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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닌 [Bakunin, Mikhail Aleksandrovich]

1814. 5. 30(구력 5. 18) 러시아 프레무히네~1876. 7. 1(구력 6. 19) 스위스 베른.

러시아의 작가·혁명가·무정부주의자.

 

바쿠닌
19세기 유럽의 사회주의운동은 그와 카를 마르크스사이의 이념적 반목으로 수년 간 혼선을 빚게 되었다.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은 트베리(지금의 칼리닌) 지방 소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4명의 누이와 남동생이 있었는데 아우와는 나이 차이가 많았다. 바쿠닌은 목가적인 전원 속에서 애정 넘치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를 졸업한 뒤 폴란드 국경에 배속되었으나 그의 반항적인 기질은 이무렵 벌써 발휘되고 있었다. 1835년 바쿠닌은 직무를 유기한 채 소속부대를 이탈했고 가까스로 체포만을 면했다. 5년 동안 바쿠닌은 고향 프레무히네에서 피히테헤겔의 철학을 연구하는 한편, 비평가 벨린스키, 소설가 투르게네프, 정치평론가 헤르젠 등으로 이루어진 모스크바의 문예 서클에 출입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적 견해가 아직 혼란상태에 있었던 1840년 미하일은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독일로 떠난다. 베를린에서 청년 헤겔 학파에 매료된 그는 1842년 드레스덴의 급진주의 신문에 다음과 같은 경구로 끝을 맺는 최초의 혁명적 신조를 밝힌다. "파괴의 열정은 동시에 창조의 열정이기도 한 것이다." 러시아 정부의 귀환명령을 거부한 바쿠닌은 여권을 회수당했고 스위스와 벨기에에 잠시 체류한 뒤 프랑스에 정착했다. 파리에서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카를 마르크스 등 당대의 저명한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교분을 쌓았으며 폴란드인 망명가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과 슬라브 민족해방운동의 연계를 구상하게 된다(→ 프루동). 바쿠닌에게 1848년 2월혁명은 최초의 가두투쟁 경험이 되었다. 며칠간을 열렬히 시위에 동참했던 그는 동부 유럽의 혁명기운을 진작시킬 목적으로 독일을 거쳐 폴란드를 방문한다. 바쿠닌은 1848년 6월 슬라브 민족회의에 참석했으나 회의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프라하 포격으로 중단되고 말았고 그해말 독일의 안할트쾨텐에 은신하면서 최초의 혁명강령선언인 〈슬라브 민족에 고함 Aufruf an die Slaven〉을 작성한다(→ 범슬라브주의). 부르주아 계급을 소멸해가는 반혁명세력으로 간주한 그는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전복시켜 중부 유럽에 슬라브 민족의 자유연방을 결성할 것을 촉구했다. 바쿠닌은 농민계층, 특히 무력저항의 전통을 지닌 러시아의 농민계층에 의지해 그들을 다가올 혁명의 중추세력으로 받아들였다.

 

소극적인 도피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1849년 5월의 드레스덴 폭동을 주선했으나 검거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작센과 오스트리아에 이어 러시아 정부에 인도되었다. 1851년 5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테르파울 요새에 유폐된 바쿠닌은 한 경찰간부의 제의를 받아들여 기이한 내용의 〈고백록 Confession〉을 집필한다. 1921년에야 세인들에 알려지게 되는 〈고백록〉은 과거의 무절제한 행위에 대한 반성과 굴욕적인 관용의 호소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약간의 반항의식과 함께 독일인을 향한 증오심과 당시 차르의 호감을 사고 있던 슬라브 민족주의의 신념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고백록〉은 바쿠닌의 상황을 호전시켜주지 못했다. 그는 3년 동안 더 수감되었고 건강의 악화 속에서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다시 3년을 보내야 했다. 1857년 미하일 바쿠닌은 마침내 석방되었다. 당국으로부터 시베리아 이주허가서를 얻어낸 그는 폴란드 상인의 딸과 약혼도 했지만 결혼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당시 동 시베리아 지방의 총독은 바쿠닌의 어머니와 사촌지간이었는데 1861년 그가 통상을 이유로 아무르 강 유역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연고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태평양 연안에 다다른 그는 일본으로 가는 미국 상선에 몸을 실었고 미국을 경유하여 항해할 수 있었다.

 

1861년말 런던에 도착한 바쿠닌은 1847년 파리에서 헤어진 뒤 소식이 끊겼던 동료 알렉산드로 헤르젠과 재회하게 된다. 〈종(鐘) Kolokol〉의 편집장이었던 헤르젠은 런던의 발명가들 사이에서 명망을 쌓아가고 있었다. 14개월간의 런던 체류는 헤르젠과의 결별로 파국을 맞았고 그들 사이의 의견대립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헤르젠은 젊은시절의 열정을 뒤로 한 채 소장 급진주의자 체르니셰프스키와 논쟁을 일삼고 있었으며 바쿠닌의 무분별한 언동과 금전적인 무책임성을 용납하기도 어려웠다. 1863년초 폴란드에서 무장봉기가 발생했다. 바쿠닌은 폴란드인 지원부대를 이끌고 발트 해로 향했으나 겨우 스웨덴까지 진출했을뿐 그해 여름을 온통 소일해야만 했다. 이탈리아는 1864년부터 4년 동안 바쿠닌의 체류지가 되었다.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평생을 헌신하게 되는 무정부주의 원칙들이 정립된 곳도 이곳이며, 다양한 비밀결사들로부터 일부는 실제이고 일부는 가공적인 혁명조직망이 형성된 곳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바쿠닌의 만년에 일어난 가장 중대한 사건은 카를 마르크스와의 이념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제네바에 정착해 있었던 그는 유럽 노동자당의 연합체인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다. 제1인터내셔널의 목적은 자본주의 사회를 범세계적인 사회주의 연방으로 통합시키는 데 있었다. 바쿠닌은 자신의 추종자들로 비밀혁명전위대인 '사회민주주의동맹'을 결성함으로써 인터내셔널 내부에 세력을 구축했다. 인터내셔널은 바쿠닌과 마르크스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거물을 포용할 수 없었고, 1872년 마르크스는 헤이그 대회에서 의견차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일종의 음모를 통해 바쿠닌주의자들의 축출에 성공했다. 양 세력 간의 불화는 향후 여러 해 동안 유럽의 혁명운동을 분열시켰다. 바쿠닌이 저술한 〈압제의 제국 독일과 사회혁명 L'Empire Knouto-germanique et la révolution sociale〉(1871) 및 〈무정부주의 사회 Staat en anarchie〉(1873)는 마르크스와의 논쟁을 다룬 것들이다. 확고한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폭력을 통한 기존질서의 파괴를 역설했던 바쿠닌은 정치적인 통제, 중앙집권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과 같은 마르크스의 원칙들을 거부하고(자신의 권위는 예외였지만) 독일 취향의 사상과 조직구성에 반대한 뒤 러시아 농민계층에 구현된 저항의식을 내세웠다. 미하일 바쿠닌의 무정부주의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대립명제('반', 헤겔 변증법의 제2단계)로서 비로소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궁핍한 말년을 스위스에서 보내면서 바쿠닌은 중부와 동부 유럽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즈음 청년 혁명가 S. G. 네차예프와의 관계는 바쿠닌의 평판에 오점을 남겼는데 염세적·반인륜적인 네차예프가 혁명이념을 저버리려 했던 조직내 동료를 살해하고 도피함으로써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바쿠닌은 러시아·폴란드·세르비아·루마니아 망명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선언문을 기초하고 혁명조직의 결성을 추징했다. 건강이 악화 일로로 치닫고 친구들의 보조금에 의지하여 생계를 이끌어나가는 곤경 속에서도 무정부주의의 신념이 약화된 적은 결코 없었다.

 

미하일 바쿠닌은 조제프 프루동과 함께 19세기 무정부주의의 주창자로 평가되고 있다. 논리적인 이론체계가 마련된 것도 아니고 의욕에 찬 방대한 저술들은 미완성인 경우가 많았지만 바쿠닌의 명성과 매력은 유럽 곳곳에 숱한 추종세력을 형성시켰다. 영국·스위스·독일에 적은 수이지만 무정부주의 조직이 구축되었고 프랑스에서는 비교적 프루동주의에 가까웠지만 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들이 세력을 과시했다. 이탈리아 및 스페인에서 바쿠닌주의적 무정부주의 운동은 계속 융성했으며 특히 1936년까지 스페인의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의 후예들이었다.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40006#

 

 

* 바쿠닌  

George Woodcock-Bakunin biography.hwp

* 바쿠닌 저작들

http://dwardmac.pitzer.edu/Anarchist_Archives/bakunin/BakuninCW.html

 

* 바쿠닌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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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li Diemer-Bakunin vs. Marx.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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