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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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논단] 아나키즘의 현대적 조명 | ||||||||||||||||||
방영준 /성신여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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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해서는 평등의 이름으로,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자유의 이름으로 공격하면서 한껏 자유인의 나래를 펼쳤던 아나키즘은 1930년대 이후 거의 논의되지 않아서 거의 사라져 버린 이데올로기처럼 보였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아나키즘의 사상은 신선한 저항이념과 운동으로 관심과 흥미의 대상으로 다시 거론되기 시작하였고 80년대부터는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과 함께 아나키즘의 이론이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공산동구국가와 소련의 와해에 따른 이념적인 대결구조가 붕괴되면서 아나키즘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또한 종래의 국가기능에 대한 논쟁과 국경개념의 변화 등 소위 세계화적 논의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아나키즘적 영감들과 연결되어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아나키즘의 부활현상은 현실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사상이나 운동으로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 패러다임의 틀로도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소위 해체주의적 경향을 띠는 학자들이 아나키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을 평가하는 수사로서 아나키는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해체주의의 근대적 원류로서 흔히 지칭되는 니체가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인 막스 스터르너(Max Stirner)를 불우하기는 했으나 생산적인 인물로 평가 (George Woodcock 1962, 87) 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근래에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재조명이 거론되면서 일제식민지 독립투쟁기에 나타난 아나키즘의 재평가가 제기되고 있고, 아나키즘 문예론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또한 환경운동, 지역공동체운동, 협동조합적 상 호부조운동 등이 아나키즘적 사유틀과 연계되어 논의가 활발하게 전 개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 삶의 질과 세계화에 따른 세계 시민적 자질문제와 연결해 아나키즘이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아나키즘의 토착화에도 관심을 갖고 한국전통사상에 나타난 각종 상생 (相生)사상과도 관련시켜 보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아나키즘에의 관심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관심보다는, 아나키즘적 사유의 틀과 삶의 양식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19세기의의 실패한 이데올로기로서 평가받은 아나키즘이 재생되는 원인은 오늘날의 지구촌의 현상과 인간 삶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하는데 있어 아나키즘이 많은 시사성과 상상력을 제공해 주는데 있다 하겠다. 본 글은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아나키즘의 현대적 의의를 조명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본 글에서는 아나키즘의 사상의 특징을 먼저 도출하고 이것이 현대성의 문제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찾아보고, 또한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상되는지 살피고자 한다.
Ⅱ. 아나키즘의 특성과 스펙트럼 아나키즘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은 마치 변신술에 능한 제우스의 경호신 프로테우스(Proteus)와 씨름하는 것과 비유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독선과 권위를 배제하고, 또한 완벽한 이론을 거부하면서 자유와 개인적 판단의 우위를 강조하는 아나키즘의 자유인적 태도의 성격은 각양 각색의 견해가 발생할 가능성을 이미 열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과 볼셰비키 혁명사이의 사상사적 불연속성의 시대에 구체화된 아나키즘은 다양한 모습과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고드윈 (William Godwin), 스터르너(Max Stirner),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 바쿠닌(Mikhail Bakunin),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등 에 의해 아나키즘의 전통이 형성된 이래 아나키스트들은 ‘뒤죽박죽의 혼란된 설교자’ 또는 ‘천진난만한 꿈의 옹호자’로 비춰지기도 하였다(Alan Ritter 1980, 1). 반면에 이러한 아나키즘은 다양한 정치철학적 덕목들을 함께 연결시킬 수 있는 규범적 교의로서도 평가된다. 또한 아나키스트들은 니힐리스트. 테러리스트. 부르주아 급진주의자로 비춰지는가 하면 자유주의자. 평등주의자. 평화주의자. 자연주의자로 비춰지기도 한다.
아나키즘은 바다로 향하여 흐르는 강줄기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각의 여러 구멍을 통해 스며 나오는 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땅속을 흐르는 지하수의 흐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물이 모여 연못을 이루기도 하고, 지면의 갈라진 틈새로 분출되기도 한다(George Woodcock 1962, 15). 이렇게 교의로서 또는 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은 끊임없는 변동 속에서 생성되고 붕괴된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사라지지 않고 잠복되어질 뿐이며, 계기적인 맥락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아나키(Anarchie)란 용어는 종래에는 무질서, 혼돈의 동의어로서 이해되어 왔으나, 프루동이 이 용어를 역설적으로 채택하여 그의 사상을 표상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나키란 용어의 어원에 근거하여 혼돈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하면서 논쟁의 혼란을 더욱 조장하는 익살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이 점에서 바쿠닌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아나키는 거대한 혼란이면서, 동시에 자유와 연대성에 기초를 둔 새롭고 안정된 합리적 질서를 표상하는 역설의 용어였다. 아나키란 용어는 그 역설에서 다다이즘(Dadaism)적 체취를 풍기고 있다. 즉 어린애기의 옹알이의 의성어인 ‘다다(dada)를 채용하여 과거의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가치를 부인하고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려는 다다이스트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많은 신봉자들은 아나키란 용어의 이중성과 유연성에 불만을 느꼈으며, 또한 일반인에게 부정적인 사상으로 비쳐지고 오해를 야기시킬 위험의 가능성 때문에 이 용어를 사용하기를 주저했다. 프루동 자신도 말년에 자신을 조심스럽게 연합주의자(Federalist)라 불렀고 그의 추종자들은 상호주의(mutuallism), 꼬뮨주의(communism)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19세기말에 세바스티엥 포르 (Sebastien Faure)가 리베르테에르(Le Libertaire)란 말을 신문의 명칭으로 사용한 이래 오늘날에 와서는 아나키스트란 말과 리버터리안(Iibertarian)이라는 말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현대의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좀 더 명료한 술어를 채용하여 애매성을 줄이려 하고 있는데 자유사회주의(Iibertarian socialism) 또는 자유마을주의(Iibertarian communism)란 말이 쓰여지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되어 한동안 쓰여졌는데 이것은 일본인의 번역을 차용했는데서 비롯된다. 무정부주의로의 번역은 일제가 아나키스트를 탄압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제 일본에서도 무정부주의가 아나키즘을 표상하는 용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원음을 그대로 쓰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나키즘이란 원음을 그대로 쓰기도 하고 자유사회사상(운동), 자유공동체주의(운동), 자주공동체운동 등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일제 독립투쟁기에 우당 이회영, 단재 신채효와 함께 아나키즘의 기치 아래 독립운동을 한 우관 이 정규(又觀 李丁奎)는 해방이후 「자유사회운동」이란 이름으로 아나키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최근 대구와 부산 등에서는 「아나키즘 연구회」를 만들어 시민운동, 환경운동, 공동체운동 등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으나 아나키즘을 한국어로 어떤 용어로 표상할 것인가에 대해 합의를 시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체로 많이 쓰이는 용어가 자유공동체, 또는 자주 공동체가 아닌가 느껴진다. 아나키적 입장에서 볼 때 용어를 획일적으로 통일한다는 것은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할 것이다.
아나키즘은 이데올로기적 분광도(分光圖)에 다양하게 위치하고 있다. 이를 크게 나누어 보면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상호주의적 아나키즘,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으로 대별할 수 있다. 다양한 아나키스트 유파간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들이 같은 아나키스트로 불리울 수 있는 공통적 특징들이 있다. 이것은 아나키즘 정의론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① 자연론적 사회관 ② 자주인적 개인 ③ 공동체의 지향 ④ 권위에의 저항 등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이를 바탕을 하고 현실을 인식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아나키스트 유파간의 차이는 사회혁명의 방법과 경제조직이라는 두 개의 한정된 범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모든 유파는 만일 아나키스트 의 희망이 달성되어 권위적 정치지배가 끝난다면 경제적 관계가 사회조직의 중요분야로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아나키스트의 여러 유파간의 차이는 ‘협동적 사물의 관계’가 개인의 자유와 자주성을 침해할 위험없이 어디까지 적용해야 하는냐 하는 견해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분광도의 한쪽 끝에 선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은 금욕적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를 넘는 협동을 위험시한다.
그 협동이 개인의 자유와 자주성을 침해할 가능성에 깊은 우려를 하고 있다. 반면에 다른 방향의 극에 선 아나르코 꼬뮨주의자들은 상호연결하는 상호부조제도의 광범위한 망상조직을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한 보호수단으로 구상하고 있다.
알란 리터(Alan Ritter)는 아나키즘의 목표를 ‘공동체적 개체성’ (Commual Individuality)을 단일명제를 내세우고 이를 추구하려는 아나키스트들의 계획들을 분석하면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와는 다른 아나키즘 나름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Alan Ritter 1980, 25-39). 자주적 개인과 공동체를 결합시키는 구도는 그것이 실천 프로그램으로 화할 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비난하면서 자유주의로 남아있길 원하고,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면서 사회주의자로 남아있길 원한다. 그래서 아나키즘 속에서 환상이 가득찬 사회인식의 풍요한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리라.
아나키즘 정의관의 밑바탕에는 공동체(communities)라는 주제가 깊게 깔려 있다. 고전적 아나키스트들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사상사적 맥락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성의 시대에 활약했던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계약의 사상을 사회관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이론적인 근거로 활용한 바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계약의 사상이 쇠퇴하고 공동체 사상이 등장하게 된다. 공동체는 높은 정도의 인격적 친밀, 정서적 깊이, 도덕적 헌신, 사회적 응집, 시간적 연속성을 특징으로 하는 모든 형태의 사회관계를 포괄하는 용어이다. 공동체가 기초로 하고 있는 인간개념은 인간이 사회질서 속에서 획득하게 되는 몇 가지 분리되어 있는 역할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전체성에 입각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태도는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지향 및 이데올로기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아나키스트의 공동체적 삶의 지향은 항상 개인의 자유성과 자주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왔고 이에 자주관리(self- management)라는 것을 주요 관심사로 등장하게 만든다. 아나키스트들의 국가에 대한 집요한 공격과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감도 이와 관계가 깊다. 프루동은 ‘중앙집권 하에서의 국가의 거대한 권력적 조직 하에 직면하고 있는 한, 개인도 집단도 솔선하여 자발적으로 독자적 행동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Daniel Guerin 1970, 43)라고 주장한다. ‘자주적 소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은 오늘날 매우 예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미래학자 네이스비트(John Naisbitt)는 그의 저서 〈 대조류(Megatrends) 〉에서 현대사회의 10대 조류 중 지방분권사회, 자조사회, 수평적인 네트워크 등을 거론하고 있다. 드러커(Peter F. Drucker)도 〈새로운 현실 (The New Realities)에서 새로운 다원사회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조직과 인간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Peter F.Drucker 1989, 참조). 이런 문제들은 조직 속에서 인간의 탄력성을 어떻게 유지하느냐 하는 과제와 직결되는 것으로 오늘날 여러 종류의 조직이론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Gibson Burrell & Gareth Morgan 1979, 279-325 참조). 현대의 조직이론은 개인의 자치성과 공동체성을 어떻게 확보하는냐 하는 아나키스트의 탐구에 깊은 영감을 얻고 있다고 하겠다.
아나키스트들의 자주공동체에의 지향은 매우 목가적이고 낭만스러운 경향을 띠기도 한다. 기실 자주 공동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냐 하는 문제와 어떤 방법으로 이룩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다양하고 모순되기까지 한다. 이는 공동체에 대한 보수주의적 입장과 급진주의적 입장이 서로 얽히어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인은 아나키즘에 나타난 공동체적 성격이 고전적인 우주론적 정의관과 근대적 자연권 사상에 바탕을 둔 자유론적 정의관의 결합에서 나왔다는 사실에서 기인된 것으로 볼 수 있다(방영준 1990, 79).
이것은 아나키즘이 진보를 어떻게 보느냐의 시각과도 관련된다. 19세기 대개의 좌익에 속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들도 진보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다. 크로포트킨은 조심스레 아나키즘과 진화를 결부시켰으며, 프루동은 실제로 〈진보의 철학(Philosophie du Progres)〉를 썼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진보를 항상 조건부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기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나키즘의 진보적 요소의 존재를 부정해 왔으며 반동적 경향을 가졌다고 아나키스트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자신의 견해에서 말한다면 그들이 전혀 잘못 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사회의 발달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아나키스트들은 종종 이상화한 미래와 이상화한 과거와의 천연자석의 중간에 드리워져 있다는 ‘마호멧의 관’ 처럼 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아나키스트가 보는 과거는 먼 고대의 비전과 닮은 경우가 많다. 그 고대의 비전은 조직된 정부아래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협동에 의하여 존재한, 혹은 존재했다고 상상되는 사회의 혼합물이다. 이렇게 많은 아나키스트들 공동체와 자유인의 유형을 과거 속에서 더듬으면서 그 연속성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과거에의 향수는 아나키스트들이 소박한 생활과 자연에의 친화를 미덕으로 보는 태도를 가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아나키스트 공동체 운동이 도시보다는 농촌의 체취가 많이 풍기고 있음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또한 아나키스트들이 생태주의 운동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오늘날 아나키즘의 자치공동체 운동이 성공적으로 실천된 곳으로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몬드라곤 협동조합 공동체가 세계적인 관심이 되고 있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은 일찍이 아나키즘 자치운동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몬드라곤 협동조합 공동체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부정의의 문제와 사회주의의 비효율을 극복하여 정의와 효율을 통합시킨 실천 사례로서, 인류미래의 실험장으로서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조합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그런 왜소한 집단이 아니다.
협동조합의 노동인민금고는 스페인 은행 중 제 7의 자산규모를 지니고 있으며, 소비자 협동조합은 스페인 유통업체 중 6위의 규모이다. 협동조합 기업체의 하나인 울고 협동조합의 가전제품은 스페인 가전제품의 약 1/4를 점유하고 있다. 자치공동체를 통해 인간적이면서 효율적인 경제체제의 실험이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William Foote,Whyte & Kathleen King,Whyte, 199 참조). 그 동안 아나키즘이 너무 이상적인 것으로 비판받는 것이 바로 자치, 자주 공동체의 열망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이 현실로 되었고, 이것은 미래사회의 바람직한 사회체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영감과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하겠다. 몬드라곤 협동조합 공동체보다 역사가 오래 되면서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이끌어 온 자치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의 ‘키부츠’를 들 수 있다.
우리의 전통사회에는 공동체적 생활양식과 각 종의 상생(相生)사상이 있다. 이것을 오늘날 자치, 자주 공동체 운동으로 어떻게 재생시킬 것인가 하는 데에 관심이 모아지기도 한다. 김지하의 생명운동과 자치운동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현상은 고전적 아나키스트의 이론에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 아나키스트들은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난만큼이나 부르주아 민주주의 기만을 비난하고 있다. 프루동에 의하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입헌 전제정치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인민이 주권자라고 선언하는 것은 가부장자의 술책이며, 실제로 인민은 주권자라는 호칭을 가졌을 뿐 조금도 위엄이 없는 왕이요, 왕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인민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으며 그의 주권은 보통선거의 정기적 실시에 의하여 위임되고, 3년 내지 5년마다 권리양도가 되풀이 되며, 통치자는 왕좌에서 추방되지만 대권은 고스란히 보존된다는 것이다(Daniel Guerrin 1970, 17). 바쿠닌 역시 “대의제도는 민중을 위한 보증이 되기는커녕 정반대로 민중을 통치하기 위한 귀족정치의 존속을 창출하고 보장하는 것” 으로 보았다. 보통선거는 술책이요, 미끼요, 안전판이다. 이른바, “인민의 의지라는 이름과 구실 하에 인민을 억압하고 몰락시키는 교묘한 수단” 이요 “은행과 경찰과 군대에 의하여 지탱되는, 실제는 전제적인 통치권력을 그 이면에 숨기고 있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는 투표용지에 의한 해방을 신용하지 않는다. 또한 아나키즘은 인민의 주권보다 개인의 주권을 옹호한다. 이것은 자연히 대의제 민주주의의 형식과 견해의 많은 것을 거부함을 의미한다. 의회제도는 개인이 그의 주권을 대표자에게 넘겨줌으로써 주권의 버림을 의미하는 까닭으로 거부된다. 현대의 아나키스트인 로버트 울프(Robert Wolff) 교수 역시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
울프에 의하면 인간은 타인의 의지에 예속되는 한 자율적일 수 없으므로, 만약에 스스로 입법자인 동시에 준법자일 수 있다면 개인의 자율과 국가의 권위는 일치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오직 만장일치적 직접민주주의에서 인간은 스스로가 입법자이며 준법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울프는 대의민주주의의 장애가 단순히 기술적인 것이므로 이를 보완함으로써 직접민주주의의 체제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제안한다. 즉 개인은 의사결정을 위해서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안건들에 대해서는 텔레비전을 통한 전문가들의 충분한 대담과 해설을 시청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정립한 후, 정해진 시간에 고안된 투표기계(home voting machine)를 사용함으로써 직접 투표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R. P. Wolff 1970, 34-37).
이렇게 울프는 개인의 자율과 국가의 권위가 일치하는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형태는 만장일치적 직접민주주의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울프의 이러한 합법적 정부의 예증은 경험상 매우 불충분하며 때로는 궤변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프의 주장은 정치철학적으로 현대 민주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현대 아나키스트들이 소위 신사회 운동이라 불리우는 사회운동과 밀접한 인연을 맺는 것은 아나키즘의 혁명주체론과도 깊은 관계를 찾을 수 있겠다. 아나키즘에 있어 혁명주체는 ‘대중’ 또는 ‘민중’ 이라는 명칭하에 매우 포괄적이다. 아나키스트들이 계급투쟁의 관념을 인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그것을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로 제한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반란의 본능을 모든 대중계급의 공유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바쿠닌에 의해 잘 대변된다. “혁명의 비전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도시와 지방전체에서 거대하게 일어나는 억압받는 대중의 진정한 반란이며, 노동자 계급 외에도 사회의 어두운 곳에 있는 모든 계급을 포함하는 것이다(Paul Avrich 1967, 32).
이렇게 아나키스트들은 합리론자로서의 냉소를 가졌던 마르크스와 달리 비노동자들의 혁명능력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유물사관에 바탕을 둔 사회분석의 과정과 결과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나키스트들의 계급관은 매우 본능적인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태도는 어떤 법칙을 만들어 과학적 예언이니 하는 것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경멸과도 관련된다. 이러한 아나키스트들의 생각은 마르크스주의자와 끊임없는 논쟁을 야기시켜 왔다.
아나키스트들의 전체를 망라한 대중혁명은 마르크스가 경멸해 왔던 비조직적, 개별적 사회요소들에게도 기회를 준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견해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의 계급을 구성할 능력도 없으며, 부르주아의 필수불가결한 성분도 되지 못한다. 다만 이들은 중간계급의 앙금이자 낙오된 인텔리들이다(Paul Avrich 1967, 33).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이러한 낙오된 인텔리들을 격렬하게 싸울 수 있는 혁명적 힘으로 보고 있다. 즉 잠자고 있는 대중의 반란성을 일깨워 혁명의 불을 붙이는 역할을 인텔리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나키즘 운동에 있어 대중의 자발성 문제와 엘리트의 역할문제에 끊임없는 혼선을 야기시킨다.
여하튼 아나키스트들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와 혁명주체의 문제는 아나키즘을 민중주의와 유사한 성격을 어느 정도는 공유할 수 있는 요소로 지적될 수도 있겠다. 또한 아나키즘과 신좌파(NEW Left)운동의 관련성 논의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신좌파 철학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국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결정하게 하라”와 같은 구호에 나타나듯이 참여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에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대의제 민주주의의에 대한 혐오감과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 때문에 황당한 의견으로 비쳐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태도가 항상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프루동은 1848년 6월 자신이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것을 묵인했으며, 그 후에도 여러번 선거와 관련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비일관성은 특히 스페인에서의 아나키스트들이 취한 행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맹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 상대적 진보를 인정하고 있다. 바쿠닌은 “가장 불완전한 공화국일지라도 가장 개발된 군주제보다 천배나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Daniel Guerin 1970, 20).
현대의 아나키스트들은 대의제를 부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대의제를 통해 아나키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녹색당과 미국의 리버터리언 정당이다. 그러나 그들의 변화된 태도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대신할 구체적 대안을 찾지 못한데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현대 아나키스트들이 참여 민주주의 운동이나 신사회 운동에 뛰어 든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여하튼 아나키즘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오늘날 현대민주주의에 나타난 부정적인 제증후군과 관련시켜 볼 때 쉽게 간과해 버리기는 어려운 예언력을 지니고 있다. 일찍이 아나키스트들이 마르크시즘은 전체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한 예언이 현실로 되었듯이 직접민주의의 실현이 어떤 형태로 실현될지 궁금하다.
아나키즘의 참여 민주주의와 관련시켜 논의해 볼 수 있는 것이 시민사회론이다. 시민사회는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 바깥에서 개인들과 집단간에 사적 또는 자발적 협정에 의해 조직되는 사회생활의 영역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시민사회는 문화적 유대에 따라 조직되는 커뮤니티와 경제적 교환에 따라 조직되는 시장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가 틀 지어지는 유형에 따라 다양한 사회질서의 조직 유형이 나타난다.
지금까지의 실험에서 완전한 시장과 완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선택은 항상 불완전한 시장과 불완전한 국가 또는 양자의 불완전한 결합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시장과 국가 외에 다른 대안적인 사회질서는 없는가 하는 논의가 제기된다. 이러한 대안으로 결사체(Association) 모델이 제기된다. 결사체 모델에 기초한 신조합주의(Neo-coporatism) 및, 협의주의 (consociationalism)는 아나키즘의 참여 민주주의 과제와 관련시켜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아나키즘의 사회운동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아나키즘이 지니고 있는 저항의 기질이다. 아나키즘의 인식체계에는 본능적인 저항감이 짙게 깔려있다. 포르(Sebasteien Faure)는 “권위를 부정하고 그것과 싸우는 자는 누구나 아나키스트다” (George Woodcock 1962, 11)라고 말한다. 이 말은 아나키즘에 대해 많은 혼동을 야기시키고 있으나 그것의 특징만은 밝히고 있다고 하겠다.
고전적 아나키스트들은 한결같이 반항자로 규정지어지고 있다. 스티로너, 푸르동, 바쿠닌 등이 그러하다. 소로(H.D. Thoreau)는 〈시민불복종 (civil Disobedience)〉서 아나키스트의 저항감을 더욱 구체화시킨다. 저항을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세련되게 표현한 학자로서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가 있다. 그는〈방법론의 도전(Against Method)〉에서 부정과 저항을 자유를 증대하고 충족된 삶과 보람있는 삶을 추구하려는 시도로서 옹호한다(Paul Feyeraband 1975, 20).
아나키스트들의 저항의식은 아나키 상태가 초래할 혼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기실 아나키즘이 니힐리즘, 테러리즘의 한 양상으로 보이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저항과 도전에 기인한다. 이러한 아나키스트의 저항의식이 현대의 사회운동에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현대 아나키스트의 저항의식은 사회운동보다는 예술분야에서 그 저항의 몸짓을 한껏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정보화 사회의 논의와 함께 대의제 민주주의의 문제와 연결되어 전자민주주의란 용어가 등장하고 있다. 구미의 젊은 아나키스트들이 인터넷을 통해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세계공동체 운동을 전개하고 있고 참여적인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앞으로 올 정보와 사회는 아나키즘의 예언을 과연 어떤 형태로 현실화 시킬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
호로비치(Irving L. Horowitz)는 아나키즘은 자연이라는 아이디어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Horowitz 1970, 22). 사실상 아나키스트들은 ‘자연’ 이라는 아이디어에 강박 당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자연개념은 거의 모든 주도적인 이론가들의 저작에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개념은 아나키즘의 교의, 즉 권위의 거부, 강제적 통치기구에 대한 혐오, 상호부조, 소박성, 조직의 분산화, 정치에의 직접참여 등의 원천이다.
현대의 생태환경론자에 제일 많은 영감을 준 고전적 아나키스트는 크로포트킨이라 할 수 있겠다. 크로포트킨은 1899년의 그의 저서 「농장. 공장. 직장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에서 생태론적 공동체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이 모델은 꽤나 루소적이다. 이것은 아나키스트들의 테크놀로지에 관한 양가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아나키스트들은 근대산업이 발달하면서 테크놀로지가 공동체의 사회적, 심리적 전제조건을 위협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산업혁명이 막 시작되었을 때 글을 쓴 고드윈조차도 산업혁명 속에서 아나키의 도래를 위협하는 여러 징후를 감지하고 있다. 대개의 아나키스트들은 문제점, 기계화로 인한 직업의 단편화와 불평등, 구성원의 공동체적 개성의 손상 등을 테크놀로지가 미칠 부정적 영향으로 거론하고 있다.
또한 테크놀로지의 사회적, 심리적 악영향뿐만 아니라 그것의 정치적 효과도 염려하였다. 바쿠닌은 테크놀로지가 더욱 복잡해지고 이해하기 어렵게 될 뿐만 아니라 각 산업분야가 다른 산업분야와의 관계에서 테크놀로지의 효용성에 더욱 의존적이 되고 따라서 기술관리자들은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정치권력을 얻게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즉 “모든 체제 가운데서 가장 귀족적이고 전제적이며 오만하고 남을 잘 경멸하는 체제인 과학적 지성의 지배가 사회를 위협할 것이다. 전문가라는 새로운 계급, 새로운 위계제도가 생겨 날 것이다. 세계는 과학으로 지배하는 소수와 무지해진 다수로 분리될 것이다”(Alan Ritter 1980, 84).
그러나 산업 테크놀러지가 아나키스트들을 놀라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산업 테크놀로지를 절대적으로 비난하면서 아나키즘 사회에서 그 필요성을 중요하지 않게 취급하리라고 예측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결코 기계파괴주의자(Luddites)는 아니다. 아나키스트들이 권위주의적 제도나 조직에 대하여 엄청나게 비난할 것과 비교해 볼 때 테크놀로지에 대한 비난은 상대적이다.
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제할 수 없는 테크놀리지이다. 적절히 통제된 테크놀로지는 성장하는 희망의 원천으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그들은 테크놀로지를 통제하고 이용하여 좋은 하인올 만들기 위한 다양한 방법과 계획들을 제시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와 자본주의자를 막론하고 19세기의 테크놀로지 숭배자들은 테크놀로지의 무제한적인 성장을 믿었다.
반면에 아나키스트들은 엄격하게 통제되는 경우에만 테크놀로지를 선택했다. 산업 테크놀로지의 기계적인 면을 이용하는 반면 조직화된 측면은 거부함으로써 아나키스트들은 19세기에 이미 약속되었던 테크놀로지의 미래의 전망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태도는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자연론적 사회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자연과의 조화를 기계가 저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자연이라는 용어에 대해 고향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그것이 명확하지 않다 하더라도 선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들에게 있어 자연이라는 용어는 서술과 평가라는 두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자연은 ‘사물이 현재하는 상태’와 ‘사물이 마땅히 지향할 바’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
아나키즘의 자연친화력은 우리에게 「윌든」이란 소설로 잘 알려진 아나키스트 헨리 소로(Henry David Thoreau)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신을 자연과 동일시할 수 있고 강줄기가 인도하는 대로 맡겨 둘 용의가 있음’ 을 이야기한다(Wilson Carey Mcwilliams 1973, 290). 그는 창조적인 무위성 내지 자율성은 인간의 정신적인 안녕, 건강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또한 그에게 있어 여타의 사회적 경험과는 달리 자연을 접함으로써 얻어지는 경험은 창조적 상상력에 촉진제의 역할을 하는 것에 못지않게 도덕적 의지의 형성을 위한 단련과 수양의 역할도 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소로는 인간과 자연의 친교와 합일은 인간과의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의 경우, 직접행동의 요구 내지 참여에의 요구도 그 근저에는 호로비츠의 어구를 빌자면 ‘무위, 자율의 심리적인 제 가치에 대한 주장 내지 고집(Horowitz 1970, 22)이 깔려 있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인식, 즉 자연의 유일성. 화합성. 자율성이 아나키스트로 하여금 개인의 자유와 질서정연한 사회생활과의 조화 내지 통일을 믿게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현대 아나키스트들이 생태론적인 환경운동에 앞장서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의 많은 환경론자들은 스스로 인식하든 안하든간에 아나키즘적 사유의 틀과 유사하다. 칼렌바흐(E. Callenbach)나 슈마허(E. Schmacher)가 제시한 에코토피아(Ecotopia)의 그림들도 아나키즘이 제시한 공동체의 모습과 유사하다. 특히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고 주장한 슈마허가 「A Guide for the Perplexed」라는 저서에서 통일(Unit)과 획일(Uniformity)을 서로 반대축으로 설정하고, 통일은 천당으로 가는 길이고 획일은 지옥으로 가는 길로 표현하면서 제시하는 사회상은 아나키즘의 자연친화적 공동체상과 궤도를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대서양사상이 인간중심적(homocentric)이며 기계론적. 원자론적 자연관의 성격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것이 현대의 기술모방적 문화(technomorphic culture)의 근원으로 지적 받고 있다. 또한 이것이 오늘의 환경문제를 야기시킨 원인으로 거론됨을 감안할 때 아나키즘은 근대서양사상의 이탈자로 보일 수도 있겠다. 아나키즘이 동양사상, 특히 도교사상과 유사하게 비교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아나키즘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매우 근원적이고 반정치적이다. 아나키즘이 제시하는 지향가치는 언뜻 유토피안 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현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아나키즘은 교조적 이념과 교조적 실천방안을 경멸하고 조직을 경시한다. 이러한 특징들은 아나키즘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치사상으로 평가받게 만든다. 그러나 정치적 태도로서의 아나키즘의 영속성은 실패의 대가로 얻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아나키즘의 생명력은 그 실패를 통해 지속된다는 것이다.
아나키즘에서 유의할 점은 그 기질의 특징이다. 한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규정지우는 데는 그것이 내세우는 교의와 더불어 그것 자체가 지니는 기질이 중요한 요소로 거론된다. 아나키즘의 근원에 깔려 있는 것은 분노와 저항이다. 앺터(David Apter 1971, 1)는 아나키즘을 ‘분노를 자극하는 피뢰침’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나키즘이 반감을 사는 것도, 동시에 많은 관심이 되는 것도 이 분노와 저항의 기질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분노와 저항의 기질은 계기적 동태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아나키즘의 재등장은 아나키즘의 예언력에 기인하고 있다. 19세기의 고전적 아나키스트들은 그 시대적 상황과 비교해 볼 때 너무 앞서서 나간지도 모른다. 오늘의 아나키즘은 유토피아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현실대안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앞두고 아나키즘적 사유의 틀은 여러 영역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아나키즘이란 용어를 빌리든 안 빌리든, 아나키즘의 존재 여부를 인식하든 안하던 간에 아나키즘적 사유의 틀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1세기를 전망하는 여러 이론들은 아나키즘의 사유 틀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현대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재등장으로 평가하고 있고, 사상적 선배의 족적을 모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조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날 정치이념으로서 아나키즘은 해체되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부터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역에서 아나키즘적 사유의 틀을 차용해 갔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아나키즘은 정치이념으로라기 보다는 생활양식과 사회운동적 차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하겠다.
기실 아나키즘의 본질은 유토피아니즘과 동일할 수는 없다. 유토피니즘이 추구하는 공동선의 특성이 완전사회를 지향하기 위한 폐쇄적 신념체계를 구축하면서 역사주의적 기조 위에 바탕을 둔 전체주의적 성향이 강한 반면, 아나키즘은 어떤 이상사회를 지향하면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상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이론적으로 어떤 확신을 주기보다는 그 이론이 충분히 인정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의 채찍으로서 또는 선동자로서 그 힘을 발휘할 것이다. 아나키즘이 끊임없는 사회변화 속에서 성장하고 붕괴하고 그리고 잠복되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아나키즘 사회는 항상 성장해 오고 있는 욕구에 따라서 끊임없이 진보하고 항상 재조정되는 사회라 하겠다. 따라서 현대의 아나키스트들은 고전적 아나키스트의 교의를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인 사유의 틀은 받아드리면서 구체적인 현실인식에는 창조적이다.
국가, 대의제, 조직, 법률, 분업 등의 문제 등에 있어 고전적 아나키스트에 비해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고전적 아나키즘의 예언을 확인해 주고 있는 오늘날에 현대 아나키즘이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할 것인지에 관심이 간다. 또한 아나키즘의 저항기질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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