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문화연구소 발행 <아나키즘연구> 제2호(2002년 10월), pp. 1-33 에 게재
이 글은 <안티뉴스>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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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思想과 아나키즘
- 大同思想을 중심으로 -
李愛熙 (江原大 윤리교육과)
1. 序言
최근 우리 사회는 공자 신드롬에 빠져들고 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든가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등의 서적이 출간되고, KBS의 공자의 <논어강의>가 저녁시간에 어찌하였던지 인기리에 방영되고, 그 강의를 둘러싼 열띤 논쟁이 전개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발표는 그러한 논의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우리사회 더 나가서 현대사회가 직면한 정치적 이상의 새로운 모색이라는 측면과 관련해서 공자사상의 아나키즘적 요소를 조명해보려고 한다.
일견 東아세아적 이념에서 아나키즘적 요소를 찾으려 할 경우 상식적으로 공자를 비롯한 유가사상보다는 老莊의 道家思想이 보다 아나키즘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확실히 그러한 생각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노자의 小國寡民의 이념과 장자의 反패권주의의 사상은 서구적 이념인 아나키즘과 상통하는 측면이 유가사상보다 훨씬 강함이 사실이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을 잘 살펴보면 아나키즘적 요소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든가 虛無主義 등으로 곡해할 경우 공자의 사상에서 아나키즘적 요소를 摘出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자는 老子나 莊子와는 달리 주나라의 봉건체제를 이상적인 정치형태로 보아 禮治主義적 입장에서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던 까닭에 심지어 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당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이 그렇게 비판받은 데에는 공자사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무식하고 저열한 현대의 이데올로기 논자들의 과오의 결과이지, 공자사상 자체가 결코 패권주의와 권력욕에 사로잡힌 體制擁護論이 아님에 틀림없다. 『論語』의 어느 구석에도 정치가 인민을 억압한다거나 통치자의 권력욕을 美化한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공자사상의 중심이 되는 仁의 사상이라든가 愛民思想은 결코 패권주의나 권력을 추구하는 측면이 없다. 오히려 공자의 사상은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覇權主義的인 體制擁護論을 배격하고 있다. 공자가 그의 제자인 有가 季씨의 가렴주구와 명분을 부정하고 사회적인 질서를 파괴며, 패권주의를 추구하는 정치를 幇助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입장이 특히 그러하다.
그렇다면 공자의 사상가운데서 아나키즘적 요소는 찾아질 수 있을까? 이 점을 확인하기에 앞서 우리는 아나키즘에 대한 고전적 이해와 함께 최근의 새로운 이해를 중심으로 그 원론적인 해석에 접근해 볼 필요를 느낀다. 그러한 해석을 토대로 공자의 사상 중에서 아나키즘과 상응할 수 있는 점을 찾아내고, 그 현대적 의의를 살펴보는 것이 이 논의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인 것이다.
2. 아나키즘의 재해석과 그 현대적 의의
가) 아나키즘의 고전적 의미와 曲解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라든가 虛無主義 등으로 곡해된 경우들이 있다. 그러한 곡해 때문에 아나키즘은 가장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사상인지도 모른다. 비록 아나키즘의 공동체주의를 긍정하는 자들까지도 권력추구를 근간으로 하는 정치의 속성을 비판하는 아나키즘의 과격성을 들어 머릿속으로는 엉뚱한 모습으로 아나키즘을 그리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따져보면 아나키즘을 가장 곡해하고 거부한 집단이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독재를 강조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공산당의 一黨獨裁를 통해 인민에 대한 억압과 국가권력을 강화함으로서 철저하게 권력욕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조류는 공동체와 集産主義를 중시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들의 전체주의를 거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전위당으로 대표되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독재를 강조하지만, 아나키즘은 모든 권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왔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이 자본주의자보다 아나키스트를 더욱 증오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점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자들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과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자본주의자들까지도 권력욕과 정권욕에 사로잡힌 그들의 본심을 공개하고, 인민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아나키스트들의 의도를 왜곡하여 그들의 권력욕구에 대한 장애를 원천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公共의 安榮과 질서를 수호하는 공동체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국가가 권력을 추구하는 구조가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의 이익을 수호한다면 아나키즘도 그러한 국가를 굳이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수없이 오해되고 있는 아나키즘에 대한 誤譯들을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 왜냐 하면 아나키즘은 이미 "모든 형태의 정부와 유사한 형태의 속박에 반대하고 필요한 것을 충족하기 위해 개인과 집단의 자발적 협동과 자유로운 연대를 주장하는 정치적 이론", 혹은 "모든 정부 권력이 불필요하며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개인과 집단의 자발적 협동에 기반한 사회를 주장하는 정치적 이론", "모든 형태의 정부는 폐지해야만 한다는 정치 학설"로 긍정적이고 적절하게 정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아나키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아나키즘의 사전적 의미를 재음미해 볼 필요는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일본인 학자들이 아나키란 말을 '무정부'와 동의어로 잘못 번역한 용어를 써온 데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아나키란 말이 잘못 해석되었다는 것은 'Anarchy'라는 단어에서 'An'은 '없다' '아니다'라는 뜻이고, 'Archy'는 '우두머리' '강제권' '전제' 따위를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에 'Anarchy'는 이런 것들을 배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경우 아나키즘은 "자율주의 반패권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
결국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이념은 정부의 인민에 대한 억압과 권력추구를 인정하지 않는데, 역사적으로 정치와 국가<정부>의 속성을 인민의 억압과 권력추구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러한 체제를 부정하는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해석해 온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아나키즘을 모든 형태의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두머리' '강제권' '전제'를 부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아나키즘에 대한 고전적 정의는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과 크로포트킨등의 초기 아나키스트들의 언급 속에 잘 드러난다. 프루동은 그의 책 "소유란 무엇인가?(What is Property?)"에서 아나키즘은 "기존의 권력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토지나 재산의 소유를 반대하는 이론"으로 즈의 했으며,
그를 이은 크로포트킨은 "농장과 공장에서의 상호 원조(Muitual Aid,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과 1910년에 Encyclopedia Britannica 의 11판"에서 "지배 체제가 없는 사회에서의 생활과 행동에 관한 이론의 주요 원칙에 주어진 이름 - 문명화된 존재의 무한히 다양한 필요와 소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생산과 소비를 위해서 자율적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법의 준수나 어떤 권위에 대한 복종에 의해서가 아닌 다양한 그룹, 지방, 직업간의 자율적인 합의에 얻어지는 조화. 이런 방식으로 발전된 사회에서는,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자발적인 연합이 국가의 기능을 대치하면서 그 보다 훨씬 더 확장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크로포트킨 이후, 아나키즘의 의미를 더욱 발전시킨 톨스토이(Leo Tolstoy)는 기독교(Christian) 아나키즘(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신 안에서 믿음을 찾음)을 주창하면서 "기존의 상황하에서 권력이 없다면 권력의 폭력보다 더 나쁜 폭력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옳다."라고 이야기했다.
나) 아나키즘의 현대적 재해석
현대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 혹은 허무주의로 해석되기를 거부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이 이념의 형성단계로부터 아나키스트은 사회의 혼란을 누구보다 원치 않으나, 그러한 혼란의 과정 속에서 억압받고 수탈 당하는 대중의 아픔을 보아왔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은 大衆의 고통을 보아주면서 권력의 횡포를 용인 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은 정치권력의 횡포를 격렬하게 비판 배격하게 되었고, 심지어 정부를 부정하는 형태의 이념으로 비추어 졌다. 뿐만 아니라 아나키스트들이 폭력에 의한 정치권력의 타도를 용인하고 조장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게 됨에 따라 아나키스트들은 폭탄이나 던지고, 폭력이나 테러에 의해 사회를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사회의 발전의 원동력을 적자생존에 입각한 투쟁이 아니라 개체들간의 상호부조를 통한 협동에서 찾으려는 이념인 까닭에 폭력을 동원하는 투쟁을 용인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20세기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새로운 아나키스트 저술가와 운동의 발전으로 아나키즘은 새로운 발전의 轉機를 맞기 시작했으며, 아나키즘에 대한 定義도 사실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괄목한 사실은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미국의 시카고에서 1986년에 있었던 8명의 아나키스트들의 체포와 투옥은 아나키즘의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Voltairnine de Cleyre와 노예로 태어난 Lucy Parsons와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Haymarket Eight"에 속해 있으면서 후에 아나키스트가 되어, 열정적인 웅변가와 노동계급의 반정부주의자로 활동했다. Emma Goldman 역시 아나키스트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적 위치를 점한다. 그의 삶의 긴 동지였던 Alexander Berkman는 특히 아나키즘을 현대의 사회적 삶을 고려하여 정의해주고 있다. 그는 『ABC of Anachism』이란 책에서 "아나키즘은 당신이 자유로워야만 함을 의미한다. 아무도 당신을 노예화할 수 없으며, 지배할 수 없으며, 빼앗을 수 없으며, 강요할 수 없다. 이것은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할 자유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강요받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역사적으로 아나키즘의 정의가 이론만이 아닌 그 이상임을 증명했던 커다란 아나키즘 운동이 아나키즘을 실행에 옮겼다. 아나키즘적인 공동체적 노력은 19세기 초의 파리 꼬뮌에서 나타났고, Ricardo Flores Magon 같은 아나키스트들과 Emiliano Zapata 같은 혁명가들은 멕시코 노동자 계급 반군을 혁명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가능함을 증명했고, 1936-39 사이의 스페인 혁명은 세계의 조그만 구역 안에서 아나키즘을 만들어낸 아나키스트들의 능력을 증명했다. 물론 현재도 스페인의 Mondragon과 같은 곳에서 진행 중인 아나키즘을 볼 수 있다.
그 곳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이 공동으로 일하며, 지배 권력 없이 자유롭게 살려 하고 있다. 아나키즘을 폭력이나 혼란으로 오용하고 있는 이들은 역사적으로도 그래 왔고, 현재도 그렇지만, 보통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은 기존의 권력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나키즘을 매도하는 자들은 아나키스트를 테러분자로 낙인찍어 매도한다. 그러나 아나키스트 사가인 George Woodcock의 "아나키스트가 폭탄이나 던지고, 폭력이나 테러에 의해 사회를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더욱 잘못된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이 폭탄을 던지거나 폭탄을 던지도록 돕지도 않았던 소수였을 때 이런 죄가 아나키스트들에게 씌워진 것은 아나키즘 옹호자들 사이의 흥미로운 둔감함을 보여준다."라는 말이나, Alexander Berkman의 오래 전에 아나키즘이 혼란이라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어떤 것이 아나키즘이 아님을 말해야겠다. 아나키즘은 폭탄, 무질서, 혼란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강도질이나 살인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모든 것에 대항하는 전쟁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미개 시절이나 야생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아나키즘은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정반대이다."라는 말을 통해볼 때 아나키스트는 결코 테러분자일 수 없고, 아나키즘은 테러리즘 추구하지 않는다.
현재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이 그 정통성과 역사를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오늘날의 아나키즘은 권력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있다. 이 경우 권력은 단순한 국가 권력뿐만 아니라, 기업체의 권력과 개인과 조직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다른 아나키스트들이 anarcho-syndicalism과 계급 투쟁에 머물러 있는 동안, L. Susan Brown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은 실존적 개인주의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또한, 아나키즘과 反인종주의, 노동자들과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자급 자족을 소개하는 음악과 Crass와 같은 밴드에 의해서 전세계로 퍼져 갔다. Black Panther 이전의 Lorenzo Kom'boa Ervin과 같은 다른 아나키스트들은 인종주의에 반대하여 단체를 구성하고 직접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더 나아가 지구환경의 위기를 경고하는 아나키즘은 생태주의에 통합되었다.
이상에서와 본 바와 같이, 아나키즘이란 단어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그리스어 어원의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아나키스트들의 철학과 행동이 아나키즘이라는 단어에 적당한 정의를 부여한다. 앞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사전적 정의는 때때로 공정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아나키즘이란 단어의 오용은 불행한 일이며, 지난 세기 동안 아나키스트들이 해결해야만 했던 문제였다. 아나키즘이란 단어의 오용과 단순화된 사전적 정의, 서로 다른 해석으로 인하여 아나키즘은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진정한 의미는 아나키스트의 역사, 글, 행동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 아나키즘 운동의 새로운 전개양상
한편 20세기 후반기에서 21세기를 맞이하는 오늘의 상황에 접어들면서 정치권력 이외의 다양한 권력의 횡포들의 양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현대사회의 권력의 양상들은 정치권력을 넘어서 기업과 시장기능의 양상에서도 등장하게 되었다. 기업의 노동자에 대한 횡포와 시장에서의 소비자에 대한 독과점을 통한 유통기업의 횡포 역시 현대의 아나키즘이 직면하게 된 새로운 투쟁을 요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등의 인간생명에 대한 위협에 대항하는 투쟁을 통해서 현대의 아나키즘은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즉 생명과 환경에 대한 보호의 운동 역시 현대 아나키즘이 직면한 중요한 운동의 방향이 되고 있다. 왜냐 하면 환경오염 역시 그 배후에는 강력한 기업과 개인의 욕구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20세기의 아나키즘은 현대사회의 대중이 직면하고 있는 생명환경의 오염과 그를 통한 고통에 대한 憐憫과 그 해결책의 모색마저 떠 안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아나키즘은 공동체주의에 토대를 두고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창조적 공동체를 조성해 가는 NGO운동, 전자민주주의의 도래를 염원하며 시작되는 "인터넷 정당"의 창당, 경제활동의 윤리적 환경과 조건을 표준화하려는 이른바 윤리 라운드(ER:Ethic Round), 주민들이 모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자는 생태마을운동의 전개 등에서 우리는 현대사회의 새로운 아나키즘운동 곧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와 상호부조라는 아나키즘의 고전철학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孔子思想의 아나키즘的 要素
가) 人間愛的 關心과 반패권주의적 理念
공자의 사상은 그가 생존했던 당시부터 특히 은둔적인 道家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고, 당대의 귀족들로부터 喪家집 개와 같다는 조롱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자의 태도는 민중을 사랑하는 자신의 포부를 밝힘으로서 그들의 비판과 조롱을 단호히 거부했다. 즉 공자는 [鳥獸와는 더불어 한무리<同群>가 될 수 없으니, 내가 이 人間의 무리가 아니면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라고 말하면서 대중의 고통을 외면하는 당시의 隱者들의 獨善主義를 비판하고, 고통을 감내해 가면서도 천하의 인민대중을 구제하는 일에 남다른 노력을 경주하였다.
즉 공자는 인간에 대한 사랑(愛人)으로 요약되는 仁을 많이 언급하면서도 그것을 적절히 구현한 경우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중을 널리 救濟하는 일에 관해서는 仁人의 경지를 넘어서 聖人이라야 구현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일은 堯舜과 같은 聖人도 쉽게 이루어 내지 못한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舜임금과 禹임금은 천하를 얻어 임금이 되었음에도 즐거움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높이 평가한다. 공자가 순과 우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그들이 覇權主義的인 권력의 욕구에 사로잡혀 인민을 억압하는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주의에 입각해서 정치본연의 인민의 행복에 공헌하는 善政을 베푼 인물들로 보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공자의 정치적 理想에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反覇權主義와 공동체주의와 상통하는 점이 있음 알 수 있다. 이러한 공자의 理想은 孟子의 王道政治에서 더욱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왕도정치의 이념은 이미 공자의 단계에서 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즉 공자가 殷나라 말엽의 文王이 영토의 三분의 二를 차지하고도 은나라를 섬긴 점이 바로 覇權主義가 아니 덕에 의한 정치<王道政治> 를 베푼 것이라고 칭송하는 데서 그러한 생각이 드러난다. 이러한 공자의 생각은 정치가 잘되고 잘못되는 것은 영토의 넓음에 있지 않고, 국가를 국민의 신뢰를 받게 통치하는데 있음을 강조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즉 그는 "양식과 군비 및 정부에 대한 백성의 신뢰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백성의 신뢰"라고 주장하는 점에서도 그가 추구하는 정치적 理想이 결코 권력을 지향하는 패권주의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공자의 이러한 정치적 이상은 맹자에게로 계승되어 패도를 止揚하고 왕도를 추구하는 이상으로 발전된다. 맹자는 당대의 齊宣王이 齊桓公과 晉文公의 힘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한 패권주의에 관해 설명해줄 것을 요구받자 "공자를 따르는 무리들은 齊桓公과 晉文公의 힘의 정치를 언급하기조차 꺼려했기 때문에 자신은 전해들은 바가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공자는 국가라는 체제를 긍정하며, 국가를 통해서 계층간의 질서가 확립됨으로서 공동체의 구성원간의 신뢰가 조성되기 때문에 공동체-- 이 경우 그것이 국가라 해도 좋다. --의 이익이 증진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국가는 결코 착취와 억압의 권력체계가 아니라 公共의 安榮과 질서를 수호함으로서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심지어 공자의 경우 국가라는 공동체를 단순한 이익집단이 아니라 혈연의 가족집단의 확장으로까지 생각한다. 국가의 통치자와 백성간의 관계를 가정의 아비와 자식의 관계로 파악하고, 그 화합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서 그러한 사고가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국가가 백성으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받아 부국강병을 추구해서도 안된다는 공자의 주장에서 우리는 그가 주장하는 국가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의 국가는 오늘날의 용어로 언급할 경우 공동체라는 용어가 절절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나키즘은 公共의 安榮과 질서를 수호하는 공동체를 결코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할 때 공자의 德治 禮治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주의(왕도정치)와 아나키즘간의 공통성과 동일한 理想型을 발견할 수 있다.
나) 平和主義 理念
서구인들의 묘지명에 흔히 사용되는 '영원한 평화'(pax perpetutau)라는 말에서 보이는 평화(peace)의 개념과 꼭 일치하는 유교의 개념은 비록 찾기 힘들지만, 그 개념을 사회적 갈등의 심화 또는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의한 사회적 혼란이 없는 상태,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의 번영이 유지되는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이런 의미의 '평화' 사상은 유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고 공자 역시 그러한 평화를 추구했다.
孔子가 생존했던 춘추시대는 주나라의 봉건적 질서가 무너짐에 따라 극도의 혼란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한 혼란에 직면한 공자는 주나라의 봉건적 질서를 국가 사회의 이상적인 질서로 파악하고, 그 질서를 옹호하고 재건하기를 염원했다. 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주나라의 국가체제는 결코 권위적인 覇權을 추구하는 체제가 아니다. 공자에 의하면 권력이 힘의 논리에 따라 행사될 때 그 체제는 더 이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보며, 덕치주의 곧 도덕적인 공동체를 추구하는 국가만이 진정한 국가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혼란 되는 원인을 그는 "예(禮) 악(樂) 정(征) 벌(伐)"이 더 이상 "천자(天子)"에게서가 아니라 "제후"(諸侯)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경우 천자는 결코 권력의 정점에 위치한 패권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정치가 패권을 추구하는 제후의 집단에서 나올 때 패권주의가 되며, 정치권력을 비정상적으로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질서의 근원이 천자에게서 나올 때 그 정치는 국리민복을 보장하는 정치가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정치를 공자를 비롯한 역대의 유가는 德治라 하였고, "제후"(諸侯)들에게서 나왔을 때 '覇道'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孔子 역시 당대를 "세상에 질서가 없다"(天下無道)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가 혼란되는 원인을 그는 "예(禮) 악(樂) 정(征) 벌(伐)"이 더 이상 "천자(天子)"에게서가 아니라 "제후"(諸侯)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보았다던 것이다.
또한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의한 전쟁의 사회적 파탄 말고도, 동일한 사회 안에서 통치를 담당하는 '군자'계층과 생산을 담당하는 '소인'계층 간의 불화(怨)와 갈등(不和)등에 대하여 공자는 상당한 우려와 염려를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공자 자신도 가끔 폭도들에 의하여 직접 생명의 "위협"을 당했음을 여러 번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인 위협들에 대한 공자의 해결책은 -법률적인 외재적인 '행정명령'政」이나 강제적인 처벌刑」에 있기보다는-인간의 도덕적 자율성에 호소하는 일이었다.
"행정명령「정」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잠시 벌을 면하려 할뿐이며, 도덕적으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덕(德)으로 이끌고 예(禮)로 다스리면 사람들이 도덕심을 갖게 되고 마음에서 받아들인다."라고 공자는 말한다. 따라서 공자에게는 사회적인 불화와 심각한 갈등을 해소시키고 평화와 화합을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선 각자의 도덕성을 발양하는 일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예' 또한 그것의 주요 功能은 바로 "자신을 닦아서 자기 주위의 지도적인」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일"과 더욱이 "자신을 닦아서 백성들까지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었다. (「憲問」, 14:42)
그리고 공자에 의하면, "자신을 닦는 일"修己」은 바로 '인(仁)을 이루어 내는 일이었다. '인'을 실현하는 길은 바로 각자가 자기의 입장을 미루어서 상대방을 절실하게 이해하여 자신에게 싫은 것을 상대방에게 하지 말라는 최소한의 실천행위'恕'」와, 내가 원하는 것이요 또한 상대방도 원하는 것이라면 내가 양보하여 상대방이 먼저 그것을 이루게끔 도우라는 최대한의 적극적 실천행위忠」, 즉 '충'과'서'를 통한 대화합(大和合)의 실현이었다.
이런 '인'의 발현을 통한 덕치가 바로 사회적 평화와 안정에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공자에 의하면, 한 국가 공동체가 안정되게 존속하려면, 물론 "충분한 군사력"足兵」, "풍요한 경제"足食」, 그리고 "백성의 신임"民信」을 모두 갖추어야 하지만, 만약 아주 부득이한 경우에는 대외적인 군사적인 문제보다는 대내적인 경제문제나 백성들과의 신임과 화합이 보다 더 중요하고, 그 대내적인 문제 중에서도 백성들과의 화합이 경제문제보다도 더 본질적이요 따라서 더 우선한다고 보았다. (顔淵」, 12:7).
공자에게는 이와 같이 한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이룩하는 문제는 결국 근원적으로는 통치를 담당해야 할 '군자'들로부터 백성들에 대한 '화합'을 이룩해 내는 일이었다. 이런 화합을 이루어내는 우선적인 과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주는 일, 즉 '민생'(民生)의 안정에 있었다.
『論語』에서 공자는 염구가 '전유'( 臾)라는 영지를 무력으로 침략하려는 정책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내가 듣기로는 나라를 가진 자「군주」란 봉토를 가진 자「귀족」는 적은 것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게 분배되지 않음을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불안함을 걱정한다. 대체로 균등하면 가난함이 없고 구르면 적음이 없고 안정되면(나라가)기울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공자는 위정자와 백성들과의 화합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위정자들이 다만 자기의 세력 확산을 위하여 남의 영지를 침략하거나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는 '공리'(公利)주의적인 정책의 추진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서 공자는 도덕성의 발양, 다시 말해, 덕치를 통한 백성들과의 화합과 조화만이 공동체의 평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공자는 공동체의 화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생산물의 균등한 분배가 생산 자체의 추구보다 더 본질적이라고 본 것이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의 만인들의 화합과 평화가 바로 공자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가까운 제자들에게 그의 이상적 삶이란 "노인들을 편안히 해주고 친구들이 신임해주고 어린이들을 가슴에 품어주는 일이다"(「公冶長」, 5;26)라고 말하였다. 요컨대, 공자는 당대의 엄청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지식인들에게 모두 도덕심을 발휘하여 공리주의를 극복하고 德治에 힘쓸 것이며, 또한 모두가 서로 균등하게 편안히 살면서 젊은이와 노인들을 아끼고 보호해주며 그리고 동료와 친구들 사이에 우애와 신의를 느끼게 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실현을 위한 평화의 윤리를 펼친 것이다.
다) 社會的 理想
공자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인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 도덕적인 이념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적인 인격수양으로서 내성과 그 수양의 사회적 실현으로서 외왕의 실천성까지를 요구하는 현실성이 강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까닭에 공자의 경우 실제적인 삶과 결부되지 않는 추상적. 비현실적인 지식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음을 본다.
이러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공자의 사상은 적어도 논어에 한정해 볼때 지혜 그 자체를 위해 지혜를 탐구한다든가 세계의 궁극적 원인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적인 지식의 탐구가 희박함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공자는 인간의 현세적인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 해결책을 강구하였기 때문에 초현세적인 대상<귀신>이나 죽엄의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다.
이처럼 그의 주된 관심은 바로 현세적인 것이고, 현세적인 인간의 삶을 바르게 이끌어 나가기 위해 모든 사회적인 인간관계를 비롯한 종교적인 의미까지를 지닌 제사의 문제까지도 논의하고 실행하였던 것이다. 그런까닭에 공자의 관심은 현세적인 인간의 삶과 연관된 방향으로 모아질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조수와는 더불어 한무리<同群>가 될 수 없으니, 내 이 인간의 무리가 아니면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라는 주장을 통해서도 확인되어 진다. 이처럼 공자는 인간의 현실적인 삶에 관심을 가졌고, 인간사회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뿐만아니라 그는 일생을 통해서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사회를 염원하였다. 그러나 그가 생존하였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주나라의 봉건적 질서가 붕괴됨으로서 사회적 혼란이 극도에 달하고 있었다. 봉건적 질서가 흔들리기 전까지만 해도 주나라의 사회적인 질서는 공자 자신에 의해 가장 이상적인 질서로 평가될 정도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까닭에 그는 주대의 사회질서를 이상시하고, 그 상태에로의 회귀를 위해 진력하게 되었다. 공자가 이처럼 주의 봉건적 질서를 지나치게 선호하였던 까닭에 그는 노예제 사회의 통치계급 곧 奴隸主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대변자라는 비판까지 받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견해에 대한 반론과 그가 실현하려던 사회가 결코 소수의 지배자에 의해 피지배계급을 대한 착취하는 사회가 아니었음을 밝히고, 나가서 그가 실현하려고 했던 사회적 이상 곧 이상사회를 그의 대동사상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아울러 그의 대동사상이 동아세아의 사상사에 미친 영향을 밝혀보기 위해 대동사상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고, 대동사상이 동아세아의 사상사에서 점유하는 위치까지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사회적 질서
사회의 기원에 대해 서경과 좌전은 민본사상적 관점을 제시해준다. 즉 사회의 성립은 하늘이 전체 민중의 뜻에 따라 그들의 지도자를 정해주어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해주는데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즉 {서경}에서는 [백성이 바라는 바를 하늘도 따른다]라고 했고, 좌전에서는 [하늘이 사람을 있게 한후 군주를 세워 백성을 이롭게 한다] 라고 했다. 춘추시대를 살았던 공자 역시 이러한 사회관을 가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공자 스스로 그러한 사회관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 다만 그의 사회적인 질서관을 살펴보면 그역시 그와같은 사회관을 신봉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고대의 정치. 사회적인 질서는 도덕적인 천의 의지가 실현되는 천명의 구현에 따라 성립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주나라의 봉건적 질서를 이상적인 사회질서로 신봉하는 공자는 그러한 질서의 최후의 근거가 되는 정치적 의미의 천명관의 신봉자였다. 그러한 천명관은 공자의 경우 뚜렷이 부각되고 있지는 않으나, 그의 정치. 사회적인 질서의식은 주나라 초엽에 확립된 천명관에 토대를 두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정치적인 질서의 근본인 군신상하간의 신분적 질서를 파괴하는 계씨를 비롯한 삼가의 참남한 행위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태도에서 사회적 질서를 수호하려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가 수호하고 확립하려고 하였던 사회적인 질서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사회는 지배자인 상위자와 피지배자인 하위자로 구성된다. 이경우 상위자는 학식과 인격적인 감화력을 지니고서 하위자를 다스리고 가르킴으로서 지배하는 자이고, 하위자는 상위자의 다스림에 따르고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 자들이며, 이러한 상하의 질서가 분명히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에 의하면 이러한 사회질서의 확립이 사회적 안정의 가장 급선무라는 것이다.
사회적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는 그의 사고는 주의 봉건체제가 급속히 붕괴되어 가던 당시의 사회적인 위기현상을 반영해준다. 당시의 사회적 위기는 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주나라의 예교적인 가치관의 급격한 변화와 그로 말미암은 사회적 무질서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공자의 눈으로 볼때 사회적 무질서의 원인은 지배층의 부패와 질서의식의 타락에서 연유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 결과 공자는 당시의 사회질서의 회복은 지배계층의 의식을 바로잡는데서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자신에게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무엇보다도 먼저 상하의 질서를 규정하는 명분의 확립으로부터 시작하겠다고 술회하였다.
2) 신분관
공자가 인간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 관건으로 생각하며 중요시한 명분은 당시 사회의 신분적인 질서를 의미한다. 공자는 당시의 사회가 이러한 신분적인 질서를 무시하면서 하위자가 정해진 자기의 직분을 뛰어넘어 직권을 남용하는 월권행위를 바로 모든 사회적 무질서의 근본임을 지적한다.
뿐만아니라 사회신분적인 질서의 회복없이는 사회의 안정에 필수적인 질서의 확립이 불가능함을 역설하면서 스스로 신분에 합당한 규범의 실천을 위해 타인으로부터 [위사람에게 아첨을 한는다]는 의심까지도 받아가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고, 상하의 신분적인 질서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상하신분관을 이렇게 강조한 나머지 공자는 당시의 상하질서 관념을 무조건적으로 신봉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피지배계층의 권익을 억압하고 지배계층의 이익을 옹호해준 봉건적(노례제적)인 체제의 대변자로 비난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의도는 사회적인 제도와 질서의 운영이 궤도를 벗어나 비정상적으로 운영되는 무질서를 비판하고, 그것을 시정하려 하였지, 단순히 보수적인 입장에서 상하의 복종적인 질서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이점은 공숙문자가 자신의 가신인 선?을 천거하여 자신과 같은 신분에 오르게한 사실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고, 자신과 상대의 신분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아래 사람으로서 위사람에게 인물을 천거함으로서 직분을 다 하였다라는 의미에서 문이라는 시호의 법에 합당하다고 평가한다.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의 신분에 비추어 볼때 출신이 천했던 제자인 재?옹을 인군의 지위에 오를 만한 덕을 지닌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때 공자는 사회신분의 변혁까지를 긍정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종래 공자를 노례주계급의 이익에 대한 옹호자로 파악하는 시각에 대한 반증의 예가 될수 있겠다. 만약 공자가 단순한 보수적인 복종의 질서만을 강조한 사상가였다면 위의 두가지 경우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구현해 보려하였던 사회적. 신분적인 질서는 어떤 것이었을 까? 그는 자신이 구상하는 사회적인 질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언급하고 있는 군자와 소인의 의미는 사회적인 계급적 차이를 뜻하는 경우도 있고, 도덕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유형을 구분하는 의미도 내포한다. 어느 경우 이든지 이들 개념은 적어도 한 인간에 대한 평가의 척도가 될 수 있는 덕을 염두에 두고 구분하는 인간관 임에는 틀림없다.
공자는 적어도 이처럼 인간을 평가할 때 덕이라는 객관적 기준을 설정해두고 그 기준에 따라서 인간의 가치와 비중을 평가하였다. 그리고 군자는 자신의 이익보다 사회전체의 공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한는 인간류형으로 파악된다. 그런까닭에 공자는 사회신분에 있어서도 군자가 사회적인 지도적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도덕적 평가 기준에 따라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인간과 지도를 받아야하는 위치에 있는 인간을 구분하고, 그러한 기준에 따라서 사회적인 신분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인간형 중에서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생각하는 유형은 두 말할 필요없이 군자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정치. 사회적인 지도자는 군자의 덕을 갖춘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공자의 경우 사회적인 지도층에 있는 상위자에게 지나치게 지적인 권위를 비롯한 모든 권위를 인정함으로서 그들의 권위를 절대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예건데 그가 [보통 사람 이상은 높은 도리를 말할 수 있지마는 보통 사람 이하는 높은 도리를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경우라든가, [그 지위에 있지 아니하면 그 정사를 논의하지 아니한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렇지만 공자는 사회적 신분은 각 개인의 인격을 기준으로 결정됨이 마땅하고 상하의 위계자는 상호 인격을 존중하는 예의로서 상대를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경우 이처럼 사회적 질서를 도덕적인 인격을 토대로 하여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사회적 신분의 변혁까지도 유동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사회적 안정
이상적인 정치에 의한 이상사회의 실현이라는 측면은 유교의 가장 근본적인 관심 가운데의 하나이다. 그런데 유교에서 생각하는 이상사회가 어떠한 것이냐에 따라서 그러한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이론들도 결국 그 목표가 되는 이상사회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사상가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본성<인의>에 따라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우며, 서로 신의를 지켜서 살아가는 공동체적인 사회를 이상적인 인간사회로 생각하고, 그 구현을 염원하여 왔다.
그러나 비록 도덕적인 사회의 건설이 유교의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이지만, 인간의 삶 자체가 경제적인 여건의 해결없이 영위 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공자의 관심 역시 경제적인 조건의 해결에 모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까닭에 공자는 도덕적인 교화에 앞서서 경제적인 생활의 안정이 선행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러한 공자의 사고는 맹자에 이르러 인간적인 삶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도덕의식의 함양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구체화 되어 도덕적인 이상정치를 표방하는 그의 인정론도 사실상 공정한 토지의 분배로 부터 시작됨을 역설하기에 이르게 된다.
공자 역시 국민의 경제적인 생활의 안정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실제로 그는[가난하면 원망이 없기 어렵다]라고 까지 말한다. 그러나 그의 경우 경제적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생산의 증대보다 분배의 문제와 관련된 정치적 공평성을 더 문제삼는 태도를 견지한다.
즉 공자에 의하면 분배적 정의의 실현이 생산성의 증대보다 더 시급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듣건데 나라와 집안<가>을 경영하는 자는 재정의 불족한 것을 근심하지 않고, (분배가) 균등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안정되지 않음을 걱정한다고 들었다. 대개 균등하면 가난이 없고 화합하면 불족이란 없으며 안정되면 위태로움이 없는 법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공자의 생각은 그가 생존하였던 사회가 오늘날과 같은 공상업적인 사회가 아닌 농경사회 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타당성이 인정될 수 있다. 사회적 안정에 필수적인 경제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분배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공자의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과 같은 산업사회에서도 노사간의 갈등과 빈부의 극한적인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때 여전이 중요한 관점임에 틀림없다. 공정한 분배를 통한 경제적 안정이 이룩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적 안정은 기대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유학의 사회적 관심은 역시 도덕성의 확립에 모아지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인 삶의 기본적인 조건의 해결을 역설하면서도 그것은 이상적인 삶을 성취하기위해 요구되는 조건일 뿐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며, 도덕적 교화가 따르지 않으면 인간이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는 점을 강조한다. 아울러 그는 도덕적인 사회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국민에 대한 규범<인륜>적인 교육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범법자가 생기게 되고 그럴 경우 자연히 형벌과 사형까지도 시키지 않을 수 없게되어 자연히 백성을 해치고, 죽이는 결과에 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공자의 사회사상은 도덕성을 전제로한 이상사회론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4. 孔子의 大同社會觀
앞에서 살편 본바와 같은 사회관을 가지고 보다 이상적인 사회를 염원하는 입장에서 공자가 제시한 이상사회에 관한 이념이 그의 대동사회관이다 . 그리고 공자 이후로 유교에서 운위되는 대동사회는 각시대의 유가의 사상가들에 의해 구상된 유토피아논 곧 이상사회론 이다. 그리고 유토피아논은 유교에서만 운위되는 것이 아니고 일찍부터 동 서양의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제시되어 왔다.
단지 사상가들에 따라서 이상적인 사회를 고대에서 찾는냐 아니면 미래사회에서 찾으려 했는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 그리고 그러한 유토피아논의 근거는 바로 인간의 의식속에 내재되어 있는 본성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간존재가 미래지향적 존재라는 점에서도 유토피아의식의 가능성은 인간의 의식의 심층부에 내재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단지 그러한 의식들이 어떠한 인간사회의 모습을 예상하고 그려졌는냐에 따라서 이상사회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을 뿐이다. 서양사회의 경우 그러한 이상사회를 주로 정치적 평등과 계급적 신분이 타파된 민주적 사회와 경제적인 안정과 복지가 구현되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보아 유토피아를 구상해 왔다.
이러한 유토피아논의 대표적인 사상가는 Platon<>, F. Bacon<>, T. More<>, B. F. Skinner <>등이다. 이들의 유토피아논에도 절제 청교도적 정신, 대자연에 대한 통제력, 정의등의 도덕적 덕목들이 실천될 수 있는 이상사회를 구상하고 있으나, 이들에 의해 구상된 이상사회는 동양적인 그것들과 비교해 볼때 아무래도 정치. 경제. 사회적인 자유와 권리등의 보장을 보다 이상적인 상태로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서양적인 이상사회론과 비교하여 동양의 유토피아논은 어떠한 성격을 갖는지를 그 전형이 되는 대동사회론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대동사상은 [예기]의 대동설 뿐만 아니라 묵자의 상동론, 장자의 제동론 등에서도 엿보이는 중국 고래의 유토피아사상 이다. 이 사상은 인간이 천지는 물론 만인과 하나가 되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상은 19세기 이후 중국에서 강유위(1858-1927)의 대동주의와 담사동()의 인학, 손문(1866-1925)의 삼민주의 등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갖는 평등주의사상으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우 한말과 일제식민통치기에 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길을 모색하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보다 이상적인 사회를 강구하였던 박은식의 대동사상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역사상에 나타난 이들 대동사상들은 비록 동아세아적 이상사회론 곧 유토피아논적 성격을 그 보편성으로 내포하고 있으나 결코 그 성격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들 대동사회론은 정확히는 그 명칭은 동일 하나 그 성격은 각자의 시대적 특성과 이들 사상을 정립한 사상가들의 사상적 성격이 반영됨으로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발전하였다고 함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대동사상은 동아세아의 이상사회론으로서 유가의 대표적인 경전인 {예기} <예운>편에 등장하는 이념이다. 이 사상의 성격을 규명하기에 앞서서 먼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예기} <예운>편에 의하면 대동사회는 공자가 그의 제자인 자유(언)에게 당시 사회의 어지러움을 탄식하며 자신이 동경하는 하은주의 삼대를 염두에 두고 밝힌 이상사회에 대한 언급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도가 행해질 때는 천하가 모두 전체사회(공)를 위한 것이었다.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뽑아서 책임을 맡기고 서로 신의를 지키고 친목을 도모한다. 자기 어버이만 사랑하거나, 자기 자식만 사랑하지 않는다. 늙은이는 돌보아 주는데가 있고, 젊은이는 써주는데 있고, 어린이는 길러주는데 있고, 홀애비, 외로운이 불구명자는 다 봉양해주는데가 있으며, 사내는 짝이 있고 계집은 돌아갈데 있다.
재물은 땅에 버려두지는 않지만 반드시 자기의 사유로 축적하지 아니하며, 힘은 자신으로부터 나오기를 원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런까닭에 음모가 없고 도적이 생기지 않아서 집집이 바깥 대문도 닫지 않는다. 이런 사회를 대동이라 한다] 위의 내용되로 라면 대동사회는 무엇보다 대도가 구현된 사회라는 것이다.
공자를 비롯한 유가의 사상가들에 의해서 언급되는 "도"는 그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운위되지만 인간사회의 규범과 관련해서 언급될 경우에는 바로 천지의 도에 근거를 두는 인간이 지켜야 할 규범적 도임에 틀림없다. 환언하면 그것은 하늘과 땅의 도인 경우 모든 생명에게 생명을 갖게해 주는(광생. 대생의) 대덕이며, 해와 달의 밝음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순환하는 계절의 질서이며, 귀신에 의해 운용되는 길흉의 원리로서 유가는 이러한 도를 지공무사한 도로 파악하고 있다. #1) {중용}
공자는 이러한 도가 실현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가 확립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한 도는 인간의 집단생활을 떠나서는 고려될 수 없는 사회적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2) 그런까닭에 공자는 인간의 도리를 강조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아울러 인간이 보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위해 구현해야할 이러한 도란 결국 한 개인의 안녕에 국한된 사적인 것일 수 없으며,
그것은 사회라는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고려하고 구상되는 이상(도)일 수 밖에 없다. 그런까닭에 이러한 이상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체 전체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추구도 인간의 노력과 인간중의 능력과 인격이 뛰어난 자의 지도를 통해서 더욱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능력이 탁월하고 심성이 어진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서 그를 구심점으로 하여 모든 사람이 자신의 혈연에만 국한되지 않는 인간애의 정신을 발휘할 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장치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대동사회인 것이다. 공자를 비롯한 유가의 사상가들은 이처럼 인간애와 그것의 사회적 실현을 염원하지만 결코 묵가에서 처럼 혈연적인 동기애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랑의 실천이 모든 보편적 사랑의 바탕이 됨을 강조한다.
결국 위의 <예운>편의 내용에서 [자기 어버이만 사랑하거나, 자기 자식만 사랑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자신의 혈육을 사랑해야 하지만, 혈육의 사랑에만 국한되지 말고 더욱 넓은 범위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인 것이다. 공자를 비롯한 유가의 학설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바로 인인 것이다. 특히 공자는 인을 자신의 핵심사상으로 정립하면서, 그것을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구현되어야 할 최상의 규범임을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이 실천될 때 비로소 이상적인 삶이 실현될 수 있고, 이상적인 사회가 구현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이상적인 삶은 혈연을 넘어서는 사랑과 함께 삶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재화의 충족 곧 경제적인 생활의 안정이 이루어져야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도 이러한 점을 간파하였던 까닭에 [천승의 나라를 다스리려면 일처리를 신중히 하여 백성의 신뢰를 받으며, 국가의 재정을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국가를 경영함에 있어서 국가의 재정을 절약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직접적으로 국민<백성>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웃사람이 절제를 하지 못하면 비록 백성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도 실제로 아무런 혜택을 주지 못하게 된다. 결국 국가재정을 절약하여 국가경제를 튼튼히 하는 것은 국민의 경제적인 생활을 안정시키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지름길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공자의 경우 이처럼 윗사람 곧 정치. 사회적인 지도자의 절제와 절약을 강조하는 만큼 경제적인 부를 증대시키는 방법 곧 산업의 진흥에 대한 관심이 미약하다. 그의 경우 인정 곧 이상적인 정치를 베풀면 자연적으로 인접국으로부터 인구가 유입된다고 생각하며,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방법을 유입인구의 증가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비록 소극적인 정도이지만 공자도 인구의 증가 이후에 산업을 장려하여 백성의 경제적인 부를 증대시켜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한다.
다만 그는 세부적인 산업진흥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사상가들의 경우 사회. 경제적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국민총생산의 증대보다 분배의 문제와 관련된 정치적 공평성을 더 문제삼는 태도를 견지한다.
이러한 공자의 관점은 인간적인 삶을 저해하는 경제적 빈곤이 자원의 부족이나 경제적 생산량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기 보다 주로 잘못된 정치와 가진 자의 수탈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길은 적극적으로 부의 원천을 늘려 나가는 것보다 재물을 적절히 관리하고, 올바른 정치를 실행함으로서 공평한 분배와 가진 자들의 수탈을 금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공평성이 도달되면 [재물은 땅에 버려두지는 않지만 반드시 자기의 사유로 축적하지 아니하며,
힘은 자신으로부터 나오기를 원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지는 않는] 이상적인 사회가 이루어 지며, 그와같은 사회에서는 빈곤이 퇴치되기 때문에 사회적인 범죄의 문제도 자연히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가 바로 대동의 사회 곧 공자를 비롯힌 유가가 염원하는 이상사회라는 것이다.
5. 맺음말
공자는 인간의 현세적인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 해결책을 강구하였던 공자는 현세적인 인간의 삶과 연관되지 않는 논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공자의 관심은 현세적인 인간의 삶과 연관된 방향으로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는 일생을 통해서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사회를 염원하였다. 그 결과 그는 대동사회라는 유토피아적인 이상사회를 제시하였다.
상하신분적 질서의 확립을 강조함과 아울러 공자는 이상적인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사회적 안정에 필수적인 경제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분배의 공정성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과 같은 산업사회에서도 노사간의 갈등과 빈부의 극한적인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점과 현대의 민주정치가 추구하는 양당정치도 이미 인민에 대한 공복으로서 봉사하고 헌신하기 보다 권력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이 되어 있다. 국회마적도 정치적인 우두머리가 공천권을 웅켜지고 정치적인 꼭두각시를 양산하는 중우정치로 전락시키고 있음을 감안할 때 공자의 사상은 여전이 중요한 관점임에 틀림없다.
공자는 노자나 장자와는 달리 주나라의 봉건체제를 이상적인 정치형태로 보아 예치주의적 입장에서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던 까닭에 심지어 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이 그렇게 비판받은 것은 역대의 공자사상의 계승자들이 그 이념을 오도한 결과와 현대의 이데올로기 논자들의 왜곡 때문이었음을 살펴보았다.
아나키즘 역시 그 본질이 왜곡된 점에 있어서 공자사상과 궤도를 같이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중심사상인 인사상과 공동체주의 이념인 대동사상은 권력욕을 배격한 측면에서 아나키즘과 유사성이 찾아짐도 보았다. 특히 인간애의 관심과 반패권주의적 이념, 평화주의적 측면, 공통체주의를 표방하는 대동사상등에서 아나키즘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자사상의 중심이 되는 인의 사상이라든가 애민사상은 결코 패권주의나 권력을 추구하는 측면이 없을 뿐만 아니라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패권주의적인 체제옹호론을 배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사회의 혼란을 누구보다 원치 않으며, 그러한 혼란의 과정 속에서 억압받고 수탈 당하는 대중의 아픔을 보아왔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횡포를 격렬하게 비판 배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대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사회운동과 자연보호운동 등 역시 공자의 생명애호정신과 상통점이 찾아질 수 있다. 특히 공자의 사회사상의 근본이념이라 할 수 있는 대동사상은 공동체주의로서 뿐만 아니라 통치권자의 권력욕구를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아나키즘과 공통적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고찰을 통해서 볼 때 공자사상(대동사상)과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공동체주의와 생명애호의 이념은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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