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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에코페미니즘

[스크랩] 심층생태학-생태여성주의 논쟁과 노장사상

by 마리산인1324 2007. 1. 28.


『동서비교문학저널』 1998  창간호 179-202

 

 

"오래된 미래": 심층생태학-생태여성주의 논쟁과 노장사상

 

 

신  두  호   삼척산업대학교

 

 

 

I. 우주론과 젠더

 

젠더라는 개념은 여성주의자들이 기존의 남성과 여성간의 본질적인 성적 차이에 대한 보편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기존의 성간의 차이에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온 것으로, 여성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중심 주제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제는 외견상 젠더와는 관계가 없을 듯이 보이는 인간사고의 많은 영역에 걸쳐 젠더의 존재를 밝히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젠더 연구에서 제기되는 질문이 "젠더 개념이 얼마만큼 이미 주어진 보편적인 형이상학적 혹은 본체론적 가정을 반영하거나 상징화하는데 공헌하는가" (Black 166)라는 점에서 볼 때, 우주론적 관점 또한 이러한 젠더 연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한 사회의 우주론적 관점은 대개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되며, 또한 이 우주론적 관점은 그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의 형성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히 서구의 우주론과 이 우주론의 틀 안에서 성격이 결정된 자연관에 나타난 젠더는 서구의 인간중심적, 가부장적인 인식론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 최근 생태학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가이아(Gaia)-우라노스(Uranos) 신화는 여신이 남성 신에 의해 정복된다는 이야기로서 여성이 대지, 물질과 연관되어있다는 점이 분명히 나타난다.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는 태모신으로 모든 신과 인간과 사물의 태초의 어머니이긴 하지만, 자신의 남편, 자식, 자손이 서로 싸우고 죽이고 복수하는 과정에 개입하고 부추키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며,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데 스스로의 힘으로 하지 못하고 남성 신들의 힘을 빌려 이루려고 하는 남성 의존적인 나약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사실 가이아는 자신의 자식인 하늘의 신인 우라노스와 결합함으로서 자신의 힘을 자식 겸 남편인 남성 신에게 이양하게 되고 결국은 남성 권력의 체계 속으로 자신을 굴복시킨 셈이다.

 

서구문화의 인식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유태-기독교 사상도 인간중심적이고 가부장제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반생태적 사고의 뿌리로서 자주 지목되는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은 오직 인간만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 땅을 "정복"하고 하늘, 바다, 땅 위의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선악과를 따먹은 벌로서 이브에게 출산의 고통과 남편을 모시고 남편으로 하여금 다스림을 받을 것을 명한다. 이러한 구약성서의 창조설화에 막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바빌로니안 창조설화도, 남성이 여성을 정복함으로서 우주를 창조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창조설화에 따르면, 혼돈의 상징이자 바다의 여신인 티아마트(Tiamat)는 자신 안에서 무엇인가가 빠져나가 혼돈을 파괴시키며 우주적인 질서를 짜는 것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혼돈의 괴물을 풀어 모든 질서를 파멸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그녀의 후손인 뭍의 남성 신 마르두크(Marduk)는 티아마트를 물리치고 질서를 세워 우주를 창조한다. 이러한 혼돈스러운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이야기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주된 내용이다. 태초에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혼돈의 우주에 남성 신 하느님은 빛을 주어 낮과 밤을 나누고, 하늘과 땅으로 나누고, 천하의 물을 한 곳에 모이게 하여 바다와 뭍으로 나누고, 하늘, 땅, 바다에 생물을 만드는 식으로 질서를 부여한다. 질서의 하느님은 질서를 위협하고 혼돈을 야기하는 자연(물)은 가차없이 정복한다. 영웅들이 여성의 형상을 한 상징화된 동물--흔히 뱀이나 용--을 살해함으로서 혼돈을 정복하는 주제가 옛 많은 영웅 이야기에서 목격되듯이, 시편 74편 13-14절에 하느님이 "바다의 용들의 머리를 부수고," "레비아탄(Leviathan)의 머리들을 부수라."고 명하는 것도 혼돈의 힘에 대항한 질서의 하느님의 모습이다. 서구의 우주론을 구성하고 있는 이와 같은 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질서를 부여함으로서 자연의 혼돈적이고 결핍된 영역에 대한 통제의 이야기는 서구 문화의 주된 이야기가 되어왔다"(Plumwood 74).

 

본질적으로 자연을 원초적인 무질서 (혼돈)로 보는 Plato는 이러한 혼돈스러운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이성 혹은 로고스(logos)라 보고 있다. 그런데 Plato에게 있어서 여성은 이성과는 정반대인 무정형하고 제멋 대로인 물질, 혹은 원초적인 무질서 즉, 혼돈과 연계되어 있고, 남성은 이성과 로고스와 연계되어 있다. 정신과 육체의 명백한 이원론을 주장하는 Plato에게 있어서 신성하고, 불멸하고, 이성적이고, 일관되며 하늘을 거주지로 삼고 있는 정신이 유한하고, 비이성적이고, 변화하며 지구를 거주지로 삼고 있는 육체를 지배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러한 지배는 곧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일 뿐만 아니라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서구의 우주론과 자연관에 나타난 젠더의 양상은 여성과 자연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여성과 자연은 우월한 남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서구 우주론은 "남성지배를 담보하기 위해 성간의 극적인 대립을 필요로 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한 표현"(브라이도티 79)으로서의 "젠더체계 (gender-system)"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우주론은 이 후의 대다수 철학자, 과학자, 신학자들에 의해 전승되어 서구 문화의 지배 담론이 되어 왔다.

 

이와 같은 서구 우주론에서 보여지는 남성 신의 자연, 물질, 여성에 대한 부정과 정복은 남성의 자아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성들은 자신을 남성 신과 동일시하여 자신을 불멸의 정신의 영역 속에 위치시킴으로서, 자신을 유한하고 부정적인 자연, 물질, 여성 세계--즉, 자신의 종속성을 상기시켜주는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만듦으로서 자율적인 개체로서의 자아를 형성한다.1)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남성 신을 만든" 남성들은 남성 신을 통해 여신과 야수의 모체를 정복하고 살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유기적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자율적이고 개별적인 정체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2) Michael Zimmerman이 "자아가 여성과 육체, 자연을 맹렬히 억압한 것은 자아의 궁극적인 종속 상태를 비례적으로 시사해 준다." (227)라고 지적한 것처럼, 남성의 자율성에 대한 열망은 남성도 그만큼 자연, 육체, 여성에 매여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준다.

 

이러한 서구의 우주론과 이 우주론에 나타난 젠더 양상에서 보여지는 특징은, 첫 째,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태도가 지배와 정복으로 나타나는 인간중심적이라는 점이고, 둘 째 남성의 자연과 여성에 대한 태도가 부정, 지배, 억압으로 나타나는 남성중심적이라는 점이며, 셋 째, 인간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 사고는 여성과 자연을 부정하고 억압함으로서 남성의 허구적인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자아형성을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생태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억압이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억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생태계 문제 해결과 남녀의 불평등 문제 해결은 서로 연결 지어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3)

 

심층생태학과 생태여성주의는 다 같이 서구의 우주론에 반영되어 있는 자연에 대한 인간중심적 태도를 비판하고 바람직한 자연-인간 관계를 다시 세우지만, 서구 우주론에 나타난 젠더 양상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심층생태학은 남녀불평등 문제는 도외시한 채 자연-인간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관계에 대한 관심만을 표명하며, 생태여성주의, 특히 본질론에 기초한 문화생태여성주의는 여성의 생물학적 우월성에 기초한 여성 지배적 관점을 보여준다. 심층생태주의-생태여성주의 논쟁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태도는 생태계 파괴와 남녀불평등 문제 해결에 각자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 준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모델은 노장사상의 우주론과 이 우주론에 나타난 젠더 양상에서 찾아질 수 있다.

 

 

 

II. 심층생태학-생태여성주의 논쟁

 

서구의 우주론에서 보여지는 인간중심적, 가부장적 개념구조는 이원론적인 가치계급적 사고를 만들어내어 상호 관계적이고 보완적이어야 할 대상간의 관계를 상호 배타적, 비교 우위적으로 봄으로서 지배 논리를 정당화하여 작금의 환경파괴 문제, 남녀 불평등 문제를 초래했다. 특히 생태학적 관심의 고조와 더불어서 생겨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운동인 심층생태주의와 생태여성주의는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인간의 자연과의 분리와 지배를 야기시킨 서구의 기본 인식인 원자주의, 계급 체계적인 이원론, 합리성의 추구와 같은 서구의 개념 구조를 해부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두 운동은 공동의 목표를 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보다는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그 이유는 생태계의 위기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진단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심층 생태주의자들은 생태계 파괴의 원인을 인간중심주의, 생태여성주의자들은 남성중심주의에 돌린다.

 

양자사이의 논쟁은 주로 에코페미니즘의 심층생태학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는 약간 일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4)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생태여성주의자들에게 공통된 기본주장은 여성과 자연이 가부장제 하에서 똑같은 지배논리에 의해 억압, 착취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여성과 자연의 이러한 굴레에서의 해방 역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한다. 생태여성주의자들의 근본적이고 공통적인 심층생태학에 대한 비판은 Zimmerman이 분명하고도 간략하게 제시하고 있다: "심층생태학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은 자연에 대한 지배의 실제 뿌리는 남성중심주의(androcentrism)인데 심층생태학은 그 뿌리로서 중성적인 (gender- neutral) 인간중심주의 (anthropocentrism)를 내세우고 있다"(37).5)

 

생태계 위기 해결을 위해서 심층 생태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친생태적인 대안적 개념들--예를 들어, 심층생태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Arne Naess와 Bill Devall이 심층생태학적 패러다임으로 제시하는 인간은 자신의 환경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일부라는 관계적인 전체영역 이미지(relational total- field image), 모든 생명체간의 생물학적 평등주의(biological egalitarianism), 살아있는 생명체간의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호공존의 태도인 다양성과 공생의 원리(principle of diversity and symbiosis), 개인적, 그룹적 차원에서 한 쪽의 타 대상에 대한 지배와 착취에 반대하는 "반계층 태도(anti-class posture)"--은 반인간중심주의적인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심층 생태주의자들은 현대의 생태계 위기를 초래한 원인을 성구별을 초월한 보편주의적 "인간" 조건에서 찾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지엽적"으로 보이는 성구별에 따른 불평등 같은 문제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남성-여성간의 불평등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생태여성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해 심층 생태주의자인 Warwick Fox의 반응에는 이런 점이 잘 드러나 있다. 확스는 환경위기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이 남성중심주의에 있다는 생태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은 인간 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면 평등한 사회가 형성되고 그러한 사회는 자연히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도 평등하고 조화롭게 된다는 사회생태론과 맥을 같이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비인간 세계는 중요한 행위--인간행위--가 이루어지도록 바탕을 제공하는 배경으로서의 전통적인 위상을 유지"(17)하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중심주의적 견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심층 생태주의는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강화시키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요인들을 너머서 "보다 넓고, 생태중심주의적인 관점"을 제시하기 위해 보다 포괄적인 개념인 인간중심주의 비판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주장한다.

 

한편 생태여성주의자들은 대부분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는 심층생태주의자들이 은연중 가부장제적 편견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타파할 대상으로 지목하는 인간중심주의 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가부장제적인 함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심층생태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중심주의 개념은 생태여성주의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인간중심주의] 개념은 인간이 구별화 되지 않은 전체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어서 남성과 여성 . . . 사이의 역사적, 정치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여성을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배제하지 않음으로서 심층 생태주의자들은 자연보다 우위에 있고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men)을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인간중심주의적인 존재라고 은연중 비난한다"(Janet Biehl 2A).

 

가부장제 문화에서 인간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여성은 제외된 채 남성에 의해서 대표되어 왔기 때문에, 자연의 파괴와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토대를 마련해준 인간중심주의 사고는 곧 남성중심주의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생태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자연지배의 근본원인은 남성중심주의라고 주장된다. 인간중심주의가 곧 남성중심주의이고 이것이 자연파괴에 책임이 있다는 생태여성주의의 주장은 그 근거를 남성의 자아의식에 두고 있다.6)

 

생태여성주의자들은 심층생태주의자들이 자연에 대한 지배를 인간중심주의로만 파악하고 인간중심주의 개념 속에 내재된 이러한 남성중심주의를 애써 외면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많은 생태여성주의자들, 특히 문화생태여성주의자들로 알려진 이들은 남성의 여성과 자연에 대한 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복과 지배의 가치를 중시하는 남성적 개념의 자아가 새로운 자아로 대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관계성을 중시하고 비폭력적이며 포용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여성적(feminine)" 자아 개념을 제시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다음과 같은 Susan Griffin의 묘사에서 잘 보여지듯이 남성과는 달리 여성은 자연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과 자연의 관계를 다룬 고전적인 저서인 Women and Nature: The Roaring Inside Her에서 그리핀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의 어머니의 손이 이 대지로 빚어졌고 그녀의 꿈이 이 대지로부터 만들어 진 것과 같이, 나도 내가 이 대지로부터 만들어 진 것을 안다. 그리고 지금 이 논문, 이 손, 말하고 있는 입, 내가 아는 이 모든 것이 대지를 통해 나에게 말하고 있고 그리고 당신들도 역시 이 대지라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을 서로에게 들으라고 말하고 싶다: 빛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227)

 

여성이 대지와 친밀히 연결되어 있다거나 대지의 일부분이라는 느낌 즉, "자연에 대한 몸으로 느껴지는 직관적인 관계성"을 강조하는 생태여성주의자들, 특히 60년대, 70년대의 급진 페미니즘의 전통을 이어가는 문화 생태여성주의자들(cultural ecofeminists)은 공통적으로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한다. 남성위주사회 속에서 여성적인 특성이 남성적인 특성에 의해 무시되어오거나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어져 왔다고 인식하는 이들은 남성적인 것--예를 들면, 과학적, 합리적 사고 방식, 진보적 태도, 자기중심적 배타주의, 경쟁적 독단, 물질주의--이 자연을 통제하고 억압하여 황폐하게 만들었으니, 이제는 여성적인 것--예를 들면, 본능적인 접근, 포용적이고 이해심 있는 태도, 자신보다 전체를 생각하는 이타적 사고--으로 대체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억압과 지배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과 지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이러한 자연과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억압과 지배를 끝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여성적인 문화의 등장이 필연적이라는 주장은 생태여성주의 문학의 큰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여성과 자연의 관계의 성격과, 여성-자연 관계가 양자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에 과연 도움이 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태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견해를 달리하고 있듯이, 생태여성주의 작가들도 위 문제에 대해서는 작품 안에서 각기 다른 견해를 보여주고 있으나, 대개 여성/자연은 파괴적인 남성/문명과는 대조적인 짝으로 대비시켜, 여성의 자연과의 조화롭고 평화로운 관계를 그리고 있다. 여성/자연 대 남성/파괴적 문명이라는 관계 설정은 생태여성주의 작가들이 그들의 공통적인 관심사항인 인간에 의한 환경파괴와 가부장제 하에서의 여성의 처지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다.

 

여성에 대한 지배와 환경파괴 사이의 상관 관계를 작품의 중심주제로 다룬 본격적인 생태여성주의 소설의 시작은 Margaret Atwood의 Surfacing (1972)에서 보여지지만, 여성이 자연과 친화적이라는 주장과, 남성의 자연에 대한 억압과 여성에 대한 억압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생태여성주의 소설 중 특히 소위 1970년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feminist utopia) 계열의 작가들에게서 그 경향이 두드러진다. Joanna Russ의 Female Man (1975), Marge Piercy의 Woman on the Edge of Time (1976), Sally Miller Gearhart의 The Wanderground (1979)로 대표되는 이들은 유토피아를 여성들만, 혹은 여성적인 원리를 가진 인간만이 사는 친생태적인 사회로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세의 디스토피아 세계를 파괴를 일삼은 남성들만의 혹은 남성적인 원리를 가진 인간들이 살아가는 자연이 황폐화된 세계로 병치시키고 있다. 이들 작품 외에도 Ursula Le Guin의 Always Coming Home (1985), Alice Walker의 The Temple of My Familiar (1989) 같은 작품은 단일 성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성(적인)원리가 지배하는 평화롭고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세계와 남성(적인)원리가 지배하는 전쟁을 좋아하고 통제적이고 환경 파괴적인 세계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여성들의 세계를 대안 세계로 제시하고 있다.

 

생태여성주의자, 특히 문화 생태여성주의자들의 입장과 생태여성주의 소설 세계는 본질론적 접근이라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즉, 여성과 자연이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입장은 사실화되어, 여성적인 원리가 친생태적이므로 생태위기의 시대에 반생태적인 남성적인 원리를 대체해야 하며 여성들이 생태계를 파멸로부터 지키는데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론적 주장은 여성(적인 특성)과 남성(적인 특성)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라고 보는 사회 생태여성주의자들의 비판에서 보듯이, 그 동안 여성주의가 극복하려고 노력해온 남성-여성의 가치 체계적인 이원론적 구조를 단순히 역전시켜 여성 지배적 구조로 다시 세우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본질론적 주장의 문제점은 남성적인 특성과 여성적인 특성, 이에 따른 남성과 여성을 서로 분리된 상극적인 존재로 보고 한 쪽이 다른 쪽 에 대해 우월 의식을 갖거나 특권의식을 갖는 데서 기인한다. 심층 생태주의자인 Fox도 생태여성주의의 이러한 젠더 구분에 따른 이원론적인 태도가 모든 남성들이 한결 같이 생태계 파괴에 똑같이 책임이 있고, 모든 여성들은 한결 같이 그러한 책임에서 벗어나 있다라는 식의 단순논리를 비판하고 있다(1989: 16). 건강한 환경유지에 도움을 주는 가치를 포함한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이나 특성이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오직 여성에게만 부여된 특권이라는 주장은 남성들로 하여금 환경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 수 있는 환경 파괴적인 요소 또한 지니고 있는 것이다.7)

 

생태여성주의자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를 이분법에 근거한 가치체계적 관계로 보지 않고, 자아를 자연의 연속체로 보면서 자연과의 사랑, 돌봄, 우정 관계를 회복할 것을 강조하면서 인간/자연을 관계적 존재로 새로이 보는 틀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과 남성 관계를 다루는 데서는 억압당하고 지배당해온 여성성의 가치 회복과 여성 지배적 프로젝트를 위해 서구 우주론에 반영된 가부장적 위계를 전략적으로 역전 시켜 사용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 심층생태주의자들은 무의식적으로 혹은 고의로 서구 우주론에 내재된 젠더 양상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인간중심주의 개념 안에 내재된 가부장제적인 요소에 대해 애써 도외시한다. 또한 그들의 자아 개념은 그간 생태계 파괴의 논리적 토대가 되어온 인간과 자연과의 가치 체계적인 이원론적 관계를 무너뜨렸음에도 불구하고,8) 확장된 자아와 초월적 자아 (Self)의 강조는 자칫 자연에 대한 기존의 남성적 관점을 그대로 유지하고 우리 주변의 구체적인 자연에 대한 경시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9)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심층생태학과 생태여성주의는 각자 서구의 우주론적 관점인 가치체계적 이분법과 전복된 가치 체계적 이분법에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Zimmerman의 지적대로 여성과 남성이 똑같이 가부장제의 영향력 하에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239). 생태계 위기에 직면하여 심층생태학과 생태여성주의는 생태계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이러한 가부장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인간/자연 뿐만 아니라 여성/남성을 상호 관계적 존재로 인식함으로서 각자의 이러한 한계를 넘어야 한다. 노장사상에서 보여주는 우주론과 이 우주론에 내재되어 있는 젠더 양상은 가부장적 관점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관계적 존재의 틀을 보여 줌으로서 심층생태주의와 생태여성주의의 각자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 모델이 될 수 있다.

 

 

 

III. 노장사상의 성구별에 따른 우주론과 자연관

 

서구의 가이아-우라노스 짝에서 살펴본 대로 성구별에 따른 우주관이 서구 전통에서 존재하듯이, 동양사상에서도 우주관은 성구별의 관점에서 설명되어 진다. 서구의 원형적인 짝인 가이아-우라노스에 상응하는 동양의 원형적인 짝은 도교에서 西王母-東王公이다. 서왕모는 서방의 순수 음 원리인 여성 기 (음기)를 다스리고, 동왕공은 동방의 양 원리인 남성기 (양기)를 다스린다. 이 둘은 합하여 하늘과 땅 그리고 만물을 만들어 낸다. 도교와 유교의 우주관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주역도 세상 만물의 생성원리를 남성과 여성의 원리인 양기와 음기의 화합으로 설명한다. 주역의 繫辭下傳 5번과 6번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천지의 기운이 화합하여 만물이 생기고, 남녀가 정기를 합하여 만물이 자라난다."; "공자는 말하기를 乾坤은 易의 문인가? 건은 陽物이다. 곤은 陰物이다. 음과 양이 덕의 기운을 합하여 剛과 柔의 體가 있다. 이것으로 천지의 모든 일을 본받고, 이것으로 神明의 덕을 통한다." 노장사상에서도 우주창조와 우주의 구성이 천/지, 음/양, 남성/여성 이미지와 같은 대조적인 개념으로 짝지어진 용어로 설명되고 있다: "지극한 음의 기운은 엄숙하고 차며, 지극한 양은 번쩍이며 뜨거운 것이오. . . . 이 음양의 두 기운이 서로 통하고 화합하여 만물을 발생시키네"(장자 "田子方").

 

우주관과 자연관에 나타난 남성적 특성과 여성적 특성10)은 동서양 모두에서 일관되어 왔다. 과학적 사고, 객관성, 정신. 이성, 지식은 남성적인 특성과 연관되어 왔고, 비과학적 성질에 기반을 둔 느낌, 직관, 감각적 경험, 주관성은 여성적인 특성과 연관되어져 왔다. 이러한 성구별에 따른 특성은 계급체계적이고 남성본위적이어 왔던 서구와는 달리 동양사상에서는 여성적인 특성은 서양과는 달리 남성적인 특성보다 열등한 것으로만 인식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노장사상에서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인간의 행동에서 여성적인 특성이 남성적인 특성보다 인간이 지녀야할 더 나은 덕목으로 권장되었다. 자연의 원형적인 두 극인 음과 양은 각기 대지와 하늘, 여성과 남성과 연계되어 있다. 자연의 도를 이해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데 있어 더욱 진실 되고 중요한 것은 노장사상에서 남성적인 특성보다도 여성적인 특성--직관적, 양생적, 양보적, 부드러움--이라고 강조한다. 노자 철학에서 여성은 대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여성적인 특성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생명력은 포용력, 부드러움, 양보, 유약함과 같은 여성적인 특질이 거부, 딱딱함, 경직, 억셈과 같은 반생명적인 남성적인 특질과 대비되어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도덕경 76장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람은 갓났을 때는 유약하지만, 죽어서는 단단하게 된다. 초록도 갓 자랐을 때는 부드럽지만 죽을 때는 말라서 죽게 된다. 고로 억세고 굳은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따라서 여성적인 특질은 남성적인 특질보다도 우월할 뿐만 아니라 남성적인 특질을 정복한다: "그런고로 무력이 강하면 결국 이기지 못하고, 나무도 억세면 결국은 잘리고 만다. 강하고 큰 것은 결국 밑에 깔리게 마련이고, 유약한 것이 결국은 위로 오르게 마련이다."

 

만물의 원리로서 도는 수용성과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함 같은 여성적인 특질로 기술되는데 이러한 특질은 자주 계곡이나 물과 같은 상징이나 무위와 같은 개념에 의해 묘사된다.11) 물은 항상 자신을 아래로 낮추고 자신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노자의 일관된 관점에서 물은 이 유약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지만 남과 지위를 다투는 일이 없어서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지대에 고여 있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8장 "易性"). 그러나 이러한 유약한 물은 어느것 보다도 강하다.12) 따라서 물과 같이 되는 것은 무위자연의 도를 따르는 것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수용하는 태도의 정점은 무위자연의 도를 따르는 것으로 이러한 사람은 성인이라 칭할 수 있다. 성인은 다양한 만물을 무위자연의 태도로 대한다: "무릇 천하의 만물은 각양각색이라. . . .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자연의 도를 따라>항상 과격한 짓을 안하고 사치를 물리치고 교만을 삼간다"(29장 "無僞").

 

이러한 수용성과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여성적인 특성을 높이 평가하는 노자는 여성적 특성과 정반대의 분별적이고 지적인 남성적인 특성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별지가 인위적인 조작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대도가 쇠진함으로서 인의의 도덕이 나타났고, 지혜를 짜냄으로서 인위적인 僞計가 있게 되었다"(18장). 이러한 인위적인 행동은 부자연한 것이다13): "발돋움하면 제대로 오래 설 수가 없고, 가랑이를 마냥 벌리고 걷는 자는 제대로 마냥 보행할 수가 없다"(24장). 따라서 무위자연의 도를 따르는 성인은 인위적 태도를 버린다: "그러므로 무위자연의 도를 터득한 성인이 다스릴 때에는 오직 생명의 근원인 배를 실하게 채워주는 일만을 할 뿐, 사특한 빛을 쫓는 눈을 위하는 인공적인 작위를 꾸미지 않는다. 성인은 외형적 감각세계를 버리고 내실적 무위자연을 취한다"(12장 "檢欲").

 

인위적인 태도는 도에서 벗어난 행동이고 따라서 인위적 태도에서 나온 강압적인 행위는 만물의 생성원리이자 존재원리인 도를 파괴하는 것이어서 자연의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고 결국 자연파괴를 초래한다. 노자는 천하만물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모든 것을 자기에게 억지로 맞추어 만물의 자존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조작하면 만물이 망가진다고 경고한다: "천하를 취해 가지고 백성을 강압적으로 다스리려 하지만, 나는 불가능하다고 내다본다. 천하는 신통한 보물이다. 억지로 다룰 수도 없고 움켜쥘 수도 없다. 억지로 다루려면 망가지고 움켜지려면 없어진다. [따라서 성인은 무위로 처하므로 망가뜨리지도 않고 움켜쥐고자 하지 않으므로 잃지도 않는다.]" 만물은 대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잘 자란다. 인위적인 조작은 만물을 일찍 멸망하게 한다: "만물은 억지와 포악을 부리면 노폐하게 마련이니, 이것이 바로 무위자연의 도에 어긋나는 일이다."(55장 "玄符")

 

장자의 <內篇> "應帝王"에 나오는 숙과 홀의 혼돈에 구멍 뚫는 이야기는 노장사상의 우주론에 나타난 자연관이 혼돈에 인위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서양의 우주론과는 얼마나 다른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남해의 임금을 숙(숙)이라 하고, 북해의 임금을 홀(忽)이라 하며, 중앙의 임금을 혼돈(渾沌)이라 하였다. 숙과 홀이 어느날 혼돈의 땅에서 만났을 때 혼돈이 그들을 위하여 잘 대접했다. 그래서 숙과 홀은 서로 상의하여 혼돈의 덕을 갚으려 했다. '사람들은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쉬고 하는데 이 분만 홀로 없으니 시험삼아 뚫어 주자'하고 하루 한 구멍씩 뚫어 칠 일이 되니 혼돈은 죽고 말았다." 이 우화에서 숙과 홀은 인위적 지배를 상징한 것이고, 혼돈은 인간의 지혜로는 다다를 수 없는 자연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우화를 통해 장자는 인간의 작위와 분별이 자연의 일체 존재의 생명을 억압하고 질식시키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노장사상에서 이와 같은 인위적이고, 분별적이고, 강압적인 남성적 원리는 여성적 원리의 총체인 도를 억압하고 또한 자연 만물을 파괴시킨다. 인도의 생태여성주의자인 Vandana Shiva의 지적대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여성적 원리의 죽음은 여성들에 대한 "주변화(marginalization), 가치하락(devaluation), 자리박탈(displacement),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없어도 그만(dispensability)"의 시작이며, "생태학적 위기는 그 근원에 있어 여성원리의 죽음이다"(42) 이것은 생태여성주의자들의 공통된 주장인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노장사상도 생태여성주의적 관점을 드러내 준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여성적인 원리에 기초한 태도를 갖출 것을 요구하는 노장사상의 우주론과 자연관은 심층생태주의와 생태여성주의가 추구하는 반인간중심주의와 반남성중심주의를 반영한다.

 

노장사상에서 여성(적인 특성)과 자연이 연계되는 것은 특히 자연 만물이 여성적인 원리에 의해 운행된다는 점을 통해서 드러나며, 노자는 우주의 창조 운행을 기술하는데 남녀의 생물학적 기능에 근거를 두고 어머니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노장철학의 핵심 용어인 도는 도덕경에서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운행시키는 원리로서 어머니 이미지로 기술된다. 道德經 제 1장 "體道"편에 보면, "말로 표상해 낼 수 있는 도는 항구 불변한 본연의 도가 아니고, 이름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다운 실재의 이름이 아니다. 무로서의 (도는) 천지의 시초이고, 유로서의 (도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제 6장 "成象"은 형체를 띠지 않으면서도 무궁무진하게 만물을 창조해내는 신비스러운 도를 여성적 이미지로 잘 그려내고 있다: "골짜기의 여신은 영원히 죽지 않고 만물을 창조해 낸다. 이를 현빈이라 한다. 유현하고 신비스러운 여신의 문이 바로 천지 만물의 근원이다. 골짜기의 여신은 보이지 않고 없는 듯 하면서 있고, 그 작용은 무궁무진하다."

 

도의 원리가 이와 같이 낳고 기르는 "여성의 일"로서 기술되고 있는 점은 노장사상에 대한 여성주의적 접근을 가능케 해주는 점이다. 왜냐하면 가부장적인 서구사회에서는 소위 "여성의 일"로 분류되어온 출산, 육아, 돌봄과 같은 일들은 많은 힘과 높은 정신적인 능력이 요구되는 소위 "남성의 일"에 비해 가치가 덜한 것으로 여겨져 왔으나, 노장사상에서는 아주 중요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생태여성주의는 모성 (mothering)을 중시하는데 그 이유는 이 모성에 의한 행동이 서구 사회에서, 그리고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오랫동안 대립적인 관계로 인식되어온 자연/문화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때문이다. 즉, 여성들은 자연상태의 유아를 키워 사회로 들어가게 하는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Ynestra King의 지적대로 "비사회화되고 미구분화된 인간 유아를 성숙한 인간으로 양육하는 과정--유기체의 사회화--은 자연과 문화를 연결짓는 다리가 [되며] . . . 따라서 역사의 주체로서의 여성의 중요성은 전통적인 여성활동--즉, 양육과 요리, 치유, 원예, 동물 사육 등--이 자연적인 만큼 사회적 활동이라는 데 있다"(185). 생태여성주의자들은 이러한 여성들의 일상적인 것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갖고 있으며, "생태여성주의자들에 의해 제공된 통찰은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의 일'로 정의된] 일에 참여하고, 타자 세계로의 동정적인 출입을 행하도록 기대되어진 여성들이 . . . 일상적인 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형적인 여성의 일을 통해 "새로운 생태적 자아가 발전할 수도 있다"(Curtin 212).

 

이것은 노장사상에서 우주천지의 원리인 형이상학적인 도에 대한 깨달음은 추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향하는 성질을 가진 물의 흐름과 같은 자연(의 진행)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점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도의 진리는 물질 세계의 움직임 속에 반영되어 있고 물질 세계 (자연)를 접하고 있는 인간은 매일 같이 영위하는 구체적인 일상 생활에서 그 진리를 포착하기 때문이다: "만물이 다같이 생육화성하지만 허정한 도를 터득하고 지키는 나는 만물이 근원에 되돌아감을 볼 수가 있다.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나, 결국은 모두가 다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다"(16장 "歸根"). 이러한 구체적인 자연에서 진리 찾는 노장사상은, 정신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추상적인 서구 사상과는 달리,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도 높인다: "나에게 큰 환난이 있는 까닭은 나의 몸을 위하기 때문이다. 나의 몸을 없게 하면 어찌 환난이 있겠느냐? 그런고로 자연의 도를 따라 스스로 존재하는 자기 몸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태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자에게 비로소 천하를 기탁할 수가 있다"(13장 "厭恥"). 앞 뒤 표현이 언뜻 모순된 것 같이 보이지만 이기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몸만을 위하지 말고, 나의 몸은 자연의 도를 따라 있는 것이니, 몸을 잘 양육하는 것은 무위자연의 도를 따르는 것이라는 뜻이다.

 

물질계의 과정이란 남성들의 추상적인 의식에 의해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세계와 보다 밀접하게 생활하고 있는 여성들의 일상생활에서 경험적으로 드러난다: "도는 만물을 낳고도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룩되게 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자라게 하고도 주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묘한 덕이라 한다"(51장 養德); "하늘의 방식은 남는 것을 줄이고 모자라는 것은 보충해 준다"(77장 天道). 이것은 만물에 대한 도 (하늘)의 이치를 자식을 낳고 키우는데 있어서 애타적이고, 자기 희생적이고, 무차별적인 어머니의 태도로 비유함으로서, 도의 깨달음이 여성들의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14) 더 나아가 노자는 우주천지의 원리인 어머니 도를 알고, 이 도로부터 나온 자식인 만물이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 도를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 "천지 만물에는 시원이 있으며, 그것을 천하의 어머니, 즉 도라고 한다. 천하의 시원인 어머니를 알면, 그의 자식인 천하만물을 알 수가 있다. 그의 자식을 알고 다시 그의 어머니인 도에 돌아가 지켜야 종신토록 위태롭지 않다"(52장 歸元).

 

인간의 일상적인 활동과 경험 안에, 그리고 매일 같이 접하는 자연 안에 내재된 도의 진리는 물질 세계를 부정하고 물질 세계로부터 탈출하고자 애쓰는 남성의 자율적이고 이기적인 자아로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일부 심층생태주의자에게서 보여지는 대상 영역으로 이기적 자아를 확장시키는 확장된 자아에 의해서도, 추상적인 전체 선을 위해 주변의 대상과의 구체적인 관계와 경험을 도외시하는 초월적 자아에 의해서도 이러한 진리는 포착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진리는 어머니와 같이 도가 만물을 낳고 기르면서 자신의 존재를 자식인 만물과의 관계성에서 찾는 데서 잘 포착되듯이 모성에 의해 깨달아 진다. 이러한 이유로 모성 (motherhood)은 타 대상과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관계적인 자아 (relational selfhood)의 모습을 띤다.

 

관계적 자아란 자신을 타 대상(물)과 독립된 존재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그물망 안에서 그 대상(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Val Plumwood는 인간중심주의의 대안으로서 관계적 자아를 제시하면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대안 제공은] 자연의 특성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와 연속성을 분명히 인식하는, 자아에 대한 관계적인 고려를 통해 보다 잘 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관계적인 고려 위에서는 타자에 대한 존중이 자아에 대한 억제로부터 혹은 자아를 초월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존중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자아의 표현이다. 이 자아는 타자와 합체되어진 이기주의적 자아가 아니라 분명히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는 타자와의 본질적인 관계 그물망 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자아이다. (1991: 20)

 

자연 만물이 도에서 나와 각자 안에 도를 운행의 원리로 삼다가 되로 되돌아간다는 노장사상에서의 각각의 존재는 전체 우주적 진리인 도에 종속되어 개별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연관된 상태로 존재한다: "하늘과 땅과 나는 함께 살고 있고, 그 안에서 모든 것과 나는 하나이다." 개별 존재들은 그 자신의 배경과 관계성의 그물망을 형성하는 전체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어떤 것도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고 모든 것은 상호 의존적이다. 자연 만물 속에 내재하는 이러한 도의 본성을 깨닫는 것은 인간이 이기적인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 깨달음은 인간은 도의 본성으로서 "관계 안에 구체화 된 인격임과 동시에 시·공간적인 사건이 일어나 '존재 (be)'를 있게 하는 '열림/비움'" (Zimmerman 234)인 것이다.

노장사상에서 상호의존적인 관계적 자아 개념은 또한 정반대적인 요소의 조화로운 통합을 강조하는 데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음/양이 그 대표적인 상징이다. 도덕경 42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절대적인 실체인 도에서 하나인 기가 나오고, 그 하나인 기가 다시 둘로 나누어져 음과 양이 생기고, 그 둘인 음과 양이 서로 조화됨으로서 세 번째인 화합체가 생기고, 이 세 번째의 화합체에서 만물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만물은 자체 내에 움과 양을 상대적으로 입거니 안거니 지니고 있으며, 음과 양의 두 기가 혼연일체가 되어 중화된 화합체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관계적 자아 개념은 인간/자연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 특히 남성과 여성관계에서도 필요하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질론적 주장의 문제점은 남성과 여성을 서로 분리된 상극적인 존재로 보고 한쪽이 다른 쪽 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기인하기 때문에, 본질론적 문제점의 해결은 남녀가 원래는 서로 관계적 자아로서 각자에게 남성(적인 특성)과 여성(여성적인 특성)이 동시에 존재하며 이러한 특성사이의 관계가 수직적 관계로 된 것은 가부장제 사회가 부여한 인위적인 개념이란 인식이 필요하다.

Catherine Keller는 남성과 여성이 본래는 관계적인 존재 (relational beings)라고 주장한다. Keller에 따르면 남성들은 어려서 가부장적 개체화 개념에 따라 분리와 독립을 강요받게 되어 남성적 자아 개념만을 획득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원래의 관계적 존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이 자신에게서 가부장제 하에서 그 동안 부정되어왔고 억눌림 당해 왔던 측면을 재통합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피부에서 나와서 특정성(gender specific)의 관심을 초월적인 인간중심주의적인 관심들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아의 의미를 우리의 여성됨(femaleness)으로부터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적인(feminine)' 것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 . .

[우리는] 관계에 있어서 다른 길들을 찾고 있다. 이것은 여성들의 의존성과 자기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킴과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복합적인 내외적 관계성에 충실하게 남아 있도록 한다. 이것은 남성들에게 남성성을 희생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적 자아의 경직성과 여성을 조종하는 관계의 양식들에 대해서 도전한다. 이 때 그 다른 길은--우리에게 독특한 우리 자신이 되는 것--분리의 범주 속에 버려져 있어서는 안된다. (161)

 

Ariel Kay Sellah도 여성적인 것을 여성한테만 있는 특성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남성에게도 있으나 억눌려온 측면으로 보고 있다: "여성적인 것의 억압은 모든 인간세계 보편적인 것이다. 이것은 단지 실제의, 살아있는, 경험적 여성에 대한 억압만이 아니라, 남성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여성적인 측면에 대한 억압이다. Watts, Snyder, Devall 모두는 '인성personhood'의 정신적 개발을 위한 교육을 원한다. 이것은 자신 안에서 본래의 양성적인 통합을 이루려고 하는 자기 소외된 남성이다"(344).

장자도 사람 안에 이러한 조화로운 양성적 통합을 언급하고 있다: "중국에도 사람이 있는데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며, 음양의 화합에 따라 천지 사이에 살고 있네. . . . 만물의 근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삶이란 한때의 기가 모인 데 불과하네"(<外篇> "知北遊").

 

Zimmerman의 지적대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심층생태주의자들과 생태여성주의자 사이의 반목과 의심이 아니라, 협동과 신뢰" (239)이다. 노장사상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관계적 자아의 회복은 심층생태주의자들과 생태여성주의자들 사이의 협동과 신뢰를 위해 모두에게 필요하다. 생태여성주의자들은 심층생태주의자들이 "그들 자신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가부장적 문화의 영향력을 깨닫고, 가부장적 범주 속에서 형성된 자아, 육체, 자연 그리고 그 밖의 피조물에 대한 개념을 발견할 때, 비로소 그들의 생태계가 진정한 깊이를 갖게" (Zimmerman 223)될 것이라고 믿는다. 한편 생태여성주의자들은 이 관계적 자아를 여성과 자연사이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여성과 남성 사이에도 적용시킬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성과 남성 관계를 관계적 존재로 인식함으로서 생태여성주의자들은 가부장제적 지배 전략과 싸워오면서 이러한 전략을 아이러니 하게도 내면화 시켜 남성에게만 전적인 환경 파괴의 책임을 돌리거나, 여성만이 친생태적이어서 생태계를 보호하는데 전적으로 적합하다는 성구별에 따른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의 우주론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에 대한 지배와 여성에 대한 지배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따라서 이 두 문제는 서로 따로 떼어서 다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심층생태주의의 주장대로 자연에 대한 지배로부터의 해방이 먼저인가 혹은 생태여성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여성에 대한 지배로부터의 해방이 먼저인가 하는 "우선적인 논쟁"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Ynestra King의 주장대로, "만약 지구가 해방된 생명들을 존속시킬 수 없다면, 사람들을 해방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되고 인간 자신에게뿐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명에게까지 인간 존재의 존귀함을 무시함으로써 지구를 구원한다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게" (192)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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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ncient Future": Deep Ecology-Ecofeminism Debate and Taoism

Doo-ho Shin

Samchok University

 

This essay is an examination of the presence of gender in both Western and Taoist cosmology to find a possible way that Taoist philosophy can make contribution for overcoming Western anthropocentrism and androcentrism, which are largely responsible for the current ecological crisis and domination of women.

The current debates between deep ecology and ecofeminism, the two major environmental movements, circle around the question of the real root of environmental degradation: for the real root of the domination of nature, deep ecology speaks of gender-neutral anthropocentrism [i.e., human- centeredness] while ecofeminism speaks of androcentrism [i.e., male- centeredness]. Accordingly, deep ecology neglects androcentric aspect evidently embedded in Western metaphysics, and ecofeminism including ecofeminist writers inadvertently perpetuate another type of destructive dualism of man/woman and humans/nature through uncritical reversal strategies, which gives a positive value to what was previously despised and excluded--the feminine and the nature.

The presence of gender in the Taoist tradition, especially in Lao-tzu's and Chuang-tzu's philosophy, on the other hand, shows different characteristics--relational self, not dualised self. Relational self, which is a different form of ecological self, recognizes the earth other and gender other as a form of mutual selfhood on equal basis. Should both deep ecology and ecofeminism adopt the concept of relational self from Taoist world view, they can cooperate to make future society of ecologically- and sexually-balanced.

 

 

1남성이 여성적인 세계에 대항하여 어떻게 자신의 자율적이고 개별적인 정체성을 획득해 나가는지를 정신 분석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 대상관계이론 (object-relations theory)이다. 어떻게 유아기의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각기 다르게 자아감을 획득하는지를 보여주는 이 이론에 따르면, 유아들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최초의 연관성을 경험하면서 어머니 대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을 통해 자아 의식을 형성한다. 남아들은 여아들과는 달리 두 개의 "개체 분리 단계"를 거친다. 그들은 어머니 상으로부터 탈피해야 할뿐만 아니라,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 속의 모든 여성 성을 거부해야만 한다. 따라서 소년들의 자아 정체성은 타자에 대한 거부와 대상화에 기초하게 된다(Kheel 205). 이러한 경험은 가부장적 사고 안에서 더욱 강화되어 여성에 대한 남성적 사고 양식으로 확립될 뿐만 아니라, 여성은 자연, 물질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서구의 이원론적인 가부장적 사유에 의해 자연에 대한 남성적 사고 양식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남성들은 자신이 여성 (혹은 여성적인 것)과 자연과는 다른 존재라는 인식의 기초 하에서, 즉, 여성과 자연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2여성과 자연에 대한 부정은 남성의 독립성에 대한 다른 한 면인 여성과 자연에 대한 의존성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에 원인이 있으며, Jacob Garb는 여성과 자연에 대한 폭력은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라고 지적한다: "생물계와 육체, 특히 여성의 육체에 대한 땅의 현실은 자유롭고 완전한 주체를 단순한 '자연적' 실존에다 끌어내리는 장애물로서 증오된다. 서구문화에서 자연에 대한 폭력과 여성들에 대한 폭력사이의 강력하고도 폭넓은 반향은 아마도 이 육체적 내재성과 의존성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들은 육체와 물질의 인력을 나타내게 되었고 그것은 영혼과 정신의 순수한 자유성을 위협한다"(401).

 

3Karen J. Warren은 모든 생태여성주의자들에게 공통 관심사항이 될 수 있는 기본주장을 설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minimal condition)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첫째, 여성과 자연에 대한 억압엔 중요한 공통관계가 있다. 둘째,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이해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자연에 대한 억압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셋째, 여성주의자들의 이론과 실천은 생태주의적 관점을 포함해야만 한다. 넷째, 생태적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해서는 여성주의적 관점이 포함되어야만 한다(4-5).

 

4심층생태학은 자신들의 환경윤리에 생태여성주의에서 주된 관심사항인 사회적인 문제--예를 들어, 계급 문제, 인종 문제, 특히, 성 문제--를 거의 포함시키지 않고 있고, 이러한 심층생태학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에코페미니즘의 비판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심층생태학에 대한 에코페미니즘의 비판은 다음 글을 참조하라: Ariel Salleh, "Deeper than Deep Ecology: The Eco-Feminist Connection," Environmental Ethics 6 (1984): 339-45; Ariel Salleh, "The Ecofeminism/Deep Ecology Debate," Environmental Ethics 14 (1992): 195-216; Ariel Salleh, "Class, Race, and Gender Discourse in the Ecofeminism/Deep Ecology Debate," Environmental Ethics 15 (1993): 225-44; Marti Kheel, "The Liberation of Nature: A Circular Affair," Environmental Ethics 7 (1985): 135-49; Michael Zimmerman, "Feminism, Deep Ecology, and Environmental Ethics," Environmental Ethics 9 (1987): 21-44; Jim Cheney, "Eco-Feminism and Deep Ecology," Environmental Ethics 9 (1987): 116-45. 에코페미니즘의 비판에 대한 심층생태학의 반론은 다음 글을 참조하라: Warwick Fox, "The Deep Ecology-Ecofeminism Debate and its Parallels," Environmental Ethics 11 (1989): 5-25. (Fox의 글에 대한 반론은 Deborah Slicer, "Is There an Ecofeminism-Deep Ecology 'Debate'?" Environmental Ethics 17 (1995): 151-69에 전개된다.)

 

5Marti Kheel은 생태여성주의와 심층생태학의 정체성과 차이성을 고찰하는 글의 서두에서 Zimmerman과 유사한 지적을 하고 있다: "생태여성주의와 심층생태학 사이에는 우리의 환경 병폐의 근본원인을 이해하는 시각에서 . . .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 . . 생태여성주의자들은 [이러한 근본 원인으로] 주된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남성중심주의 세계관이라고 주장한다. 심층생태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최우선적으로 비난을 받아야할 대상은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이다. 생태여성주의자들에겐, 특권적 지위를 박탈 당해야하는 것은 단지 '인간(humans)' 만이 아니라 남성과 남성적 세계관이다(129)."

 

6서구에서는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에 근거하여 여성은 자연과 본질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으며, 온전한 인간의 조건으로서 이성과 영혼(soul)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성과 정신을 우위적인 가치로 파악하는 이분법적이고 가치 체계적인 논리는 이성과 정신적인 것을 갖춘 남성만이 온전한 인간이며, 이러한 요소를 결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여성과 자연을 물질화, 대상화함으로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그리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가 정당화되고 있으며, 이것은 인간중심주의가 곧 남성중심주의와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은 Aristotle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분명히 보여진다:

 

육체에 대한 영혼의 지배, 격한 감정에 대한 정신과 합리적인 요인의 지배가 자연스럽고 정당하다; 반면에 이 둘 사이의 동등함이나 열등한 것의 지배는 항상 해를 끼치기 쉽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이점은 동물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길들여진 동물이 야생 동물보다 낫고, 인간에 의해 지배당할 때 모든 길들여진 동물들은 보호되어질 수 있으므로 행복하다. 남성은 본래 우월하고 여성은 열등하다; 그래서 남성이 지배하고 여성은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원리는 필연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확대된다. (Politics, bk1, chap.5)

 

Aristotle에게는 본래 열등한 존재인 여성과 자연은 주인인 인간과 남성에게 시중드는 노예에 적합한 존재이다. 이러한 논리는 데카르트, 베이컨과 같은 사상가들을 통해서 더욱 확고히 되었고, 가부장제적인 기독교 문화 안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다. 이러한 문화 안에서 "남성적(masculine)" 자아는 깊이 뿌리를 내렸고, 여성에 대한 지배와 자연에 대한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7Valerie Bryson은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이 삶을 북돋는 가치들을 포함하며 이 점이 널리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들이 여성에게 그런 가치들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준다고 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는 우리가 여성들만이 그러한 가치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전통적인 역할과 분업을 추인 하고, 남성들이 가정에서는 대안적인 덕목들을 찬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지구를 파괴하도록 방치하는" 듯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211).

 

8심층생태주의자들은 사람들은 우선 그 동안 당연시 여겨온 인간/자연의 가치 체계적이고 이분법적인 태도를 버리고, 인간은 자연과 별개가 아닌 자연과 연속적으로 연결된 존재라는 새로운 자아관을 가질 것을 주문하고 있다. 확스에 따르면, 심층생태학의 "중심적인 직감 (central intuition)"은 바로 이러한 구분된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의 영역에서 확실한 본체론적 구분을 만들 수 없다 . . . 실제로 인간과 비인간 영역 사이에는 . . . 우리가 그 경계를 인식할 만한 분기점이 없다. 오히려 모든 존재들은 그들의 관계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1984: 196).

 

9심층생태주의의 인간과 자연 사이의 자아와 타자 사이의 무경계는 주체 (인간)와 객체 (자연)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서 인간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간주하는 긍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성적 자아의 특성이 엿보인다. 왜냐하면 "자아(self)는 우리가 동일시하는 전체성만큼이나 포괄적이다. . . . 우리의 [확장된] 자아(Self)는 우리가 동일시하는 바로 그 대상이다." (261)라는 Naess의 주장에서 드러나듯이, 자연을 인간과 연속적으로 연결된 존재로 인식하는 자아는 자신의 영역을 타 영역으로의 확장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자아는 Fox가 자아의 확장을 "우주론적 기반을 둔 동일화"라고 이름 붙인 것에서 보여지듯이 우리 주변의 구체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개인적인 감정 같은 것을 초월하여 추상적으로 인식되어지는 전체로의 자아의 확장을 꾀할 수 있다(1989: 12). 이러한 자아와 타자간의 몰 구별(indistinguishable)된 자아, "확장된 자아 (expanded self),"는 Val Plumwood (1993)가 지적하듯이 자아의 극복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지배와 복종을 요구하는 자아의 확장인 "지배자 의식 (master consciousness)"로 연결될 수 있다(178). 왜냐하면, 타자에 대한 존중은 타자의 자아와의 차이, 특성, 연속성을 인정하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또한 자아(self)를 그 안에 모든 것을 다 포함한 "초월적인 자아 (Self)"로 확장하려는 것 또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 초월적인 자아에 대한 관심은 개별 존재들이 '전체' 선에 종속되어 개별성을 잃게 될 수도 있으며, 따라서 여성주의자들이 중시하는 개별 존재들 간의 관계성은 경시될 수도 있다.

 

10여기서 남성적 (masculine), 여성적 (feminine)이라는 용어는 생물학적인 sex에 의한 구별이 아니라, "성간의 차이를 사회적, 담론적으로 구조하고 표상하는 하나의 구조틀을 제공하는 개념"인 gender에 의한 구별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적, 남성적 태도, 행위, 사고는 여성과 남성의 태도, 행위, 사고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도 소위 "남성적"으로 구별된 태도, 행위, 사고가 존재하며, 남성에게서도 소위 "여성적"으로 구별된 태도, 행위, 사고가 보여진다.

 

11도덕경 28장은 도의 수용성을 골짜기로 비유하면서 골짜기로 되는 것은 무위의 덕을 이루는 것이라고 본다: "남성의 힘을 쓸 수 있으면서도 여성적인 겸허와 유약을 지키면서 천하의 물을 모아 흐르게 하는 골짜기같이 될 수가 있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므로 영구 불변하는 무위의 덕에서 떨어지지 않고, 따라서 영아 같이 순진소박한 상태로 복귀할 수가 있다. . . . 천하의 골짜기가 되므로 영구 불변하는 무위의 덕이 충족하게 되고 따라서 소박한 생태로 되돌아 갈 수가 있다."

 

12"천하에서 가장 유약한 것, 즉, 물은 천하에서 가장 견고한 것, 즉 금석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무형의 물은 틈이 없는 것, 즉, 유형의 금속 속에 파고 들어갈 수 있다"(43장 "偏用"): "천하에서 물보다 더 유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굳고 센 것을 꺾는데는 물보다 더 뛰어난 것이 없다. 아무것도 물의 본성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유한 것이 억센 것을 이긴다"(78장 "任信").

 

13장자의 <外篇> "秋水"에서 자연과 인위가 무엇이냐는 황하의 신의 질문에 북해의 신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소나 말에 네 발이 있는 것을 자연이라 하고, 말 목에 굴레를 씌우거나 쇠코를 뚫는 것을 인위라 하네. 그러므로, 인위로서 자연을 멸하지 말고, 고의로서 천성을 멸하지 말며, 명리를 위해서 천성의 덕을 일지 말라고 하는 것이네."

 

14심층생태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일상적인 생활, 경험 안에서 접하는 구체적인 자연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중시한다. 이러한 생태여성주의자들의 경향을 확스는 심층생태주의의 입장에서 "개인에 기초한 동일시하기 (personal basis for identification)"라고 부르면서 주변 대상과의 동일시 과정에서 개인 자신에게서 가까운 것으로부터 먼 것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생태여성주의자들의 자아 개념은 이기적 자아의 모습을 띠며 소유, 전쟁, 생태적 파괴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욱 많다고 비판한다(1989: 11). 확스의 이러한 비판은 다소 억지스러워 보인다. 왜냐하면, 자기 주변에 가까운 자연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많은 환경 보존론자들의 한결 같은 주장이며, 실제로 많은 원주민들에게서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대한 친생태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생태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생물지역주의 (bioregionalism)"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생물지역주의는 인간에게 자연적인 상황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환경 내에서 작용하는 특정한 생태적 관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 한 지역에 토착화되어 가는 과정을 수반" (Berg & Dasman 217)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물지역주의는 인간이 자기 주변의 자연에 대해 사랑과 이해에 바탕을 둔 관계적 존재로 이해하며, 따라서 생태여성주의의 이론이 "실천적인 사회 운동의 일부로서 전환될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틀을 제공해 줄 것이다"(Plant 244).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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