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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아나키즘

아나키즘의 경제 논의와 환경 문제 /구승회

by 마리산인1324 2007. 7. 17.

 

<안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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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의 경제논의와 환경문제                                     
                                       

                               
  - 구승회 (동국대 강사) -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쉽게  비현실적일 만큼 과격한 이상주의 라는 표식을 붙인다. 아나키스트는 분명 유토피아를 가지고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의 이상이 단순한 유토피아라거나 비실제적이라는 주장은 인간의 본성을 사악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보고, 여기에 근거하여 경쟁과 시기심, 사리사욕을 만족시키는 사회가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핑계이다.


   중앙집권적 권위와 통제로 비대해진 거대국가는 개인과 공동체의 공적(共敵)이다. 아나키 공동체는 거대사회의 특성인 탈개성적이고, 기계화된 관계가 순수하게 사회적이고, 협동적인 사회로 환원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작은 규모일 때만 번성할 수 있다. 지역주의(localismus), 탈중심주의는 아나키즘의사회-경제이론의 전제조건이다. 이는 사회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추구하며, 자유로운 개인들이 경제적·정치적 활동을 위한 자율적인 조직을 위한 이론이다.
  
   I. 아나키즘의 사회-경제이론의 철학적 기초
  
   1. 아나키즘은 환원주의를 반대한다


   아나키즘은 개인적 환원주의와 전체론적 환원주의를 거부한다. 아나키즘은 개인과 사회를 상호 환원 가능한 것으로 보는 대의정치와 의회제도를 거부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대의정치란 자유사회와는 어울리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한 정부형태라고 주장한다.


   반환원주의는 대의정치라는 대안은 진정한  사회적인  조직 및 의사결정 방법이 아니며, 나아가서  평등한 사회적 개인 을 보증해 주는 사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의사결정의 진정한 방법은 사람들이  그들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도  보다 큰 사회적 권력에 자유로이 자신의 권력을 결합시키므로써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국가나 대의체는 의사결정을 위해 대리인에게, 그리고 결국에는 정부에 권력을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 이 두가지 사회조직원리는 전적으로 개인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즉 개인을  사회적 개인(Gesellschaftliches Individuum) 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적 개인(privates Individuum) 으로 보느냐의 차이이다.
  
   2. 아나키즘은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사람들은  아나키즘이란 국가를 최소화 내지는 폐지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고 알고 있다. 그러나 아나키즘 본래의 의도는 국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환원론 ,  전체환원론 을 거부하고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유 자본주의(Freimarkt-Kapitalismus) 는 극단적인 개인 환원론에 근거해 있다. 예를 들면 노직의 이론이 그렇다. 노직에 의하면 재산(富)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산물(개인의 사적인 노동의 산물)이며, 부는 완전히 자족적인 방식으로 생산된다. 나아가서 이기적인 각자의 수입이므로 국가나 사회가 간섭할 아무런 권리도 없으며, 개인은 이를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노직은 이른바 개인의  사유재산 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국가(Minimalstaat) 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적 개인과 사적 소유를 보호하기 위해 주장되는 노직의 최소국가 개념은 아나키즘의 다원적 구조와 조화될 수 없는 근본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 하면 노직의 주장은 개인과 사회는 사적 개인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자유방임 자본주의이다.


   아나키즘은 국가의 사회적 기능을 거부하지 않는다. 사회적 개인 및 집단이 자유로운 조직을 통해 국가가 진정으로 효과적인 사회적 기능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만인이 동등하게 생산수단에 접근할 수 있고, 사회생활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를테면 쓰레기 종량제, 승용차 10부제, 골목길 주차제도 개선, 시내버스노선을 조정하는 일 등)에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참여하며, 동등한 권리를 갖는 사회를 원했던 것이지, 그런 사회를 포기하거나 폐지하자는 주장은 아니었다.  자유자본주의 는 사회에 대한 부정성에 기초하지만, 아나키즘은 사회의 긍정성의 원리에 기초한다.
  
   II. 협동교환과 참여의 경제
   (Cooperative exchange and the economy of involvement)
  
   이상적인 아나키 공동체를위해 어떤 경제체계가 바람직할까? 우선 규모의 문제를 놓고 보면, 분배가 필요없는 사회라면 공동체는 모든 성원이 서로 얼굴을 알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능한 한 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가족이 먹기 위해 야채를 기르는 것은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지만, 가능한 한 규모를 크게 할 경우 자본주의의 그것만큼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중앙집중화, 중심화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쓰레기나, 폐기물을 효과적으로이용하고, 에너지생산을 최소화하며, 지역 환경문제를 지역 사람들에 의해 통제하는 등, 많은 환경적인 잇점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공동생산에서는 익명에 의한 생산이 아니라, 아는 사람에 의해 생산되어야 한다. 누가 기른 배추인지, 돼지인지, 혹은 어느 집 과수원에서 자란 사과인지를 알고 먹는 수준의 공동체가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대로 공동체 성원의 욕구가 자동차이거나, 지하철일 경우, 이 역시 문제의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권위적인 규제없이 자유로운 공공체계(행정기능)의 운용은 가능한한 소규모여야 할 것이다.


   생산과 분배체계의 규모가 커지면 익명의 결핍 또한 커진다. 다른 말로 하면 진정한 결핍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는 의사결핍(Pseudo-Not)의 규모가 그만큼 커진다. 소비자는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소비에 대해 관심과 책임을 다하지 않게 되고, 자본주의라는 거대창고(수퍼마켓)에서는 무책임한 소비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바로 이런 소비체계 하에서 상품생산에 투여한 노동의 가치는  익명의 심연으로 소멸해 버린다는 점이다.
  
   1. 교환이란 무엇이며, 누구에 의한 교환인가?


   이제 이윤이 없고, 이익, 차용, 지대가 없는 진정한 아나키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교환이론을 제시해야 할 때이다. 아나키 사회에 필요한 적절한 분배이론은 자본주의 경제이론의 핵심인 사적 개인을 사회적 개인으로대체함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다음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아나키 사회-경제이론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① 교환이란 무엇이며, 누구에의한 교환인가? ② 교환을 지배하는 원칙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③ 생산물은 어떻게 필요에 따라 조절될 수 있는가? 교환이 무엇이며, 누구에 의한 교환인가? 아나키즘을 위한 교환체계에서는 지금까지 자본주의에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교환가능한 것들이  교환금지 된다. 아나키즘의 반환원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충분하지 않은 모든 것은 경제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최소한의 제한조건만 만족시키면 무한정 교환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가설을 정면으로 부인한다. 예를
들면 반환원주의에서는 토지는 교환대상이 아니다.그 외에 어떤 생산수단도 교환될 수 없다.


지하자원, 공기, 물, 바다, 강, 삼림 등 모든 자연자원은 교환될 수 없다. 교환될 수 없으므로 값이 매겨지지 않고,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다. 부족할 경우에는  사회적  동의를 얻어 이용할 수 있다. 그것이무가치해서가 아니라, 교환을 위해 사회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공동체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이를 교환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은 그것의 사회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로 교환되는 것은 생산물 자체가 아니라, 생산물을 산출하는 데 투여된 노동이라는 사실을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 즉 교환되는 것은 생산물에 투여되어 표현되는 노동 이며, 그 노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상품은 이차적이거나, 다양한 다른 형태로 소유되거나 교환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노동은교환될 수 있다. 그리고 그외의 모든 것은 공적인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이것만이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소유되거나 교환될 수 있다.
  
   2. 노동가치이론에서 노동교환이론으로


   아나키 공동체내에서 노동은일종의바터(barter) 형식으로 교환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보편성과 유연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동과 저장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은 한번 투여되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이동 보관이 불가능하여 값을 매기거나, 가치를 비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는 가격체계나 등가교환 체계로 해소될 수 있다. 교환조건은 순수 노동이나 숙련기술의 교환이어야 하며, 그래서 원칙적으로 교환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교환가격을 결정함에 있어서 유일한 가격결정 요인으로 만드는, 다시 말해서  노동교환이론(Theorie der Arbeitsaustausch) 으로 만드는 그런 교환체계를 필요로 한다.


   결론은 이러하다: 교환을 지배하는 이론적 근거는 .노.동.교.환.이.론.이지 고전경제학, 특히 고전적인 맑스 경제학에서 주장되어 온 .노.동.가.치.이.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시스템 내에서 노동은  가격 을 결정-그것은 당연히 등가교환이다-할 뿐, 결코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노동에는 많은 자연물, 생태계, 그리고 땅 (토지)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고, 노동교환체계에서 고유한 높은 가치를 가지기 때문 이다. 똑같은 이유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라는 고전적인 구분은 여기서 제시하는 가격과 가치의구분과는 다르다. 가치란 인간의 활용여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상품의 가격이란 사실상  시장의 메타퍼(Metaphor des Markets) 에 다름 아니다.


   노동교환이론은 맑스의 이론의 가정(자연물은 무가치하다거나 자연물의 가치는 전적으로 인간의 노동, 혹은 이용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는 주장)을 전제하지 않아도 된다.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시켰던 맑스의 이런 전제는 노동교환이론에 포함되어 있는 전제와는 차원이 다른 전혀 별개의 전제조건이다.


   요약하면 아나키 사회-경제체제에서 교환가능한 것은 오로지 상품에 표현되어 있는 노동일 뿐이라는 점, 그리고 전체론과는 달리 교환은 사회적 전체와 마찬가지로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러한 노동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점이다. 

   
   3. 교환을 지배하는 원칙들은 무엇인가


   오로지 노동만이 교환가능하다고 보는 아나키 교환체계에서 상품의 가격-그것은 결국 등가교환이다-은 전적으로 상품을 구체화시키는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교환은 등가노동이라는 의미의 교환이다. 노동등가란 시장이라는 수단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아나키 경제이론이 반환원적 사회이론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때,  교환은 사적 개인들간의 교환이 아니라, 사회적 개인들간의 교환이어야 한다.  사적 개인에게 있어서 합리적이라 함은 개인의 이기적인 관심을 가능한 한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런 합리성의 개념은고전파 경제학의 경제적 거래에서의 이윤 극대화라는 목표에 잘 나타나 있다. 이기적인 관심을 가진 사적 개인들이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타인의 관심사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사회적 개인에게는 전혀 불합리한 것이다.


   아나키즘의 노동교환이론은 반환원적이다. 이는 개인들간의 자유로운 경제적 교환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는 공산주의적이면서도 개인을 부정하지 않으며, 동시에 시장경제체제에서의 사회성  개념도 부인하지 않는다. 반대로 시장경제체제는  사회성 을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시장은 이윤 극대화의 전형으로 보고, 시장은 이기심으로 가득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둘째; 개인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립하는 상품을 소유, 통제, 교환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리하여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은 무엇이건 완전한 시장가치로 환원할 수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4. 생산물은 어떻게 필요에 따라 조절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전체론자는 중앙집권화된 계획과 통제에 의해 조절될 수 있다고 말할 것이고, 반대로 부분론자는 자본주의시장의 수요/공급의 매카니즘에 의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런 시장경제 매카니즘에서 생산자와 소비자는 상호 만족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를 최대로 하기 위해 어떻게 타인의 욕구와 필요를 이용할 것인가 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생산자는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소비자의 욕구를 이용하고, 소비자는 거꾸로 생산자를 이용한다.


   우리가 제시한 협동교환과 참여의 경제는 시장의 이런 비사회적(asozial)-반사회적 관계를  협동적 참여 라는 사회적 관계로 대치시킨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 서로 협동한다. 거기서 서로의 상호의존적인 관심사를 확인한다. 생산자와 구매자는 이제 익명으로 있지 않다.


   한마디로 하면 자본주의의 자족적인 개인들의 집합을 아나키즘의 상호의존적인 집합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런 협동적 참여의 교환체계에서 생산과 소비의  책임 을 공유한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많이 통용되던 매커니즘이다. 얼굴도 모르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시장이라는 익명의 심연에서 만나 한쪽에서는 이윤을 챙기고, 다른 쪽에서는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는 그런 매커니즘하에서는 노동가치가 소외되고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책임이라는 원칙을 소멸시켜 생태적·환경적 위기를 재촉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굴을 아는 사람들 사이의  협동적 참여 는 생산과 소비를 개인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복원시킴으로써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함은 물론이고, 생태-환경적 위기해소에도 큰 도움이 되는 교환체계라 할 수 있다.


   협동적 참여의 경제 체제에서 생산은 일종의 사전 주문 생산방식이 이상적일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가 강화되면 될 수록, 노동은 소외되지 않고, 협동적 등가교환이 정착될 것이며, 사회적 관계를 토대로 생태론적이고, 환경친화적인 단순 경제체제로 이행될 것이다. 따라서 협동적 참여의 교환경제체제에서는 자본주의시장 경제에서 보이는 경제계획과 시장이라는 이분법이 사라지고, 생산과 소비에 참여하는 공동체 구성원들 스스로의 관리와 통제만이 있는 자율적이고 탈중심화된 계획이 될 것이다.


   협동적 참여의 교환체계에서는 이윤을 노리는 거간꾼들(사업자, 국가, 관료, 자본가 등)이 들어설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므로 생산과 소비의 책임이 생산자와 소비자 자신들의 수중에 있게 되고, 그 결과 통제의 탈중심화가 가속화된다. 이로써 비로소  경제생활의 자주관리가 실현된다. 이들은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 투여된 노동가치 이상을 생산가격에 포함시킴으로써 이윤을 챙긴다. 맑스의 잉여가치이론이 그것이다. 직접적인 참여의 경제에서 생산자는자연스럽게 교환을 위한 완성품 및 반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생산자조합을 결성하게 될 것이고, 기업적인 통제와 이윤극대화를 목표로 끝없이 분열되는 자본주의적 생산체계는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직접적인 참여의 경제에서는 또한 소위  3D 업종 이라고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피되는 열등한 직업군의 일을  2차 노동시장 에 맡기지 않고, 소비자가 직접 떠맡아야 한다. 예를 들면 변호사나 직업관료, 엔지니어와 같은 전문업 종사자가 도로보수, 쓰레기 처리, 가로청소, 자동차 정비 등에 불가피하게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직업에 의한 사회적 계층이 사라지고, 개인들은 공동체속에서  그리고 한 개인 내에서  인간적인 다양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체제가 자본주의로 타락하지 못하도록 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나키즘의 일반적 원리인  개인이 생산수단이나 타인의 노동을 전면적으로 장악할 방도가 없다는 사실 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타인에 대해서 경제적 혹은 여타의 권력을 장악할 어떤 체계나, 계획, 조직도 근본적으로 봉쇄하기 때문이다.
  
   5. 크로포트킨의 아나키 공산주의 이념과 환경문제


   크로포트킨은 1899년의 저서 『농장, 공장, 그리고 직장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에서 직업으로서의 일거리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노동 또는 자본으로부터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제공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한 국가의 재력이 단지 소수의 특정계층만을 위해 생산되는 이익 -예를 들면  국민총생산 에 의해 판단되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노동의 창조성을 강조하면서 그는 인간이 진실로 존중되는 경제학을 요구했다.  돈벌이를 위해 수 십분, 몇 시간씩 이동하지 않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곳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사람들을 도시로 모이지 않게 하며, 대규모 자본을 집중적으로 투입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기술, 그런 기술이 필요없는 그런 경제학 을 주장했다. 슈마허도 나중에 똑같은 톤으로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크로포트킨의 이런 주장이 편협한 지역주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루소 식의 과격한 자연주의적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자급자족경제를 유지하면서도 코스모폴리탄적인 사유와 다른 세계와의 부단한 교류를 통해 각각의 공동체 속에서의 성원들의 주체인식을 강화해 간다.


   현대의 생태 환경론자들 중에서 크로포트킨의 아나키공산주의를 가장 정당하게 현대적으로 수용한 사람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이다.


   그러나 그는  아나키공산주의 라는 이름 대신에  사회생태론 , 혹은  생태사회주의라 번역될 수 있는  kosozialismus 이라는 용어로써 이를 대변하고 있다. 북친이 주로 비판의 표적으로 삼는 사람은 코모너, 칼렌바흐, 그리고 고르츠이다. 북친의 좌익 생태지향주의 비판은 그것이 암암리에  속류맑스주의 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생태계의 파괴를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포용하고,해결하려는 것은  기술지향주의 와 다를 바 없다.


   북친은 주장하기를 맑스주의를 신봉하는한, 사적유물론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며,  자본주의 체제가 생태적인 필요를 기술적인 제약을 통해 해결할 수 있으므로 자연에 대한 불가피한 착취는 이 체제내의 질서로 흡수할 수 있다 는 고르츠의 주장은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비판되는 자본주의의 기술은 다시금 환경과 생태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긍정적인 생산양식으로 옹호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북친에 의하면 고르츠는  조잡한 맑스주의자 의 해결책 밖에 제시할 수 없다.


   북친과 유사하게 생태사회주의를 주장하는 독일의 행동가 루돌프 바로는 스스로 맑스주의의 정언명령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벗어나지 않으려는태도를 보이면서도 계급투쟁보다는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 이 우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생태 환경 문제에 관한 한, 어떤 계급적,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나 세계관의 투쟁은 확실히 낡은 사고이며,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하는 룩셈부르크(Luxemburg)의 양자택일은  계급혁명이냐, 생태적 세계관의 혁명이냐로 대치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Bahro)는 현대과학과 산업독재를 낳은 자본주의라는 거대기계(Megamaschine) 자체가 스스로 국가가 되어 버린 지금 녹색운동은 거대기계를 세우고, 산업독재를 타도하는 일만으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 왜냐하면 그것은  거대기계에 녹색 옷을 입혀주는 생태적 현대화 계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정신의 대대적인 개종운동이라고 말한다.


   근대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적 범죄 를 단죄하는 것이다. 바로(Bahro)는  생태사회주의라는 녹색정치사상을 체계화하여 생태위기의 근본 원인은 직접적으로 유럽 산업화와 그로부터 등장한 산업 자본주의의 팽창에 기인하는 것이긴 하지만, 자본주의의 경쟁과, 성장, 팽창에의 충동은 베이콘 이래로 주체로서의 자아가 강화된  근세적 인간 에 내재하는 테르시테스적인 자기확대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바로(Bahro)의 태도에 대하여 몇몇 사회주의자(맑스주의자)들은 그가 온건한 낭만주의에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잘못하면 일종의 생태파시즘( kofaschimus)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6. 사적 기술의 통제와 탈중심화

 

   협동적 교환과 참여의 구조에서 지역적으로 분산된 공동체는 국가에 의존하기 보다는  연대와 연합 이라는 삶의 유형을 필요로 한다. 분산된 소규모공동체는 현대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거대도시의 환경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거대도시에서 이웃은 그 진정한 역할을 상실했으며 사람들은 자족적인 삶을 누릴 수 없도록 조직되어 있다. 거대도시에서는 교통과 운송, 그리고 에너지의 불필요한 낭비를초래한다. 탈중심화된 아나키공동체에서는 가능한한 규모가 작은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환경적 부담을 덜어 준다. 예를 들면 화학비료 공장을 폐쇄하고 유기비료를 씀으로써 대규모 비료공장 플랜트는 필요없게 된다. 화학비료 공장을 가동하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 소비도 그 만큼 줄어 들게 된다. 개인 승용자동차 공장은 사적 개인을 위한 기술이다. 다시 말하면 승용차는 이기적인 운송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를 자전거나 최소한의 전기버스로 대체하게 되면 자전거 산업과 버스 및 에너지산업은 사회적 기술로 환원된다. 문제는 자주관리 사회가 사적 기술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수행하느냐이다.


   기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노동의 구원에 있을터이지만, 생태 환경이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기술의 선택은 언제나자본주의의 논리인  경제적 이유 로만 설명될 수 없다. 기술의 선택은 생태 환경의 위기시대에 더욱 신중해져야 하며, 노동의 구원이라는 기술 본래의 목적보다도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독점생산, 독점 판매되고 있는 화학약품(살충제)은 해충구제를 통한 농업생산성의 제고(提高)라는  경제적이유 에서 언제나 필요한 것으로 선호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생태학적 균형의 파괴를 통한 수요 충족이요 성장이다.


   개인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을 실현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물질적 풍요를 이룩해야 된다는주장은 사회적 개인을 이해하지 못한 사적 개인이라는 개념을 기저에 깔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와 맑스레닌주의는 그런 주장을 펴고 있다. 결핍의 추방을 주장하는 맑스주의는 사적 개인을 거부한다는 공식적인 태도 때문에 불가피하게 사적개인을 잠재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맑스와 맑스주의에 있어서 사적 개인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적 개인이 결핍의 추방이라는 이름 하에 사회적 개인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자족적인 필요와 이익을 실현하여, 더 이상 타인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것이 필요치 않을 때까지 사적 개인은 은밀히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경쟁이 있는 한 맑스주의의 논의에서 사적 개인 개념은 항상 잠재해 있다.


   그러나 필요와 이익이 상호의존적이고, 개인이 사회적 개인으로 간주되는 자주관리 사회에서 필요의 충족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과 연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① 엄격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② 과도한 소비를 부추키는 잉여생산이 없기 때문에, ③ 의사결핍(상대적 빈곤감)을 조장하는 과잉생산에의 동기 부여가 없기 때문에 생산의 극대화, 경제규모의 성장은 불합리한 것이며 비효율적인 것으로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필요한 최소한의 기술진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주관리 사회에서는 의사결핍을 조장하는 잉여생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기술과 설비를 무리하게 투자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V. 맺 음 말
  
   우리는 생태윤리적인 인간중심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세계 속에서 특별한 위치 -생태계와 환경을 책임져야 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 그리고 인간은 지구상에 계속해서 존속해야 된다는 윤리적 요청- 를 갖는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 이외의 것을 마음대로 처분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최후의 심판자나 자연의 목자(牧者)도 아니다. 지구라는 거주지(居住地)는 분명 인간의 목적에 쓸모가 있고, 또 인간이 자기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는 장소로 가장 적합한 생태계이다.


   하지만 세계가 오로지 인간의 목적만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처분하거나 바라는 대로 변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을 배려하는 태도는 소규모 생산을 필요로 한다. 자연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소비자가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생산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알고 있는 그런 생산양식이다. 자연을 배려하는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자연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직접 책임을 질 수 있게끔  협동교환과 참여의 경제 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