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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아나키즘

생태주의에서 에코아나키즘으로 /구승회

by 마리산인1324 2007. 7. 16.

<한국아나키스트연대>

http://homini.tripod.com/1.htm

'고대신문' 1999년 11월에 게재 

 

 

생태주의에서 에코아나키즘으로

 

구승회

 
I.

생태주의는 한가지 색으로 다양한 분광적(spectrum) 현상을 보이는 용어이다. 이는 아주 소박한 자연보존론자, 기술지향적인 환경보호론자, 형이상학적인 생명중심주의자, 혹은 반문명주의를 선언하는 과격한 전체론자(holist)를 망라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생태주의는 어떤 하나의 이념을 지향하는 생태사상의 흐름이라기보다는, 환경사상 생태사상에 기초한 '이념의 총체'로 이해될 수 있다.


60년대 중반 미국에서 등장한 '환경문제'는 오늘날 '생태문제'라는 용어로 더 짙은 녹색 이미지를 풍기면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는 정보, 문화라는 말과 더불어 21세기에도 인류 최대의 화두(話頭)일 것이다. 60-70년대 환경사상은 주로 환경적 관심에서 출발하였는 바, 공해, 오염, 보존, 보호 등 인간중심적 관심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한 자연환경을 지킬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으나, 최근에 와서는 생활양식으로서의 생태적 관심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즉 인간과 자연의 관계 양상만이 아니라, 삶의 양식, 세계관의 문제로 되었으며, 21세기에는 불투명한 '환경-생태 위기'라기보다는 생태지향적 삶을 위한 '자연스러운 생활세계의 문제'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II.


환경.생태문제에 직면한 인류의 삶에 대한 전망을 살펴보자: 우선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규모의 경제에서 생태효율성을 강조하는 생산-소비방식으로 변할 것이다.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급속한 탈중심화가 일어날 것이며,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붕괴되어 생활세계는 '연대와 결속'이라는 공동체적 삶의 준칙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이미 공동체주의 이론과, 무수히 많은 공동체적 삶의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경쟁, 타협, 합리성이 공적 도덕의 기초였던 데 반해, 생태주의 시대에는 연대, 결속, 관용이 중요한 생태도덕적 표준이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생태계 위기로 인한 도덕의 구조변화만은 아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그로 인한 문화의 파급력으로 인하여 한편으로는 경제와 사회, 정치 시스템을 급속히 파편화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사회세계는 급속히 지구화, 세계화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공적 영역에서 세계화가 지속될수록, 사적인 생활세계는 더욱 '탈중심화', '지역분산화'할 것이고,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는 생활양식은 생태계 위기 시대의 다문화주의적인 공존의 법칙이 될 것이다.


인간은 지구 생태계 내에서 아주 특별한 지위, 즉 생태계와 환경을 책임져야 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 그리고 인간은 지구상에 계속해서 존속해야 된다는 윤리적 요청을 갖는다. 우리가 현재의 문명을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인류의 보편적인 위기에 대한 근원적인 처방을 얻으려면 '소비를 최소화하는 일' 말고 달리 대안이 없다. 그러나 소비를 줄이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욕망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시스템 전반을 "최소소비 사회"에 알맞게 변경해야 한다. 생태적, 환경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 적합한 통치시스템, 권력행사, 생산과 소비행태의 변화는 그러나 지금까지의 인간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자연 재생산 활동으로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필자는 과학과 기술과 자본의 강력한 유혹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에코파시즘으로 되지 않을 대안으로 '에코아나키즘( koanarchismus)'을 제안하고자 한다.


III.


에코아나키즘은 맑스의 철학이 그러했듯이 사회혁명의 기대지평일 뿐, 현실적 목적지평 위에 있지 않다. 맑스에게 맑스주의란 하나의 현실적 운동이었지, 제도 정치의 틀을 마련하는 체제나 이념은 아니었듯이, '에코아나키즘은 현실적인 사회운동이다.' 포스트모던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전일적인 세계 설명원리란 없다. 그 어떤 거대 담론도 더 이상 '희망의 원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에코아나키즘은 기본적으로 상호부조에 의한 자주관리 사회를 염두에 두고 있다. 자연을 배려하는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자연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직접 책임지는 생산양식을 선택하는 이른바 '협동교환과 참여의 경제'이다.


사람들은 거대국가를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국가가 없다면 살인, 강도, 강간이 더 많을 것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국가가 폭력을 독점함으로써 생기는 전쟁, 권력에 의한 착취, 추방, 소유권 박탈, 민족살해,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체르노빌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에코아나키스트는 이제 좀도둑이 있는 아나키 공동체를 택할 것인지, 체르노빌과 히로시마, 아우슈비츠가 있는 중앙집중적인 거대국가를 택할 것인지 묻는다. 국가는 이제 필연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에코아나키즘은 대의정치의 불투명한 늪을 지나고, 시장자본주의의 높은 언덕을 넘어서려는 사람들에게 든든한 '이성의 지팡이'가 되고자 한다. 자본의 언덕을 넘어 견소포박(見素包朴)한 아나키 공동체에 들어선 사람들은 탈개성적이고, 기계화된 관계로부터 순수하게 사회적이고, 협동적인 인간관계를 복원할 것이다. 개인은 욕망으로 가득 찬 사적 주체가 아니라, 사회적 개인으로 될 것이다. 경쟁과 계약에 대한 책임이라는 자유주의적 가치보다는 연대와 결속이라는 공동체주의적 가치가 존중될 것이다. 이는 결국 관용과 인권 보장에서 친밀성의 확대로의 도덕의 구조변동을 초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