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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에코페미니즘

가이아의 과학을 위하여 /김재희

by 마리산인1324 2007. 1. 27.

<여성환경연대>2004-07-06 20:17

http://www.ecofem.or.kr/bbs/board.php?bo_table=forum&wr_id=19

 

 

2004년 7월 여성환경연대 월례포럼
[여성주의와 생태주의는 어떻게 새로운 정치지형을 만들 것인가?] 네번째 이야기


여성과 생명의 관점에서 보는 과학, 과학기술


                                                        가이아의 과학을 위하여

 

                                                                                                                                                                    김 재 희



17세기 과학혁명의 지독한 업적은
우주에 대한 생명론적 감수성을 제거함으로써
자연을 살해한 결과로 드러난다. 
                                                        
- 캐롤린 머천트
-




17세기 신과학(scientia nuova) 

스페인이 유럽 최고의 번영을 누리며 콜럼버스의 항해 비용을 대던 16세기 당시, 이자벨라 여왕은 그녀의 문장에 ne plus ultra (no more beyond)라는 글귀를 새기고 자신들이 이룩한 업적에 대한 완결성을 뽐내었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만큼 세상 모든 일을 밝혀내고 획득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곧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새로운 시야가 열리면서 ne plus ultra의 ne를 빼버리고 이제 plus ultra, 그 너머의 더 새로운 것을 향한 열망과 투지를 불태웠고, 그 너머의 새로운 세상을 찾아가는 plus ultra의 글귀는 그로부터 약 백년 후, 당시의 세계어 라틴어를 쓰던 지성의 입에 회자하는 ‘신과학(scientia nuova)’의 기치가 되었다.

톱니바퀴로 가는 시계, 피댓줄로 도는 자연 

톱니바퀴로 가는 시계, 다양한 측량기구와 망원경의 개발로 한결 정교해진 지도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고 plus ultra의 세계를 탐험해 나갈 수 있게 한 상징적인 도구였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객관적 척도를 발견하고 망원 렌즈를 통해 지구 바깥까지 시각을 확장해 창조주가 기획한 우주의 청사진을 그려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새로운 과학은 신의 영광을 찬미하는 새로운 신학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1619년 성 마르티누스 축일(11월 11일) 전야, 한창 예민한 나이의 데카르트는 신과학이 이룰 엄청난 기계 문명의 비전을 본다.

 

꿈에 나타난 진리의 천사는 ‘톱니바퀴와 피댓줄로 돌아가는 기계로 된 자연’의 비밀을 보여주며, 이러한 비밀을 푸는 열쇠는 수학이라고 일러 준다. 다뉴브 강변의 노이부뤀에 살던 스물 세 살의 데카르트는 이 비전을 본 것은 신의 은총이라 믿고 로레토의 성모님께 순례 여행을 다녀온 지 18년 후, 신과학의 철학적 초석인 ‘방법 서설(le discours de la méthode)’을 세상에 내놓는다.

남성의 원리로 제압한 우주

1609년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통해 달의 표면을 보고 목성 주변 위성들의 움직임을 보고했을 때만 해도, 그의 업적을 경탄하는 시를 지어 보내 왔던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은 교황 우르반 3세가 된 후, 1633년 종교재판을 통해 그에게 함구령을 내릴 수밖에 없는 정치 상황으로 몰리는데, 이와 더불어 르네상스 시절 신과학과 로마 교회의 짧았던 밀월은 막을 내린다. 신과학을 표방하던 갈릴레이가 세상을 떠난 1642년 태어난 뉴튼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전통을 마감하고 신이 창조하신 대자연 전체를 요약하는 보편적이고 단순한 수식을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cogito ergo sum 이라는 데카르트의 선언과 함께 인간 정신만 빼 놓고 세상의 나머지는 모두, 복잡하게 구성된 기계로 환원될 길을 찾았다. 멈춰 선 물체는 크기와 형상을 기하학의 도면에 옮기고 움직이는 물체는 운동의 인과 관계를 결정론적 수식으로 표현하는 고전 물리학은, 자동 기계의 부품인 물질의 활동을 뉴튼식 힘의 원리로 온전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갈릴레이, 데카르트 그리고 뉴튼이 전통의 관념 세계를 17세기 신과학인 기계론의 지평 위에 정립하고 있던 데 비해, 재판관 출신의 프란시스 베이컨은 기존의 추상적 작업들을 구체적인 실험과 관찰을 통해 실용화할 것을 주창하였다. 과학의 진보와 자연 정복의 야망에 사로잡혔던 베이컨은 실험을 통한 과학 기술로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대자연을 지배하리라 확신하면서 자연의 비밀을 캐내는 혁신적 수단을 강구할 것을 촉구했는데, ‘아는 것(과학적 지식)이 힘’이며 ‘자연은 마녀와 같아서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고문하고 괴롭힐수록 그 비밀을 토해낸다’고 주장하였다.

영성을 잃어버린 자연

기계론을 주조로 하는 근대 과학이 정통성을 확보하면서 자연은 이제 생명이나 영성을 지닌 신비스런 존재가 아니라 과학 문명의 진보를 위해 인간의 손아귀에 붙잡힌 실험 재료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의 기계론식 사조는 무엇보다 정신과 물질을 확연히 구분하는 것으로 인식의 기초를 삼고, 감성이나 영성과 같은 여성적인 요소는 악마한테 영혼을 빼앗긴 표시로 처단하였다.

 

영국에서 1662년 창건한 왕립 학회(Royal Society)는 베이컨의 진취적인 이상을 열렬히 추앙하며 그의 비전을 실현시키는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왕립 학회의 창립 취지에는 ‘신과학을 통하여 남성적 학문의 토대를 튼튼히 하고 확고한 진리를 찾아내는 인간의 이성을 고양한다’는 문구가 눈에 띤다. 이렇듯 당시의 신과학은 자연을 정복하고 조작하는 권능으로, 고전 물리학에서 비롯한 과학 기술의 성과는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의 산업 혁명으로 확산되면서 농경 사회를 산업 사회로 탈바꿈시켰고 생산력의 증가는 과학의 진보에 대한 신념을 강화시켰다.

 

비슷한 무렵 스웨덴 출신의 생물학자 카를로스 린네는 신이 지구 상에 창조하신 뭇생명의 계통을 밝히는 설계도를 작성하였다. 신이 인간에게 준 이성을 바탕으로 종․속․과․목․강․문․계의 분류법을 정리해 생명의 다양성을 묘사한 것은 뉴튼이 우주 창조의 청사진을 추적해 신의 섭리를 읽어내려던 것과 꼭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일로, 이는 진화를 고려하지 않은 채 창조의 날부터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된 생명체의 다양한 모양새의 질서를 확인하는 무척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신과학의 진화

고전물리학은, 원자로 이루어진 모든 물질은 서로를 잡아당기는 인력이 있다는 관찰에서 출발한다. 예컨대 태양과 지구는 텅빈 우주에서 중력이라는 신비한 힘으로 서로를 잡아당긴다. 이렇게 우주 공간 전체에 미치는 중력이라는 힘을 뉴턴은 신의 능력과 결합시켜, 신은 거대한 기계 장치를 고안한 똑똑한 기계공으로 부각되었다. 전지전능한 신은 우주를 완벽한 자동 기계로 설계한 까닭에 우주의 질서는 창조의 그 날부터 영원무궁토록 더 이상의 변경 없이 언제나 그대로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물리학의 대상은 딱딱한 고체의 움직임만이 아니라 물과 같은 유체(流體)의 움직임으로 확대되고 19세기에 들어와 전기 현상을 포함하고 열역학이 등장하는 식으로 그 내용이 꾸준히 보완되었다. 1860년 맥스웰(Maxwell)은 전기와 자기의 특성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는 수학의 틀로 정리하여 물리학의 폭을 확장하였을 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새로운 지평이 열리면서 이른바 ‘장(場)’의 개념이 물리학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물질의 세계가 열역학 법칙에 따라 엔트로피를 늘려가다가 결국은 모든 질서가 사라진 혼돈 상태, 열사망이라는 최종 단계에 이르리라는 결론은 19세기 과학자들을 불안하게 했다. 거대한 기계 장치인 우주는 언젠가 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 불가피하기 때문이었다.

잘못 짚은 진화론

열역학이 확률과 분포로 처리하는 방법을 도입하면서, 자연의 온갖 사건에는 즉흥적 어긋남과 자발적 동요의 가능성이 허용되었고, 이러한 불안정성이 물질계뿐 아니라 생명계에도 작용한다는 사실을 다아윈은 1859년 ‘종의 기원’에서 발표하였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른 열사망을 부인하며 지구는 점진적인 지질학적 활동을 통해 우주 전체의 활동에 부합하는 발전을 행하고 있다는 지질학의 새로운 견해가 제임스 허튼(James Hutton)과 찰스 라이얄(Charles Lyall)에 의해 대두되고, 이는 다아윈에게 영향을 미쳐 생물종의 모양새가 자손대대 일정하게 유지되는 성서에 나온 창조를 부인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양새의 변경이 이루어진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 박차를 가하던 산업화와 식민지의 확보 그리고 제국주의를 지탱하던 남성 중심의 공격적 사고는 진화의 개념을 사회 발전 일반에 적용하는 보편 원리로 확장되어, 생존 경쟁과 적자 생존의 논리로 약육강식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원리

19세기 말 산업화가 절정에 이르면서 절실한 것은 질 좋은 철의 제조 기술이었다. 제련 공법을 개발하던 과학자들은 용광로에서 발생하는 빛을 연구하였고 이 노력의 결과 양자 세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아원자를 관찰하면서 우주 형성의 단위인 원자는 그 본질상 비어 있다는 사실과 함께, 딱딱했던 뉴턴의 물질 대신 율동과 형상과 추상적인 질서들이 드러났고,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의 성격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모순의 실체를 증명하려 여러 과학자가 연구에 몰입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움직이는 양자의 속도를 측정하려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고 위치를 가늠하려면 속도를 제대로 잴 수 없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극미 세계를 관찰하려면 관찰 과정을 통해 현상 자체를 간섭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을 관찰하는 주체 및 관찰자와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벌어지는 사건 혹은 관찰되는 객체라는 식의 구분이 당연했던 고전 물리학의 주체/객체 이분법이 무색해지고 대신 관찰하는 주체의 마음이, 관찰되는 객체의 성격에 중심적인 요소로 부각되었다.

 

아울러 1905년 아인슈타인은 전자기장의 현상을 물질의 성격을 지니지 않은 순수한 장의 개념으로 새롭게 정의하였다. 고전물리학에서 시간과 공간과 물질은 독립적으로 영속하는 절대량이었던데 비해 이제는 빛의 속도밖에 남지 않았다. E = mc² 라는 유명한 공식을 통해 아인슈타인은 별개로 간주하던 질량과 에너지의 개념을 통합시키고, 이들은 동일한 현상의 상이한 양태일 뿐임을 밝혀냈다. 상대성 원리는 고전 물리학의 기본 개념을 대폭 바꿔 놓지만, 아인슈타인 본인은 중력 작용을 우주의 기하학적 원인으로 믿고 ‘우주의 수학적 원리’에 감탄하며, 자신의 작업이 물리학의 새로운 출발이 아니라 고전 물리학이 추구해온 물리 세계의 수학화 작업을 완결시킨 것이라고 흡족해했다.

20세기 신과학 (new sciences)

코페르니쿠스 천문학과 더불어 편편한 땅과 둥근 하늘 천장을 벗어 던진 17세기 신과학의 우주가 태초부터 완벽한 조화와 질서를 지키며 늘 같은 운동을 했던데 비해, 20세기 신과학은 우주의 또 다른 차원을 열어 보이기 시작하였다.

 

지난 세기에 밝혀진 생물의 진화에 이어 물질과 장 역시 진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갈릴레이를 단죄하던 당시 근대 과학의 혁명에 맞먹는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창조는 더 이상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껏 계속되는 커다란 과정으로 파악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1992년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이의 복권과 함께 교회의 가르침이 현대 과학과 상충하지 않는다는 발표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여기서 ‘현대 과학’을 요약하면 그것은 ‘진화’이다.

 

기존 질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질서한 상태로 균등하게 조정된다는 엔트로피 현상은 자연계를 지배하는 절대 법칙이었기에, 우주의 진화란 태초부터 여태까지 언제나 무질서, 즉 혼돈의 방향으로 흐르는게 원칙이었다. 따라서 생명 현상은 엔트로피를 거역하는 예외 현상으로 제외시키곤 했던 데 비해, 프리고진은 화학 반응에서 ‘흩어지는 구조(dissipative structure)’의 연구를 기초로 ‘힘찬 요동을 통해 생기는 혼돈으로부터의 새로운 질서’라는 물질 생성의 기본 원리를 발견하였다.

흩어지는 구조와 스스로 짜짓는 우주

프리고진의 ‘흩어지는 구조’란 에너지와 물질이 무질서하게 흐르며 유지되는 힘찬 요동의 상태로서, 이러한 혼돈의 극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물질의 활동 원리’로 자연 현상의 전반에 깔려 있는 보편 현상이며, 원자의 세계만이 아니라 은하계에도 그리고 생명체의 세포 단위만이 아니라 우리 몸의 모든 부분, 심지어 방대한 사회나 문화권에도 이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는 점을 얀취(E. Jantsch)는 ‘스스로 짜짓는(self-organizing) 우주’의 개념으로 요약했다.

 

‘스스로 짜짓기(autopoiesis)’란 개념은 17세기 신과학이 확립한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20세기 신과학의 핵심어다. 주체가 제어(control)하는 객체 식의 이분법 시각에서 스스로를 조절하여 자기 모습을 만들고 유지하는 생기론(vitalism) 쪽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바뀌는 추세는 물리학뿐 아니라 생물학에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예컨대 가이아설은, 지구의 역사와 생물의 진화에 대한 종래의 시각과 견해를 달리하는 새로운 입장을 표명한다. 기존 과학이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고 지구 과학과 생물학, 천문학등으로 나누어 분야의 특성대로 자연 현상을 분석하는 데 비해 가이아설은 지구 환경과 관련한 여러 가지 상호연관성을 옴살스런(holistic) 시각에서 조망하며, 생물은 지난 40억년 동안 지구 환경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지구의 역사를 이루어 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깨어나는 대지의 여신

우리가 살고 있는 파란 별 지구는 생명이 살고 있는 별일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온갖 생명 현상을 나타내는 커다란 생명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구의 생물권 전체는 단순히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적자 생존하는 소극적 존재가 아니라, 지구의 여러 가지 물리화학적 환경을 활발히 변화시키는 능동적 존재임을 천명한다.

 

가이아(Gaia)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생명의 여신으로, 가이아론을 내놓은 러브롴과 마굴리스는 지구상의 생물이 지구의 대기권 조성을 비롯하여 해양․대륙․암석 등의 무생물적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범지구적 차원에서 검토했는데, 이들은 가이아가 스스로를 짜지어가며 항상성을 유지하는 지성적이고 생리학적인 시스템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렇듯 대자연과 생명의 신비에 매혹 당한 오늘날의 진보적인 과학자들은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으로 양분하던 근대 과학적 세계관과 방법론에 회의하며 기계 덩어리였던 우주의 삼라만상에 생기를 불어 넣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분법의 극복

한편 이러한 현상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관찰자인 인간의 인식 능력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성찰의 변화가, 다시 말해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고 있다. 아직 진화의 개념이 포함되지 않았던 고전 물리학과 이를 근거로 성립된 인식론의 기본 전제는 독립된 주체의 설정이었다.

 

환경과 무관하게 어떤 대상 혹은 현상을 관찰하는 독립된 주체로 설정해 왔던 인간이 사실은 우주가 진화를 거듭하며 발생한 생물학적 결과임을 지적하며, 마투라나(Maturana)와 바렐라(Varela)는 우리의 시각과 청각 및 다른 감각과 지각 능력 모두는 인류가 출현한 환경과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통해서 스스로를 꾸려 가는 신경계의 활동이며, 이는 지구 환경과 함께 진화해 온 생물학적 조건임을 천명한다.

 

우리 인간은 지구 생태계와 함께 진화해 온 여러 가지 생물학적으로 구성된 조건을 통해 세상을 이렇게 저렇게 느끼고 평가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이른바 구성주의적인(constructive) 자각은 양자 역학에서 드러난 주체/객체 이분법의 모호성을 재확인하며 정신과 육체,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옴살스런 안목을 다시한번 요청한다.

식민지 백성의 과학

현재 모든 대륙에서 실시되는 과학교육은 오로지 유럽에서 진행된 과학혁명을 근거로, 대부분의 문화에서 내려오던 자연과의 관계를 미신적인 것으로 격하시켰다. 이처럼 영성을 제거시킨 물질 위주의 세계관과 감수성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문명을 건설하였다. 신과학과 신기술이 유럽인에게는 식민지 개척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열림으로, 여기서의 자원확보는 산업화로 이어지며 그 나마의 자생적인 비판력을 키워 나갈 선택의 여지가 있었지만, 식민살이에 헐떡이던 제 3 세계 사람들에게는 과학발달의 과정을 스스로 평가하고 반성할 겨를 없이 절대 가치를 갖는 동경과 경외의 대상으로 수용되었을 따름이다.

 

이렇듯 근대과학이 성립한 이후 자연법칙은 늘 가치중립적이라 여겨졌으며 따라서 그러한 원리를 보고한 과학자들 개인의 성향이나 배경을 따져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과학은 합리성이라는 원칙 아래, 주체와 객체를 나누고 인간과 자연을 갈라 환경을 공격하고 정복하는 철저한 남성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문제 삼지도 않았다.

 

이토록 절대적인 객관성을 확보하느라 과학은 그 동안 자연이 갖는 감성과 순환의 원리를 무시하며 지극히 파괴적인 경향으로 발전해 왔고 그 결과 인류는 오늘 세계적인 생태파괴와 자원고갈에 따른 심각한 환경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제 인류의 존속 자체를 의문시하게 만드는 환경 위기의 상황에서, ‘생명’이라는 주제는 지상 최대의 화두로 다시 자리 잡았다.

 

‘생명’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현재 양극으로 갈리는 두 가지 대립된 가치관은 오늘날 지구 문명의 분열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나는 이른바 ‘생명 공학’이라는 이름으로 핵공포와 함께 인류에게 분홍빛 약속을 남발하는 조작(gene manipulation) 기술의 방향이다. 생명 현상만큼은 최근까지 숨쉬고 양분을 취하며 성장하고 또 자손을 번식시키고 자극에 반응을 하는 등, 살아 있는 것들의 온갖 특성을 포괄하는 복합적인 내용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분자생물학의 성립과 함께 생명은 어느새 신비로운 조화의 틀을 벗고 대신에 유전자 분자 속에 온갖 정보를 각인시킨 고대문자로 전락해 버렸고, 가부장식 권능을 상징하는 막강한 이성의 힘은 다시, 이 부호들을 조작하고 그 작용을 지배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인간의 진화도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마녀들이 하는 새로운 과학

생명 가치에 대한 다른 방향은, 조작 기술의 획기적 발전이 아니라 과학의 감수성 자체를 극적으로 전환시키려는 움직임이다. ’70년대 이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서구의 여성 운동은 가부장제의 성립과 함께 소외되어 온 여성의 감수성을 사회 곳곳에 회복시켜 보다 균형 잡힌 문화를 가꾸는데 공헌하였다.

 

가부장제의 역사 속에 자연과 여성이 겪은 수난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루어졌으며 환경 파괴의 일차적인 피해자는 여성과 어린이라는 자각은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이라는 새로운 여성의식의 각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근대과학이 성립할 무렵 유럽인들은 마녀라는 이름으로 나치가 살해한 유태인의 수보다 더 많은 여성을 학살하였다. 영어의 witch(마녀)란 낱말은 원래 wise(똑똑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들의 후예인 유럽의 여성들은 삼사백년 전 마녀가 가졌던 날카로운 지성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거대자본과 권력이 집중되는 과학기술의 폭력성에 대항하는 비판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미래의 신과학 - 에코페미니즘

이들은 과학이 수 없는 시행착오와 끊임없는 갱신을 거쳐왔음에도 기존하는 과학의 방법론을 통해서는 결코 현실을 정당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백인 남성 위주의 세계관과 가치 기준 그리고 사회적 조건에 따라 기성체제가 요구하는 사회적 구조물을 재생산할 뿐임을 천명하고, 주체/객체의 이분법에 따르는 가치 중립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아울러 ‘몸으로 느끼기’ 같은 여성스런 감수성과 자연친화적 영성의 개발, 그리고 제 3세계 원주민 사이에 잘 보존된 초감각 능력까지 인간이 가진 훨씬 다양하고 종합적인 능력에 관심을 집중하여 가부장제의 산물이었던 과학기술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이들은 가부장제의 폐해를 치유하는 적극적인 대안으로, 제 3세계 기층여성이 몸으로 살아 온 자연친화적 살림(giving life)의 지혜를 21세기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 다시 말해 ‘미래의 신과학’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하였다.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

아울러 여성 과학자들은 근자에 들어 비로소, 자신들을 읅죄던 정서적인 단절감, 이질감, 소외감의 정체가 바로 근대과학의 곳곳에 찍혀 있는 엄격한 가부장제의 인장이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다른 분야에 비해 생물학에서는 여성 과학자의 고유한 감수성과 시각을 통해 세상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획기적인 사건이 몇가지 기록되었다.

 

다아윈 이래의 생물학이 진화 개념의 기반을 적자생존과 자연도태, 혹은 경쟁, 정복 등의 공격적 힘의 논리로 해석하는 데 몰두해 온 데 비해, 여성 과학자들은 생물체간의 협동과 상호연관 혹은 의존관계 또한 중요한 원동력임을 입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러브록과 함께 가이아설을 주창한 린 마굴리스는 세포들은 서로 공생을 지향하는 가운데 오늘날과 같은 놀라운 수준의 생물체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린 마굴리스(Lynn Magulis)는, 약자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이 곧 자연의 원리라는 남성 중심의 사유법은 결코 자연의 보편법이 아니며, 진화라는 현상도 새로운 감수성으로 더욱 총체적인 관찰을 통해 전혀 새롭고 훨씬 온전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세간에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힘의 논리에서 공생의 지혜로

그녀는 삼엽충이나 공룡의 화석을 근거로 오백만 년 혹은 천만 년 동안 이루어진 진화를 설명하던 기존 생물학의 단편적 해석에서 벗어나, 지구 상에 현존하는 세포들의 다양한 양상과 그 내부 구조를 관찰하면서 수억 년에서 수십 억년에 걸쳐 일어난 더욱 장대하고 복합적인 진화의 파노라마를 새롭게 조명하였다. 이를 가리켜 그녀는 “남자들이 물리학적 힘의 법칙으로 진화를 이해하고 설명한 데 비해, 나는 생명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조화와 절묘한 변화에 주목했다.”고 설명한다.

 

무려 십억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구 상의 생명체는 모두 핵이 없는 세포들, 즉 박테리아와 같은 원핵(prokaryote) 세포였는데, 어느 시점에선가 핵이 있는 진핵(eukaryote) 세포로 진화가 이루어지고 복잡하고 세련된 대사 작용이 세포 내의 활동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동물과 식물의 몸을 이루는 진핵 세포 안에는 세포 내의 대사 작용을 나누어 맡아하는 작은 소기관(organelles)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 중 어떤 것은 핵의 염색체와 별도의 고유한 유전 물질을 갖는다. 예컨대 호흡을 담당하는 미토콘드리아와 광합성을 담당하는 엽록체는, 세포의 핵에 있는 유전자와는 전혀 별개인 독립된 유전자를 따로가지고 각각의 필요한 단백질을 합성하며 자기 복제를 하는 등 온전한 생명체의 단위 구실을 한다. 즉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원래 박테리아처럼 독립된 생활을 했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이들이 다른 생명체 안에 자리잡고 생활하면서부터 각자의 고유한 기능을 통해 나름대로의 생명 활동을 더욱 효율적으로 영위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도래

이러한 세포 안 공생의 관계(endosymbiosis)는 이제 더 이상 의심할 바 없는 정설로 인정되어, 세포학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의학과 농학을 포함하는 생명 과학 전반의 일반 생물학 교재에 실리게 되었다. 진화론의 탄생과 더불어 백여 년이 넘게 강조되어 온 경쟁이나 약육강식과 같은 배타적 적자생존의 원리보다 협동과 공생을 통해 긴밀한 결합을 이루는 방식이 진화의 비약에 한결 주효했음을 마굴리스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60년대 말 이런 식으로 생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 그녀는 그 정당성을 증거하는 데 몰두한 20여 년 동안, 그리고 이어서 제임스 러브록과 함께 지구 생명체 전반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조절하며 생태론적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푸른 별로 변모하기까지의 여정에 감탄하며 대지의 여신(女神) ‘가이아’라는 애칭으로 지구에 영성(spirituality)을 부여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욱 더, 참으로 제 멋대로이고 몹시도 고집세고 막되먹은 여자라는 비난의 소리를 남성 동료들로부터 감수해야 했다.

감성과 영성으로 느끼는 과학

이렇게 과학자로서 세상을 보는 마음보가 달라진 것 뿐 아니라, 기존의 과학적 방법론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놀라운 접근으로 새로운 차원을 열어 보인 이가 있으니 그녀의 이름은 바바라 맥클린톡(Barbara McClintock : 1902~1992). 그녀는 자기가 가꾸던 식물과 가진 아주 특별한 접촉의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생물체의 유전암호는 글자로 박혀 권위가 되어버린 책처럼 언제나 그렇게 적혀 있는 정태적인 청사진이 아니라 주위 환경에 반응하는 유동적이고 역동적인 암호임을 밝혀냈다. 

 

그녀는 살아 있는 것의 ‘느낌’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험에 쓰는 수많은 옥수수 나무였지만, 나무 하나하나는 모두 제각기 독특한 느낌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하나하나마다 다른 이름을 붙여 주고 그들에게 귀를 귀울이자 식물도 그녀에게 응답하였고 자기네 열매의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사건들을 아주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고 말한다.

 

정통파 과학자에게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유전자의 다양한 활동 중 1940년대 그녀가 ‘몸으로 느꼈다’는 자리바꿈(transposition) 현상은 놀랍게도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정확하고도 중요한 특성임이 인정되어 1983년 생리․이화학 분야에서 여성 단독으로 처음 노벨상을 받았다. 너무나 특별하고 기존의 패러다임에 속하지 않는 그녀의 방식이 옳고 탁월할 뿐만 아니라 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사실이 30 여년 세월이 흐른 후 세계적으로 공인된 이 사건은, 과학의 역사와 앞으로의 향방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주체/객체의 철저한 이분법에 따라 절대적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근대 과학적 방법론의 제 1 명제가, 개인적 느낌에 집중하여 주객을 나누지 않고 신심을 분리하지 않는 그녀의 독특하고 예민한 감수성 앞에 기반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지평

‘새롭다’는 형용사는 상대적이다. 기존의 것, 낡은 것, 구태의연한 것을 전제로 한다는 뜻이다. 새로와 짐(becoming new)은 현상태를 유지하는 최선의 길이다. 새로와지지 않으면 ‘끊임없이 무질서와 혼돈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엔트로피의 법칙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게 변화하며 어차피 새로워지기 마련이지만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송두리째 변화하는 혁명적인 사건이 있다. 과학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점진적 변화 말고 사상 체계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는 대대적인 변화가, 이른바 패러다임의 변동이 있음을 토마스 쿤은 지적하였다.

 

패러다임이란, 동시대를 사는 사람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일반적인 감수성으로 예컨대 대부분의 과학 이론은, 당대의 과학자 대부분이 공유하는 패러다임 안에서 주어진 수수께끼를 푸는 일상적인 새로움이다. 그러나 기존의 감수성과 사유방식 그리고 가치체계 모두를 뒤엎고 새롭게 등장하는 패러다임이 있을 때, 그것은 사회 전반에 혼란과 반발, 그리고 물의를 일으키는 문화적 사건이 되기 마련이다.

 

과학이란, 뛰어난 과학자가 발견한 사실을 절대진리로 받아들여 무조건 숭배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권위나 선입견에도 굴하지 않고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과학 정신’의 산물일진대, 깨어 있는 마음뿐 아니라 깨어 있는 몸으로 세상을 다시 느끼려는 여성들의 작업은, 현상태를 유지하는 일상적 새로움을 뛰어 넘어 과학사 전반의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커다란 물결을 일으킬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탈중심적 / 탈가부장적 / 탈근대적 생태여성주의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기존의 감수성과 생활 양식을 전폭 폐기하여 간결하고 단순한 자연 친화적 삶으로 변형시키고, 아울러 정보 통신의 혁신으로 인한 지구민의 각성은 지구 문명 전체를 새로운 국면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낙관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널리 역설한다. 혹은 꿈꾼다.


참고문헌

졸저,  《신과학산책》 김영사 1994
         《깨어나는 여신》 정신세계사 2000
         《지구의 딸 지구시인 레이첼 카슨》 이유책 2004
이블린 폭스 켈러 《생명의 느낌》 양문 2001 : 바바라 매클린톡의 전기
새라 파킨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 양문 2002 : 페트라 켈리의 전기
비키 매켄지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 김영사 2003 : 텐진 빠모의 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