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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아나키즘

후기구조주의와 아나키즘 /구승회

by 마리산인1324 2007. 7. 17.

<한국아나키스트연대>

http://homini.tripod.com/24.htm

 

 

                후기구조주의와 아나키즘 ― 미완의 사고실험


구 승 회 (동국대)

 


1. 새로운 정치철학의 가능성 모색


대륙적 전통에서 정치철학은 정치적 위기에서 출몰하는 하나의 프로젝트이다. 이런 위기는 존재와 당위 사이를 전이하는 공간에 머무르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전통 윤리학이나 형이상학과는 달리, 정치철학의 연구는  존재와 당위의 긴장으로 기술된다(현실과 이상).


그러나 지금까지 정치철학은 ‘주어져 있는 무엇’의 당위만을 논의해왔다. 사회적 외형이 변하면 철학적 접근도 변해야 한다: 아도르노는 헤겔 풍의 용어로, 실재하는 세계와 상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불일치가 없으면, 정치철학도 필요 없을 것이라고 정당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철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불일치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치철학은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의 붕괴는 그 이론적 기초의 몰락(‘맑스주의는 죽었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련과 동유럽이 정치적 변화의 모델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 포기되었다. 그런데도 아주 최근까지도 맑스주의 담론이 정치철학의 이론과 실재에 있어서 그 결함들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충분한 희망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 양 받아 들여 졌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의 ‘정치철학으로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몇몇 성급한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정치철학의 종말에 도달하였으며, 최종적 통일체로서 자본주의와 더불어, 이제 역사의 종언에 이르렀다는 의미도 아니다(예를 들면 프랜시스 후쿠야마 처럼).


이 글의 목적은 하나의 대안적 정치철학의 이론틀을 그려보는 데 있다. 이 새로운 정치철학은 비전 제시에 있어서나, 개입의 차원과 스타일에 있어서나 이것이 제시하는 바는, 아무래도 그 동안 지배적이었던 자유-시장경제적 자유주의, 맑스주의 등 기존의 정치철학과는 다른 무엇일 것이다(아나키즘이 제3의 정치철학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물론 이 새로운 정치철학도 전통의 정치철학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이는 아주 최근에 일어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아직은 아나키즘이 하나의 ‘정치철학의 이론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새로운 정치철학의 이론틀은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 사상이다. 후기 구조주의 이론을 근거로 하여 아나키즘이 새로운 대안적인(이데올로기 없는 시대의) 정치철학으로서의 지위를 갖는가를 논의하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닌 나로서는 이를 다룸에 있어서 푸코, 들뢰즈, 료따르[리오따르]의 저작을 주로 참조하고, 일단 이들의 논의에 의지해서 설명해 갈 것이다.


후기구조주의 정치철학은―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지만―맑스주의의 붕괴 이후에 실재 세계와 상상의 세계[있을법한/있어야할 만한 세계] 사이의 긴장을 구체화하는 정치적 개입의 대안적인 비전을 제시해 왔다. 후기구조주의 정치철학이 그동안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던 것은 따지고 보면―구체적이고, 제한된 분석을 선호하기 때문에, 전지구적 담론(거대담론)을 회피하는―포스트모던적 담론 그 자체의 본성 때문이기도 하다. 근대 민주주의 정치에서 거시-정치적 영역은 후기구조주의에 와서는 미시-정치의 영역으로 이행한다. 보다 일반적인 철학적 이론틀에 구체적이고 제한된 분석을 위치시키려는 시도는 어찌 보면 ‘포스트모던적(경우에 따라 나는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을 혼용한다) 기획’에 반대되는 것으로 모른다. 나중에 우리는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조명되지 못했던 아나키즘의 전통 위에서 후기구조주의를 만족시킴으로써 그것의 근본적인 미시-정치적 합의를 깨트리지 않고, 후기구조주의 이론틀을 구체화하는 것이 가능함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우선 후기구조주의 이론이 작동하는 정치적 항목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정치철학의 세 유형


나는 세 가지 유형의 정치철학을 제시하고자 한다: “형식적 정치철학”, “전략적 정치철학”, “전술적 정치철학”이 그것이다: 형식적 정치철학은 양자(사실과 당위) 사이의 긴장을 매개로 해서, 당위의 극단과 사실의 극단 중 어느 하나에 고착하는 것으로 특징화 할 수 있다. 이런 편향된 고착은 한 극단이 철학적으로 되면 될수록 더욱더 형식적으로 된다.


2.1. 형식적 정치철학


형식적 정치철학은 보다 덜 형식적인 정치사상과는 달리, 강한 철학적 입장을 산출한다. 형식적 정치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은 ‘정의사회의 본질은 무엇이며,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안가?’라는 질문이다. 롤스의 <정의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책에서 롤스는 정의의 두 원칙을 제시한다: ‘자유의 원칙과 기회균등의 원칙’, 그리고 ‘차등의 원칙’이 그것이다.


롤스가 정의원칙을 도출하는 방법과 과정은 순수 절차적, 형식적이다. 그러나 유토피아적인 것은 아니다. 롤스는 ‘사람은 합리적으로 자기-이익관심적 존재’라는 전제 위에 자신의 철학적 논변을 입론한다. 롤스의 <정의론>과 로버트 노직의 <아나키,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의 차이는 앞의 것은 형식적 정치철학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뒤의 것은 모든 정치적 요소를 거부하는 순수 도덕철학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노직은 결정이론적 구조를 통해 롤스가 제시했던 것은 다름 아닌 한 사회의 분배구조를 결정하거나, 최소한 한계지우는 윈칙으로서, “정의의 최종상태 원칙”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절차를 롤스의 그것과 구분한다. 노직이 생각하기에 이런 원칙은 부정의injustice한 데, 왜냐하면 정의원칙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정당하게 그 원칙에 속하게 되는 사람들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정의 개념은 정의로운 획득과 정의로운 전이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차등의 원칙에서처럼 최종상태 분배요구에 고착되는 것은 그래서 부정의에로 귀착된다고 노직은 비판한다.


그러나 형식적 정치철학이 반드시 당위의 극단ought-pole을 따를 필요는 없다. 주어진 사회적 맥락이라는 틀내에서 정치철학의 지배적인 극단을 추구하는 맑스주의에 이론적 가닥을 볼 수 있다. 제2 인터내셔널의 맑시스트들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루카치에 의하면 부르주아 사회가 성공적으로 자신을 재생산할 수 있는 이유는 물질적 대상, 노동, 시간 따위를 모두 교환가능하고, 고립되어 있으며, 계산 가능한 상품으로 전화시키기 때문이다. 루카치는 물론 사실의 극단에 우선성을 부여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암시적인 수준에서 윤리적인 것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루카치는 분명히 긍정적인 발전으로서 사회주의 사회에의 도달을 예기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의 도달을 용이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건 받아들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루카치 저작의 위상은 자의식의 발전계기로 해석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게급의식을 증진시켜 주는 여하한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저작은 더 이상 역사적인 과제가 아니라, 하나의 윤리적인 사태이다. 그래서 당위의 극단은―역사적 운동에 있어서 부차적인 것이긴 하지만―윤리적인 것을 위해 구획된 여지를 포함하고 있다. 루카치의 저작은 어떤 긍정적인 윤리적 가치를 위해 콘텍스트의 불가피한 변증법의 전개를 촉진시킨다.


2.2. 전략적 정치철학


형식적 정치철학으로부터 전략적 정치철학에로의 연결 통로는 한 극단의 정치철학에의 의존성으로부터 양자 사이의 긴장관계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행로가 유동적이긴 하지만, 더욱 엄격하게 “전략적”이라는 범주에 놓이게 되는 철학적 유형은 우리가 형식적 정치철학이라고 불렀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전략적 정치철학은 고전적인 정치 전략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같은 물음에서 구체화된다. 전략적 정치철학에서 윤리적인 목표는 상황맥락적contextual 이해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역사 및 사회적 조건은 필연성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어쩌면 때에 따라서는 퇴보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사회적 조건이 부차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는 윤리적인 프로그램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정치적 개입을 위한 어떤 구체적인 가능성을 결정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사회적 상황은 윤리적 요청이라는 맥락에서 독해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프로그램은 제한되어 있으며, 어쩌면 부분적으로는 그 상황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이는 대부분―전부 다는 아니지만―의 정치철학이 철학화가 일어나는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에 대한 “전략적” 설명의 범주에 놓이게 되는 이유이다.


전략적 정치철학에서 사실의 극단과 당위의 극단 사이의 이러한 상호작용 변증법적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는 그들의 상호행위로 성취되는 필연적인 고차원적인 종합은 없다. 이것이 바로 이 둘(사실의 극단/당위의 극단) 사이의 관계를 “긴장”이라는 말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하게 보이는 이유이다. 그러나 맑스주의 전략의 차원에서 전략적 정치철학 기획은 변증법적 방법으로 이와 같은 긴장을 다룬다. 레닌과 맑스의 <루이 보나빠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등의 글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긴장관계, 권력 재분배의 필연성의 긴장관계를 변증법적으로 다루고 있다.


전략적 정치철학이 변증법적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는 마키야벨리의 <군주론>인데, 이는 “야만의 손아귀에서 이탈리아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윤리적 요청의 담론이다. <군주론>은 비변증법적 전략적 정치철학의 한 사례이다. 이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주어진 정치적 현실의 맥락에서 윤리적 의제에 용기를 주고자 한다. 이런 식으로 특정화된 전략적 정치철학이 순전히 철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정치적 프로그램, 혹은 정치적 의제 목록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롤스나 노직과는 달리 전략적 정치철학에서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관심이 없다. 반대로 이에 대한 대답은 다소간 추정적(가설적)인 것인데, 이 기획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한계지워진 추정적인 정의를 어떻게 가장 잘 증진시킬 수 있을까를 보여줄 수 있을 따름이다.


더욱이 정의가 문제되는 일련의 상황에 대한 인식을 통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맑스가 자기가 살던 시대의 시대상황에 적용했던 정의에 대한 선입견을 자신의 현재 상황에 적용했으며, 부적절하게 예시했으며, 그래서 혁명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몰고 가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맑스에 대한 오독이다. 모든 정치철학이 정치현실에 대한 윤리적 반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말하자면 모든 철학이 노직류의 전험적인a priori 윤리적 반성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전략적 정치철학은 형식적 정치철학과 마찬가지로 롤스가 말하는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의 제한조건 내에서 구체화된다(여기서 반성적 평형에 대해 설명할 것). 요약하자면 형식적 정치철학과 전략적 정치철학의 차이는 앞의 것은 철학이고, 뒤의 것은 정치강령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형식적 정치철학은 현실과 당위 중 어느 한쪽에 몰두하는 것이고,  전략적 정치철학은 그 양자 사이의 긴장에 몰두하는 것이다.


2.3. 전술적 정치철학


전술적 정치철학을 생각해 보자: 여기서는 정치철학과 정치강령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정치철학이든 정치강령이든 현실과 당위의 문제를 피할 길이 없다. 정치철학은 당위만을 다루고, 정치강령은 현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반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정도의 차이이다. 전략적 정치철학과 전술적 정치철학의 차이는 앞의 것이 어떤 목표 지향을 가지고 획일적인 분석을 가한다는 것이다. 즉 정치의 핵심영역을 문제삼는다. 여기서는 모든 문제를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하는 ‘환원주의적’ 성격을 드러낸다. 정치영역의 핵심이 있고, 그 주변에 환원 가능한 주변부적인 문제들이 둘러싸고 있는 그런 모양(동심원적)으로 이해한다. 물론 이 정치의 중핵이 불변의 확고한 핵심은 아니다. 역사과정―혁명―을 통해 부단히 변혁된다.
전략적 정치철학이 불변의 정치영역의 중핵을 인정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전략적 사고방식이 동심원적으로 수행된다는 점에서, 선들이 교차하는 소통망으로 규정하는 전술적 정치철학과 다르다.


전술적 정치철학도 전략적 정치철학과 마찬가지로 사실과 당위의 긴장으로 발생하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전술적 정치철학은 사실과 당위의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제3의 긴장을 끌어들인다. ― 권력은 중심(중앙집권적)으로부터 나온다는 권력에 대한 전략적 정치철학의 해석 참조.


전술적 정치철학은 권력발생의 중핵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반환원적이다. 권력생성의 다원성, 그리고 이들 다원적 요소들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권력은 교차하는 선들의 주변적 응집! 전술적 정치철학은 사실과 당위의 긴장에 주목할 뿐만 아니라, 반환원적이면서 상호 교차하는 권력 실행들의 긴장[제3의 긴장]에 주목함으로써 핵심에 대한 분석보다는 주변에 대한 분석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전술적 정치철학이 전략적 정치철학을 거부하는 또 하나의 관점이 있다. 전술적 정치철학은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전위당의 역할을 거부한다. 후기구조주의 정치철학이 바로 그런 예이다. 후기구조주의는 형식적, 전략적 정치철학과는 달리, 권력 중심 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장 보드리야르는 전략적(포괄적이고, 환원주의적)이다. 데리다의 사상은 여기서 구분하고 있는 세 가지 정치철학 중의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3. 아나키즘과 후기구조주의 정치철학


아나키즘은 후기구조주의적 정치철학의 선구적인 양식이다. 아나키즘 역시 후기구조주의와 마찬가지로 재현적인 정치적 개입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에 의하면 권력집중은 권력남용을 초래한다고 본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환원 불가능한 투쟁이라는 다원성 속에서 정치적 개입의 여지를 추구한다. 피터 크로포트킨: “사회적 삶의 진보는 통치기관에 의한 권력의 집중과 규제적 기능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 기능적인 차원에서의 탈집중화이다.”  아나키즘이 탈집중화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전술적 정치철학과 일치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나키스트들이 투쟁과 압제 사이에는 대립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행사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투쟁 역시 다양한 차원에서 수행되어 왔다는 의미에서―중앙 집중화되어 있는 현행의 사회구조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탈집중화를 생각하는 아나키즘의 사상에는 다양한 긴장이 있다. 그래서 투쟁의 다양성이 필요하다. 아나키스트들은 인간의 본질이라는 통일된 개념에 의지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인간의 본성을 선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권력이 작동할 필요가 없다. 아나키즘의 인간본성에 대한 이런 관념은 후기구조주의자들로부터 억압을 초래하는 전략적 사고 양상과 유사하다고 비판받았다.


그러나 세 가지 유형의 정치철학을 기술하고 나면 “전술적 정치철학으로 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철학사상에 대한 설명에 만족하지 않더라도, 그와 같은 철학사상 혹은 정치적 조망 전반을 거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루소가 사회계약의 이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그가 민주주의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지난 70년간의 사회주의 실험에서 우리는 위로부터의 권력의 변화가 사회구조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전히 최고 상층부의 사람들에게 권력은 여전히 집중되어 있고, 그러한 권력에 영향받는 사람들에게 분배되지 않는다. 이것이 아나키즘 사상의 중요한 한 흐름이다. 그렇다면 권력 장악을 위해 아래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런 주장은 권력은 바닥 ‘위에서’ 실행되는 것이지 바닥‘에서’ 실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후기구조주의의 독특한 분석이 의심했던 어떤 가정에 근거해 있다: 권력의 실행이 그 자체로서 정당한 요구들을 억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와 같은 요구들 속에서 수행된다면, 새로운 사회의 씨앗을 심을 기름진 토양으로서 ‘바탕(bottom)이라는 생각은 무의미하다. 권력이 하나의 강권적인 힘으로서 정확히 위에서 아래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위, 아래라는 형상화는 무의미하다. 후기구조주의는 이런 식의 중앙집중적인 순환체계로서 위, 아래라는 관념을 포기한다.


후기구조주의 정치철학은 윤리적 합의에 기초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 후기구조주의 철학과 정치사상의 윤리적 정합성을 다룬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그 동안 후기구조주의가 공개적인 윤리적인 논의를 회피해 왔기 때문에―후기구조주의 담론의 독특한 이론적 개입과 침묵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윤리적인 문제―특히 메타윤리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3.1. 후기구조주의에서 실천이란 무엇인가?


후기구조주의 정치이론은 전통 아나키즘의 ‘전험성’을, 한편으로는 권력의 긍정성과 창조성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 혹은 실천의 집단(주체나 구조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이 더 적절한 분석단위 라는 관념으로 대체한다. 여기서 저자는 “실천”이라는 말을 목표지향적인 사회적 규정성(규제적 힘)이라는 의미로 좀 느슨하게 사용하고 있다. 아무리 목표 지향적인 실천이라고 하더라도, 실천의 의도와 그 결과는 항상 다르다. 실천에 참여하는 자들은 실천의 결과를 투명하게 알 수 없다. 실천과 그 결과가 불투명한 이유는 다양하다:


첫째, 실천은 다른 실천들과 교차―교차하는 것 역시 하나의 실천이다―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교차는 양쪽의 실천에 가담한 행위자들의 목표가 아닌 것으로 되어 버린다. 교차하기 때문에 목표가 흐려진다. 푸코가 감옥에 대한 연구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죄의 범주를 구성함에 있어서 심리적이고, 법적인 실천의 교차가 그와 같은 교차의 한 사례이다. 들뢰즈는 돈젤로뜨의 책 서문을 쓰면서, “사회적인 것은 작은 단선들의 교차지점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즉 실천들이 교차하기 때문에, 불투명하다.


둘째, 실천에 참여하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실천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실천이 다른 실천이 일어나도록 촉발시켜서 교차하면, 그 다른 실천에 의해 수행된 결과를 최초 실천 참여자는 알지 못한다.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과학적 지식을 다른 유형의 서사적 지식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에서 자본주의와 과학이 묵인하고 있는 것에 대한 료따르의 서술은 과학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 의문은 종종 과학적 실천을 대신하는 듯이 보이는 서사적 지식을 통해서만 답변될 수 있는 의문이다.


“포스트모던적 지식은 참, 거짓 등 지시적 진술들 뿐만 아니라, 효율성, 정의, 미에 관계되는 기술적·규정적·미학적 진술을 수행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 지식이란 오로지 과학적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 생활하는 것, 경청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포스트모던적 지식에는 과학적 지식과 서사적 지식(이야기적 지식) 두 가지가 있다. 과학적 지식은 지시적 언어게임만 수행하며, 다른 언어게임을 배제한다. 모스트모던 사회이론의 관점에서 과학적 지식은 지식=사회, 혹은 지식=과학기관(단체) 간의 관계에 문제를 일으킨다.  과학적 지식은 언제나 검증과 반증의 대상이다. 이 검증과 반증은 언제나 전문가집단의 담론규칙에 따라 수행된다.


반면에 서사적 지식은 사회에서 수행되는 수행성을 서사적 기준에 의해 평가한다. 다양한 언어게임을 허용한다. 이야기(서사)를 통해서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기 때문에, 화용론적 규칙집단이 전승된다. 서사적 지식은 검증, 반증의 대상이 아니며, 문화 속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지금까지 서구사회는 과학적 지식은 좋은 것, 서사적 지식은 신화, 미신, 야만적인 것으로 보고, 계몽을 통한 서사적 지식의 발전을 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료따르는 주장한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제국주의다. 서사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에는 불가공약성이 지배한다. 인컴파티블하다. 즉 과학적 지식의 관점에서 서사적 지식을 , 또 그 거꾸로의 방식으로 서로를 평가할 수 없다.”(리오따르,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인용)


과학적 지식이 불투명한 것은 서사적 지식이 거기에 개입해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지식이 주도하는 현대 세계에서도 서사적 지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셋째, 이는 후기구조주의적 조망에 결정적인 것인데, 모든 행위는 권력지향적 행위이다. 즉 모든 행위는 다른 행위를 억압하지 않고는 수행될 수 없다. [후기구조주의적인 시각에서] 억압적, 창조적 성격을 갖는 권력은 종종 행위자들이 파악하는 것의 외부로부터 행위를 결정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제약조건을 가진 새로운 실천은 사회적 실천을 교란하는 권력조직으로부터 생성된다. 권력조직의 조작은 더욱 냉소적이다: 다른 실천과 교차되는 실천은 여타의 실천(혹은 제3의 실천)이 그러한 실천을 이해하도록 돕는 참여자가 없이 그것을 점유하는 데 봉사하도록 전용될 수도 있다. 나라의 안전을 위해 선진 무기를 개발하는 것, 사람들은 그것이 안전과 이득을 가져다 주리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권력 조작이다.


넷째, 우리가 ·들뢰즈와 초기 료따르의 ‘힘forces’개념을 지지한다면, 힘들의 투쟁에 대한 실천의 대응은 실천의 ‘무의식적인 결정이라는 층위’를 만들어 낸다. 이 제3의 층위는 행위자들의 실천의 목적을 은폐하는데 기여한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모든 실천이 불투명하다는 것은 아니다. 푸코, 들뢰즈 등 후기구조주의자들은  권력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지를 보이기 위해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을 원용한다. 권력을 긍정한다는 점, 휴머니즘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후기구조주의 정치이론의 계보학적 방법은 아나키즘적이다.


3.2. 지식=권력의 계보학


“계보학은 역사과정을 통한 공허한 동일성에 있어서 사건이나, 추세에 관해 초월적인 주제를 언급하지 않고, 지식의 구성, 담론, 대상영역을 설명하는 역사의 한 형식이다.” 계보학은 선이 굵지 않고, 세심하다. 유일한 기원(최초의 기원)을 찾는 일은 오류이다. ① 그것은 현상의 배후에 본질이 있다는 가정이다. 계보학은 사회관계를 반환원적 연결망으로 생각한다. ② 역사의 시초를 거대한 사건으로 보는 오류, ③ 진리개념을 역사의 시초에 개입시킨다. 등등.


들뢰즈, 단일한 기원을 찾는 것은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를 방해한다. 계보학적 가치평가는 다원적이다.
푸코에 의하면 니체의 계보학은 통일적 기원 대신에 ‘기원’과 ‘생성’이라는 이중적 방법을 대치한다. 기원과 발생을 동시에 추적한다. 계보학은 통일되고, 완전한 전체로 보이는 대상을 구성하기 위해  기원과 생성을 동시에 추적한다. 기원과 생성이라는 방법은 역사를 이해관계가 전이하고, 최종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힘들 혹은 실천들의 익명적 실행이라고 본다. 이해관계가 전이하는 이유는 사태의 우연성과 권력 때문에 대상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해관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대상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계보학은 역사적 대상에 대한 역사적 설명인 바, 역사를 우연적이고, 산포되어 있으며, 유동적이며, 목적없는 것으로 본다. 들뢰즈의 말로하면 그것은 “경험적이고 다원주의적 예술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계보학적 방법에 내재적인[본래적인] 것은 “비판”, 혹은―푸코의 말로―“치료적 과학”이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지식 역시 전유와 재전유라는 일련의 과정으로서 그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지식의 실천 역시 투쟁과 저항의 객체인 동시에 주체이다. 그러므로 지식을 가치-중립적인 것,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보는 것은 오류이다. 여타의 사회적 실천과 마찬가지로 지식도 계보학적 기원과 생성을 가진다. 이는 현대의 후기구조주의가 사회를 분석하고, 사회적 실천에 개입하는 이론적 기초가 된다.


후기구조주의가 그 이론적 힘을 지식의 정치학politics of knowledge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그릇되게도 지식이 정치적 고려사항과는 무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지식이 정치와는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경향. 의식을 투명하게 할 수 있다는 가정,  그래서 대상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볼 수 잇다는 가정, 이른바 ‘투명성의 가정assumption of transparency’은 주체적 본질이 있다는 관념의 일부이며, 그 목표는 이러한 본질을 이해하고, 실현하는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런 가정은 후기구조주의는 이런 가정을 거부하는 휴머니즘 프로젝트에 연결되어 있다. 후기구조주의는 지식이 중립적 실체라는 관념을 포기한다.


지식은 여전히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며, 모든 서사(이야기)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모든 서사는 정치적 중립성을 은폐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푸코의 ‘지식/권력’에 대한 설명과, 들뢰즈의 의식에 대한 니체적 비판을 통해 지식의 정치학을 살펴보았다. 지식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을 천착하는 가장 강력한 시도는 료따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이다.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료따르는 세계이해의 가장 주도적인 양식인 과학적 지식의 출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이를테면 과학적 지식이―그것이 하나의 지식유형으로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한 요구조건을 부과함으로써―다른 지식 양태를 깔보게끔 하는 것이다. 담론은 엄격한 검증이라는 규범, 순수하게 외연적인 진술, 수행적 효율성에 일치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조건, 제한조건은 자연과 타자를 지배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정치적 기획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은 여타의 서사적 지식 유형을 소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과학적 지식은 그 자체의 조망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유일한 지식의 정당화 유형으로 되는 과학적 증거란 없다. 그래서 과학적 지식은 미신, 종교, 전제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이라는 계몽적 서사 혹은 헤겔의 정신의 자기실현이라는 사변적 서사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료따르가 근대적 서사, 혹은 그랑 나라티브grand narratif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거대이야기[담론]를 의심하는 새로운 포스트모던적 시대에로 들어서게 되었다.


여타의 사회적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지식은(계보학적 지식을 포함하여) 투쟁과 지배의 문제이다. 지식이 가치와 정치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면, 계보학은 단순히 대상들의 역사에 관한 지식 획득의 문제가 아니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계보학 자체도 정치철학에 있어서 사실의 극단과 당위의 극단간의 긴장의 일부임을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계보학은 계보학적 지식이 가치-부여value-laden된 것이며, 가치가 생성되는 상황맥락과 분리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상황맥락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지식이다.


계보학이 산출하는 정치는 거대서사에 더 잘 어울리는 대규모 정치보다는 지역적이고, 분산되어 있다. 계보학은 실천이 일어나고, 교차하고, 억압적 관계가 발생하는 분산된 점들에서 저항을 촉진한다. 계보학은 다양한 차원―경제적, 국가적 차원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심리학적, 언어적, 성적, 종교적, 정신치료적, 윤리적, 정보적―에서 투쟁하는데, 이런 다차원적인 투쟁이 권력의 집중이 없는 사회를 창조할 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권력이 발생하는 여러 측면들의 표면을 가로질러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결국 계보학이 만들어낸 정치는 미시정치학이다.


미시정치의 정신분석, 혹은 미시정치의 화용론이라는 문제는―들뢰즈에 의하면―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개인이나, 당신이 속한 집단의 노선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 분절적 노성, 분자적 노선, 탈주의 노선 등 상이한 ‘노선들’을 산출한다.


우리들의 실천이 계보학적 방법이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작은 선들, 혹은 부분적인 대상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정치적 개입은 이 선과 선들의 교차지점을 따라야, 혹은 가로질러야 한다. 바로 이것이 계보학적 정치가 미시정치학인 이유이다. 미시정치적 개입이 일어나는 사회/정치적 관계의 그물망이 하나의 통일된 망이 아니기 때문에―사실 권력은 모든 지점에서 동일한 정도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을 권력적 억압이라고 말할 수 없다.―모든 미시정치적 개입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미시정치이론은 고전적인 아나키즘 이론과 마찬가지로, 미시정치적 실천을 표상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 가까이 있고자 한다. 반표상적이다.


후기구조주의적 미시정치학의 반표상적 성격은 인식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두 가지 기록물에 따라 수행된다. 인식적인 것은 표상주의를 공격한다. 이는 사람들이 일련의 자연스러운 이익관심, 혹은 본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들의 정치적 자유는 이런 본성이나, 이익관심을 표현하고 충족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다. 여기서 표상[재현]은 억압적이지 않다: 표상은 거짓이며, 기껏해야, 그럴듯할 뿐이다. 타자의 이익관심의 표상에 대해, 그들의 이익관심이 마치 자연스러운 것, 주어져 있는 것, 심지어는 역사적 숙명을 드러내는 것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휴머니즘의 실수이다. 그러나 후기구조주의는 이런 실수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무해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식론적, 정치적 불일치에 빠지지 않는다면, 미시정치적 분석은 이러저러한 억압의 희생자들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되며, 어떻게, 왜 그런 상황이 발생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