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환경연대> 2004-03-31 17:11 http://www.ecofem.or.kr/bbs/board.php?bo_table=pds_1&wr_i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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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호 필자는 꿈지모 회원 전우경(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석사과정 졸업, '에코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논문을 썼으며, 현재 생명여성주의를 화두로 사유에 힘쓰고 있다) 씨이다. 자연의 이야기를 듣기: 생명 여성주의자가 되어 간다는 것
사실 첫 모임 전 까지만 해도 그 모임이 어떻게 진행 될 것이며, 어떤 신뢰관계 속에서 모임이 유지될 수 있을지 미심쩍었다. 말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말 할 수 있고 귀 먹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할진대, 게다가 수다떨기가 여자들의 주특기라고 사회적으로 알려져 있는 바에 새삼스레 이야기하는 모임을 꾸릴 이유가 뭐 있을까? 이전에 친분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 이들끼리 정말 속내를 드러내는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등등..
그런데 모임의 횟수가 거듭한 지금 나는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듣는다는 것에 대하여 새로운 성찰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야기하는 일에 더 마음이 쏠렸다. 어떤 이야기를 선택해야 하나? 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또 다른 상처를 받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머뭇거림들이 내 마음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나는 첫 번째 모임에서 아버지에 대한 오래된 기억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어떤 이는 가족사의 아픈 상흔을 이야기했다. 또 다른 이는 아내가 강도범으로부터 강간당한 상처를, 또 다른 이는 성폭행 당한 경험을, 또 다른 이는 가까운 이의 죽음의 아픔을.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야 했던 맏딸로서 감내해 온 삶의 무게를 이야기했다. 아픈 이야기를 갖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야기를 낳는 이는 과거의 기억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상처받은 과거의 영혼을 현재의 영혼이 보살피는 경험을, 그리고 듣는 이들은 이야기를 낳은 이들의 내면을 다시 채워주는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의 영혼과 만나 그 영혼의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에 동참함으로써 또한 스스로를 함께 치유하는 과정을 체험하였다.
의식의 아래쪽에 켜켜이 애써 감춰 두었던 기억이 표면으로 튕겨져 올라오는 느낌. 그것은 매우 선명하였지만 한편으론 억지로 멈추게 한 비디오의 정지화면과 같은 떨림을 포함하였다. 그 장면들을 평정심을 유지하며 바라볼 수 있기까지는 일정 정도의 시간, 그리고 용기를 필요로 하였다. 한참 동안의 감정적 흔들림이 지난 이후에야 나는 꽁꽁 얼어붙은 채 그 기억을 경험하고 있는 또 다른 나와 직면하여 그 존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온전히 들을 수가 있었다.
모임에 나오는 다른 이들 역시 나와 유사한 과정을 겪고 있음을 차츰 알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가져오는 이야기들의 재료는 제각기 달랐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에는 공통의 경험소가 있다는 것 또한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지 못한' 기억들이었다. 있는 그대로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지 못한 경험,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는 경험은 한 사람의 영혼에 심한 상처를 남기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의식의 심층부에서 영혼이 파열되었던 기억을 찾아내는 몇 차례의 시도를 하면서, 기억을 '탐색'하는 그 자체가 이미 치유의 한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외부로 향하던 의식을 내면 깊숙한 곳으로 인도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현재의 나의 의식이 과거의, 그러나 현재의 의식과 단절되지 않은, 또 다른 의식과 만나는 것은 마치 가장 쾌적한 상태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이 의식의 파장을 맞추는 작업을 필요로 하였다.
내 경험상 그 과정에 이르게 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는 침묵이었다. 의식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행위의 일시적 멈춤을 필요로 하였다. 말하기가 외부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행위라면, 침묵은 외부로 향하는 의식을 내면으로 향하기 위한 자발적 선택행위이다. 그러나 침묵은 침묵 당함과는 매우 다른 별개의 행위이다. 침묵 당함이 해당 사회의 약자들과 그러한 존재들의 경험에 대해 외부의 지배적 힘이 강제하는 사회적 행위라면, 침묵은 자발성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침묵은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침묵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마치 내가 금가고 찢겨져 나간 나의 영혼을 스스로 치유하는 샤먼이 된 느낌을 받았다. 샤먼은 퉁구스 말(퉁구스는 시베리아와 몽골에 사는 이들)에서 왔는데, 그 말은 "어둠 속에서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의 현재 의식이 비디오의 일시 정지 화면처럼 떨리고 있는 기억 속의 영혼과 직면하여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까지는 위에 인용한 시 구절처럼 무딘 귀와 가슴을 여는 절차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은 현재의 내 의식이 진정으로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에 따라 오래 동안 침묵 당했던 이야기가 들려진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침묵을 통해 침묵 당한 이야기를 듣는 과정, 진실로 이야기를 듣는 행위. 그 과정 속에서 고정된 나는 없었다. 다만 한 영혼은 말하고 또 다른 영혼은 듣고 공감하는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낳아진 여럿의 이야기들은 경험과 지식을 연결시켜주었고, 다른 경험의 가치를 알게 해 주었다. 이런 만남 자체가 곧 치유의 과정이었고, 치유의 힘은 이야기를 낳고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여럿이서 또 다시 먹여주는 과정 속에서 반복적으로 확장되었다.
다시 샤먼의 관점으로 되돌아가면, 병의 주요한 원인은 영혼의 상실이라고 한다. 이들은 영혼이란 말을 생명의 본질로 사용한다. 그리고 영혼의 상실은 충격(외상)의 결과들이라고 말한다. 외상이 발생했을 때, 고통에 대한 방어로 개인의 영혼의 일부가 달아날 수 있는데, 그것은 영혼이 그 자신의 몸에 있지 않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정신과 의학에서는 이것을 "분열"로 진단하고, 샤먼들은 "영혼의 상실을 외상에 대한 적응 전략"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샤먼들은 영혼의 상실은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반면, 그 사람에게는 파편화되고 공허한 느낌을 남긴다고 설명한다(글로리아 페이먼 오렌스타인(Gloria Feman Orenstein)의 "에코 담론에서의 샤먼의 영역", 인터넷 EVE(ecofeminist visions emerging) online 게재글 ).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가부장제 사회 문화에서 여성 집단은 영혼의 상실을 가장 빈번하게 경험하는 집단이다. 가부장제 문화란 것이 근본적으로 여성의 생산능력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니 만큼 여성의 존재를 '온전하지 못함' 또는 '결여'로 다루며, 여성의 존재를 그 자체로 축복하지 않는 속성을 근간으로 한다. 이러한 문화에서 여성들은 정서적. 육체적 학대와 폭력에 매우 빈번히 노출되는 사회적 집단이라는 점에서 온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험 또한 빈번하게 경험한다(그래서인가 이야기 모임의 구성원들도 다수가 여자이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영혼을 침탈 당하거나 상실한 존재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다시 샤먼의 관점에서 보면 치유의 과정은 상실 당한 영혼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야기모임의 체험은 상실되고 파편화된 서로의 영혼을 온전하게 되돌리는 치유의 과정이었다. 그것은 바로 상처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흔히들 우리 문화권에서는 견딜 수 없는 억압의 고통을 '한'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관점으로 보면 치유는 곧 한풀이다. 그런데 이야기로 하는 치유 목회를 이끄는 김영 목사는 진정한 치유는 한풀이와 더불어 한을 품었던 사람들이 '한풀은 치유자', '상처 입은 치유자'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한을 성취하는 길이라고 말한다.(김영,『입을 떼니 마음 열리고』, 도서출판 여교, 1994, 36쪽)
아는 만큼 보이고, 느끼는 만큼 안다고 했던가. 지금 나는 내가 느낀 것만큼만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또 다시 내 경험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한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요가와 특정한 전통에서 이어져 온 명상 수행을 하고 있다. 나의 요가 교사는 요가 동작을 할 때마다 수련생들에게 외부로 향하는 시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의식의 눈으로 몸을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내쉬는 숨과 함께 몸의 긴장을 내려놓으라고 주문하곤 한다. 내가 접한 명상법에서는 늘 마음 챙김하여 아랫배로 숨결이 들고남을, 걸을 때는 발바닥에 의식을 두고 어떤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관찰하라고 이른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순간 알아차려서 바라보며 행위의 과정 또한 바라보라고 한다. 그리하여 매 순간에 마음 모음하여 깨어있으라고 한다. 그리고 마음과 몸을 느끼고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훈련과 더불어 평온한 파장을 가다듬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평화와 자비의 기원을 보내라고 한다.
이런 훈련을 늘 순탄하게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위하여 일정한 시간을 낼 때면 나는 늘 내 몸에 의식을 집중하곤 한다. 내면의 중심 자리로 들어가 소란스럽고 긴장되어 있던 마음이 좀더 평온해지면, 몸의 긴장 또한 내려놓아짐을 느낀다. 의식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사실 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과정이다. 요가이던 명상이던 몸이나 마음의 경직과 긴장이 가져오는 아픔을 회피하지도 그렇다고 이끌려가지도 않고 그냥 바라보고 흘려보냄으로써 평온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몸결과 마음결을 보살피는 데 있어서 숨결은 가장 좋은 집중의 대상이다.
이런 수련의 전통을 접하면서, 자아와 분리된 외부로부터 받은 침해라는 생각에서 나온 방어 작용이 긴장상태를 유발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몸과 마음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므로 생각에 이끌려간 의식이 몸을 이룬 다양한 군집들(현대과학에서 말하는 세포일 수도 있고, 동양의 다른 전통에서는 말하는 地, 水, 火, 風일수도 있는)에 특정한 경직이나 균형의 파괴를 유발하고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거나, 또는 영혼을 침탈당한 경험이 몸의 어딘가에 저장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소위 나라고 여겨지는 이 몸이 나의 영혼을 담는 저장소나 그릇이 아니라, 내 몸 자체가 오래된 기억들을 내장한 영혼들의 결집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하면 사실 나라고 하는 개체의 고정된 경계가 느슨해지곤 한다. 기실 모든 생명체는 유기체이면 동시에 군집체이다. 가령 인체는 무수한 미생물 또는 세포들이 떼지어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흔히들 신비주의자로 분류되는 이들의 경험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 개체가 고립된 존재라는 인식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나와 타인, 또는 인간 종과 다른 생물 종, 또는 다른 고립된 개체들이라는 생각 또한 환상일 수 있다. 흔히들 신비주의 서적 또는 신화나 경전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한 천에 서로 얽혀 짜여진 직조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이런 생각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일 뿐, 공식 담론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기실 이전의 어떤 문명권에서도 고립된 개별적 존재라는 생각이 주류인 적은 거의 없었다. 뒤집어 말하면, 다만 이 관념은 서구의 근대라는 특정한 문화권이 채택한 특정한 존재론이자 우주관이다. 다만 우리들은 지금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특정한 앎의 방식(이른 바 정당한 앎에 이르는 근대의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또 다른 존재론, 우주관을 정당한 지식으로 채택하지 않는 힘이 우세한 문화권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인도 문명권에는 환상이라는 의미를 갖는 '마야'라는 단어가 있다고 한다. 서양이나 동양의 고대 전통은 사물이 분리되어 보이는 것을 마야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실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망각하게 하는 마야에 빠져들지 말도록 경고한다. 만약 세계가 서로 연결된 것이라고 의식하면 세계는 변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마야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다. 분리된 사물이 환상이라면 보이는 현상 역시 환상이다. 형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물은 잠시 동안 어떤 형태를 취했다가도 곧 다른 형태로 변한다. 세계는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세계를 경험하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존 브룸필드,『지식의 다른 길』, 양문, 2002, 297쪽).
우리의 의식이 사물들을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구분하면, 세계는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우주론은 다른 존재에게 행함이 곧 우리 자신에게 행하는 것임을 간과하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서구의 에코페미니스트(eco-feminist)들의 논의에 관심을 기울인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오래 동안 가부장제 문화를 지탱해온 담론인 자아와 타자라는 위계적 이항대립의 관계로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다. 가부장제의 문화에서 여성 집단은 비(非)인간. 자연. 타자와 연결되며, 서구의 가부장적 근대 계몽의 담론은 토착의 문화를 '종속적 타자들'의 범주로 다루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가부장제 문화가 채택한 세계관이 영적 세계를 삭제함으로써, 수많은 '타자들'(예를 들어 우주에 가득 찬 자연의 정령들,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혼, 의식의 현존)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위계적 이원론으로 구성하는 방식에서 '종속적 타자들'이란 지배자의 특정한 욕구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거나, 그것에 언제라도 부응할 수 있도록 자신의 욕구를 침묵 당해 온 존재들이다. 그들은 빈번히 존재 그 자체를 부정당하는 경험, 영혼을 상실당하는 경험을 겪여 온 존재들이다. 이런 점에서 여성과 자연은 방어적 긴장과 상흔을 가진 대표적 집단이며, 한을 품은 영혼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속적 타자'로 다루어져 온 대표적 집단인 여성들에게는 영혼의 회복을 위하여 '나'라고 경계지어진 스스로를 보살피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과정이다. 스스로의 몸결, 마음결, 숨결을 보살피는 것을 통해 침묵 당했던 이야기들에 귀기울이고, 스스로의 이야기를 낳고, 그리고 상실한 영혼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혼의 회복은 사랑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다.
신화나 경전은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에 대한 심상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들에게 가야할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때로는 서로가 서로를 비추이는 보석으로 이루어진 인드라의 하늘 법망으로, 때로는 한 천에 서로 얽혀 짜여진 직조의 영상으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생명의 그물망의 부분을 선하게 하는 것은 결코 이기/이타라는 이분법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나'라고 여겨지는 이 존재가 우리가 속한 우주의 아름다움을 축복하는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종속적 타자들인 '자연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곧 그것의 영혼을 회복하는 치유의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성스러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숲의 성스러움에 직접 참여한다는 것은, 숲이 살아 있는 존재이며, 숲과 나무들이 오래된 기억을 간직한 영혼들의 결집체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생명 없는 물질로 그래서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 것으로 다루는 침탈행위에 도전할 수 있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자연의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생태적 감수성,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다. 자연은 진정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열린 귀와 가슴을 가진 존재들에게만 치유의 열쇠를 떨어뜨려 줄 것이다.
간디는 현실을 창조하는 의식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평화롭게 만드는 방법은 모든 개인들이 자신의 정신 속에서 평화로울 수 있는 길은 찾는 것이다(존 브룸필드, 254쪽에서 재인용)." 그의 말 대로라면,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자연을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영혼을 가진 존재로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곧 자연임을 안다." 사유와 행위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세계는 우리가 의식하는 대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다만 우리가 사유와 행위, 몸과 마음, 지식과 실천을 분리하는 사회에 살고 있을 뿐이다.
다시 '상처 입은 치유자'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나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문화적 원형을 예로 들어서 우리의 현실을 창조하는 의식의 역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에코페미니즘' 또는 '생명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는 자신의 고통의 상처를 벗어나서 생명 가진 뭇 존재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치유를 위한 지혜와 사랑의 기운을 내는 존재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 의식의 빗장을 열게 한 문화적 원형으로 나는 티베트 문화의 '녹색 타라' 여신을 들고 싶다.
'타라'는 관세음보살과 더불어 티베트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보살이다. 타라는 산스크리트 명이고 티벳어로는 '돌마'라고 하는데, 돌마는 티베트에서 가장 흔한 여자 이름이라고 한다. 타라 여신들은 자비의 신성인 관세음보살(아발로키슈테바라)의 눈물의 화신이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중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아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는 존재이다. 관세음보살이 자비심에서 흘린 눈물에서 연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에서 지혜의 여신들이 나타났고 이들이 타라 여신들이라고 한다.
타라는 녹색 타라와 흰색 타라로 나타나는데, 특히 녹색 타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수억 겁 전부터 수많은 생을 통해 수행을 해 온 한 공주가 있었는데, 그녀는 어린 나이부터 고행과 명상을 끊이지 않고 계속하여 79세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보살(보디사트바)의 경지에 이르렀다. 공주가 깨달음을 얻자 비쿠(남성 출가자)들이 찾아와 예를 올리고 속히 남자의 몸을 받아 부디 중생을 위해 법을 베풀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공주는 남자 모습의 부처와 보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여자 모습의 보살은 거의 볼 수 없으니 자신은 이 모든 존재들이 열반에 이를 때까지 여자의 모습으로 모든 중생을 돕겠다고 서원하였다. 그리하여 공주는 오랜 수행의 공덕을 더 쌓아 마침내 '고통의 강을 건네주는 어머니'라는 의미의 '타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타라의 이야기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타라는 부처의 축복을 받아 99세라는 나이에 훌륭한 용모의 보살을 아들로 낳았다고 한다. 타라는 아들을 몹시 사랑하였는데, 어느 날 젖먹이 어린 아들이 그만 사라져 버렸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 타라는 그 동안 수행으로 쌓은 모든 마음의 힘을 잃은 채 하늘과 땅이 흔들리도록 통곡하니 그 눈물로 호수가 생겼다고 한다.
부처가 내려와서 그녀의 고통은 달래며 설법하였으나 아들을 잃은 그녀의 고통을 달랠 수가 없었다. 타라는 아들을 찾아서 온 우주를 샅샅이 뒤지고 헤매면서 뭇 중생들의 고통을 낱낱이 보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내 아들을 찾아내 상봉한 모자가 끌어안고 울며 함께 흘린 눈물이 또한 바다를 이루었고 그 눈물을 마신 모든 중생들이 장애와 병을 벗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타라는 아들을 찾던 그 애절한 마음으로 고통스러운 중생들을 건지리라고 서원(誓願)하였다.
그러자 부처와 보살들이 몹시 기뻐하며 “타라 어머니시여, 우리가 당신의 아들을 숨긴 것은 중생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실상을 어머니가 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수없이 많은 존재들을 구원한 타라는 지금도 포탈라라는 궁전에 거하며 외아들을 찾는 어머니의 애절한 마음으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뭇 존재들을 돕고 있다고 한다.
내가 녹색 타라 라는 아이콘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녀가 끈질기게 한계에 도전했던 수행자이자, 자식을 잃고 모든 마음의 힘이 무너져 버린 아픔과 약함을 경험한 어머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가 여성의 몸 그대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의 고통에 동참하며 그들의 평온과 행복을 발원하는 치유의 영성이라는 점이다.
한편으로 서양의 근대 이전의 문화에서는 자연의 약초를 잘 아는 여성 치유자들을 '녹색 엄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는 '녹색 타라'라는 아이콘을 가부장적 이원론과 위계문화에서 유배당한 모든 '종속적 타자들'을 보살피는 자, 즉 '자연의 이야기를 듣는 이', '상처받은 치유자'의 문화적 원형으로 채택하고 싶다.
어떤 이는 다른 존재의 마음을 열 때, 상대가 빗장을 따고 열어주는 대문으로 들어가야지 억지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담을 타 넘는 도둑이나 강도와 같다고 한다. 이 때 도둑이나 강도 당한 영혼은 외상의 기억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경계감이나 분별심이 다 사라진 경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경우 분리된 개체로서의 자아라는 경계 자체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초탈한 의식은 침해당했다는 생각조차도 없으며, 다만 그것이 환상임을 알아차린다고 한다.
영혼을 침탈 당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침묵 당했던 존재들이 그 상처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낳고 '자연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연이 곧 나임을 알아차려 자연에게 행함이 곧 나에게 행함이며 자연을 치유함과 나를 치유함이 이원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의식을 갖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계를 영혼이 가득 찬 성스러운 세상으로 되살리는 일. 이 과정이 바로 생명 여성주의자가 된다는 것일 게다.
어쩌면 지금과 같은 문화권에서 생명 여성주의자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은 뭇 생명들이 모두 니르바나에 이를 때까지 여자의 몸 그대로 함께 하겠다는 서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지배적 담론에 속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어떤 이익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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