 자아를 회복할 수 있다. 사막의 경험은 진실에 뿌리를 박고 있는 실재(reality)와 연결되는 길이다. 우리는 내면의 진실과 연결될 때 삶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현존 안에 있을 때 자신들의 참된 자아를 경험할 수 있다. 머턴이 설명하는 사막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머턴의 ‘전율’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율과 하나님과의 일치 마음의 기도가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실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면서 삶과 신앙의 가장 깊은 진실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현존을 그리워하고 그분의 말씀을 자신의 것처럼 깨닫기를 열망하며 그분의 소원과 뜻을 알아듣고 그분을 청취하며 그분께 순명할 수 있는 능력을 애타게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 자신이 외부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간청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그 무엇이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뜻을 알고 그분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묵상과 기도의 목적이다. 모든 기도, 독서, 묵상은 마음의 순결성 즉 하나님께 대한 조건이 없는 겸손하고도 전적인 의탁이나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 자신과 처지를 완전히 수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우리의 거짓 자아가 죽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전율의 경험이다. 적나라하고 무방비한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이 전율 속에서 우리는 홀로 하나님 앞에 허무한 채로 서서 변명이나 이론이 없이 신앙의 빛과 그분의 자비와 은총의 선물이 절실히 요구되는 그곳에서 완전히 그분의 섭리적인 안배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율의 경험은 명상과 기도 생활에서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자아 부정과 희생이 기도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말한다. 기도와 명상 생활에서 자아 부정과 희생을 강조한다고 해서 물질적인 것을 모두 악한 것으로 보고 경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질서한 내면의 관심에서 이탈해 자유롭게 됨을 뜻하고, 이로써 우리가 세상과 삶의 좋은 면들을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더 높은 목적을 위해 그것들을 희생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전율과 명상적인 삶 명상의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객관적이고 명백한 과학적인 인식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을 체험해 아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머턴에 의하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을 우리의 지적 연구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지식은 역설적인 것으로서 우리를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구원적이고 자비로움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하나님께 대한 산지식이다.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체험되고 깨닫는 사랑의 지식이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우리를 열어 놓게 하느냐는 문제다.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전율이 우리를 어둠에 열어 놓고 어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드러운 자비에 의존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머턴이 전율의 어둠을 말하지만 그가 어둠의 경험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이런 점에서 우리는 머턴의 균형을 엿볼 수 있다. 머턴은 어둠과 하나님께 대해 완전히 알 수 없음을 말하지만, 또한 빛과 하나님께 대한 지식도 함께 말하고 있다. 중세의 신비가 십자가의 요한도 어둔 밤을 말하지만 ‘사랑의 살아 있는 불꽃’을 함께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머턴은 우리에게 기도 생활에서 항상 간과하며 쉽게 피하고 싶어 하는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사막이나 어둔 밤과 같은 순간들을 회피하지 말고, 그 사막이 하나님의 동산으로 바뀔 때까지 하나님과 씨름할 것을 권고한다. “어떤 면에서 명상 기도는 사막, 공허, 가난을 단순하게 택하는 것이다. 어둡고 무미건조한 미지의 오솔길을 다른 모든 길보다 더 좋아하면서 직관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그 길을 찾을 때 이미 그 사람은 명상의 의미를 알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 참된 명상이나 기도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보려는 것, 알려는 것, 맛보려는 것, 하나님 현존을 체험하려는 것 등을 ‘내던질 수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현존을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확신과 모든 내적 생활에 변화를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을 맛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머턴이 사막의 경험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막의 경험이 유일한 명상 기도의 길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사실 명상은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홀로 길이시며 그리고 그분을 볼 수도 없다. 명상을 사막이라 함은 빈 마음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비유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상태는 우리가 모든 길을 버리고 자신을 잊으며 볼 수 없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길로 취할 때 체험하는 것이다.” 비록 머턴이 명상을 강조하지만, 그는 명상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고백하며 따르는 것이다. 결국 명상의 길과 목적도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데 있음을 머턴은 말하고 있다. 여기서 머턴은 명상가에 의해 경험된 더 깊은 차원의 전율을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무지의 경험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어떤 공로와 노력, 능력으로도 그리고 용서받을 수 없고 철저히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다. 그리고 자아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대립과 소외의 현실에 대한 경험이다. “인간의 마음 안에 전율, 허무, 밤에 대한 체험은 우리 생활의 진실에 불성실함을 의식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참회하지 않은 불성실성, 은총의 도움 없이 참회할 수도 없는 불성실에 대한 의식이다. 또한 이것은 신비스럽고 허망한 자아에 대한 괴팍한 애착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데서 오는 자아와 하나님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에 대한 깊고 당황케 하는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다.” 그런데 머턴은 다시금 전율과 밤의 경험이 “책벌이 아니라 오히려 정화이고 은총”이라고 말한다. 이런 전율이 우리의 영적 삶에 진보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머턴은 가난의 경험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신앙의 신비를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전율, 허탈, 번민, 버림받음, 헐벗음에 어느 정도 참여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전례의 신비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 가난은 우리의 무기력함이다. “전율은 소유감에서 즉 우리 존재와 사랑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느낌에서 우리를 이탈시켜 우리를 완전한 개방 상태(내부를 뒤집어 놓은)에 있게 하여 단순한 하나의 무방비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이 영적 죽음 안에서 거짓 자아에의 애착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항복이 이뤄졌을 때 더 이상 공포와 전율을 위한 자리는 없다. 여기서 머턴은 성 베네딕도를 인용해 “완전한 사랑은 전율을 몰아낸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전율 자체가 우리의 기도 안에서 사랑과 신뢰와 희망으로 바뀌는 것이다. 가장 깊은 절망에서 희망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기도의 은혜요, 명상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볼 때 평생이 고난의 길이었음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의 여정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던 어둔 밤’이었다. 창세기는 야곱의 벧엘에서 얍복까지 20년의 여정을 어둠으로 이어진 밤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도 우리는 밤과 같은 내면과 외면의 현실을 살고 있다. 아무리 절망적인 현실이었을지라도 그 밤의 현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 밤이 새벽의 영광과 부활의 소망으로 바뀔 때까지 기도로 씨름했던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과 삶은 어둠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큰 도전과 힘을 준다. 이 시대의 영적 안내자인 머턴의 사막으로서의 명상에 대한 나눔도 같은 맥락에서 어려운 현실에서 하나님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큰 영적 도움을 주리라고 확신한다. | |
오방식_장로회신학대학교 실천신학 전임 강사 | 2006.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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