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동 [Proudhon, Pierre-Josep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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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 1. 15 프랑스 브장송~1865. 1. 19 파리. 프랑스의 자유론적 사회주의자, 저널리스트.
개요
초기생애와 교육
프루동은 가난한 통 제조업자 겸 선술집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9세 때 쥐라 산맥에서 목동이 되었다. 고향에서 보낸 유년기와 농민이었던 그의 선조들은 평생 동안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이상사회에 대한 그의 전망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수공업자나 농민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그린 것이었다. 그는 빈곤을 고귀하게 생각했으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결코 사치를 추구하지 않았다. 프루동은 어린시절부터 명민함을 드러내어 장학금을 받고 브장송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부유한 상인 아이들로부터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 가난뱅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향학열에 불탔으며, 집안의 경제적 파탄으로 견습 인쇄공(나중에는 식자공)이 될 수밖에 없었을 때도 그 열은 식지 않았다. 인쇄소에서 기술을 배우는 동안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를 독학했으며, 인쇄소에서 여러 지역의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과 사귀었고, 같은 브장송 출신의 이상적 사회주의자인 샤를 푸리에와 만나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후에 프루동은 다른 젊은 인쇄공과 마찬가지로 직접 인쇄소를 차렸으나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그가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인쇄소의 경영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이때 그가 프랑스어로 쓴 1편의 글은 외국어로 번역하기에는 난점이 있었으나 플로베르, 생트 뵈브, 보들레르 같은 여러 작가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838년 프루동은 브장송 아카데미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할 수 있었다. 이때의 여가를 이용해 그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최초의 주요저서 〈재산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a propriété?〉(1840)를 발표하여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 재산법). 여기서 프루동은 "나는 무정부주의자"라고 선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반적인 의미의 재산에 대해서는 공격하지 않았으며,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는 재산만을 공격했다. 반면에 다른 의미의 재산, 즉 농부가 자신이 일할 토지를 소유할 권리 또는 장인(匠人)이 도구나 작업장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는 자유의 보존을 위해 본질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 성격이 공상적이든 마르크스주의적이든 그는 모든 공산주의가 개인으로부터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아버림으로써 자유를 파괴한다고 비판했다.
1840년대 7월 왕정의 다소 반동적인 분위기 속에서 프루동은 가까스로 정부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으나 1842년 〈재산이란 무엇인가?〉의 후속편이자 더욱 선동적인 저서 〈소유자에 대한 경고 Avertissement aux propriétaires〉를 출간하면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최초로 받은 이 재판에서 판사가 그의 주장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죄를 물을 수 없다고 양심적으로 판결함으로써 그는 유죄를 면했다. 1843년 프루동은 수상운송회사의 사무 책임자로 일하기 위해 리옹으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직조공들이 조직한 비밀결사의 회원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산업사회에서는 노동자들에 의해 공장이 운영될 것이며, 노동자들은 폭력혁명보다는 경제적 행동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원시적 무정부주의의 주장을 전개했다. 이러한 견해는 프랑스의 자코뱅적인 혁명 전통의 변형이었다. 프루동은 이들의 정치적 집중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했으나 그래도 이들의 견해를 수용하여, 나중에 그의 고유한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상호부조주의(Mutualism)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리옹의 노동계급 지도자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프루동은 리옹의 무명 노동계급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이자 여성해방 운동가인 플로라 트리스탕을 만났으며, 파리를 방문하여 카를 마르크스, 미하일 바쿠닌, 러시아의 사회주의자이며 작가인 알렉산드르 헤르젠 등과 친교를 맺었다. 1846년 그는 사회주의 운동의 조직문제에 있어서 마르크스의 중앙집중적인 견해를 반대하면서 마르크스와 대립하게 되었다. 얼마 뒤 프루동이 〈경제적 모순 또는 빈곤의 철학 Système des contradictions économiques, ou philosophie de la misère〉(1846)을 발표하자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 La misère de la philosophie〉(1847)을 집필하여 프루동의 오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무정부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 간의 역사적 대립의 시작이었다. 또한 프루동 사후에 마르크스와 프루동의 제자 바쿠닌 사이의 갈등은 제1인터내셔널이 분열되는 상황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프루동은 1848년초 리옹의 일자리를 그만두고 파리로 가서 2월부터 〈인민의 대표자 Le Représentant du peuple〉라는 무정부주의적인 논조의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848년의 혁명기와 1849년 1월에 그는 모두 4종류의 신문을 편집했다. 맨 처음 나온 신문은 어느 정도 정기적으로 발행되었으나, 4개 신문 모두 정부의 검열에 의해 차례로 폐간되었다. 프루동은 1848년 혁명기에 소수파로 있었는데, 그는 이 혁명에 견고한 이론적 기초가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1848년 7월 제2공화정의 제헌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그는 주로 혁명의 와중에서 태동하여 결국 나폴레옹 3세의 독재로 귀결된 전제적 경향을 비판하는 데 몰두했다. 한편 상호 신용과 노동 전표에 기초한 인민은행을 설립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는 생산에 소비된 노동시간에 따라 임금을 주는 제도였다. 프루동은 결국 제2공화정의 대통령인 루이 나폴레옹을 비판한 죄로 투옥되어 1852년까지 감옥에 있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 쿠데타를 일으킨 뒤 다음해 스스로 황제 나폴레옹 3세 자리에 올랐다. 그는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수감생활을 했으며, 투옥기간중에 결혼하여 첫 아기를 얻었다. 옥중에서 그는 A. 헤르젠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그가 마지막으로 발행하던 신문을 편집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이 시기에 〈혁명가의 고백 Confessions d'un révolutionnaire〉(1849)·〈19세기의 혁명관 Idée générale de la révolution au ⅩⅨe siècle〉(1851) 등의 주요저서를 집필했다. 〈19세기의 혁명관〉은 국경선이 사라지고 국가가 소멸하고, 코뮌 또는 지역조직에 권력이 분산되며, 자유계약이 법을 대신하는 세계연합사회를 묘사함으로써 그의 이상사회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1852년 프루동은 석방된 후 제국 경찰로부터 끊임없이 방해를 받았다. 사회주의 사상을 전개한 저서는 발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투자자를 위한 시시한 글이나 쓰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858년 그는 출판업자를 설득하여 〈혁명과 교회에서의 정의를 위하여 De la justice dans la Révolution et dans l'église〉(3권)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교회의 선험적 전제에 인도주의적 정의론을 내세웠다. 이때문에 책이 모두 몰수되고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벨기에로 망명함으로써 결석재판에서 더 높은 형량을 선고받았다. 그는 1862년까지 벨기에에 남아 있으면서 민족주의의 비판과 세계연방사상을 발전시켰다. 이는 저서 〈연합사회의 원리에 대하여 Du Principe fédératif〉(1863)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파리로 돌아온 뒤 프루동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상호부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파리의 수공업자들은 1865년 그가 죽기 직전에 창립된 제1인터내셔널의 주된 세력이 되었다. 프루동의 마지막 저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 De la capacité politique des classes ouvrières〉(1865)는 그의 임종 직전에 완성되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노동계급의 해방은 경제적 투쟁을 통한 노동계급 스스로의 과업임을 주장했다.
평가
프루동이 무정부주의를 전개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이미 그 이전에 무정부주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윤곽이 잡혀 있었다. 가령 영국의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의 글과 그의 영향을 받은 퍼시 비셰 셸리의 시 등에 무정부주의 사상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프루동이 고드윈이나 셸리의 저서를 읽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의 독특한 무정부주의(정부 없는 사회)·상호부조주의(신용은행 설립을 위한 노동자들의 조직)·연방주의(중앙집중주의적 정치조직의 부정) 등의 사상은 개인적 경험에 의한 프랑스 혁명 사상의 독창적인 재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루동은 자신이 하나의 사상체계를 정립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당을 건설하려는 사상을 혐오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이 나중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다소 역설적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후에 바쿠닌(그는 언젠가 "프루동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라고 언급한 바 있음)과 러시아의 작가 페테르 크로포트킨이 발전시킨 무정부주의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러시아의 인민주의, 1860년대 이탈리아의 급진민족주의, 1870년대 스페인의 연방주의, 프랑스에서 발전하여 나중에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큰 세력을 형성한 생디칼리슴 등의 다양한 사상적 조류에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초까지 프루동은 프랑스 노동계급의 급진주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늘날에도 탈(脫)집중주의적인 사상이 어느 정도 재현되고 있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우가 있다.
G. Woodcock 글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206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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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프루동 아카이브
http://www.marxists.org/reference/subject/economics/proudhon/index.htm
* Larry Gambone-Proudhon and Anarchism 1996.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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