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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아나키즘

크로포트킨 [Kropotkin, Peter]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1.
크로포트킨 [Kropotkin, Peter]
정식 이름은 Pyotr Alekseyevich Kropotkin.

1842. 12. 21(구력 12. 9) 모스크바~1921. 2. 8 모스크바 근처 드미트로프.

러시아의 혁명가, 지리학자, 무정부주의 운동의 일급 이론가.

 

개요

크로포트킨
지리학·동물학·사회학·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세속적인 출세의 길을 버리고 혁명가의 생애를 택했다.

 

초년기와 무정부주의로의 전향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크로포트킨 공의 아들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상류층의 자제들만 다니는 수습기사단(修習騎士團)에서 교육을 받았다. 1년 동안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부관으로 근무했다. 1862~67년 육군장교로 시베리아에 배속되어 군무 이외에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고 지리학적 탐사활동에 열중했다. 자신의 탐사결과에 기초하여 산맥구조선(山脈構造線) 이론을 전개했고, 이 이론은 동아시아의 지도작도법을 수정하게 했다. 또한 빙하시대에 아시아와 유럽에서의 빙하작용에 관한 연구들을 발표했다.

 

연구결과를 즉시 인정받은 크로포트킨에게는 과학자로서 대성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1871년 러시아 지리학회의 회장직을 거절한 후 귀족세습권을 포기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시베리아 복무중에 그는 이미 모든 정부는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무정부주의 이론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872년에는 스위스의 쥐라 산맥에 있는 시계제조업자들을 방문했는데 이들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한 자발적 결사체에 감탄하여 자신의 자유주의적 신념을 확고히 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 혁명단체에 가입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농민들에게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1874년 경찰의 대량검거 때 투옥되었으나 2년 후 극적으로 탈출하여 서유럽으로 달아났으며, 서유럽의 급진파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후 몇 년 동안 스위스에서 지내다가 188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혁명가들에게 암살당한 후 러시아 정부의 요구로 스위스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폭동을 주동했다는 날조된 혐의로 체포되어 3년 동안 감금되었다. 1886년에 석방되어 30년 동안 영국에서 살다가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자 고국으로 돌아왔다.

 

혁명 철학

장기간의 망명생활 동안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자유주의적 철학을 피력한 영향력 있는 저서들을 집필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어느 반항자의 이야기 Paroles d'un révolté〉(1885)·〈러시아와 프랑스의 감옥에서 In Russian and French Prisons〉(1887)·〈빵의 정복 The Conquest of Bread〉(1892)·〈들판·공장·작업장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1899)·〈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Memoirs of a Revolutionist〉(1899)·〈상호부조 Mutual Aid〉(1902)·〈러시아 문학 Russian Literature〉(1905)·〈1789~93년의 프랑스 대혁명 The Great French Revolution 1789~1793〉(1909) 등이 있다. 그가 종종 밝혔듯이 그의 목표는 과학적 기반 위에 무정부주의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는 〈상호부조〉에서 그는 적자생존이라는 다윈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종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고 주장했다. 풍부한 실례를 들어 사교성이 동물세계의 모든 수준에서 지배적인 특징임을 증명하면서 인간 세계에서도 상호부조가 예외적이기보다는 일상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원시부족, 농촌 마을, 중세의 코뮌에서부터 강압적인 관료제 국가의 대두에도 불구하고 상호지원을 계속 실천하고 있는 현대의 각종 협동체(노동조합·학회·적십자사 등)에 이르기까지 자발적 협동결사체의 진화과정을 추적했다. 그는 현대사의 추세는 사람들이 지배자·성직자·군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그들의 창조적인 기능을 개발할 수 있는 지방분권적·비정치적·협동적 사회로의 복귀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유재산과 불평등한 소득 대신 물자와 용역의 무상분배가 이루어지는 '무정부적 공산주의'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크로포트킨은 무정부적 경제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임금의 원리를 필요의 원리로 대체했는데 그것은 각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판단하여 노동에 참여했건 안 했건 관계없이 필요한 물건을 공동의 창고에서 꺼내 쓰도록 하는 원칙이었다. 크로포트킨은 사람들이 공업과 농업에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함께 하는 사회를 마음 속에 그렸다. 각 협력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은 20~40대에 안락한 생활을 하기에 충분한 하루 4~5시간을 일하며 분업 대신 여러 가지 일을 즐겁게 함으로써 중세의 도시생활에서처럼 인격의 균형이 잡힌 유기적인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보다 행복한 생활을 준비시키기 위해 청소년교육을 강조한 그는 정신적·육체적 능력을 골고루 개발시키는 '통합교육'을 실시하여 균형잡힌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철학). 또한 수학·과학의 기본원리와 인문학의 학습을 중요시하면서도 책만 가지고 가르치기보다는 적극적인 야외교육을 통한 실험관찰학습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방법은 현대의 교육이론가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자신이 직접 겪은 형무소 생활을 토대로 크로포트킨은 형벌제도의 철저한 수정을 주창하기도 했다(→ 형벌학). 그는 형무소는 범죄자를 교화시키기는커녕 잔혹한 벌을 가함으로써 범죄 습성을 굳혀주는 '범죄의 온상'이라고 말했다. 상호부조를 바탕으로 한 미래의 무정부사회에서 반사회적 행동은 법과 형무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이해와 공동체의 도덕적 압력에 의해서 해결될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과학자와 윤리학자의 자질에다 혁명조직가와 선전가의 자질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애로운 마음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폭력의 사용을 용인했다. 또한 무정부주의의 투사로 활약하던 초년에는 인민의 반항본능을 일깨우기 위해 말과 글을 통한 선전활동을 보완할 목적으로 '행동을 통한 선전'인 폭동행위를 열렬히 지지했다. 영국과 러시아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창시했으며, 프랑스·벨기에·스위스의 무정부주의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중에 그가 연합국을 지지하자 많은 동지들이 그를 떠났다. 그의 결정은 독일의 전체주의가 사회의 진보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은 무정부주의의 반군사적인 전통을 위배한 처사였으며, 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 그가 거의 반세기에 걸쳐 구축했던 운동은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러시아로의 귀환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함께 사태는 호전되었다. 75세의 고령인 크로포트킨은 서둘러 조국으로 돌아왔다. 1917년 6월 망명한 지 40년 만에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임시정부의 교육장관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퉁명스럽게 거절했다. 1917년 그가 국가 없는 사회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코뮌과 소비에트(병사·노동자 위원회)들이 자발적으로 구성되자 자유주의적 미래에 대한 그의 기대는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의 감격은 비통한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혁명의 매장이다"라고 그는 친구에게 말했다. 크로포트킨은 혁명이 자유주의적 방법이 아닌 전체주의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를 볼셰비키가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년을 윤리학사의 집필에 몰두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1921년 모스크바 근처 드미트로프에서 죽었다. 수만 명의 추종자가 참가한 그의 장례식은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이 러시아의 수도를 누빈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크로포트킨의 생애는 자신이 일관성 있게 주장한 높은 윤리기준 및 사상과 행동의 결합을 예증한 것이었다. 그에게서는 다른 많은 혁명가들의 이미지를 손상시킨 이기주의나 이중성 또는 권력에 대한 탐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동지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를 "단검과 폭탄에 불과하다"라고 매도한 사람들에게도 찬탄을 받았다.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은 그만이 톨스토이가 주창했던 삶을 살았다고 말했으며, 오스카 와일드는 자기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진정 행복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크로포트킨이라고 말했다.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95973#

 

* 크로프토킨 논문과 책 목록 Kropotin's Writings

http://army_of_the_ppl.tripod.com/thereadingroom/a.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