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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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3 오후 12:31:03
한국 농업, 21세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1)
"신자유주의로도 제국주의로도 설명 안 되는 농업정책의 딜레마"
<프레시안>은 '환경과 농업을 살리는 건강한 농지제도 개편을 위한 연석회의(농지제도 연석회의)'와 공동으로 최근 농지법 개정을 둘러싼 찬반 논란을 통해 촉발된 우리나라 농업정책의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그 바람직한 개선책을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지난 6월 임시국회에서 농지법이 일부 개정되면서 농업정책의 미래를 둘러싼 논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프레시안>은 이번 농지법 개정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공론화에 불을 지폈던 우석훈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경제학 박사)의 글을 두 번에 나눠 싣는다. '농지제도 연석회의'와 함께하는 '희망을 찾는 농업 살리기' 기획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편집자>
한국의 농업, 21세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1)
농지법 개정 한 주일 만에 허점 찾아낸 투기꾼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공조로 6월 임시국회에서 41건의 법안이 상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0개의 법안이 통과됐다. 사건의 중대함에 비해 별로 시선을 받지 못하던 법안 하나가 이 중에 포함되었는데, 이게 '비농민의 농지소유 허용'의 내용을 담고 있는 농지법 개정안이다.
이 법안은 실질적인 논의가 전개되지 못한 상황에서 1년 정도 국회 근처에서 표류하고 있었고, 발표된 뒤 파주, 포천에서 여주, 이천을 지나 충청도 일대를 건너 이 땅의 끝인 해남과 구례에 이르기까지 작게는 다섯 배 많게는 열 배 정도 농지 가격을 올려놓았다. 뒤늦게 '농지제도 연석회의'라는 전농과 민주노동당을 포함하는 시민단체 연대회의가 결성돼 이 법안의 저지에 전력투구했는데, 농지법 자체의 통과를 막지는 못하고 보존지역과 도시 인접지역의 농지투기를 어렵게 하는 선에서 법안을 처리되게 만들었다.
이제 농업과 농지를 둘러싼 다음 논의는 농업기반공사가 주체가 될 '농지은행'의 운영방안이다. 농지은행이 실질적으로 농지 트러스트와 같은 선진국 형태가 될지, 아니면 그야말로 비농민이 농사를 짓는다는 법률적 명분만 만들어주는 '농지 세탁'의 기구로 전락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벌써 며칠 사이에 농지투기 세력들은 이 새로운 법률안의 맹점을 벌써 찾았고, 충청권의 비토지거래허가구역인 충북 진천, 음성과 충남 보령, 서천 등이 틈새시장이라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시작했다. 수도권의 비토지거래허가구연인 가평, 이천, 여주, 양평, 옹진, 양천 같은 곳도 '미래 투자가치'가 충분히 있다면서 투기를 부추기고 있다. 이들 투기세력 앞에선 농림부도 시민단체도 그리고 농민단체도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백면서생일 뿐이다.
정부도 약간의 양보를 했고, 시민단체도 워낙 뒤늦게 나서 타협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막는 선에서 타협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 주일 만에 개정 농지법의 허점을 찾아낸 농지 투기세력들의 전문성은 정말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처음 개정안을 낼 때에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직접 나서서 앞으로 비농민들도 농지를 소유하게 됐다고 온 국민이 알도록 발표했지만, 막상 그렇게까지 전면 개방한 것은 아니라고 할 때에는 정부의 그 누구도 내용을 상세히 발표해주지 않았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농지제도 자체가 갖는 소소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농업이라는 것이 21세기에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그 성격 규정이다. 비농민도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하자는 정부의 농지법 개정안이 이 시기에 그렇게 중요하게 대두된 것은 쉽게 표현하면 "헬리콥터로 농사를 짓자"는 정부의 농정 기조에 따른 것이다. 비유를 사용하자면 헬기로 농사지을 곳은 얼마 안 되니까 나머지 땅은 아파트를 지어 판다면 '국토의 효율적 이용'이 가능할 것이라는 게 노무현 정부의 농업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21세기 한반도에서 헬기 농업이라는 것이 옳은 정책일까?
충청남도 아산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어울려 손 모내기를 하고 있다. ⓒ농지제도 연석회의 |
농업은 생태적 안전망의 보루인가, 마지막 투기처인가
제주도의 개방의 역사는 우리나라가 현재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970년대 개발시대에 중앙정부는 산업만이 살 길이라고 했다. 물론 제주도에서는 별 산업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군사정부의 시대가 끝나고 1990년대부터 제주도에는 '관광만이 살 길'이라는 궤변이 휩쓸고 갔다.
40개에 달하는 골프장이 제주도로 몰려갔고, 도로를 열심히 놓았고, 제주도에는 해마다 오는 그 태풍 속에서도 유사 이래 한 번도 없던 홍수가 이 도로들로 인해 생겨났다. 이 기간 동안 소위 '외지인'의 토지 보유가 급격히 늘었고, 60% 이상의 토지가 외지인의 소유로 전환됐으며, 그 중 20% 정도가 서울시민의 소유라고 한다. 실제 제주도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이 기간이 갈등이 기간이고, 발전과 번영이 아니라 상대적 몰락과 해체의 기간에 더욱 가까웠다. 제주 아라중학교에서 시작된 제주도의 친환경급식은 '생명 제주'라는 거대한 질문의 시작이었지만, 이것만으로 문제를 풀기는 여전히 어렵다. 제주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성공할 경우 그 혜택은 대부분이 오히려 지가상승으로 인해 1990년대 이후에 헐값에 제주도 땅을 사들인 외지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고, 제주도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할 것이다.
이런 문제가 21세기에 한국 농업이 겪고 있는 여러 어려움의 한 실정이다. 농업을 산업으로 볼 것인가 혹은 "국토생태 보존사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노동력의 버퍼' 역할로 볼 것인가. 이런 여러 가지 질문 속에서 현재의 농업은 현실적으로는 농지를 택지로 전환시킬 수 있는 마지막 투자처-혹은 투기처-로 전락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의 이데올로기와 WTO라는 통상의 이데올로기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갈등의 현실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최전선인 셈이다. 농지를 개발지로 전환해 토지수용을 받거나 택지로 판매하는 것은 그 어떤 벤처나 특수산업보다도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길이다. 하루만 미리 알 수 있으면 큰 돈을 벌 수 있는 증권이나 경마가 갖고 있는 최소한의 가정도 필요 없다. 개발이 가능한 농지를 사들이고, 정부와 지방정부에게 개발을 요구해 개발하도록 만드는 것은 적어도 2004~2005년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고소득 사업 방식이고, 증명되고 입증된 '불패의 신화'를 갖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투기 경제'에서 발생하는 '이득'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발생한 '이윤'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지대'는 토지의 농업생산성에 의해 결정되지만, 우리나라의 농지 가격은 얼마나 농사를 짓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가, 즉 정부 표현대로 '한계농지'에 가까울수록 높아지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도로가 날 만하거나 기업도시가 생겨날 확률이 높을수록, 달리 말해 '농업진흥지역'에 포함되지 않아 고립되어 있고 또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땅에 더욱 가깝고 농사를 짓기 어려울수록 농지가격이 높아지는 기현상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은 투기를 하면 생활이 나아질 수 있지만, 이러한 방식으로는 '국민경제'가 튼튼해지지 않는다는 구성의 오류가 지금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관료 사회가 튼튼한 것은, 정치인들은 부패해도 관료들은 부패하지 않았다는 믿음이 긴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지금 관료들을 믿기 어려운 것은 실제로 농업정책에 대해 가장 상부기관 격이던 재경부의 부총리를 비롯한 많은 고위 관료들이 선의든 혹은 고의든 농지투기를 했고, 이런 의혹들이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속았다"인 셈이다. 비영농인이 농지를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간단한 원칙은 비영농인은 '투자'를 위해 농지를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투기'를 위해 보유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추곡수매라는 보조금이 존재하는 상태에서도 수익률 1%를 내기 어려운 농업이 '투자'를 유치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들어오는 돈은 그야말로 99% 투기 목적이다. 그래서 농지 보유를 비영농인에게 개방하기에는 더 많은 정책적 안전장치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여러 사람들이 주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만으로도, 미 제국주의 이론만으로도 농업은 설명되지 않는다
농업에 대해 우리나라에는 딱 두 가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 정부의 이데올로기는 편하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그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는 미 제국주의 이론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방향은 다르지만,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는 WTO라는 매우 특별한 국제기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문제와 관련돼 있다. 정부의 이데올로기는 우리나라는 통상 국가이고, 수출을 통한 공산품의 교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이므로, 농업을 개방하고 다른 상품에 대한 수출로 경상수지 흑자를 만드는 길만이 국가가 부강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규모농'이라는 특별한 장치가 덧붙어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 농민의 상당수는 WTO를 미국이라는 특별한 제국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일종의 미국의 하부조직 정도로 이해한다. 그래서 WTO의 농업 개방을 미 제국주의의 명령이라고 이해하고, 따라서 이들로부터 농업을 지키는 것은 단순한 농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지키는 일이고 여기에서부터 일종의 '민족 농업'이라는 담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갖게 되는 이데올로기 구조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농업의 복합성은 신자유주의만으로 혹은 이에 대한 정반대의 민족농업 담론만으로는 잘 환원되지 않는다. 여기에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농업이 갖고 있는 국토생태에서의 '생태 안전판'으로서의 기능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을까? 농지가 아파트로 바뀌었을 때 벌어지는 생태계 교란의 장기적 기능이나 혹은 골프장으로 바뀌었을 때 심지어는 공장 지역으로 전환되었을 때의 복합적인 효과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벼농사라고는 하지만, 다양한 형태의 논이 지역별로 혹은 권역별로 어느 만큼의 생태계 보존기능을 하는지 혹은 어느 정도의 안전효과를 발생시키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논이 아파트로 바뀐다면 생태계의 종다양성이 심각하게 떨어질까? 아파트에도 쥐와 바퀴벌레가 살고, 또 사람이 살아야만 생존이 가능한 다양한 곤충과 동물들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농약을 심하게 쳐서 벼와 보리 외에는 살고 있지 않은 생태계보다 오히려 아파트가 더 많은 종다양성을 기록할 수도 있다.
여기에 우리나라 농업이 보장해주는 '식품안전'에 대해서도 선험적으로 '우리 것이 안전할 것이다'라는 말 외에는 확실한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 식료안보 혹은 식량안전이라고 표현하는 소위 food security에 대한 지수화도 거의 이뤄져 있지 않다. 잔류 농약란의 최소기준이 과연 적합하게 설정된 것인가, 그리고 가공식품에서의 화학첨가제들의 실제 보건효과는 어떠한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웰빙'이라는 상표를 달고 수입되는 외국 농산물의 식품산업에서의 비율도 잘 파악되고 않은 상황에서 미세 성분의 기능까지 요구한다는 것은 조금은 과도한 요구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안전할 것이라고 믿고 먹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농업과 농업 관련 부문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어느 정도의 고용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을지 혹은 이러한 고용전환이 사회적으로 유리하고 가능할 것인지도 정책적으로 검토된 바 없다. 다만 인구통계에 근거해 농민 고령화가 문제라는 단편적인 평가만이 농업이라는 특별한 산업의 고용구조에 대해 알려진 거의 전부다.
중국에서는 농민에 대해 소득세를 비롯한 국세를 경감해주는 정책 방향이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고, 일본에서는 어떻게 '친환경'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물량보조에 더해 새로운 보조금 정책을 시행할 것인지 연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추곡수매'라는 형태로 진행되던 농업 부문에 대한 보조금을 어떻게 '농촌지역' 개발에 대한 '건설 보조금'으로 전환할 것인지에 연구가 집중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어떻게 농업에서 안전하게 철수할 것이냐는 문제와 미 제국주의의 민족침탈에 대해 어떻게 농업을 지킬 것이냐는 문제가 대립하는 동안 농업이 갖는 다양한 생태적이며 사회적인 효과들, 그리고 21세기 한국 경제에서 농업이 가질 수 있는 소위 '버퍼'의 역할들에 대한 논의는 숫제 뒷쪽으로 빠져 있는 셈이다. 농업 부문이야말로 지나친 현대와 오래된 현대가 정면으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지만, 정작 21세기 한국에서의 농업이 가질 수 있는 기능과 위상에 대해서는 논의를 시작하지도 못한 형국이다.
그 상황에서 '경자유전'을 실질적으로 포기하는 정부의 농지법 개정안이 제기된 셈이고, 이 작은 제도의 변화가 농업에 대한 무관심의 안전핀을 건드린 셈이다. 좋든 싫든 농업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이데올로기만으로 21세기의 한국 농업은 설명되지 않고,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대립만으로 새로운 방향이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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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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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5 오전 10:57:51
한국의 농업, 21세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2)
농업정책, 국민적 논의는 이제 시작이다
농업을 살리기 위한 사회적 흐름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 논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초점을 잡아야 할 것이다.
첫째는, 농지를 투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점에 국민들이 동의해야 한다. 농업이 일종의 사회적ㆍ생태적 안전판 역할을 한다면, 아직도 '한계농지'부터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현 제도에 대해 다양한 수정과 보호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이건 1990년대 일본의 '리조트법'이 만들어냈던 10년간의 경제 장기공황으로부터 상당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투기도 하고, 또 어떻게든 지역에 시설물을 투자해서 관광으로 한 나라의 국민경제가 좋아질 수 있고, 또 사람들도 만족한다면 그 방향으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대공황을 격발시킨 1929년의 플로리다 해안에 대한 투기에서부터 가깝게는 일본의 리조트와 골프장 러쉬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투기가 국민경제를 안전하고 건전한 방향으로 유도한 적이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두 번째는, 농업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보조금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건 일반적인 산업 논리의 이윤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지불비용'과 같은 것이다. 심지어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수십 헥타르-우리나라의 규모농은 6헥타르를 목표 크기로 하고 있다-에서 헬기로 농사짓는 미국 농민들도 직불제와 같은 다양한 형식의 보조금의 수혜를 받고 있으며, 유럽으로 넘어가면 가격보조, 물량보조, 소득보조 등 WTO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힘껏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 21세기의 새로운 정책 방향이다. 신자유주의적 이해방식에 의하면 이 유럽이나 미국의 농민들도 모두 퇴출 대상이지만, 그렇게 함부로 농업에서 철수하는 선진국은 없다. 규모를 줄이거나 약간의 조정은 있지만, 참여정부의 농정처럼 전면적으로 농업에서 철수하고, 심지어 농업에 지급되던 보조금을 '건설산업 보조금'으로 전환하는 예는 없다.
쉽게 말해, 추곡수매에 지급되던 정도의 금액을 생태보조금이나 친환경농업 직불제 같은 방식 혹은 도시빈민 귀농프로그램 지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환한다고 하면, 우리나라의 경우도 21세기의 세계적 흐름인 생태농업 방식으로 전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WTO 내에서 농업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이유로 7만 호의 규모농을 제외하면, '각자 알아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농업 부문의 보조금을 농촌지역 도로와 아파트 건설에 지원하는 참여정부의 농정은 야만에 가깝다. 이 상태에서 음식 생산과 유통을 잘못하면 일벌백계를 하겠다는 '식품안전기본법' 논의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농업 정책과 괴리된 식품 정책은 뿌리가 없고, 세계적인 통합 흐름에도 맞지 않는다.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의 친환경농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쌀의 경우는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경우 농약으로 농사짓는 관행농에 비해 생산성 하락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유기농 논쟁은, 유기농이 경제적으로는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지만 생산성이 줄어 국민을 전부 먹여 살릴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수입할 수밖에 없다는 논의에 의해 주도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최소한 쌀에 관한 한 생산성의 급격한 하락과 같은 기술적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쌀 재배유형별 경영성과 비교 > |
(단위 : 원/10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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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유기재배 55농가와 무농약재배 33농가를 대상으로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협력을 받아 2003년 7월 28일부터 8월 15일까지 조사한 결과임. |
농업 전략을 새로 수립하자
우리나라의 농업 정책은 지나치게 관료에게 집중돼 있다. 물론 이 때의 관료란, 이미 정부에서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대해지고 스스로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농협과 또 다른 자기이익 그룹인 농업기반공사와 같은 국가 기관들을 포함해서 일컫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IMF 신봉자에 가까운 재경부, 왜 농업이 어려운지를 설명하기에 급급한 농림부와 산하기관들, 그리고 대규모 관행농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농후계자 그룹의 이해관계만으로 21세기 대한민국의 농업은 잘 설명되지 않고, 또 사회적 논의를 포괄적으로 담아낼 수 없다.
여기에 덧붙여 현 정부가 들어선 뒤 새로운 이해단체로 지역개발을 담당하는 지방자치단체가 앞 다퉈 세우고 있는 지역의 개발공사들도 문제다. 물론 이들의 뒤에는 지역의 대규모 토지보유자와 외지의 비농민 토지소유자들이 숨어 있다. 농림부 관료들이 토지투기를 목적으로 정책을 수립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미 자신의 목소리를 독자적으로 내기 시작한 지역 정부와 그 뒤에 숨은 토호들의 이해는 대다수 국민들의 경제적 이해와 궤를 달리하고 있다.
적어도 친환경농업을 뒷받침하고 있는 20만의 도시 생활협동조합원들은 소비자로서 농정에 참여할 수 있는 훌륭한 파트너이고, 이들은 실제 오랫동안 훈련된 소비의 안전판들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민족농업론자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한 개방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해를 체계화시킬 수 있는 통로가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토생태라는 국가의 또 다른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그룹이다. 국민일 수도 있고, 시민일 수도 있고 혹은 다음 세대라는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대변할 수 있는 그룹이 필요하다.
어렵지만 이렇게 다른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논의구도와 정책구도가 필요하다. 답이 없는가? 물론 지금처럼 '규모농만이 살 길이다'라고 무조건 6헥타르 정책을 불도저처럼 밀고 나간다면 정말 농업에는 답이 없다. 모든 농촌이 관광으로 잘 살 수 있다고, 그나마 얼마 남지 않는 보조금의 여력을 전부 도로 만들고 번듯한 건물 몇 개 짓는데 사용해서는 정말 농민은 물론 농촌지역에 대해 답이 없다.
여기서 몇 가지 외국 모델을 참고할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의 국민투표를 통해 '친환경농업' 원칙을 수립한 스위스가 한 가지 참고대상이 될 수 있고, 우리 식으로는 식약청을 중심으로 환경부와 농림부를 통합해 광우병 파동을 친환경농업 전환으로 극복한 영국의 데프라(DERFA: Department of Environment, Food and Rural Affairs)도 또 하나의 참고 사례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스위스형이나 영국형 혹은 덴마크형 모두 국민의 의지가 정책을 수립하고 국가적인 대전환을 만든 기본 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과 같이 농림부와 재경부 사이의 닫힌 논의구조만으로는 국민의 의사가 정책에 반영되거나 국가적 지혜를 모을 길이 없다.
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먼저 2004년 2월의 '농업ㆍ농촌 종합대책'의 골간을 형성하는 '6헥타르 정책'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 수십 헥타르에서 헬기로 농사짓는 미국의 규모농과 유전자조작 농산물 앞에서, 6헥타르 정책은 그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골리앗에 맞서기 위해 다윗의 지혜를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몸집을 불려가고자 하는 격이다. 이는 농업을 살리기보다 오히려 농업의 퇴행만을 가져올 것이다.
충청남도 아산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어울려 손 모내기를 하고 있다. ⓒ농지제도 연석회의 |
10년간 119조 원을 7만 호의 덩치 불리기에 사용하고, 나머지 돈은 농촌지역 도로와 건설에 사용한다는 이 종합대책의 정신이 구현된다면, 농업은 살아날 수가 없고, 농민도 죽을 것이며, 오로지 국토의 투기장화만 촉진될 것이다.
우리나라 농가당 보유토지는 3500평이다. 이 구도는 다행히도 세계적으로 21세기의 농업형태라고 하는 '유기농'에 우연히도 가장 적합한 구조다. 부부가 열심히 농사짓는다고 할 때, 유기농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기술적 한계가 3000평 정도로 추정되고, 쌀의 경우는 오리 또는 우렁이 농법 등 비교적 통일화된 방법으로 7000평까지 가능하다고 추정된다.
전략은 간단하다. 현재의 농업구조에서 얼마나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친환경농업' 체계로 전환할 것이냐의 문제이고, 이 때 단기적으로 부족한 농가소득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보전해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걸 WTO의 용어로 설명하면, '동일제품(likelihood-product)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유기 재배한 농산물과 그렇지 않은 농산물이 동일한 제품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 추세는 점차 동일한 제품이 아니라는 쪽으로 가고 있다.
남은 사회적 과제는 누가 농사지을 것인가의 문제다. 몇 가지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데, 어떤 경우라도 농업이 우리나라에 중요하다는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추진될 수 있는 정책들이다.
스위스의 경우 전체 농산물의 10%까지 유기농 전환에 성공했는데, 이 변화가 최근 5년간에 이뤄졌다. 보통의 OECD 국가들이 10% 수준까지 올리는데 보통 5년이 걸렸다. 이 수준이면, 주요 곡물과 주요 축산물은 유기농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고, 일단 시스템이 안정화되면, 점차적으로 50% 이상이 유기농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술적 여력이 생겨난다. 스위스의 경우 농업이 GDP의 2%를 차지하는데, 농업 및 농업관련 고용은 총고용의 20% 정도를 차지한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 이제 농업 정책은 '농업 산업' 혹은 '농민' 정책에서 사회정책의 중요한 고리로 작동하고 있다. 어차피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포드주의를 경과한 사회에서 '더욱 더 산업화'의 기제로는 고용과 사회의 언저리에서 밀려난 빈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기계가 대체한 작업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그야말로 '자연'이 감싸 안는 셈이다. 대지의 품이 넓다는 얘기는 문명사적으로 전 자본주의 단계에서 생겨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산업화가 끝까지 간 사회에서 농업을 새롭게 이해하며 생겨난 새로운 철학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압축성장으로 인해 아직 자연과 농업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에서 탈-포드주의로 넘어간 셈이다. 그래서 전도된 농민 정책과 왜곡된 '농촌지역' 정책만 있을 뿐 전체 사회체계 내에서의 21세기 '농업의 버퍼 역할'에는 미처 정책적 목표화 하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는 친환경농업으로의 전환이 대세다. 단순히 음식을 안전하게 먹자는 의미만이 아니라 '일자리 나누기(job-sharing)'로도 미처 소화할 수 없는 대량실업 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다 보니 농업 그리고 '노동집약적 농업'인 유기농업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국민소득 1만불이면, 충분히 안전한 음식을 먹고, 유기농으로 삶을 꾸릴 수 있는 국민 10%를 소화할 정도의 경제 여력이 된다. 기술혁신으로 더 고도화를 추진하는 산업 부문과 '전문화'를 추구할 부문 그리고 노동집약적으로 전환할 부문들이 각기 분화돼야 한다. 전 부문에서 노동투입 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의 '단조로운' 진화만으로는 너무 많은 국민들이 불행해진다.
그래서 21세기에 '농업'이 OECD 국가들에서 새로운 질문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략은 지난 5년 동안 OECD 국가들에서 현재진형형인 논의다. 하다 못해 중국도 전국토에 걸친 부동산 거품빼기와 함께 농민들에 대한 세금 경감을 논의하는 이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농정과 농업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에 함몰돼 있다.
'경쟁력'이라고 하지만 농업에서는 현재 '안전'이 최고의 경쟁기준이 되어 있다. 이제 우리 농업에서도 화학비료와 살충제 그리고 제초제를 빼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화학품들이 사라진 빈 구석을 사람들의 손이 채우게 되는 것을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유기농업으로의 대전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산업화와 도시화에서 튕겨져 나온 신자유주의의 패배자들은 죽어야 하는가? 그들에게 유럽 국가들이 새로운 도피처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농업이다.
제발이지 헬기로 농사지으면 경쟁력이 생길 것이라는 구시대의 아름다운 그림을 제발 머리 속에서 지워야 한다. 델몬트를 절대로 이길 수 없고, 카길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6헥타르'라는 헬기로 농약 뿌리는 70년대 미국 농업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을 지우면, 그때부터 우리나라 농업의 새로운 진화가 시작된다. 헬기에 대한 환상 속에서 농업은 끊임없이 퇴행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국민투표가 필요한가 아니면 국민서명이 필요한가? 정부가 명예롭게 '6헥타르' 정책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농부의 이름으로, 어머니의 이름으로, 도시 빈민화된 철거민의 이름으로, 전국의 18% 아토피 아이들의 이름으로, 그리고 20만 생협 조합원의 이름으로 정부가 명예롭게 '친환경농업'에 대해 고민할 것을 권한다.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는 투기꾼이 아니고, 또한 공업화와 산업화를 지켜낸 대다수의 국민은 여전히 지혜롭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에게는 농민의 피가 흐르고 있다.
우석훈/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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