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이야기/아나키즘

아나키즘과 녹색경제의 패러다임 /구승회

by 마리산인1324 2007. 7. 17.

 

<안티뉴스>에서 퍼오다

http://www.antinews.or.kr/bbs/board.php?bo_table=304&wr_id=30&page=1

 

 

아나키즘과 녹색경제의 패러다임

 


구승회 (동국대학교 인문학부 강사, 대구 아나키즘 연구회 회원)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비현실적이고, 과격한 이상주의'라는 표식을 붙인다. 물론 아나키스트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니키스트의 유토피아가 비실제적이라는 주장은 인간의 본성을 사악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보고, 여기에 근거하여 경쟁과 시기심, 사리사욕을 만족시켜 주는 것으로 보이는, 그런 사회가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분명 사고의 한계이며, 개인적 환원주의 혹은 전체론적 환원주의를 간접적으로 승인하려는 태도에 불과하다. 아나키즘의 이상이 단순히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형식으로 실천했던 전통사회-그와 같은 전통적인 사회는 모두 소규모 사회이기 때문에 '기능적, 지역적 탈중심성'을 강조한다-가 존재했었고, 지금도 세계 도처에 성공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나키즘은 분명 이데올로기적으로, 또 생태적, 실존적으로 대안이 없는 시대의 의미있는 대안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중앙집권적 권위와 통제로 비대해진 거대국가는 사회와 공동체의 공적(共敵)이다. 아나키 공동체는 거대사회의 특성인 탈개성적이고, 기계화된 관계가 순수하게 사회적이고, 협동적인 사회에 의해 환원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작은 규모일 때 번성한다. 지역주의, 탈중심주의는 아나키즘 사회, 경제이론의 핵심이다. 이는 사회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추구하며, 자유로운 개인들이 경제적, 정치적 활동을 위한 자율적인 조직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1. 아니키즘과 반환원주의


아나키즘은 개인적 환원주의와 전체론적 환원주의를 거부한다. 아나키즘은 개인과 사회를 상호 환원 가능한 것으로 보는 대의정치와 의회제도를 거부한다.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대의정치란 자유사회와는 어울리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한 정부형태라고 주장한다. 이를 증명하는 예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역사 속의 아나키스트들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자유를-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 할지라도-방해받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나아가서 개인의 자유를 방해하는 대의정치제도가 왜 나쁜지 자세히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아나키즘은 막연한 파괴주의요, 극단적인 허무주의라는 오해를 받아왔다.


분명한 예를 들어 보자 : "아홉 명의 도둑이 모여 물건을 훔치는 일을 맡을 대표를 뽑았다고 하자. 대표로 뽑힌 도둑이 경찰에 붙잡혀서 '나는 우리 도둑집단의 대표로 뽑힌 사람이므로 죄가 없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죄가 면해지는가? 그것이 구백 명, 구천만 명의 대표라 하더라도 폭력을 독점하고, 강제를 행사하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대의제도는 이런 허위에 근거하고 있다."


필자는 이 논문을 통해서 아나키즘의 사회, 경제이론의 본령(本領)을 분명히 드러내고, 이로써 일정한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는 현대 환경론을 뛰어 넘어 탈이데올로기적인 생태 환경론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개인을 대리하는 대표자들에 의해 구성되는 정부형태의 대의정치는 개인적 환원주의에 적합한 정부형태이고, 개인의 본성을 '사적 개인'으로 보는 그런 견해에 적합하다. 개인과 사회의 본성에 대한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면, 타인들을 위한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일련의 대표자를 선택하는 일 말고, 문제에 대해 공정하고, 평등한 의사결정수단이 있을 수 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 부분론이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는 어떤 특정한 공인(대표자, 대리인)의 선택 수단이 어느 정도 공정하고 평등한가(민주주의) 그렇지 않은가(독재나 사이비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부분론은 권력을 가진 몇몇의 선택된 '개인'에게 자신의 권위와 권리의 양도(포기)를 대신할 대안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반환원주의의 관점은 대의정치라는 대안은 진정한 '사회적인'조직 및 의사결정 방법이 아니며, 나아가서 '평등한 사회적 개인'을 보증해 주는 사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의사결정의 진정한 방법은 사람들이 '그들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도 보다 큰 사회적 권력에 자유로이 자신의 권력을 결합시킴으로써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국가나 대의체의 의사결정 방법은 대리인에게, 그리고 결국에는 정부에 권력을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 이 두 가지 사회조직원리는 전적으로 권력을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 이 두 가지 사회조직원리는 전적으로 개인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즉 개인을 '사회적 개인(Gesellschaftliches Individuum)'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적 개인(Privat-Individuum)'으로 보느냐의 차이이다. 사적 개인은 사회적 관심과, 상호의존적 속성과 같은 서로 개인들 간에 서로 교차하는 영역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권리를 중앙정부에 양도함으로써 공공의 사회적 조절과 통제는 각자 개인적으로 획득해야 된다. 그러나 사회적 개인은 서로 중복되고 상호의존적인 이해관계 그리고 사회적인 소유는 다양하고 상이한 조직을 가능케 한다. 이런 조직 내에서 개인의 권리는 계속 유지되며 양도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도 개인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이해관계를 결합, 결속할 수 있다. 크로포트킨이 지적했듯이, 이것이 바로 연방주의(Federalismus)와 대의정치의 역사적인 차이점이다.


대의정치는 사람들에게 자율을 허용하는 듯이 생각되지만, 주인을 자유선거에 의해 선출했다고 해서 주인과 노예가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대의정치는 사회적 개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이해관계, 물질적 필요, 그리고 안녕의 상호의존과 상호연관을 인식시켜주는 '자주관리(Selbst-Management)'라는 사회적 방법을 포기하는 대신에 또한 사람들이 그들의 이해관계를 통합하고 협업을 가능하게 하는 대신-오로지 타인을 관리하는 역할만 하는 개인, 즉 '공적 개인'이라는 특수한 계급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공인으로서의 삶'은 사적, 개인적인 삶에 비해 고상하고 특별한 것으로 간주된다.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공인으로서의 삶은 다양한 하층계급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해관계의 대립을 조정, 조화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대리인을 선출하는 원자화된 사적 개인들이 그야말로 사적으로 되고, 개별화된 다수와 한 개인의 관계라는 시각에서 제시되는 '대의제'는 원자화되고 사적인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보여줄 뿐, 사회적으로 연대하고, 결속하고, 사회조직 내에서 상호의존적인 이해관계나 안녕을 실현하는 사회적 역량은 아니다. 대의제의 계층구조는 상호 결합된 '사회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개별화되고 사적으로 된 독립적인 원자모델을 가정한다.


진실로 '사회적인'조직과 의사결정을 이끌어 내는 방법은 결코 대의제가 아니다. 그것은 '연대와 참여'라는 말로 규정될 수 있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통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의 규제와 통제이며, 나아가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향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동의를 통하여, 그리고 생산과 소비가 결합된 연방형태를 통한 자유로운 조직'이다. 이런 조직은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의 직접적인 참여를 극대화"할 수 있으며, 오직 이런 사회조직 내에서만 대리인과 '대표'가 필요 없게 된다. 필요할 경우 특정한 임무와 한시적으로만 대표를 세우게 된다. 또한 조직적 활동은 대표들이 계속 행정가로서가 아니라, 보수없이 활동함으로써 대표자들이 직업적으로 되는 것을 막을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사회적인 의사결정의 좋은 예를 제시하고 있다.


"사람들이 의회에 의존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표를 의회로 보낼 때는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는 일에 투표하라. 우리는 그대의 결정에 복종하겠다'는 의미로 의회에 보내지는 않는다. 그들은 문제를 제기하고, 먼저 문제에 관해 충분히 토론하고 나서 의회에서 논의될 문제에 관해 잘 알고 있는 대표를 의회로 보낸다. 그들은 대표를 보낸 것이지 그들을 지배할 지배자를 보낸 것이 아니다. 대표는 호주머니에 '법률'이 아니라, '동의에 관한 제안서'를 넣어 가지고 돌아온다."


이와 같은 수단은 우연적인 선택을 통해 수행된 간접적이고, 사적인 통제에 비해 정치적 의사결정에 대한 강력하고 직접적인 통제가 가능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권력이란 필요한 최소한의 경우를 제외하고, 결코 대리인에게 양도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디에서든 직접적인 통제와 참여가 가능하며, 경제조직 및 삶의 다른 영역들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직접적인 통제가 가능하며, 권력 불평등의 근원 및 위로부터의 강제를 제거해 준다. 자신들의 삶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실행함으로써 사람들은 위로부터 그들에게 강요되는 견해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선택하거나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개방적이고 실질적인 토론이다. 이 토론을 통해 개인이나 집단은 어떤 견해를 제안할 동등한 기회를 가질 뿐만 아니라, 타인의 견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견해를 공식화하는 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갖는다. 고전적인 아나키스트들이 부단히 강조해오고 있듯이, 가장 기본적인 것은 생산의 조직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생산수단에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고, 경제적 생활의 통제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삶의 조직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 가능성은 자본주의적 조직의 물리적인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탈중심적인 사회가 전제된다. 중앙집중적인 거대체제는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적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공동체가 소멸한 곳에서 번창한다. 진정한 사회조직에 대한 아나키즘의 대안적 모델은 극단적으로 오늘날 대의정치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참여 민주주의'라는 신선한 모델을 제공한다.


2. 아나키즘과 다원주의


사람들은 '아나키즘이란 국가를 최소화 내지는 폐지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아나키즘 본래의 의도는 국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환원론', '전체 환원론'을 거부하고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유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개인 환원론에 근거해 있다. 예를 들면 노직의 이론이 그렇다. 노직에 의하면 재산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산물(개인의 사적인 노동의 산물)이며, 부는 완전히 자족적인 방식으로 생산된다. 나아가서 이기적인 각자의 수입이므로 국가나 사회가 간섭할 아무런 권리도 없으며, 개인은 이를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노직은 이른바 개인의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국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적 개인과 사적 소유를 보호하기 위해 주장되는 노직의 최소국가 개념은 아나키즘의 다원적 구조와 조화될 수 없는 근본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노직의 주장은 개인과 사회는 '사적 개인'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바쿠닌과 같은 고전 아나키스트들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러므로 개인적 환원론에 근거한 노직의 이론은 국가의 사회적 기능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자유주의도 아나키즘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자유방임 자본주의'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나키즘은 국가의 사회적 기능을 거부하지 않는다. 사회적 개인 및 집단이 자유로운 조직을 통해 국가가 진정으로 효과적인 사회적 기능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만인이 동등하게 생산수단에 접근할 수 있고, 사회생활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를테면 쓰레기 종량제, 승용차 10부제, 골목길 주차제도 개선, 시내버스 노선을 조정하는 일 등등-에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참여하며, 동등한 권리를 갖는 사회를 원했던 것이지 그런 사회를 포기하거나, 폐지하자는 주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국가를 주장하는 '자유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을 동등하게 점유하고, 동등한 발언권을 가질 기회는 점점 줄어들게 되며 개인의 삶에 대한 거대한 통제를 허용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류의 이론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나키즘과 유사하지만, 실제로는 아나키즘의 동기에 목표를 뒤집고 있다. '자유 자본주의'는 사회에 대한 부정성에 기초하지만, 진정한 아나키즘은 사회의 긍정성의 원리에 기초한다. 아나키즘은 개인을 사회로 환원하지도 않고(사회주의, 공산주의), 거꾸러 사회성의 원리를 전부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자본주의 사회)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아나키즘의 사회원리를 '다원주의'라 부르고자 한다.


현대 아나키즘은 이자, 이윤, 지대를 제거한 새로운 교환관계를 도입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개인 간의 호혜적인 교환경제체제로 대체하고자 노력한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결국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개인을 비사회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사회성'과 '연대'란 개인과 자유의 적(敵)으로 간주된다. 아나키즘은 '국가'와 '사회성'을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만약 개인적 아나키즘처럼 국가와 정부를 부정하면, 사회성마저도 부정하게 되어, 결국에는 공동체와 사회적 협동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을 사적 개인으로 보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개인을 사회적인 것으로 보고, 공동체나 연대에 의한 협동을 사회성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예를 든 입장으로서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개인, 개인의 자유, 공동체 사이를 명백한 갈등이 존재한다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과연 이런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과 집단(공동체) 양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사회, 경제적 원칙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사적 개인에게 생산수단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주는 것과 전체주의적 중앙계획에 따라 생산을 통제하는 것 양자를 모두 거부하는 하나의 새로운 경제체제'를 제안했다. 그 핵심을 보면 모든 상품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소유하며, 화폐를 폐지하고,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공동창고에서 공동생산물을 나누어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 경제체제는 자유로운 '자주관리 공동생산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규모가 작은 공동체일 경우,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쉽게 간파된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필요에 따라 나누어 가지려고 할 경우, 공동체 내에 최소한 적절한 규모의 제철소나 대규모 설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소규모 공동체의 경우 우리는 그런 것을 상상해 보기 어렵다. 이런 약점은 그 당시 아나키즘운동 내부에서도 이미 지적되고 있었다. 현대에 와서 문제는 오히려 더욱 복잡해 졌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현대의 눈부신 과학적, 기술적 성취를 볼 때, 모두에게 긴급한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환경에 대한 책임, 노동을 통한 자아성취와 만족, 이와 결부해서 개인과 사회성을 적절히 허용하는 가운데 이를 성취하기란 훨씬 어렵게 느껴진다. 공동창고가 이런 모든 조건들 특히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적 자유를 동시에 만족시킬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다원적 아나키즘과 아니키적 분배체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위에서 예를 든 아나키 공산주의처럼 모든 개인이 모든 생산과 분배가 공동체적, 공공성을 띈다면, 그래서 공동체만이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다면 개인은 어쩌면 아주 불건전한 의존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마찬가지의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개인은 공동체에 의해 받아들여질 때만, 그리고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는 집단이나 공동체를 조직할 때만 비로소 사회성을 가지며, 사회적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자유로운 조직'과 '자율적 연대'라는 아나키즘 본래의 정신이 훼손될 수 있으며, 집단(공동체)은 유연성을 상실하여 자칫 국가나 정부처럼 경직되어 버릴 소지도 있다. 그러나 집단과 개인간의 불가피한 갈등을 폭력(여기서는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폭력, 즉 공권력)이나 권위(관료주의의 권위)에 호소하지 않으면서 개인이 자유로이 움직이고, 집단이 자유로이 조직, 해체, 분리, 재구성될 수 있는 유연성이 중요한 매커니즘으로 등장한다. 공동체 구성의 자연적인 유동성, 유연성이 매우 중요하다. 정태적(情態的)인 아나키 공동체에서는 갈등, 폭력, 권위를 해결하는 방식이 다시금 강제적이 되기 쉽다.


다원적 아나키즘은 개인의 활력과 개인과 집단간의 목적, 욕구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다원적 아나키즘은 말라테스타가 잘 암시해 주고 있다 :


"어느 누구도 자기 일에 타인을 복종시키거나 예속상태에 묶어 둘 기회를 갖지 않으며, 그럴려고도 하지 않는다."


3. 아나키 공동체를 위한 협동적 교환과 참여의 경제


이상적인 아나키 공동체를 위해 어떤 경제체계가 바람직할까? 우선 규모의 문제를 놓고 보면 분배가 필요 없는 사회라면 공동체는 모든 성원이 서로 얼굴을 알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능한 한 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가족이 먹기 위해 야채를 기르는 것은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 시키지 않지만, 가능한 한 규모를 크게 할 경우 자본주의의 그것만큼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중앙집중화, 중심화 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쓰레기나, 폐기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에너지 생산을 최소화하며, 지역 환경문제를 지역 사람들에 의해 통제하는 등 많은 환경적인 잇점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환경을 생각한다면 가능한 한 소규모의 공동체가 바람직할 것이다. 공동생산을 함에 있어서 익명에 의한 생산이 아니라, 아는 사람에 의해 생산되어야 한다. 누가 기른 배추인지, 돼지인지, 혹은 어느 집 과수원에서 자란 사과인지를 알고 먹는 수준의 공동체가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대로 공동체 성원의 욕구가 자동차이거나, 지하철일 경우, 이 역시 문제의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권위적인 규제없이 자유로운 공동체계(행정기능)의 운용은 가능한 한 소규모여야 할 것이다. 크로포트킨이 일찍이 지적했듯이 이런 공공체계는 자유로운 농업공산제에서 예증되고 있다 :


"(......)공동체에 땔감나무가 많으면 이웃의 암묵적인 동의 이외에 어떤 허가를 받거나 방해받지 않고 원하는 만큼의 땔감을 채취할 수 있다. 그러나 목재일 경우, 그것은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할당하고, 이웃의 동의를 얻어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목초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농가의 가축이 소비할 만큼의 충분한 목초가 있다면 문제는 없다. 스위스, 프랑스, 독일의 공동체에서는 공동목초지를 이런 식으로 운용해 왔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계는 공동체가 총분하게 소유하고 있으면 할당이나 제한이 없으나, 부족하고 고갈되기 쉬운 생활용품에 대해서는 일정하게 몫을 나누고 분배하게 된다,"


생산과 분배체계의 규모가 커지면 익명의 결핍 또한 커진다. 다른 말로 하면 진정한 결핍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는 의사결핍(Pseudo-Not)의 규모가 그만큼 커진다. 소비자는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소비에 대해 관심과 책임을 다하지 않게 되고, 자본주의라는 거대창고(수퍼마켓)에서는 무책임한 소비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이런 소비체계하에서 상품생산에 투여한 노동의 가치는 익명의 심연으로 소멸해 버린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대규모 중심화된 자유분배체계는 시장과 중심화된 권위주의적 분배체계에서 나타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괴리를 영속화시킨다. 자본주의의 시장 수요, 공급체계를 통한 생산의 통제와 전체론적인 중심화된 계획에 의한 권위주의적 통제하에서는 필요에 부합하는 생산을 조절할 수 있는 체계로 발전하기 어렵다.


이제 이윤이 없고 이익, 차용, 지대가 없는 진정한 아나키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교환이론을 제시해야 할 때이다. 아나키 사회에 필요한 적절한 분배이론은 자본주의 경제이론의 핵심인 사적 개인을 사회적 개인으로 대체함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다음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아나키 사회, 경제이론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


①교환이란 무엇이며, 누구에 의한 교환인가? ②교환을 지배하는 원칙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③생산물은 어떻게 필요에 따라 조절될 수 있는가? 반환원주의 원칙에 입각한 아나키즘은 부분론(자본주의)이나 전체론(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비해 새로운 대안적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이상의 질문을 하나 하나 살펴 보자.


교환이 무엇이며, 누구에 의한 교환인가? 아나키즘을 위한 교환체계에서는 지금까지 자본주의에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교환 가능한 것들이 '교환금지'된다. 아나키즘의 반환원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충분하지 않은 모든 것은 경제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최소한의 제한조건만 만족시키면 무한정 교환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가설을 정면으로 부인한다.


예를 들면 반환원주의에서는 토지는 교환대상이 아니다. 그 외에 어떤 생산수단도 교환될 수 없다. 지하자원, 공기, 물, 바다, 강, 삼림 등 모든 자연자원은 교환될 수 없다. 교환될 수 없으므로 값이 매겨지지 않고,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다. 부족할 경우에는 '사회적'동의를 얻어 이용할 수 있다. 그것이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교환을 위해 사회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공동체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이를 교환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은 그것의 사회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다. 땅은 한번 소유하게 되면 그것의 공공적 성격이 소멸하여 전적으로 사적인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인 실체, 즉 '비사회적인 실체'로 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토지, 지하자원, 자연조건으로부터 돈을 벌거나 이득을 취할 수 없고, 취해서는 안된다. 결국 자본주의에서 값으로 매기는 다른 생산요소(여기서는 토지가 교환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두 가지 생산요소, 즉 '노동'과 '자본')는 아나키 사회에서는 더 이상 가치매김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산수단으로서의 '노동'은 노동자의 급료이상으로 팔리는 상품을 생산하는 개인 기업가에 의해 고용되어 이용될 수 없으며, 당연한 귀결로써 노동이 임금이라는 형식으로 팔리지 않으면 소위 '자본'이라는 것도 없어진다. 자본축적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자본도 이제 사회(공동체)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아나키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교환가능'하고, 공익으로 취급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개인적인 노동이 그것이다. 그리고 개인이 이전에 종사하던 분야에서의 '개인적인 생산'에 대하여 개인과 집단은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으며, 자유로이 결정된 교환이 개인에게 있어서나 사회 전체에서나 공히 이루어질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노동을 사회적 공익으로 취급하는 것은 개인적인 노동을 '사회적 생산'으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인적인 소유는 물론이고, 개인과 그 노동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를 부정하게 되고, 결국 전체론과 아주 유사한 가정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개인은 공공의 사회적 유산을 근거로 해서 순전히 자신의 노동을 투여해서 생산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에, 그는 그런 생산물을 사적인 용도에는 물론이고, 그것을 교환에 이용할 수도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최초로 교환되는 것은 생산물 자체가 아니라, 생산물을 산출하는데 투여된 노동이라는 사실을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 즉 교환되는 것은 생산물에 투여되어 표현되는 '노동', 그리고 그 노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상품은 이차적이거나, 다양한 다른 형태로 소유되거나 교환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노동은 교환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이 공적인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이것 만이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소유되거나 교환될 수 있다.


3.1 노동가치이론에서 노동교환이론으로


노동의 일종의 바터(barter)제 형식으로 교환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보편성과 유연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동과 저장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노동은 한번 투여되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동 보관이 불가능하여 값을 매기거나, 가치를 비교하기가 어렵다. 이런 한계는 가격체계나 등가교환 체계로 해소될 수 있다. 교환조건은 순수 노동이나 숙련기술의 교환이어야 하며, 그래서 원칙적으로 교환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교환 가격을 결정함에 있어서 유일한 가격결정 요인으로 만드는, 다시 말해서 '노동교환이론'으로 만드는 그런 교환체계를 필요로 한다.


결론은 이러하다 : 교환을 지배하는 이론적 근거는, 노동교환이론이지 고전경제학, 특히 고전적인 맑스 경제학에서 주장되어 온 노동가치이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필자가 제안하는 이런 시스템 내에서는 노동은 '가격'을 결정-그것은 당연히 등가교환이다-할 뿐, 결코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노동에는 많은 자연물, 생태계, 그리고 땅(토지)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고, 노동교환체계 내에서 이는 고유한 높은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생태계, 자연물, 토지는 그 자체로서는 인간의 노동을 전혀 포함하지 않고 있으며, 그 가치는 인간의 노동이나, 활용에 의해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유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고전적인 구분은 여기서 제시하는 가격과 가치의 구분과는 다르다. 가치란 인간의 활용여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상품의 가격이란 사실상 '시장의 메타퍼(Metaphor der Marktes)'에 다름 아니다.


가격과 교환의 단순한 구분은 환경적인 이유에서도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 노동교환이론은 맑스의 이론의 가정(자연물은 무가치하다거나 자연물의 가치는 전적으로 인간의 노동, 혹은 이용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는 맑스의 주장을 상기하라)을 전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시켰던 맑스의 이런 전제는 노동교환이론에 포함되어 있는 전제와는 차원이 다른 전혀 별개의 전제조건이다. 노동교환이론은 노동가치이론에 늘 따라붙는 불필요한 일련의 문제를 피할 수 있다. 좋은 예로 개인 각자가 어떤 상품에 투여한 노동의 크기를 공정하게 계측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노동교환의 기초로써 등가노동의 공정한 계측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반박하고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지극히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노동가격이론을 유치하다는 이유에서 간과해 버렸다. 예를 들어 사뮤엘슨(P.Samuelson)은 자본, 지대와 같은 생산의 나머지 두 요소가 부족하지 않을 경우에만 노동이 가격을 결정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노동가격이론을 무시해 버린다. 하지만 사뮤엘슨이 말하는 '충분함'이란 원초넉인 자연상태, 말하자면 에덴의 동산에서나 가능한 전제이다. 사뮤엘슨의 논증은 전적으로 오류에 빠져 있으며,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적 토대가 되고 있는 사회적 전제를 교묘히 감추고 있다. 신고전파 경제이론의 정당화에 필요한 이런 가정은 땅이 충분하지 않다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땅은 교환가능한 것이며,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이 매겨진다는 '사회적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아나키 사회, 경제체계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다.


앞에서 충분히 논증했듯이 아나키 사회, 경제이론에서는 토지는 가격을 갖지 않는다. '결핍 때문'이라는 사뮤엘슨의 논증 역시 시장에서의 교환 말고 충분하지 않은 것을 분배하는 다른 사회적 매커니즘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것은 상호의존적인 이해관계와 '자유로운 개인의 자율적인 동의'에 근거해서 수행되는 공동체적 체계에 적절한 방식일 것이다. 필요를 평가하는 공정하고도 평등한 척도가 있으며, 이에 따라 분배하는 것, 혹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공동체 차원에서 자유로운 분배를 위한 계획이나 체제에 구성원들이 동의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신고전파의 논증은 결핍(부족)이 만인에게 평등한 결핍이라고 전제하고, 그렇기 때문에 교환가능한 것으로 보는 오류이다. 우연적이고 변경가능한 사회 조직을 마치 필연적이고, 변경불가능한 자연적 요소로 제시한다. 이는 분명 자연주의적 오류이다!
우리가 결론내리고자 하는 것은 아나키 사회, 경제체제에서 교환 가능한 것은 오로지 상품에 표현되어 있는 노동일 뿐이라는 점, 그리고 전체론과는 달리 교환은 사회적 전체와 마찬가지로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러한 노동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점이다.


3.2 교환을 지배하는 원칙


오로지 노동만이 교환가능하다고 보는 아나키 교환체계에서 상품의 가격-그것은 결국 등가교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은 전적으로 상품을 구체화시키는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교환은 등가노동이라는 의미의 교환이다.


노동등가란 시장이라는 수단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시장가격의 매커니즘은 사회적 개인이 아니라, 이기적으로 틀 지원진 사적 개인들에게나 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나키 경제이론이 반환원적 사회이론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때, "교환은 사적 개인들간의 교환이 아니라, 사회적 개인들 간의 교환이어야 한다."


사적 개인에게 있어서 합리적이라 함은 개인의 이기적인 관심을 가능한 한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런 합리성의 개념은 고전파 경제학의 경제적 거래에서의 이윤 극대화라는 목표에 잘 나타나 있다. 이기적인 관심을 가진 사적 개인들이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타인의 관심사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사회적 개인에게는 전혀 불합리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의 이기적인 관심의 극대화와 경제적 거래에서의 이윤관 이득의 극대화는 만약 그 사람의 관심이 타인의 관심과 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적일 경우, 더 이상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이기적인 관심을 극대화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광범위한 상호의존적인 이해관계와 상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개인이 타인의 이해관계-그것은 상호의존적이다-를 희생시키고, 무시하여 자신의 관심사와 이익증진을 추구하는 것은 불합리이다. 고전 경제학에서 주장하듯이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의 가격의 극대화가 합리적이라고 표현되는 이기적인 이해타산의 극대화는 사회적 개인에게 있어서는 불합리이다. 이기적인 이해타산을 가진 사적 개인을 전제할 때만 가격의 극대화는 합리적인 것이 된다.


문제는 교환 품목에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등가의 노동단위를 측정하는 적절한 원칙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장이라는 기능에 의해 측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시장 말고 다른 어떤 기준을 통한 등가노동의 측정기준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등가노동을 재는 한 가지 변수로 모든 교환에 공히 포함되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시간'이라는 변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시간을 등가 노동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는 사회주의 사상의 오랜 전통이다. 생산물에 투여된 시간은 등가노동의 어떤 기준에도 포함되어 있는 주변수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유일한 요인(숙련, 담당하는 일의 난이도 등등 다른 요소들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은 아니고, 다른 공동체에서는 등가노동을 재는 또 다른 원칙을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순수하게 물건을 만드는데 드는 노동 시간에 의한 '등가노동계산'은 순수하게 생산물을 만드는데 소비한 시간이라는 의미로 등가교환이 결정될 수 있다. 고도로 평등한 사회-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만 가능하겠지만-에서는 한 사람이 노동한 한 시간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 노동한 한 시간과 등가로 계산된다.


그래서 이런 사회에서 사회적 교환을 위한 평등주의적 토대가 확립된다. 물론 평등주의적 원칙, 혹은 그 어떤 노동등가의 원칙으로부터도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은 무엇이건 가치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교환은 상품교환이 아니라, 노동의 교환이기 때문에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동등함이란 '생산물의 동등한 가치'가 아니라, '노동등가'를 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음의 예를 보면 등가노동 혹은 노동시간에 의한 교환원칙이 얼마나 불충분한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 목수가 식탁의자를 만드는 데 세 시간 일했고, 외과의사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30분간 노동했을 때, 만약 노동총량이 가치를 결정한다고 하면, 의자는 사람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교환가격의 목표는 단순히 생산자가 물건을 만드는데 소비한 시간과 노력을 공정하고 균등한 비율로 보상하기 위함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생산자가 생산한 물건의 '가치'를 지불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나키즘의 노동교환이론은 반환원적이다. 시장경제체제는 '사회성'을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 시장은 이윤 극대화의 전형으로 보고, 시장은 이기심으로 가득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둘째 : 개인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립하는 상품을 소유, 통제, 교환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리하여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은 무엇이건 완전한 시장가치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노동교환이론에 근거하여 '협동적 참여'라는 이름 아래 아나키 사회, 경제이론의 핵심이 무엇인지 살펴 보았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시장경제체제와 어떻게 다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이며, 그리고 그 환경친화적 성격에 대해서도 간간히 언급하였다. 이제 아나키 사회, 경제이론의 환경적 귀결을 다루기로 한다.


4. 아나키즘과 녹색경제의 패러다임


4.1 아니키 공산주의 이념과 환경문제


여기서는 아나키즘이 어떻게 자연환경과 친밀한 사회 경제이론이 될 수 있는지 크로포트킨의 아나키 공산주의 이론에 근거해서 살펴 보고, 사적 기술의 통제와 탈중심화, 사회적 통제와 기술의 선택, 그리고 아나키즘의 생산, 소비조직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생태지향주의와 이상적인 '자주관리 사회'를 위한 청사진은 이미 19세기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정교하게 그려졌다. 그 중에서도 크로포트킨은 오늘날 생태지향주의라고 불리는 생태, 환경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이다. 칼렌바흐(E. Callenbach)나 슈마허(E. Schmacher)의 에코토피아는 바로 크로포트킨이 그려내었던 아나키 공산사회의 모습 그것이다. 그러나 후세의 사람들은 놀랍게도 크로포트킨의 말을 완전히 빼 버린체, 아나키 사회, 경제이론을 마치 자기들인 것인 양 말하고 있다.


크로포트킨은 1899년 저서 [농장, 공장 그리고 직장(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에서 직업으로의 일거리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노동 또는 자본으로부터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제공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 국가의 재력이 단지 소수의 특정 계층만을 위해 생산되는 이익-예를 들면 '국민총생산'-에 의해 판단되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노동의 창조성을 강조하면서 그는 인간이 진실로 존중되는 경제학을 요구했다. "돈벌이를 위해 수십분, 몇 시간씩 이동하지 않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곳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사람들을 도시로 모이지 않게 하며, 대규모 자본을 집중적으로 투입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기술, 그런 기술이 필요 없는 그런 경제학"을 주장했다. 슈마허도 나중에 똑같은 톤으로 말하고 있다.


크로포트킨은 바쿠닌에게 영향받은 아나키적 성향의 '쥐라(jura)연맹(스위스 쥐라지방의 시계공들이 조직한 아나키 공동체)'을 통해서 아나키 이상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에코토피아에의 근본적인 이상을 제시한 18세기의 루소였다. 알고 있듯이 루소에 의하면 개인은 오직 공동의 필요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개성을 가장 훌륭하게 실현한다고 생각했다. 루소는 서양철학의 실증주의적 흐름에 반대되는 경향을 대표하고 있는데, 낭만주의자로서 근대과학의 발전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 과학의 전문가가 계획하고, 이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정부가 필요하다는 베이컨류의 '계몽적 전제주의'를 비판했다.


루소는 과학이 사회진보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오히려 현대문명은 진보하기는커녕 진정한 행복은 자연과 가까이 하려는 소박한 삶을 통해 실현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루소에게 있어서 인간의 최고의 덕목은 '자유'이며, 인간은 정치사회 속에서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로 된다.


"아나키 공산주의는 권력분산형, 자유분방형 사회주의를 선호한다. 따라서 사회적 책임보다는 개인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사회적 책임을 무시하고, 개인의 자유에 집착하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을 거부한다.

아나키 공산주의는 개인의 독자성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상호 의존성도 중시한다. 개성의 발전과 충만은 개인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평등한 상호협력관계를 북돋우며 사회의 다양성을 진작시키고, 권위주의적인 위계질서의 출현을 저지하는 각각의 이익단체들과의 '연대'를 강조한다. 아나키 공산주의는 현 사회에 대한 자본주의 생상양식 및 기타 다른 경제적착취 때문에 생기는 불가피한 불평등과 억압적인 계급관계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맑스주의와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은 크로포트킨의 이런 주장이 편협한 지역주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루소 식의 과격한 자연주의적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자급자족경제를 유지하면서도 코스모폴리탄적인 사유와 다른 세계와의 부단한 교류를 통해 각각의 공동체 내에서의 성원들의 주체인식을 강화해 간다. 그러니까 크로포트킨이 그려내고 있는 이상적인 아나키 공동체는 오늘날 그 예를 쉽게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지방자치가 잘 발달된 나라의 '지방 전원도시형 사회'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책에서 그는 그런 소공동체의 유형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500명 내외의 마을공동체가 모여 지역공동체를 이루고, 5만명이 모여서 공동체 국가를 구성한다. 이런 단위는 기존의 민족국가를 넘어서 지구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 그러므로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규모의 경제, 생산과 분배에 대한 중앙집중식 통제와 조작에 의해 지탱되는 사회는 그 어떤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대중을 보다 용이하게 억압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이 된다. 따라서 아나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모든 제도와 형식 관료주의, 권위 위계질서, 소비시장, 중앙집중화, 특권 등등은 "상호보조적인 인간의 자기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에 단호히 거부된다."


크로포트킨의 아나키 공산주의를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지만, 북친과 유사하게 생태사회주의를 주장하는 독일의 행동가 루돌프 바로는 스스로 맑스주의의 정언명령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벗어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계급투쟁보다는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이 우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바로는 '생태사회주의'라는 녹색정치사상을 체계화하여 생태위기의 근본 원인은 직접적으로 유럽의 산업화와 그로부터 등장한 산업 자본주의의 팽창에 기인하는 것이긴 하지만, 자본주의의 경쟁과 성장, 팽창에의 충동은 베이콘 이래로 주체로서의 자아가 강화된 '근세적 인간'에 내재하는 테르시테스(Tersites)적인 자기확대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태, 환경 문제에 관한 한, 어떤 계급적,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나 세계관의 투쟁은 확실히 낡은 사고이며, '사회주의냐, 야만이냐'하는 룩셈부르크(R. Luxemburg)의 양자택일은 '계급혁명이냐, 생태적 세계관의 혁명이냐'로 대치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Bahro)는 현대과학과 산업독재를 낳은 자본주의라는 거대기계자체가 스스로 국가가 되어 버린 지금, 녹색운동은 거대기계를 세우고, 산업독재를 타도하는 일만으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 왜냐하면 그것은 "거대기계에 녹색옷을 입혀주는 생태적 현대화 계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정신의 대대적인 개종운동이라고 말한다. 근대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적 범죄'를 단죄하는 것이다. 이런 바로의 태도에 대하여 몇몇 사회주의자(맑스주의자)들은 그가 온건한 낭만주의에 빠져있다고 비판하였다. 그것은 잘못하면 일종의 생태파시즘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4.2 사적 기술의 통제와 탈중심화


협동적 교환과 참여의 구조에서 지역적으로 분산된 공동체는 국가에 의존하기 보다는 '연대와 연합'이라는 삶의 유형을 필요로 한다.


분산된 소규모 공동체는 현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거대도시의 환경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거대도시에서 이웃은 그 진정한 역할을 상실했으며, 사람들은 자족적인 삶을 누릴 수 없도록 조직되어 있다. 거대도시에서는 교통과 운송, 그리고 에너지의 불필요한 낭비를 초래한다.


탈중심화된 아나키 공동체에서는 가능한 한 규모가 작은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환경적 부담을 덜어 준다. 예를 들면 화학비료 공장을 폐쇄하고 유기비료를 씀으로써 대규모 비료공장 플랜트는 필요없게 된다. 화학비료 공장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 소비도 그 만큼 줄어들게 된다. 개인 승용자동차 공장은 사적 개인을 위한 기술이다. 다시 말하면 승용차는 이기적인 운송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를 자전거나 최소한의 전기버스로 대체하게 되면 자전거 산업과 버스 및 에너지 산업은 사회적 기술로 환원된다. 문제는 자주관리 사회가 사적 기술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수행하느냐이다.


생산을 협동적으로 조직하고, 권력을 급진적으로 탈중심화함으로써 자주관리되는 아나키 공동체에서는 기술의 남용과 오용을 막고, 은밀하게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이나 소집단의 과학적 탐구를 사회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연스럽게 통제할 수 있다.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가 기술통제에 개입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국가권력 자체인 것 같지만, 사실상 (국가)자본가의 개입에 다름 아니다. 국가자본주의의 개입은 결국 협동적 생산과 참여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국가 혹은 국가자본주의의 개입은 기술생산자와 기술소비자간의 이해관계를 중재하지 못하고, 강제에 의해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편들어 주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국가는 언제나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주는 대변인 구실을 했다. 이와 반대로 아나키즘은 이들간의 직접적인 중재, 조정 체계를 가지고 있다.


크로포트킨 역시 중세 자유도시에서 비국가적인 중재와 조정의 예를 들고 있다. 공동체 구성원 전체에 의한 의사결정과 전체에 의한 강요는 이미 국가의 간섭에 의한 강요와는 다르다. 이런 식으로 자주관리 아니키 공동체에서만이 공해나 자연 환경, 기타 자연 생태계에 해가 되는 행위를 막을 수 있다.


기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노동의 구원에 있을 터이지만, 생태, 환경이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기술의 선택은 언제나 자본주의의 논리인 '경제적 이유'로만 설명될 수 없다. 기술의 선택은 생태, 환경의 위기 시대에 더욱 신중해져야 하며, 어쩌면 노동의 구원이라는 기술 본래의 목적보다도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독점생산, 독점 판매되고 있는 화학약품(살충제)은 해충구제를 통한 농업생산성의 제고(提高)라는 '경제적 이유'에서 언제나 필요한 것으로 선호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생태학적 균형의 파괴를 통한 수요 충족이요, 성장이다.


개인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을 실현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물질적 풍요를 이룩해야 된다는 주자은 사회적 개인을 이해하지 못한 사적 개인개념을 기저에 깔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와 맑스, 레닌주의는 그런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런데 결핍 때문에 생기는 충돌이 멈추는 곳은 분명 사적 개인들의 이해관계가 더 이상 무의미해 질 때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결핍된 물품을 위한 사적 개인들의 경쟁은 풍족할 때는 일어나지 않게 되고 풍요 위에서 자유로운 여가를 위한 경쟁만이 남게 될 것이다.


결국 사적 개인이 풍요를 성취하는 그곳에서 그는 사회적 개인이 된다. 그러므로 결핍의 추방을 주장하는 맑스주의는 사적 개인을 거부한다는 공식적인 태도-맑스는 정말로 그랬다- 때문에 불가피하게 사적 개인을 잠재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부분론에 대한 불완전한 거부이다. 맑스와 맑스주의에 있어서 사적 개인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적 개인이 결핍의 추방이라는 이름 하에 사회적 개인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자족적인 필요와 이익을 실현하여, 더 이상 타인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것이 필요치 않을 때까지 사적 개인은 은밀히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경쟁이 있는 한, 맑스주의의 논의에서 사적 개인 개념은 항상 잠재해 있다. 지구 자원이 풍족하지 못하고, 산업생산물이 개인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 경쟁은 더욱 만연하게 되어 인간은 이기적인 욕망의 주체로 생각하게 되었다.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가정하고 있는 개인은 바로 이런 개인이다.


그러나 필요와 이익이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개인이 사회적으로 개인으로 간주되는 자주관리 사회에서 필요의 충족은 경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협동과 연대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 사회적 개인의 수요와 욕구는 탐욕스러운 것이 아나며, 엄격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과도한 소비를 부추키는 잉여생산이 없기 때문에, 의사결핍(상대적 빈곤감)을 조장하는 과잉생산에의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에 노동의 목표는 생산의 극대화와 경제규모의 성장은 불합리한 것이며, 비효율적인 것으로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필요한 최소한의 기술진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주관리 사회에서는 의사결핍을 조장하는 잉여 생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기술과 설비를 무리하게 투자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성장과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생산지상주의를 거부하는 자주관리 사회는 이런 야만적인 매카니즘으로부터 이 세계의 인간, 자연, 환경을 동시에 배려하는 공동체 문화, 공동체 예술을 진작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자주관리되는 자유사회는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상호의존과 직접적인 교환관계로 복원함으로써 익명성과 이기적인 시장경제를 해소한다. 익명성을 해소하고 직접적인 관계의 복원을 통해 다른 자연계에 대한 배려와 관심, 그리고 책임을 실천할 수 있게금 해준다.


5. 맺음말


인간이 지구상에서 특별한 위치-생태계와 환경을 책임져야 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 그리고 인간은 지구상에 계속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윤리적 요청-를 점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 이외의 것을 마음대로 처분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최후의 심판자나, 소유자의 입장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분명 인간의 목적에 쓸모가 있고, 또 인간이 자기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는 장소로 특히 알맞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가 오로지 인간의 목적만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처분하거나 바라는 대로 변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이 생태와 환경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자연계와 다른 종을 대하도록 하는 데에 탁월함을 보이는 견해를 지녀왔고 지금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자연계에 대한 서구의 '재산지향적 태도'를 비정하고 냉혹하고, 부도덕하다고 고발한다. 자연계를 재산가치로 보지 않는 태도는 '아나키 공동체 공산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자연에 대한 배려는 이용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이용을 배제하는 것이다.


자연을 배려하는 태도는 소규모 생산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자연을 배려하는 마음과 동시에 불요불급한 필요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소비자는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생산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알고 있는 그런 생산 양식이다. 소비자는 자신이 생산된 물건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리고 자신이 자연계 일반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 책임감, 배려, 관심을 가져야 한다.


소비자는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만 사용하고, 자연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자연에 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생산한다. 자연을 배려하는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자연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직접 책임을 질 수 있게금 '협동교환과 참여의 경제'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자연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는 지금까지의 서구의 자본주의적 소유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따라서 시장경제와는 양립할 수 없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재산개념 자체와 세계에 대한 재산주의적 사고 방식이 거부된 것이라기보다는 '재산지향적 태도'가 개인에서 전체로 전이된 것이다. 세계는 오히려 더 명백히 인간의 재산으로 간주 되지만, 이는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전체론적 인간의 재산인 것이며 또 그에 알맞게 취급된다. 이러한 전체론적 입장에서 정말로 거부되는 것은 그렇다면 비교적 변화되지 않은 채, 전체로 전이되는 재산의 개념 자체라기보다는 개인의 개념과, 개인이 전체와 독립하여 취할 수 있는 행동의 가능성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반환원론의 입장은 개인의 개념을 수정하고 또한 그 결과 재산의 개념을 철저하게 수정하여 사회 공동체와 자연계와의 공동체 관계를 모두 가능케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