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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아나키즘

에코아나키즘

by 마리산인1324 2007. 7. 16.

 <안티뉴스> 2007-01-16 (화) 11:59

http://www.antinews.or.kr/bbs/board.php?bo_table=304&wr_id=40

 

 

에코아나키즘(Ecoanarchism)

 

글쓴이 : 신비인

 

에코아나키즘은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한다. 하나는 생태, 환경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지배와 권력관계의 문제이다. 즉 생태 문제는 과학과 기술문명이 만들어 낸 산업사회의 권력관계는 그냥 놔둔 채, 인간의 자연에 대한 물질적, 도덕적, 영적인 태도의 변화만을 의도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Murray Bookchin은 외연적, 개념적으로는 자연생태론에 대립해서, 그리고 내포적으로는 환경주의에 대립해서 자신의 에코아나키즘을 제시한다. 북친의 에코아나키즘은 19세기 러시아의 지리학자요, 유명한 아나키스트였던 페터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고전적 아나키즘과는 달리, 에코아나키즘은 페미니즘적 이상과 공동체주의적 비전을 포함한다.

 

북친은 자신의 생태사상을 사회생태론(학) 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사회생태학이라 하면 엄밀하게 학적 토대가 마련된 생태학의 하부 분과쯤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더욱이 북친은 환경, 혹은 생태문제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반대했다.

 

북친이 심층생태주의와 자신의 입장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1985년 무렵부터이다. 근대 기계적 세계관의 부정, 생태중심주의적 접근, 사회적 위계와 지배 관계의 철폐 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에코아나키즘은 심층생태론과 여러모로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에코아나키즘은 자연과 사회의 일원성과 연속성을 주장한다. 인간과 자연이 평등한 수평적 연대를 유지했던 원시 자연사회의 다원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의 평등을 생각한다.

 

에코아나키즘은 생태계 위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사회적이라는 형용사를 생태학에 첨가함으로써 사회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에코아나키즘은 비인간에서 인간을, 자연에서 사회를 도출하는 작업에서 불변의 법칙성을 찾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은 사회에 생태윤리, 즉 자기선택과 진화를 통한 자유와 개체성의 보장에 근거한 상이성과 참여의 원리를 제공해주며, 지배와 위계질서를 비교, 변경하는 패턴을 제공하고, 기존의 위계질서와 지배를 부정하도록 해준다. 따라서 에코아나키즘은 과정의 철학이며, 참여의 철학이라고 주장된다.

 

북친의 에코아나키즘적 유토피아는 언뜻 보면 로데릭 내쉬(Roderick Nash)가 그려낸 '아름다운 정원 풍경'과 유사한 점이 많다. 하지만 북친은 1974년의 책에서 미생물학자 르네 두보(Rne Dubos)를 최초의 에코아나키스트로 기술하고 있다. 두보와 북친의 견해는 결코 같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견해는 놀랍도록 일치한다. 북친은 생태학을 보다 근본적인 사회학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북친은 크로포트킨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재의 억압적인 산업 자본주의의 세계를 반위계적 사회관계에 근거한, 탈중심적-민주적 공동체로 변형시켜야"하며, 여기서는 "태양에너지와 같은 생태기술, 유기 농업, 인간적인 규모의 산업이 지배적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북친만이 이 과격한 에코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에 의지해 있는 것은 아니다. 심층생태론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급진생태론자들 역시 크로포트킨의 공동체주의, 탈도시화, 산업의 탈중심화, 대안적 기술, 유기 농업, 성장의 억제, 새로운 자연주의적 감수성이라는 이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북친의 에코아나키즘은 아주 의식적으로 사회생태론적 토대 위에서 "생태사회"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환경윤리학적으로도 그는 클락(John Clark)과 더불어 비인간중심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환경윤리의 차원에서 보면 북친은 두보와 다른 입장이다.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말을 빌리자면 "두보의 입장을 인간생태학으로 부른다면, 북친의 그것은 사회생태학(에코아나키즘)이다.

 

북친은 인간의 거주 환경이나, 지구의 자연생태계에 대한 관리, 보호, 보존의 이념은 나쁜 것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보수적이며, 인간중심적이라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사회관계에 대한 생태학적 혁명이 선행되지 않으면 어떤 환경운동도 환경관리주의, 환경관리윤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장기간의 지배와 억압적인 인간 정신과 체제인데, 그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억압과 지배를 포함한다. 인간과 자연의 갈등은 인간과 인간 간의 갈등이 확대되어 인간과 자연의 갈등이 발생한다. 생태운동이 모든 측면에서의 지배의 문제를 포괄하지 않는다면 우리 시대의 생태운동의 근원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생태운동이 단순히 오염 통제나 환경보존을 위한 통제라는 개혁적 수준에 머문다면 보다 광범위한 혁명의 개념으로 다루지 않고, 환경주의(environmentalism)에 머문다면 자연적, 인간적 착취라는 기왕의 체제에 봉사하는 운동이 되고 말 것이라고 갈파한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로항장곡)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본 바탕은 변함 없고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
버들 가지는 백번 꺽여도 가지를 새로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