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2007년 06월 24일 20:4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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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
괴산출신 ‘추일부대장’ 김형식씨 |
신홍균 기자 topgunhk@ccdn.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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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아픈 기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6·25 전쟁이 발발한 지 57년 째 되는 해다. 아픈 기억은 잊어야 한다지만 6·25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역사다. 하지만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특히 젊은 세대들은 6·25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누가 침략을 하고 누가 침략을 당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당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지금은 고향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김형식씨(81)를 만나 활동 당시의 상황과 현재의 심경 등을 들어봤다.
그는 1926년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서 태어났다. 남부러울 것 없는 지주의 집에서 유복하게 자라며 열두 살 때 청주 주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해 배재중학교에 입학, 1945년 졸업했다. 같은 해 12월 경성 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고 2년 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으로 입교했다(서울대는 1924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이 모체다. 1946년 8월 국립종합대학안(國立綜合大學案)이 확정·공포되면서 국립 서울대학교로 정식 발족했다).
입교 2년 후인 1949년 그는 돌연 학교를 중퇴하고 동시에 남로당에 가입한 뒤 의정부를 거쳐 월북한다.
“친일파였던 사람들이 친미파로 돌변하면서 득세를 했지. 거기다 이승만 정권은 토지 개혁이나 적산(일본이 남긴 재산 등) 처리 등이 불공정했고 미국의 원조에만 기대는 무능한 정부였어. 일제에 수난을 겪다가 나라를 되찾았으니 살만해지겠지 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꺾은 거야. 오히려 북쪽의 사람들이 사상적으로 더 깨끗했어.”
북한 제3군관학교와 강동정치군사학교에서 각각 4개월씩 교육을 받은 그는 1950년 3월 200여 명의 인민유격대와 함께 남파됐다.
“당시 내 가명이 ‘추일’이었고 내가 이끌던 부대는 ‘추일 부대’였어. 대원 수는 20여 명 정도였지만 규모가 문제는 아니었지. 당시 내 계급이 지금으로 따지면 대령 급이었어.”
후방 교란 임무를 맡은 그는 항상 총탄이 빗발치는 최일선에 서서 싸웠다고 한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고 산 속에서 국군과 교전하다 총알 세례를 견디지 못한 그는 살아남은 대원들을 대피시키고 홀로 도주하다 결국 부산 동래에서 체포됐다. 6·25 종전 한 해 전인 1952년 2월이었다.
독방에 가둬진 그에게 남측은 말을 들으면 일반 죄수처럼 대우해 주겠다며 전향을 종용했고 수감 5년 뒤 그는 전향을 선택했다.
“전향하겠다고는 했지만 마음 속까지 전향한 건 아니었지. 체포될 당시에도 수류탄을 갖고 있었지만 체념하고 항복했어. 모두 살기 위해서였던 거야.”
그에겐 당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이 구형됐다가 재판 과정에서 무기징역으로 바뀌었다.
1972년 9월 출감했지만 빨치산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1980년 고향에 내려온 그는 여전히 감시 대상인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배재중학교 시절 배웠던 기억을 살려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는 초기엔 빨치산 시절의 기억을 담은 그림을 주로 그려왔지만 근래 들어서는 어스름한 저녁 신작로 등 고향에 대한 감성을 담은 작품을 주로 그리고 있다. 그런 그가 6·25 57주년을 맞는 느낌은 어떨까.
“사람들이 흔히 6·25를 두고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따지는데 남침이 맞아. 당시 내가 동해 울진 죽변으로 상륙했거든. 6·25가 끝나고 북한이 잘 해 왔으면 잘 했다고 하겠는데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산은 나무가 다 잘려나가는 등 사는 게 말이 아니잖아.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나 다 몹쓸 놈들이야.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중국을 발전시킨 등소평만큼 김정일이 했으면 얼마나 좋아.”
김일성과 김정일을 ‘대놓고’ 욕하는 그가 그럼 빨치산 활동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을까.
“지금 이념을 얘기할 때가 아니야. 내가 과거에 빨갱이였고 강성이었던 건 맞지만 나는 항상 나라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했어. 지금에 와 돌이켜보면 허무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는 인상이었지만 빨치산으로 사람을 죽인 데 대한 후회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는 떳떳함이 복합적으로 비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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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6월 24일 20:4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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