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성 디트리히가 아니었다-
자비네 드람/ 김순현(갈릴리교회 목사)옮김
명시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디트리히 본회퍼를 개신교의 성인과 독일 저항운동의 천사로 만드는 것이 차츰차츰 관례가 되었다. 다음과 같이 많은 것이 거기에 일조했다. 그가 나치의 통치와 그 파괴 이념을 애초부터 분명하게 거부한 것, 그의 철저한 신앙과 독창적인 신학, 눈부신 사상과 탁월한 표현력,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에큐메니컬 운동과 고백교회에 참여한 것, 그가 의식적으로 망명 시도를 중단한 것, 히틀러 정권에 은밀히 저항하기 위해 정보국 정보원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해외 첩보 업무에 종사한 것, 그의 순탄치 않고 짧았던 생애, 자칭 천 년간 지속될 것이라고 호언하던 히틀러 정권이 항복하기 4주 전에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한 것. 그는 오래 전부터 현대의 순교자, 신앙과 삶을 일치시킨 전형, “선한 독일인”의 화신으로 열렬히 추앙받아 왔다.
1906년 2월 4일에 태어나서 100년이 흘렀지만 그 신학자를 둘러싸고 있는 후광은 이처럼 그의 탄생일을 맞이할 때마다 몇 갑절 두터워지는 것 같다. 그라면 자신의 자기이해를 따라서 그러한 영웅 숭배와 성인 숭배를 장려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체포되기 3개월 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우리의 실수와 실책이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거짓된 선행을 고치는 것보다 그러한 실수들을 더 잘 바로잡으신다고 생각한다.” 뒤이어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는 악행을 목격하고도 침묵하는 증인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약빠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가 쓸모가 있을까?” 1943년 여름, 그는 테겔 감방에서 자신의 약혼녀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당신은 어떻게 하는 것이 나를 실제로 기쁘게 하는 일인지 이미 알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나를 타고난 주상(柱上) 수행자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1년 뒤에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성인이건, 회개한 죄인이건, 성직자이건, 의인이건, 불의한 사람이건, 병든 사람이건, 건강한 사람이건 간에, 제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뛰어들고, …우리는 인간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네.”
본회퍼는 자신이 현장과 동떨어진 프로테스탄트, 영사 스크린, 신앙의 영웅, 나치에 대적한 슈퍼 천사로 여겨지고 있는 것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러워할 것이다. 그는 “내가 여기에 서 있다. 나는 바뀔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본회퍼를 올바르게 평가하려면, 그의 생생한 삶의 자리에서 인간 본회퍼를 알아야 한다. 그의 갈등과 그의 정직성, 그의 모순과 그의 솔직함, 그의 완고함과 그가 알고 있던 자신의 불만, 그의 머뭇거림과 그가 품었던 희망 속에서 그를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희망 속에서 그를 알아야 한다. 그가 품었던 희망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확신으로 물들어 있었고, 허무가 아니라 미래를 지향했다. 그가 품었던 희망은 자기 포기를 거부하고, 죄인이 될 위험을 감수했으며, 있을지도 모를 하느님의 용서 의지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본회퍼의 장점은 그의 신학과, 그의 강렬한 신앙 실천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나중에 정치적 저항이라고 부르게 될 그런 부류에 속함으로써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그가 나치 정권을 종식시키려고 준비하고 시도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용기와 결과를 무조건적인 존경을 표하며 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는 있다. 과거에 그려진 본회퍼의 이미지, 곧 지하투사와 저항 투쟁가, 히틀러에 맞설 음모를 꾸밀 만큼 추진력을 지닌 활동가, 저항 신학자 등의 이미지를 성화상(聖畵像) 제작용 접시에서 내려놓아선 안 되는가? 있는 그대로의 본회퍼를 위해. 본회퍼를 미화하는 행위는 그에게 걸맞고 우리에게 고무적인 길, 곧 의미심장한 추모의 길을 가로막는다. 따라서 나는 검증되지 않았으나 널리 알려진 본회퍼의 이미지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조심스레 배제하되, 있을지도 모를 “실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에 입각해서 공정하고도 냉정하게 비신화화 하고자 한다.
본회퍼의 이력에서 드러난 “저항운동”과 관계된 물음들을 역사비평에 의지해 해결하는 것은 흥미롭고 당혹스럽지만, 또한 유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언제부터 어떻게 왜 대단히 소심한 교회 투쟁의 궤도에서 정치적 저항의 궤도로 옮겨갔는가? 그는 무엇에 반대하여 정치적 저항을 열망했는가? 그는 어느 “동아리”에서 돌아섰는가? 그는 어떤 정치적 견해와 가까웠는가? 그는 당시 어떤 삶을 원했고, 어떤 미래를 기대했는가? 그의 평일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는 무엇으로 생계를 이어갔는가? 그가 국경을 왕래하면서 받은 “정신적 피해”는 어느 정도였는가? 그는 자칭 육군 정보국 정보원이자 히틀러 암살 음모의 실질적인 밀사로서 자신의 모호한 지위를 얼마나 잘 수행했는가? 겉보기에는 그의 뜻에 따른 것이었지만, 왜 하필이면 군 첩보 활동이어야 했는가? 그는 저항 세력 내에서 실제로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의 임무는 무엇이었는가? 성과는 무엇이고, 실패는 무엇이었는가? 그 끝에서 어떤 시작이 이루어졌는가?
나는 위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이 자리에서 간략하게만 스케치하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답변 가운데 하나가 이미 에버하르트 베트게의 펜 끝에서 나왔다. 거의 40년 전에 베트게는 근본적인 전기에서 이렇게 썼다. “저항 그룹 내에서 본회퍼가 차지하는 지위의 정치적 의미는 높게 평가되지 않는다.” 당시에 베트게는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독일을 위한 설계 및 그 헌법 형식과 연관지어 볼 때 본회퍼는 암살 음모에 비교적 미미하게 참여했을 뿐이다.” 그 후 본회퍼 연구 분야와 저항운동 연구 분야에서 원전들과 주석들, 자료들과 분석들, 단편들과 전기들 같은 다수의 새로운 연구결과가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온다. 명시적으로 드러난 본회퍼의 저항활동 단계들을 재구성함으로써 여러 가지 성과를 올리게 된다. 본회퍼의 저항활동을 재구성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제3 제국” 안에서 이루어진 독일 국내의 저항운동을 체제 전복 계획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회퍼의 저항활동을 재구성하여 얻은 성과 가운데 몇 가지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본회퍼가 저항운동에 참여하게 된 주요 동기는 그가 나치 독일 내에서 병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히틀러에 대한 충성맹세를 거절한 것과 관계가 있다. 그의 신앙과 그의 신학에 바탕을 둔 그러한 거부는 당시 일반은 물론이고 교회 집단 안에서도 규칙이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예외였다. 병역 거부는 그를 서서히 공모자 무리 근처로 이끌었다. 1939년 여름, 그는 “구원의 물가”인 미국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지만, 눈을 질끈 감고 귀국을 결심했다. 그의 매형이자 친구인 한스 폰 도나니가 병무청의 체포와 사형으로부터 본회퍼를 지키기 위해 특수 조직을 계발했다. 육군 정보국 인사과장인 한스 오스터가 본회퍼에게 민간 필수 요원이 되라고 꼬드기고, 본회퍼가 군무 수행과 관련하여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해명되도록 힘을 써주었다. 본회퍼는 육군 정보국 민간 정보요원이 되어 직무를 수행했다. 한스 오스터와 한스 폰 도나니는 해외정보과와 군 첩보 활동 영역에서 저항 그룹을 조직하는 “단단한 핵심”이었다. 저항 그룹은 한스 오스터의 상관인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의 동의 내지 인지 하에서 행동했다. 저항 그룹의 수장은 전직 육군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였고, 저항 그룹의 “민간 초소 우두머리”는 칼 괴어델러였다. 그리하여 본회퍼는 독일에 현존하던 저항활동들의 폭넓은 스펙트럼 내에서 보수적이고 시야가 좁은 측과 한패가 되었다.
처음에 본회퍼는 명시적인 임무를 맡지 않았으며 정보국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유 협력자”로 간주되었다. 그는 유럽 국가 및 북미 국가와의 탁월한 관계로 인해 그리고 그가 받고 있던 “호평”으로 인해 분위기를 파악하여 전달하는 요원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본회퍼는 사실상 정보국 밀사로 활동한 적이 없다. 그러한 보호막에 싸여 그는 1941/1942년에 스위스 여행과 스칸디나비아행을 감행했다. 그곳에서 영국행을 위한 접촉을 매듭지었다. 독일 국내의 저항운동 실정을 알리고, “적국”에서 저항운동을 선전하고, 쿠데타를 모의할 테니 “교전”을 중단할 의향이 있는지 떠보는 것이 중요했다. 얻은 게 없었지만, 본회퍼는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그것은 다른 문맥에서 사무엘 베케트가 말한 것처럼 “거듭 시도하고, 거듭 실패하고, 더 잘 실패하는 것”을 의미했다. 본회퍼의 체제 전복 “선전활동”의 정점은 1942년 5월말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스웨덴 여행이었다. 그가 스웨덴으로 여행한 것은 영국 외무성에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친구이자 영국의 주교인 조지 벨에게 군사적 저항을 모의하는 “말과 기사(騎士)”의 이름을 알려주고, 그들이 혁명을 준비하고 있으며 최소한 서방연합국의 소극적인 지지라도 얻기를 바라고 있다고 알리기 위해서였다. 스스로를 영국 정부의 진정한 대화 상대자로 여기고, 영국 정부가 자신을 대등한 눈높이에서 대해주리라고 생각한 것은 비참하게도 자기 오해에 속한 것이었다.
런던의 인사들이 본회퍼가 “누설한” 사람들의 이름을 무슨 이유로 신뢰하겠는가? 그가 거명한 사람들의 무리에게 무슨 이유로 유예기간을 약속하겠는가? 영국인들은 침묵으로 답했다. 당시의 상황에서 대화나 엄호를 기대한 것은 처음부터 현실을 오인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본회퍼와 저항”이라는 주제와 씨름하다보면 또 다른 폭발적인 문제들이 나타난다. 저항은 유럽의 유대인들을 겨냥한 인종 말살 정책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저항은 독일 군대가 가담한 인류에 대한 범죄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본회퍼와 저항을 수용하여 신화를 만들려고 하는 모종의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스 몸젠은 이렇게 평가한다. “정부를 저지하고, 박해정책을 공격하는 활동은 오스터와 도나니와 본회퍼를 둘러싼 그룹, 곧 크게 고무되어 대단히 적극적으로 활동한 그룹에서 먼저 주도되었다.” 게다가 당사자들도 당시에 유익한 일을 하면서 진지하게 행동했다고 말했다.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잔인한 명령이 내려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소수의 사람들을 구할 수는 있다.” 한스 폰 도나니는 이렇게 말했다. “디트리히와 나는 정치가의 신분으로 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진실한 인간의 불가피한 활동이었을 뿐이다.”
“평범한” 나날 속에서 음모의 밀사가 되어 행했던 본회퍼의 다양한 시도는 학살 기계의 톱니바퀴에 낀 모래알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한 시도들의 다양한 면은 그다지 외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스 폰 도나니나 한스 오스터 혹은 “크라이사우어”의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가 정치적 저항에 가시적으로 참여한 것이 훨씬 뛰어났다. 그 이유는 본회퍼의 신분과 역할 때문이었다. 본회퍼의 참여는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잔인한 국가권력에 맞서는 구체적 저항을 합법화하고, 자유롭게 풀어주어 행동에 옮기게 하고, 암살 기도 문제에 직면하여 의식적으로 책임을 떠맡는 것, 그것이 그의 참여였다.
그는 자기 나름의 저항을 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생명력으로 사람들을 고무한 것 같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생명력을 일컬어 “희망의 능력”이라고 썼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포기하는 자리에서 머리를 곧추 세우는 능력, 모든 것이 실패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미래를 적의 손아귀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요구하는 능력”이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현실성이 이미 세워진 죽음의 나라의 현실성보다 훨씬 고귀하다는 것이 증명되리라는 확신에 뿌리내린 것이었다. 그가 한패가 되었던 저항 그룹에 대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이 말해서는 안 된다. “단 한 명의 성직자도 그 저항 그룹과 동행하지 않았다.”
출처_ Zeitzeichen 200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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