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주 유림선생 기념사업회>
http://www.danjuyurim.org/danju01_10.htm
단주 유림과 한국아나키즘의 형성
김성국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 아나키즘학회 회장)
지나간 것은 모두 그리워지고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다. 역사란 어찌 보면 집단의 추억이고 그걸 돌아보는 일은 우울하면서도 감회에 젖는 달콤함이 있다. 그러나 또한 돌아보는 일은 부질없다. 그 누군가의 말처럼 시간은 방향이며, 삶은 그 방향에 따른 일회성의 진행이다. 그런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어쩔 수 없이 ‘지금, 여기’가 된다. 그리고 두려워 떨고 조바심치며 보는 것은 ‘다음, 저기’가 되며, 그 때문에 우리는 돌아보기보다 더 많이 바라본다. 낯선 곳을 찾는 것은 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라보기 위해서이다 /이문열의 시베리아 횡단기(1), 조선일보 2001년 3월 5일자 9면)
만약 우리 아나키스트들이 정신차리지 않는다면, 적들이 우리의 역사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Gaetano Salvemin- Levy(1999: 1)에서 재인용)
Ⅰ. 유림: 아나키즘에서의 일탈이냐? 아니면 아나키즘의 한국화냐?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한국 아나키즘운동사라는 역사의 물결을 더듬어 가며 단주 유림선생(旦洲 柳林先生, 이하 “유림”으로 약칭하겠음)을 (유림은 한때 월파 유화영(月波 柳華永)이라는 호와 성함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개명하였다. 정인식(鄭仁植)선생에 의하면, 세간에 알려진 단주라는 아호는 부산정치파동 이후에 사용한 것이며, 월파의 한자어도 ‘月波’가 아니라 ‘越坡’가 정확한 것이라고 한다. “언덕을 뛰어 넘는다”는 의미의 ‘越坡‘란 바로 민족독립과 사회혁명을 추구하는 의지의 표현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일제하의 만주와 평양으로 다시 중국 천지로 돌아다녔으며, 해방을 앞둔 임정(臨政)의 절박한 순간들도 그려 보았고, 해방후 독립노농당의 당당한 외침과 처연한 운명도 지켜 보았다. 유림이 들고 다녔던 횃불이 완전히 꺼진 것이 아님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몇몇 살아남은 동지들이 여전히 “그날‘을 기다리며 불씨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숙연해졌다. 그 불씨들이 작지만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할 것 같다는 자기완결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도 들었다. 이 불이 밝혀주는대로 앞을 바라보고자 한다.
유림은, 세계아나키즘운동사에서는 매우 예외적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독립노농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고 제도권정치에 개입하였다. (아나키즘과 국가, 정부, 조직 등과의 연관성은 결코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대 아나키스트들은 점차 한시적 수단 혹은 현실적 실체로서 국가체제를 절대 부정하거나, 맹목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 이에 관한 최근의 논의로 Marshal(1992: 12-50)과 방영준(1998)을 참고할 것.)
이와 같은 일련의 파격적 정치활동에 대하여 논란이 분분하다. 그것은 아나키즘으로부터의 배신인가? 일탈인가(Crump, 1995; 이호룡, 2000)? 아니면, 아나키즘의 고양인가? 창조적 변용인가(하기락, 1993: 272-273; 김성국, 1998a: 90-102)? (아나키스트의 정치참여와 관련해서는 내부적으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이미 상해노동대학의 설립과 관련하여 1927년 5월 일부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일본인 아나키스트 암좌작태랑(岩佐作太郞)이 강력한 반대를 제기하였고 이정규는 현실참여의 불가피성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해방후 독립노농당의 창당과 관련해서 이정규는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이 글의 목적은 이같은 논쟁적 주장들에 정면으로 대응하면서 아나키스트 유림의 활동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일탈론을 주장한 이호룡(2000)을 대상으로 비판적 논박을 제기할 것이다. 필자는 그의 평가와 해석은 편향적이며,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호룡이 한국아나키즘운동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였음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와 논거가 적시될 것이다. 유림의 아나키스트 일대기를 세 시기, 즉, 해방전의 아나키즘수용기(제2장)와 임정참여기(제3장) 그리고 해방후의 독립노농당시기(제4장)로 각각 나누어 논의하겠다. (유림에 관한 연구는 김희곤(1992)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이 글은 자료의 제약상 시론적 성격을 갖는다.)
필자는 유림이 한국적 특수성에 입각하여 아나키즘을 “한국화”, 즉, “고유화” 혹은 “주체화”하였을 뿐아니라, 아나키즘의 실천적 지평을 확장하므로써 세계아나키즘운동을 한단계 “고양”시킨 선구자적 업적을 이룩한 것으로 판단한다. 필자 자신이 참여지향적 아나키스트로서의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필자는 순정(純正, Pure)아나키즘의 필요성을 인정하기는 해도 아나르코-생디칼리즘과 아나르코-코뮤니즘에 더욱 관심이 많다.)
물론, 일종의 가치전제로서, 필자는 긍정적-적극적 입장에서 유림을 바라보기는 한다. 불가피하게, 역사란 제한된 자료를 앞에 두고, 미래를 바라보며 해석하는 연구자의 부담스런 몫이 아닌가? 다만,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한국 아나키즘운동사는 이념적으로 좌(左) 아니면 우(右)라는 배타적인 양극구도가 지배하는 사회과학의 담론질서 때문에 이제껏 제대로 평가받지도, 인정되지도 못하였다. (매우 흥미롭게도,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운동사에 관해서도 동일한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지금까지 이탈리아 아나키즘에 관한 역사는 대부분 아나키스트의 적들에 의해 쓰여졌으며, 지난 25년 동안에야 보다 균형잡힌 아나키즘운동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오랜 세월 이탈리아 아나키스트운동사는 거의 잊혀졌거나, 아니면 단지 각주에나 언급될 정도였다.....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Levy, 1999: 2). 이제 한국에서도 아나키즘의 역사는 아나키스트들이 적극적으로 기록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다행히, 최근 오장환(1998)을 시발점으로 조광수(1998), 조세현(2001) 등의 비교사적 연구가 축적되고 있다.)
다행히, 현대문명의 근본 패러다임이 뒤바뀌는 세계사적 대격변의 물결과 함께, 특히, 강권적 국가체제의 기만성과 억압성이 여지없이 폭로되는 가운데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이해가 깊어지면서 그것을 대하는 시각도 점차 객관적이면서도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같은 지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아나키즘과 한국아나키스트운동사에 대하여 근거없는 용비어천가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유림을 미화하려거나 영웅시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스스로의 직접행동으로서 자신을 입증하였기 때문이다.
Ⅱ. 아나키즘 수용기: 반공산주의노선의 형성
(본 연구에서 사용되는 반공산주의(反共産主義)의 대상으로서 공산주의는 독재적-권위적 성격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혁명운동을 지칭한다. 물론, 크로포트킨의 아나르코코뮤니즘(혹은 무정부공산주의)에는 정치적으로 자유연합적인 지역자치공동체를 지향하는 코뮨(commune)중심주의와, 경제적으로 상호부조의 기반 위에서 재산의 공유(共有) 혹은 집산(集産)을 추구하는 반사유재산제도(反私有財産制度)라는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유림이 언제부터 확실히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를 입증하는 자료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는다. 공식적 기록(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198-199)에 의하면, 이미 아나키즘적 입장에 서있던 유림이 1929년 3월 하순 북만주에서 김좌진, 김종진, 이을규 등과 독립방안을 토론하면서 당시 증대하던 공산주의 세력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정부주의 사상의 수용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동년 11월 11일부터 12일 사이 평양에서 개최된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 주최의 전국흑색사회주의자대회(全國黑色社會主義者大會)에 참석하고자 만주로부터 평양에 잠입하여 수차의 회합을 가진 뒤, 이홍근, 최갑룡 등과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여 만주부(滿洲部)의 책임자가 된다. (여기에서 채택된 아나키스트강령과 운동방침은 다음과 같다: 강령은 “(1) 현재의 국가제도를 폐지하고, 코뮨을 기초로 그 자유연합에 의한 사회조직으로 변혁할 것, (2) 현재의 사유재산제도를 철페하고, 지방분산적 산업조직으로 개혁할 것, (3)현재의 계급적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고, 전 인류의 자유 평등 우애의 사회건설을 기한다” 이고, 운동방침은 “(1) 적색운동자와 대립적 항쟁을 하지 말 것, (2) 농민대중에 대한 운동을 진전시킬 것, (3) 다른 민족적 단체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818).)
그러나, 유림이 아나키즘에 접하여 아나키스트적 활동을 수행하기 시작한 시점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유림은 1919년 삼일운동 직후 아나키즘이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던 중국으로 탈출하여, 1921년 북경에서 그 당시 이미 아나키즘에 경도되어 있던 신채호와 함께 천고(天鼓)를 발행한다. 추론컨대, 유림은 1922년부터 중화민국 국립성도대학교 사범부 문과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4년 동안 당시 풍미하던 아나키즘에 대하여 충분한 연구와 숙고를 (당시의 독립운동가중에서는 드물게 유림은 중국의 정규 대학과정을 마친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아나키즘의 한국적인 재창조를 시도할 수 있는 논리적 기반을 갖추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출중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아나키즘에 대한 광범한 지적 섭렵도 가능했을 것이다.)
거치면서와 아나키스트로서의 확고한 신념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을규의 김종진에 대한 회고(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32)에서도 1929년 김종진이 이을규를 기다리던 중 “우연히 무창 한구에서 상종하였던 무정부주의자 월파 유화영(月波 柳華榮: 이후 유림으로 개명하였음)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유림은 이미 그 이전부터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 결과, 1925년 유림은 상해에서 민중사(民衆社)를 창설하여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을 계몽선전하던 중 대구에서 아나키스트단체 진우연맹(眞友聯盟)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려의 글을 보냄과 동시에 국내로 무기반입을 추진하였다(1991년 4월 1일 최갑룡의 추도사,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235).
유림의 아나키즘 수용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대다수 조선 아나키스트들의 경우처럼, 유림도 공산주의계열의 적색 독립운동노선과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흔히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활동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1929년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에서는 운동방침으로 ‘적색운동자와 대립적 항쟁을 하지 말 것“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이미, 신채호도 3·1운동을 전후하여 등장한 공산주의에 대하여 프로레타리아독재론은 “공산전제”를 내포하는 “새로운 강권주의” 이며, 모스크바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소련사대주의”에 빠져 주체성을 상실하였다고 비판한다(신용하, 1984: 290-291). 신채호의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당시 중국에서 활약하던 대다수 조선무정부주의자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과 동일한 선상에서 형성된 것이다. (재일본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의 공산주의 비판에 관해서는 김명섭(2001: 89-90, 141-145)을 참고할 것.)
실제로, 신채호와 유자명은 1926년경 의열단(義烈團)이 좌경화되는 경향을 보이자 거리를 유지하거나 독자적인 행동을 전개하였다. (물론, 유자명의 의열단으로부터의 이탈 혹은 주변화에는 암살파괴운동의 포기와 조직적 무장투쟁노선의 채택이라는 요인이 직접적으로 작용하였다. 이같은 의열단의 노선전환에는 좌경화 혹은 좌파적 압력(예컨대, 상해청년동맹과의 노선공방)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의열단원이기 이전에 무정부주의자라는 정체감이, 단에 대한 귀속감보다는 무정부주의운동에의 헌신도가 더 강렬했던” 유자명은 그 후에도 의열단 지도자 김원봉과의 개인적 관계는 유지한다(김영범, 1997: 144). 유자명과 정화암 등이 남화한인청년연맹의 후신으로서 1937년에 조직한 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은 민족전선의 일환으로서 공산주의자와 때로 연합하기도 한다.)
신채호는 재판정에서도 “동방연맹이란 기성국체를 변혁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국을 건설하자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모르오”라고 답하나, 뒤에는 “무정부주의로 동방의 기성 국체를 변혁하여 다 같은 자유로서 잘 살자는 것이오”라고 진술하여, 공산주의 이념을 수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모르오’라는 대답을 신채호가 공산주의 이념을 수용하지 않은 증거로 간주하는 것은 일종의 확대해석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기락(1980: 367)의 추정처럼, 질문 중의 ‘공산국’이라는 개념이 애매하였기 때문에 ‘모르오’라고 대답하였지, 만약 소련과 같은 나라를 지칭하였더라면 분명히 ‘아니오’라고 대답하였을 것이다.)
전투적 민족주의자의 시기부터 “자유”를 매우 중시한 신채호로서는 “평등을 보장하나 자유를 희생하는 경향이 있는” 공산주의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신용하, 1984: 291). 이같은 아나키스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일관되게 지속되어 1930년대에 와서도 공산주의와 공산주의계열의 독립운동을 “사이비혁명적 허식인 공산전제”이며, “공산당 이용자의 애매한 사대사상”으로 평가한다(조선총독부 경무국, 1934: 276의 내용을 김영범, 1997: 251에서 재인용). 특히, 남화한인청년연맹선언(南華韓人靑年聯盟宣言)에서는 “.....노동자만의 당이 있기 때문에 안심하는게 가능하다면서 당의 독재를 실행하여 소수의 위원 또는 간부의 권력투쟁에 당황하는 노동자를 노예로서 제국주의보다 더한 강압과 절대 부자유를 전민중에 강요하고.....공산러시아와 같이 암담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함인가”라고 공산주의를 배격한다(사상휘보, 제5호, 1935년 12월,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해방 이후에도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주의 좌파가 포함된 임정세력과는 공동전선을 모색하나 소련파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아나키스트조직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自由社會建設者聯盟)은 [선언]을 통하여, “우리는 자주독립 완전해방을 위하여 그 실현의 날까지 우리의 우군인 혁명적 좌익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공동전선을 펴자”고 주장하면서 임시정부봉대운동(臨時政府奉戴運動)을 전개하나, 공산세력에 대해서는 “노국의 주구배(露國의 走狗輩)”(자유사회건설자연맹 창립대회 개회사, 1945년 9월 하순)라고 규정한다. 1945년 12월 20일-21일에 개최된 전국대표대회에서도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절대지지의 입장을 표명하나,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소련을 조국이라고 인식하는 사대사상을 버릴 것”과 “목적을 위해 수단을 불고하는 것을 버리고 무산자 독재정권을 수립하려는 의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며 분명하게 반대입장을 밝힌다.
유림 또한 1927년 3월 하순경 독립운동전반의 기본문제 및 당면과제에 관하여 김좌진과 격론을 벌리면서 공산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 무정부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에 관한 이을규의 기록(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34-35)을 살펴 보자: “토론의 중심은 만주에서의 독립운동계획안이었다. 그리고 만주에서 강력히 대두하는 적색분자들에 대한 어떤 사상적 방위책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 또한 중요한 것이었는데.....사상은 사상으로야 막을 수 있는 것이니까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로라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월파(즉, 유림)이 주장한데 대하여 백야는 주의는 주의로라야 대항할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주의가 구극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요 동시에 우리 민족이 복되게 잘 살자는 것이 염원인 이상에야 그 목적을 위하여 또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는 이론을 세워야 할 것이지 꼭 남들이 주장하여 오는 무슨 주장이라야 될 것은 아니라고 한데서 격론이 벌어졌던 것이다. 백야는 자기의 결론으로서 이런 문제는 일반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클 뿐아니라 단결과 협동이 시급히 요청되는 이 때에 자칫하면 운동자들 자체내부에 파란을 야기시킬 우려가 없지 않으므로 비록 동지들 사이의 격의없는 자리라 치더라도 신중히 다루어야할 문제이니까 이것은.....연구문제로 하여서 보유 재검토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얼마 안있다가 월파는 길림으로 돌아가고 백야, 회관과 더불어 선생은 해림(海林)과 출시(出市)를 격일하여 넘나들면서 신민부(新民府) 개편문제와 대공사상문제를 가지고 논의한 끝에 신민부 개편을 선생에게 (이회영으로부터 아나키즘을 수용한 김종진은 그후 1929년 7월 해림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여 아나키스트 농촌공동체의 설립을 시도하였으며, 김좌진의 신민부를 아나키즘적 성격이 강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재출발시킨다.)책임, 입안토록 위촉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볼 때, 당시 유림은 매우 단호하게 반공산주의적 입장을 지녔던 것 같다. 이 점은 원칙주의자 혹은 비타협주의자로서 유림의 면모와 일치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유림의 반공산주의 신념은 일관하여 유지된다. 해방후에는 김구가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할 때, 볼세비키의 수법에 현혹되지 말도록 결사 만류한다. 또, 4?19이후 혁신을 표방하는 정치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하던 때, 자신은 민주사회주의자가 아니요, “반맑스 자유사회주의자”라는 이념적 입장을 분명히 표명한다(1991년 4월 1일 최갑룡의 추도사에서,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236).
그렇다면, 재중국 조선아나키스트 혹은 유림의 반공산주의적 입장은 어떤 배경에서 형성된 것일까? 주지하듯, 아나키즘과 (마르크스-레닌-스탈린 계통의 독재주의 성향의)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서로 뿌리깊은 원한과 앙숙의 관계를 맺어 왔다. 당시의 조선무정부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 직후 볼세비키들이 아나키스트들을 숙청하고, 중국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지시하에 아나키스트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해 나가던 사실을 생생하게 체험하거나 기억했을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아나키즘의 기반 위에서 공산주의가 수용되었기 때문에 운동의 헤게모니 쟁취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는 구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그 당시 세계공산주의운동 및 식민지 치하의 민족해방전선을 지휘하던 소련지배의 코민테른이 행사한 엄청난 통제력을 감안할 때, 양자간의 대결은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일제하 아나키스트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의 세력관계 혹은 헤게모니구도는 어떠했을까? 이호룡(2000: 4-5)은 “한국의 경우 중국이나 일본처럼 아나키즘을 비롯한 사회주의의 사상적 토대 위에서 공산주의가 수용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가 수용된 뒤 공산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아나키즘이 수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과는 어긋나게, 이호룡(2000: 229)은 조선에서 아나키즘은 중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1880년대부터 소개되어 개인적 차원에서 수용되기 시작”하였고, “한말에 소개된 사회주의에는 온갖 조류의 사회주의 사상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1920년대 초까지 한국 사회주의계의 주류는 아나키즘”이었고, 1920년대초 “아나키즘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공산주의가 수용되었고, 1921년무렵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가 분화되었으며, 1922년 후반 무렵부터는 공산주의가 점차 사회주의 사상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해 갔다”고 결론을 맺는다.
한국의 경우 재일본 및 재중국운동을 포함하여 공산주의운동은 아나키스트운동의 기반이 내적으로 분화되거나 혹은 외부로부터 대립적으로 도입(혹은 침투)된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의 아나키즘운동 발단 자체가 일본과 중국의 아나키즘운동에 기반?연대하여 발생한 것이고, 일본과 중국의 경우에는 시간적으로 분명히 공산주의에 선행하여 아나키즘이 우세를 점유하였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도 19세기 각국 혁명운동의 적지 않은 부분은 “아나키스트가 용감하게 개척한 길을 나중에 공산당이 교묘한 수단으로 빼앗아 온 역사“(玉川信明, 1991:87)라고 할 수 있다.)
무정부주의자였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1994: 103-105)에 의하면, 조선무정부주의자의 전성기는 1921년에서 1922년이고 1924년에 이르면 대중운동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기울어진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대중운동을 일제가 허용해 주면서부터 공산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하였으며, “왜놈들은 이 단체들을 탄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단체들은 테러리즘과 의열단에 반대하였으며, 1919년부터 1924년까지는 왜놈들이 테러리스트들을 박멸하기 위하여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당시 왜놈들은 (공산주의자의) 선전과 대중운동보다는 (아나키스트의) 폭탄과 총을 훨씬 더 두려워 하였던 것이다. 1924년까지 300명에 가까운 가장 우수하고 용감한 의열단원들이 왜놈들에게 살해되었다.“ 조선공산주의운동의 급속한 성공배경에 이와 같은 일제의 선별적 탄압정책이 작용하였다는 점에 관해서도 앞으로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아무리 의로운 독립운동이라지만 목숨을 내걸고 감행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보다 안전하고, 소련이라는 막강한 지원세력이 있는 공산주의자의 반합법적(半合法的) 대중운동으로 몰린 것이 아닐까? 어쩌면, 아나키즘의 위축과 공산주의의 확대는 일제의 간교한 분할정책과 (소련으로부터의) 외부적 지원이라는 타율적 변수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필자는 아나키즘운동이 비록 소수이고, 대중적 조직성이 취약하지만 떳떳한 정도(正道)의 운동이었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양적 추세로 볼 때는, 비록 공산주의계열의 운동이 1920년대 중반부터 우세하였다고 해도, 운동의 독자성과 치열성 그리고 비타협성이라는 질적 측면에서 볼 때 아나키스트운동이 쇠퇴한 것이라고 규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독립운동에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민족주의 간의 세력구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의열단의 노선변화를 보더라도 이와 같은 문제점이 발견된다. 김영범(1997: 152 n251)에 의하면, 아나키즘이 점차 탈색되던 1925년경의 의열단은 “코민테른이나 소련정부로부터의 지원을 굳이 거부하거나 유대를 기피하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을 자가당착적이라고만 평언할 수 없는 것은 운동의 취약한 물적 기반을 보전하기 위한 실용주의적인 태도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1920년대 국제혁명운동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갈수록 강화되고 있던 소련 및 코민테른의 영향력에 피치 못하게 견인되어간 측면일 수도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그러한 태도를 “공산주의 이용주의자의 애매한 사대사상”으로 낙인찍고 시급히 청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하 독립운동상의 역학 구도를 고려한다면, 백야의 현실적 봉합론 혹은 타협론은 실용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조만간 혹은 필연적으로 와해될 수밖에 없는 임시방편적 세력유지론 내지 근본문제를 회피하는 일종의 미봉책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애석히도, 백야는 1930년 1월 20일 공산당원 김봉환(일명 金一星)의 조종으로 박상실(김신준)에 의해 암살되고, 김종진, 이준근, 김야운 등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피살된다. 그 당시 날로 횡행하던 공산주의테러의 실상(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331-333)을 통하여 테러리즘(특히 파괴를 위한 파괴적 테러리즘)이 결코 아나키즘에만 고유한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한) 한족총연합회의 조직공작이 이처럼 급진전을 보게 되니 일제의 영사관과 그 주구들의 당황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간도공산당사건 이래 진용재정비를 서두르고 있던적색분자들의 방해공작도 당연히 예상되고 있었다. 그래서 연합회측에서는 일제주구들과 적색분자들의 준동을 특별히 감시하라고 각지에 시급히 지시했다.....한편 비밀회의를 게속하면서 동만(東滿)일대의 공산폭도들의 여세가 북만(北滿)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산시 해림 등지의 방비를 더욱 굳게 하면서 예의 사태진전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폭도들의 무궤도한 만행은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비일비재였다. 무고한 기독교들을 생나무에 매달고 산채로 껍질을 벗기고 학교교원을 산채로 십자가에다가 못을 박고 부녀자에게 난행을 하며 사람을 묶어 놓고 불에다 삽을 달구어 단근질을 하는 등 인간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끔찍스런 짓들을 자행하였던 것이다.....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는 이 (아나키스트동지들과 한족총연합회의) 운동에 놀라움과 위축을 그리고 시기와 질투를 느끼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일제주구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일부의 사이비 독립운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위험은 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의 책동도 만만치 않았다. 왜경과 공산주의자들은 서로 연락이나 하듯이 교대하여 파상공세를 취해왔다. 공산주의자들은 흑룡강 대안의 종주국 소련을 등에 업고 한족총연합회를 파괴하여 북만에서의 주도권을 탈취코자 획책하고 있었다. 재만 무정부주의자연맹만 분쇄하면 한족총연합회는 저절로 거세되고 와해될 것으로 계산한 것이다. 이리하여 재만 무정부주의자연맹과 그 외곽단체인 한족총연합회는 일본제국주의와 소련을 배경으로한 공산주의집단에 의하여 말하자면 남북으로 협공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요컨대, 이 시기에는 국내외에서 아나키스트와 볼세비키(공산당)와의 충돌이 부쩍 늘고 있다. 1927년 이래 원산청년회 내부의 아나보르폭력사태, 동년 동경 조선인들의 흑적(黑赤)충돌, 1931년 1월의 아나보르충돌, 동년 3월의 함흥고보 학생들의 충돌, 4월 단천에서의 충돌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이 현상은 만주에서는 가위 쌍방의 무력충돌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Ⅲ. 임시정부 참여기: 유림의 “한국적“ 아나키즘 시도
유림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이전인 1942년 중경에서 “일개민족(一個民族), 일개정부(一個政府), 일개이념(一個理念), 일개집단(一個集團)”과 “당파(黨派)는 합동연이(合同聯異), 정부는 공대균담(共戴均擔)‘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해외각지에 있는 모든 혁명세력들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총단결할 것을 호소하였다(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264). 민족독립을 위한 그의 임시정부참여론이 아나키스트적 조직원리의 바탕에서 제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신채호를 비롯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임시정부를 격렬하게 비판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완전독립과 절대독립 그리고 무장투쟁을 주장하던 신채호는 조선의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한 이승만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1919년 4월 10일)와 대통령(1919년 8월 18일-9월 17일)으로 선출하자 완전히 결별한다. (신용하(1984: 275)에 의하면, 이 시기 신채호의 반임정활동은 전투적 민족주의자로서 당시 상해임정의 활동을 비판하고 부인한 것이었지 일반적으로 모든 정부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같은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이후 정부라는 기구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결국에는 무정부주의의 반정부사상에 동조하는 요인이 되었다.)
1920년대 말에는 신간회(新幹會) 설립(1927)의 기반이었던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간의 민족전선론을 아나키스트들은 극렬히 비난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세력은 “지배욕광 위선독립배(支配慾狂 僞善獨立輩)”이며, “강권을 배경하고 모순된 주장을 가진 불구자”(양자추, 흑색신문 제34호, 1934.12.28, 흑색신문사)로서 “국내 자본가계급과 타협하는 것”(탈환 창간호, 1928.6.1,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후 아나키스트는 민족주의자와 가끔 사안별로 공조체제를 유지하기는 했으나, 임정에 대한 불신과 비판을 고수하면서 때로는 상당한 적대감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한때 임정계의 민족주의운동을 하던 아나키스트 오면직(吳冕稙)은 1935년말경 김구, 안공근 등의 운동태도가 불철저하고 독선적인데 불만과 염증을 느끼고 남경 각처에서 혈맹단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한다(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365).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 나월환 대장의 피살사건과 관련하여 임정계는 아나키스트세력을 제거하고자 연관자 전원의 처단을 요구하였으나, 아나키스트세력의 대변자인 후보이는 조선인의 독립운동세력으로 임정계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고, 또 임정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변호했다(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391). 임정계인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국민당에 대해서는 한때 민족 내부의 파쇼세력으로까지 규탄하였다. 즉,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남화통신(사상연구자료특집 40호 69면)에서 임정을 포함한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행태를 두고 “적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를 새로운 철쇄로 결박하고 사리를 도모하는 반역자, 자치운동자 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해방과 혁명을 위하여 투쟁하는 선배 등의 잘못을 열거한다면, 조선이 식민지인 특성을 망각하고, 적 앞에서 기성국가의 정당식으로 사분팔열(四分八裂)하여 서로 자기의 세력기반을 축성하고, 서로가 영수가 되고자 급급하여 자기멸망의 투쟁을 계속하고 공허한 정치운동으로 해방운동을 삼고자 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인 동시에 오늘의 조선독립운동계를 침체시키는 일대 원인이라 할 것이다”라고 임정의 내적 분열과 당파투쟁 그리고 독립투쟁 방식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반임정주의노선에도 불구하고, 왜 유림이나 유자명은 1942년 10월 임시정부에 참가하게 되는가? 국공합작의 실패에 대한 교훈과 더불어 이 시기에 두드러지기 시작한 공산주의자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불안감이 무엇보다도 핵심적인 내적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독립의 가능성이 점차 현실화되는 전환기적 국면에서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의 프로레타리아 독재국가 설립을 저지하면서 동시에 아나키스트사회의 건설을 위한 정부를 수립하는 세력기반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1936년 스페인에서 민중전선이 성공하고, (당시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던 아나키스트들은 세계적인 파시즘의 물결을 역류하면서 한가닥 광명으로서 비친 스페인에서의 아나키스트혁명을 주목하고 있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일본의 인쇄공들은 아나르코상디칼리즘의 기치를 내건 동경인쇄공조합을 재건한다(小松隆二, 1972: 244-245,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416에서 재인용).)
프랑스에서도 연합정부가 설립되자 연합전선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인식도 바뀌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대내적으로도.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이 더욱 가열화되면서 민족독립운동 제세력들간의 보다 결집된 강력한 대응이 요구되었다. (아울러 중국측으로부터도 좌우합작에 대한 강력한 권유와 조치(예컨대, 임정에 대한 승인계획과 각 당파에 의한 임정의 확충 요구, 타 독립단체에 대한 지원중단, 좌우군대 통합과 관할 등)가 있었다.)
그리하여 1936년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민족전선의 필요성과 과제를 다음과 같이 17개조의 행동강령 초안을 통하여 제시한다(남화통신, 12월호):
1. 현하의 조선민족은 민족적 존망의 추(秋)에 처하여 우리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국제 정세를 인식하고 민족해방의 목적을 신속하게 달성하기 위해서 각당각파의 혁명세력 연합전선 결성의 필요를 통절(痛切)하게 느낀다.
2. 조선 민족의 자유해방을 위해서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자는 단체이건 개인이건 가리지 않 고 민족전선 구성에 참가해야 한다.
3. 민족전선은 그것을 구성하는 각 단체의 해체를 요구하지 않지만 혁명공작에서 보취(步驟)의 일치와 국호의 통일을 요구한다.
4. 민족전선은 대다수의 근로 민중을 기본대오로 삼는다.
5. 민족전선은 오로지 반일투쟁시기의 전략적 결합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건설시기에서 도 협동 노력해야 하는 것을 약속한다.
6. 독재정치를 거부하고 철저한 전 민족적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7. 경제기구의 독점권을 폐제(廢除)하고 만인평등의 경제제도를 건설한다.
8. 일체의 봉건적 세력을 배제하고 과학적 신문화를 건설한다.
9.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타도함과 동시에 공유사유를 가리지 않고 일본제국주의에 침점(侵占) 되었던 일체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의 공동경영제도를 설립한다.
10. 매국적(賣國賊)의 일체 사유재산을 몰수하여 건설사업에 충용한다.
11. 조선 내에 있는 일본인이 소유한 일체의 금융기관 및 상공업기관을 몰수한다.
12. 일본인이 소유한 광산?어장?산림을 일체 몰수한다.
13. 조선 내에 설치되어 있는 일체의 해륙교통기관을 몰수한다.
14. 생산본위의 교육제도를 건립한다.
15. 의무노동제도를 건립한다.
16. 공업의 도시집중을 방지하고 농촌의 공업화, 기계화에 주중(住重)한다.
17. 동아(東亞)의 일체의 항일혁명세력과 연합한다.
이같은 취지에 입각하여 일련의 협상과정을 거친 뒤, 1942년 유림(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및 경상도 대표)과 유자명(조선혁명자연맹과 충청도 대표)은 (유자명과 임정의 관계는 매우 돈독하였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의 임시의회 의원이 되었고, 의회비서로 일한 경험이 있다. 유자명(1999: 235-236)이 회고록에서 언급하듯이, “ 임시정부의 노혁명 선배들을 자기의 부형과 같이 존경했으며 그들도 나를 자기의 자식과 같이 애호했다. 나는 그들과 오래 동안 떨어져 있었으나 임시의회 의원의 책임은 늘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으며 따라서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의원 및 노동위원장 등으로 활동한다. 유림은 1943년 2월 16일 외교연구위원으로 선임되고, 1943년에는 조소앙, 신익희 등과 함께 선전부 선전위원으로 선임되며, 또 임시헌장수개초안 작성위원이 되고,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피선된다. 1945년에는 대한민국건국 강령기초위원 및 헌법기초위원이 되어, 동년 8월 일본의 항복을 예견하여 중국중앙방송국을 통하여 국내동포에게 질서유지, 연합군에 대한 편의제공, 임정환국대비 등을 방송하고 12월 2일 김포비행장에 도착한다.
사실 1930년대까지 임정은 이름만 거창하였지 독립운동 세력의 대표기구로 간주되기에는 인적, 물적, 이념적 차원에서 전혀 부족하였다. 특히, 내부 분열과 갈등으로 거의 해체위기를 맞았으며, 그 후 임정의 조직은 주로 한국독립당 일색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독립의 기회가 가시화되자 독립운동세력들의 대동단결은 더욱 절실해 져서, 임정은 차츰 세력결집의 구심점으로 간주되어, 1942년 5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소속된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각 진영들이 임정이라는 틀 내에서 명실상부한 통일전선을 이룩하는 것은 1944년 4월 제36차 임시의정원회의로서 전문 7장 62조로 이루어진 임시헌장이 통과되고 기구가 확충되어 유림을 비롯 김성숙(金星淑), 김원봉(金元鳳), 성주식(成周寔), 김붕준(金朋濬) 등의 진보적 인물들이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시점이다. 비로소 임정은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그리고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4개 단체가 연대한 민족통일전선으로 확대 개편되어 좌우합작을 실질적으로 성사시킨다. (독립운동에서 임시정부를 둘러 싼 좌우합작운동의 형태를 취하며 시도된 민족연합전선의 역사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42년부터 전개된 임정하의 후기 합작은 연합전선 방식을 구현하여 “각종 혁명단체의 결합 형식”을 취하는 “최고 정치투쟁 기구”이었으나, “정당은 아니었다”(안준섭, 1986: 251-256).)
4개 당파 연합선언문의 주요 내용을 다음과 같다:
“침략을 반대하는 전세계의 정부 및 인민 여러분! 전세계의 피압박 민족 및 반파시스트 인사 여러분!반침략 세계대전은 이미 승리의 단계로 접어 들었으며, 이제 주요 동맹국들은 전후 세계평화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한국 각 혁명집단 및 재중국 자유 한국인들은 모든 반침략 민족의 우의로써 한국이 독립국으로 건설되어야 하고, 한민족이 자유민이 되어야 함을 거듭 선포하는 바입니다.....한국의 완전한 독립은 한민족 전체의 일치된 요구이며, 과거 수십년간 수천만명의 한국인이 투쟁을 통하여 얻은 신성한 대가입니다.....그럼에도 작년 여름 이후 주요 동맹국, 특히 영미의 극소수 지도자들은.....한국을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한국의 국제관리 등 한국을 모욕하는 글을 게재하고 있습니다.....신탁통치의 소식을 전하므로써 한민족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한국의 완전한 독립은 극동 및 태평양지역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입니다.....동맹국지도자들은 민족자결원칙을 한국에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우리는 동맹정부가 국제신탁통치문제를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선포해 주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바입니다”(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53-56).
1944년 4월 24일, 4개 당파가 임시의정원 제36차의회를 지지하는 선언의 주요 내용을 인용해 보자:
“친애하는 동지 동포 여러분.....이번 회의의 개헌과 인선은 위대한 성공이다.....우리 4개 당은 대회의 성공을 경축하는 동시에 우리의 공동의견을 정중히 선포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4개 당은 이번에 수정한 임시헌장을 전민족이 지켜야 할 최고 준칙임을 확인하고, 솔선하여 준수할 것이다. 둘째, 우리 4개 당은 신임 정부주석 김구 선생이 현재 국무위원을 대표하는 민족의 최고지도자임을 확인하며, 솔선하여 성심껏 지지할 것이다. 셋째. 우리 4개 당은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전민족을 동원?단결하여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최후의 결전을 전개할 것이다. 넷째, 우리 4개 당은 중미영소 동맹국 및 전세게의 모든 정의로운 인민들의 동조와 원조를 얻기 위해 그리고 최단시일 내에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국제원조를 얻기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이다”(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57-58).
유림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의 임정참여를 두고 이호룡(2000: 180-94)은 “아나키즘에서의 일탈”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이같은 논란은 이미 스페인혁명에서 아나키스트의 정부참여와 관련하여 제기되었고, (스페인혁명시 파시즘의 공격이 가열되면서 일부 아나키스트들이 정부의 각료가 된다. 1936년 9월 카탈로니아정부에 1명, 동년 12월 마드리드정부에 2명이 입각한다. 당시 FAI(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맹)은 이를 상황이 요구하는 것으로 지지했으나, “뒤르티(Durruti)의 친구들”그룹은 비판한다.)
최근에는 아나키스트 크럼(Crump, 1996: 46-47, 49)이 한국아나키즘을 “아나키즘의 기본원칙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무시하였으며(flouted), 그 일탈의 빈도나 정도(the scale and regularity of the Korean anarchists' departure from anarchist principles)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하여 매우 심각하다"고 비난한다. 특히, 유림에 대해서는 그가 아나키즘을 ”일종의 자유주의적 개념(a liberal concept)"으로 축소시키며, "어떤 형태나 어떤 종류의 정부도 강제적이며 자유의 속박을 초래한다(government in any shape or form is coercive and entails the surrender of freedom)"는 아나키즘의 가장 기본원칙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준엄하게 지적한다. (Crump은 1998년 10월 3일 영국 스코트랜드 스털링대학 그의 연구실에서 있었던 토론에서 필자의 반박 혹은 정당화에 대하여 충분히 한국적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일본의 岩佐作太郞이나 八太舟三이 추구했던 ‘순정(純正)아나키즘(Pure Anarchism)’을 지지한다고 토로하였다. 한국의 경우는 스페인이나 일본의 경우와는 전혀 상이한 상황이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호룡(2000: 180)에 의하면, 한국 아나키즘의 일탈화는 재일본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이 1934년 1월 30일에 결성된 일본 무정부공산당의 민중독재론과 중앙집권적 조직론을 수용하면서부터 확산되기 시작한다. 나아가, 1937년 12월 재중국 조선인 아나키스트조직인 조선혁명자연맹의 민족통일전선의 행동강령도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정권참여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의 투쟁강령에도 군대창설로 연결되는 민주집권제가 채택되어 자유연합주의를 폐기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국가와 정부에 대한 입장 변화를 이호룡(2000: 193-194)은 “우선 민족혁명을 통해 한국 민족을 해방시킨 뒤 진정한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아나키스트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회혁명으로 나아가는” 단계혁명론으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이호룡(2000: 194)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일방적으로 그리고 왜곡되게 도출한다: “그러나 민족혁명을 당면의 목표로 설정하고 그를 위해 민족주의자?공산주의자와 연합하면서 국가와 정부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아나키즘 본령에서의 일탈이었고, 그 일탈은 결국 아나키즘으로 하여금 제3의 사상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연합전선 속에서 사상적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즉, 민족혁명 그 자체에 매몰되어 버림으로서 민족주의자와의 차별성이 별로 부각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항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조직하였던 조선의용대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차지한 역할이 상당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군대나 임시정부 내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그 결과 아나키스트 세력은 민족주의 진영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이후 아나키스트들이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한 사례는 없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 하였다.”
이호룡은 아나키즘과 한국아나키즘운동을 매우 편향적인 관점에서 뒤돌아 보고 있다. 아나키즘의 풍요롭고도 유연한 이론적-실천적 함의를 무시하거나 오도하고 있다. 아나키스트운동을 그 어떤 절대적 원칙에 따라서 완벽하게 순수성을 구현해야 할 탈속세적 이념형으로서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순수파적(?) 결벽성을 선호하는 듯한 이호룡의 비판을 일찍이 상해노동대학의 설립과 관련하여 이정규가 정치와의 타협을 가장 경계하고 반대하던 순정아나키스트 암좌작태랑(岩佐作太郞)을 설득한 현실적이고도 유연한 논리와 대비시켜 보자. 아나키즘에서 어떤 특별한 교조적 이론을 인정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론을 추구하였던 이정규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오치휘, 이석증 등을 노폐니 타락이니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행동이요 조직의 결정사항으로 한 행동이 아니다. 또한 그들 자신들도 아나키즘의 신념에 반역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석증은 중국이 나갈 길은 각 성의 완전자치로 연합되는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소위 연성자치(聯省自治)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의 연성자치, 분치합작(分治合作)이란 아나키즘의 자유연합과 다를 바 없다.
둘째, 그들의 행동이 이념과 배치된다 하더라도 아나키즘이념 자체가 획일적인 것을 반대하므로 행동통일을 기도하는 정도에서 선의로 이해하고 포섭하여 상해노동대학 일을 도모하는 것이 무조건의 배척보다 낫다.
셋째, 아나키즘운동이 침체양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청담류적 개결(介潔)과 이론적 편향 때문이다. 사회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개조해야 한다는 아나키스트지만 현실적으로 사유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금전으로 매매를 하고 있으며 정치와의 타협을 배제하면서도 국공립하교 또는 종교재단의 학교에서 임명을 받고 교직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적극, 철저, 순수라는 것은 정도 문제일 뿐이다“ (이정규, 1974: 131-132).
보다 구체적으로, 이호룡의 해석을 쟁점별로 비판해 보자.
1) 국가와 정부 그리고 군대의 존재 인정: 아나키즘 본령에서의 일탈?
도대체 아나키즘의 본령이란 것이 무엇일까? 본령을 어떤 근본 원리 내지 기본 원칙이라 규정해도 그것은 추상적/일반적 개념을 지칭할 뿐이지 공시적-통시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절대적 교리나 행동강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아가, 이같은 본령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방법은 다양한 형태를 띌 수 있고, 아나키스트들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에는 여러 갈래가 있어 왔고, 또 시대의 변화와 함께 아나키즘도 변화?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아나키스트가 동의하는 어떤 원칙을 도출할 수도 있다. 국가 또는 정부의 부정이나 정치참여(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정부의 직위나 정당이나 의회 등의 권력기구에 침여하는 것)의 거부는 근본 원칙이라기 보다는 반강권주의(혹은 자율?자치?자주), 자유연합, 상호부조라는 아나키즘의 최고목표이자 최대 가치를 달성하는 실천적 방법론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개인적 자유나 사회적 해방의 실현이라는 보다 상위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하위의 원칙일 뿐이다. 여기서 본질적인 문제는 국가와 정부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부정은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모두 “강권적-억압적-착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나키스트들도, 필요하다면 그리고 조건이 성숙되었다면, 얼마든지 정부라는 기존 조직(의 형태)를 비판적으로 활용하면서 아나키스트사회의 실현을 추구할 수 있다. (예컨대, 최소정부(minimal state)의 개념이 여기에 부합된다. 이에 관해서는 Nozick(1974: 26-28, 51-53, 113-119)과 Taylor(1982)를 참고할 것.)
유림은 비록 임시정부가 조직과 활동상으로 문제가 있음을 알았지만 당시의 역사적 조건과 절박한 상황을 고려할 때 민족해방의 과제를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유일한 수단이요, 또 임정을 발전적으로 개혁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참여한 것이지, 임정내부의 권력투쟁에 끼어 들어 헤게모니를 장악하려거나, 요직을 탐내어 참여한 것이 결코 아니다. 나아가, 임정은 명목상 정부이지 피난살이 망명정부로서 국가통치기구로서의 실질적 의미는 거의 보유하지 못한채 오직 상징적 존재로서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내부적으로 권력구조를 둘러 싼 분열과 독점이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강권적 억압-착취기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나키스트가 어떤 대단한 정부기구에 참여하고 거창한 국가를 인정한 것이 결코 아니다. (1872년 9월 2일 헤이그에서 제2차 인터내셔날을 성공적으로 치룬 직후 바쿠닌, 마라테스타 등 서구의 저명한 아나키스트들이 9월 15일부터 산 테이미에 모여 “정치적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소위 혁명적 임시정부의 권력과 같은 조직은 모두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선언한다. 여기에서 거론된 임시정부는 마르크스주의가 주창하는 프로레타리아독재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국가나 정부도 하나의 정치조직이다. 아나키스트들도 수많은 자유연합형 혁명적 정치조직을 설립하여 그 틀을 기반으로 활동하였다. 유림이 참여한 임정도 이름만으로는 정부기구지만, 광의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해석하자면 당시의 4개 주요 독립운동세력이 공통의 단일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자유연합”한 조직일 뿐이다. 다시 말해, 유림의 임정참여는 개인적 결단이나 선택으로서가 아니라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세력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그것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아나키스트 자유연합형 조직은 아니라 할지라도, 공산당조직과 같은 철저한 상명하달의 위계조직보다는 훨씬 민주적인 것이었다.
역사상의 모든 아나키스트는 국가체제나 정부기구의 통제 하에 살았지만, 그를 아나키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이같은 통제에 거부하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유림도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임정을 선택하였지, 임정을 강권적 국가체제의 강화나 중앙집중적으로 정부기구화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유림이 참여한 임정은 민중과 동떨어진 권력투쟁이나 민중에 대한 권력행사 기구로서가 아니라, 민족해방 세력들의 연대기구로서 간주된 것이다. 특히, 4개 세력을 연합하게 만든 명분과 취지는 당시의 상황에서 매우 합당하고도 올바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처럼 촌각을 다투는 국면에서 조선아나키스트는 어떤 선택을 했어야 “가장 아나키스트적”이었을까? 나홀로 외로이 고립분산적 투쟁을 계속했어야 하는가? 또는 유유하게 아나키스트 농민/노동자공동체 운동에만 전념해야 했을까? 아나키스트들은 일보 후퇴를 통한 이보전진의 정신으로 임정에 합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임정을 창조적으로 건설해 나가고자 노력했다.
이호룡(2000: 191)은 민족전선의 행동강령 초안에 있는 “혁명공작에서 보취의 일치와 국호의 통일에 대한 요구”라는 표현을 두고 “국가 존재의 인정”으로 해석하고, 민족전선이 “반일투쟁시기의 전략적 결합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건설시기에서도 협동 노력해야 할 것을 약속“하므로써 ”민족전선을 정권기구로 설정하고 있으며, 정권에의 참여를 전제“한다고 가정한다. 지나치게 자귀(字句)에만 억매인 해석이다. 우선 민족전선은 분명하게 그것을 구성하는 ”각 단체의 해체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언급하므로써 자유연합적 성격을 확보하였다. 소위 말하는 화이부동 (和而不同)을 추구하는 合同聯異의 전략을 적절하게 구사한 것이다. ”국호의 통일“이나 ”장래의 건설”이라는 표현으로부터 정부와 국가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는 의미만을 기계론적으로 도출해 내는 것은 상상력의 결핍을 보여준다. 민족해방후 아나키스트들이 구상한 국가나 정부란 것이 바로 독립노농당이 당략과 당책에 명시한 아나키스트형 체제를 의미하는 것인데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분명히, 아나키스트들도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되찾으려는 나라는 “민중을 마음대로 착취, 압박하였던” 과거의 조선이라는 봉건국가도 아니고, “대다수 농민과 노동자를 착취하고.....어린애를 임금의 철쇄로 결박하여 그 육혼을 소수자에게 헌상하는” 미국식 제국주의도 아니고, “공산러시아와 같은 암담한 국가”도 아니다(사상휘보 5호). 아나키스트들이 원한 세상은 “각인이 자유의사로서 선택된 사회를 만들고, 또한 자유로 일하고 얻는 사회로서.....민족적 민주주의와 만인평등의 경제제도”가 보장되는(사상휘보 5호: 1935. 12) 그야말로 새롭게 천지개벽(天地開闢)된 국가 즉 아나키스트사회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한 국가 개념은 통상적 의미에서 아나키스트들이 부정하는 국가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세상의 어느 기성 국가 혹은 자본주의국가에서 경제기구의 독점권을 폐제하여 만인평등의 경제제도를 건설하며, 농민에 의한 토지공동경제도와 의무노동제를 건립하고, 공업의 도시집중을 방지하고, 생산본위의 교육제도를 실시하고자 하겠는가?
끝으로, 조선민족전선의 일환으로 조직된 한중합동유격대와 전지공작대를 두고 이호룡은 원칙적으로 군대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들이 자위수준을 넘어 전투부대를 창설하여 자신의 이념을 위반하였다고 지적한다. (군대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크로포트킨이 연합군의 대독전쟁을 바른 것으로 인정하고 동료 아나키스트들의 반전운동을 비판하였다. 이미 1928년 6월 복건성의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던 이정규를 비롯한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은 토비와 공산주의세력에 대처하기 위하여 중국 국민당의 요청에 의하여 황포군관학교의 직제에 준하는 황천이속민단훈련처라는 무장자위조직을 만들었다. 특히, “전지공작대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적극 참여한 단체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고 하여 이 단체를 무정부주의 단체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실제 주도세력 일부를 제외하고 무정부주의 세력이 없으며, 대원들 역시 무정부주의적 색채를 띄는 인물이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고 주장하는 것(박환, 1997: 125-126)은 매우 신중한 해석이다. 전지공작대의 구성 자체가 김구계열의 민족주의세력(김구의 장남인 김인, 조소앙의 차남인 조시제, 김구가 파견한 이해평 등)과 연합하여 이룩된 것이므로 이호룡의 비판 자체가 초점을 제대로 맞추기 어렵다. 전지공작대의 성격과 활동에 관해서는 박환(1997)을 참고할 것.)
드러난 현상에만 연연하는 단순한 해석이다. 자위부대는 전투를 하지 않는가? 혁명세력으로서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한 군대를 국가폭력의 수호자요 전위대 역할을 담당하는 통상적 의미의 일반 군대와 비교할 수 있는가? 소련혁명 직후, 백군이나 볼세비키와 싸운 아나키스트 마흐노(Nestor Makhno)의 군사조직에 대해서 결코 아나키즘의 일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아나키스트부대를 두고도 아나키즘의 배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일본제국주의자에게는 신채호, 이을규, 정화암도 폭력적 테러리스트에 불과하지만, 조선민중들에게는 훌륭한 애국열사이듯, 아나키스트가 조직한 군대도 혁명세력이요, 혁명조직일 뿐이다. 폭력을 위한 폭력(즉, 일본군대)과 창조적 파괴를 위한 폭력(아나키스트 혁명수단으로서 군대)은 외관상으로는 둘다 폭력이지만 질적으로 완전히 상이한 것이다. 5·18에서 해방광주의 시민군을 폭도라고 규정한 군부세력이야말로 진짜 폭력집단이 아니었던가? (5·18과 국가폭력의 관계에 대해서 자유해방주의적(libertarian), 혹은 아나키스트적 해석을 시도하는 김성국(1998b)을 참고할 것.) 신채호도 분명히 조선혁명선언에서 암살파괴와 더불어 독립군의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였다(김영범, 1997: 136 n220).
2) 중앙집권적 조직론과 민중독재론의 수용: 아나키스트 조직원칙의 부정?
이호룡(2000: 180, 238)에 의하면, 아나키즘은 자유연합을 표방하므로써 “민중들의 힘을 조직화하는 것을 등한시”하므로서 점차 “소멸의 길”을 걷지만, 재일본 조선아나키스트들이 1934년 11월 3일 일본무정부공산당(1934년 1월 30일 종래의 “일본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이라는 당명을 개칭)에 가입하고 “중앙집권적 조직론과 민중독재론”에 찬성한 것을 “아나키즘에서의 일탈”이라고 규정한다. 이 점에 대하여 이미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1978: 416-421)에서 소송융이(小松隆二)의 다음과 같은 분명하고도 균형잡힌 설명을 제시하였는데도 어찌하여 왜곡?과장된 평가가 나왔는지 의아하다:
“해방문화운동에 자극을 받으면서 1933년 12월 초 일본무정부 공산당의 전신 일본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때는 국가독점자본주의자의 중압에 대한 초조감없이는 운동을 추진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만큼 그 전도는 결코 순탄하리라고 예상할 수는 없었다. 당초의 연맹은 종래의 아나키즘진영에 있어서의 조직 경시를 반성하는 데서, 한편으로 평시에는 아나키즘운동의 중핵이 될 것, 그렇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은 물론 사상문화운동에도 발판을 만들어 대중과의 연결을 강화할 것 등을 목표로 했다. 또한 다른 편으로는 혁명시에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과도기의 프로레타리아독재의 역할을 부담해야 핳 비밀결사로 된 혁명단체와 같은 것을 지향할 것을 목표로 했다.....1934년 1월 30일 연맹은 일본무정부공산당이라 개칭되었다.....34년 8월20일 궁극의 무정부공산사회의 도식을 그린 강령(1. 권력정치 및 자본제 폐지; 2. 완전한 지방자치제의 확립; 3. 사유제의 페지; 4. 생산수단 및 토지의 공유; 5. 임금제도의 철폐; 6. 노동자 농민에 의한 자주관리; 7. 교육과 문화의 향유; 8. 인위적 국경의 철폐)와 당면과제로서의 잠정테제도 결정되었다. 무정부공산당의 주장을 살펴 보면.....아나키즘의 전통에 따른 것도 있으나, 아나키즘이 부정하여 온 방향도 보인다. (이에 대해 편찬위원회는 견해를 달리한다.)
그러면 무정부공산당은 아나키즘의 원리를 포기하고 순전히 마르크스주의에 동화하고 만 것이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그 근저에는 역시 아나키즘의 전통이 뿌리깊이 깔려 있다. 예컨대, 비밀결사의 형식으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연맹 그리고 그 후신인 당은 종래의 아나키즘운동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도 있고해서, 종(縱)으로 결합된 중앙집권조직을 취하면서도, 내부에는 자유로운 발언을 허용하고 있다. 더욱이 중집(中執)에서의 결정은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하고 그 결정을 타단체에는 강요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율원칙도 세우고 있었다. 이와같이 한편으로는 중앙집권제를 채택하면서 다른 편으로 그것과 양립할 수 없는 자유발의 만장일치원칙 또는 자율원칙과 같은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 일견 내부모순을 내포하는 점에서 이 당의 취약성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이 당으로 하여금 아나키즘의 자유연합?자유발의의 원칙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되지 않게 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그러한 구체적 운용과 기능면에서 뿐 아니라 당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인 혁명론·국가론에 관하여 혁명의 과도기에 있어서 헤게모니의 장악을 겨냥한 근본주의와 같은 원칙에 관한 인식에 있어서도 이 당은 아나키즘의 전통과 전혀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무정부공산당은 여태까지의 아나키스트단체와는 달리 혁명이 일어나 성공한 경우 그것을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었다. 그것을 가리켜 그들은 헤게모니의 장악이라 하고 근본주의라 했다. 그 때 주의할 것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국가·독재권력의 용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이 의도한 것은 프롤레타리아국가의 수립을 못하도록 방어하고 혁명적 코뮨을 수호하는데 있었다. 말하자면 과도기로서의 프롤레타리아국가라는 독재권력을 수립하려는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서 바로 아나키스트가 헤게모니를 장악할 필요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런 한에서는 무정부공산당의 기본자세는 종래의 아나키즘과 원칙적으로 상이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이상의 인용문을 통하여 이호룡의 비판이 형식논리에 머무르고 있음이 충분히 제시되었을 것이다. 특히, 무정부공산당은 정당운동을 외면하던 아나키즘의 전통을 깨뜨릴 수밖에 없는 실천적 요구와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한국아나키스트들에게도 시사점을 남겼을 것이다.
물론, 아나키즘의 자유연합원리에 입각한 투쟁조직은 민주주의적 체험과 자유로운 의사소통 훈련이 극히 부족하였던 당시의 현실에서는 적지 않은 부작용을 초래하였겠지만, 적어도 목표와 수단을 동일시한다는 관점을 취한다면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초기 의열단의 아나키스트적 조직형태에 대해서 “무조직, 무규율, 무중심, 자발성을 절대 숭앙하는 무정부주의적 기풍”을 청산하라는 상해청년동맹의 요구(김영범, 1997: 136)도 오직 반면의 진실만을 가질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목적이 정당하다면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정당하다고 하면서 테러를 정당화하는 아나키즘의 논리”라는 이호룡(2000: 20)의 지적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왜 공산당 조직이 혁명후에 전제주의적 독재조직으로 강화되는지를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나키스트들도 1934년 1월 25일자 [흑색신문] 제24호에서 아나키즘은 아직 조직이론을 확립하지 못해 계획적 조직활동에는 익숙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이로 인해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함이 활발하지 못함을 큰 결함이라고 자가반성한다.( 玉川信明(1991: 87)도 “아나키스트가 반성해야 할 것으로, 특히 케케묵은 낭만적 아나키스트는 더욱 마르크스주의자의 능란한 전략전술에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어떤 조직활동에서도 자유연합이라는 기본 원칙을 적용하고자 노력하였다. 절차적 민주주의 없이 어찌 제대로 된 민주주의에 도달하겠는가?
3) 제3의 사상으로서 독자성 상실: 민족주의에 흡수
처음부터 이호룡(2000: 6, n19)은 무슨 까닭인지 ‘제3의 사상’이라는 사회과학적으로 고유한 의미를 갖는 용어를 자의적으로 “한국의 근대사상에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상도 있다”는 의미에서 한정적으로만 사용한다. 이와 같은 용어법에는 아나키즘의 이념적 의의와 역사적 역할을 원천적으로 축소하거나 과소평가하려는 의도가 혹시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것은 아닌지? 한국의 아나키즘은 결코 사상적으로 잔여범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좌우익을 넘어서는 제3의 길로서 혹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시에 비판한 제3의 사상으로 추구되었다(신용하, 1984: 291; 김성국, 1996: 223-224, 1998a: 90-102). (“노자철학만이 참된 아나키즘”이고, “노자철학의 총체성은 항상 아나키즘의 본질로 환원된다”고 주장하는 김용옥(2000: 72-73)도 아나키즘을 제3의 사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무정부주의를 마치 무질서를 지향하는 혼란주의와 동의어인 것처럼 곡해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모든 진보주의(=사회주의, 공산주의)나 보수주의(+우파 반동주의, 국가주의)가 한결같이 국가라는 제도에 대한 불가치의(不可置疑)적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맑시즘 특히 레닌이즘은 아나키즘을 증오하였고, 모든 스테이티즘(statism) 그리고 우파 반동철학도 아나키즘을 혐오하였다. 아나키즘은 현실 불가능한 로맨티시즘의 타락 내지 리버랄리즘의(liberalism)의 환상으로 치지도외(置之度外)하였다. 왜냐? 아나키즘은 권력에 대한 근원적 부정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지향하는 모두에게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허나 인류의 예지는 좌?우가 동시에 증오하는데 숨어 있었다. 21세기는 바로 이 좌·우가 모두 혐오하던 의식형태로부터 출발치 않을 수 없다.”)
아나키즘의 역사 자체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그리고 동시에 지양하려는 것이다. 역사가 아무리 승리자(예컨대, 남한의 보수적 민족주의와 북한의 사대적 공산주의)의 역사로 기록되는 경향을 가진다지만, 그 승리자들의 추악한 정체가 이미 백일하에 드러난 지금에도 여전히 구태의연한 현실주의자(realist)의 시각으로 역사를 되돌아보기만 한다면, 그것은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미래를 바라보지 않으려는 태도와 다를바 없다. 매우 혼란스럽게도, 이호룡(2000: 7)은, 한편으로는, 역사적 진실을 외면할 수 없기에 “아나키스트들은 민족해방운동상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면서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하여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방법이나 전망에서도 민족주의자·공산주의자와는 다른 입장을 제시하는 등 제3의 사상으로서 그 나름대로 역할을 하였다“고 인정하면서도, 결론에서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역전해 버리는 것이다.
과연, 아나키스트들은 이호룡의 주장대로 제3의 사상으로서 독자성을 상실하여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와 구별되는 상이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민족주의 진영으로 흡수되고 말았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먼저, 한가지 근본적인 반문부터 제기해 보자. 일제하 모든 독립운동세력들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였지만 그 방법과 독립국가/해방사회의 성격에 관해서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는 언제나 유별난 목소리만을 독야청청 더 높게 질러대야만 하는가? 아나키스트가 궁극적 목표를 위해 이념적으로 다른 세력과 한시적으로 정치적 연합을 시도해서는 안될 어떤 내재적 불문율이나 지상명령이라도 존재하는가? 아나키스트는 영원히 어둠 속에서 외투 깃을 세우고 폭탄이나 피스톨을 들고 혈혈단신으로만 투쟁해야 하는가? 아나키스트도 얼마든지 연대하고, 타협할 수 있다. 제3의 사상은 제1의 사상이든 제2든 혹은 제4든 언제든지 필요다하면 수용하고 연대할 수 있다.
이호룡이 과연 어떤 자료를 토대로 아나키스트가 민족주의 진영에 “흡수”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흡수”라는 매우 부정적-비하적 표현은 아나키스트세력이 독자적인 정체성과 주체성을 상실하고 전혀 새로운 이질적 형태로 변모했을 경우에나 사용해야 할 것이다. 협상의 초기, 임시정부와 조선민족전선연맹과의 통일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임시정부측 대표(조완구, 엄항섭)는 임시정부의 영도 밑에 각 단체들이 통일해야 된다는 것이나, 조선민족전선연맹측 대표(석정, 유자명)는 각 단체가 연맹의 형식으로 통일하자는 것이어서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유자명, 1999: 234-235). 마침내, 각 세력의 독립성과 자주성이 보장되는 배경하에서 유림과 유자명은 임정에 참여한다. 그래서 4개 당파의 연합선언과 1944년 4월 24일의 한국 각 혁명당의 제36차 의회 지지선언이 4개 세력의 명의(한국독립당, 한국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로 발표된다.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의열단의 후신이었던 (4개 당파의 일원인) 민족혁명당을 과연 민족주의 진영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김영범(1997: 423)에 의하면, “중·후기 의열단운동의 이념적 위상은 민족주의라고 단언하기에는 부연설명이 필요하고, 사회주의로 간단히 치부해버리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이성동체화(異性同體化)의 지점에 놓인 것이었다. 그것은 민족주의 편에서 보면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사회주의 편에서 보면 민족적 사회주의로 규정될 수 있을 성질의 것이었다. 이때의 사회주의는 민족독립 후 신국가 건설과정에서의 경제체제의 조직원리를 주로 의미하였지, 계급혁명이라는 사회정치적 과정이나 계급투쟁이라는 변혁방법론의 내포를 띠지는 않았다.”)
조선혁명자연맹과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반자(反資)와 동시에 반공(反共)의 입장을 수미일관하게 유지하였으며, 그 전통은 해방후에도 유림에 의하여 굳건하게 지속된다. 만약 민족주의 진영에 흡수되었다면 어찌하여 단주는 해방후 아나키즘에 충실한 독립노농당을 독자적으로 창설하고, 김구의 민족주의 진영과 결별하게 되는가? 이호룡의 판단은 사실과 어긋난다.
그 까닭은 이호룡이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의 관계를 상호대립적 관계로 설정하여, 일제하 아나키즘의 발전을 민족주의와 결별-재결합하는 도식적 과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제하 아나키스트에게 있어서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의 관계는 하기락(1980: 21)의 지적처럼 “이것으로 저것을 내실화하는 보완관계”로서 “민족주의의 성숙단계로서 아나키즘”(김성국, 1996b: 219)이라는 발전론적 과정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제하 모든 아나키스트는 민족주의자 였지만, 민족주의자 중에서 일부만이 아나키스트였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자. (아나키즘과 민족주의가 결합하여 나타낼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이념과 사회에 관해서는 김성국(1996: 218)을 참고할 것.)
요컨대, 이호룡은 아나키즘에 대한 편향된 인식의 틀 위에서 유림을 비롯한 아나키스트의 임정참여과정을 아나키즘에서의 일탈이라고 잘못 평가한다. 특히, 단계혁명론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이같은 일탈을 설명하려는 그의 시도는 단계를 너무 단절적으로 강조하고 차별화한 나머지 단계의 연속성에 내재된 일관된 함의를 놓치고 만다. 아나키스트는 마르크시스트와는 달리 혁명의 과정에 프로레타리아독재를 삽입하여 민족혁명-정치혁명-사회혁명의 점증하는 단계혁명을 추구하지 않는다. 아나키스트혁명은 언제나 동시적으로 추구된다. 조선아나키스트들은 서구나 중국과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체험하지 못한 식민지라는 절대절명의 특수상황에서 그리고 좌우익의 협공 속에서 직접행동의 가장 극적이면서도 위험한 형태인 일종의 연합전선과 정치참여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을 “일탈”로 치부하기보다는 “상황변화에 따른 적극적 대응이요, 성숙한 판단”으로 간주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Ⅳ. 독립노농당의 정치투쟁: 유림과 한국아나키즘의 형성
해방 이후에도 아나키스트들은 임정세력과는 공동전선을 모색하였으나 공산주의세력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1945년 9월 하순 창립대회에서 “우리는 자주독립 완전해방을 위하여 그 실현의 날까지 우리의 우군인 혁명적 좌익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공동전선을 펴자”고 주장하여 임시정부봉재운동(臨時政府奉在運動)을 전개하였으나, 공산세력에 대해서는 “노국의 주구배(露國의 走狗輩)”라고 규정하였다. 1945년 12월 20일과 21일에 개최된 전국대표대회에서도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절대 지지의 입장을 표명하였으나,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소련을 조국이라고 인식하는 사대사상을 버릴 것”과 “목적을 위해 수단을 불고(不考)하는 것을 버리고 무산자 독재정권을 수립하려는 의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며 반대입장을 밝혔다. (유림도 동아일보(1945년 12월 12일)와의 인터뷰에서 “볼세비즘과 아나키즘은 정치, 사상으로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은 만인이 다 인정하는 바일 것이나, 나는 볼세비즘과 정부가 반드시 합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정치행동으로 제3자의 입장에서 합작의 접착제 역할을 하려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유림은 이때만 해도 비록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민족통일의 대업을 위해서는 상호연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점차 소련의 조선공산당 지배와 북한의 괴뢰정권화 과정을 지켜 보면서 공산세력과의 연대가 불가능할 뿐아니라 무의미함을 확신하게 된다.)
이처럼 해방정국이 급속하게 좌우익으로 분열·대립되던 상황에서 유림은 1945년 12월 1일 귀국한다. 유림은 국내신문들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아나키스트로서 자신의 입장과 향후 계획을 천명하는데, 특히, 1945년 12월 5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인터뷰기사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널리 회자되고 있는 그 전문을 인용해 보겠다:
문: 선생은 무정부주의자라는데?
답: 무정부라는 말은 아나키즘이란 그리이스말을 일본사람들이 악의로 번역하여 정부를 부인한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것 같은데, 본래 <an>은 없다는 뜻이고 <archi>는 우두머리, 강제권, 견제 따위를 의미하는 말로서 <anarchi>는 이런 것들을 배격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강제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이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는 타율정부(他律政府, heteronomous government)를 배격하지 자율정부(自律政府, autonomous government)를 배격하는 자가 아니다. 물론 과거의 아나키스트들은 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사상면에서 큰 공헌을 하면서도, 현실면에서는 패배를 거듭해 왔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현실적 조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나 역시 아름다운 꿈을 안고 임시정부라는 조직에 참가한 것이다. 이 정부는 3·1운동에서 탄생한 전 민족의 자율적 기관인 것이다.
문: 임시정부에 가입하게 된 동기는?
답: 내가 정치운동에 참가한 것은 불과 5년밖에 안된다. 나의 이상은 강제권력을 배격하고 전민족, 나아가서는 전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하에 다 같이 노동하고 다 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당시 나는 일본제국주의는 반드시 패망하고, 조선은 해방되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자주 독립이 언제 달성될 것인지 단정할 수 없었다. 허다한 난관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이 이 한고비의 난관만 돌파하면 반드시 독립하리라는 것이 환하게 내다 보였다. 이 독립을 달성하고 이 나라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려면, 우선 민족을 대표할 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근거를 나는 망명한 임시정부라고 보고 거기에 합류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독립이란 산을 넘은 후에, 각자의 주의를 위하여 매진하는 것이다. 임시정부란 요컨대 그러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요, 근거라는 말이다.
문: 지금 조선에는 정당이 난립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답: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몽고인 보다도 정치적 기회를 얻기 힘들었던 조선사람이 이 기회에 그만한 정치적 의욕도 없다면 장차 어찌 민주주의를 수립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치질서는 결국 3, 4정당으로 정리되리라고 본다.
문: 임시정부는 연립정부인데 차후의 운동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답: 나의 원리만을 어디까지라도 관철할 결심이다.
이상의 인터뷰 내용은 동아일보(1945년 12월 12일)의 표현처럼 “적지 않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일반적 상식으로 아나키즘은 국가와 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논리적 연장선에서 정치 및 정당활동 또한 부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제1인터내셔날 이래 아나키스트들이 정치활동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기락(1993: 272-3)의 적절한 설명처럼, 아나키스트가 과거의 관념과 태도에 교조적으로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관념의 노예에 불과하고, 아나키스트적인 태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며, 외국군대가 조선에서 군정을 실시하고 있는 현실에서 ”무정부타령이나 하고 앉았다면, 그것은 민족의 요망을 무시하거나 배반하는 관념의 유희자“에 불과하지 진정한 아나키스트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아나키스트에게 중요한 점은 현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이냐 이다. 유림은 조선민족을 대표할 합법적 대표기관을 조선사람들 자신에 의해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활동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여 이 구심점을 임시정부에서 구했던 것이다.
다시 한번, 하기락(1980: 361)의 논리를 통해 당시의 한국아나키스트들이 취한 국가/정부/정치관을 정리해 보자: “아나키스트가 거부하는 것은 강권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정부다. 종래의 모든 정부는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모든 정부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라고 옮겨서 조금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민중 자신의 자치적 질서를 방위하기 위한 민중 자신의 권력기관을 반드시 배제하지 않는다. 아나키스트는 무정부라는 문자나 개념에 사로잡힌 관념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도, 만약 현실적으로 최대의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연방주의적 최소국가가 존재하여 아나키스트사회의 실현을 추구한다면, 그것을 아나키스트(형) 국가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싶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아나키즘의 독특하고도 참신한 그래서 선구자적인 실험과정과 대면하게 된다. (유림의 인터뷰에서 임시정부와 관련된 마지막 대답(“나의 원리만을 어디까지라도 관철할 결심이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림은 아나키스트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임정과 연대하고, 정당/정치활동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원칙을 고수하고자 하였다.)
해방후,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단순한 정치참여가 아니라, 독립노농당이라는 자신의 독자적 정당을 만들고, 선거에 참여하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직접행동을 감행한 것이다. 서구 아나키즘운동사에서는 유례가 없는 대사건이다. 서구 아나키스트들이 파괴에 치중하여 건설에 소홀하였다면(보다 정확히 말해, 건설할 기회를 별로 갖지 못하였다면),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하에서는 파괴(테러리즘)와 건설(농촌공동체 실험)을 동시에 추구하다가, 해방후에는 건설(정치참여와 농촌운동)에 치중하였던 것이다.
모든 아나키스트에게 어떤 절대적 권위가 불멸의 우상(偶像)으로서 존재할 수 없듯이 서구 아나키즘이 결코 한국 아나키스트의 이상적 모델은 아니다. 이점에 있어서, 노자의 아나키즘적 정치관은 보다 심원한 지혜를 담고 있다. 예컨대, 소국과민(小國寡民)을 단순히 어떤 정적(靜的)이고도 완성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적게 만들어 나가는 하나의 동태적-실천적 과정으로서 파악한다면(김용옥, 2000: 72-73), 아나키즘은 최소국가정치론(혹은 작은 정부론의 극대화)과도 선택적 친화력을 갖는다. 아나키즘이 정치적으로 주장하는 연방주의적(fedralist)이고, 지역공동체적(communitarian)인 자유연합의 네트워크조직은 현실적으로는 탈중앙집권화와 지역자치화의 기반 위에서 성립하는 직접민주주의에서 그 최적의 근사치를 발견할 수 있다. 아나키스트가 탐색하는 정치의 성격은 “반정치의 정치(politics of the antipolitical 또는 anti-political politics)"로서 (이 용어를 사용한 아나키스트 Read(1959)와 한때는 열렬한 시민사회론자였던 Habel(1988)을 참고할 것.) 모든 권력지향의 제도를 최소화하려는 정치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의 정치“가 바로 아나키스트정치의 이상향이 아니겠는가? (이에 관해서는 조광수(1998: 7-31)를 참고할 것.) 동양적 아나키즘의 뿌리를 공유하며, 지성인/인텔리겐쨔로서 선비의 정치참여 전통을 간직하는 한국아나키즘이 이처럼 아나키스트정치론에 있어서 서구와는 상이한 주체적 변신을 단행한 것을 필자는 ”세계아나키즘운동사에서 새로운 실천적 지평의 개척이“라고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신채호(1982: 25-26) 선생이 그토록 갈구하였던 ”주의(主義)의 조선(朝鮮)“이 아니라 ”조선(朝鮮)의 주의(主義)“를 마침내 한국아나키스트들이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르듯이“ 조선의 아나키즘은 당연히 서구의 아나키즘과 다를 수 있고 또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나아가, 정치의 개념은 오늘날 엄청나게 변하고 있다. 이제는 “사적인 것도 정치적이다(personal is also political)". 생활양식 자체도 정치투쟁의 현장이 된다. 그러므로 현대 아나키즘은 고전적인 집합적 정치행동을 시도하는 사회적 아나키즘(social anarchism) 뿐아니라 개인주의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생활양식 아나키즘(life-style anarchism)이 추구하는 미시정치의 의미도 결코 과소평가 하지 않는다.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김성국(1999)을 참고할 것.)
이와 같은 현대아나키즘의 발전과정을 고려해 볼 때, 이미 1940년대부터 아나키스트정치를 개척한 한국아나키즘운동은 ‘매우 선구적’이라는 평가를 받을만 하다. 정치는 현실이고 투쟁이며 행동이다. 직접행동을 선호하는 아나키스트가 현실을 외면하고 투쟁을 거부하면서 관념적 게임에 몰두할 수는 없다. 또, 아나키스트정치를 편애하게 정의하여 오직 소규모의 게릴라적 활동이나 비밀결사적 음모집단에 국한시키거나 아니면 자연발생적-무정형적 대중조직에만 결부시키고자 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 아나키즘에 안주하고 말 것이다.
만약, 스페인혁명이 아나키스트의 주도로 성공하게 되었다고 가정하고, 그 사후과정을 한번 상상해 보자. 정부라는 기구가 당장 없어질 것인가? 아니면, 모든 자치적 지역공동체를 연합시키고, 조정하고, 지원하는 너슨한 협의체로서 정부가 존재할 것인가? 지역공동체에서는 정부가 완전히 사라질 것인가? 아마도, 협의기구 내지 지원조정기구로서 최소한의 필수 업무를 담당하는 정부가 존재할 것이다. 만약 정부의 종사자들이 권력엘리뜨나 통치관료로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공복(公僕) 혹은 큰 머슴의 자세로 일할 경우에도 우리는 그러한 정부를 외면하고 부정해야 할까? (예컨대, 만약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선거로 뽑은 선량’이라는 환상을 내세우면서, 입법자, 국민의 대표자, 국정의 감시자라는 어마어마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매우 어려운 자격시험을 치룬 꽤 인기있는 전문직종이지만, 일정기간(예컨대 8-10년)밖에는 취업하지 못하며, 각종의 특권은 전혀 누리지 못하고, 반드시 지역주민의 동의하에서만 위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철저히 외부의 감독과 평가를 받는 다소 고액의 월급쟁이라면, 그들이 모인 국회라는 기구를 권력기관이라고 규정하기 힘들 것이다.)
아나키스트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현존하는 강권적 기구인 국가나 정부를 창조적으로 파괴해 나가야 한다. 국가나 정부 속에 들어가서 반역의 씨앗이 되어 그 억압과 착취의 틀을 깨고 그것을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시켜야 한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한국에서도 그야말로 수많은 애국지사, 우국열사, 혁명동지, 민주화투사들이 정치판에 뛰어들었으나 권력의 달콤한 늪에 빠져 익사하든지, 취생몽사(醉生夢死) 헤매든지, 아니면 권력의 주구가 되든지 할 뿐이다. 사태가 이러하다고 아나키스트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정치를 외면해야 할 것인가?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싫어 은둔과 회피 혹은 잠적의 정치(politics of retreat)를 구사할 것인가? 전략적으로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제도권정치가 아닌 재야정치 혹은 운동정치에만 만족해야 할 것인가? 실로 어려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는 자신의 주체적 판단에 따라 어느 것이든 선택할 수 있다. 정치참여는 진위(眞僞)의 문제라기보다는 선호(選好)에 따른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항상 근본적이고 급진적이며 총체적인 혁신을 추구하는 아나키스트라면 결코 현실정치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신중하게 숙고하여, 철저히 준비한 다음, 기회가 오면 과감하게 도전할 필요가 있다. 국가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국가와 국가정치는 항상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장악하는 무적의 존재였다. 국가불패의 신화는 국가의 엄청난 실수와 과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정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인 동시에 모든 혁신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모순적인 투쟁영역이다. 아나키스트는 소극적인 부정과 저항만 일삼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도전해야 한다는 행동윤리를 갖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한국의 아나키스트가 정치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느냐의 여부이지, 정치적 도전 자체가 옳은 것이냐 틀린 것이냐가 아니다. 필자는 유림이 해방공간에서 내린 선택과 결정은 매우 적실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독립노농당은 결성과정에서부터 아나키스트정당으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 주었다. 1946년 2월 21일과 22일 부산 금강사에서 개최된 경남북아나키스트대회에서 유림은 조선무정부주의자 총연맹 서기부 총무위원의 자격으로 축사를 통해 과도정권의 수립과 함께 다음의 4가지 원칙을 요구한다. 아나키스트사회의 기본원리인 민족적 자주성/개인의 주체성, 지방자치주의, 생산자 자주관리가 명시되고 있다:
1. 정부수립은 일체의 외세의존을 배제하고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방법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1. 정부는 통일된 민족의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
1. 정부수립은 지방자치의 확립과 불가분하게 병행되어야 한다.
1. 모든 생산수단은 생산에 종사하는 근로인민에 의하여 관리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나아가, 아나키스트들은 당시의 과도정부수립추진기구인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모두 비자율적, 비통일적,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면서, 각 시읍면은 자발적으로 그 자치제를 구성하고, 그들의 대표자로 하여금 직접 국민대표자회의를 구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민중직접혁명론의 논리에 의거하여 민중주체의 풀뿌리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아나키스트 원칙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1946년 4월 20일에서 23일까지 경상남도 안의에서 전국아나키스트대회가 개최되어 (1945년 9월 27일에 이미 결성된)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회원들과 유림을 비롯한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의 회원들이 모두 참여한다. (대다수의 참석자는 양 연맹에 이중으로 가입하고 있었다. 유림은 이 대회에서 이을규, 신재모와 함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회 기간 중, 국제정세보고를 통해 “미소 양대국간의 양극적 대립이 발전할 소지”를 지적하고, 국내정세보고에서는 조선의 정부수립을 위한 노력이 “전혀 비자주적인 비민주적 비통일적인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리고, 토의과정에서 정당을 조직하자는 문제가 정식으로 제기된다. 그리하여, “비록 무원칙한 난맥상이기는 하나 다수의 정당이 앞을 다투어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기에 우리 민족의 관심이 정치문제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인식하면서, “실정에 맞지 않는 미군정의 시책으로 인하여 사회 각방면의 혼란상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므로 대회는 다음과 같은 최종결정을 내리고 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한다:
“우리는 노동자 농민의 조직된 힘을 정치에 반영할 수 있는 정당의 필요를 인정한다. 정당에 참여하는 일은 연맹원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긴다. 정당에 참여하지 않는 동지들은 사상운동으로써 정치활동에 협력한다. 앞으로 조직될 정당은 본대회가 선정한 기본원칙에 따라야 한다.“ (하기락, 1993: 289-301).
이상의 결의를 토대로 독립노농당은 1946년 7월 7일 서울시 필동 역경원에서 결성대회를 가져 유림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한다. 결당선언에서는 “국가의 존재가 인민의 복리를 전제로 하고, 인민의 복리는 인민자신이라야 최선으로 옹호함이 불문의 철칙이어늘 건국사업이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됨은 민중이 직접으로 건국공작을 부담 아니한 데서 원인이 발견된다.....노농근로대중은 이 국토의 진정한 주인이요, 신국가를 건설할 유일한 자격자다.....양두를 걸고 구육을 파는 「인민의 수호자?」와 주관에 도취되어 현실을 몰각하는 「과학적 이론가?」는 이미 그 정체가 백일하에 폭로되어 그 우상적 신망을 더 유지할 수 없고, 점차 각성하는 우리 노농 근로대중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조국사업(造國事業)을 타인에게 위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처리함이 가장 강력하고 정당함을 알게 되었다”고 당시의 사대주의적 좌우익을 비판하면서 민중주체의 민중직접정치를 표방하였다(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90).
이와 더불어 아래에 제시되는 17개의 당략(黨略)을 보면 아나키스트의 자주. 자치, 자율의 원리가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91):
1. 국민의 평등과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는 민주입헌정치를 실시한다.
2. 정치.경제.문화.군사.외교의 완전한 자주권을 확립한다.
3. 지방자치제와 직업자치제를 시행한다.
4, 중소 자산층을 주체로 한 부민주의 계획경제 체제를 시행한다.
5. 국내자본의 과도집중과 외래자본의 침략적 점탈을 방지한다.
6. 산업을 조직화하여 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국민생활의 평등한 향상을 도한다.
7. 농공을 병진하고 상호조화를 기한다.
8. 독점성 사업과 대규모 기업은 국영 혹은 공영으로 하고, 중소기업의 자유발달을 장려한다.
9. 토지는 경작자만이 소유권을 향유한다.
10. 신화폐제를 실시한다.
11. 국민의 개식(皆食), 개학(皆學), 개로(皆老), 개병제(皆兵制)를 실시한다.
12. 국가는 모든 시책에서 농민, 노동자, 일반근로대중의 자유 행복 발전을 옹호조장한다.
13. 봉건유풍과 권력주의 여습을 청소하고 과학적 평민문화를 건설한다.
14. 평등호혜의 외교를 저내하여 세계평화에 치력한다.
15. 지하자원을 적극 개발한다.
16. 국토미화정책을 적극 시행한다.
당책(黨策)은 정치, 경제, 국방, 외교, 산업, 노동, 농업, 임업, 수산, 광업, 문화, 사회, 국코게획 등 13개 부문 133조항으로 규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1991: 91-98)을 참조할 것. 이 가운데서 흥미로운 내용을 몇가지 소개하면, 국회는 지역대표제와 직업대표제를 병행하고, 20세 이상의 남녀 모두에게 병역의무를 부과하고, 지방자치단체와 직업자치단체에 자위군(自慰軍)을 설치하고, 정부독선의 비밀외교를 절대금지하고, 노동대중의 국민외교를 적극전개하고, 사치품의 생산을 제한하고, 최고노동시간과 최저임금제를 실시하고, 생활필수품에 대한 근육노동의 우선권을 확보하고, 공사창(公私娼) 예기(藝妓)를 폐지하고, 여관업을 국영으로 확충하는 등의 정책이 제시되어 있다.
이후 독립노농당은 대도시를 비롯한 지방조직에 착수하여 다수의 농민과 노동자를 당원으로 영입하고, 기관지로서 노농신문을 2주 계간으로 발행한다. 이후의 주요활동을 순서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영남폭동사건의 조사·보고(1946년 10월 25일)
2. 미군정의 자문기관 입법의원 신설 반대(1946년 12월 12일)
3. 노농청년연맹 결성(1947년 3월 30일)
4. 제1차 전당대표자대회(1947년 5월 5-7일)
5.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비판 담화문(1947년 7월 17일)
6. 조선문제의 UN상정(신탁통치없는 독립)에 대한 비판적 지지 담화문(1947년 9월 23일)
7. 국민의회 비판(1947년 10월 26일)
8.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성명(1948년 3월 9일)
9. 김구의 남북협상 반대(1948년 4월 19일)
10. 제2차 전당대표자대회 개최 및 조직개편(1948년 5월 5일)
11. 5·10선거 참가자 제명(1948년 ??)
12. 중앙상무위원회에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의 개조 요구(1948년 6월 2일)
13. 김구와 김규식의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에 대한 지배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유림의 폭탄선언 (1948년 7월 10일), 이에 양김씨는 통일독립촉진회를 별도로 조직.
14. 독립노농당 일본당지부 결성(1948년 8월 8일)
15. 제3차 독립노농당 전당대표자대회(1949년 5월 7-8일)
16. 독립노농당 중앙집행위원장 유림의 파리 세계아나키스트대회 참석을 위한 여권신청(1949년 7월 31일)이 정부방해로 좌절.
17. 이승만 비난후 유림 투옥(1950년 하반기), 한국민주주의자 총연맹 조직하여 이승만 독재에 항거(1952년)
18. 6·25동란중 대구에서 경북지구특수위원회 조직(1952년 10월 3일)
19. 제4차 전당대표자대회(1956년 7월 7-8일)
20. 제5차 전당대표자대회(1957년)
21. 전당상임대표회 제17차회의에서 3·15선거의 부정선거 가능성에 대한 경고와 비판(1960년 2월 6일)
22. 독립노농당 상임대표회 회장 유림의 시국담화(1960년 4월 28일)
23. 혁신동지총연맹 발기(1960년 5월 12일) 및 결성준비위원회 시국선언문 발표 (1960년 5월 27일), 최고위원으로 선출
24. 분열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위해 독립노농당, 한국독립당,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 동지총연맹 등 5당통합을 주도하였으나 신당의 기본이념에 대한 불합치로 좌절(1960년 8월 이후)
25. 유림 서거(1961년 4월 1일)
26. 민주사회당 흡수·통합 그러나 5·16쿠테타 직후 독립노농당 당원 다수 연행 및 수배(1961 년 5월 18일).
27. 군사정권의 정당해산조치로 16년의 역사를 일단락(1962년)
[후사(後史)]
27. 정치활동 해금 후 정화암, 양일동, 하기락 등이 민주통일당 조직(1972년 2월), 10년 뒤 전두 환정권의 정치정화법에 의해 해산
유림은 독립노농당을 통하여 아나키스트정치를 시도하였다. 유림은 1947년에는 전국혁명자총연맹을 창립하여 위원장이 되며, 1948년에는 대한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고,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대표간사가 되며, 1950년에는 국내외 독립운동자를 총망라한 독립전선의 결성을 주창하고, 1952년 부산임시수도시절에는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조직한다.
해방공간에서 펼쳐진 한국의 현대정치사는 그야말로 아우성과 소용돌이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변전무쌍하는 예측불허의 난장판이었다. 이 와중에서도 유림은 조선민족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그리고 외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정치지도자들에 의해서 분열의 비극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물리치고자 혼신을 다하여 투쟁한다. (유림은 1948년 3월 5일 남한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담화내용에서 “6. 골육상잔을 초래한다” 와 “7. 미소대립을 조장하여 국제전쟁을 도발한다”는 예언자의 탁견을 제시하였다(대동신문, 1948년 3월 6일자).)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역시 선구자를 무정하게도 고난의 길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 (남북분단이나 6·25전쟁을 두고 외인론과 내인론이 대립한 가운데 최근 세계체제의 구조적 제한성을 강조하는 외인론이 득세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제하 독립운동사와 해방 직후의 좌우익 대결구도를 볼 때, 조선의 분단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정형화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조선의 오랜 역사를 통해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대주의적 정치행태는 일제말 친일-친청-친로의 삼각구도에서 미소라는 양극구도로 변화되었을 뿐이다. 미소의 그 어느쪽에도 사대하지 않았던 아나키스트의 정치적 실패는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비록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것이기는 해도, 가장 떳떳하고 자랑스런 패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호룡(2000: 228)은 일제하 아나키스트들의 민족전선론과 임정참여를 비난하였듯이, 독립노농당도 민족주의 진영, 즉, 우익진영에 편입되어 사상적 독자성을 상실하고, 공산주의세력과 줄곧 대립하므로써 독자적 세력의 구축에 실패하고 제3의 사상으로서 위상도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 완전히 고립된 소정당으로 전락하여 아나키스트세력의 몰락을 초래하였다고 혹평한다. 나아가, 이러한 아나키즘의 일탈은 “한국의 근대사상계를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좌우대립으로 몰고 간 내적 요인”이라는 무책임론까지 첨가한다. 좌우대립의 희생양을 다시 한번 속죄양으로 몰아치는 격이다.
이합집산으로 얼룩진 한국의 현대정당사와 미소라는 양 강대국에 사대하던 남북한의 정권장악세력들에 관해 비판적 관점을 지닌 연구자라면 독립노농당에 대해 이같이 편파적이고도 무책임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호룡(2000: 214-220)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비정치적 농민운동의 성과도 과소평가할 뿐이다.) 정당활동의 성과를 오직 권력장악이라는 마키아벨리적 기준에서만 본다면야 모든 집권세력은 언제나 긍정적인 평가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오늘의 싹쓸이판 정치세태를 합리화시켜 주는 논리와 무엇이 다르랴. 현재 한국정치의 희극적 비극이 과연 소수당이었던 독립노농당의 잘못으로 연유된 것인가? 아니면 독립노농당과 같은 바른 정치세력을 (특히, 당명을 어긴 5·10선거의 당선자들이 비록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족한 수임에도 과감히 제명하므로서 대의를 추구하는 이념정당의 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오늘날 원내교섭단체를 만들기 위해 온갖 추태를 부리는 정치판과 비교해 본다면, 과연 한국에 그런 선진적 정당이 있었던지 믿기 어려울 것이다.) 배제하고 탄압한 지배세력의 잘못 때문인가?
이호룡의 주장을 항목별로 반박해 보도록 하자.
1) 편입. 독립노농당은 민족진영에 편입되지 않았다.
독립노농당은 그 결성 과정에서 과도정부 수립과 관련하여 우익/민족주의계열 진영(국민대회준비위원회와 비상국민회의 등)과 좌익/공산주의계열 진영(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민주주의 민족전선 등) 모두를 비자율적, 비자주적, 비통일적이라고 비판하고, 남조선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도 비현실적이라고 부정하였다. 이호룡이 제기한 “편입론”의 보다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전략적 연대나 일시적 공동보조를 두고 편입 운운한다면 강변이 되고 말 것이다. 독립노농당은 그 발기취지서, 당의, 당강, 결당선언, 당략, 당책에서 아나키스트정당의 조건을 최대한 갖추어, 당시의 다른 정당들과 비교할 때, 매우 독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결당선언에서는 “양두를 걸고 구육을 파는 인민의 수호자와 주관에 도취되어 현실을 몰각하는 과학적 이론가는 이미 그정체가 백일하에 폭로되었다”(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90)고 하면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를 모두 비판하였다(오장환, 1998: 248). 특히, 당략과 당책에서 명확하게 아나키즘사회를 지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완벽한 지방자치, 산업자치, 직업자치를 추구하고, 고도의 단누진세(單累進稅)에 의한 소득재분배, 크로포트킨류의 자급자족적 경제활동, 남녀평등의 병역의무, 노동대중의 외교 역할, 공적 산업의 국가관리와 산업의 지방분산, 노동자의 자주관리권, 공동생활의 장려 등을 대거 포함한다. 또 독립노농당이 이승만 독재를 일관되게 비판하고 4·19이후에도 존속하여 혁신세력의 통합을 주도한 사실은 그것이 결코 민족진영에 편입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2) 우익. 독립노농당은 우익이 아니다.
어떻게 독립노농당의 이념적 지주인 아나키즘을 우익이라고 규정하는지 참으로 불가해(不可解)하다. 공산주의세력에 반대하면 무조건 우익인가? 공산당만이 좌파를 독점하는가? 요즈음에도 통일논의에 조금이라도 비판적 발언을 제기하면 반통일세력으로 몰아부치는 일종의 레드메카시즘 혹은 진보주의파시즘이 횡행하는데 혹시 이같은 기류가 무의식적으로라도 반영된 것은 아닌지? 세상의 어떤 우익이 당의 강령에서 “농민 노동자 일반근로대중의 최대복리를 위해 투쟁한다”고 천명할 것이며, 당의 정책으로 계획경제체제, 자본집중의 방지, 대기업의 국공영화, 노동자의 자주관리, 경자유전을 명시하겠는가? 또 어떤 우익이 미국의 정책에 공공연히 반대하겠는가?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 계열인 춈스키가 “어떤 좌파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만약 자신을 마르크스나 레닌과 같은 의미의 좌파로 규정하려 한다면 자신은 좌파가 아니다”라고 답했던 것이 기억난다. 5·16쿠테타 직전까지 혁신동지총연맹을 결성하고, 한국독립당, 한국사회당, 사회대중당 등의 통합을 주장하며 자유사회주의를 추구하고자 했던 독립노농당을 과연 우익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사이비 좌우파가 득세한 한국의 현대정치사에서 좌우익 타령은 선명성시비만 왁자지끌할 뿐 어떤 의미있는 생산적 토론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사회주의자가 과연 누구인지?
3) 반공주의. 공산주의 세력과의 투쟁은 일제시대부터 계속되었다.
아나키즘과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와 푸르동, 마르크스와 바쿠닌, 레닌과 크로포트킨, 스페인혁명에서 볼세비키/스탈린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관계처럼 역사적으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은 아니라 해도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러므로 아나키스트들이 소련의 앞잡이가 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을 이단시한 것은 매우 자연스런 귀결이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아나키스트로서 역사를 바라 볼 뿐이다. 해방공간에서 아나키스트가 공산주의자와 연대하거나 협력해야만 한다는 타당한 근거가 있었다면 알고 싶다. 프로레타리아독재론을 내세우며 국가권력의 쟁취에 혈안이 된 공산주의자들의 구조적 한계를 아나키스트들은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러시아혁명과 스페인혁명에서도 아나키스트들은 레닌이나 스탈린에 의해 혁명이 철저히 배반당하는 비극을 목격하였고, 후배 아나키스트들은 항상 이점을 잊지 않고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아나키스트는 좌익독재건, 우익독재건 모든 강권적 국가주의자들을 거부한다.
4) 고립. 독립노농당은 고고하였을 뿐 결코 고립되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없는 정당은 물론 초라하게 보일 것이다. 만약 필자가 당시 유권자의 정치의식이나 막걸리와 고무신이 오간 선거문화 수준을 거론한다면, 민중의 역량을 무시하는 반민중주의자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단독선거 반대라는 정치적 대의를 저버리고 독립노농당이 5·10선거에 적극 참여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당명을 거부하고도 당선한 사람들의 숫자보다는 훨씬 많지 않았을까? 김구중심의 임정세력과 결별하여 독자적 길을 걸었기 때문에 소정당으로 전락하였을까? 김구와 결별하게 되는 독립노농당의 대의명분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도 없이 타당한 것이다. (하기락(1993: 315-326)을 참고할 것.) 그렇다면, 김구계의 정치세력은 그후 어떻게 되었던가? 승승장구하였는가? 한국독립당은 어디로 갔던가? 유림이 서거하기 직전 한국독립당을 비롯한 5개 정당의 통합을 준비하였으나 끝내 실패한 그 이념적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특히, 1950년의 5·30선거에서 50명 이상이 출마하여 당선자는 못내었으나 차점자만 27명이었다는 사실(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102)은 그래도 국민들의 상당한 혹은 적지 않은 지지가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최근 선거에서 소위 진보정당들의 득표율이 극히 저조하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가치가 유명무실하다고 단정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우익독재가 지배한 해방공간과 1950년대에서도 독립노농당이 전개한 치열한 선전(善戰)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알 수 없다.
5) 몰락. 아나키스트세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한국의 아나키스트세력은 몰락하지 않았다. 단지 위축되고 약화되었을 뿐이다. 자유당의 이승만 독재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은 한 독립노농당은 건재하였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였다. 정당의 세력을 평가할 때, 물론 국회의원의 수는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미 강조했듯이, 한국과 같이 정치문화나 정치도의가 저차원인 경우에는 정치의 질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재야의 소수 양심적 정치세력이 수행한 민주화투쟁은 오늘날 만인의 귀감이다. 자유를 주지 않는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한 독립노농당이라면 그 세력은 여전히 건재하였다. 이와 같은 평가는 4·19혁명 과정에서 아나키스트 하기락이 교수데모에 앞장서고, 독립노농당 대표로서 유림이 혁신동지총연맹의 구심점으로 활약하였다는 점을 보더라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몰락한 세력이라면, 왜 1961년 5월18일 시국대책을 논의하던 독립노농당 당원들을 계엄군이 연행하거나 수배하였겠는가? 비록 군사정권의 정당해체 조치로 독립노농당은 사라졌으나, 10년후 정화암, 하기락 등의 아나키스트세력은 다시 통일민주당을 결성하여 선거 때마다 원내에 진출하였고, 특히 1973년 2월 선거에서는 유권자 총투표의 10.2%를 획득하였다. 통계적 수치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아나키스트세력의 부활이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을가? 그 뿐이 아니다. 한국의 아나키스트세력은, 국민문화연구소(1998)는 논외로 하더라도, 1972년 6월 22일 한국자주인연맹을 창설하고, 1988년에는 하기락의 주도로 서울에서 아나키스트세계대회까지 개최한다. 이후 1990년대에 들어 대구아나키즘연구회, 부산아나키즘연구회 등이 속속 만들어졌으며, 2002년 2월에는 한국아나키즘학회까지 창립되었다. 그렇다면, 아나키스트세력의 몰락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잘못 된 것이 아닐까? 한국아나키스트들은 일찍이 토인비가 말한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로서 창조적 파괴를 위한 저항정신을 항상 견지해 왔다.
6) 민중없는 조직. 아나키스트들은 민중과 함께 행동하였다.
이호룡(238)에 의하면, 아나키즘은 민중해방을 표방하여 사상의 민중성을 강조하지만, 아나키스트운동에는 민중이 없다. 왜냐하면 창조적인 선구자들끼리만 모였지, 광범한 대중을 조직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으로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다. 조선노동공제회부터 시작된 아나키스트의 대중조직 활동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아나키스트운동은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지속하였다. 민중직접혁명론의 교훈을 누구보다도 명심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나키스트이다. 놀랍게도, 이호룡은 공산당조직의 특성인 전위당 내지 전문혁명가/뱅가드 중심조직론을 아나키스트조직에 ‘잘못’ 적용한다. 대중조직의 방법에서 공산당식의 철저한 위계서열적 조직은 한마디로 비민주적인 것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희생하는 이같은 운동방식은 출발부터 독재화의 길로 향하고 있을 뿐이다. 해방정국에서 각 정당들이 대중을 조직하였다는 진정한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연고주의? 돈봉투? 막걸리와 고무신? 혹은 이념적 환상이나 세뇌? 아니면 은근한 위협과 강제? 한국에서 어떤 사상과 정당이 밑으로부터 대중의 자발적 각성과 참여를 기반으로 대중을 조직하고 또 진실로 대중을 위해 일하였던지 되묻고 싶다.
이호룡(237-238)은 비민중성 혹은 비조직성을 아나키즘의 관념성과 결부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아나키즘은.....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관념상의 자유에 불과하다. 아나키즘은 민중들이 직접 누릴 수 있는 자유 즉 일상생활상의 구체적 자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그 결과 아나키스트들은 민중들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실패하였다.” 아나키즘운동에 대한 편향적 시각이 점점 경직되고 있는 것 같아 매우 답답하다. 역사상의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대경실색할 이같은 비난은 전통적으로 반(反)아나키스트들이 즐겨 사용한 “수사학적 죽이기” 수법과 (이호룡의 수사법, 예컨대, 아나키즘의 “사상적 파탄”(235), “사상적 독자성의 확보 실패“(234), ”사상으로서의 존립근거를 상실하는 내적 요인“(235), ”아나키즘의 포기“(237), ”우익 진영에 편입“(238) 등은 근원적으로 한국아나키즘에 대한 비우호적 가치전제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유사한 점에 당혹스럽다.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투쟁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을 관념적이라고 하다니! (아나키스트의 실천지향성은 “실행에 의한 선전(propaganda by deed)"이라는 구호 속에 분명히 표현되고 있다. 이호룡이 사용하는 ”사실에 의한 선전‘은 잘못된 번역이다.) 도대체 관념적 자유와 현실적 자유를 어떻게 구분하기에 이같이 비경험적-반사실적인 결론을 내리는지? 일제하 혹은 해방직후 조선민중의 일상적 구체적 자유가 무엇이기에 아나키스트들은 외면하였단 말인가? 다른 주의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관심을 보였기에 성공했는가? 공산주의자 아니면 이승만 우익독재주의자가 조선민중의 구체적 자유에 도대체 어떤 관심을 가졌단 말인가? 자유에의 길은 다양하다. 이호룡은 어쩌면 어떤 특수한 주의가 상정하는 자유의 왕국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노예가 되는 길과 자유의 길을 구분하기가 종종 쉽지 않다.
이호룡은(2000: 217-219)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생활혁신을 통한 자유사회건설론이 개량주의적 성격을 가져 일반 대중에게 설득력이 적었던 것으로 평가한다. (자칭 진보주의자들이 “개량주의”를 마치 소극적이고 안일한 방법론으로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자가당착일 뿐이다. 점진적 방법론을 선호하는 개량주의는 급진주의에 내재된 모험적 기회주의나 선동적 영웅주의를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또 개량과 급진의 차이는 생각보다도 크지 않고 그 경계도 애매한 경우가 많다. 특히, 실질적 효과라는 측면에서 볼 때, 때로 급진의 부작용은 훨씬 심각하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광범위한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한다. 과연 그랬을까? 아나키스트단체로서 아나키스트적 원칙에 충실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대중성 확보 이전에 우선 운동의 지상과제이다. 좌우익이 권력투쟁을 위해 감언이설로 민중을 위로부터 동원하던 당시의 실정에서 과연 어떤 운동이 진정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것이었는지 다시 한번 냉정하게 반문해 보자. 모든 화려한 정치적 구호와 정책적 선전의 거품들이 다 벗겨진 오늘의 시점에서 당시 노동자와 농민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폭력과 모함이 난무하고, 거짓과 허세가 가득하였던 해방공간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결정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포섭하여 세뇌시키고 동원해야 할 객체로서만 간주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농민을 각성시키고, 농업과 농촌의 하부구조를 변화시키므로써 농민을 주체적 생산자로 만들고자 하였다. 무상몰수나 무상분배와 같은 듣기 좋은 소리만을 외치거나, 부르죠아, 친일반동 지주의 처단과 같은 복수심을 불지르는 언동을 일삼는 것이 대중의 요구를 광범하게 수용하는 것인가? 아나키스트의 생활혁신운동은 장기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결코 화끈한 인기는 끌지 못했더라도, 실천가능한 과제들을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는 아마도 가장 필요했던 농민운동이라 할 것이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활동에 관한 내용은 국민문화연구소(1998)를 참고할 것.)
7) 사상적 파탄. 독립노농당은 아나키스트사상의 선구적 실천이다.
끝으로, 이호룡(2000: 235-237)은 “사상적 파탄”이라는 극한적 용어를 구사하면서 독립노농당계열의 아나키스트와 함께 자유사회건설자연맹계열의 아나키스들도 매도한다. 즉, 후자가 초기에는 정당활동을 부정하였으나 뒤에는 적극적으로 관여하였기 때문이다. 남한에 단독정권이 수립되고 한국전쟁도 끝난 1950년대 중반 무렵부터 시작된 일부 아나키스트들의 민주사회주의운동과 4·19이후 혁신정당통합운동(의 좌절)과 민주사회당의 결성준비 그리고 민주통일당의 결성(1973)과 같은 일련의 정치활동을 두고, 이들이 초기의 반(反)정당 입장을 배신하므로서 아나키즘을 포기하고 사상적으로 파탄하였다는 것이다. 전혀 동의할 수 없는 해석이다.
독립노농당계의 현실참여론을 반대한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정당활동 불참이유는 다음과 같다: “.....정당도 좋으나 그에 앞서 정당 자체가 존립할 수 있는 기반, 즉 농민과 노동자조직이 급선무다. 정당을 먼저 결성하고 농민과 노동자 조직을 그 후에 하면 그것은 농민 노동자들을 자율적으로 각성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우롱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결국 개인 중심이나 지도자 중심의 반동적인 결과를 초래한다”(이정규, 13). 이처럼 비참여파도 절대적으로 정당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시기상조론(時機尙早論) 내지 선조직후정당론(先組織後政黨論)을 제시한 것일 뿐이다. 이들은 ‘아나키즘의 한국적 실현형태는 민주사회주의적인 형태로 건설하여야 될 것“이며, ”민주사회당이 다소나마 아나키즘적 색채가 있어 좌익과 이론적-정책적 대결이 가능하며 우익보수당에 자극을 줄 것“(이정규, 263-271)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에 민주사회당을 결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선택은 필자가 비판하는 순수 아나키즘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당시의 현실적 여건을 고려하여 선택한 방안이다(오장환, 1998: 245). 어쩌면 이들의 과감한 변신은 독립노농당의 좌절을 딛고 일어서려는 일종의 동지적 계승운동 내지 연대운동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이들은 어떤 측면에서도 아나키스트로서의 소임을 망각하거나 배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선, 아나키스트들은 독립노농당의 결성과 관련하여 정당참여와 비참여를 개인의 자유의사에 맡겼으며, 각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아나키즘의 구현을 위하여 노력하였을 뿐 어떤 형태의 심각한 당파적 대립과 분열을 초래하지 않았다. 일종의 이념적 자유연합이 아니겠는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한국전쟁이후 변화된 정치적 토대와 여건에서 정화암의 귀국(1954년)을 전기로 정당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결코 정당활동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호룡의 비난은 전후맥락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단죄하는 셈이다. 아나키스트들도 내적 분화 혹은 분파를 얼마든지 이룰 수 있고, 또 서로 대립과 불신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시대부터 결코 심각한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초래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립노농당계열과 자유사회건설자연맹계열은 후일 통일 민주당(1971)과 한국자주인연맹(1972년 6월 22일)으로 재결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상적 파탄이 아니라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이념적 결단”이요, “사상적 성숙”이다.
Ⅴ. 결어: 아나키즘의 선구자로서 유림
유림은 그야말로 시대와 사상의 선구자였다. 그리고 선구자가 겪어야 하는 온갖 고난과 풍상에도 의연하였다. 그는 조국의 앞날을 밝히고자 아나키스트동지들과 함께 칠흑의 비바람 속에서도 굳건하게 희망의 횃불을 들고 나아갔다. 아나키스트로서 그의 투쟁은 과연 실패로 끝났는가? 그의 아나키즘은 좌절되었는가? 본 연구를 통하여 필자는 그의 세속적 실패는 이념적 성공을 기약하는 것이며, 그의 시대적 좌절은 새로운 시대에서의 부활을 준비하는 것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이호룡(2000)의 무리한 주장과 편향된 해석을 비판하므로써 한국아나키즘의 역사적 위상을 정당하고도 바르게 재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하였다.
유림의 활동이 아나키스트운동에 기여한 바를 다섯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보자.
첫째, 유림의 임정참여는 아나키스트정치의 시발점으로서 신채호가 추구하였던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을 아름답게 결합시킨 이념적 성숙의 산물이다.
둘째, 유림은 신채호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므로써 우익 민족주의진영에 편입되거나 자본주의적 질서에 현혹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셋째, 유림의 독립노농당 결성과 정당활동은 아나키스트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므로써 세계아나키스트운동사에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고, 한국아나키즘의 고유성을 확립하였다.
넷째, 유림도 아나키즘의 반공산주의적 노선을 따라서 시종일관 대립적 자세를 견지하므로써 아나키즘의 사상적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소련동구권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가 붕괴한 오늘날 과거의 공산주의는 자유(해방적) 사회주의(liberal or libertarian socialism) 혹은 아나르코코뮤니즘(anarcho-communism))에로의 창조적 변신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유림의 비타협적 원칙주의 노선은 현실적으로는 고난과 좌절로 이어졌지만, 21세기 한국아나키즘의 부활과 발전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해방 후 유림의 아나키스트 정치투쟁은 그가 해방시키고자 하였던 민중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지는 못하였다. 시대를 앞서 가는 선구적 이념의 담지자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좌절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현실적인 좌절과 패배를 통하여 한국아나키즘운동은 그 순수한 비판적 저항정신을 간직할 수 있었다. 살아남아 영광을 누린 자들의 배신과 탐욕의 역사는 우리를 슬프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한국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끝났는가? 해방과 함께 다시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이 남북한을 지배하였고, 현재도 우리 민족은 일제가 남긴 민족분단의 비극을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외세의 횡포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독립운동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이 사실을 명심하고 있다. 그래서 유림의 투쟁도 계속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아나키스트정치의 세속적 성공가능성은 아직도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각종의 운동정치(특히 신사회운동과 연관된 영향력의 정치나 정체성의 정치 그리고 환경/문화/여성정치)는 아나키스트의 주요한 활동무대가 될 수 있다. 또, 정보기술의 발전은 네트워킹의 형성과 확대를 매우 용이하게 만들고 있으므로 자유연합이라는 아나키스트 조직원리도 급속하게 확산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직적 기반을 토대로 하여 한국의 아나키스트정당과 아나키스트정치인이 “한국정치체제의 연방주의적 개편과 시민불복종의 제도화 그리고 각종의 자치공동체와 자주관리”(김성국, 1996a: 34-40)를 공약으로 내걸고 등장할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특히, 분단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시대의 정치를 대비함에 있어서 아나키스트정치는 좌우의 국가권력지상주의자(國家權力至上主義者)를 지양하여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 대신에 민중과 시민이 주인이 되는 지역분산형 자유해방의 사회를 추구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유림의 인간적 면모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일반 사람들이 그의 인격과 기상을 알게 된다면, 한국아나키스트운동의 정당성을 가일층 확신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위대한 아나키스트들 모두가 초인의 기상과 군자의 품성을 지녔다고 말한다면 공연한 자화자찬이 될까? (중국인 연구자 장강(1997: 331-332)의 다음과 같은 관찰은 의미심장하다: “무정부주의학설은 비록 외국으로부터 전해들어왔지만 그러나 그것의 기본 요의(要義)는 도리어 중국의 노자, 묵자, 공자의 학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 바 바로 대동(大同)사상, 겸애비공(兼愛非攻)사상, 예양호조(禮讓互助)사상으로서 5·4운동이래 제창한 민주정신과도 일치한 것이다.....그러므로 그것은 정치학설이기도 하고 도덕학설이기도 하며 중국유가학설의 냄새도 있다. 무정부주의는 일종의 사회사상 조류로서 정당이 아니며 정치가의 야심도 없으며 만인안락의 사회를 실현할 것을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무정부주의사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죄다 도덕 수양을 중요시하였다.”) 단재 신채호와 더불어 단주 유림도 민족절개의 사표로 추앙받을 것이다.
21세기의 벽두, 한국사회는 또다시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이제 우리를 도와 줄 영웅도, 지사도, 열사도 그리고 테러리스트도 없는 이 삭막한 시대를 위해 유림은 다시 한번 태어나야만 할 것 같다. “그대 있어, 이 나라 묵직하더니, 그대 가버리니 이 나라 허전하구나, 그대는 바로 천하의 선비니, 영원토록 고고히 맑은 바람이어라(君在大韓重 君去大韓空 君是天下士 百世獨淸風)”고 읊은 심산 선생의 애도사가 아직도 심금을 울리고 폐부를 찌르는 까닭이 무엇 때문이겠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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